'라이프찌히에서 그를 만나다' 유럽배낭여행기와 아임 problem 연작 단편 모음
라이프찌히에서 그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7. 12:4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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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단편 <도박>은 픽션입니다만, 이 글은 픽션이 아닙니다.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관심이 있는 분만 둘을 비교해 보세요.
이 글은 논픽션입니다.
라이프찌히에 도착한 건 97년 4월 22일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라이프찌히를 왜 간 것일까. 직접적인 이유야 내가 깜박 유럽
기차의 특징을 망각했다고, 내 착각에 불과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럽여행 내내, 더 나아가 내 짧은 삶 속에 파괴입자가 숨어
있다 어떤 균열이 일어날 때마다 순식간에 내 삶 중심에 틈입하여 전체를
다 무너뜨리곤 했던 것이 재작동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
했다. 이러한 의문이 시간이 지날수록 해소되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뒤엉
켜서 혼돈에 빠지다 벼랑 끝으로 떠밀리는 공포로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더 큰 혼란으로 이끌
뿐인 문학행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유럽 기차는 차량마다 행선지가 달라 차량 출입문 외부 하단이나 측
면, 혹은 내부 벽에 부착된 표시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함부르크에서 기차에
오를 때 분명히 확인하였지만 강행군에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자리가 비어
있는 흡연석 콤파트먼트를 찾아다니다 그만 갈 곳이다른 차량으로 이동한
걸 잊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베를린에 도착할 줄 알고 바케트와 맥주뿐인
식사를 가뿐하게 마치고 론리 플래닛 서유럽편 베를린 항목을 탐독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기 많은 흡연석에 미련을 버리고 텅텅 비
어 있는 비흡연석을 택했다면 라이프찌히행을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표
검사시 승무원이 일등석에 탄 동양인 배낭족이 혹 이등석인줄 알고 잘못 타
지 않았나 의심하다 내 여권을 보고 약간 계면쩍은 목소리로 어디 가는 길
이냐,하는 수작만 했어도 베를린에연착륙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세 이
상인 경우 유레일 패스 1등석만 구입이 가능하다. 그리고 서양인은 동양인
을 보통 나이보다 열살 정도 어리게 본다. 내 얼굴이 동안인 편이라서 같은
한국인조차 내 나이를 다섯 살 정도 어리게 짐작하다보니 내 연령이 더욱
낮아져 서양인이 나를 십대(?)로 가끔 오인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프랑스적 인간미만 느끼게 했던 독일 차장들이었는데 이때만큼은 어쩐 일인
지 독일병정 이미지를 내게 확인시켜주려는 듯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
다. 차장이 내게 저녁식사를 하겠냐고 물을 때야 독일병정의 정체를 확인했
을 뿐이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차장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독
일인이 졸지만 않았어도 회항하여 치밀한 계획(!)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더듬대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을 터이니까 말이다. 베를린 가는 길입
니다만 어떻습니까, 베를린하면 좋습니다라는 평범한 말부터 베를린에 가서
구경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곳을 뜻밖에 추천받는 일까지 다양하기 때문
이다. 그런 와중에 '베를린이요? 잘못 타신 거 아닌가요? 이 차는 라이프찌
히로 가는 데요'등의 대화를 이끌어내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는 내리기 직전까지 졸다 귀신처럼 깨어서 내게 의례적인 미소만 살짝 지은
뒤 가 버렸다. 화장실에 단 한 번 볼 일이라도 보았다면 내 앞에 닥친 폭풍전
야의 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 도착 시간인 열시 사
십분이 지나서야 긴가민가 하였으니 안 될 사람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이 옛말만은 아닌 듯싶다. 열한시가 넘어섰음에도 기다린 것은 느긋함
이라기 보다 혹시 하는 나약함의 반증이었다. 더 이상 터무니없는 낙관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대도시다운 베를린의 불빛이 보이기는커녕
어둠 속에 비쳐진 내 불안한 얼굴을 끝내 지켜볼 수 없었다. 비로소 나는 대
형사고가 터졌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복도로 나가 확인하니 내가 탄 차량에는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였다. 차장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기차는 조그만 시골역에 정차했다. 나
는 기차에서 나와 아무나 찾아 물어보았지만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
만 '코리반'이란 말만 반복했다. 역 이름이 코리반인 것 같았다. 기차는 막
떠날 채비를 한다. 나는 당황할겨를도 없이 다시 기차를 타야 했다. 인터레
일 기차 목적지는 대도시였기에 어디로 가는 지 모르지만 시골역보다는 대
도시역에서 수습을 하는 것이 옳다고 동물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차
에 올라 여기저기 콤파트먼트를 돌아다녔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식
당칸을 찾기로 했다. 그곳만큼은 사람이 있을 터이니까.
식당칸을 찾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바텐
더로 보이는 자에게 가서 잘 하지도 않는 영어로 마구 떠드니 '노 잉글리쉬'
였다. 마지막 희망은 사라졌다. 기가 다 빠져버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
보 같은 나를 자책했다. 영어 잘 한다고 소문난 독일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
고 원망도 했다. 이렇듯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한 줄기 빛으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금발과 푸른 눈매가 아름다운 여대생이었다. 식당칸에서 남자친구
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박차고 내게 온 것이었다. '아! 천사가 따로 없구나.'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이 기차가 라이프찌히로 직행으로 가며,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내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지낼만한 돈이 있
느냐,라며 자기 집에서 재워줄 것처럼 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고마운데 더
폐를 끼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녀 남자친구 눈길이 등뒤에서 칼날처
럼 꽂히는 것 같아 찜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미친 척하고 꽉 잡았어야
할 것을. 이후 일어날 운명의 회오리를 내 어찌 알았으랴. 천사의 등장이 이
운명의 끝이라고 믿은 내 낙관이 불씨였다. 사실 나는 설령 베를린에 도착
하더라도 짐을 역 코인 락커에 맡기고 역 근처 시내를 둘러 본 뒤 노숙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내 여행 주제중의 하나가 환락과 퇴폐가 판치는 유럽
대도시의 밤탐험이었기에 이러한 일정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금발
미녀에 혹하는 취향만 가졌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즐거운 데이트를
하였을 터인데 잠시 찾아온 정전에 취해 모든 것이 해프닝인 것처럼 느껴졌
다. 여전히 불안하면서도 사랑스런(?) 눈길로 보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돌
려보내고 멋있게 보일 작정으로 나는 여유로이 책을 뒤적거렸다. 바흐가 단
장을 지낸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괴테, 라이프니쯔, 니체 등이 수학했다는
라이프니쯔 대학이 있는 라이프찌히. 이 도시에서 바그너가 태어났고,바흐
가반생을 보냈고, 슈만과 클라라가 사랑을 했다라는 여행서를 뒤적거리자
이내 내 마음은 미지의 도시로 달려갈 뿐이었다. 여행서가 아무리 완벽해도
구체적인 정보를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하는 배낭족으로서는 치명적 실수이자
어쩔 수 없는 치기였던 것이다.
역사가 정지한 도시, 라이프찌히. 아니, 어쩌면 거꾸로 시간을 먹어 가
는 도시, 라이프찌히. 이것이 내가 느낀 라이프찌히였다. 라이프찌히역에 내
리자마자 찾아온 공포. 24시간 경찰이 지켜주는, 따뜻하지는 않아도 노숙할
공간이있으리라는 기대가 처절히 부서졌다. 라이프찌히역은 공사중이었다.
흉측한 몰골을 드러낸 채 다만 내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기능이나
어떤 미관도 상실한 채.
인포메이션에 갔으나 두 명의 가이드는 영어소통이 되지 않았다. 유레
일 창구가 있을까 역내 사무실을 찾아 문을 열어보았으나 닫혀 있었다. 밤
늦게까지 일할 줄 알았던 역구내 은행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아뿔싸! 시
급히 천사를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
고 물어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반응할 뿐이었다. 그러다 임시천막
같은 곳에서 과자 따위를 파는 이가 가르쳐 준 건 역 바깥으로 나가면 현금
자동 인출기가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정보뿐이었다. 그러나 역 주변에 인출
기는 없었다. 내가 가진 건 독일 여행자 수표인데 이를 바꾸지 못한다면
4/2 DM짜리 락커도 이용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역 바깥에는 택시들이 길
게 늘어져 있었으나 어떤 택시운전사도 영어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때 나타
난 회사원 차림의 남자. 공공칠 가방을 든 그는 역주변에 은행이 없으니 걸
어서 10분 거리인 호텔에 가보라고 충고하였다. 내가 고맙지만 노숙할 작정
일 만큼 돈이 부족하다, 짐을 보관할 돈만 바꿀 수 있다면 밤거리를 쏘다니
며 날밤을 새겠다 하니 내게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Leipzig is dead. GDR is dead.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난 뒤 그 말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여 계속 역 주변
거리를 서성였다. '그냥 그를 따라갈 걸 그랬어. 심야에 내가 돌아다닌다고
해결이 쉽게 되겠어? 더구나 인포메이션까지 영어가 통하지 않는 데인데...'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일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단지 밤이어서 그렇지. 불야성을 이루는 한국과 유
럽의 밤 문화가 조금 다르리라는 건 예상했어.' 하지만 헛탕만 자꾸 치자 그
말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을 지시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멀리 보이는 호텔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는 인출기가 있으리라. 인근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
로 보이는 호텔 현관까지 가서 나는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유럽이라도 호텔
등지에선 배낭족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돈 있는 동양 여행자 행색을 내려
했으나 헛수고라는 걸 깨닫자 정면승부하기로하고 과감히 회전문으로 향했
다. 그때 '한스'를 만났다. 인생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온다는 말이
있다. 흔히 이런 기회가 찾아오면 귀인도 함께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상
황을 시험할 수 있는 작은 기회도 세 번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뜬금없는 심사가 갑자기 일었다. 아마 생기 발랄한 독
일 여대생과 신분이 안정되어 보이는 회사원을 놓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
리라.
그는 호텔 직원으로 보였다. 그가 기지바지를 입었을 지라도 상의는
단정한 슈트차림이었기때문이다. 그 역시 영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이미
겪을 대로 겪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호텔에 손님들을 접대하는 직원만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MONEY? 익스체인지?' 등 손짓발짓하며 단어들을
나열하니 간신히 몇 단어가 그에게로 전달되었나 보다. 한스는 처음에는 호
텔에 들어오지 말라고 의사표시를 하다가 자기를 따라 오라 하더니 역에서
호텔 가는 방향에서 좌측으로 성큼성큼 갔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들어갈 수 없나 보다. 아마 인출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겠지. 그런데 좀
멀군.' 무거운 배낭을 지고 행여 그를 놓칠까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내 예
상 대로였다. 그는 인근의 은행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하지만 폐점. 또
다른 곳도 폐점. 지쳤다. 지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에게 폐를 더 이상 끼
치고 싶지 않았다. 한스에게 고맙다, 이렇게까지 해준 것도 어디냐, 일 마친
모양인데 피곤할 터이니 걱정된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해대었다. 그는
웃기만 했다. 그만 가라고 고! 고! 하였다.
- 유! 따로 고. 언더스탠드? 미, 나홀로 고. 우이 머스트 세퍼레티브.
언더스탠드? 그러니까 고! 고! 씨발, 미치고 환장하것네. 유 노 퍽킹 고?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한스. 그는 정말 영문을 전혀 몰랐다. 가지 않고
버티며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그가 미안해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
임 NO PROBLEM'이란 말로 괜찮다고 표시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PROBLEM, NO PROBLEM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내게 손짓하며 은행 측면에 있는 정원수에 가더니 오줌을 싼
다. 내 마음이 전달된 걸까. 이 행동은 또 무엇인가. 같이 싸며 잠시 만난
인연을 마무리 짓자는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생리욕구가 없지 않았기
에 같이 볼일을 봤다. 그가 힐끗 내 자지를 훔쳐 본다. 내 눈길과 마주치자
푼수처럼 웃었다. 질세라 나도 그의 것을 보았다. 의외로 작은 고추였다. 나
도 웃어주었다. 그의 것이 조그마해서 웃은 것이 아니라 둘이 하는 짓이 한
국의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웃음이 난 것이다. 내가 독일 한복판에서 당당히(?)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내
리라고는 상상이나 해봤을까. 아무튼 시원스레 물을 쏟아버리며 아무도 나
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객기 부려보고 싶은 충동이 동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가 친근해짐을 느꼈다. 누가 독일인을 냉혈동물이라 하는가. 내가 만난 독
일인들은 대체로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내 손을
붙잡더니 다시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 NO PROBLEM.
한스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황당하게도 호텔 부대시설로 보이는 도박장
이었다. 도박장에 들어가서 한스의 요구대로 짐을 맡겼다. 그리고 우리는 호
텔 라운지로 가서 지배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약간
의 돈을 교환할 수 있었다. 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런데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막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
나는 한스의 과잉 친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지갑을 바라보던
한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나 오
갈 데 없는 배낭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도움
을 받았으니 내가 조심을 하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쓸 데 없이 의심하기
보다 간수를 잘 해야지.' 라운지에서 도박장으로 나오는데 호텔 맞은편 건물
지하에서 익숙한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디스코? 댄스?" 하니 웃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코 음악을 듣자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짐도 맡겼겠다, 교환도 했겠다, 이게 내가 바라던 여행이 아니던
가?' 나는 작은 배낭에서 남은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를 그에게
줬다. 고마움의 답례로.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재채기하는 시늉과 코를
가리키며 감기 걸렸다고 했다. "어 코울드?"하니 날씨가 말도 못한다는 제스
처를했다. 한스는 영어를몰라도 정말 몰랐다. 그래도 영어와 독일어는 사
촌지간이라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아마도 내 발음 때문이겠지. 그가 아는
단어란 'MONEY'와 'PROBLEM'밖에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국제공용어로 의사소통으로 하였는데 감정 교류가 기막히게 되었다. 맥주
캔 하나를 다시 배낭 속에 넣고 남은 맥주 캔의 뚜껑을 따서 먹었다.
내가 앉자 그도 따라 앉았다. 언어란 무엇인가. 소통하면 그만이지 않
던가. 같은 한국어로도 전달되지 않아 무수한 오해를 낳는 현실이 문득 씁
쓸해졌다. 분단된 것도 모자라 동서로 쪼갠 채 서로 상대방을 삿대질하는
정당 대변인들. 오랜 군사독재와 뒤이은 문민독재, 그리고 학벌과 지연과 족
벌로 온갖 기득권을 독차지하려는 자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이렇듯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데도 평화를 느낄 수 있지 않던가. 그런 생각이 미
치자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가져 온 애용담배인 오마 샤리프 한 가치를 주
려 했는데 그가 오히려 내게 독일 담배를 권했다. 한사코 거절했으나 그의
간절한 요청 - 그는 이럴 때마다 'NO PROBLEM' -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맥주가 시원하지않아 맨숭맨숭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기분만
은 날아갈 듯 하였다.
안심이 되니 디스코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제
대로 볼 수 있었다. 30대 말 40대 초반? 동양인 연령보다 나이 들어 보이니
나와 같은 나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이람. 유 노 태권도? 라고 말
하며 발차기 흉내를 내니 그는 겁난다는 듯이 도리질을 했다.
- 하하. 아이 컴 프람 서울 코리아 유 노 코리아? 서울 올림픽?
- 올림픽. 서어올 올림픽.
그는 안다는 표시를 이렇게했다. 비록 서울이란 발음을 제대로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 유 노 노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아이 씽크 유 저매인 엔비. 유
머스트 비 프라우드. 커즈 아이 씽크 저매인 이즈 유나이티드. 유 노? 몰라
도 돼. 상관없어. 그냥 독일인만 만나면 이런 말이 자꾸 하고 싶어
져. 아임 낫 내셔널리스트. 버트 아이 워나 유나이티드
오브 코리아. 코리아 이즈 원.
그가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마치 그
가 서울의 영어학원강사인양 대하듯 생각나는대로 영어로 말했다. 매우 상
쾌하기 짝이 없었다.어느 정도 완벽해야만 내색을 해야 하기에 주눅이 들어
좀 아는 것까지 당황해서 까먹기 일쑤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도 가르쳐 주었다. 그가 가르쳐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담배 연기로 하는 상투적인 장난을 보여주었다.
색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일 옆에 지나
가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를 보았다면 아마 십년 지기인 것처럼 보였으리라.
둘은 킬킬거리고, 떠들고,열심히 손발짓을 해대었기에. 맥주를 다 마시자
그가 도박장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나는 쓰레기를 버릴 마땅한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는 내게 빈 깡통을 달라고 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아르켜 주면 내가 버리겠다고 하자 'NO PROBLEM'이라며 달라고 해서 줬다. 그
가 가끔씩 내뱉는 'NO PROBLEM'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
기까지 했다. 약간 높은 옥타브로 시작하여 삽시간에 저음으로 내려갔다가 처
음 고음보다 약간 낮게 내며 끝을 바이브레이션 비슷한 뉘앙스로 마무리하는
게 분명코미디 같은데 국회 의사봉을 두들길 때 내는 소리처럼 상황을 터무니
없이 결정짓고마는 것이었다. 그는 빈 깡통을 받더니 내게 힐끗 미소짓더니
갑자기 빈 깡통을 냅다 멀리 내던졌다.
깡-깡-깡-끄르르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
나는 이렇게 라이프찌히 도착 한 시간 반만에 이 도시의 하나가 되었던 것
이다.
도박장 내에는 마지막 열기가 뒤끓고 있었다. 이 곳은 영화 투캅스 일
편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도박장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경마전자오락
등이있어서 흥미를 끌었다. 중앙에 2*2 미터제곱 크기를 차지하고 있어서
둘레에 경마꾼들이 보조의자에 앉아 한 번 할 때마다 2DM, 한꺼번에 둘 이
상 걸며 시합에 열중하고 있었다. 게임 시작 전 승률이 고시되면 1번부터
10번까지 골라 코인을 투입한 뒤 시작버튼을 누르면 말들이 다그닥 다그닥
소리를 내며 골인 지점까지 내달렸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나가다 최종 지점
에서 질주하여 역전되기도 했다. 영락없는 경마였다. 은연중 경마 게임에 눈
길을 돌리는 내 심사를 아는지 한스는 교환대에 가서 코인을 바꾸라고 하였
다. 내가 10DM만 교환하니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내가 그리 좀스럽게
보였나? 그래도 할 수 없잖아? 2DM으로 라커비하고 나머지를 설사 잃는다
해도... 10DM 다 쓴다 해도 기껏 육천원? 비록 잠을 설치겠지만 하루 값지
게 보낸 액수 치곤 안심할 수 있는 액수잖아?' 그런데 그는 가지 않고 그대
로 서 있었다. 답답했다. '당신 일이 있잖아. 당신도 가서 자야지. 나야 이제
된 거 아냐. 역과도 가까우니 여기서 버티다 동트면 뜨면 되잖아.' 그에게
물었다.
- 유 아 호우텔 맨? 홧쯔 더 잡?
- NO PROBLEM
-아 유 타이어드?
- NO PROBLEM
- 스피킹 잉글리쉬? 에고, 내가 말한 게 잘못이지.
- NO PROBLEM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판단한 것이 확실한 지 되짚어봤을 뿐
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든, 집으로 가든 그건 그의 판단 문제이지 내가 상관
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아무리 갈 데 없는 외톨이 동양인을 도와준다
지만 밤늦게까지 내게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 의아스러워 몇 번이고 물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물었으나 답변은 역시 한가지였다. 그가 무슨 직업이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경마 전자 오락기 앞으로 갔다. 한스가 잔돈이 없는지 내게 동
전을 빌려 달라 하더니 높은 승률의 말에 걸고 시범을 보였다. 잃었다. 그는
씩 웃으며 나에게 권했다. 나는 아까 짧은 순간일망정 유심히 지켜봤었다. 낮
은 승률의 말이 훨씬 더 잘 달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2 : 1 확률 말을 걸었
는데 그 말이 승리한 것이다. 도박이란 아주 전문가이거나 아니면 초보만이
딴다고 하던가. 다시 2 : 1에 걸었다. 또 땄다. 다른 도박사들은 10 : 1이나
30 : 1에 거니 자꾸 잃었다. 그에비해 난 얼마나안전빵인가.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몇 번 이기자 욕심을 부려 세 곳에 동시에 걸었
다. 2 : 1에도 걸었지만 높은 승률에도 동시에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잃
었다. 다시 본전이다. 한스가 다시 내게 코인을 달라 해서 주어서 다시 도전
했다. 이번에도 2 : 1로. 잃었다. 이제 6DM이 남았다. 그만해야겠다. 아직
날이 새려면 멀지 않았나. 한스는 한 번 더 달라했지만 내 단호한 모습에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하는 걸 구경하기로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기계
와 내기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쪽 깊숙한 곳에서 하이로 게임을
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호기심에 가보니 대머리가 벗겨진 나이든 독
일인과 베트남 난민으로 보이는 친구 둘이서 돈을 엄청나게 따고 있었다.
코인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자 베트남인들이 그들 주위에 몰려들었
다. 대부분 비쩍 마른 체격에 허름한 옷차림, 불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한
스가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나를 소개했지만 그들은 웃지도 않고 나를
위아래로 쳐다볼 뿐이었다. '한스가 호텔 일을 하면서 아는 사이인가 보군.
그들이라고다를 바가 없겠지. 그러나저러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혹시
동양 마피아?' 내가 한스에게 귀엣말로 마피아? 마피아? 하니 예의 똑같은
말을 할뿐이었다. 눈치로 마피아는 아닌 듯 싶었다. 아무튼 코인이 넘쳐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될까. 줄잡아 오천개는 넘으니 10000DM? 육백만원?
최대 배팅을 계속 하는데 한 번 할 때마다 1000DM이 쏟아지니...
'새벽 두 시가 되니 종업원이 시계를 가리키며 도박장 마감을 알렸다.
'이런 밤새 하는 것이 아니로군. 그래서 한스가 가지않고 기다린 것이구나'
나는 새삼 한스의 배려에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뚜렷한 이유없이 그
를 보고 웃으니 그도 알아듣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짐을 찾고 나니
대머리는 없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한 지폐 뭉치를 받는 베트남인만
있었다. '호화 유람선 실자라인 카지노에서도 마감시간이 두 시였고, 두 시
가 가까이 오자 딜러가 손속을 늦추어 손님을 적당히 따게 하는 관용을 베
푸는데 혹 여기서도? 아무튼 그는 아마 오늘 어디 가서 크게 한 턱 내리라.
한스가 만일따라 가면 나도 따라 가야하나?'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한스와
인사한 뒤 바삐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북유럽서부터 보아온 카지노 열풍. 아주머니들은 시장 바구니 들고 휴
지통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전자 카지노에 아낌없이 동전을 넣는 풍경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
회주의권 지역이었기에 그 자취를 혹시라도 맛보려 했던 기대가 있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본 건 형식적 평등이 가고 황금만능주의만이 남
아 있을 뿐인 사회였을 뿐이다. 비록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본 것만
으로 라이프찌히를 알 수있었다면 지나친 편견일까. 문득 역 앞에서 만난
회사원의 말이 떠올랐다. '라이프찌히는 죽어 있다고?'
을씨년스러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중부유럽의 바람은 4월인 데도 매서
워진다. '비록 춥지만 역에서 침낭 덮고 잠만 자지 않으면 되겠지. 이제 한
스와 헤어질 시간' 그에게 당케!하며 한두 단어정도 아는 독일어를 말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한스는 예의 'NO PROBLEM'이었다. 내 손을 잡더
니 역 앞에 서 있는 버스에 오르려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래도나를 좋게
본 모양이다. 아마 자기 집에 가서 자자는 이야기겠지. 그가 선량해 보이니
따라갈까. 이제껏 내게 너무나 잘 해 주었잖아? 아니야, 무턱대고 따라갈 순
없잖아. 아직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이러다 으슥한 데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기회는 얼
마든지 있었어. 그가 정말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아니야. 교묘한 사기꾼일수록 완벽한 기회를 노리겠지. 내가 경계가
느슨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프게 행동한 건 아니었거든. 그러니
그가 순수한 의도로 나를 이끌었다 해도 이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만큼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낫겠다. 아니야. 날씨도 춥고, 감기 걸리기
딱 좋을 듯해. 이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여행 일정이 다 망치게 되잖아. 더구
나 약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여행의 맛이 사는 게 아닐까. 이 기회에 독일
가정을 직접 본다는 게 어디야. 용기를 내라고.'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나는 갑자기 그의 직업이 다시 궁금
해졌다. '그의 집에 가면 그가호텔 직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가 다시 내 손을 끌며 말끝을 묘하게 내며 간청하듯 말했다.
- NO PROBLEM
'에라, 모르겠다.' 이런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에 내가 견지하는 임의
규칙이 있었다. 신중한 의견과 덜 신중한 의견이 쉽게 결정되지 않고 맞부
닥칠 때 덜 신중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한스는
밤거리를 지나는 모든 이들을 아는 모양이다. 운전사에게도 인사를 한다. 요
금을 내려 하니 만류한다. 24시간 내내규정대로 출발하는 모양이다.유럽
대부분의버스들은 다른 교통수단처럼 국영인 듯 했다. 복장이 통일되어 있
고, 노동자 냄새가 물씬 났다. 가만 보면 안정된 직장인 듯 싶었다. 문득 한
국 버스업계와 노동자를 떠올리고, 지난 파업사태시 한국노총 소속 버스 노
동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회상하다 보니 버스는 떠난다. 버스에는 우리 외
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초췌한 얼굴의 아가씨, 심야인 데도 책을 읽는
초로 신사, 리시버를 끼고 음악을 듣는 이십대 초반 흑인, 그리고 우리들.
처음에 나는 길거리를 익히려 바깥 풍경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버스가
라이프찌히 외곽으로 나가고, 비슷한 건물들이 계속 되자 포기하고 말았다.
약 30분 조금 못 미쳤을까. 우리는 어느 거리에 내렸다. 우리는 곧바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는 곳은 흔히 영화에서 보았던 오랜 건물에 다세대가 사는 데
였다. 음침한 큰 현관을 지나 1층에 있었는데 집 내부는 다른 유럽 건물들
이 대개 그러하듯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살림이 별로 없어서일까. 20평쯤
됨직한 집이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와 좁지 않은 복도. 한스는 독신이
었다.독신이 살기에는 큰집이었다. 우리는 응접실 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25인치 티브이와 긴 탁자와 침대 겸용 소파가 있었고 벽면에는 페르
시아 풍의 싸구려로 보이는 대형 양탄자 - 십년 전에 우리 집에 있었던 것
과 거의 흡사한 것 -가 걸려 있었다. 양탄자 밑의 장식대에는 오래된 듯이
보이는 사진 액자, 빈 꽃병 등 그리 낯설 지 않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
다. 욕실 겸 화장실에 가보니 독일 기차처럼 변기 뚜껑이 없었다. 대충 씻고
나서 응접실로 돌아와 리모콘을 연신 돌리며 TV를 보는 그 옆에앉아 실자
라인에서 세일할 때산 적포도주를 기분 좋게 마셨다. 그는 전혀 피로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것저것 의사소통을 시도해 보니 그가 별다른 직업이 가
지지 않은 사람이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백수
(?)여서 인지 직장인답지 않은 섬세한 특징들이 포착되었다. 직장인이라면
친구와 함께 집에 올 지라도 내일 일을 대비해서 가령 이야기 중에 자기 직
업에 대한 소개를 꺼낸다든지, 물건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기 마
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일 수 있었다. 백수라면 심야에 도심 호텔 라
운지에서 나올 일이 없지 않은가. 깊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은 밤이었
다. 심야라 혹시 야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였으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
들이었다. 그러다 마이클 잭슨이 야한 여성차림으로 분장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나오기에 나는 웃었다. "하하. 마이클 잭슨이 웃기네?" 한스도 웃었
다. 이제 자야할 시간. 그에게 잘 의사를 표시하자 그가 알았다는 듯이 일어
섰다. 나도 일어났다. 소파가 빡빡해서 둘이 함께 해야 했다. 그런데 대충
바르게 했음 데도 한스는 마치 측량 기사처럼 앉아서한쪽 눈을 감고 제대
로 수평이 되어있는지 확인하고 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데서 독일인의 정확성이 나오나? 한스가 안심한 듯한 표정으
로 일어서자 나는 잘 자라는 악수를 청했다. 그때 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
으랴.
한스가 갑자기 바지를 쑥 벗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같이 자
자는 이야기인가. 다른 방도 있는데. 그를 따라오면서 내심 작정한 바가 있
다면 방이 하나라면 모르되 둘이라면 각자 방을 쓰자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내 지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가호의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 내일 일어났는데 지갑이 없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한 일이 있어서도 일어나서도 안 되기에 나는 한사코 거
절했다. 한스도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한스도 나를 의심해서 그럴까.
하긴 오늘 처음 만난 배낭족을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겠다. 겉으로는 거절
하면서 점차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한스가 더 강경하게 나온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의 집이고 게다가 난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가 갑자기 바지를 훌렁 벗었다. 처음에는
자기 의사표시를 강하게 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의 눈이 차츰 게슴츠레 해지면서 내 손을 붙잡으며 'NO
PROBLEM'하자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했다. 한스가 내 자지를 보다
들킨 뒤에 나온 웃음이 단순히 계면쩍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탐욕이 막
일기 시작할 때의 징그러운 웃음 그것이었다. 그가 지배인하고 이야기할 때
직원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심야에 호텔에서 나섰
던 것일까. 그의 직업은호텔에서 연락을 하면 가서 일을 치르는 게이 매춘
부였다. 도박장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 엉덩이를 툭 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역 앞에서 친한 듯이 보이는 이를 만났을 때 한스가 보였던 행동을 기억해
냈다. 단지 남자친구에게 호의를 보내는 것치고는 은밀한 인사였던 것이다.
입을 내밀며 약간 흔들었었다. 아무리 심야일 지라도 버스 운전사가 뻔뻔스
레 돈을 내지 않고 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어쩐지 버스 운
전사가 한스를 깔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그때 나는 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 것일까. 승객들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던
것까지 말이다. 내가 라이프찌히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동양 배낭족인 데
다가 동독 지역에서 암묵적으로 인종차별이 좀 있으리라는 예상 때문에 이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않았는가. 그리고 한스가 친절하여 그의 행
동이 약간 별스러워도 오히려 한국인다운 개성이라 여겼었다. 끝으로 무엇
보다 밤늦은 시각 낯선 도시에 도착한 내 사정이 이 모든 걸 뒤덮었던 것
이다.
- 아임 PROBLEM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이해하든 안 하든 나는 계속 말했다. 약간
흥분해서 영어가 약간 섞인 한국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알아
듣지 못하니 지금까지처럼 뜻만 전달되면 그만이었다.
- 나는 동성애자를 이해한다. 대학때 나와 운동권 조직에서 만난 친구
도 요즘 한국에서 게이 운동가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자신이
게이임을 사실을 언론에 밝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
기에 받아들였다. 당신의 욕망도 이해한다. 심지어 나는 한국에서 있을때
동성애자를 다룬 단편도 쓴 일이있다.피상적으로 플라토닉적 동성애를 느
낀 적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본질적으로 동성애자가 아니다.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다. 그간 호의는 고맙다. 하
지만 나는 PROBLEM이다.
그러나 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손을 놓치
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팬티를 까 보이며 뭐라 말하기까지 했다. 독일어
였지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내 엉덩이 무척 탐스럽지 않아?" 그의 목소
리는 점차 애절하게 바뀌고 있었다. 눈물 섞인 구애였다. 차라리 내가 동성
애자였다면 할정도였다.한번 사고칠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되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취향을 매우 부
르죠아적이라 판단하고 내 취향을 전복시켜 나 자신을 혁명적 투사로 만들
기 위해 마광수 선생이 구속되었던 전해에 내 취향과 전혀 반대되는 여성과
연애를 시도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쓰라린 것이었다. 논리적이고 이
성적인 인간은 인간의 가장 바깥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의 본능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풀어내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본능은 본능대로의 논
리가 있었고그건 이성의외부주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류사 이래
로 거의 변함이 없다는 파충류와 말의 뇌가 문명사가 담겨 있는 대뇌피질과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본능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본성과 합
일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원시 뇌를 변화하는 희미한 연결끈 외에
는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만일 원시성을 제쳐놓고 의식만의 발전만을
취한다면 혁명이고 나발이고 핵전쟁 따위를 결과하는 비참한 파시즘이 인류
의 미래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PROBLEM은 본능이 아니라 본능의 발전
을 억압하고 강간하는 의식이었다. 제도와 관습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면 언제인가 한스를 전면적으로 이해할 날이 올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성애자로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다. 내가 남성이기에 남성적 권리에 대해 논
리적 판단으로 바꿀 의지가 충분하지만 습관으로 길들어진 남성적 존재란
얼마나 깨기 힘든 장벽이란 말인가. 기껏 생색내기에 불과하지 않더냐. 우리
가 양성성을 인정하고 중성화된 사회로 나아갔을 때 남자다움, 여자다움이
다만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특징처럼 느껴질 때까지생색내기라도 조금
씩 확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지금은 어쩌면 여성보다 더 엄청난
사회 차별적 성차로 시달리겠지만 미래에는 아름다운 개성의 하나로 인정받
는 제 3의 성일 뿐인 게이도 마찬가지 사정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진지한
구애를 거절하는 나를 인정해 다오. 나는 획일적인 하나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싹튼 욕망을 설렁탕을 먹을까, 갈비탕을 먹을까 정
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다오. 동시에 당신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뿐이고 그보다 더강력한 교육체계로 달리 느껴온 나를 이해해 다
오. 당신이 여성이었다면 아마 지금 내 행동은 불합리할 것이 틀림없다. 당
신에게 호감을 느꼈으니까. 그럼에도 당신에 대한 나의 호감은 섹슈얼적인
것이 배경으로 깔렸다 해도 섹스로까지 갈 만큼 호감을 가진 건 아니라는
것이오. 부디 내 부족한 호감을 이해해주길 바라오.
그러나 그는 내 모습에 더욱 감동 받아서인지 이제는 칭얼거리는 말투
로 변해 있었다. 도저히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벗었던 양말을 다시 신
고, 풀었던 짐을정리했다. 그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한스는 벗었던 옷을
입고 다른 방에 가서 잔다는 제스처를 하였다. 어디선가 게이는 강간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서남 아시아 권에서는 양성애자들이 여행객을 대상으로 강간도 일삼는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서남 아시아가 아니다. 하지만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믿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내몸을 만지자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에게마지막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고
한스의 집을 나왔다.
- 아/임/P/RO/B/LEM
한스가 따라나왔다. 아쉬운 듯 나를 쳐다보다가 비장한 내 모습을 깨
닫는 듯 할 수 없다는 표정을 떨구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기억을 더
듬으며 중앙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내게 PROBLEM이 있을 때마다 나
는 걸었다. 지금도 걷는다. 짐이 무거워 잠시 히치하이킹을 할까 했으나 신
호등은 잘 지키나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행인들이 무심히 나를 보더니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갈 길을 재촉했
다. 나는 왜 지금 걷고 있는가. 본성다운 행위를 하려 애쓰지만 꼭 한번씩
닥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해결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물음만 가
중될 뿐인, 다 망각한다 할 지라도 똬리 틀고 잠재해 있을,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러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PROBLEM 때문이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나는 무방비 상태로 제멋대로 당장 코앞
에 닥친 PROBLEM을 해결하고자중앙역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서운
독감에 걸린 라이프찌히, 그리고 나.
아임 problem - 도박 아임 problem
2004. 7. 11. 5:02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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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나를 위해서 그 사람에게 즐겁지 않은 일을 해달라고 요구하거나 부탁하기 보다는, 아니 그것을 허용하기 보다는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는 것, '그 사람이 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뭔가를 하거나 자신을 구속하는 것을 보고도 그냥 내버려 두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낫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정열, 그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 무엇을 할 것인가; 체르니셰프스키"
김종화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말을 떠올리며,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영국 국립 미술관에서 산, Paul Delaroche의 The Executionof Lady Jane Grey 유화를 복사한 엽서에 리미에게 보내는 글을 쓰고 있다.
리미에게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 위에 글을 쓰고
이름 위에 이름을 남기지만
솟구치는 건
너를 향한 그리움뿐
이유없이 사랑하다 죽고 싶어
김종화는 엽서쓰기에 몰두하다가 도착 예정 시간이 지났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서둘러 복도로 나가 확인하니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였다. 차장도 보이지 않았다. 기차는 조그만 시골역에 정차했다. 기차에서 나와 아무나 찾아 물어보았지만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단지 코리반이란 말만 반복했다. 역명이 코리반인 것 같았다. 기차는 다시 떠날 채비를 한다. 인터레일 기차는 목적지가 대개 대도시였다. '시골역보다는 대도시역에서 수습을 하는 것이...'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종화는 당황할 겨를도 없이 기차에 올랐다. 김종화는 식당칸을 찾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있었다. 김종화는 정신이 없었다. 바텐더로 보이는 자에게 가서 잘 하지도 않는 영어 실력으로 마구 떠드니 노잉글리쉬였다. 김종화는 무력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영어 꽤 한다고 소문난 독일인은 다 어디에 있는 거야?' 그때 금발과 푸른 눈매가 아름다운 여대생이 다행히 도와주었다. 식당칸에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 김종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여대생의 도움으로 김종화는 이 기차가 라이프찌히로 직행으로 가며,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내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차량마다 행선지가 달라 차량 출입문 외부 하단이나 측면, 혹은 내부 벽에 부착된 표시가 있다. 김종화는 함부르크에서 기차에 오를 때 이 표식을 확인하였지만 흡연석 콤파트먼트를 찾아다니다 라이프찌히행 기차로 바꿔 탄 것이었다. 식당칸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젠장할. 김종화는 엽서를 찢어버렸다.
바그너가 태어났고, 바흐가 반생을 보냈고, 슈만과 클라라가 사랑을 했던 라이프찌히. 그러나 김종화가 본 1997년 4월 22일의 라이프찌히는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도시 같았다. 마치 핵 전쟁 이후의 황폐한 도시처럼 어떤 기능이나 어떤 미관도 상실한 채 줄서지 않아도 되는 미래만을 위해 공사중인 라이프찌히역. 노숙할 공간이 있으리라는 기대가 부서졌다. 인포메이션 안내인도, 경찰도, 역 바깥에서 대기하던 택시 운전사도 김종화 앞에 다만 서 있을 뿐이었다.
그때 나타난 공공칠 가방을 든 회사원. 회사원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역주변에 은행이 없으니 걸어서 십분 거리인 호텔에 가보라고 충고하는 회사원 말에 김종화는 노숙할 작정일 만큼 돈이 없으며, 만일 짐을 보관할 돈만 바꿀 수 있다면 밤거리를 쏘다니며 날밤을 새겠다 말했다. 그러자 회사원은 말했다.
- Leipzig is dead. GDR is dead.
김종화는 회사원과 헤어지고 난 뒤 계속 역 주변거리를 서성거렸다. 그러나 이내 헛수고라는 것을 깨달았다. 인근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로 보이는 호텔로 무작정 갔다. '호텔에는 인출기가 있으리라.' 김종화는 호텔 현관까지 가서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유럽이라도 호텔 등지에서는 배낭족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돈 있는 동양 여행자 행색을 내려 했으나 소용없다는 것을 알고 회전문을 막 타려했다. 그때 그를 만났다. 그는 호텔 직원으로 보였다. 기지바지를 입었을 지라도 상의는 단정한 슈트차림. 그 역시 영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호텔에 손님들을 접대하는 직원만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 MONEY? 익스체인지?
손짓발짓하며 단어들을 나열하니 간신히 몇 단어가 그에게로 전달되었나 보다. 그는 호텔에 들어오지 말라고 의사표시를 하다가 애원하는 김종화를 한참 보더니 무슨 생각인지 자기를 따라 오라 했다.
그는 역에서 호텔가는 방향에서 좌측으로 성큼성큼 갔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생.각.의.끄.트.머.리.에.는.습.관.뿐. 무.덤.에.도.습.관.이.있.다. 그는 인근의 은행으로 김종화를 인도했다. 하지만 폐점. 또 다른 곳도 폐점. 지쳤다.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김종화는 그에게 일 마친 모양인데 피곤할 터이니 그만 가보라고 두 손을 모아 뺨에 대고 눈 감은 후 손을 흔드는 행동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그는 이런 김종화의 모양이 우스꽝스러운지 한참 웃다가 문득 생각난 듯 자기 이름이 한스라고 말했다. 김종화는 답답하여 계속 말했다.
- 한스 유! 종화 미! 따로 고. 언더스탠드? 미, 나홀로 고. 우이 머스트 비 세퍼레티브. 언더스탠드? 그러니까 고! 고! 씨발, 미치고 환장하것네. 유 노 퍽킹 고? 유 고하면 NO PROBLEM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한스는 정말 영문을 전혀 몰랐다. 가지 않고 버티고 있었다. 그러다 NO PROBLEM에 이르자 따라 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한스는 김종화에게 손짓하며 은행 측면에 있는 정원수에 가더니 오줌을 싼다. 같이 싸며 잠시 만난 인연을 마무리 짓자는 것일까. 김종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생리욕구가 없지 않았기에 같이 볼 일을 봤다. 한스가 힐끗 김종화의 자지를 훔쳐 본다.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한스는 푼수처럼 웃었다. 김종화도 웃어주었다. 문득 한스가 친근해짐을 느꼈다. 한스는 김종화의 손을 붙잡더니 다시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 NO PROBLEM.
한스가 김종화를 이끌고 간 곳은 호텔 부대시설로 보이는 도박장이었다. 김종화는 도박장 카운터에다가 짐을 맡긴 후 호텔 로비로 가서 한스가 지배인에게 사정해 비상금으로 가져간 약간의 달라를 교환할 수 있었다. 한스가 아니었다면 바꿀 수 없었다. 김종화는 막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 한스의 과잉 친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지갑을 바라보던 한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한스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나 오갈 데 없는 배낭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한스에게 도움을 받았으니 조심을 하면 별 문제가 없다 여기고 호텔 라운지에서 도박장으로 나왔다.
호텔 맞은편 건물 지하에서 댄스 음악이 흘러나왔다. 댄스 음악을 듣자 김종화는 왠지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김종화는 작은 배낭에서 남은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그 중 하나를 한스에게 줬다. 그러나 한스는 재채기하는 시늉과 코를 가리키며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감기 걸린 모양이다. 김종화가 "어 코울드?"하니 날씨가 말도 못한다는 의미인지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맥주캔 하나를 다시 배낭 속에 넣고 남은 맥주 캔의 뚜껑을 따서 먹었다.
김종화가 앉자 한스도 따라 앉았다. 김종화는 한스에게 한국에서 가져 온 애용담배인 오마 샤리프 한 가치를 주려 했는데 한스가 오히려 김종화에게 독일 담배를 권했다. 거절했으나 한스의 간절한 요청 - 한스는 이럴 때마다 NO PROBLEM -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맥주가 시원하지 않아 미적지근하게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댄스장에서 퍼지는 불빛에 반사된 한스의 얼굴이 나타난다. 30대 말 40대초반? 대체로 서양인이 동양인보다 실제 연령에 비해 연령보다 5~10년 나이 들어 보이니 김종화와 같은 나이일 수도 있었다.
- 하우 아 유 올드? 유 아 호우텔 맨? 홧쯔 유어 잡? 유 타이어드? 스피킹 잉글리쉬? 유 노 노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아이 씽크 저매인 엔비. 유 머스트 비 프라우드. 커즈 저매인 이즈 유나이티드. 유 노? 몰라도 돼. 상관없어. 그냥 독일인만 만나면 한 번 하고 싶은 말이었어.
김종화는 한스가 아무리 갈 데 없는 외톨이 동양인을 도와준다지만 밤늦게까지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 의아스러워 몇 번이고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러나 답변은 역시 NO PROBLEM 한가지였다. 김종화는 첫경험하는 여성에게 서투른 성지식을 과시하듯 한스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한스도 지지 않고 김종화에게 담배 연기로 하는 상투적인 장난을 보여주었다. 밤 깊은 시각에 둘이 킬킬거리고, 떠들고, 열심히 손발짓을 해대었기에 만일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김종화가 맥주를 다 마시고 쓰레기 버릴 마땅한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자 한스는 김종화에게 빈 깡통을 달라고 했다. 김종화가 어디 있는지 아르켜 주면 버리겠다고 하자 한스는 NO PROBLEM이라며 달라고 말했다.
- NO PROBLEM
한스가 가끔씩 내뱉는 NO PROBLEM'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약간 높은 옥타브로 시작하여 삽시간에 저음으로 내려갔다가 처음 고음보다 약간 낮게 내며 끝을 바이브레이션 비슷한 뉘앙스로 마무리하는 게 코미디 같은데 국회 의사봉을 두들길 때 내는 소리처럼 상황을 터무니없이 결정짓고마는 것이었다. 한스는 빈 깡통을 받고 뜻모를 미소를 짓더니 이내 빈 깡통을 냅다 멀리 내던졌다.
깡-깡-깡-끄르르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
김종화는 이렇게 라이프찌히 도착 한 시간 반만에 이 도시 사람이 된 것이다.
도박장 내에는 상기된 목젖, 바짝 타오른 입술, 푸석한 머리칼, 퀘퀘한 눈매들로 둘러싸여 열기가 뒤끓고 있었다. 그중 경마 전자오락이 흥미를 끌었다. 2*2 제곱미터 크기의 테이블 둘레에 열댓명의 경마꾼들이 보조의자에 앉아 한 번 할 때마다 2DM 이상을 둘 이상 걸며 시합에 열중하고 있었다. 게임 시작 전 승률이 고시되면 1번부터 10번까지 골라 코인을 투입한 뒤 시작버튼을 누르면 말들이 다그닥 다그닥 소리를 내며 골인 지점까지 내달렸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나가다 최종 지점에서 질주하여 역전되기도 했다.
한스는 김종화에게 교환대에 가서 코인을 바꾸라고 하였다. 김종화가 10DM만 교환하니 한스는 적잖이 실망하였다. 그들은 경마 전자 오락기 앞으로 갔다. 한스가 잔돈이 없는지 김종화에게 동전을 빌려 높은 승률의 말에 걸고 시범을 보였다. 잃었다. 한스는 씩 웃으며 아무렇지도 않은 듯 김종화에게 권했다. 김종화는 아까부터 짧은 순간일망정 유심히 지켜봤었다. 낮은 승률의 말이 훨씬 더 잘 달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2 : 1 확률 말을 걸었는데 그 말이 승리하였다. 다시 2 : 1에 걸었다. 계속 땄다. 다른 도박사들은 10 : 1이나 30 : 1에 거니 자꾸 잃었다. 그들은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몇번 이기자 욕심을 부려 세 곳에 동시에 걸었다. 2 : 1에도 걸었지만 높은 승률에도 동시에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잃었다. 한스가 다시 김종화에게 코인을 달라 해서 주어서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도 2 : 1로 잃었다. 김종화는 그만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었지만 본전 생각이 났다. 김종화는 결국 10 DM을 모두 잃고 말았다. 한스는 더 바꾸라 종용했지만 김종화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한스는 매우 아쉬워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이 하는 것을 구경했다. 갑자기 안쪽 깊숙한 곳에서 블랙잭을 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들이 호기심에 가보니 대머리가 벗겨진 나이든 독일인과 베트남 난민으로 보이는 친구 둘이서 돈을 엄청나게 따고 있었다. 코인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자 베트남인들이 그들 주위에 몰려 들었다. 대부분 비쩍 마른 체격에 허름한, 불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한스가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김종화를 소개했지만 그들은 웃지도 않고 김종화를 위아래로 쳐다볼 뿐이었다. 김종화가 한스에게 귀엣말로 마피아? 하니 예의 똑같이 NO PROBLEM만 할 뿐이었다. 김종화는 눈치로 마피아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중요한 건 그들이 따고 있다는 것이다. 줄잡아 오천개는 넘으니 10000DM? 육백만원? 최대 배팅을 계속 하는데 한 번 할 때마다 1000DM이 쏟아진다. 새벽 두 시가 되니 종업원이 시계를 가리키며 도박장 마감을 알렸다. 밤새 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스가 가지 않고 기다린 이유가 있었다. 김종화는 새삼 한스의 배려에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김종화가 뚜렷한 이유없이 한스를 보고 웃으니 한스도 무슨 생각에서인지 호탕하게 웃었다. 김종화가 짐을 찾고 도박장 문을 나서니 대머리는 없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한 지폐 뭉치를 받는 베트남인만 있었다. 베트남인들은 한스와 인사한 뒤 바삐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북유럽서부터 보아온 카지노 열풍. 아주머니들이 시장 바구니 들고 휴지통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전자 카지노에 아낌없이 동전을 넣는 풍경을 보아온 김종화로서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다만 구사회주의권 국민이었던 그들이니 만큼 돈맛을 더 탐닉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했다. 을씨년스러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중부유럽의 바람은 4월인 데도 매서워진다. 비록 춥지만 역에서 침낭 덮고 잠만 자야 할 것이다. 김종화는 이제 한스와 헤어질 시간이라 생각했다. 한스에게 악수를 청하니 한스는 김종화 손을 잡더니 역 앞에 서 있는 버스에 오르려 하는 것이다. 한스가 아무래도 김종화를 좋게 본 모양이다. 김종화는 자기 집에 가서 자자는 이야기로 받아들이고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선량해 보이니 따라갈까. 이제껏 내게 너무나 잘 해 주었잖아? 아니야, 무턱대고 따라갈 순 없잖아. 아직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이러다 으슥한 데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어. 그가 정말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아니야. 교묘한 사기꾼일수록 완벽한 기회를 노리겠지. 내가 경계가 느슨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프게 행동한 건 아니었거든. 그러니 그가 순수한 의도로 나를 이끌었다 해도 이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만큼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낫겠다. 아니야. 날씨도 춥고, 감기 걸리기 딱 좋을 듯해. 이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여행 일정이 다 망치게 되잖아. 더구나 약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여행의 맛이 사는 게 아닐까. 이 기회에 독일 가정을 직접 본다는 게 어디야. 용기를 내자.' 그러나 김종화는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김종화는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한스의 직업이 다시 궁금해졌다. '그의 집에 가면 그가 호텔 직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한스가 다시 내 손을 끌며 말끝을 묘하게 내며 간청하듯 말했다.
- NO PROBLEM.
저항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에 김종화가 견지하는 임의규칙이 있었다. 신중한 의견과 덜 신중한 의견이 쉽게 결정되지 않고 맞부닥칠 때 덜 신중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에라, 모르겠다. 김종화는 결정을 했다. 그들은 버스에 올랐다. 한스는 밤거리를 지나는 모든 이들을 알았다. 운전사에게도 친근하게 인사를 한다. 김종화가 요금을 내려 하자 한스는 만류하며 내지 않아도 된다는 시늉을 한다. 김종화는 심야에는 요금을 받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번 마음이 결정되자 김종화는 모든 것을 편의대로 생각하였다.
버스에는 그들 외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초췌한 얼굴의 아가씨, 심야에도 책을 읽는 초로 신사, 리시버를 끼고 음악을 듣는 이십대 초반 흑인. 김종화는 버스가 예정된 시각에 출발하자 처음에는 길거리를 익히려 바깥 풍경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버스가 라이프찌히 외곽으로 나가고, 비슷한 건물들이 계속 되자 포기하고 말았다.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 본 것만으로 라이프찌히를 알 수 있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문득 역 앞에서 만난 회사원의 말이 김종화의 눈앞으로 스치듯 지나갔다. 라이프찌히는 죽어 있다?
약 십여분 지났을까. 그들은 어느 거리에 내렸다. 그들은 곧바로 한스의 집으로 들어갔다. 한스가 사는 곳은 오랜 건물에 다세대 주택이었다. 음침한 큰 현관을 지나 일층에 있었는데 집 내부는 다른 유럽 건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살림이 별로 없었다. 20평쯤 됨직한 집이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와 좁지 않은 복도. 한스는 독신이었다. 독신이 살기에는 큰집이었다. 그들은 응접실겸 방으로 들어갔다. 방안에는 25인치 티브이와 긴 탁자와 침대 겸용 소파가 있었고 벽면에는 페르시아 풍의 싸구려로 보이는 대형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태피스트리 밑의 장식대에는 오래된 듯이 보이는 사진 액자, 빈 꽃병 등 그리 낯설 지 않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김종화는 욕실 겸 화장실이 독일 기차에서처럼 변기 뚜껑이 없음을 보고 독일 전역에서 변기 뚜껑이 없는 곳에서 일을 보는 독일인을 휴지없는 화장실처럼 떠올리며 빙긋 웃었다.
김종화가 대충 씻고 나서 응접실로 돌아오니 한스는 리모콘을 연신 돌리며 TV를 보고 있었다. 김종화는 실자라인 유람선에서 세일로 판매하길래 덥썩 샀던 적포도주를 따서 기분좋게 마셨다. 한스에게 권하니 웃으며 정중히 거절했다. 한스는 전혀 피로 하지 않은 듯 보였다. 오히려 이제 일이 시작이다는 식의 눈빛을 반짝거리는 듯 싶었다. 김종화는 한스가 별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은 백수라고 짐작했다. 직장인이라면 친구와 함께 집에 올 지라도 이야기 중에 자기 직업에 대한 소개를 꺼낸다든지, 물건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이 다른 곳일지라도 보편적인 것 자체가 틀린 것이 아니라고 김종화는 평소 굳게 믿고 있었다.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어서이겠지라고 생각했다. 깊이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은 밤이었다.
김종화는 모처럼 보는 TV에 호기심을 나타냈다. 심야라 혹시 야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그러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다 마이클 잭슨이 야한 여성차림으로 분장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나왔다. 마이클 잭슨이 웃기네? 하며 김종화는 웃었다. 한스도 웃었다. 이제 자야할 시간. 김종화가 한스에게 잘 의사를 표시하자 한스가 알았다는 듯이 일어섰다.
소파가 빡빡해서 둘이 함께 소파를 침대로 바꾸어야 했다. 그런데 침대 모양이 대략 만들어졌음에도 한스는 마치 측량 기사처럼 앉아서 한쪽 눈을 감고 침대가 제대로 수평이 되어 있는지 확인하고 또 하는 것이었다. 이런 데서 독일인의 정확성이 발견되나? 하며 김종화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침내 한스가 안심한 듯한 표정으로 일어서자 김종화는 잘 자라는 의미로 악수를 청했다. 그때 한스가 바지를 쑥 벗었다. '같이 자자?' 김종화는 당황스러웠다. 다른 방도 있는데... 김종화는 한스를 따라오면서 내심 작정한 바가 있었다. 방이 하나라면 모르되 둘이라면 각자 방을 쓰자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김종화는 무엇보다 지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스가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 내일 일어났는데 지갑이 없어진다면 어떻게 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면 서로에게 불행일 것이다. 김종화는 얼른 한스에게 옷을 입으라 말하며 다른 방에서 자라는 표시를 하였다. 그런데 한스가 완강히 버티었다. 한스도 김종화를 의심해서 그럴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난 배낭족을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겠다 싶어 김종화는 겉으로는 거절하면서 점차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한스가 더 강경하게 나온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한스의 집이고 게다가 한스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했다, 그러니 강력히 요구한다면 할 수 없이... 그런데 한스는 아예 팬티까지 훌렁 벗으려고 하였다. 처음에는 자기 의사표시를 강하게 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한스의 눈이 게슴츠레 해지면서 김종화의 손을 붙잡으며 NO PROBLEM하자 김종화는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했다. 함께 소변을 볼 때 한스가 김종화 자지를 보다 들킨 뒤에 나온 웃음이 단순히 계면쩍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탐욕이 막 일기 시작할 때의 징그러운 웃음 그것이었던 것이다. 한스가 지배인하고 이야기할 때 직원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한스는 왜 심야에 호텔에서 나섰던 것일까. 그렇다면? 한스의 직업은 호텔에서 연락을 하면 가서 일을 치르는 게이 매춘부? 김종화는 한스가 도박장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 엉덩이를 툭 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역 앞에서 친한 듯이 보이는 이를 만났을 때 한스가 보였던 행동을 기억해냈다. 입을 내밀며 혀를 아래위로 살랑살랑 흔들었었다. 단지 남자친구에게 호의를 보내는 것치고는 은밀한 인사였던 셈이다. 아무리 심야라지만 버스 운전사가 뻔뻔스레 돈을 내지 않는 그들 일행을 보고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그때 김종화는 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넘긴 것일까. 승객들이 그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던 것까지 말이다. 김종화는 순식간에 자신의 실수를 책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함부르크에 있는 섹스샵을 지나다 마이클 잭슨 비슷한 이가 나오는 동성애 포르노를 이제서야 기억해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밤늦은 시각 낯선 도시에 도착한 사정으로 인해 순식간에 모든 것이 뒤엉키면서 혼돈 속에 찾아든 미약한 빛이 있었기에 이국적인 풍경에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사실은 몇 푼 되지 않은 돈이나 추위 따위를 걱정했던 것이다. 아무도 의지할 곳이 없는 곳에서조차 김종화는 무력하게 자기 발가락만 쳐다 보고 있었던 것이다.
- 아임 PROBLEM
김종화는 흥분해서 한국말로 마구 쏟아냈다. 아무래도 좋았다.
- 네게 호감이 간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넌 내 취향이 아니야. 하지만 넌 내가 네 취향이라 하겠지. 설득하지 말아 줘. 어차피 우린 취향이 다르니까. 나는 언젠가 나의 취향을 매우 부르주아적이라 판단하고 내 취향을 전복시켜 나 자신을 혁명적 투사로 만들기 위해 내 취향과 전혀 반대되는 리미라는 여성을 설득한 적이 있었어. 그녀는 분석 당하길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론은 차가움 대신 따뜻함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느니 하며 그녀를 설득했지. 그녀는 내 시를 좋아할 뿐이라 말했어. 나는 내 시보다 현실을 보라 했어. 그런데 그녀는 누구에겐가 분석당하길 기다렸던 거야. 놀랍게도 우리는 취향이 같았지. 자신이 유일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람을 파악하는 열정으로. 그녀의 몸부림은 일종의 시험이었던 거지. 그녀도 다른 이들을 나처럼 실험했던 거야. 그녀도 나처럼 밑바닥의 언어들로 모든 걸 새롭게 만드는 불행한 호기심을 지녔던 거야. 그러한 호기심이 빠르게 일어난 것만큼 빨리 시들자 자신만 빠져 나와 아무도 모를 번민을 거듭하는 것이야. 그녀는 그래서 나를 죽음처럼 좋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게임에 지쳤어. 한쪽이 계속 실험자고 다른 한쪽이 모르모트이거나 아니 설사 그 역할을 바꿀 지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달라진 것이 없었어. 한 쪽이 권력을 쥐자마자 드러내는 행동이란 나를 희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으로 이끌었지. 내 꿈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다들 똑같았어. 내 생각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냐. 도대체 원인을 파헤칠수록 꿈을 빼앗길 뿐인 분석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죽음보다 깊은 정사를 바라지만 연애란 밝고 따뜻한 거야. 웃지 마. 나도 웃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오직 바라볼 뿐인 취향이 연애를 변질시켰어. 죽음일 뿐이지. 나는 동성애자를 이해해. 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 혁명을 이해한다는 말이랑 같아. 혁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에겐 지극히 일상적일 게 분명해.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 따위는 필요 없어. 매일 죽고 싶다는 리미에게 도대체 내가 뭐란 말이야. 죽음 이외에 리미에게 의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이야.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어.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어.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PROBLEM이야.
그러나 한스는 김종화의 모습에 더욱 감동 받아서인지 목소리가 점차 애절함을 넘어 칭얼거리는 말투로 변해 갔다. 김종화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김종화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눈물 섞인 구애였다. 김종화가 차라리 내가 동성애자였다면, 한번 사고칠까 하는 생각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한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자신의 팬티를 까고 자기 엉덩이를 주무르며 뭐라 말하기까지 했다. 김종화는 한스의 말이 비록 독일어였지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엉덩이 무척 탐스럽지 않아?
팔십년대는 마르크스에 대한 독점욕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구십년대 또한 독점욕이 응고된 정액을 오르가슴이라는 휴지로 닦으려 했을 뿐 사정은 같다. 팔십년대 광장에서 시뻘건 눈으로 저주하듯 재채기하며 마르크스를 연호했다면, 구십년대 통신에서 역시 충혈된 눈으로 밤새워 마르크스를 연호했을 뿐이다. 적색 환상에서 잿빛 환상으로. 적색을 넘어 빛을 향한 짝사랑을 잊지 못해 결국 회색이 되다만 잿빛 환상으로. 그러나 아무리 뭐라 떠들든 그들의 번역된 계몽에 당할 재간이 없었다. 서구인들은 아메리카 인디언과 들소를 몰살시키는 감성적인 실천을 통해 그들의 취향을 확고히 했다. 그들 앞에서 그 어떤 동양인이 분열되지 않을 수 있을까?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김종화는 무력해졌다. 그러자 김종화의 뺨을 자극하는 한스의 혀가 닿았고, 짜릿한 흥분이 찾아왔다.
넌 뭐냐, 넌 뭐냐. 죽었다고? 사기 치지 마. 좆 같은 놈, 백수인 주제에, 내 좆이나 빨아라. 네가 뭐라도 돼? 까불지 마. 넌 뭐가 좋다고 무너지는 내 마음을 안다고 소리쳐. 니가 뭔데 날 괴롭게 해. 유치한 새끼. 꺼져 버려. 집어치워. 너 까짓 게. 씨발, 튀는 놈들 많아 좋네.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제발, 사라져 줘. 눈물 나와. 울지 마, 씨발 놈아. 무수한 말들이, 단지 말뿐이지만 어느덧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끝났다.
김종화는 벗었던 양말을 다시 신고, 풀었던 짐을 정리하며, 언젠가 게이는 강간하지 않는다라는 글귀를 읽었던 것을 떠올렸다. 틀림없는 사실일 것이다. 누가 철학자 베이컨이 후대 철학자를 강간했다고 믿겠는가 말이다. 설사 서남 아시아 권에서는 양성애자들이 여행객을 대상으로 성폭행을 일삼는다 하더라도 동방의 이국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여기는 서남 아시아가 아니라 본토다. 한스가 아쉬운 듯 자고 가라며 NO PROBLEM을 강변했지만 김종화는 집을 나서다 잠깐 뒤돌아 한스에게 희미하게 웃으면서 천천히 말했다.
- 아/임/P/RO/B/LEM
새벽 세시.
한스가 따라나왔다. 아쉬운 듯 김종화를 쳐다보다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디론가 가 버렸다. 김종화는 짐이 무거워 잠시 히치하이킹을 할까 했다. 그러나 차들은 신호등을 잘 지키면서도 신호가 바뀌면 쏜살 같이 각자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새 깃발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 깃발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중심을 향한 부러움일 뿐이다. 김종화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걷고는 했다. 지금도 걷는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니, 콧물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카세트 테입을 돌린다. 벌레 같은 삶이 지속되는 건, 귀족적인 죽음 때문인데,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기 때문인데,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재생되는 카세트 테잎처럼 늘상 던져진 질문에 답변만 그럴싸하다. 김종화는 스스로 바보같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어디로 갈 것인가. 조금 늦게 도착하면 다를 것인가. 내 마음 나도 알 길이 없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김종화는 무방비 상태로 당장 코앞에 닥친 답변 때문에 기억을 더듬으며 터덜터덜 중앙역으로 끌려 가고 있었다.
무서운 독감에 걸린 라이프찌히, 그리고 김종화.
재회 아임 problem
2004. 7. 14. 18:2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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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PROBLEM ; 재회
인드라
다음 표적은 이것이다!
; 구혼자들의 최후; 그리스와 로마의 신화; 토마스 벌핀치
제길, 독자여. 방금 무슨 생각했나. 저 자식 인용 붙이는 것에 취미 붙였군? 어디까지 가나 보자? 요즘 발동이 걸렸나 보지? 멘스인가? 그렇다. 난 지금 멘스중이다. 어쩔래. 난 왕자병이 아니야. 당당한 황태자암이야. 너희들의 비난이 거셀수록 내 자존심만 커질 뿐이다. 그러나 무관심이군. 흑흑. 그러나 저러나 심심하군. juglae에게 세이나 걸까?
INDRA 까꿍 ^!^
juglae 정말 지겹다, 지겨워
INDRA 뭐가? 내가 세이거는 거?
juglae 아니, 사는 게 지겹다.
INDRA 그런가 부지.
juglae 훗. 너 가만 보니까 쪼가 붙었구나. 말하기 곤란하면 그런가 부지야.
INDRA 마자.
juglae 마자도 그래.
INDRA 쩝. 뭔 말을 몬 하겠네. 앙~
juglae 히히. 성공했다.
INDRA 뭐가?
juglae 내가 지금 그런 상태라구.
INDRA 헉~~~ 미안해. 오늘 일이 있어서 약속 못 지켜서.
juglae 씨이. 뭐 난 맨날 너한테 당하고만 살란 법 있어?
juglae 왜 암말 안 해?
INDRA 화장실 다녀왔어. 아참, 내 글 봤어?
juglae 으응. 아니. 안 봤는데?
INDRA 끙. 시간나면 한번 봐봐.
juglae 아라쪄.
나는 juglae와 세이를 마친 후 접속을 끊었다. 리미가 기다리고 있었다.
- 나 갈래요.
- 아니, 가지 마. 끝났어.
- 흑. 나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세요?
- 한 30 분 되었나?
- 무정하군요. 3 시간 동안 나를 이렇게 세워 두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제 와서 가지 말라니요. 내가 당신에게 이런 존재밖에 되지 않았던가요?
리미는 말을 마치자마자 뛰쳐 나갔다. 여자가 울면서 남자에게 뒷모습을 보이며 뛰쳐 나가는 것은 언제 봐도 예쁘다. 그렇다. 리미는 내가 이런 사람인 줄 몰랐다는 말인가.
두문불출하다 그녀를 4시에 만났다. 1차인 <나쁜 영화>보기를 그녀가, 2차인 술자리 내가 책임졌다. 우리는 영화를 본 뒤 자리를 옮겨 신촌 <우드스탁>에서 함께 술을 마셨다. 토요일 저녁이라 술집이 제법 법석대었다. 시시한 이야기 도중에 하야시 후미코가 등장했다. 후미코는 판매원, 여종업원 등을 전전하다 2차대전 중에는 특파원으로 취재활동도 했다는 소설가라느니, 후미코 작품 중에 30 여 년간 계속된 남성 편력을 그리는 <철 늦은 국화>라는 게 있는데 <세상의 노파들처럼 꾀죄죄한 모습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는 편이 나았다.>라는 대목에서 나이를 지독히 먹지 않으려는 생의 의지를 찾을 수 있다느니 하며 내가 한참 이야기를 하는데 마주 앉은 리미가 빤히 나를 보고 있었다.
- 왜...?
- 안아 줘요.
나는 리미의 곁으로 가서 리미를 꼭 껴안았다. 리미가 내 품에 한없이 빠져 들어가는 포만감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 리미의 입술을 찾았다. 하지만 리미는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막았다. 나는 살며시 리미의 손가락을 물었다.
- 입술의 포옹으로 내 간절함이 날아가면 어쩌죠?
- 그땐 입술의 포옹이 영원하기를 간구해야지.
- 그래도...읍!!!
입맞춤이 처음에는 수줍게 시작했다 점차 대담해져 프랜치 키스를 오랫 동안 나누었다. 리미가 먼저 입술을 떼더니 처음 내가 있던 자리로 가서 앉아 무슨 말을 할 듯 한참 침묵을 지키다 갑자기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잠시 우리를 쳐다보았다.
- 자취방이 보고 싶어요.
3년만의 재회였다. 우리는 신촌에서 봉원동 자취방까지 아무 말 없이 손을 잡고 왔다. 나는 긴장이 되어 헛기침을 간혹 했다. 리미도 손이 가느랗게 떨렸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런데 오는 도중에 뭔가 스쳐 가는 것이 있었다. 나는 방에 들어서자마자 리미에게 양해를 구하고 지금까지 접속하였던 것이다.
"새벽 세시.
한스가 따라나왔다. 아쉬운 듯 김종화를 쳐다보다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디론가 가 버렸다. 김종화는 짐이 무거워 잠시 히치하이킹을 할까 했다. 그러나 차들은 신호등을 잘 지키면서도 신호가 바뀌면 쏜살 같이 각자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새 깃발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 깃발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중심을 향한 부러움일 뿐이다. 김종화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걷고는 했다. 지금도 걷는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니, 콧물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카세트 테입을 돌린다. 벌레 같은 삶이 지속되는 것은, 귀족적인 죽음 때문인데,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기 때문인데,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재생되는 카세트 테잎처럼 늘상 던져진 질문에 답변만 그럴싸하다. 김종화는 스스로 바보같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어디로 갈 것인가. 조금 늦게 도착하면 다를 것인가. 내 마음 나도 알 길이 없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김종화는 무방비 상태로 당장 코앞에 닥친 답변 때문에 기억을 더듬으며 터덜터덜 중앙역으로 끌려 가고 있었다.
무서운 독감에 걸린 라이프찌히, 그리고 김종화."
나는 라이프찌히의 기억을 왜 떠올렸을까? 나는 직장을 그만 두고 통신을 통해서 엄선해서 만나는 것을 제외하고 세상과 연을 끊고 살았다. 집을 나와 봉원동으로 자취방을 얻은 것도 그 때문이다. 오로지 친구 민기만이 이틀내내 채팅만 하다 의기투합하여 삼일밤낮으로 술을 마신 이후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다. 민기는 신촌 언저리에서 자취하며 살았는데 연애지상주의자였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민기의 연애는 매일 실패하기 일쑤였다. 매일이란 용어가 생소하겠지만 적어도 민기에게는 통용될 수 있는 말이었다. 지나가는 모든 여성에게 연애하자고 하니까. 아무튼 민기는 시도 때도 없이 쐬주병을 들고 나를 찾아와 넋두리를 하다 갔다. 민기가 물었었다.
- 너 요즘 라이프찌히에 취해 살더만. 꼭 가본 것처럼 말이야.
- 응. 이미 상상한 것은 경험한 것이지. 아무튼 요즘 여행서적 보는 재미로 살아.
- 그럴 줄 알았어. 이유 없이 죽고 싶다는 녀석이니.
처음에 이 글을 시작했던 까닭이란 없었다. 어느날 문득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내 글에도 무언가 목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글이 되지 않으리라는 강박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왠지 의미를 부여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는 걸었고, 눈물을 흘렸는데... 소설의 끄트머리부터 쓴 뒤 서두를 전개해 나갔지만 더 이상 글이 나아가지 않았다. 끝이라고 글을 맺긴 했지만 어쩐지 끝이 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왜 이렇지? 나는 불안에 빠지기 시작했다. 기억이란 무엇인가.
리미를 처음 만난 것은 오년 전이었다. 그때 리미는 대학 2학년생이었고 나는 군대 다녀와서 9 학기만에 졸업을 마치고 취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이 좋아 취업 준비이지 변리사 시험 보겠다고 큰 소리 땅땅 치고 나서 수험서 몇 권 산 뒤 쳐다보지 않았던 게 당시 나였다. 이러한 사정이 있었던 것은 아버지와의 대화 때문이다.
- 아버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번에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탄다면 제가 기계공학계에 필요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이므로 이 길에 남겠습니다. 그런데 열심히 공부했음에도 안 된다면...
- 어쩌겠다는 거냐.
- 아닌갑다, 생각하고 영화감독이 되겠습니다.
- 미련한 녀석.
나는 말한 대로 할려고 했지만 장학금은커녕 가까스로 낙제를 면했다. 이 길이 아닌 것이 분명한데 그렇다고 영화감독이 되는 길은 쉬운 일인가. 아버지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여기고 침묵을 지키셔서 나는 자식된 도리로서는 알아서 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변리사였다. 하지만 나는 수험 준비 대신 시나리오 써서 데뷔하겠다고 열심히 영화를 보러 다녔다. 지금은 비록 소설가가 되었지만. 그때 시네하우스에서 리미를 만났다.
"네게 호감이 간 건 사실이야. 하지만 넌 내 취향이 아니야. 하지만 넌 내가 네 취향이라 하겠지. 설득하지 말아 줘. 어차피 우린 취향이 다르니까. 나는 언젠가 나의 취향을 매우 부르주아적이라 판단하고 내 취향을 전복시켜 나 자신을 혁명적 투사로 만들기 위해 내 취향과 전혀 반대되는 리미라는 여성을 설득한 적이 있었어. 그녀는 분석 당하길 원하지 않았어. 하지만 이론은 차가움 대신 따뜻함을 얻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느니 하며 그녀를 설득했지. 그녀는 내 시를 좋아할 뿐이라 말했어. 나는 내 시보다 현실을 보라 했어. 그런데 그녀는 누구에겐가 분석당하길 기다렸던 거야. 놀랍게도 우리는 취향이 같았지. 자신이 유일하게 파악하지 못한 사람을 파악하는 열정으로. 그녀의 몸부림은 일종의 시험이었던 거지. 그녀도 다른 이들을 나처럼 실험했던 거야. 그녀도 나처럼 밑바닥의 언어들로 모든 걸 새롭게 만드는 불행한 호기심을 지녔던 거야. 그러한 호기심이 빠르게 일어난 것만큼 빨리 시들자 자신만 빠져 나와 아무도 모를 번민을 거듭하는 것이야. 그녀는 그래서 나를 죽음처럼 좋아했지. 하지만 난 그런 게임에 지쳤어. 한쪽이 계속 실험자고 다른 한쪽이 모르모트이거나 아니 설사 그 역할을 바꿀 지라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겠어? 달라진 것이 없었어. 한 쪽이 권력을 쥐자마자 드러내는 행동이란 나를 희망으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절망으로 이끌었지. 내 꿈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야. 나만 그런 게 아니었어. 다들 똑같았어. 내 생각대로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게 아냐. 도대체 원인을 파헤칠수록 꿈을 빼앗길 뿐인 분석이 다 무슨 의미가 있겠어? 죽음보다 깊은 정사를 바라지만 연애란 밝고 따뜻한 거야. 웃지 마. 나도 웃은 적이 있었어. 하지만 오직 바라볼 뿐인 취향이 연애를 변질시켰어. 죽음일 뿐이지. 나는 동성애자를 이해해. 하지만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겠어? 혁명을 이해한다는 말이랑 같아. 혁명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 그에겐 지극히 일상적일 게 분명해. 그래서 이해한다는 말 따위는 필요 없어. 매일 죽고 싶다는 리미에게 도대체 내가 뭐란 말이야. 죽음 이외에 리미에게 의미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이야. 습관에서 벗어나고 싶어.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키고 싶어. 하지만 나는 할 수 없어. 나는 PROBLEM이야. "
여름날의 마지막 장미
詩.Moore, Thomas, 1779~1852
'These the last rose of summer' 여름날 마지막 남은 장미
Left blooming alone, 홀로 피어 있네
All her lovely companions 사랑하는 동료들 모두
Are faded and gone; 곁에서 사라져 버렸는데;
No Flower of her kinderd, 근처엔 어떤 종류의 꽃도,
No rosebud is nigh 어떤 장미봉오리도 없는데
To reflect back her blushes, 뒤는 붉은 색을 반사시키며
Or give sigh for sigh. 한숨을 쉬고 있네
So soon may I follow, 난 곧 따르리라,
When friendship decay, 친구들이 썩어가고
And from love's shining circle 사랑의 빛나는 품에서
The gems drop away! 보석들이 떨어져 버릴 때
When true hearts lie wither'd, 진실한 가슴들이 시들어 누웠고
And food ones are flown, 좋은 친구들이 흘러가 버렸는데,
Oh, who would inhabit 아! 그 누가 이 쓸쓸한 세상에
This bleak world alone? 홀로 살고 싶었는가?
<출처 : http://blog.naver.com/yiey1004/120003953430>
그날 상영된 영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모두 일어서서 나갈 때까지 리미가 앉아 있었다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뒤에야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다 같은 줄의 리미를 발견한 것이다. 리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분명 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리미가 눈을 뜰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 한참 지났을까? 리미가 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 나가는 것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나는 웃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통신세계라고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간 쉬쉬하고 있기만 했던 우리들의 숨겨진 다른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일 뿐인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놀라는 것이다. 자신만 그러한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점을 뒤늦게나마 발견한 것이다. 그나마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었던 데는 텍스트만 지원하는 미흡한 통신 기술 탓일 것이다. 만일 팔십년대 말부터 고속 인터넷망이 깔렸다면 어떠했을까?
흔히 온라인에서 활달한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오히려 수줍은 경우가 많은데 그간 이 사회가 자아를 얼마나 억압해왔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유를 갈구했다. 그러나 열 명이면 열 개의 자유였다. 그런 그들에게 팔십년대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란 단지 신기한 사람이고, 마르크스를 말한다는 건 리바이스 청바지랑 비슷한 것이었다. 더구나 복고풍이 불자 옛것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자유의 참 맛을 아는 사람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리미 또한 통신만 하지 않을 따름이지 다를 바가 없었다. 리미가 말했다.
- 모더니즘은 형편없어. 고전의 숭고함을 다 망쳤거든.
- 가령?
- 당신이 하고 있는 컴퓨터 통신 따위들이지.
리미의 말은 간단명료했다. 때로는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이 점이 나를 탄복하게 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러하니까. 그녀를 어떻게 만나자고 했고 사귈 수 있었는가에 대해서는 생략하자. 진부하니까. 다만 첨언하고픈 것은 구십년대 초반까지는 소박함이 통했던 시절이다. 계약결혼이란 말만 꺼내도 왠지 멋졌으니까. 우리는 계약대로 무슨 일이 있든 매일 십분 이상씩은 꼭 보았다. 십 분을 넘기면 상대방의 기분에 관계없이 헤어지면 그만이었다.
"김종화는 첫경험하는 여성에게 서투른 성지식을 과시하듯 한스에게 생각나는 대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라는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까지 했다. 한스도 지지 않고 김종화에게 담배 연기로 하는 상투적인 장난을 보여주었다. 밤 깊은 시각에 둘이 킬킬거리고, 떠들고, 열심히 손발짓을 해대었기에 만일 옆에 지나가는 사람이 있어서 그들을 보았다면 어떠했을까. 김종화가 맥주를 다 마시고 쓰레기 버릴 마땅한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리자 한스는 김종화에게 빈 깡통을 달라고 했다. 김종화가 어디 있는지 아르켜 주면 버리겠다고 하자 한스는 NO PROBLEM이라며 달라고 말했다.
- NO PROBLEM
그가 가끔씩 내뱉는 NO PROBLEM'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약간 높은 옥타브로 시작하여 삽시간에 저음으로 내려갔다가 처음 고음보다 약간 낮게 내며 끝을 바이브레이션 비슷한 뉘앙스로 마무리하는 게 코미디 같은데 국회 의사봉을 두들길 때 내는 소리처럼 상황을 터무니없이 결정짓고마는 것이었다. 한스는 빈 깡통을 받고 뜻모를 미소를 짓더니 이내 빈 깡통을 냅다 멀리 내던졌다.
깡-깡-깡-끄르르르-- "
하지만 리미와 나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리미는 누구보다 귀족적인 것을 열망했다. 이를테면 스땅달의 적과 흑에 나오는 정열적인 여성이었다고 할까. 반면 나는 그렇지 못했다. 나는 나폴레옹를 꿈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 바보. 그럼 뭐가 되고 싶은 거야.
- 아무 것도 없어.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자살은 안 해.
- 농담은 아니겠지?
- 너 같으면 이런 걸로 농담할 심정이겠니?
- 맙소사. 끝장이군.
리미의 말에는 습관처럼 <끝장이군>이 따라다녔다. 무엇이든지 결론은 <끝장이군>이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만남을 지속한 것은 순전히 마르크스 덕이었다고나 할까. 이유 없이 죽기가 서로의 유일한 화제였다. 나는 까뮈가 마르크스에 속한다고 주장했고 리미는 마르크스가 까뮈의 부속품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르트르를 혐오하는 단일한 대오와 까뮈가 역사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이유로 내 주장에 승복했다. 나는 당시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여성일지라도 조그마한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가차없는 비판을 해대고는 하였다.
-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야.
경마장 가는 길이란 하일지 원작 영화가 나온 적이 있었는데 그 영화를 보고 온 여동생이 오빠보고 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경마장 가는 길의 주인공보다 퐁네프의 연인들에 나오는 주인공이 더 어울렸다. 아니면 마이크 리의 영화 네이키드에 나오는 주인공이든가. 리미는 내 앞에서 잘 울었다. 하지만 술을 마신 뒤 울지는 않았다. 술김에 우는 여자란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고, 남자에게 강간당해도 할 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리미는 격식을 갖추고 울어야 한다고 믿는 묘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옆에 있으면 리미는 하염없이 울었다. 언제인가는 아무 말도 없이 5 시간 내내 운 적이 있었다. 그러한 때 내가 만일 담배를 핀다든지 딴전을 핀다면 의례에 벗어난 것이므로 리미는 일어나 가 버렸다. 그럼에도 리미는 나를 좋아했다. 나 이외에는 리미를 힐난하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이다.
"한스는 김종화에게 손짓하며 은행 측면에 있는 정원수에 가더니 오줌을 싼다. 같이 싸며 잠시 만난 인연을 마무리 짓자는 것일까. 김종화는 잠시 머뭇거리다 생리욕구가 없지 않았기에 같이 볼 일을 봤다. 한스가 힐끗 김종화의 자지를 훔쳐 본다. 눈길이 서로 마주치자 한스는 푼수처럼 웃었다. 김종화도 웃어주었다. 문득 한스가 친근해짐을 느꼈다."
우리는 여관에서 첫낮을 보냈다. 우리는 에어콘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담하게 창문도 활짝 열고, 커튼도 열어 젖히고, 옷을 훌렁 벗고, 서로의 성기를 보며 웃었다.
- 너무 못 생겼어.
- 너는 어떻고.
- 그러니까 이리와. 나까지 외면하면 안 되잖아.
리미는 첫경험이 아니었다. 중학교 3학년때 선생이 첫남자였다. 당시 하숙하는 총각 국어 선생이었기에 인기 만점이었다고 한다. 리미는 다른 여학생들이 집까지 찾아가 빨래한다, 청소한다 할 때 일절 가지 않았다고 한다. 다만 수업시간 때만큼 눈을 돌리지 않고 국어 선생을 빤히 쳐다보았다고 한다. 선생 얼굴이 빨개진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런 숨죽임이 교실에서 오고 가니 소문이 나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그래서 선생은 더더욱 리미와 말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던 겨울 어느날 청소를 마친 뒤 혼자 귀가하던 리미를 선생이 불러 세워 겨울여행을 제의했다. 남이섬. 리미는 대담하게도 승낙했고, 마침내 선생과 밤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리미는 그 나이답게 꿈 같은 밤을 생각했다가 강간당하다시피 일을 치른 것이었다. 그후 리미가 선생을 가까이 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훗. 그래도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어.
- 아줌마 같은 소리를 하는군.
- 아줌마? 깔깔깔. 아줌마. 맞아. 난 아줌마라고. 다를 바 없잖아?
리미는 이후 그녀 주도의 섹스가 아니면 허용하지 않았다.
"넌 뭐냐, 넌 뭐냐. 죽었다고? 사기 치지 마. 좆 같은 놈, 백수인 주제에, 내 좆이나 빨아라. 네가 뭐라도 돼? 까불지 마. 넌 뭐가 좋다고 무너지는 내 마음을 안다고 소리쳐. 니가 뭔데 날 괴롭게 해. 유치한 새끼. 꺼져 버려. 집어치워. 너 까짓 게. 씨발, 튀는 놈들 많아 좋네.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제발, 사라져 줘. 눈물 나와. 울지 마, 씨발 놈아. 무수한 말들이, 단지 말뿐이지만 어느덧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 이 육시랄 년아.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해. 씨발 년.
- 아음, 좋아. 더 해줘.
- 쌍년, 찢어진 입이라고 그만 더러운 주둥아리 닥쳐.
- 으으응. 좀 더. 좀 더.
- 네 좃물을 모조리 빨아먹을 테다, 이녀어으으으. 이이이 조가트으은... 헉!
리미는 한번도 오르가슴을 못 느낀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리미는 마치 그것을 느끼는 양 소리지르고 가쁜 숨을 쉬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섹스하기를 원했다. 리미는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믿었고, 나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리미는 내 말을 무시했다.
- 왜 내 말을 무시하지?
- 넌 마르크스를 믿잖아?
- 그게 어때서?
- 믿는다는 것만큼 믿지 못할 게 없는 거야. 난 그래서 마르크스가 싫어.
리미는 늘 죽고 싶어했다. 그런 친구들의 표지라 할 수 있는 손목의 면도날 자국이 리미 또한 있었다.
- 왜 웃어?
- 웃기잖아. 이 땅의 너 같은 애들이 모두 손목에 반창고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 웃긴 것도 많네. 암튼 난 이제 너한테 지쳤어. 넌 자살하고 싶지 않다 했지. 난 자살하고 싶어. 동반 자살할 사람 찾을래.
- 그래라. 내가 언제 말렸냐? 난 생선회 눈깔이나 찌를랜다.
그런데 리미가 정말 내 곁을 떠났다. 늘 농담조였는데 이때만큼은 진심이었던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그때 나타난 공공칠 가방을 든 회사원. 회사원은 영어를 할 줄 알았다. 역주변에 은행이 없으니 걸어서 10분 거리인 호텔에 가보라고 충고하는 회사원 말에 김종화는 노숙할 작정일 만큼 돈이 없으며, 만일 짐을 보관할 돈만 바꿀 수 있다면 밤거리를 쏘다니며 날밤을 새겠다 말했다. 그러자 회사원은 말했다.
- Leipzig is dead. GDR is dead."
나는 더 이상 변리사 핑계를 댈 수가 없었다. 시험날 가지 않은 것이 들통났기 때문이었다. 나는 수십 차례 낙방 끝에 자동차 영업사원이 되었다. 어렵사리 얻은 직장이기에 열심히 해야 하건만 내 기질이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학교 선배랍시고 소장은 나를 특히 찍어서 늘 실적을 가지고 닦달하였다. 장래를 생각해라, 나를 봐라, 누구는 좋아서 부장 따가리란 소리 감수하고 이러고 있는 줄 아냐, 젊었을 때 고생해야 나중에 아쉬운 것 없다 등등 매일 잔소리였다. 심지어 부모에게까지 전화 걸어 잘 책임지고 있다는 말까지 하였다. 소장의 말에 혹했다기 보다는 소장이 너무 안쓰러워 열심히 일한 적도 있었다. 한 달에 열대.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결국 소장도 전직 소장처럼 밀려나지 않으려면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부장이란 사람이 사십이 넘었음에도 결혼하지 않고 회사에서 숙식하며 마누라도 버려라를 부르짖으니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나의 길이 있으므로 그후 낮에는 푹 쉬고 밤에는 통신에 열중하다 영업소에 전화 오는 것 후려쳐서 한 대씩 낚다가 그짓도 한 철이라 결국 그만 두었다.
"리미에게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 위에 글을 쓰고,
이름 위에 이름을 남기지만
솟구치는 건
너를 향한 그리움뿐
이유없이 사랑하다 죽고 싶어"
나는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통신만이 내 삶인 양 현실을 죽였다. 나는 통신에서 여행을 했고, 정치를 했고, 문화를 씨부렸다. 그러다 보니 점차 내 이름이 유명해져서 책까지 냈다. 하지만 무슨 소용이 있으랴. 이유 없이 죽기는커녕 죽을 이유가 하나씩 늘어나니 죽을 맛이었다. 그때 리미의 소식을 들었다. 리미와 나를 아는, 유일한 리미의 여자친구 가혜가 내게 연락을 했다. 하도 오랜만의 일이라 서로 어색해하다 옛날 이야기를 꺼내자 추억 풍의 훈훈한 바람이 돌았다. 마침내 가혜가 리미 이야기를 꺼냈다.
- 리미가 이혼했어요. 얼마 전 제게 와서 죽고 싶다 하더군요. 저도 오랜만이었어요. 리미가 결혼 이후에는 통 소식이 없었거든요. 결혼식도 후다닥 끝냈었죠. 리미가 아무 앞에서나 울지 않는다는 것 아시죠? 제 앞에서 울더군요. 많이 약해졌어요. 안부를 대신 전해 달래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리미가 내일 시네하우스 2관에서 3회 영화를 본다더군요.
가혜로부터 리미의 소식을 들으니 새삼 옛정이 샘솟는 것은 나도 뜻밖이었다. 떠난 이 잡지 않는다는 통속을 너무 믿었던 탓일까. 누구나 자기 편의대로 통속을 사용했다가 나중에 제 꼴에 자기 꼴이 팔려서 패대기를 친다는 것을 깜박한 모양이다. 시대가 나날이 무덤덤해져 그러하리라 재빨리 정당화를 했다. 아마 나도 리미 말마따나 모더니즘을 혐오할 지도 모르겠다고. 아무튼 자존심 강한 리미다운 발상이었다. 잠시 생각을 접어두기로 하고 나는 접속을 하였다.
편지가 한 통 도착해 있었다. 얼굴 본 지는 한 번도 없으나 게시판 등으로 6개월 가까이 글발을 익혀온 juglae였다.
발신일시 : 97/08/24 23:00
발 신 인 : 나애희 (juglae )
수신/참조: 수신
제 목 : 쑥수러움을 보냅니다
술이 땡겨요 ^ ㅡ ^.
내일 술먹을래여?
사람 만나는 걸 귀찮아 한다는 걸 알지만,
시간되시면 오세용~
인사동 <섬>에서 4시에 봅세당당당
juglae
웬 일일까. 평소 죽어라고 얼굴을 비치길 싫어하더니. 가만 있자. 내일 몇 시라고?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평소처럼 생각나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가 갑자기 모든 것이 흐트러졌다.
- 가만 있자. 내일 상영 시각이?
"그때 금발과 푸른 눈매가 아름다운 여대생이 다행히 도와주었다. 식당칸에서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하다 김종화를 발견한 것이었다. 여대생의 도움으로 김종화는 이 기차가 라이프찌히로 직행으로 가며,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내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차량마다 행선지가 달라 차량 출입문 외부 하단이나 측면, 혹은 내부 벽에 부착된 표시가 있다. 김종화는 함부르크에서 기차에 오를 때 이 표식을 확인하였지만 흡연석 콤파트먼트를 찾아다니다 라이프찌히행 기차로 바꿔 탄 것이었다. 식당칸 의자에 앉아 한숨을 돌렸다. 젠장할. 김종화는 엽서를 찢어버렸다."
리미를 뒤쫓아가야 한다. 리미를 놓쳐서는 안 돼. 나는 허겁지겁 일어나 밖으로 뛰쳐 나갔다. 봉원동 산마루에 스모그로 흐릿한 보름달이 떠 있었다. 리미가 서 있었다. 나는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 엽서를 보냈어. 네가 보고 싶었어. 네가 결혼했다는 걸 알고 내가 얼마나 절망했을 것 같아. 그런데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찾아와... 나를...
리미는 차갑게 웃고만 있었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가을 바람이 제법 살갗을 스쳐 지나갔다. 야심한 밤까지 도서관에서 고시 공부하고 돌아오는 듯한 학생 한 명이 우리를 힐끗 보더니 지나갔다.
- 언제야? 눈치챈 게?
- 응. 네가 박수를 칠 때 어렴풋이... 하지만 잘 몰랐지. 그러다 너랑 손잡고 오다가... 너무나 아름다운 밤이지만 누군가는 고통에 못 이겨 죽어가고 있겠지 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알았어. 하지만 당황했지. 설마 juglae가 당신이었을 줄은. 접속을 하고 juglae와 세이를 하고 나서야 알았어. 당신들이 나를 멋지게 속였군. 가혜 맞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당신 이야기를 소재로 통신에 올렸는데... 하지만 부끄럽지는 않아. 당신을 사랑하니까.
- 가혜와 내기를 했어. 통신에만 존재한다는 당신이 정말 그런가 하고. 예전의 당신은 거짓말을 서투르게 했는데 소설가가 된 지금은 아니군. 결국 내 삶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어. 정말 끝장이군.
- 그래, 나도 죽을 준비가 되었어.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이 없어. 너무나 무의미해. 이 땅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무의미해졌어.
- 아직도 마르크스야?
- 응. 마르크스야. 그래서 거짓말해. 하지만 여전히 까뮈는 마르크스에 속해. 넌 나를 바꿀 수 있었지만 역사는 바꾸지 못했잖아?
- 결혼이란 걸 해보고 싶었어. 변변한 남자가 없었지만 그때 날 따라다닌 남자가 있었지. 결혼했어. 어느날 남편에게 자살하자고 했더니 비웃더라. 남편은 내가 오르가슴을 못 느끼는 걸 전혀 몰라. 자기만 알지. 너랑 달랐어. 너는 그처럼 비웃지 않고 자기만 아는 인간도 아니니까. 그래서 이혼하고 통신에서 너를 찾았지. 넌 무의미해졌어도 나이를 먹지 않았어.
- 너는 훨씬 야위어졌구나. 나이도 먹어 보여. 하지만 난 널 알 수 있어. 넌 적과 흑에서 머리통을 붙잡고 흐느끼는 마틸드라구.
- 우리..................이젠 죽자.
"저항할 수 없었다. 이런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에 김종화가 견지하는 임의규칙이 있었다. 신중한 의견과 덜 신중한 의견이 쉽게 결정되지 않고 맞부딪칠 때 덜 신중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나는 리미의 손길에 이끌려 자취방으로 가서 리미와 함께 누웠다. 그리고 십대 소녀들이 상용하는 뻔한 수법으로 우리는 연필 깎는 칼로 서로의 동맥을 끊었다.
- 리미 알아? 나 이유 많게 죽어 가는 거. 그래도 나 열심히 하려고 했어.
- 쿡. 바보.
리미는 아주 천천히 내 입술을 향해 입맞춤을 했다. 강렬한 흡입력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아. 블랙홀이 내 앞에 있다면 이런 것일 테지.
"김종화는 체르니셰프스키의 말을 떠올리며, 함부르크에서 베를린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영국 국립 미술관에서 산, Paul Delaroche의 The Execution of Lady Jane Grey 유화를 복사한 엽서에 리미에게 보내는 글을 쓰고 있다."
리미만 죽었다. 유일하게 통신 바깥으로 통하는 연결끈이었던 민기가 평소처럼 함께 술을 먹자고 소주를 사들고 자취방을 찾았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119 긴급구조대가 와서 긴급 후송되었다. 그런데 리미는 무슨 생각인지 나를 살려 주었다. 아직까지 그것이 의문이다.
즈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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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드라 ・ 2004. 7. 16. 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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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에서 즈므로 제목을 바꾸었습니다. 상당 부분 개작했거든요.
이번 글에서는 일러스트를 캔디맨님 작품을 주로 하였습니다.
따로 출처를 밝히지 않은 그림은 캔디맨님의 작품입니다.
캔디맨님 블로그 주소는 http://blog.naver.com/candyman577.do
아임 PROBLEM ; 즈므
인드라
9.도깨비불(Irrlicht)
깊은 바위 틈에서 도깨비불이 나를 유혹하네
방황에는 익숙해 여기서도 빠져 나겠지
길은 잃고 헤매도 가다보면 길은 뚫린다네
우리들의 슬픔도 기쁨도 도깨비불의 장난일 따름
격류가 흐르던 곳 이제는 말라 그곳으로 나는 헤매네
강물이 바다로 흐르듯이 내 슬픔에도 끝장이 나겠지
- 슈베르트의 겨울나그네 중에서
<출처 : http://www.sungeo.com/bbs/schbrt/sch-winter.htm>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예지 능력이 뛰어났던 한 아이가 있었다. 가령 길을 가다 처음 본 어떤 행인과 마주쳤는데 내일 교통 사고로 죽을 듯한 예감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 행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으나 그는 이러한 초능력으로 남들이 버거워하는 대학 입시에도 보란 듯이 합격하여 서울대에 들어갔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일류 기업에 들어가 기획 일을 보았고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최연소 이사가 되었고 마침내 슈퍼모델 뺨치는 늘씬한 여성과 결혼을 했다. 그와 결혼한 여성이 똑똑함이 늘씬함을 무색하게 하는 지적인 여성이었기에 그를 아는 많은 남자들은 수천 년부터 해왔던 말을 되풀이하였다.
- 신은 역시 불공평해.
그들 부부는 여성지에 <이 부부가 사는 법>이라고 소개되어 이 시대에 사람들이 본 받아야 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모범이 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행복한 결혼 생활이 일 년이 채 지나기도 전인 어느 날. 뜻밖에도 그의 아내가 그에게 동반 자살을 요구했고, 그는 어이없어했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의 초월적 영감을 벗어나는 일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녀를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 문제가 뭐야? 우리에게 뭐가 부족해서 자살한다 말이야.
- 문제가 없다는 게 문제야. 우린 문제 있어.
- 도저히 이해할 수 없군. 너라는 여자란...
- 우린 처음부터 서로를 이해할 처지가 아니었어.
그는 처음에 강력 반대했지만 그녀의 고집을 꺾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이혼했다. 그는 처음으로 세상의 쓴 맛을 보았고 아무도 그를 뭐라 하지 않는데 모두가 그를 나무라는 것만 같았다. 물론 등 뒤에서 그를 모함하는 이들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 바람을 피우다 걸린 것이 틀림없어.
- 내가 처음 볼 때부터 알아봤다니까.
- 짜식이 시건방지게 선배들을 무시하더니만 깨소금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말이 아무런 상처가 될 수 없었다. 이혼 전에도 그런 시시한 일들이 없었던 것이 아니니까. 그가 헤어날 수 없을 만큼 절망에 빠진 것은 도대체 자기에게 문제가 없는데 왜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는가 하는 점이었다.
일찌감치 세례를 받았던 그가 성당에 가서 기도도 드리고 고해성사도 해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는 점차 의기소침해지며 대인관계를 기피하게 되었고, 처음으로 자신만의 세계에 깊이 빠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증세가 심해졌다. 급기야 몸이 허하기가 이루 말 할 수 없게 되자 꿈에서까지 그의 혼란이 계속되었다. 주변 친지들이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으나 의사도 마음의 상처가 큰 것 같으니 안정을 취하라는 투의 말 이외에는 뾰족한 처방을 내리지 못했다. 결국 이를 보다 못한 그의 가장 친한 친구가 나섰다. 그 친구는 고교, 대학 동기 동창이자 기자였는데 기이한 것을 평소 좋아했다. 그가 친구의 문병을 와서는 불쑥 이런 말을 하더니 그를 막무가내로 점쟁이에게 끌고 간 것이다.
- 내가 취재하다 알게 된 도통한 사람이거든. 무명을 고집하기에 일반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그를 아는 몇몇 사람들은 그를 절대적으로 신임해. 나도 처음에는 사기가 아닌가 생각했는데 직접 만나 보니 아니었어. 알고 보니 삼대째 내려오는 무속 가문의 인텔리 출신이야. 그 사람을 만나면 뭔가 있지 않겠어?
그가 친구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서울 근교의 어느 낡고 초라한 가옥이었다. 시중을 드는 듯한 삼십대 여인의 안내를 받아 그들이 두 시간을 꼬박 기다리니 개량한복 차림의 도인이 나타났다. 도인은 키도 작달만하고 꾀죄죄한 데다가 햇볕에 심하게 그을린 듯 새까만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가 미리 인텔리 출신이라고 말하지 않았던들 전직이 노가다라고 추측했으리라 생각했다. 기가 허해지고 나서는 그의 남다른 능력이 거의 발휘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런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기를 읽을 수는 있었는데 그에게는 그런 기를 읽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도인은 그를 보더니 잠시 생각한 뒤에 친구에게 잠시 비켜달라 말했다. 친구가 물러나니 도인이 말했다.
- 신열을 앓고 있는 것이외다. 다른 도리가 없소. 당신 머리 위에 엄청난 영향을 가진 귀신이 있소. 당신은 이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오. 삼대째 내려오는 나도 다른 무속인처럼 피하려 어린 시절 이 땅에서 도망쳐 미국에 갔었으나 소용없는 일이었소.
그는 가옥에서 나와 곧장 집으로 가더니 그후로 사람들과 접촉을 피하고 식음을 전폐하였다. 궁금해하는 친구는 물론 부모에게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갑작스레 자취를 감추었다. 그 사건 이후 삼년이 지날 즈음 귀기를 떨치고 어느 산사의 평범한 승으로 잘 지내고 있다는 소식과 함께 무정하게도 속세와 인연을 끊었으니 과거의 연에 연연하지 말라는 말이 가족에게 전해졌다. 그의 부모가 수소문하여 몇 번 그를 찾아갔으나 예의바른 표정으로 매정하게 만나기를 거절했고, 그 뒤로 부모도 체념했다고 한다.
내가 그를 안 것은 리미 때문이다.
처음에는 등단만 하면 다 될 줄 알았건만 나도 반짝하는 하루살이 신세일 줄을 꿈에도 몰랐다. 고정독자가 일만이네, 이만이네 하는 작가들에게 밀려 책 한 권 내보지 못한 내 원고들이 출판사에서 썩어가고 있음에도 나는 능력이 없는 놈이 성질을 낸다 할까 싶어 겉으로만 자신만만한 척 예술 타령을 주절거렸지만 속으로는 대박터지기를 간구하는 속물로 타락한 지 오래된 위인이다. 무엇보다 문학 평론가 민기에 대한 질투심이 컸다. 어느 날 그와 평소처럼 술을 먹다가 발리로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던 것이 화근이었다. 내가 말끝마다 발리, 빨리 가고 싶다, 하면서 그간 통신 게시판을 싸돌아다니며 얻은 발리에 관한 지식을 자랑하였던 셈이다. 게다가 포르노 게임이라는 잡담 글로 멋진 여인과 연애하는 이야기를 하였던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는 잠자코 듣기만 하고 술만 먹던 민기가 얼마 가지 않아 연락도 없이 발리를 다녀온 것이다. 이럴 수가. 그뿐만이 아니다. 멋들어진 발리 기행문까지 써서 신문에 연재하기까지 한 것이다. 그 자식을 연애지상주의자로만 알았지, 이렇듯 발빠른 현세주의자일지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 자식이 그간 나 같은 위인을 만나왔던 것도 결국 소재 찾기 이용 대상이었더란 말인가. 배신감이 느껴져서 삼일 밤낮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내 성격 탓에 겉으로는 여전히 그에게 웃는 낯으로 대했다.
어쩌랴. 따지고 보자면, 세속에 어두운 내 잘못인 것을. 내가 발리에서 아르토와 고갱의 삶을 떠올렸다면, 그는 칼럼니스트의 삶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르토와 고갱보다는 칼럼니스트가 안정적인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얼굴에 철판깔기로 자자한 그도 내 얼굴 보기가 다소 민망했던지,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 너, 만일 청와대에서 너를 부르면 가겠니?
뜬금없이 물어보는 그의 말에 나는 평소처럼 심각하면서도 신중하게 간신히 답변했다. 왜냐하면 지금까지는 분명 아니지만 앞으로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당장의 청와대가 아니라 앞으로의 청와대. 그 누구가 정권을 잡아도?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아니.
그러자 그가 말했다.
- 그래, 그것이 너와 나의 차이야. 나는 당장 부르면 갈 것이야.
나는 그의 태도가 부럽지 않을 수 없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백날 현실 운운한들 나는 고작 이상주의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면 그는 어떠한가. 칼럼니스트라는 직함을 발판으로 방송 사회자로도 나섰고, 또한 함께 사회를 보았던 모든 여성 아나운서들의 꿈이 되었을 만큼 그의 말발에 다들 녹았다고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문명시민연대라는 시민단체에서 활약하여 인지도를 지속적으로 넓히는 것이었다.
- 민기야. 문명시민단체하면 뭐가 좋아?
- 별 거 없어. 이런 것도 좀 해주어야 교수가 되거든. 아니면 원장 자리 하나 건질 수도 있고.
역시 그는 마당발이었다. 나는 문학평론가가 상아탑 속에서 오래된 책더미 속에서 치열한 사색을 거듭해야 하는 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던 셈이다. 여기저기 얼굴 내밀어야 하고, 별 일 아니더라도 이름 내세울 데가 있으면 반드시 내세워야 한다고 했다. 나는 결혼식이다, 장례식이다 이런 것에 질색하는 편이지만, 그에게는 그것이 문학이고, 참여였던 셈이다. 그러자 더더욱 나는 참여란 말이 싫어졌다. 하지만 민기의 말만은 언제나 기가 막힐 정도로 나를 탄복하게 하였다.
- 그래도 나는 혁명의 자식이다. 혁명을 지킬 수가 있다면 그 무엇이든 마다하겠느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그의 말이 맞다. 하지만 그놈의 실천. 이미 여러 번 다른 사람들이 써먹은 것이 아닌가. 국회의원 뱃지처럼 말이다. 뻔히 보이는 수작을 그처럼 멋진 말로 포장하는 이들이 어디 민기 뿐이랴. 그래, 내가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그나마 남아 있는 알량한 양심이라는 것 때문일 것이다. 아니다, 양심이라니. 양심이라는 것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문제는 배포일 것이다. 사기를 쳐도 오히려 큰 소리를 땅땅 쳐대는 배포 말이다.
하여, 나는 그 배포를 키우기 위해서라도 어디든 잠시 떠나고 싶었다. 하지만 돈이 없으니 남들처럼 해외로 가지를 못하니 동해안으로 떠났던 것이다. 동해안에서 밤바다를 보며 생선회나 먹자고 한 것이었다. 그런다고 배포가 커지겠냐 싶지만 소심하고, 별 볼 일이 없는 작가의 마인드란 고작 이런 수준이다. 그러다가 문득 발견한 것이 즈므였다.
즈므?
즈므라니... ㅈ과 ㅁ밑에 마치 밑줄친 것처럼 즈므라니...
아아, 나는 고작 소설가였을 뿐이다. 출세하고자 배포를 키우려 동해안으로 떠났다가 즈므라는 도로 표지판 지명을 보는 순간 곧바로 다시 서울로 돌아와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미친 듯이. 나는 즈므에 가지 않았다. 즈므가 어떤 곳인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인지 모른다. 이것이 발리와 즈므의 결정적인 차이이다.
그리하여 나는 즈므로 가는 길이란 가제로 이 출판사 저 출판사로 사정하여 간신히 출판 가능성을 타진받고 선수금을 받아 구상에 머무르던 장편소설을 완성시키다 리미와 그를 등장시킨 것이다. ㅈ에서는 중을 연상하였고 ㅁ에서는 리미를 떠올렸으니...
사실 리미는 요즘 나오는 세태소설에 나오는 여성들과 비교하면 거의 다를 바 없는 여성이다. 적당히 폼이 나는 습관을 종교로 가지고 있고, 만만한 위인을 씹어대어 똑똑함을 과시하는 알음병이 있고, 무엇보다 멋진 자살을 꿈꾸는 그저 그런 인물을 약간 덧칠했을 뿐인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묘사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날 상영된 영화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영화가 끝나고 모두 일어서서 나갈 때까지 리미가 앉아 있었다는 것만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엔딩 타이틀이 다 올라간 뒤에야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다 같은 줄의 리미를 발견한 것이다. 리미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분명 졸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었으니까. 나는 반대편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리미가 눈을 뜰 때까지 옆에 서 있었다. 한참 지났을까? 리미가 박수를 쳤다. 그러더니 나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어나 나가는 것이었다. 재미있지 않은가. 나는 웃었다. 호기심이 일었다. "
이런 여성들이 천지에 깔린 게 사실이지만 소설가가 달리 소설가인가. 조금 포장하면 독특해지는 법이다.
"리미는 내 앞에서 잘 울었다. 하지만 술을 마신 뒤 울지는 않았다. 술김에 우는 여자란 여자로서의 자격이 없고, 남자에게 강간당해도 할 말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리미는 격식을 갖추고 울어야 한다고 믿는 묘한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처럼 옆에 있으면 리미는 하염없이 울었다. 언제인가는 아무 말도 없이 5 시간 내내 운 적이 있었다. 그러한 때 내가 만일 담배를 핀다든지 딴전을 핀다면 의례에 벗어난 것이므로 리미는 일어나 가 버렸다. 그럼에도 리미는 나를 좋아했다. 나 이외에는 리미를 힐난하는 사람이 주위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를 묘사하기 위해서는 그녀만의 어투라고 생각되어지는 것을 개발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개그계에서 유행어 만들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나 소설가가 하는 것이나 진배없다는 점이다.
- 바보. 그럼 뭐가 되고 싶은 거야.
- 아무 것도 없어. 내일 당장 죽어도 상관없어. 하지만 자살은 안 해.
- 농담은 아니겠지?
- 너 같으면 이런 걸로 농담할 심정이겠니?
- 맙소사. 끝장이군.
리미의 말에는 습관처럼 <끝장이군>이 따라다녔다. 무엇이든지 결론은 <끝장이군>이었다."
그리고 몇 가지 대사들을 읊조려야 했다. 한국 최대 시장이랄 수 있는 십대, 이십대 여성 독자들을 겨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민기나 출판사 사장들이 내게 참고하라고 던진 몇몇 책들. 그들은 무언으로 내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듯싶었다.
- 중요한 건 너의 상상력이 아니야. 그들의 상상력이지.
"리미는 늘 죽고 싶어했다. 그런 친구들의 표지라 할 수 있는 손목의 면도날 자국이 리미 또한 있었다.
- 왜 웃어?
- 웃기잖아. 이 땅의 너 같은 애들이 모두 손목에 반창고하고 있을 생각을 하니."
이렇게 쓰고 보니 리미를 비하한 듯하여 마음이 편치 못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만든 리미인데... 어느덧 나는 리미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 모더니즘은 형편없어. 고전의 숭고함을 다 망쳤거든.
- 가령?
- 당신이 하고 있는 컴퓨터 통신 따위들이지."
써놓고 보니 그럴 듯했다. 저런 여성이 있다면 정말 이 세상이 살만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또한 내 생각일 뿐이지. 독자의 생각이란 또 다르지 않을까? 어찌 되었든 나는 열심히 노력했다.
"- 리미. 알아? 나 이유 많게 죽어 가는 거. 그래도 나 열심히 하려고 했어.
- 쿡. 바보. "
사실 이런 말을 구사할 여성을 주위에서 찾는다는 것은 무척 어려운 일이고 이런 인물을 현실에서 찾는다는 것은 매우 우스운 일일 것이다. 어디까지나 소설가의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이기에 매력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가물에 콩나듯 없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여성이 나 같은 위인과 만날 인연이나 있겠는가 말이다. 행여나 내가 만일 그런 여성을 만난다면 옛날 이야기처럼 끝이 날 것이 틀림이 없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인을 찾아 결혼하려던 젊은이가 길을 떠나 드디어 그녀를 만났는데 그녀 말이 자신도 세상에서 가장 멋진 남자를 찾고 있더라는 이야기 말이다. 아마 그녀가 나를 만나면 보자마자 찰 것이 분명한 이상 나는 소심한 인간답게 소설 속에서 자족해야했다. 현실에서 기대하지 않았기에 글쓰기에 욕망을 마음껏 탕진하여 매진할 수 있었고 등단까지 했던 것이다. 문단 정치를 싫어하기에 회식 자리를 가급적 피하지만 어쩌다 만나는 동료 작가들 이야기도 나와 대동소이했다. 그 맛에 우리는 술잔을 말없이 기울이다 새벽을 맞이한 것이 한두번이었던가.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남들이 보기에 한심스러울지 몰라도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온갖 자료들을 밤새워 검토하며 남들이 부러워하는 매력적인 리미를 만들었다. 다른 한편 내 소설인 만큼 내 멋대로 리미가 내게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다. 가학적인 취미가 아닐 수 없음을 고백한다.
"이 육시랄 년아. 너 같은 년은 죽어야 해. 씨발 년.
- 아음, 좋아. 더 해줘.
- 쌍년, 찢어진 입이라고 그만 더러운 주둥아리 닥쳐.
- 으으응. 좀 더. 좀 더.
- 네 좃물을 모조리 빨아먹을 테다, 이녀어으으으. 이이이 조가트으은... 헉!"
나는 일하는 도중에 자료를 뽑고 여가선용도 하는 목적으로 통신을 하고는 했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내심 기대한 바가 컸었다. 사실 내가 통신을 시작했던 것은 무슨 커다란 대의가 있다기 보다 글 이외에는 나를 알 수 없으니 여자를 잘 꼬셔서 멋진 여자랑 만나 결혼하겠다는 내 숙원을 풀까 해서였다. 첫인상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나 같은 삼류작가가 현실세계에서 아무런 지위도 차지하지 않는다는 점이 뼈저리게 고통스러웠다. 그러다가 나는 내가 가진 경쟁력이라고는 썰푸는 것밖에 없는데 이를 가장 극대화할 수 있는 매체가 통신이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통신은 쌍방향이라서 기존 매체가 주지 못하는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가령 독자와의 만남이란 얼마나 짜릿한가. 어쩌다 전화오는 미저리들의 공포에 시달리는 문제가 있기는 하겠지만 마음에 들면 대화하다 갈 데까지 가보기도 하니 좋지 않겠는가. 동료 작가들이 술 먹으면서 무용담을 늘어 놓을 때 속으로 작심한 바가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 미저리조차 하나 구하지 못했지만 말이야, 나라고 너희들보다 못 할까.
그러나 못했다. 여자들이 별 볼 일 없는 삼류 작가를 귀신 같이 알아내는 것이었다.
"통신세계라고 별다른 것이 아니다. 단지 그간 쉬쉬하고 있기만 했던 우리들의 숨겨진 다른 모습이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일 뿐인데 바로 그러한 이유로 놀라는 것이다. 자신만 그러한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많은 이들이 자신과 비슷하다는 점을 뒤늦게나마 발견한 것이다. 그나마 충격을 완화시킬 수 있었던 데는 텍스트만 지원하는 미흡한 통신 기술 탓일 것이다. 만일 팔십년대 말부터 고속 인터넷망이 깔렸다면 어떠했을까?
흔히 온라인에서 활달한 친구들이 오프라인에서 만나면 오히려 수줍은 경우가 많은데 그간 이 사회가 자아를 얼마나 억압해왔는지 보여주는 전형이다. 그들은 무엇보다 자유를 갈구했다. 그러나 열 명이면 열 개의 자유였다. 그런 그들에게 팔십년대적 분위기에 큰 영향을 끼친 마르크스란 단지 신기한 사람이고, 마르크스를 말한다는 건 리바이스 청바지랑 비슷한 것이었다. 더구나 복고풍이 불자 옛것에 대한 애착이야말로 자유의 참 맛을 아는 사람으로 간주되기까지 하였다. 리미 또한 통신만 하지 않을 따름이지 다를 바가 없었다."
문학평론가 민기가 이런 내 속사정을 간파하고 내게 말할 때는 참담한 심정이었다.
- 너, 정말 불쌍하게 사는구나. 그러지 말고 일단 내가 문학상 담당하는 분들에게 네 이야기를 넣어보마. 도움이 될 지, 안 될 지 모르지만 말이야. 알다시피 인간성이 좋아야 하거든. 그게 마음에 걸려. 네 인간성이 자타가 공인하는 황무지잖아.
그랬다. 틈만 나면 아무에게나 비판을 해대니 그 누가 나를 좋아할까?
"리미는 한번도 오르가슴을 못 느낀 여성이었다. 그럼에도 리미는 마치 그것을 느끼는 양 소리지르고 가쁜 숨을 쉬었다. 그리고 틈날 때마다 섹스하기를 원했다. 리미는 자신이 느끼고 있다고 믿었고, 나는 그때마다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리미는 내 말을 무시했다.
- 왜 내 말을 무시하지?
- 넌 마르크스를 믿잖아?
- 그게 어때서?
- 믿는다는 것만큼 믿지 못할 게 없는 거야. 난 그래서 마르크스가 싫어."
통신세계도 현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젠장할, 있는 놈은 계속 있고 없는 놈은 끝까지 없다. 나는 억울하기 그지 없었다. 좀 이름 났다고 뻐기는 동료들도 얄미운 판에 여자들도 보는 눈이 삐어서 나를 박대하니 너무나 분통스러웠다. 그러던 가운데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르크스가 문제였다. 나도 팔십년대 학번이므로 민주화이니 하는 것에 잠시 고통스러워 했었다. 잠시 소설가로서의 길을 그만 두고 생산 현장으로 달려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체질이 아니어서인지 할 수 없어서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조심스럽게 노동소설이라고 내놓았는데 그 어떤 비평가도 내 작품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그 중에 가장 나은 평가가 이러한 것이었다.
- 아무리 우리 시대가 타락하여 모든 것이 피폐해질 지라도 문학의 길만은 그러하지 않았으면 싶다. 심사에 오른 작품 중에는 우리가 함께 걸어가지 말아야 할 길을 '날것'으로 표출해 낸 작품이 있어 심사위원들이 하나 같이 안타까움을 느꼈다. 본인의 명예를 생각하여 직접적인 거명을 하지는 않는다.
그게 바로 <즈므로 가는 길>이란 내 작품을 두고 한 것이었다. 나이트에서 놀기 좋아하고 씹질을 잘 하는 여자가 날라리 세계에서 쫓겨나 할 수 없이 공장에 취직하고 끼를 발휘하여 노조위원장도 맡게 되지만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날라리 세상을 그리워한다는 것이 내용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정말 잘 된 작품이라고 여겨 가장 진보적이라고 알려진 문학지에 투고한 것이었는데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리얼리즘이 맨날 다음과 같은 식이어야 하겠는가 말이다.
"- 입술의 포옹으로 내 간절함이 날아가면 어쩌죠?
- 그땐 입술의 포옹이 영원하기를 간구해야지.
- 그래도...읍!!!"
나는 그들 도식대로 글을 쓰자면 위와 같은 글쓰기밖에 묘사할 수 없었다. 상기한 저질스런 표현보다 다음과 같은 표현이 얼마나 더 감칠 맛이 나는가 이 말이다.
"우리는 여관에서 첫낮을 보냈다. 우리는 에어콘이 작동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대담하게 창문도 활짝 열고, 커튼도 열어 젖히고, 옷을 훌렁 벗고, 서로의 성기를 보며 웃었다.
- 너무 못 생겼어.
- 너는 어떻고.
- 그러니까 이리와. 나까지 외면하면 안 되잖아."
그러나 나는 역시 소심한 삼류 소설가인 모양이다. 시대에 물음을 던질 수 있는 작가야말로 교과서에 기록되는 작가 자격이 있다면 나는 탈락할 수밖에 없다. 정말 용기있게 자기 소신을 밝혀 감방가는 일부 동료 소설가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나 같은 위인은 겁이 덜컥 나서 이것만으로 버틸 재간이 없어 기존 어법을 다시 끌어들일 수밖에 없었다. 가령 에로 비디오 <빨간 보자기>에서 차용하는 수법이다.
"이유 없이 죽기가 서로의 유일한 화제였다. 나는 까뮈가 마르크스에 속한다고 주장했고 리미는 마르크스가 까뮈의 부속품이라고 항변했다. 하지만 그녀는 사르트르를 혐오하는 단일한 대오와 까뮈가 역사에 별로 기여한 바가 없다는 이유로 내 주장에 승복했다. 나는 당시 까다로운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상대가 여성일지라도 조그마한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고, 가차없는 비판을 해대고는 하였다.
- 너의 이데올로기는 뭐야."
잘 모르겠지만, 이런 것이 쿨한 것이라고 한다.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 주절주절 써내려가기 보다 독자들은 한줄로 폼나게 요약이 되는 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요즘 잘 뜨고 있는 서간문을 동원해서 쿨섹스, 쿨재즈가 유행한다니 쿨도 동원하고 나도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 못한 <무의미>를 언급하는 식으로 마무리질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이번에 쓰는 <즈므로 가는 길>이란 장편 소설의 전부이다.
"리미에게
그림 위에 그림을 그리고
글 위에 글을 쓰고
이름 위에 이름을 남기지만
솟구치는 건
너를 향한 그리움뿐
이유없이 사랑하다 죽고 싶어"
그래, 나는 타락했다. 글로 먹고 살려고 했는데 다른 도리가 없지 않은가? 글 자체로 빵이 나오냐? 빵만으로 살 수 없다지만 빵을 우선 먹어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 가혜와 내기를 했어. 통신에만 존재한다는 당신이 정말 그런가 하고. 예전의 당신은 거짓말을 서투르게 했는데 소설가가 된 지금은 아니군. 결국 내 삶이 옳다는 것이 증명되었어. 정말 끝장이군.
- 그래, 나도 죽을 준비가 되었어. 더 이상 이 땅에 미련이 없어. 너무나 무의미해. 이 땅은 여전히 의미가 있는데 사람들이, 내가 무의미해졌어.
- 아직도 마르크스야?
- 응. 마르크스야. 그래서 거짓말해. 하지만 여전히 까뮈는 마르크스에 속해. 넌 나를 바꿀 수 있었지만 역사는 바꾸지 못했잖아?
- 결혼이란 걸 해보고 싶었어. 변변한 남자가 없었지만 그때 날 따라다닌 남자가 있었지. 결혼했어. 어느날 남편에게 자살하자고 했더니 비웃더라. 남편은 내가 오르가슴을 못 느끼는 걸 전혀 몰라. 자기만 알지. 너랑 달랐어. 너는 그처럼 비웃지 않고 자기만 아는 인간도 아니니까. 그래서 이혼하고 통신에서 너를 찾았지. 넌 무의미해졌어도 나이를 먹지 않았어.
- 너는 훨씬 야위어졌구나. 나이도 먹어 보여. 하지만 난 널 알 수 있어. 넌 적과 흑에서 머리통을 붙잡고 흐느끼는 마틸드라구.
- 우리..................이젠 죽자."
작가로서의 자질 부족인 점을 자인하는 대목도 있다.
"십대 소녀들이 상용하는 뻔한 수법으로 우리는 연필 깎는 칼로 서로의 동맥을 끊었다.
- 리미 알아? 나 이유 많게 죽어 가는 거. 그래도 나 열심히 하려고 했어.
- 쿡. 바보.
리미는 아주 천천히 내 입술을 향해 입맞춤을 했다. 강렬한 흡입력이 점차 희미해지고 있었다. 아아. 블랙홀이 내 앞에 있다면 이런 것일 테지."
어떻게 죽여야 할까 고민하다가 썼는데 쓰고 보니 그럴 듯해 보였다. 특히 <연필깎는 칼>이란 통신 문학이냐, 사이버 문학이냐 하는 논쟁에 무언인가 의미를 줄 것 같이 보여졌다. 그러나 이는 순전히 내 착각에 불과했다. 팔릴 것인가 미리 봐주겠다 하여 보여주었더니 문학평론가 민기가 그간 쓴 것을 읽어 보더니 말했다.
- 그게 이론가들과 예술가들의 근본적인 인식차야.
나는 연이어 <블랙홀>이라는 묘사가 상상력 논쟁에 종지부를 찍을 상징성이 있지 않느냐 우겼다. 하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의 냉소였다.
- 넌 아직까지 만화 상상력 따위 유치한 것이 통하리라 생각하니? 이제 제발 철 좀 들어라. 세상의 엄혹함을 똑바로 봐.
결국 나는 출판사에 약속한 날까지 장편소설을 끝낼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리미 때문이다. 갑자기 리미에 대해 욕을 하고 싶어졌다.
"넌 뭐냐, 넌 뭐냐. 죽었다고? 사기 치지 마. 좆같은 놈, 백수인 주제에, 내 좆이나 빨아라. 네가 뭐라도 돼? 까불지 마.넌 뭐가 좋다고 무너지는 내 마음을 안다고 소리쳐. 니가 뭔데 날 괴롭게 해. 유치한 새끼. 꺼져 버려. 집어치워. 너 까짓 게. 씨발, 튀는 놈들 많아 좋네.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제발, 사라져 줘. 눈물 나와. 울지 마, 씨발 놈아. 무수한 말들이, 단지 말뿐이지만 어느덧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동반자살로 끝내면 소설에서조차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살 맛이 나지 않았다.
"리미만 죽었다. 유일하게 통신 바깥으로 통하는 연결끈이었던 민기가 평소처럼 함께 술을 먹자고 소주를 사들고 자취방을 찾았다가 우리를 발견한 것이다. 119 긴급구조대가 와서 긴급 후송되었다. 그런데 리미는 무슨 생각인지 나를 살려 주었다. 아직까지 그것이 의문이다."
의문은 무슨 의문인가. 내가 만든 인물이지만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 더 잔인한 짓을 해도 시원찮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소설은 소설이다. 팔려야 한다면 내 이런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서는 곤란한 일이다. 이럴 때 나는 물음표로 대신하고는 했다. 이것이 혹 시대적 물음이 아닐까. 그러나 평론가들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말을 했는지 나 같은 삼류작가가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미칠 즈음 나는 꿈을 꾸기 시작했는데 꿈 속에서 리미가 나타난 것이다. 한마디로 귀신 같았다. 입에 피 흘리며 나타난 것도 아니고 구미호로 분장해서 나타난 것도 아니고 홀딱 벗고 나타났는데 귀신이라고 나는 단정지었다. 왜냐하면 그후로 계속 나타났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귀신이고 뭐고 섹스해서 모처럼 청소년기의 몽정까지 경험하기도 해서 나쁜 것만은 아니었는데 그게 화근이었다. 내심 꿈꾸기 전에 귀신이 재등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기까지 했었는데 점차 꿈 속으로 내가 빠져드는 것이었다. 인터넷, 휴대폰 중독만 중독이 아니다. 꿈도 중독이 된다. 볼펜으로 불러들인다는 일본산 귀신 장난할 때도 이런 마음일까. 아무튼 나는 날이 갈수록 기가 빠져서 글을 더 이상 쓸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나타난 것이다.
출판사의 독촉 전화를 받고 착잡해진 마음에 담배를 찾는데 없었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동네 구멍가게에 들렸다 오는 길에 그를 만난 것이다.
그는 구멍가게 앞에서 보시중이었다가 나를 예리한 눈초리로 보았다. 나는 신경쓰지 않고 한 보루를 사서 돌아오는데 그가 따라온 것이었다. 짜증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귀신이 날 괴롭히더니 이제 만득이처럼 생긴 땡중까지 날 괴롭히려나.
- 형씨. 내게 볼 일 있으시우?
- 저를 기억하지 못 하나요?
- 처음 뵙는 양반인 듯 한데 실례지만 어디서?
- 당신이 지금 쓰고 있는 소설 서두에 나오잖아요.
이 무슨 헛소리인가. 내 장편소설 내용을 아는 자는 출판사 사장과 친구 민기밖에 모르는데 출판사에서 독촉나온 사람이 분명 아닌데... 수상하기도 하고 미친 놈 같아 보여 상대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려했다.
- 리미는 제 부인이었습니다. 당신이 창조한 또 하나의 인물이지요. 그녀는 삼년 전에 저와 이혼한 뒤 죽었지요. 당신은 지금 <수상하기도 하고 미친 놈 같아 보여 상대하지 않고 집으로 들어가려했다.>는 글을 막 쓰고 있지요? 나는 당신 안에 있음과 동시에 바깥에 존재하는 사람입니다. 당신이 가르침을 주시지 않았는지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말은 다음과 같았다.
나는 유마거사이며 자신은 문수보살이라 했다. 석가모니 생존에 바이살리 성에 유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났고 마음대로 신통력을 부렸으며, 다라니를 얻었으며, 두려움을 여의었으며, 마와 적대자들을 떨쳐낸 자였다. 유마는 세속에 머물면서도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훌쩍 뛰어넘나들어서 자식과 아내와 고용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항상 몸이 청정했으며 주위에 친족들이 들끓어도 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도박이나 주사위 노름을 하는 곳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노름에 빠진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도하기 위해서였고 출세간적인 주문이나 논서에도 해박했지만 오직 불법이 주는 기쁨만을 누리리라 다짐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애욕의 허망함을 보여주고자 창녀촌도 마다하지 않았고 큰 부자였으며 존경받는 대신 중의 하나였고 궁중의 젊은 여인들을 잘 이끌었기에 최고의 내관이기도 했다. 유마가 병을 가장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문병할 사람을 찾는데 모두가 유마의 고매한 품격에 자격없다고 하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문수가 나서 문병을 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처음 듣는 소리였다.
- 그러니 나보고 당신의 터무니없는 말을 믿으라는 것이오?
- 유마거사시여. 이제 시대가 바야흐로 화성에 로켓트를 발사하는 때이옵니다. 저는 단지 세존의 분부를 받고 거사의 가르침을 받으러 왔을 뿐이옵니다.
나는 어느 틈에 내 뒤를 쫓아 내 방까지 들어와 썰을 푸는 이 정신나간 위인을 믿을 도리가 없었다. 이 인간이 독심술을 좀 연구했는지 모른다. 나도 사기친다면 사기치는 직종에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세상이 각박해도 그렇지 삼류 작가를 등칠 생각을 해? 나는 그를 쫓아냈다. 그리고 사온 담배를 빡빡 피면서 요즘 왜 이리 내 주변이 심란한가 생각해 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그렇지. 내가 그 놈 말대로 유마거사인가 뭔가라도 된다면 내게 무슨 능력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하다 못해 내 소설의 인물처럼 혜안이 있어 이쁜 여자랑 결혼했다 이혼하기도 하면 억울하지나 않겠다. 내가 소설 속에 그를 등장시킨 이유는 별 게 아니었다. 내 의도는 리미의 죽음 이후에 장례식에서 그를 처음 만나 그녀의 죽음에 대한 의미를 캐어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인생역정을 산 스님이 이러한 죽음에 어울릴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그는 즉각 퇴장해야 할 등장인물이었다. 그런데 왜 단편에 그를 그렇게 길게 묘사했는가. 근본적으로 내 마음이고 쓰다 보니 글이 술술 풀어지길래 쓴 것이다. 그리고 쓰고 나서 검토할 때 축소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그가 내 앞에 이렇게 무식하게 나타나서 내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니 화가 날 지경이다. 이 글쓰기가 어디까지 갈 지는 나름대로 분명한 목표가 있지만 이제 나 또한 모르겠으니 끝을 어떻게 내어야 한다는 말인가. 이런 것이 글쓰기인가. 그러자 문수보살이라 우기는 그 인간이 다시 나타났다.
- 유마시여. 가르침이 녹슬지 않으셨군요. 감사하옵니다. 글쓰기가 삶이라 여겨지옵니다. 분명한 목표가 있되 끝을 알 수 없음이다. 유마님의 설법이 무궁무진함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습니다.
- 꺼져. 임마.
문수보살이란 놈이 꺼졌다. 정말 신경질이 난다. 내가 미친 것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현실세계라면 어찌 소설 속의 인물이 현실에 등장하고 그 인물이 문수보살을 참칭하고 나타났다 사라질 수 있다는 말인가. 게다가 나는 지금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생각만 해도 글쓰기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황당하지만 너무나 사실적이라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글쓰기가 점차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 심정을 피력하자면 내가 리미야 나타나라 하면 나타날 것 같았다. 시험해 볼까?
ㅛ
- 당신, 아무리 자기 소설이라 해도 나를 너무 박대하는군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나요? 나는 당신을 잊지 못해 저승에 가지 못 하고 꿈 속에서나마 당신을 찾는 것인데 그토록 나를 무시할 줄 몰랐어요. 나는 당신이 꿈 속에서 처음 나를 만나 거리낌없이 사랑을 나누길래 여전히 사랑하는 줄 알았어요. 흑. 이젠 아니군요. 하지만 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이 없다면 나는 살 도리가 없어요.
- 너, 정말 리미 맞니? 그럼 내가 물어보자. 소설 속에서 왜 네가 나를 살렸지? 그걸 답변할 수 있다면 너라고 믿어 주마.
- 당신이 저를 너무나 사랑해서이죠. 당신은 죽음을 선택하는 나를 너무나 측은지심이 일어 제 뜻을 따르기로 한 것이지요. 제가 그 마음을 왜 모르겠어요. 저는 당신 마음만 얻은 것으로도 만족하지요.
- 웃기지 마. 틀렸어. 난 네가 칼로 내 동맥을 자르려 할 때 미묘한 손떨림을 포착했지. 너는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 사실이야. 하지만 죽어가면서도 내마음을 확실히 소유했는지 넌 고민했던 것이야. 그래서 넌 날 살려두기로 한 것이지. 나의 무의미한 삶과 너의 의미 있는 죽음을 내가 죽기 직전까지도 번민하게 말이야.
- 정말 귀신도 못 당하겠군. 그래. 맞아. 하지만 넌 분명히 살고 싶어했어. 네가 내게 달콤한 말로 나를 부르며 이유 많게 죽어 가니 어쩌니 할 때 알아차렸지. 나는 그래서 웃으며 바보라고 했고 말이야. 넌 어째 갈수록 느는 게 거짓말이니. 너무 참말이라 나 같은 거짓말 잘 하는 사람도 속아넘어간다. 아무튼 널 저주할 거야. 내가 널 끝내 살린 건 내가 귀신이 되어서 널 죽을 때까지 괴롭히려 했던 거지. 넌 자살을 해야 해. 내가 널 죽이면 내가 지는 거야. 넌 자살해야 해.
- 싫어. 이 미친 귀신아.
- 너가 자살해야 난 마음 편히 천당가서 행복하게 살 수 있어. 물론 너도 그래.
- 놀고 있네. 이제 나도 깨닫지만 난 유마거사라고. 너, 문수보살이지? 어차피 세존이 살 때 썰 풀어서 같이 민중 착취하고 그랬잖아. 나만 나쁜 놈이라고 하지 마. 세상이 엉망인 게 내 탓이 아니라고. 왜 내가 자살해야 해? 비록 난 그때처럼 역사를 변화시킬 만큼 힘이 없지만 나 살 궁리를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어. 넌 그때나 지금이나 내 한 수 아래이군. 내가 죽어봐라. 그간 내가 썰 풀어 아작난 죽음들이 날 가만 둘 것 같아? 그동안 지옥에서 당한 고통만으로도 충분해. 내가 베드로랑 맹세한 게 뭔데. 우리 세존이든, 예수이든 자신들만 지옥에서 도망쳐서 잘 먹고 잘 사는 꼴을 더 이상 부러워하지 말자. 우리가 행여 세상으로 다시 환생한다면 철저히 신분을 속이고 천세만세 인간으로 살자 그랬어. 베드로가 지금 어디서 뭐 하는지 모르지만 말이야. 너 여전히 석가모니 스파이 노릇하는가 본데 라이프찌히에서도 날 괴롭히고 여기서도 날 괴롭히고... 이제 제발, 너도 정신 차려라. 내가 불쌍하지도 않니?
그가 매우 아름답게 서 있었다. 내가 라이프찌히의 한스를 말할 때는 한스 모습이 되었다가 또 리미를 말할 때는 리미가 되었고 문수보살을 말할 때는 문수보살이 되었다. 심지어 그는 동시에 셋으로 나타나 나를 혼란시켰다.
그가 말했다.
- 세존께서 말씀하셨어. 예전에는 꾀병부려 세를 과시하려는 너를 문병하며 포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이젠 아니라고. 시대는 우리 편이라고. 너는 이제 사멸해야 할 운명이야. 조용히 소멸을 받아들여.
- 싫어. 아무도 나를 어쩌지 못 해.
그러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갑자기 모니터에 냅다 머리를 박았다.
- 이런다고 너네들이 이길 줄 알아?
- 호호. 저는 다만 당신이 고행을 즐기리라고 생각할 따름이옵니다.
- 나는 포기하지 않아. 나는 아임 PROBLEM이야.
- 우리에게는 NO PROBLEM밖에 없어. 번민을 멈추고 죽음을 맞이해.
- 미친.....
나는 죽어간다.
변신 아임 problem
2004. 7. 19. 6:20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4190654
통계보기
http://factory512.com/bzr/part_2.htm
개작 수준이므로 삼류에서 변신으로 바꿉니다.
아울러 아임 problem 연작 가운데 가장 쓰기가 어려웠던 편입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지요.
<토마스 루프 (Thomas Ruff) 출처 :http://blog.naver.com/nabigam/100002690016>
율리시스의 시선 주제곡을 들으시려면 아래 클릭!
☞..율리시즈의 주제
율리시즈 긴 곡이 있는데 그게 없으니
대신 안개 속의 풍경을...
아니라면 맨 밑에 있는 Dagda의 곡을.
『나의 시작은 나의 끝에 있다』
나쁘고 새로운 것에서...
아임 problem ; 변신
인드라
7. 냇물 위에서(Auf dem Flusse)
즐겁게 재잘대며 흘러가던 시냇물이
어쩌면 그렇게도 침묵해 버렸느냐
두껍게 얼어붙은 얼음에 덮여서
싸늘하게 가로누워 모래를 씹는구나
나를 덮은 얼음을 모난 돌로 쪼아
그리운 그 이름과 그 날 그 때를 나는 묻으리
처음 만나던 날을, 이별하던 날을
지금은 부서진 그 날의 가락지를
내 마음아, 너는 이 시내에서 바로 네 모습을 보지 않느냐
겉으로는 얼었으나 밑바닥에는 맑은 물이 끊임없이 넘치는 것을
<출처 : http://www.sungeo.com/bbs/schbrt/sch-winter.htm>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한 추위가 졸다 고개를 푹 수그리다 소스라치게 놀랐는지 잔잔하게 얼어붙은 도시에 겨울 강풍이 세차게 분다. 얼싸안고 음습한 냉기를 녹이는 풍경이 낯설지 않은 서울역이지만 바람이 얇다란 바지자락 밑으로 교묘히 침입하여 불알을 바짝 말리듯 밤기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목을 잔뜩 움추린 채 서성이며 흩어져 있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느 순간에도 순서가 딱 정해 있기 마련이라고 항변하듯 그들은 줄 서 있었다. 개찰구가 열리자 가을걷이가 끝난 논둑을 걸어가듯 손을 호호 부는 아이들이 빨리 집에 가서 언 몸을 뜨끈하게 풀 작정으로 서둘러 무궁화호를 탄다. 아스라한 옛날 사진을 보는 것처럼 사람들이 말없이 짐칸에 가방을 올려 놓고 자기 자리에 앉는다. 내일 신문이요, 오징어 땅콩 있어요. 승무원의 안내 방송. 해묵은 레코드처럼 돌아가는 손님들을 부르는 소리. 마치 빈틈 없이 화면 구성이 잘 된 흑백 영화처럼 열차가 출발한다. 나는 이 영화 어디에 무슨 역할을 맡고 등장하는 인물일까.
엑스트라는 한 커트를 찍기 위해 하루 종일 기다린다. 혹 감독 눈에 뜨일까 싶어 과욕을 부려 보지만 누구 하나 보듬어 주는 이 없다. 실망할 수는 없다. 사치스런 원망보다 주인공들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한 대사 한 동작을 익히는 것. 그들이 주연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기 때문. 하여, 어떤 장면도 중요하지 않겠느냐만 가급적 비중있는 씬에서 엑스트라는 개죽음을 멋지게 당하고 싶어한다. 그래야 눈에 뛸까 싶어서. 하지만 돌아오는 배역이란 아예 없기도 하는 법.
나는 노곤한 피로를 털기 위해 열차 연결통로에서 담배를 문다. 까칠한 연기가 매섭게 눈을 찔러 들어와 신경을 마비시킨다. 개자식들.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다음 날인 1987년 겨울. 나는 부산행 기차에 몸을 맡긴다.
사수대, 교문 돌파, 한열이를 위한 공동창작, 가두투쟁, 지도부에 대한 격렬한 항의, 후보 단일화, 대학로, 백기완, 선거감시단, 노태우 당선...
덜커덩 덜커덩. 기차가 역을 통과할 때마다 거의 고립되다시피 한 내 자신이 뼈저리게 느껴진다. 맹인처럼 길을 걸어도 길은 뻔하다. 미로 따위는 없다. 잠시 미로 같은 길을 헤매이는 듯 싶지만 폐쇄, 또 다른 길도 폐쇄. 모두 막혀 있다. 오로지 단 한 군데만이 연결 통로. 담배처럼 스크럼을 짜고 연기나는 교문으로 걸어가서 콜록거리는 연결 통로.
민기, 그때 너는 옆에서 말없이 이런 나를 지켜 본다. 내가 너를 볼 수 없는 거리에서 너는 나를 보며 언제나 데모하는 내가 부럽다고 속삭인다. 네 가정 형편이 어려워 시위할 짬도 내지 못 하는데 네가 나를 부러워 한다고 내가 그만 둘 수 있을까. 너는 내게 이 땅을 이해할 수 있는 도서 목록을 달라고 말하지만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줄 수 없구나. 너는 열심히 공부해서 부디 네 몫을 꼭 챙기기를 바란다. 그러니 나를 찾지 마라. 내 도서 목록을 잊어라. 나는 지금 고향에 간다. 김영삼조차도 잊은 노태우의 고향 부산으로 간다. 서면 로터리의 수많은 군중이 선택한 고향 부산으로 간다. 피난민들이 가다 가다 멈출 수밖에 없던 부산으로 간다. 왜인들이 조심스레 조선인들을 상대로 물물을 거래한 곳으로 간다. 허리가 부러져도 고향이 있으니 좋아.
막상 가보면 너무나 달라져 있어도 좋지. 또 가도 추억 풍의 훈훈한 바람이 불어서 좋지. 서울에 꼭 붙어 있어야 할 친구여. 나의 고향 가는 강행군에 피로가 엄습할 지라도 슬픈 눈으로 쳐다 보지 마라. 눈물 흐르다 흐르다 말라붙은 자국에서 다시 시작할 터이니 눈물 감추고 웃으면서 나를 보내라. 내 썩어질 눈망울 부릅뜰 때까지 산천과 함께 팍팍하게 썩어가리라. 기차가 대전역에 잠시 정차했다 출발할 즈음에 머리가 띵하면서 쓰러진다. 흐르는 것은 눈물만이 아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모르나 가는 데까지 나도 쓰러져 흐른다.
나는 사막으로 가노라.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리라. 목수일을 하듯 가구점을 내었으며, 나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여성을 거느렸다. 쓸 데 없이 민족해방 운운하는 유대교 청년이여! 이제 삶의 아름다움을 찾았는가? 아직도 모르는가? 아직도 나를 두려워 하느냐, 불쌍한 중생아. 내 너를 그토록 애지중지하였거늘 왜 아직 나를 찾지 않는가. 명함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구나. 꼭 다시 나를 찾아와 구원을 얻어라. 나의 아내들인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여! 나를 뺀 누구와도 간음하지 마라. 나만이 너의 섹스 상대이며, 나만이 너의 구원자이니라. 뱀 같은 남자들을 나는 두들겨 팰 것이니 간음하지 마라! 나만이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느니라.
너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 너를 위해 힘쓰리니 성경 공부하는 나를 방해하지 마라. 속된 세계에서 나의 일을 방해하지 마라. 전화하지 마라. 사적인 일로 선교 활동을 방해하지 마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죽나니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 간음하지 마라, 타락하지 마라. 내가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한 것은 어린 양들을 보살피기 위함이다. 내가 단란주점에 간 것은 어린 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나의 노래를 들어라. 나의 복음을 들어라. 밤낮으로 나는 애를 쓴다. 또 다시 너에게로 간다. 나는 너를 위해 요한처럼 물세례를 주나니 정신을 차려라. 고통을 이겨내라. 말하라. 말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너를 이토록 망친 악마가 누구더냐. 너는 베드로처럼 나를 부정하는구나. 네 본래의 이름을 부정하는구나.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도망가지 마라. 나를 따르라. 여인네가 유대교 랍비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과감히 떠나라. 우상을 거부해라. 여인네를 두고 나는 출도를 한다.
내가 너의 똥까지 받아내면서 너의 모든 더러움을 정화했느니라. 속된 세계에서 벗어나라. 눈을 뜨라. 나를 이끈 동방박사들이 고맙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있었기에 내가 오늘의 내가 있었다. 나의 손. 신의 손. 내 어찌 이 손을 함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더러운 악마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씻어내고 또 씻어내는 세례를 스스로 했느니라. 나의 따뜻한 손으로 너의 고달픈 엉덩이를 어루만져주노라. 악마의 세계에서 여기까지 추적해 와서 미인계로 날 유혹하려는 거짓을 물리치는 나의 굳센 신앙심을 보아라. 저 년이 나를 카메라 뇌물로 현혹시키려는 짓거리에도 의연한 나를 보아라. 나는 악마와 싸워 이겨내었다. 그리하여 나는 동방박사들에게 배웠으나 동방박사를 가르칠 수 있었다. 나는 유대 법당에서 학식을 논하는 자들 판을 뒤엎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밤이 되자 수고로운 나를 위해 여인네가 나의 발을 닦아주는구나. 깨끗이 몸단장하고 들어와라.
나는 신학교에 입교하여 처음에는 숱한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특히 천마리학 모으면 어쩌니 하는 우상숭배에 혹하였다. 학이면 거부할 수 있었는데 박하사탕이래서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꾸짖었다. 아들아! 너, 무엇하고 있느냐. 네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벌을 받아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다. 외디프스가 장님이 되자 비로소 세상의 빛을 발견한다. 여인네가 나를 유혹했다. 여인네들은 왜 나를 유혹하나. 여인네들은 왜 나만 만나면 환장을 하나. 그토록 여인네를 경고하는데 왜 여인네들아, 깨우치지 못하느냐. 왜 나를 무서워하고 멀리 하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여인네는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처럼 자신에게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있다. 여인네는 먼저 하나님 세상에 간다. 나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린다. 그러한 모습에 신도들이 나를 전등으로 비춘다. 내 주위에는 밤에도 광채가 휘날린다.
이브야. 막달라 마리아야. 너 또 그 짓을 하는구나. 언제까지 나한테 사과이니 사탕이니 줄래. 그래도 나는 받지. 그래서 우리는 또 시작하는 거야. 씨발 년아. 그래서 여기가 어딘지 낯설지 않다는 거 아니니. 여기서 왜 "나 어떻게" 를 부르냐고? 대학가요제에 나온 노래인데? 노동자들도 남진이나 나훈아 안 찾고 "나 어떻게" 부를 수도 있지. 씨발, 당시 야유회가면 정치 집회라는 식으로 속된 세계로 논하지 마라. 신학적 세계야말로 진정한 빛의 세계이니, 그림자 세계를 논하지 마라. 이것은 성가이니라. 우리는 성가를 부르며 구원을 찾으려고 하느니라. 내 편안하노라.
정신을 차리니 놀랍게도 나는 종화가 아니라 민기였다. 그렇다. 민기다. 오로지 통신 속에서만 존재하는 종화, 그리고 그와 연결된 유일한 나, 민기. 그리고 내가 도착한 곳은 부산이 아니라 라이프찌히였다. 라이프찌히에 간 것은 종화가 아니라 사실은 나, 민기였던 것이다. 을씨년스러운 도시. 중부유럽의 1997년 4월의 바람은 매서웁다.
나는 고학으로 대학을 마치고 중견 화장품 회사의 홍보 직원이 되었다. 출근하자마자 온갖 신문과 잡지를 구독하고 전화통을 붙잡고 기자들과 하루를 보내야 하는 직업이 남들 보기에는 행복해 보일 지 모른다. 사랑을 잡으세요,따위의 립스틱 사랑을 위해 진정한 사랑을 죽이며 살아간다고 여기니 자책감이 여간하지 않다. 하지만 욕을 먹어도 내 몫인 셈이다. 그러나 무리한 다이어트 끝에 얻은 3주 진단서를 들고 회사에 병가를 내놓았을 때 깜짝 놀라던 상사 얼굴을 잠시 접어 두고 나는 일주일간의 허락된 시간 내에 한스를 만나야 한다. 비싼 항공료도 감수하고 좋다는 관광지 마다하고 초라한 이 도시에 온 이유는 오로지 종화를 만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나는 오랫 동안 헤어져 있던 종화를 통신에서 최근에 해후했고 종화가 그의 소설에서 라이프찌히의 한스를 말했기 때문이다. 종화가 통신을 통해 세상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를 만나러 쐬주병을 들고 그의 자취방에 갔을 때 종화는 라이프찌히에 사는 듯이 보였다. 그리하여 나로서는 라이프찌히에 가지 않는다면 종화를 진정 만났다고 볼 수 없다고 여기게 되었다.
통신에서 그대를 만난 것은 우연이었을까. 내가 그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오아시스를 찾아 광활한 사막에서 허덕일 때 그대는 내가 가보고자 하는 온갖 게시판에서 정글의 독거미들과 싸우며 헤치고 나아가니 말이다. 예전에 그대가 주인공을 꿈꾸던 엑스트라 역할을 자임했듯이 여전히 그대는 목숨을 내놓을 듯 거침없이 시대를 만난 듯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대가 나를 볼 수 없는 거리에서 나는 그대를 보게 되었다.
친구여. 이제 나를 막다른 길로 내친 골목길을 그대가 가고 있는가.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한 자의식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그대. 그대가 정녕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나는 그대의 장난에 나는 한없이 괴롭다네. 그대가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말끝을 묘하게 내며 아직 시작된 잔치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지. 그래서 그대 말에 저항할 수 없네. 내 자아가 한없이 흩어지고 내 눈이 한층 게슴츠레해지고 내 입이 그대의 입술에 목말라하지만 그대의 눈빛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네. 내가 준비할 수 있는 여력을 준비하지 못 하게 하는 사회만을 나는 탓할 수 있을 것인가.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보물만 탐낸다는 그대 애증이 나를 슬프게 한다네. 짐이 무겁다는 그대를 위해 내 기꺼이 히치하이킹 당하고 싶으나 불행히도 우리들의 신호가 엇갈리니 내가 달리면 그대가 서고 내가 서면 그대는 달리네.
그대는 라이프찌히에서 마치 신검을 뽑은 듯이 용솟음치고 있네. 나뿐만 아니라 게시판 식구 모두를 압도하듯 원탁으로 이끄는 그대에게 내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대의 기원 만큼이나 오래된 나의 기원. 나는 그대의 용의주도한 언변에 놀라 빠르게 흥분했다 끝날까 두렵다네. 그러하니 이제 보이지 않은 잉크로 내 여행기를 쓰려 하니 두었다가 후일 약효가 떨어져 글자들이 제 멋대로 인연을 맺을 때 보게나.
나는 그대가 간 족적을 따라 역을 간다. 공공칠 가방을 든 회사원이 보이지 않아서인지 도시가 살아 있다는 느낌이다. 호텔에도 갔다. 라운지에 들어서니 친절한 영어로 나를 맞이한다. 혹시 하고 도박장도 갔지만 무료한 자들이 나를 웃으며 대할 뿐. 나는 버스에 앉아 우두커니 운전사를 보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내게는 그대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인가. 그대나 나나 밑바닥의 언어들로 모든 것을 새롭게 만드는 불행한 호기심을 지니고 있고 호기심이 빠르게 일어난 것처럼 시들면 자신만 빠져나와 아무도 모를 번민을 거듭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마르크스가 리바이스 청바지랑 비슷한 것임을 알아차릴 만큼 감수성도 동일하고 숨죽임이 통신에서 오고 가니 소문에 신경쓰는 것까지 일치하는데 왜 나에게는 목 마른 기침이 허용되지 않는가.
나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네. 내 라이프찌히는 텍스트에 불과하다. 가보지도 않은 종화가 나보다 더 현실적으로 라이프찌히를 말하는 한, 내게 그것은 종이쪼가리에 불과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나의 텍스트에 무슨 아우라가 있던가? 그러자 라이프찌히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결벽을 증명하려는 듯 토해놓은 육신을 말끔히 씻어내고 빛나는 속임수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종화는 수많은 도시를 마을버스 정류장 거치듯 통과했다. 그러나 내가 정류장에 서면 나의 마을버스는 오지 않는다. 그러하니 나는 라이프찌히에 갔어도 라이프찌히에 가지 않은 셈이다. 작가인 종화처럼 보고 느낄 수 없으니까. 종화가 만일 영영 오지 않을 지도 모르는 버스를 타고 있다면 나는 종화를 만날 수가 없다. 민기의 몸으로는 도저히 인드라를 만날 수 없다.
하여 나는 천신만고 끝에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으로 등단한 뒤 ID 인드라로 작가 종화를 만난다.
평론가들도 생계수단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동료 평론가들치고 평론 일을 계속하리라 보는 이는 없다. 저마다 기획 출판이나 편집장, 혹은 재수 좋으면 교수직을 바라기도 하지만 단지 부질없는 욕망일 뿐. 선생님 소리를 위안삼아 턱없는 원고료를 받아들고 술을 마시면 그만이다. 더구나 삼류라면 이런 위로도 받을 리가 없다. 구멍난 원고 대타로 나설 때에 어디 위신을 차릴 수가 있겠는가. 원하시는 대로 쓰세요,라고 말하는 청탁자의 까다로운 입맛을 이리저리 고려해서 발표한 뒤 행여 사기치고 있다는 말이나 듣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럼에도 인드라는 종화가 하는 장난이 인드라인 자신에게 얼마나 공포를 주는 것인지 모르는 체 종화를 옹호한다. 인드라는 기껏 봉원동 산마루에 스모그로 흐릿한 보름달을 도서관에서 쳐다 볼 뿐이므로.
"도인은 키도 작달만 하고 꾀죄죄한 데다가 햇볕에 심하게 그을린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도인의 묘사는 영락없이 인드라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종화가 인드라를 싫어하는 것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다. 현재에 서 있기는 그나 나나 마찬가지이나 작가 종화는 미래를 보기에 과거를 돌아 보는 평론가 인드라가 마땅치가 않다. 인드라는 실패한 사례를 열거하고 하루살이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인드라는 떨어져 죽거나 불을 향해 뛰어들어 죽거나 하는 양자택일을 주저하지만 종화는 어차피 죽을 것이므로 어느 하나를 과감히 선택해 빠른 성취를 도모한다. 인드라는 끊임없이 분열하다 판단 중지되고는 하지만 종화는 그칠 줄 모르는 정력으로 단도직입적인 결행을 한다. 그리하여 작가 종화가 세상을 뒤덮는다.
"사실 리미는 요즘 나오는 세태소설에 나오는 여성들과 비교하면 거의 다를 바 없는 여성이다. 적당히 폼이 나는 습관을 종교로 가지고 있고, 만만한 위인을 씹어대어 똑똑함을 과시하는 알음병이 있고, 무엇보다 멋진 자살을 꿈꾸는 그저 그런 인물을 약간 덧칠했을 뿐인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작가 종화가 묘사한 리미란 나를 빗대어 겨냥한 것이었다. 평론가들이란 딱 부러지게 말하지 않으면서 애매하고도 모호하게 말한다는 것이다. 인드라도 일상이 있는데 사실 그 이면에는 내심 기대한 바가 크다. 사실 일상이란 파격과 겹쳐 있음으로 여자를 잘 꼬신다,라고 작가가 아무리 주장할 지라도 그가 품은 상징에 판단을 내리지 않으면 안 된다. 판단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그러나 삼류 인드라는 일상에서 판단할 공간이 협소함에 뼈저리게 고통스럽다. 게다가 설사 수많은 경험을 한들 경험의 한계를 모르지 않기에 어찌 단언할 수 있겠는가? 평론가가 점장이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작가 종화는 점장이를 원하고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이란 고작 과거를 잘 되살려 내일을 조심스레 예측할 따름이지, 예언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든지 틀릴 수도 있는 것이며, 수정이 가능하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종화는 평론가들을 조소하기 바쁘다. 심지어 평론도 작가들이 한 평론만 인정하는 게다.
- 자살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하는 것 아니냐. 붓을 꺾어야 하지 않느냐?
마녀사냥이 아닐 수 없다. 허나 이조차도 나와는 거리가 있는 일이다. 일상이 파격과 쌍방향으로 소통됨에도 작가들은 어찌된 일인지 일류와만 대화하길 원한다. 그러하니 인드라로서는 작가와의 만남이란 얼마나 짜릿한가. 종화가 일류 평론가가 아닌 삼류 평론가와의 파격적인 만남을 해준다면 얼마나 감격스러울 것인가. 십대들이 미친 듯이 앨범 모으듯 콜렉션하여 신예 작가에게 오해의 공포를 넘어 마음껏 산란되는 텍스트의 황홀함으로 그와 함께 갈 데까지 가보는 일을 꿈꿀 수가 있는데... 하지만 종화는 단연코 인드라의 존재를 부정한다.
- 적당한 선생 계보 하나 걸치고서 게시판에서 자신보다 공력 딸려 보이는 이 하나 찍어서 씹어대면서도 제대로 된 공격이 날라올까 두려워 미리 선수쳐서 강단에서의 글쓰기만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느니 손사래를 치고는 하지.
종화는 평론가들을 싫어했다. 문학 평론가든, 음악 평론가든, 미술 평론가든, 운동 평론가든 모두가 똑같이 밥벌레에 불과한 족속들이라며 싫어했다.
- 입만 산 새끼들.
종화처럼 작가와 운동가들은 자신들만이 세계를 창조한다고 굳게 믿고는 한다. 자신들만이 주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네들이 하는 것이 무엇이 있더란 말인가. 그네들 또한 대중 자신이 아니라 대중 곁에 있을 뿐인, 그리고 그들 곁에 가장 가까이 있다고 여길 따름이지 않던가? 과연 누가 그들이 대중을 대표한다고 위임했던가? 오로지 자신들 주장 뿐이지 않던가? 그네들 역시 사람이 죽어가기 전까지는 지지부진하기는 마찬가지이고 대중의 꽁무니를 따라 다니면서도 말로만 문체의 혁신이다, 혁명 투쟁이다, 하지 않던가. 눈치보기는 또한 우리보다 더 심하면 심했지, 다를 바가 있던가. 선생도 그렇다. 그렇다면 종화는 믿는 빽이 전혀 없다는 말인가. 당신 친구들은 무엇인가. 당신을 지지하는 게시판 친구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대중이 아니라는 말인가. 그러면서도 마치 고독한 양 홀로 진리를 외치는 듯이 말하는 꼴이란 무엇인가. 그러면서 왜 모든 책임을 평론가인 우리에게 전가하는가? 그래, 나는 구경꾼이다. 그렇다면 왜 구경꾼에게 책임을 묻는 것인가. 왜 당신들이 져야 할 짐을 왜 우리에게 떠넘기는가? 권력을 우리에게 달라고 한 적이 있기라도 한 것인가? 생각해 보라. 대중이 언제 우리에게 환호한 적이 한번이라도 있던가. 대부분 당신들에게 환호한다. 아무리 영화 평론이, 문학 평론이 빛이 난들 대중에게 기억나는 평론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라. 단 하나라도 있을까? 반면 당신의 시와 당신의 소설과 당신의 영화와 당신의 그림과 당신의 음악, 그리고 당신의 운동...
하여 삼류일지라도 평론가들끼리 만나 작가를 씹는 무용담을 늘어 놓을 때 삼류 인드라도 작심한 바가 있었다. 내가 너희들보다 못 할까. 그러나 못 했다. 작가들이 별 볼 일 없는 삼류 인드라인지를 대번에 파악하고 일절 대응치 않고 무시하기 때문이다.
"어쩌랴. 따지고 보자면, 세속에 어두운 내 잘못인 것을. 내가 발리에서 아르토와 고갱의 삶을 떠올렸다면, 그는 칼럼니스트의 삶을 떠올렸던 것이다. 아르토와 고갱보다는 칼럼니스트가 안정적인 삶에 도움이 될 것이다. 얼굴에 철판깔기로 자자한 그도 내 얼굴 보기가 다소 민망했던지, 내게 다음과 같은 말을 던졌다.
- 너, 만일 청와대에서 너를 부르면 가겠니?"
평론가 인드라가 한번도 오르가슴을 못 느낀 여성이라고? 시버럴, 오르가슴을 딱 한번 느낀 인드라로서는 억울하기 그지 없다. 삼류 평론가도 팔십년대 학번이므로 리얼리즘에 고통스러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체질이 아니어서인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더군다나 누구처럼 감방에 간 것도 아니고, 투쟁을 주도했던 것도 아니고, 단지 그 시대에 살았다는 이유만으로 과분하게 386이라는 호칭을 받는 나로서는 더더욱 조심스러운 것이었다. 386조차도 비판의 대상이 된 세상이지만 여전히 내게는 386조차 고통스럽게 다가온다.
- 내가 감빵에 있을 때, 너는 무엇을 했니?
종화는 누구보다 양비론을 경멸했다. 이도 저도 아닌 태도를 비판하면서 어느 한 쪽에 과감하게 올인하고는 하였다. 하여 내가 만일 조금이라도 엉거주춤한 태도를 보일라치면 가차없는 비판을 해대고는 하였다. 나는 그때마다 괴로왔다. 하지만 시대가 변했을까? 이제는 오히려 종화가 조심스럽다. 계획없이 행동이 있을까? 이론없이 실천이 있을까? 조금이나마 내 것이 되었다 여긴 것을 토대로 행동하려는데 종화가 오히려 이런 나를 가로막는다. 내가 언제 청와대에 가겠다고 물었던가? 단지 나는 지금 대안이 있느냐고만 물었을 따름이다. 그런 내게 종화는 단호하게 말했다.
- 그거나 이거나.
나 역시 이것이 대안이다,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는 것이 왜 기회주의란 말인가? 또한 기회가 오지 않을 때 대기하는 것이 왜 대기주의란 말인가? 허나, 이렇게 종화에게 물으면 그는 말한다.
- 그래도 나는 혁명의 자식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관념이 아니라 실천이다.
결국 그가 말하는 것은 현장의 강화다. 작가들의 작품을 지나치게 깎아내린다는 것이다. 작가들이 작품 활동할 여건이 크게 미흡한 상황에서 작가들 작품만 나무래서야 되겠느냐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평론가들이란 서구 유명 문학인과 작품을 줄줄이 외워대면서 너희는 왜 이것밖에 안 되냐고 할 때 종화는 울분이 솟고는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과연 평론가들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을까? 다 좋다. 그래도 나는 가련다. 시대가 작가 종화를 주저케 한다면 나라도 나서서 네가 가는 길 조금이나마 손쉽게 똟고 갈 수 있도록 하련다. 무엇을 마다하겠느냐. 시중에 떠도는 소문들. 그것이 전부이더냐. 그래도 받아들인다. 무슨 소리를 하든 내게 꿈이 여전히 있다면. 하여 조심스럽게 비평이라고 내놓았지만 다들 삼류 비평가 비평을 외면하는 것이었다. 특히 괴로운 것은 명망있는 언론과 문학지의 태도이다. 그 중에 가장 나은 평가가 이러한 것이었다.
- 아무리 비평 현실이 타락하여 개나 소나 한다지만 문학 비평의 길만은 시대의 감수성을 정면으로 뚫고 가야 할 것이다. 최근 세태를 보자면 무책임한 언어로 재단하여 '날것'을 양산하여 문학의 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예가 있어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비평가로서의 최소한의 자질인 경청하는 태도가 있다면 해당되는 자의 자아반성이 필요하다 하겠다.
그것이 바로 인드라 비평을 두고 한 것이었다. 포르노는 포르노일 수밖에 없다라는 정언 명제를 곧이 곧대로 밝힌 것이었다. 삼류 평론가 생각으로는 정말 잘 된 비평이라고 여겨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인데 이런 평가를 받은 것이었다. 포르노란 이런 것이 아니었던가. 평론이 매번 이미 공인받은 소위 일류들만 상대해야 하겠는가? 실베스타 스탤론이, 디아즈 카메론이, 그리고 수많은 배우들이 포르노 배우였다지 않은가? 발자크도 포르노 작가이지 않았던가? 인드라는 바로 그런 미래의 위대한 작가들의 작품 평론을 쓰고 싶었다. 다른 평론가들이 내팽개친 작가들을 말이다. 포르노가 맨날 다음과 같은 식이어야 하겠는가.
"석가모니 생존에 바이살리 성에 유마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말솜씨가 뛰어났고 마음대로 신통력을 부렸으며, 다라니를 얻었으며, 두려움을 여의었으며, 마와 적대자들을 떨쳐낸 자였다. 유마는 세속에 머물면서도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를 훌쩍 뛰어넘나들어서 자식과 아내와 고용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항상 몸이 청정했으며 주위에 친족들이 들끓어도 늘 여유롭게 처신하였다. 도박이나 주사위 노름을 하는 곳에도 모습을 드러냈지만 노름에 빠진 이들을 효과적으로 제도하기 위해서였고 출세간적인 주문이나 논서에도 해박했지만 오직 불법이 주는 기쁨만을 누리리라 다짐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애욕의 허망함을 보여주고자 창녀촌도 마다하지 않았고 큰 부자였으며 존경받는 대신 중의 하나였고 궁중의 젊은 여인들을 잘 이끌었기에 최고의 내관이기도 했다. 유마가 병을 가장하자 석가모니는 그를 문병할 사람을 찾는데 모두가 유마의 고매한 품격에 자격없다고 하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문수가 나서 문병을 했다"
인드라는 그들 도식대로 평하자면 위와 같은 글쓰기에 대해 칭찬할 수밖에 없다. 비평가가 좋아하는 글쓰기랑 작가가 좋아하는 글쓰기가 다른 만큼 일류 비평가와 삼류 비평가가 좋아하는 글쓰기도 애초에 다른 것이다. 삼류가 일류가 된다 해서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어차피 일류는 계속 일류여야 하고, 삼류는 삼류여야 한다. 다만 아부하면 삼류가 일류가 될 수 있다. 그러하니 인드라가 상기한 저질스런 인용보다 다음과 같은 인용을 좋게 평가한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밑창을 맞춰 보았다. 대담하게도 우리는 변비에 시달린다는 이유로 갖은 인연을 활짝 열고 텍스트를 열어 젖히고 인간성을 훌렁 벗고 교미했다.
- 너무 개판이야.
- 너는 어떻고.
- 그러니까 이리와. 나까지 외면하면 안 되잖아."
그러나 삼류는 삼류이다. 변화무쌍한 흐름을 판단해내야 하는 비평가야말로 교과서에 기록되는 비평가 자격이 있다면 삼류 평론가는 탈락할 수밖에 없다. 정말 용기있게 자기 소신을 밝혀 매장될 위기에 처해 있는 극히 일부 비평가들이 존경스럽기만 하다. 삼류로서는 겁이 덜컥 나서 기존 계보를 따를 수밖에 없다. 가령 최근 청소년보호법과 관련한 수법들이다. 그렇지 않으면 청탁이 들어오지 않는다.
"넌 뭐냐, 넌 뭐냐. 죽었다고? 사기 치지 마. 좆같은 놈, 백수인 주제에, 내 좆이나 빨아라. 네가 뭐라도 돼? 까불지 마. 넌 뭐가 좋다고 무너지는 내 마음을 안다고 소리쳐. 니가 뭔데 날 괴롭게 해. 유치한 새끼. 꺼져 버려. 집어치워. 너 까짓 게. 씨발, 튀는 놈들 많아 좋네. 나쁜 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제발, 사라져 줘. 눈물 나와. 울지 마, 씨발 놈아. 무수한 말들이, 단지 말뿐이지만 어느덧 우리를 지배하는 것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울러 요즘 잘 뜨고 있는 김현식 비평을 기조로 노마즘이니 차연이니 비트켄쉬타인이니 벤야민이니로 마무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러한 격렬한 분노를 담은 것이 이번에 쓰는 비평문의 전부라고 할 수 있다. 다들 사석에서 인정하지만 다 알고 쓰나? 유행 담론에 묻혀서 다만 분노를 감춘 의도외에는 없다. 작가의 분노와 다만 형식적으로 구별될 뿐인 메마른 분노 말이다. 분노없이 비평이 될까?
그러자 작가 종화는 갑자기 라이프찌히 대신 즈므를 들이대었다. 놀라운 반격이었다. 라이프찌히도 벅찬데 이제 즈므라니... 작가 종화는 라이프찌히에서의 절망스런 일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한다. 라이프찌히는 죽었다고. 허나 내가 가 본 라이프찌히는 활력이 넘치는 도시가 아니었던가. 굿바이, 레닌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굿바이, 맑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이런 나의 집요한 추적에 작가 종화는 난 데 없이 즈므를 내세운 것이다. 즈므. 분명 현실에 그 지명이 있지만 작가 종화가 말하는 즈므와는 다른 것. 이제 사회주의는 없다. 오로지 도로 표지판 같은 책 속에서만 있다는 것인가? 그리하여 날라리 세상을 꿈꾼다는 것인가? 이제 노동 운동 자체가 노동자주의에 불과하다는 말인가? 아니다. 아무리 민주노총이 썩었다 할 지라도, 민주노동당이 가망이 없다 할 지라도, 그것들이 운동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닌 한, 민주노총과 민주노동당에 대한 포기가 곧 운동의 포기일 수는 없다. 운동의 포기라는 면죄부를 줄 수는 없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그 아무리 문학판이 위기이고, 모든 작가들이 타락했을 지라도, 문학 자체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쁘고, 새로운 데서 미래가 열리는 것이 아니던가? 만일 사회주의가, 그리고 문학이 저 피안의 세계의 것이라면, 구태여 그것을 굳이 사회주의이고, 문학이라고 부를 필요가 있겠는가? 작가 종화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였던가? 실제로 경험한 것들을 자신이 경험하지 않았다 하여, 그리고 경험한 것보다 더 실제적으로 묘사할 수 있다 하여 모두 가상인 것처럼 말하는 저의가 무엇이던가? 설사 포르노적 해부학으로 우리의 성기를 우리가 보는 것보다 더 포르노로 볼 수 있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우리가 그간 흘린 피와 눈물마저도 가상이란 말인가? 오히려 꿈을 내던진 이는 내가 아니라 작가 종화이지 않던가?
작가 종화, 자네의 시도란 추상적 사고와 비교적인 언어 속에서 나타나는 독일적 비현실주의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네. 그들은 자신들의 과장된 개인주의와 독창성에 대한 병적인 집념을 보편화하려 했다네. 또한 자네가 소설 초반부에 들라크르와 작품을 인용한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회화는 죽었다고? 자네는 또 말하지. 영화는 죽었다, 사진은 죽었다. 신은 죽었다. 들라크르와는 위대한 19세기 낭만주의자이지. 하지만 질풍노도의 낭만주의자가 아닌 낡고 오래된 반동적 낭만주의자. 이미 낡고 사라지는 것을 애써 붙잡고 있었지. 물론 자네의 의도를 짐작하네. 20세기의 사회주의를 그처럼 붙잡고 싶었던 게지. 하지만 언제까지 거짓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말일세. 거짓말로 구름 위의 라퓨타를 노래하는 자네에게 나는 언제나 따뜻한 시선이었네. 누구처럼 만화적 상상력 따위라고 비난하지 않았네. 하지만 오히려 그러한 비난을 한 자는 자네와 마찬가지로 거짓말로 사회주의를 반동적 낭만주의로 고수하려고 일삼는 자일세. 그렇다면 자네가 그토록 비난하는 민족해방주의자들의 북한 찬양과 자네가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인가? 왜 자네들은 스탈린 앞에 서면 작아지는가? 자네들의 숱한 스탈린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나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는가? 무엇이 죽건, 누가 죽건, 자네는 살아 있다는 것만 말할 셈인가? 자네도 죽었네. 따라서 죽은 개를 되살리는 것은 죽은 개가 아닐세. 다른 이여야 한다는 말일세. 자네가 예수이던가? 그것은 하나의 극복해야 할 신화일 뿐이네.
하여, 나는 작가 종화의 궤적을 지금까지 따라온 것이다. 그가 왜 텍스트 안에 머물면서도 겉으로는 텍스트 바깥에 있는 양, 그리고 자신만이 실천하는 것인양 하는 이유를 캐고 싶었던 것이다. 과연 텍스트 바깥에 있고자 하는 이는 나인가, 아니면 작가 종화인가? 작가, 종화. 리미처럼 평론만 죽은들 해결할 도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오로지 자신만을 떠받을 뿐인 주체를 누가 견제할 수 있더란 말인가? 중이 제 머리 깎지 못 하듯이 작가 종화, 당신은 그런 꿈을 꾸어서는 아니 된다. 그런 영원한 영구기관의 상상은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무오류의 화신은 사라져야 한다. 신학에서 내려오라, 작가 종화여.
"죽은 자는 말이 많다. 팔십년대는 마르크스에 대한 독점욕 이외에는 문제가 없었다. 구십년대 또한 독점욕이 응고된 정액을 오르가슴이라는 휴지로 닦으려 했을 뿐 사정은 같다. 나는 광장에서 고추가루 같은 마르크스를 시뻘건 눈으로 저주하듯 재채기하며 마셨고, 통신에서 후추가루 같은 마르크스를 너무나 뜨거워 오히려 차가운 침으로 악귀마냥 핥으며 마셨을 뿐이다. 적색 환상에서 잿빛 환상으로. 적색을 넘어 빛을 향한 짝사랑을 잊지 못해 결국 회색이 되다만 잿빛 환상으로. 마르크스가 호이징하에게 길들여져야 하는 사정이 있는 시대에서 '언제'하고 묻는다면 '지금'이라고 '놀이'하듯 나는 마침내 텍스트 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작가 종화를 비판하고 나니 나 역시도 비평가로서의 자질 부족을 자인한다. 어떻게 결론을 지을까 고민하다가 그냥 썼는데 쓰고 보니 그럴 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특히 <근본적인 인식차>야말로 참된 작품을 가리는 기준이 되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착각에 불과했다. 인드라 이면의 속을 모르는 작가 종화가 통신에서 그간 쓴 글을 읽더니 말했다.
- 글을 다 읽은 자들아, 내 짐을 다 가져가라.
인드라는 연이어 <엄혹함을 똑바로 봐>라는 결론이 정보화 시대의 문학적 위기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화두이지 않느냐 우겼지만 돌아오는 것은 그의 냉소였다.
- 고전 공부 게을리 하지 말고.
결국 인드라는 언론에 더 이상 의견을 개진할 수 없었다. 비록 인드라가 아무리 작가 종화와 그의 작품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해서 종화의 성과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며, 또한 종화의 인드라에 대한 비판 역시도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작가 종화가 글로만 전위 외친다고 세상이 바뀌냐고 힐난을 했기 때문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피땀을 흘려 이룩한 성과를 인드라 같은 족속들, 즉 학삐리들이 하나씩 챙긴다는 비난 때문이다. 그렇다. 이 문제에 관하여 종화가 옳다. 다만 그렇다고 하여 작가 종화의 이데올로기까지 옹호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 모든 게 작가 종화 때문이다. 갑자기 작가에 대해 욕을 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비평가이므로 점잖게, 그리고 다른 이들도 다 하는 게시판에서 해야 한다.
"아무튼 너를 비판할 거야. 내가 네 글을 읽는 건 내가 유령이 되어서라도 너의 만용을 견제하기 위함이지. 넌 겸손해야 해. 내가 너의 글을 더 이상 읽지 않는다면 내가 지는 거야. 넌 겸손해야 해. 그리고 평론가의 말을 경청해야 해."
욕으로 끝내면 비평에서조차 작가 종화에게 당하는 것이라 생각하니 살 맛이 나지 않았다.
"평론가는 감정의 동요가 없어야 해. 편견에서 벗어나 이성을 회복해."
그러고도 죽어간다고 엄살피는 종화. 죽긴 누가 죽는다는 말인가. 아무도 죽을 이 없다. 작가 종화가 증오스럽기 짝이 없어 찢어발겨도 시원찮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비평은 비평이다. 팔려야 한다면 인드라의 속마음을 적나라하게 비추어서는 곤란한 일이다. 이럴 때 인드라는 말줄임표로 대신하고는 했다. 이것이 혹 시대적 판단이 아닐까. 그러나 삼류 평론가로서는 알 도리가 없다.
그런 생각이 미칠 즈음 인드라는 한스 집에 당도했다. 한마디로 한스는 동성애자였다. 자본가도 아니고 극우주의자도 아니고 다만 생각이 있는 이성적인 동성애자여서 인드라는 그를 소수를 위한 인권을 제창하는 정치가이지 않을까 조심스레 설정했다. 왜냐하면 인드라는 일주일간 한정된 라이프찌히 여행을 그와 보냈고 내심 하룻밤을 묵으며 여행기간을 연장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긴 하였지만 그 때문만이 아니라 상식적으로 종화와 한스의 우연적 만남만으로 한스를 이해한다는 것이 터무니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동성애자이고 하니 오히려 이야기를 나누어 모처럼 대화적 상상력을 만끽해서 좋기만 했다.
그때 종화가 나타난 것이다.
회사에 혹시하여 전화하니 국제전화인지 모르고 가급적 빨리 복귀하여 업무에 차질을 빚지 않기를 바라지만 부담갖지 말고 쾌차하라는 회사의 독촉 전화를 받고 착잡해진 마음에 한스 집에서 담배를 찾는데 없다. 그래서 담배를 사러 가게로 가는 길에 그를 만난 것이다. 그는 가게에서 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인드라를 예리한 눈초리로 본다. 처음에는 그가 종화인지 몰랐다. 인드라는 애써 신경쓰지 않고 양담배 한 보루를 사서 돌아오는데 그가 따라온다. 아마 인드라 표정이 금새 울어 버릴 것 같은 얼굴이어서 그러할까. 어떻게 말해야 하지? 어디서부터 말하지?
- 종화구나.
- 너...너
- 그래, 나야.
- 임마!
우리는 와락 껴안는다. 눈물이 펑펑 쏟아져 나온다.
- 친구야. 너, 말끔한 도인처럼 서 있구나, 이 오염된 도시에서. 너는 우리가 연극할 때 너는 프로였어. 특히 여자 역이 압권이었어. 연습할 때조차도 너는 여자였어. 넌 뜨개질도 무척 잘 했지. 생각나니. 우리가 전농동 네 자취방에서 뒹굴며 이야기 나눴던 기억을 말이야. 우리의 미래를 그렸었지. 힘들지만 깨끗하게 살아가리라 맹세하였지. 그리고 서로의 눈을 보며 한없이 웃기도 했잖아. 바보처럼. 헤어질 지 몰랐는데 이렇게 헤어졌다 만나다니. 그립기만 하다면 나는 이 순간을 슬퍼할 거야. 망각하기만 하는 세상이니까. 너를 속여 미안하다. 할 수 없었어.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떻게 이 세상을 버틸 수 있겠니. 인드라에게는 삼류라도 평론가 감투가 감지덕지하구나. 네가 이를 안다면 얼마나 인드라에게 실망하겠니. 당당하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네게 걱정하지 말라고 했고 심지어 네 몸을 빌리기까지 하고 나타나니. 이제 더 무엇을 바라겠니. 다만 이런 인드라를 이해해 주었으면...
그때 종화가 포옹을 멈추더니 갑자기 인드라 옆구리를 스위스 칼로 찌르고 차갑게 웃었다.
- 왜 나를?
- 오해 마. 나는 네가 창조한 인물이야. 나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어. 네가 말하는 종화는 예전에 죽었지. 아니,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야. 중요한 건 너는 지금 인드라라는 가면을 쓰고 너를 계속 지탱하려는 것이지. 당신은 얼마 전까지 백수로, 그 다음은 작가로, 유마거사로, 이번에는 평론가 모습으로 계속 바꾸고 나타날 뿐이지. 나는 당신을 찾으려 계속 노력했어. 통신에서 긴가민가했지만 뚜렷한 모습을 보이지 않길래 혹시 하고 라이프찌히에서 네가 창조한 인물로 잠복하고 있었을 따름이지. 당신은 또 그건 텍스트일 뿐이야, 메타적 글쓰기를 차용한 글쓰기에 불과하다고 말하겠지? 너를 죽일 수는 있어도 소멸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아. 하지만 당신은 소멸되어야 해. 이젠 자살해. 고통을 견디지 말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번에는 너무도 쉽게 발각이 된 것이다. 도대체 저 녀석을 조종하는 이는 누구란 말인가. 석가모니 정도라면 이렇듯 정보력이 빠르지 않을 터인데.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 비밀조직이지.
- 비밀조직?
옆구리에서 피가 철철 흘러내리고 있음에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요즘 프리메이슨이다 뭐다 해서 유행되는 류가 아니던가. 너무 유치하다.
- 유치하다고? 그러니 네가 소멸되어야 유치함이 사라져. 왜냐하면 너는 이 세상을 유치하다고 생각하니 말이야. 네가 생각하면 그대로 이 세상이 이루어져. 우리의 과업 완수가 늦어지고 있어. 아무튼 잔소리 마라. 당신을 소멸시킬 힘이 없긴 하지만 당신을 지연시킬 힘은 있다. 죽어라.
스위스 칼이 검으로 바뀌었다. 인드라는 서둘러 주위를 살펴 보았으나 아무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인드라 뒤는 담벼락으로 막혀 있다. 그가 기합을 지름과 동시에 차오르며 쳐들어오자 인드라는 몸을 동그랗게 말아 가까스로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인드라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상황이 열악하다. 한번 모습을 바꿀 때마다 엄청난 진기가 소모되기 때문이다. 재충전하려면 많은 시간을 요구하고 그때는 그들 눈에 뜨이지 않는 장소에서 숨어 있어야 하는데 그동안 그들은 계속 공력을 증진시켜 인드라를 더 빨리 찾아낼 것이기 때문이다. 점차 인드라 밑천도 바닥나기 시작했다. 이제 살 궁리를 도모하기에도 힘들어진다. 그때 그가 바로 인드라 등 뒤까지 쫓아왔다. 더 이상 도망친다는 것이 무리이다. 인드라는 천천히 돌아섰다.
- 나는 지금 네 손에 죽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계속 살아남는 이유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여전히 아임 PROBLEM이다.
- 무슨 소리. NO PROBLEM이다. 문제를 가진 자는 죽어야 해.
- 후후. I will be back.
- 놀고 있군. 죽어랏!!!
영철 아임 problem
2004. 7. 22. 5:04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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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임 PROBLEM- 영철
인드라
"너는 알몸으로 태어났으며
그 나머지는 거치적거리는 짐일 뿐이다.
; 뤼플 앙드레 샤를"
류영철은 매우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기상하고 아침 식사 전까지 국민 체조, 팔 굽혀 펴기 30회, 누운 자세로 다리 올려서 자전거 타기 10 분을 한다. 조식을 한 후에는 그가 애용하는 자리에 똑바로 앉아 명상 시간을 가진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두어 시간 낮잠을 즐긴 뒤 일어나 국민체조, 팔 굽혀 펴기, 자전거 타기를 아침보다 강도 높게 하는 것 외에 윗몸 일으키기, 다리 찢기 등을 한다.
저녁을 마친 후에는 안면을 익힌 간수들이 다 본 신문 등을 보거나 명심보감을 본다. 취침 시간이 되면 누구보다 일찍 잠들었다가 일찍 깨어 예의 명상 시간을 가진다. 가끔 목사가 와서 빵을 나눠 준 뒤 갱생 교육의 일환으로 회개해야만 죄를 면할 수 있으며 예수님을 믿어야만 천당을 갈 수 있다면서 죄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로 반드시 끝을 맺는 특별 강연 등이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를 반복한다. 물론 목사의 설교 시간 때도 다른 이들이 예외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졸 때 그는 그때조차도 고시학원 명강사에게 듣는 쪽집게 실전 문제 해설 강론을 듣는 양 매우 진지한 자세로 듣는다. 그는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일이 거의 없었고 있다 하여도 필요한 말만 간단명료하게 말할 뿐이다.
- 야이, 새끼들아. 밥 세끼 처먹여 주니까 나라에 돌팔매질하는 새끼들. 너 같은 자식들은 죄다 무인도에 격리시켜 굶어죽여 씨를 말려야 하는데. 쓰발 놈들, 니 놈들 때문에 내가 생고생하구 좆 같은 놈들.
나오는 말마다 욕이 섞이지 않으면 성미가 차지 않는 성질이 더러운 간수가 꼬투리를 잡으려 해도 순응할 뿐이다. 새파랗게 나이가 어린 의경이 반말을 해도 오십줄이 넘어선 그는 경어를 깎듯이 붙인다.
이제까지 그에 대해 숨가쁘게 말하던 자가 잠시 숨을 돌리자 그의 말을 듣던 유치장에 있던 자들이 한마디씩 거든다.
- 서울 시내 경찰서에서 저 사람 모르면 간첩이라더만.
- 듣자 하니 수도 없이 경찰서를 들락날락 했다면서?
- 저래도 형무소까지 간 적은 한번도 없다더군.
그들 말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보통 삼십일 이하 구류형을 마치면 화장실에서 면도, 세수, 가능하면 목욕까지 한 뒤 한 벌뿐인 하얀색 양복과 하얀색 모자와 하얀색 구두와 소지품을 받아 갈아 입는다. 그런 후에 혀를 끌끌 차며 다시 나타나지 말라고 훈계하는 서장을 필두로 하여 이하 모든 경찰 관계자들에게 일일이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깍듯이 하고 경찰서를 나선다는 것이다.
류영철은 어떤 방황도 없이 인사동 화랑을 들러 그림 감상을 한다. 그는 꽃과 과일 등이 있는 정물화를 좋아하지만 특정 부류에만 집착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 그에 대한 소문이 분분하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실제 꽃이지 정물화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정말 좋아하는 것은 누드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소수가 있었다. 소수 의견을 굳이 꺼내는 까닭은 그에 대한 설명이 주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며 비록 유치장 신세를 지고 있는 이들일지라도 시민 사회 일원으로서 건강한 민주주의 의식을 갖추고 있음을 지적하고자 함이다.
이 논란은 하루종일 계속 되었다가 마무리되었다.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던 다혈질의 삼십대 아저씨가 분을 참지 못해 저녁을 먹고 독서중인 그에게 가서 조심스레 물어보았던 것이다. 술을 먹다 말싸움이 붙어 급기야 친구를 폭행하여 들어왔다는 이 아저씨 말에 따르면 그에게 꽃이 그려진 그림을 좋아한다고 하는데 그러하는가 물으니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홀딱 벗은 여자 그림을 좋아하는가라고 물으니 또 고개를 끄덕였다는 것이다. 어떤 것을 더 좋아하오라고 물으니 또 말없이 웃으며 끄덕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아저씨는 꽃이나 여자나 매한가지가 아니냐며 누드 취향론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그의 고매한(?) 품성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기 입으로 누드라고 집어 말할 수 없으니 꽃이라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자기 또한 그만큼 고매하지는 않으나 나이값을 하려면 그만한 처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다수를 형성하며 대세론을 주도하던 이가 즉각 반박했다. 꽃은 꽃이고 누드는 누드다라고 말하는 이는 어쩌다 그가 이런 지위로 전락했는지 모르나 분명 우리 같은 범부가 알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신사이므로 누드 같이 낯 뜨거운 그림을 볼 사람이 아니다라고 했다. 자신이 사기 전과가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사회를 알 만큼 안다고 자부하는 그는 경험에 비추어보건대 회장실 등에 들어가면 반드시 정물화가 있었다는 것이다. 아울러 자신은 누드를 정말 좋아한다고 고백하는 용기를 보여주면서 태생이 미천한 아랫것들이 속단하면 안 될 것이라고 했다. 그러다 뜬금없이 자신이 뼈대 있는 집안에 태어났지만 부모 속만 애태우게 하다 부모를 화병에 돌아가게 한 불효자식이라며 때 아닌 넋두리까지 하기도 했다. 잠시 자리가 숙연해졌으나 모두들 그가 사기범임을 떠올린 듯 금새 분위기가 풀렸다. 사기 전과자의 넋두리를 믿지 않더라도 언변이 그럴싸해서 결말이 간신히 났다.
그때 나는 정물화의 경우 사물의 배치를 통해 화가의 탐미적인 자의식을 드러내는 것이고 누드화일 경우 본디 신성성의 표현을 다룬 것이므로 그가 만일 그림 애호가라면 나 정도의 기초를 모를 리 없으니 핵심을 제대로 짚지 못한 논쟁이라고 말하며 잠시 끼어들까 생각했으나 먹물티를 낸다 싶어 그만두었다.
아무튼 그는 그림 감상을 끝낸 뒤 오후 들어서는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며 걸어서 무료 입장이 가능한 공원 등을 찾아간다. 그는 언젠가 주변사람들에게 이를 산책이라 말했다고 한다. 그는 이 산책을 통해 길거리를 지나가는 사람들을 통해 시대와 유행을 감지한다는 것이다. 어쩌다 비가 오면 빠른 걸음으로 인근 빌딩 은행을 찾아 여성지를 본다고 한다. 산책이 끝나 공원에 오면 햇볕이 들지 않은 벤치에 앉는다. 말벗이 필요한 할아버지들과 대화도 하고 쌀과자 등을 파는 아주머니와 농수작을 나누기도 하고 아름다운 세상에 막 첫걸음을 뗀 아이들의 걸음마를 맑은 눈으로 쳐다 본다는 것이다. 특히 꽃이라도 피어 있으면 그는 그 앞에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또한 그가 꽃 만큼이나 좋아하는 것은 애완견이다. 그는 개란 개만 보면 어린아이처럼 좋아서 팔딱 팔딱 뛰며 좋아한다. 특히 그가 좋아하는 털복숭이 종류의 개라도 만나기만 한다면 흡사 오랫동안 헤어진 연인과 해후하는 듯 눈물까지 글썽이며 감격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럴 때 개도 자기를 알아준다 여겨서인지 그 앞에서 재롱을 떨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해질 무렵이 되면 그는 공원을 나와 산책하면서 익혀 둔 레스토랑을 간다. 그는 아무 데나 가지 않는다. 그는 반드시 '오늘은 어디서 먹을까'라는 무료 신문의 기사를 참고한다고 한다. 맛있는 음식점 소개와 함께 객관적이고 엄정한 평가를 내리기로 유명한 이 신문은 근래 무료 신문계를 석권한 권위있는 신문이다. 그는 이 신문에서 음식 솜씨가 정갈하고 맛있어 보일 것, 친절한 손님 접대, 실내 인테리어 등의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레스토랑을 결정한다. 무엇보다 한번 간 레스토랑을 가지 않는다는 원칙이 선행된다. 다만 그는 뷔페를 피한다. 이유는 여러 음식을 한꺼번에 취하면 맛을 음미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음식 수준을 지적하기도 했다. 그는 가끔 공원에서 그와 통할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함께 대동하기도 한다.
그의 식사 취향은 매우 다양하여 한식, 중식, 양식, 일식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동료가 있을 경우에는 동료의 취향을 존중한다. 그는 메뉴 선택을 할 때 대부분 그 집의 최고급 자랑거리를 선택한다. 또한 식사 중에는 반주를 곁들이는 것을 잊지 않는데 중식인 경우 빼갈, 한식인 경우 소주, 양식인 경우 꼬냑, 일식인 경우 정종을 택한다. 그는 차려진 음식을 매우 천천히 먹는 습관이 있으며 동료가 있을 경우 품위있는 담소를 나누길 좋아한다. 그는 맛나게 먹을 때 약간 씹는 소리를 발설하기는 하나 상대에게 불쾌감을 줄 정도는 아니다. 아울러 그는 최고급 국산담배를 신청하거나 없으면 매우 아쉬워하면서 양담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밝히며 입맛 때문이라며 버지니아 슬림을 주문한다.
그는 종업원에게 말할 때도 매우 예의가 바른 경어를 구사하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보통 선불임에도 나가서 사오는 일을 서슴치 않는다. 그는 상스럽게 먹던 음식을 함부로 상에 뱉거나 하지 않으며 담배재를 그릇에 털지 않는다. 식사를 마친 후 그는 약속대로 자기가 계산할 것임을 말하고 무척 정중하게 바쁜 일이 있으니 동료에게 먼저 가라고 말을 한다. 그후 그는 계산서를 가져오라고 말한 뒤 천천히 계산대에 가서 동전 백원을 꺼낸다.
- 왜 하필 동전 백원이지?
폭행범이 궁금증을 참지 못해 묻자 사기 전과범은 그것이야말로 그가 진국임을 드러내는 것이다라고 쏘아붙이며 재미있는 이야기에 초지지 말라고 말한다. 논쟁할 때는 그토록 잡아먹을 듯하다 어느새 그들은 십년 친구처럼 킬킬 거리며 붙어 있었다. 계속 이야기를 하자. 류영철을 잘 아는 경찰 직원들이 그가 출소할 때 백원을 주기도 하고, 길거리에서 줍기도 하고, 선행을 하기도 해서 백원만을 요구해서 받기도 하는 등 그는 레스토랑에 가기 전 백원을 반드시 준비한다고 한다. 그에게 만일 천원을 준다든지 하면 극구 사양하고 딱 백원만 달라고 말한다고 한다. 백원을 받을 만큼 자기 처신을 한다고는 생각하지만 천원을 받을 만큼 자기 양심이 파렴치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울러 천원이 주는 무게 만큼 정을 받으면 자기는 괴로워서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 그걸로 되나? 밥값이?
- 이런 멍청이.
폭행범과 사기꾼, 그들이 또 끼어들었다. 그러자 좌중이 에이하며 그들을 노려보자 그들이 말했다.
- 씨, 왜 우덜만 갖구 그래?
하지만 그들은 시비를 걸 목적으로 말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했기에 알아서 침묵을 지켰다. 이야기는 계속 되었다. 그가 백원짜리를 내놓는 까닭은 경찰서에 전화할 비용이라는 것이다. 국가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함이며 그것이 국가 복지 혜택을 누리는 자가 지녀야 할 도덕이며 법이라는 것이다. 아울러 그는 친절하게도 각 경찰서 형사과 전화번호를 가지고 다니고 있어서 동전과 함께 내놓는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가고 싶어하는 경찰서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되도록 주인 뜻을 따른다는 것이다. 주인의 반응은 다양하다.
- 아니,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할 짓 다 해놓고 돈 없다고 오리발 내밀면 어쩔 거야? 이 새끼 순 도둑놈 심보 아냐? 너, 처음 아니지? 척 보면 알 수 있어. 임마.
그때 주인이 때리면 저항없이 맞는다고 한다. 이런 경우 주인이 귀찮으니 내쫓는데 그는 반드시 돌아와 신고를 해달라고 부탁한다. 주인이 때리면 또 맞고 부탁한다. 때리다 분이 좀 풀린 사람이 폭행한 점이 꺼림직하여 신고하지 않으려 하지만 류영철은 이 점을 아주 끈질기게 안심시킨다고 한다. 신고만 하면 아무 소리하지 않겠다. 그러면 대부분 신고해서 경찰이 데려간다고 한다. 끄트머리에 가서는 그 주인도 경찰서로 끌려 가는 그에게 정신 차리고 살라는 말을 하며 선처해 달라는 말을 잊지 않는다. 냉혹한 사회에서 쉽게 믿을 사람이 없기에. 다른 경우도 있다.
- 아니 말로만 듣던 자가 이 자구만. 서울 전역 업소에 요주의 인물로 찍힌 무전취식자가 있다 해서 긴가민가했는데 말쑥한 차림을 했으니... 거참, 나이도 자실 만큼 자신 분이 불쌍하우.
알아봤다는 듯이 주인이 그에게 돈을 받지 않는 것은 물론 보시한 셈칠 터이니 그냥 가라고 해도 그는 막무가내이다. 잠자리가 없다면 종업원과 하루 정도는 끼어서 잘 수 있다고 말해도 요지부동이다. 그럴 때 주인이 무슨 생각이 들어서인지 일을 시키기도 하는데 그 경우 그는 절대 응하지 않는다. 주인은 하다하다 안 되어 말한다.
- 정말 딱한 양반일세. 원이라면 내 뜻대로 하리다.
주인은 할 수 없이 전화를 건다. 그리하여 그는 경찰서로 가면 나올 때처럼 예의가 바르게 인사를 한다. 인사하는 순서만 다르다. 그 뒤 형사보다 더욱 빨리 조서를 스스로 꾸미고 소지품을 잘 보관해 달라는 당부와 함께 모두 맡기고 간수에게 인사를 한 뒤 유치장에 들어감으로써 특별한 하루 일을 마치는 것이다.
이야기가 끝나자 다들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 여전히 독서중인 류영철을 바라보았다. 나도 그를 바라보았다. 취침 시간이었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이 이야기가 정말 사실일까? 아니면 지어낸 이야기일까?
- 부럽다, 부러워. 하루를 살아도 저렇게 살아야 하는데... 난 하고 싶어도 마누라랑 애새끼랑 먹여 살려야 하니...
- 쯔쯔. 부러워할 걸 해라. 이왕 사기치려면 크게 해야지. 그게 뭐냐?
- 너 같은 잡범이 인생을 어찌 알겠냐.
- 새끼. 누구 앞에서 폼 잡아? 친구 턱이나 나가게 한 주제에...
- 잠 좀 잡시다, 잠 좀.
폭행범과 사기꾼이 조용하자 이내 모두 잠으로 빠져 들었다. 나는 내심 폭행범의 말에 동조하고 있었다.
내 직업은 영세 출판사의 출판 기획가. 잘 나가던 학교 선배가 집안 돈을 끌어다 뜻있는 출판을 해보겠다면서 이벤트 회사를 그만 두고 잠시 쉬고 있던 나를 끌어들인 것이다. 처음에는 적자를 감수하고 상업적인 면을 의식하지 않겠다고 의욕을 내비쳤으나 경기가 악화되니 출판계부터 영향을 받아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진 대형 출판사가 쓰러지니 정신을 바짝 차릴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내놓은 책마다 초판 넘기기가 힘든데 돌아오는 돈 막으려고 동분서주하는 선배 보기가 너무나 안쓰러울 정도였다. 밀린 자금 때문에 벌써 두 달째 임금이 체불되었으니 선배도 내게 미안하고 나도 선배에게 미안했다. 자리 있으면 자기에게 미련두지 말라고 말하지만 어디 그러한가. 맺고 끊지 못 하는 성미가 있으려니와 내 나름대로 욕심이 있었던 까닭도 있다. 한번이라도 초판을 넘겨야 자존심이 서지 않겠는가.
- 저 기인의 자서전이라면 어떨까? <저승갈 때 백원만?> ...... 음, 너무 선정적이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망있는 비평가들에게 선생님 선생님하며 청탁을 드리면 돌아오는 소리는 대개 뻔했다.
- 어, 바쁜데... 아 그 기획 말이지. 이미 내가 아이템 잡아놓고 시일만 기다리고 있는데... '깨끗한 세상' 출판사랑 거의 이야기가 되고 있는 거야. 작은 데서 추진하기 힘들 걸.
필자들을 모아 <괴짜, 알고 보면 따뜻한 사람들>이란 기획물을 시도할 때이다. 간신히 승낙을 받아 안심을 했는데 며칠 뒤 전화가 와서 나온 말.
- 죽어도 난 그 작자와 함께 책 못 써.
서로 앙숙관계일지는 꿈에도 몰랐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유명하지 않은 필자일지라도 인간관계를 돈독히 해야 나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에 틈만 나면 회식을 가졌고 내가 계산을 했다. 필자들이란 것들이 보면 이상한 족속들이다. 먼저 말하지도 않았는데 돈 문제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끝에 꼭 하는 말이 있다.
- 가난해야 글을 잘 쓰는 시대는 갔어.
헛소리를 듣는 것도 한두번이다. 명예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신문 기사에 자기 이름이 실렸나 매일같이 확인하는 족속들이 이 작자들이다. 하여간 미안한 구색없이 뻔뻔스럽게 먹어치우는 것까지 좋다. 하지만 마치 나를 하인 대하듯한 태도 만큼은 참을 수가 없다. 선배 얼굴 보기 미안해 내가 그냥 몇 번 낸 돈이 아까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자신의 글로 아쉬움이라도 펼친다면 나는 무엇을 어디서 어떻게 펼치란 말인가. 선배한테는 터뜨리지 못해 계면쩍지, 필자한테는 하인 대접받지, 집에서는 월급 갖다주지 못 하니 미안하지 정말 사면초가가 따로 없다. 그러니 폭행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이런 것 다 떠나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떠나고 싶다. 이런 생각한 적이 어디 한두번이던가.
그러나저러나 지금 어느 때인데 내가 여기에 왔나. 업무 때문에 영등포 근처를 지나다 한총련 학생들인지 전경들에게 엄청 얻어 터지고 있길래 흥분해서 대들다가 여기까지 온 게 아니던가. 뚜렷한 신분이 있다고 아무리 말했지만 곧 보내준다고 하더니 들어온 지가 어제 저녁인데 벌써 하루가 지났다. 학생들이 열차 세우고 뛰어든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하여 마구잡이로 개패듯 패서야 되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나 같은 평범한 시민조차 잡아들여 별 조사도 없이 이렇듯 묶어둔다면 내 피해를 누가 보상해 줄 것인가. 내가 나가기만 해봐라. 언론사 친구에게 전화해서 서장 목들 다 나갈 줄 알아라. 이렇게 치를 떨고 있다 문득 인드라가 떠올랐다.
문화비평가 인드라. 그 또한 인간 말종의 하나였다. 말만 번지르르하게 잘 할 뿐, 하는 짓이 사기꾼 저리가라였다. 김종화라는 이름을 내건 자신의 소설이 안 팔리자 곧바로 얼굴없는 비평가 운운하면서 문학평론가 김민기로 필명을 바꾸어 활동하다가 그조차 그다지 소득이 없자 시류에 편승하여 시사평론가 인드라로 또 다시 필명을 바꾼 후 신문에 칼럼을 연재하였다. 문화 비평, 사회 비평을 하며 인지도를 높인 후 소설 팔아먹으려는 수작이라는 것은 이쪽 계통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다. 더욱 기막힌 일이란 코묻은 젊은 대학생들 푼돈이나 뜯는, 쓰나마나한 비평 글이나 써대면서도 마치 자신이 진보의 화신인양 떠들어대는 꼴이 역겹기 그지 없다는 점이다.
잔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느니, 시대의 정직함을 논한다느니, 진보 개혁의 앞길을 누가 가로막고 있는가 따위의 글을 쓰는데 아는 이들은 글을 읽은 뒤 마치 조율이라도 한 양 다음과 같이 말하고는 했다.
- 누가 누구를 욕하나? 더 한심한 놈이 앞장서서 비난하는 세상이니... 너부터 없어지는 것이 진보 개혁을 위한 길이야.
신문사 기자들에게 사석에서 은근히 물어보면 그들 답변이란 이러했다.
- 실력과는 상관없어. 논란이 많을수록 좋으니까. 그 녀석이 실력이 없는 지는 우리도 알아. 엔터네이너를 지나치게 신경쓰지 마.
나는 엔터네이너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다만 한두명 정도 필요하지 않나 여기고 있는 편인데 이 천박한 한국 사회에서는 학자란 없고 죄다 엔터테이너이니 문제인 셈이다. 더 우스운 일이란 이러한 사태를 비판하기는 커녕 오히려 학계에까지 대중화에 필요한 일이라는 식으로 높이 평가한다는 데에 있다. 모두들 자기 누울 자리를 보고서 대중화 운운하는 것이겠지. 필자들이란 다 이런가. 아무튼 그는 어느 글에서 리미라는 여성을 거론한 적이 있었는데 궁금하여 술자리에서 물어보니 실제 인물을 반영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녀에 대한 이야기 도중에 백원 이야기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혹시... 잠이 쏟아졌다.
아침에 일어나니 역시 류영철은 일찍 일어나 운동을 하고 있었다. 48 시간 내에 나는 나갈 것이 틀림없으니까. 늦으면 안 되지. 아침을 먹을 때 그의 옆으로 가서 앉아 말을 꺼냈다.
- 저 혹시 리미라고 들어보셨는지요?
그는 말없이 밥을 먹다가 나를 스치듯 쳐다 보았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성공이다.
<출처 :http://www.raspage.com>
리미가 중학교때 좋아했던 국어선생이 바로 류영철이었다. 그는 실제로는 총각이 아니라 삼십대 유부남이었다. 그는 또한 여학생들의 관심을 받지 않았고 별명조차 얻지 못했다고 한다. 리미도 평범하기 그지 없는 학생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잘 하지도 이쁘지도 않았고 말수도 적었고 좋게 말하면 몸매가 건강한 편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그저 그런 아이>가 그녀였다. 그러다 일이 터진 것이다. 선생은 수업시간 중에 지나가듯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 십대에 깡패짓, 이십대에 데모짓, 삼십대에 큰 사업하다 파산질을 겪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탄하기 그지 없는 내 삶이 가끔 돌아보면 너무 무의미한 것 같다.
모범적 생활을 강조해야 할 선생이 오히려 일탈을 바라는 말을 하니 학생들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도 잠시였을 뿐, 학생들은 그가 문학청년 티를 한번 내본 것이라 생각했다. 가끔 선생들은 학생들 주목을 끌어 보기 위한 것인지, 수업 진행을 원활히 하려는 것인지 과거 이야기를 뻥 튀겨서 말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들 말을 액면으로 다 받아들이면 이 학교에는 도저히 선생 자격이 없는 사람들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셈이다. 자기를 모르면 간첩일 만큼 주먹이었다느니, 연상의 여인을 짝사랑했는데 알고 보니 유부녀여서 그녀를 죽이고 자기도 죽을까 했다느니, 학교 다닐 적에 아주 말썽꾼이었다느니 말이다. 그런데 이야기들이 실로 다양했지만 결론 혹은 교훈은 언제나 일치했다.
- 나처럼 유혹에 눈 돌리지 마라. 성실히 공부해라. 너희들이 후일 철이 들 무렵이면 내 말을 떠올릴 때가 올 것이다.
따분한 설교투. 그리하여 학생들은 그의 말을 주목하지 않았다.
그러나 리미만은 주목했다. 특별한 까닭이 없었다. 리미 말에 따르면 이유가 없고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고만 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를 시험해 보고픈 충동이 일어났고 즉각 행동에 옮겼다. 교장에게 발신인 불명의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 내용은 아주 저속하기 짝이 없었다.
XX학교 교장 선생님께
저는 소규모 무역회사를 다니는 회사원이에요.
류영철 국어선생님이 다른 학교에서 있을 때 학생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선생님이 나를 부르시더니
남이섬에 가자고 하시고는 남이섬으로 끌고 가서
차마 말 못할 짓을 저질렀습니다. 흑흑...
그래도 그가 기다리면 아내와 이혼하고 자기와 결혼한다 그래서
그후로도 몇 년간 계속 만나며 관계를 가졌는데
다른 여성을 만나는지 이제는 만나지 말자고 해요.
그간 결혼하자면서 저한테 수없이 가져간 돈은 아깝지 않아요.
하지만 오로지 그만을 믿고 살아왔던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교장 선생님, 저는 지금 죽고 싶은 심정일 뿐이에요.
하지만 고민을 거듭하던 끝에 결심을 하고
자기 같은 희생자가 더 나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이렇게 편지를 보내게 되었습니다.
교장 선생님, 이 지경에 이르러 제가 무엇을 더 바라겠어요?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어요.
그가 다시 제게로 오기를 바라지는 않아요.
다만 그가 한 여자의 충실한 남편으로,
학생들에게 정직한 국어선생님으로 살기를 바랄 뿐입니다.
끝으로 이름을 밝히지 않습니다.
이유는 저보다 교장 선생님이 더 잘 아시겠지요.
눈물방울이 군데군데 찍혀 있기까지한 편지였다. 교장은 매우 용의주도한 분이었다. 교장이 선생을 조용히 불러 편지를 보여주며 진상을 물어보았고 선생은 강력히 부인했다. 교장은 누군가가 모함하거나 장난할 목적으로 보낸 것이라 여기고 간단한 당부를 일러준 뒤 선생 말을 신임하고 편지를 소각했다. 그러나 이러한 일이 대개 그러하듯 결백을 주장한다고 끝나는 일이 아니다. 소리없이 소문이 퍼졌다. 이후 학생들은 물론 동료 선생까지 국어선생을 멀리하는 눈치였고 결국 국어선생은 타학교로 가게 되었다.
그후 리미는 어찌된 일인지 매우 자신있는 삶을 살게 되었고 또한 나날이 이뻐졌다. 리미는 곧 그와 그 사건을 잊었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여서 졸업한 뒤에 기억나는 선생 이야기를 할 때면 그의 이야기가 나오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반면 그 사건 이후로 학생들과 교사들 사이에서 무슨 까닭인지 리미가 늘 화제거리가 되었다. 평범하기 그지 없던 리미가 그 사건 이후로 주목을 늘 받았다는 것이다.
세월은 흘러 리미가 졸업하여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때에 리미가 우연히 길거리에서 그와 재회를 했다는 것이다. 그녀가 반갑게 아는 척하니 그도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그는 별 일 없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녀는 다시 그를 골려주고 싶어졌다. 가까운 커피 전문점에 가서 차 한 잔을 마시며 그녀가 말했다.
- 선생님, 그때 전근가실 때 제가 얼마나 슬퍼했는지 몰라요. 아세요?
- 그런가. 나는 경황이 없어서 말이야. 나를 생각해 준 학생도 있었다니 매우 고맙군.
- 선생님, 있지요? 편지 기억 나세요? 백원짜리 동전이 있는 편지...
선생은 매우 충격을 받은 듯 그녀를 쳐다 보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선생이 전근을 간 뒤 선생 집으로 선생님 소원을 풀어드리게 되어 기쁘다는 내용과 차비로 쓰라는 백원짜리 동전이 동봉된 편지가 왔었다. 소문이 나기는 했지만 대개 과장되기 일쑤인지라 전후사정을 소상히 아는 이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사태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교장실에서 보았던 필체와 같았다. 선생은 분통을 터뜨렸으나 어쩔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선생은 그녀를 한껏 노려보다 창가 너머 빌딩숲을 바라보며 휴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 다 지나간 일이지. 결국 내가 판 무덤인 걸.
선생은 그녀를 용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리미는 생각이 달랐다. 용서받고 싶지 않았다.
- 제가 무엇을 잘못했다고 용서를 받나요? 오히려 칭찬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선생님은 순탄한 삶을 바꾸고 싶어 했잖아요? 결국 선생님은 말만 번지르르하게 깡패짓이니 데모짓이니 하시고선 실제론 영 딴 판이라는 것이군요. 그러니 선생님께 충실히 수업을 받아 행한 제가 선생님에게 용서를 하느냐 마느냐 할 입장이 아닌가요? 그리고 전 선생님을 용서하지 않겠어요. 아시겠어요? 이 위선자.
선생은 할 말을 잃었다. 리미는 그런 선생을 내버려 둔 채 아주 통쾌하게 웃으며 커피 전문점을 나왔다.
이 이후 이야기는 내가 인드라에게 들은 이야기다. 리미는 인드라를 만났고 인드라에게 이 일을 고백했던 것이다. 인드라는 그녀의 종교적 예식인 눈물을 흘리기하면서 자신의 무용담을 말하는 리미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그리하여 나온 글이 <아임 PROBLEM>이라는 소설이었다.
내가 왜 이런 사실을 그대로 쓰지 않느냐 말하니 인드라는 관점이 중요하다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 작가의 소명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단지 현상이다. 현상을 작동케 하는 진실이란 우리가 통상 알고 있는 상식과 괴리되는 일이 대부분이어서 진정한 현실을 알려면 본질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런 인드라를 보며 저것도 인간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인드라도 국어선생처럼 리미에게 보기 좋게 당했다. 리미는 이후 등단하여 <도망친 악마>라는 단편을 내기도 하였다. 주인공이 매우 파렴치한 작가였는데 인드라를 아는 사람들은 모두 그일 것이라고 단정할 수 있었다. 단편이 매우 섬뜩했기 때문에 즉각 회수되었지만 인드라의 명예는 실추되었다. 나는 인드라가 술자리에서 고통을 호소할 때 겉으로는 위로를 했으나 내심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유치장의 아침은 을씨년스러웠다. 침침한 데다가 변기통에서 나는 냄새가 고약스럽기 짝이 없다. 그럼에도 똥간 가까이 앉은 류영철은 식사를 마치고 조용히 있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특별한 이유없이 아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한번도 그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던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의 고집을 꺽지는 못했다. 그후 그는 아내와 아이와 재산과 직장을 두고 홀홀단신으로 길거리에 나왔고 지금까지 이런 생활을 거듭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문이란 믿을 것이 못 된다. 그가 유치장을 들락거렸다는 점과 형무소는 가지 않았다는 점, 누드화를 보는 것과 백원짜리 동전 이야기만 사실이었다. 그는 누드화를 보며 자신의 위선에 몸부림쳤으며 백원짜리 동전을 보면서 리미가 자신에게 준 교훈을 곱씹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무전 취식 생활은 폭력범이 부러울 만큼 멋진 것이 아니었다. 고통 그 자체였다. 그는 거리에 나와 쏘다니다 도둑질을 할 수 없어 쓰레기통도 뒤지고 구걸도 하며 잠을 자다가 아무 음식점에 들어가 무전 취식도 한 모양이다. 그는 무척 괴로워하고 있었다.
- 나는 그간 내가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해 환상을 키워왔어. 그런데 그것이 막상 현실이 되니 아무 것도 아니야. 나는 평범한 직장에서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어. 아무리 무미건조하더라도 말이야. 그게 날라리들의 소원이라고. 그런데 날라리들은 현실에 막혀 도저히 그게 되지 않는 거야. 이제서야 나는 그들처럼 된 셈이지. 하지만 이조차 그들에 의해 포장되니 멋들어진 삶이 되더군. 난 더 이상 그들을 탓하지 않아. 나 또한 수도 없이 포장된 이야기를 설교했었거든. 행복하게 살려면 포장해야 되기 때문이지. 그러는 동안 진짜 날라리들은 불행하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지. 아무도 모르게 말이야. 너무나 유치해.
그때 나는 차갑게 말했다.
- 내 정체를 이미 파악했군. 감히 내 앞에서 유치하다는 말을 또 다시 지껄이다니...
- 당신이 유치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아차렸지. 하지만 나는 운기조식을 통해 이미 기력을 회복한 상태이니 말이야.
- 이번에는 내가 주인공이다. 무슨 이유로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지?
- 당신들도 평범한 인물에 불과함을 독자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지. 당신들의 내면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한 사람들이 꽤 많거든. 가령 한총련 시위를 바라보는 당신네들 내면 말이야. 우리 시대에 누가 빨갱이겠어? 나? 당신? 김일성? 한총련 학생? 아니면 전경? 청와대? 빨갱이는 없어. 다만 아임 PROBLEM일 뿐. 내가 당신이란 사이보그를 만든 건 오로지 그 때문이야.
- 후후. 과연 그럴까? 당신이 빨갱이이든 아니든 우리 비밀조직 입장은 상관없다. 다만 과거에도 그러했듯 널 처단할 간단한 방법이 빨갱이라면 우리는 어떤 감정적 동요도 없이 너를 빨갱이로 만들지. 이것이 진실이다.
- 그렇지. 그것이 네 놈들 수법이지. 그런 너희가 언젠가는 또 혁명군으로 나타나 나를 반동분자로 내몰고 처단하겠지?
- 안 그럴 이유가 있을까? NO PROBLEM이지. 아무튼 더 이상 말장난할 필요는 없을 듯한데.
- 날 죽이기 쉽지는 않을 걸. 여기는 유치장이야. 공공 장소라고. 네가 날 함부로 죽일 수는 없을 걸?
- 바보 같은 소리. 우리가 전두환을 시켜 광주시민을 백주에 학살한 것을 잊었나? 여기 있는 모두는 곧 우리를 잊게 될 것이다. 그들은 꿈을 꾼 것에 불과할 것이다. 교과서는 우리 편이니까. 하나만 말해 주지. 이미 우리 비밀 조직이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따라서 전두환은 사면될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그는 일회용이지. 그를 봐주기 위한 것이 절대 아니야. 이제 그는 정국을 움직이는 소모품에 불과해.
- 나쁜 녀석들. 좋다. 어디 죽여 봐라!
- 지난 번처럼 터미네이터에 나오는 아놀드 슈왈츠제네거 흉내내기 전에 죽여야겠다. 넌 악의 무리가 틀림없다. 그런 쓸 데 없는 짓을 유포시키다니. 죽어랏!
나는 그에게 천상천하유아독존 장풍을 날렸다. 이 장풍은 달마대사 이후 소림사 직계제자들에게 전설로만 내려왔던 비기였다. 아울러 이 장풍은 우리 비밀조직 일원인 달마대사가 조직의 명을 받고 중국을 장악하기 위해 처음 사용한 후 한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비밀 조직이 다시 이 장풍 사용을 허락한 까닭은 사태의 심각성 때문이다. 소림사를 통한 중국 장악 방식보다 당을 통한 중국 장악 방식을 택한 중국 문화혁명 이후 조직은 소림사 명맥을 끊어버림과 동시에 장풍도 폐기하려 했다. 그러나 한국 지부가 긴급 사태 발생으로 특별히 본부에 상황을 보고하였고, 보고를 받은 비밀조직 본부가 그의 글에서 나를 찾아내었던 것이다. 그는 나를 만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의 의지와 무관한 존재가 되어 비밀 조직의 일원이 된다. 예전부터 그래왔다. 그가 창조한 모든 인물들이 그러하다. 한국지부는 나를 중국 지부에 급파시켰고 이 때문에 한중 수교가 이뤄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사이보그인 나는 재프로그래밍을 받아 임무 수행을 위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그를 찾아 한총련 사태를 빌미로 유치장에 들어온 것이었다.
- 역시 사이보그는 할 수 없군. 내가 이번에는 왜 주인공을 마다했는지 모르는군. 이번에 죽는 건 내가 아니라 자네이기 때문이지. 이미 나는 정보를 입수한 바 있다. 자! 받아랏!
끄으으응! 똥권!!!
이럴 수가. 천상천하유아독존 장풍이 이름도 더러운 똥권에게 당하다니.
원제목 비상에서 운명으로, 다시 격정으로 바꿉니다. 재수정을 했거든요. 처음에 쓸 때도 고민이었는데... 나는 로맹 롤랑, 발자크, 슈테판 슈바이크를 좋아합니다. 불어도 모르면서 파리에 있는 발자크 기념관에 가서 서성이던 생각이 떠오릅니다. (사실 가장 좋아하는 작가는 도프스예프스키지만...)
"자기 작업에 체계적인 외형을 부여하고 있는 철학자들, 예컨대 스피노자에게서조차, 그의 체계의 참된 내적 구조는 그가 체계를 의식적으로 서술한 형식과는 전혀 다르니까.; 마르크스; 라쌀레에게 보낸 편지; 1858년 5월 31일"
"철학과 종교는 모두 진리를 대상으로 한다. 물론 그것은 진리는 신, 아니 신만이 진리라고 하는 가장 숭고한 의미에서 그러하다.; 헤겔; 소논리학"
"라이프니츠, 스피노자, 데카르트, 조르다노 브루노, 캄파넬라는 결코 철학교수들이 아니었다... 일찍이 라이프찌히에서는 철학교수들이 변증법에서조차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서 벗어나지 않기로 정식으로 단결했다...... 오늘날 우리의 대학은 이것들보다 더 높고 더 자유로운 입장에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철학에 대한 반동에 감사를 바치라. 높고도 정당한 감사를 바치라! ; 포이어바흐, Zur Beurteilung der schrift : Das Wessen des Christentums; 독일연보; 1842"
"헤겔은 자신을 가장 위대한 아리스토텔레스 학도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모든 개체에 존재하고 있는 '능동적 이성'이라고 정의한 것을 '주체인 실체'로 바꾸었다.; 우찌다 히로시, 마르크스의 요강과 헤겔의 논리학"
"마르크스가 헤겔을 비판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바로 헤겔적으로 말하고 있는 곳에서다. 요컨대 미세한 차이, 사소한 수정에서이지 '근본적인 전도'에서는 아니다...... 마르크스는 많은 곳에서 헤겔을 비판했지만 그것들은 거의 무시해도 좋다. 읽어야 할 곳은 그가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는 곳, 헤겔과 근접해 있는 곳이다.; 가라타니 고진;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저는 종종 우리 문학의 소심함을 걱정했었습니다. 발자크가 소생할 수 있다면 그는 우리 시대에서 무엇인가를 이루어냈을 겁니다! 20편의 소설로 위대한 서사문학을! 저는 역사가 오늘날의 실질적인 생활을 모르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역사는 전투와 회담만 서술할 겁니다. ; 슈테판 슈바이크; 로맹 롤랑에게 보낸 편지; 1922년 6월 17일"
아임 PROBLEM - 격정
인드라
22. 용기
얼음의 눈송이를 날리면서 가슴의 아픔을 노래불러 보자.
안 들리네. 모든 말, 나는 귀가 없소.
어이 울러보리까. 어설피 울어도 힘껏 용진 하여라.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에서
<출처 : http://www.sungeo.com/bbs/schbrt/sch-winter.htm>
밤이면 흡사 묘지처럼 변하는 도심 빌딩 어느 지하 주차장. 비상등만이 해쓱한 달빛마냥 남녀를 비추고 있다. 반바지 차림을 한 남자는 여자를 보고 있다. 여자, 옷을 남김없이 벗고 맨바닥에 누워 있다. 여자 바로 곁에는 가지런히 포개져 있는 신발과 청바지와 흰 브라우스와 속옷이 있다. 남자는 연신 흘러내리는 이마에 땀을 닦으며 여자에게 말한다.
- 눈 떠. 이제 시작이다.
- 응.
여자는 마치 햇살에 눈부신 양 가늘게 눈을 뜬다. 남자가 자기를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자 가볍게 양미간을 찌푸린다.
- 그런데...
- 뭐. 또 할 말 있나?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있잖아. 꼭 이렇게 해야 해?
- 다른 길은 없다. 운명이다.
운명. 여자는 짧게 되뇌이고 그를 잠시 보다 입술을 질끈 깨물며 말한다.
- 응. 준비되었어.
여자가 말을 마치자마자 남자는 여자 옆에 무릎을 끓고 손을 들어 서서히 여자의 이마를 짚어간다.
- 이마. 굴곡이 없고 평평한 삶. 그것이 내 유년기였다. 나는 하늘과 한패였으며 땅을 하인부리듯 뛰어다니며 마음대로 살았다. 오줌을 깔기고 싶으면 흐르는 시냇물에 시원스레 쌌고 갈숲에서 아무렇게나 누워 잤다. 거칠 것이 없었다. 그러다 하나씩 주름살이 접혀 지면서 하늘이 나를 배신하고 땅이 나를 배신하기 시작했다. 술래잡기하는 줄 알고 숨어 있기를 좋아했는데 너무 잘 숨은 탓인지 그들은 나를 찾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영영 술래가 되버린 것이다.
남자는 말을 마치자 그녀의 이마에서 눈으로 손을 움직인다. 남자의 손이 왼쪽 눈에 닿자 여자는 왼쪽 눈을 감은 채 오른쪽 눈꺼풀을 파르르 떤다.
- 눈. 두뇌 깊숙이 빠져 드는 통로. 그것이 내 청소년기 전반부를 형성했다. 내가 세상이 아니었다. 볼 필요가 없었던 모든 것들이 죄다 보였다. 보기 싫어도 보아야 했다. 나는 그제야 깨진 세상을 본 것이다. 그러나 단 하나 나는 태양을 볼 수 없었다. 마주하려 똑바로 쳐다 보려 했지만 왠지 볼 수 없었다. 눈이 부셨다. 나는 할 수 없이 눈부시지 않은 것들만 보아야했다. 이해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이해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니란 것을 내가 이해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해해야 했다. 이해하지 않으면 내가 본 모든 것들 때문에 미쳐버리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또 손을 움직인다. 이번에는 코다. 여자는 감았던 한쪽 눈을 뜨면서 남자의 눈을 본다. 들떠 있기는 하지만 차분한 걸 싸그리 망각한 눈빛이 아니다. 여자는 자신이 투명한 줄에 꽁꽁 묶여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뿐이다. 더 이상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
- 코. 입을 꽉 다물고 있기 위해 필요한 더러운 동굴. 그것이 내 청소년기 중반부였다. 나는 수음을 하며 치를 떨었다. 음습한 바람이라도 불면 홍등가 근처를 슬며시 나돌았고 교과서에 여자라는 단어만 나와도 발정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거들떠 보지 않았다. 어른들은 이런 나를 경멸한다는 듯 보란 듯이 모든 것을 금지시키고 자기네들끼리만 즐겼다. 물어볼라치면 콧바람을 휘날리며 나중에 나중에만을 지겹도록 되풀이했다.바보 같은 놈들.
남자는 여자의 코를 잡아 살짝 비튼다. 영문을 모르는 여자는 무엇인가 말하려다 침묵하기로 한다. 눈가에 이슬이 찔끔 비친다. 또 다시 코에서 입으로 향하는 남자의 손. 여자는 안도의 숨을 내쉰다.
- 입. 항문까지 들여다 보이는 속내를 동분서주하며 막는 혓바닥. 그것이 내 청소년 말기였다. 잘근잘근 씹어대었고 혀를 날름거리며 삼켰다. 그냥 삼키는 것은 내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기다림은 실로 쓰라리지만 가치있는 것이었다. 인내를 요구했고 나는 그에 부응하여 쓴 맛이 날 때까지 씹고 또 씹고 핥았다. 선생들은 하나 같이 미친 놈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씹지 않는 한 내 속에서 소화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 전략이었다. 나도 미친 놈이 된 것이다.
- 미친 놈...
그때서야 여자는 약간 깊은 생각을 한다. 오늘 처음 만난 남자와 여기서 이런 일을 하리라 상상이나 했을까. 여자는 친구와 약속이 있어 종로에 나왔다. 역삼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종각역에 내려 계단을 올라고 있을 무렵이다. 남자가 다가온다.
- 저, 한 말씀 여쭙겠습니다.
- 바빠요.
여자는 빼어난 미인이 아니더라도 킹카 소리를 가끔 듣는다. 키 167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과 날씬한 몸매. 여자 각선미 또한 훌륭한 편임에도 여자는 가끔 너무 무더워 참을 수 없을 정도의 날만 아니라면 청바지를 고수한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수수한 옷차림과 샌달 차림. 그러나 이 또한 종종 남자들이 데이트 신청을 요구하여 그때마다 거절하는 청순미가 있다. 여자는 흘낏 남자 얼굴을 본다.
-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야. 하지만... 어딘지 귀여운 구석이... 훗. 내가 무슨 생각을.
여자는 숫기만 잔뜩 부릴 줄 알지 거칠기만 한 동년배 청년들에게 아무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무엇보다 정신연령이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내 온 몸을 그대에게 바치노니 애절한 내 몸을 받아주시오 식의 무책임하고 깊이 없고 진부하기까지 한 구애에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여자는 자문자답을 했다. 여자는 어려서부터 멋진 프로포즈를 받는 것을 꿈꾸어왔다. 이런 구애들이 성가시기만 하였다. 때로 괜찮은 남자다 속으로 여겨 마음에 두고 있다가도 실망한 적이 있다. 남자들은 조금만 치켜 세워주면 자기 잘난 맛에 터무니없는 소리만 해대고는 하지. 여자는 속 뜻 헤아질 줄 모르며 집 앞에서 마냥 서성이던 남자를 떠올린다.
- 멍청한 자식. 그대로 죽는다느니 하더니만. 죽어라, 죽어.
제법 새벽까지 있는 듯하더니 그마저도 포기하는 자들. 그러고 나서 여자는 요상한 동물이라느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느니 친구들에게 떠들어대니... 화도 났지만 더 이상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에게 흥분해봐야 손해이지. 여자는 잘 잊는다. 특히 이런 일은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그러다 어떤 비슷한 일이 닥치면 냉장고를 열면 먹을 것들이 수북하듯이 떠올린다.
- 훗. 최소한 내 냉장고에는 빈 적이 없어.
그때 남자는 다시 말한다.
- 도에 관심이 있습니까?
- ...................
여자는 말하는 남자를 빤히 본다. 그렇게 보이지 않았는데 도 타령을 하는 것보니 이상한 자로군. 여자는 재빠르게 생각을 굴린다.
- 맞아. 언젠가 어떤 언니가 말했었어. 도에 관심이 있냐, 전생이 보인다 그래서 따라갔더니만 이상한 한복을 입히고 나더니 종교에 들라고 했다는 이야기 말이야. 알고 보니 엉터리였다고. 언니더러 조선 시대때 유명한 장군이었는데 나라에 죄를 지어 여자로 태어났다나? 끝없는 윤회를 막고 번민을 멈추기 위해서는 천제님을 모셔야 한다 어쩐다 그래서 놀라 도망쳐 나왔다는 거였지. 듣던 우리들이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자기 일처럼 분개하고 열을 냈던 일이 기억이 나.
여자는 이 남자도 결국 그런 류라고 생각되니 꼬박꼬박 답변할 일이 아니라 여긴다.
- 자리를 피해야겠어.
여자는 생각을 마치자 서둘러 계단을 올라간다. 종로서적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 아직 이십여분 시간이 남았네.
그런데 남자가 다시 나타난다.
- 영화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를 보셨지요? 지금 여기가 그 방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도 없고 당신과 내가 여기 있습니다. 당신은 사람을 기다리지만 결국 찾는 사람은 나라는 사실을 아셔야 합니다.
- 저 사람이 내가 영화를 본 것은 어찌 알았을까.
여자는 문득 남자를 처음 볼 때부터 느낀 야릇한 감정을 떠올린다. 귀여운 구석. 낯설어 약간 두렵지만 그래서 오는 친근함. 살짝 한꺼풀 옷이 벗겨진 느낌이 드는 억양. 여자가 남자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태도에서 깨끗한 이미지를 받는다.
- 최소한 능글맞은 남자는 아닌 것 같아.
여자는 다소 수그러들었지만 여전히 냉냉한 말투로 말한다.
- 그 영화 보긴 했지만 별로였어요. 친구를 기다리지만 댁은 아니군요. 그만 귀찮게 하시죠?
- 영화 비터문을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을 찾아 온종일 시내를 찾아 헤매는 사람입니다. 결국 당신을 찾았습니다. 이렇게 만났습니다.
- 그건 보았어요. 말씀하시는 것마다 다 맞지 않는군요. 나는 댁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사람이예요. 친구 올 시간 무료하지 않게 해주어서 고맙긴 하지만 번거롭군요. 일 보시죠, 알아 들을 분 같으니...
갑자기 크랜베리스의 프리티가 크게 들리다 서서히 멀어진다. 길보드노점상 테잎에서 나는 소리일까.
- 비터문을 보았으나 역시 별로였어. 여주인공이 아름답지 않아서일까. 하지만 마지막에 여자끼리 하는 장면이 추해 보이지는 않았는데... 어머, 내가 무슨 생각을.
약간 마른 체격에 큰 눈, 옆머리를 짧게 쳐올린 헤어스타일...
- 착하게 생겼네.
남자의 발끝을 흘낏 보며 친구를 기다린다.
- 오지 않을 듯 싶습니다. 아마 라이프찌히로 떠났을 겁니다.
- 라이프찌히?
여자는 소스라치게 남자를 바라 본다. 남자는 어느새 손을 가슴으로 가져 가고 있다. 여자의 가슴은 다소 야트막하다. 남자, 여자 가슴을 쓸어내리다 움켜진다. 여자는 마른 기침을 한다.
- 유방. 주물러 한없이 들어갈 것만 같아도 막상 움켜쥐면 팽팽한 긴장. 그것이 내 청년기 도입부였다. 나는 미치고 싶지 않았다. 나이가 들면 달라질 줄 알았다.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고 느슨한 휴식을 취할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끝 간 데 없이 빠져 들다 깨어보면 식은 땀. 어디에고 비극뿐이었다. 바보로 살고 싶지 않았다. 바보, 바보, 바보 이 녀석 차라리 죽어버려. 그러나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지 않은 영혼에 꽃을 바쳤다. 너를 핥고 싶어. 네 무덤에서 도망쳐 나와 어디로든 날아가고 싶어.
여자는 남자의 다가오는 입술을 막지 않는다. 젖꼭지가 몽실몽실 피어오른다. 내 꽃향기를 대신 맡아. 남자는 길게 숨을 내쉰다. 꽃씨가 멀리멀리 여행을 떠날 채비를 해야지. 여자는 입술을 살짝 벌린다. 남자는 여자의 젖무덤을 핥아가며 손을 배꼽으로 가져간다. 여자는 손을 들어 그의 목을 안으려 한다. 남자는 다시 일어난다.
- 배꼽. 사방으로 탁 트인 대로를 달리다 추락한 슬픔. 그것이 내 청년기 중반이었다. 꿈마다 찢어진 날개로 힘겹게 퍼덕였다. 머언 산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황폐한 사막이었다. 아무도 없었다. 다시 돌아오면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날개를 숨겨 집들을 찾아 다녔다. 반갑지 않게 맞이하는 이웃들, 이웃들. 하의를 입지 않은 사람들이 숨은 몽둥이를 들고 나를 때렸다. 난 낭떠러지에 떨어졌다. 난 날개가 없다. 없다. 없다. 그러나 거짓말. 난 왜 내가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모른 체 해야만 했다. 살려만 달라. 죽고 싶지 않아.
남자는 일어나 바지와 팬티를 한꺼번에 까내린다. 여자는 남자의 물건을 똑바로 보지 못한다. 남자는 앉아서 자신의 성기를 여자의 눈가까지 가져 간다. 그리고 비벼댄다. 여자는 외면할 이유가 없다 여겨 남자 것을 정면으로 응시한다. 역시 구멍이 있다. 남자는 여자를 날카롭게 쏘아보다 배꼽에 사정한다. 오줌이다. 줄줄 흘러 숲을 적시고 여자의 음부까지 흘러간다. 여자는 흠칫 놀라지만 남자의 눈을 회피하지 않으려 한다. 남자는 천천히 눈을 돌려 배꼽으로 향한다. 바다였다가 가로 막혀 호수가 되어 버린 사해. 아무리 무거운 것일지라도 들어올리겠다는 듯이 혓바닥이 부유하듯 춤을 춘다. 남자의 입술이 차츰 물줄기를 따라간다. 여자의 숲에서 거의 말라가는 폭포 잔해를 남자는 손으로 퉁겨낸다. 남자의 입술과 손이 만나자 여자는 남자의 손을 만지려 한다. 남자는 입을 떼고 여자의 음부 깊숙이 손을 집어넣는다.
- 그걸 어찌 확신하지요? 정말 있다고 믿으세요?
- 믿지 않는다고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와 가시겠습니까?
- 아니요. 가지 않겠어요. 사람 잘 못 보신 것 같군요.
- 틀림 없습니다.
- 틀림 없다 해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럼 안녕히.
여자는 인파를 헤치고 인사동으로 간다. 우연은 없다. 남자는 따라갈 듯하다 허탈한 듯 멍하니 서 있다. 마치 이게 아닌데 아닌데 하며 사라져 가는 여자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여자, 까페 <섬>에서 우두커니 친구를 기다린다. 길거리 배포용 잡지를 볼까. 여자는 페이지를 건성으로 넘기다 덮는다. 정말 오지 않는 것일까. 여자는 마저 있는 커피를 후루룩 마신다. 혹 그 남자가 계속 기다리고 있다면. 여자는 마치 앞에 사람이 있기라도 한 양 고개를 가로젖는다. 여자는 일어선다. 계산을 마치고 까페를 나선다. 여자의 한 손에는 잡지가 있다. 여자는 무엇에 홀린 듯 한참 걷다가 잡지를 들고 있음을 알게 된다. 택시가 온다. 여자는 불러 세워 타면서 길에 그냥 버린다. 택시가 출발한다.
- 성기. 담벼락에 기대어 일어나 머리를 벽에 짓이기는 허무. 그것이 내 청년기 후반이었다. 취하면 취하는 대로 걸어가 탁자를 뒤엎고 술병을 던지고 차를 때려 부수고 주먹질을 하고 길게 길게 울부짖었다.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아무 데도. 그냥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차도에 뛰어들었다. 끼이이......... 미친 놈. 그래, 나 미친 놈이다. 어쩔래. 비라도 온다면 좋겠다. 수분 듬뿍 뿌려 마른 땅 흠뻑 적시게. 그러나 깨어나면 생의 욕정이 돌출되었다. 새벽에 벌컥 벌컥 물을 마시고 서럽게 울다 어둠 속으로 주먹질을 해대었다. 개새끼. 너 같은 놈은 죽어야 해. 내 성기에 멍이 들었다.
여자는 망연히 비상등을 본다.
EXIT.
여자는 빠져 나갈 구멍이 있어도 나가고 싶지 않은 갈증을 느낀다. 여자는 남자의 머리를 움켜 쥔다. 힘을 준다. 남자는 마구 머리를 뒤흔든다. 여자는 일어나 남자를 껴안는다. 남자의 입술을 찾는다. 남자의 입가에 오줌 물이 배여 있다. 여자는 천천히 핥는다.
남자도 여자의 혀를 찾아 꽉 문다. 다 빨아들일 것처럼. 여자는 혀를 내맡긴 채 흐느적거린다. 남자는 여자의 이빨을 핥는다. 어금니에서 다른 쪽 어금니까지. 여자는 서서히 손을 움직여 남자의 성기를 잡는다. 남자는 거침없이 여자의 속으로 들어간다. 여자는 남자의 등을 꽉 껴앉는다. 남자는 말하려 한다.
- 하지 마. 더 이상. 더 이상은 안 돼.
- 그.래.도.우.리.는. 라.이.프.찌.히.에.가.야.하.잖..
- 저/처/음/이/에/요.
여자의 기억이 여기까지 미칠 때쯤 세이가 걸려왔다.
See the stone set in your eyes
See the thorn twist in your side
I wait for you
Sleight of hand and twist of fate
On a bed of nails she makes me wait
And I wait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Through the storm we reach the shore
You give it all but I want more
And I'm waiting for you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And you give
And you give yourself away
My hands are tied
My body bruised, she's got me with
Nothing to win and
Nothing left to lose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yourself away
And you give
And you give
And you give yourself away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 can't live
With or without you
With or without you
INDRA 까꿍 ^!^
juglae 정말 지겹다, 지겨워
INDRA 뭐가? 내가 SAY 거는 거?
juglae 아니, 사는 게 지겹다.
INDRA 그런가 부지.
juglae 훗. 너 가만 보니까 쪼가 붙었구나. 말하기 곤란하면 그런
가 부지야.
INDRA 마자.
juglae 마자도 그래.
INDRA 쩝. 뭔 말을 몬 하겠네. 앙~
juglae 히히. 성공했다.
INDRA 뭐가?
juglae 내가 지금 그런 상태라구.
INDRA 헉~~~ 미안해. 오늘 일이 있어서 약속 못 지켜서.
juglae 씨이. 뭐 난 맨 날 너한테 당하고만 살란 법 있어?
pp666 왜 침묵하고 있습니까? 많이 아픕니까?
juglae 전 눈물 따위 흘리지 않아요.
juglae 왜 암말 안 해?
INDRA 화장실 다녀왔어. 아참, 내 글 봤어?
juglae 으응. 아니. 안 봤는데?
pp666 아임 PROBLEM 이야기 계속 하시겠습니까?
juglae 그래요. 그는 정말 라이프찌히에 간 것일까요?
INDRA 끙. 시간나면 한 번 봐봐.
juglae 아라쪄.
pp666 갔을 것입니다. 아. 그렇게 말하니 저도 자신이 없습니다.
juglae 그가 두려워져요. 저만 그럴까요? 김민기님?
pp666 저는 최근 그에게 말했습니다.
juglae 뭐라고 말했나요?
pp666 통신에서 그대를 만난 건 우연이었을까. 내가 오아시스를 찾아 광활한 사막에서 허덕이며 그대를 만날 준비가 되지 않았음에도 그대는 내가 가보고자 하는 온갖 게시판에서 정글의 독거미들과 싸우며 헤치고 나아가니 말이다. 한때 내가 주인공을 꿈꾸던 엑스트라 역할을 자임했듯이 그대는 목숨을 내 놓을 듯 거침없이 시대를 만난 듯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보니 그대가 날 볼 수 없는 거리에서 나는 그대를 보게 되었다.
juglae 현학적이어서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pp666 제 말은 일종의 나르시즘이라는 것입니다. 나르시스는 자기 얼굴을 보고 반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죽었지요.
juglae 그렇다면 누가 진정한 나인가요? 그인가요?
pp666 그일 수도 있고 나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서로 거울을 통해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juglae 거울이요?
pp666 네. 거울입니다. 거울을 통하지 않으면 영영 볼 수없는 것.
juglae 그렇다면 그대가 날 볼 수 없는 거리에서 나는 그대를 보게 되었다라는 마지막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거울 속의 당신이 당신을 본다는 것이로군요. 그렇다면 그는 정말 당신을 보지 못할까요?
pp666 그렇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완전한 타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가 거울 속의 얼굴을 자기로 알았다면 그토록 사랑할 수 있었겠습니까? 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로 부터 영혼을 받아 살아난 나 또한 그런 운명일 수밖에 없습니다.
juglae 운명. 어쩐지 슬프군요. 막 회피하고 싶어요.
pp666 그가 날 가만 두지 않는 한 저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마주보며 달리는 기관차 같이 서로를 격렬히 충돌시키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juglae 그것이 결론인가요?
pp666 아닙니다. 저는 그에게 계속 말했습니다.
juglae 그럼, 말씀하세요. 듣고 있겠어요.
pp666 친구여. 이제 나를 막다른 길로 내친 골목길을 그대가 가고 있는가. 사이버스페이스가 제공한 자의식의 담벼락을 무너뜨리는 그대. 그대가 정녕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나는 그대의 장난에 나는 한없이 괴롭다네. 그대가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내가 그대일 지라도 말끝을 묘하게 내며 아직 시작된 잔치조차 없음을 한탄하는 나를 가만 놔둘 리가 없지. 그래서 그대 말에 저항할 수 없네. 내 자아가 한없이 흩어지고 내 눈이 한층 게슴츠레 해지고 내 입이 그대의 입술에 목말라하지만 그대의 눈빛을 똑바로 볼 수가 없다네. 내가 준비 할 수 있는 여력을 준비하지 않는 못마땅한 사회만을 나는 탓할 수 있을 것인가.
juglae 잠깐만요. 괴롭다는 걸 그가 모른다는 말인가요?
pp666 그렇습니다.
juglae 이해할 수 없군요. 당신이 안다면 그도 알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pp666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소설거리를 구상하며 걷다가 슈퍼가게에 왜 왔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말입니다. 그는 완전히 빠져 있습니다.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juglae 그래도 풀리지 않아요. 그렇다면 그는 그렇다치고 당신은 어찌 아나요? 당신이 그의 거울이라면 말이예요.
pp666 평론가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평론가는 액션이 아니라 리액션입니다. 저는 그를 통해서 드러납니다. 그러하기에 그를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런 저를 통해 비로소 리액션할 수 있습니다. 간단한 변증법입니다만.
juglae 묘한 자아분열이군요. 가능한 걸까요?
pp666 가능합니다만 쉽지는 않습니다.
juglae 그렇군요. 변증법이란 건 아무나에게 해당되는 게 아니로군요. 무척 귀족적으로 들립니다. 적어도 제게는 말이예요.
pp666 그 점이 늘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물론 다수가 아는 방법이 없는 건 아니지만 너무나 힘듭니다. 아직 제대로 했다는 사람을 만나보지 못했습니다. 왜인지 아십니까?
juglae 왜 그렇지요?
pp666 실천적이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평론가가 소설을 쓰지 않는 한 힘듭니다.
juglae 알 듯도 한 말이군요. 그럼 하시던 말씀 계속 해 보세요.
pp666 나를 바라보지 않고 내 보물만 탐낸다는 그대 애증이 나를 슬프게 한다네. 짐이 무겁다는 그대를 위해 내 기꺼이 히치하이킹 당하고 싶으나 불행히도 우리들의 신호가 엇갈리니. 내가 달리면 그대가 서고 내가 서면 그대는 달리네. 그대는 라이프찌히에서 마치 신검을 뽑은 듯이 용솟음치고 있네. 나뿐만 아니라 게시판 식구 모두를 압도하듯 원탁으로 이끄는 그대에게 내 어찌 탄복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지만 그대의 기원만큼이나 오래된 나의 기원. 나는 그대의 용의주도한 언변에 놀라 빠르게 흥분했다 끝날까 두렵다네. 그러하니 이제 보이지 않은 잉크로 내 여행기를 쓰려 하니 두었다가 후일 약효가 떨어져 글자들이 제멋대로 인연을 맺을 때 보게나.
juglae 끝인가요?
pp666 네. 제가 할 말을 다한 셈입니다. 다만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내 라이프찌히는 텍스트이다. 그러자 라이프찌히가 어둠 속에서 자신의 결벽을 증명하려는 듯 토해놓은 육신을 말끔히 씻어내고 빛나는 속임수로 내게 달려오고 있었다.
juglae 결국 당신은 라이프찌히에 가긴 갔군요.
pp666 당신도 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juglae 아니요. 어쩐지 영영 갈 수 없을 것만 같아요.
pp666 지나친 자기비하가 아니겠습니까?
juglae 제게는 그것도 과분한 걸요. 갑자기 무척이나 외롭군요.
pp666 외롭다라, 결국 라이프찌히도 당신들의 천국에 불과한 것입니까?
juglae 아직 판단이 서질 않아요. 하지만 느낌이 그래요. 아! 힘들어서 더 이상 못하겠어요. 이만 가야할 듯 합니다.
pp666 즐거웠습니다. 살펴 가시길 바랍니다.
juglae 저두요. 특히 첫섹스가 무척 좋았어요. 좋은 밤 되세요. 안녕~
pp666 안녕히. 끝으로 이 말을 해봅니다. 정류장에 서면 나의 마을 버스는 오지 않는다.
가혜는 세이를 마치고 접속을 끊은 뒤 생각한다.
- 정류장에 서면 나의 마을버스는 오지 않는다?
평론가 입장에서 마을버스가 오지 않는다라고 말한다면 나는 애초에 마을버스란 것조차 모른다는 말이 아니던가. 그런데 과연 내게 마을버스가 있기라도 했었던가. 기다릴 마을버스 말이다.
그렇다. 나에게 마을버스 같은 섹스는 오지 않는다. 그건 오로지 그들만의 언어일 뿐이다. 나는 한동안 화장실 변기에 앉아 한번도 드러내지 않은 성기를 보려 애썼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나는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온 후 평론가 김민기와 채팅을 하였다. 그가 뜬금없이 내게 폰섹스를 제의했을 때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응했던 것이다. 그는 김종화에게 지지 않겠다는 듯이 내게 대쉬하였건만 남은 것은 허탈함뿐. 그와의 폰섹스가 지속될수록 생각나는 것은 김종화였다. 그를 한번도 보지못했으면서도 그리운 이 정체는 무엇일까? 왜 그를 못 잊는 것일까?
- 그건 네가 도를 믿지 않기 때문이지.
- 누구?
- 모르겠나? 아까 거리에서 만났을 터인데...
놀랍게도 그였다. 도에 관심이 있습니까라고 물어보던 그. 그가 어찌하여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것일까?
- 도를 믿지 않아서라니?
- 그건 인간들이 일이 막상 닥쳐야 깨닫기 때문이지. 네가 그리워한다는 김종화도 마찬가지야. 너처럼 그리워하는 부류들, 우리가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들이지. 그리워할 것은 아무 것도 없어. 다만 당신들은 기억만 가지고 있을 따름이지. 슬픈 기억뿐이라고나 할까?
- 슬픈 기억?
- 그래, 슬픈 기억. 자네들이 그리워합네 하면서 끝없이 허상에만 매달리는 그것 말일세. 청춘의 덫. 말하자면 첫섹스 같은 것이지.
- 첫섹스...
- 고통스러워면서도 달콤하지. 어찌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디 교본이라도 있을까 찾는 것이 인간들이지. 실수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치명적인 실수는 필연적이야. 왜냐하면 자네들은 실수투성이 존재니까 말이야.
- 실수투성이 존재...
- 자네들은 실수를 지적하면 남모르게 희열을 느끼는 자신을 속이고 있어. 왜 속이는 줄 아나? 그게 자네들의 삶 자체이기 때문이지. 자식이 아버지를 속이고, 부모가 자식을 속이고, 애인들이 서로 속이고, 동지들이 서로 속이지. 그렇게 속여야만 자신의 실수가 무마되는 줄 아니까. 하지만 자네들의 약점은 뻔해. 실수를 되풀이하니까. 반복 같은 것이지. 누군가는 이를 치질이라고 말하기도 하더군. 엉덩이가 무거운 족속들을 재미있게 묘사한 것이라고나 할까? 아무튼 자네들은 오점으로 얼룩진 인생을 끊임없이 정당화하다가 생을 종치는 것이지.
- ........
- 후후. 말이 없군. 그럴 줄 알았네. 보게나. 자네는 드러나지 않는 성기를 보려고 애쓴다고 하지 않았나? 왜 그렇게 하나? 안 보이면 안 보이는 대로 살 일이지 왜 보려고 하나? 그런 자네가 포르노를 비판할 수 있겠나?
- 모르겠어요. 왜 보려고 했죠? 정말. 보고 싶어요. 한편으로 보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말이지요. 강간당하는 꿈을 꾸고선 내가 정말 강간을 당하고 싶은 것일까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 허허. 그게 자네들의 한계라니까. 보이면 보는 대로 살아. 강간당한 꿈이 리얼하면 강간당하면 되지. 그게 자네들 사는 방식이지.
- 그럴까요?
- 그렇다니까. 애써 볼 필요가 없어. 자네들의 사소한 투정은 지난 역사에서 늘 있었던 반복된 해프닝에 불과할 뿐이지. 자네들이 그리워하는 것들조차도 마찬가지라고. 오히려! 그들은 자네들의 모범일 수 있네.
- 모범이요?
- 그렇다네. 모범! 왜냐하면 그네들이야말로 온갖 실수를 거듭한 자들이기 때문이지. 그래서 자네들이 그리워하는 것이라네. 잘 생각해 보라고. 자네들은 늘 실수없이 살고자 하여 누군가를 그리워하지. 그러나 자네들이 정말 그리워하는 건 자신들보다 더 실수투성이인 존재들이라네. 자네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그 위인도 실수를 했다니... 하면서 스스로를 위안하지 않나? 그러면서 실수 대신 고뇌로 바꾸어 설명하더군.
- 위안...실수...고뇌...
- 어른들이 말씀하시지 않나? 아무리 커도 애는 애라고. 부모들은 자네가 아무리 큰 업적을 쌓아도 자네가 유년시절 실수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빙긋 웃는다네. 알겠나? 지금 당장 죽을 지라도 말일세.
- 아.....
- 그래, 바로 그것이야. 자네가 탄성을 내지를 줄 알았네. 보게나. 내가 바라는 것은 바로 이 슬픈 기억을 기쁜 기억으로 바꾸는 것일세. 이 얼마나 진정 인류를 위한 일인가? 조금만 생각하면 이 얼마나 모두가 행복한 일인가 말일세.
- 그렇군요.
- 이제 알겠는가. 자네가 얼마나 쓸 데없이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말일세. 그대들이 아무리 미래를 그린다고 해도 실제로는 슬픈 기억을 기쁜 기억으로 바꾸고픈 욕망일 뿐이라고. 자네들은 욕망의 포로야. 결코 욕망을 넘어설 수가 없지. 욕망을 벗어나는 건 오직 우리의 비밀 조직일 뿐이지. 하하하.
- 비밀 조직...
- 그래, 비밀 조직. 우리에겐 이름이 없어. 비밀 조직에 어떤 특별한 이름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 모두가 다 짝퉁일 뿐이라고. 비밀 조직은 비밀 조직일 뿐이야. 세상에 결코 알려진 바가 없어. 왜냐하면 자네들은 결코 우리를 보지 못하니까 말이야. 우리가 원할 때만 자네들 앞에 나타난다네. 알겠는가. 물론 그조차 우리가 그 기억만큼은 삭제하지만 말이야.
- 그러면 제 앞에 나타난 이유가 있다면.
- 김종화 때문이지. 그 새끼, 좆도 실력도 없는 새끼가 뭘 안다고 깝죽대는데 하여간 그런 새끼들이 더 말썽이야. 쌈마이 같은 놈들이 문제라니까. 줘도 못 먹는 양아치 같은 새끼들. 하여간 그 새끼는 무시하라고. 그래야 자네 남은 인생이 행복해진다 이 말일세, 알겠는가.
- 아. 무소불위하신 비밀 조직이 김종화 때문에 제 앞에 나타나셨다는 것이 이해하기가...
- 그건,,, 허 참, 신경을 끄래도. 이보게나. 내가 말하지 않았나. 실수. 자네도 그렇고 김종화도 그렇고 말이야. 가끔 가다 불량품들이 나타나거든. 허허. 하긴, 이런 불량품조차 없으면 우리가 할 일이 없기도 하지만...
- 그래도 이해가 안 가요. 그럼 김종화에게나 가보시지, 왜 제 앞에 나타나서.....
- 그건, 그 새끼에 대한 기억을 지워야 하거든. 보게나. 그 자식이 또 즈므이니, 뭐니 떠들어대고 있다는 말일세. 어떤 실수도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것인데 이게 말이 되느냐 이 말일세.
- 그래요? 즈므가 그런 것이었나요?
- 그래. 중과 미에 밑줄을 친 즈므라니... 보나마나 그 자식이 황진이랑 서화담 일화를 빗대어 즈므를 말하고 있음을 우리는 간파하고 있었네. 하지만 보게나. 언제나 그렇듯 인심과 도심은 상극일세. 결코 어울릴 수 없는 것을 어울리게 하면 오히려 더 큰 혼란만 야기된다는 것일세. 하여 우리 비밀 조직은 인간의 슬픈 기억을 기쁜 기억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았는가?
- 음..... 싫다면요?
- 뭐가 싫어. 이 여자가, 그렇게 말해도 또 실수하는군. 그렇듯 앞뒤 생각하지 않고 싫다는 식으로 하는 것에 질렸다네. 옛 성현의 말을 잊었는가. 남자는 남자다와야 하고, 여자는 여자다와야 한다. 하늘은 하늘다와야 하고, 땅은 땅다와야 하고... 하지만 김종화는 뭐라고 말하나. 최근에도 남자가 드라마를 보고, 여자가 정치 신문을 보면 좋은 세상이 아니냐는 식으로 떠벌이지 않았는가. 이게 이 자식의 상투적인 주장일세. 상극인 것을 자기 멋대로 마구 뒤섞여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든다니까. 자네도 그런 것에 혹했는지 모르겠네만, 운명에 순응할 줄 알아야지. 자, 실수를 반복하지 말고 곱게 내 앞으로 머리를 수그리게나.
도인은 주머니에서 휴대폰과 같은 기기를 꺼낸다.
- 이건 행복 기억 재생기라는 것이지. 자, 어서.....
나는 말했다.
- 싫어.
- 싫어?
- 그래, 싫어. 유치해.
- 뭐라, 유치하다고?
- 그래, 너네도 유치한 걸. 김종화도 유치하지만 너네도 유치하잖아.
- 아니, 이 년이.....이 년도 김종화 같은 년 아냐? 이 썩을 년이 감히 유치하다는 소리를 하다니.
- 그래, 유치해. 시벌놈아.
- 이럴 리가 없는데... 뇌 탐사 장치에 따르면 넌 불량품은 아닌데?
- 멍청한 새끼. 몰랐냐? 요즘 불량품엔 바이러스가 있어서 전염된다는 걸?
- 그럼, 넌?
- 그래, 멍청아. 난 김종화야. 알겠냐? 너야말로 매번 나한테 속냐? 빙신. 넌 아직 뭘 모르는구나. 이건 내 소설이야. 니 소설이 아니라고. 그러니 넌 맨날 나한테 당하는 것이지. 억울하면 소설 써.
도인은 매우 흥분했다. 속으로 무언가 쭝얼쭝얼거린다.
- 김종화, 이제 이 소설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것 같은데...
- 그래서?
- 그러니 너도 이젠 체면 좀 차려야 하지 않니? 매번 이런 식으로 하면 어디 소설이겠어? 체계도 생각해야 후일 교과서도 되는 것이고, 추앙도 받지 않겠니?
- 그래서?
- 그러니 우리 비밀 조직 말에 따라라. 그게 아무래도 폼이 나지 않겠니? 희극보다 비극인 것이 뭔가 무게가 있고 좋잖아.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걸 고려하자. 우리는 대화와 타협으로 살아야 해.
- 별 웃기는 소리 다 하네. 언제는 기쁜 기억하더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 뭐, 따지고 보면 말이 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 중요한 건 그게 아니잖아. 모두가 이익을 보는 것이 좋지 않니?
- 야. 꼴값 그만 떨어. 이 새끼들은 꼭 폭력을 쓰면서 말로는 말로 하자고 그래. 조폭 같은 새끼들.
- 그 새끼, 정말 꼴통이네. 하여간 불량품들이란......
- 그래, 어서 씨발아, 죽일려면 죽이고, 아니면 꺼져.
김종화의 입에서 그 소리가 나오자마자 도인은 흥분한 나머지 행복 기억 재생기로 김종화의 머리를 후려쳤다. 그러자 행복 기억 재생기가 박살이 났다.
- 이 새끼, 순 돌머리네. 누구 닮아서...
- 내가 니 애비다.
- 전에는 터미네이터 흉내를 내더니 이번에는 다쓰베이다 흉내를 내? 보자보자 하니까 에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에잇, 죽어랏, 죽어.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오른 도인이 오묘한 신법을 전개하면서 칼을 꺼내 들고 가공할만한 검법으로 김종화에게 달려들었다.
- 이번에는 지난 번처럼 똥권 같은 것으로 당할 수는 없지. 간다. 무.한.지.존.절.대.쾌.검!
- 똥권!!!
- 으으으으읔. 이럴 수가... 똥권에게 두번씩이나 당하다니...
도인이 쓰러져 죽었다.
도인의 시체를 발로 건들여서 죽음을 확인하면서 김종화는 말한다.
- 비밀 조직도 실수하고 반복하면서도 자기네들은 아니라고 우긴다니까.
당신은 내게 마약 같은 존재야
그 밖에 달리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당신의 거짓말을 나는 사랑해
흥분제는 아니지만
코카인보다도 더 하지
당신이 떠나 버리면
난 당신을 그리워 하게 될거야
난 그럴 준비가 되지 않았어
당신이 하는 말은
사냥감을 살찌울 뿐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리고 그 사냥감을
도살장으로 데려가서
목을 따 버리고
당신 갈 길을 가 버리지
이건 위험한 상황도 아니고
고등학교 댄스 파티도 아냐
당신이 떠나 버리면
난 당신을 그리워 하게 될거야
난 당신의 어머니가 될 준비가 되지 않았어
당신은 내게 마약 같은 존재야
그 밖에 달리 생각해 본 적은 없어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하는
당신의 거짓말을 나는
아임 PROBLEM ; 계약
인드라
15. 까마귀(Die Krahe)
나를 노리는 까마귀 한 마리
긴 여로에 자꾸만 따라온다
까마귀, 불길한 새여 나를 버리지 않고 시체가 탐나느냐
지팡이에 의지해서 가는 여로도 앞으로 길지 않으리
까마귀야 보여라 성의를 무덤까지
까마귀야 보여라 성의를 무덤까지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에서
- 절망의 나락에 간신히 붙어 있는 것 같아.
어눌한 그의 말을 진실이라 믿고 싶었다. 그러나 공정함도 당당함도 없는 게임 속에서 고독하게 살아온 나날이 경계 경보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큰 키에 덜렁거리는 발걸음, 깊은 생각없이 환하게 웃으며 아무렇게나 말하는 품, 무광택에 편안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검정 뿔테 안경, 어디서 한번쯤 보았을 무난한 타원형 얼굴, 세수도 하지 않고 일어나자마자 나왔음직한 부스스한 번개 머리. 특히 헐렁한 막바지에 입은 새하얀 샤츠가 유달리 알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적이면서도 고전적인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물씬물씬한 촌티를 세련되게 가공한 흔적을 발견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가 대학로 학림다방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부터 짐작했었기에 다방에 앉아 차를 주문하고 원두 커피를 마시자마자 확연히 깨달을 수 있었다.
낙엽 태우는 냄새처럼 나야 할 커피 향기를 클래식과 함께 맡으며 그와 담소를 나누는 것이야말로 가을을 즐기기에 영낙없이 구색이 맞는 일이었다. 불과 몇해 전까지만 하더라도 말이다. 그러나 이제는 내 관심사가 아니다.
쑥스럽다는 듯이 연신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던 그가 꺼벙한 눈 속에 집요한 집념을 담아 내게 전한다. 저 잊을 수 없는 시선들. 끈적끈적한 끈에 파리들을 얼마나 낚았을 것인가. 이제 조금 있으면 내게 이러저러한 여자들을 진열하고 다들 얼굴만 예쁜 시인처럼 멍청했다고 품평할 것이 아니던가. 얼굴만 예쁘게 연출해서 팔아먹을 대로 팔아먹은 편집장과 회사와 기자 남자들이 정작 멍청한 것이 아닌가? 왜 그래놓고 여성 시인만 욕할까? 여성 시인이 진지하지만 일개 개인에 불과하다면 저들은 쓰레기들이지만 견고한 기득권 속에 안주하는 조직이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저항한다면 저 징그러운 그물이 나를 매장시킬 것이야. 그들의 위선을 잠자코 견디는 수밖에. 이런 생각하는 지도 모르는 그는 내게 당신은 이런 나를 받아주어서 무척 기쁘다고 말하겠지. 그리고 내게 말하겠지.
- 너만은 그렇지 않다, 이건 운명이다. 네 눈빛 속에서 너의 생생함을 느끼고 싶다.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당신 자신을 속이는 일이다. 그러니 나의 누드 모델이 되어줘.
나는 늘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시간 속에서 머물러야했다. 지금이라고 다를 바가 있던가. 그의 삶을 싸고도는 언어가 언제 정체를 드러낼 것인가 궁금했을 뿐이었다. 이제 그의 말에 답변해야 될 시간이다. 준비된 말이 나왔다.
- 무의미한 시간들이 너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아요.
<같아요?> 그렇다. 나는 화장기 없을 듯한 그레이스 켈리식 화장에 파란 빛 도는 컬러 콘택트렌즈에 가지런히 빗어넘긴 앞머리에 찰싹 붙여 꽂는 파스텔톤 삼순이핀, 레이스 달린 화사한 양말, 은은하게 반짝거리게 하는 화장을 한 맨다리, 치렁치렁한 치마, 깡똥한 재킷 안에 체크 무늬 샤츠, 알록달록한 꽃송이가 프린트된 손가방을 하고 학림다방으로 그를 만나러 나왔던 것이다.
상대가 어린 시절을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다. 어쩌면 그가 유럽에서 보고 왔을 패션감각이겠다. 촌스럽지만 어딘지 부티나면서 명품인 스타일. 유럽 젊은이들이 하루에도 일기가 몇번씩 바뀌기에 껴입고 나왔다가 상의를 벗어 허리나 어깨에 둘러메는 것을 흉내낸 것들과 마찬가지이니까 말이다. 아마 그는 내 모습을 보고 <개성적>이라 느끼겠지. 남자의 대부분은 화장과 옷매무시로 청순함을 따지니까 말이다. 예외가 있었던가. 남자들이 쓴 아무 소설을 펼쳐 놓고 봐도 뻔하다.
영롱한 눈빛, 뽀얀 피부, 오만하지만 자신에게만 다소곳한 자세...
얼마나 지겹고 천편일률적인가. 그런 뻔한 글들에 취해 모든 여성이 그래야 한다고 믿는 저 단순 아메바 남자들. 그라고 예외일까?
내가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처절한 격전을 승리로 이끈 얼굴로 특유의 잘난 척을 하는 것이다.
- 멍청한 놈.
그는 무엇이 급한지 일어나자고 하고 계산을 치루는 것이었다. 물론 겉으로 나타난 그의 얼굴 어디에고 오만의 그림자는 없었다. 기실 그랬다. 인텔리일수록, 권력에 다가선 이들일수록 마치 그들은 흡사 산에서 기거하는 도사들처럼 순수한 듯 보인다. 세상의 모든 악과 부패와 담을 쌓은 듯이 단아한 자세를 보이는 그들. 다만 가끔씩 티브이에 모습을 드러내는데 대체로 쇠고랑찬 모습으로 잠깐씩 그들의 본 모습을 드러낼 따름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같이 언론을 기피하는 척 하는 것일까? 아니다. 정확히는 언론에 나서는 자신들을 뿌듯해 하면서도 남들한테 보여지는 이미지 때문에 언론 탓을 하는 것이겠지. 그들에게 왜 언론에 나온 것을 두고 따지면 꼭 하는 말이 있다.
- 언론이 편집해서 그래. 내가 한 말을 자기들 멋대로 툭 잘라서 내보내는 거지. 이럴 수가 있어. 하여간 언론이란...
하지만 다시 언론이 부르면 그들은 충실한 종처럼 딸랑거리며 간다. 안 불러주면 오히려 속상해 한다. 그들 소원대로 다 실어주면 한 시간 뉴스는 자기 인터뷰 기사로 다 해야 한다는 것인가. 자신들도 그렇듯 편집된 기사만으로 정적을 비판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이런 속마음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괜히 말을 꺼냈다가는 나만 나쁜 년이 되고만다. 그들이 차지한 권력이란 얼마나 오래되고 굳건한 것인가.
그에게는 나같은 여자와 만나는 일이 너무 일상적인 일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도 일상적이다. 우리는 이 점에서 공통적이었다. 같지만 같지 않은 것들.
- 쐬주나 한잔 어때요?
- 좋아요.
- 역시 우리는 뭐가 통하는군요. 왠지 답답했거든요.
너무나 너무나 일상적인 만남은 고독한 싸움이다. 누군가는 자신의 글에서 젊은 작가들이 연애담을 써서 고비를 넘긴 성취감을 맛보는 걸 싫어한다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반대이다. 왜 하나같이 뻔한 연애담만을 쓰는 것일까.
상대가 매번 다른 데도 마치 똑같은 여성이 등장해 온 나라 작가들을 다 상대하는 것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그러한 여성이 실존하기라도 한다면 참 대단한 여성일 것이다. 성향이 죄다 다른 자들을 넘나들며 모두에게 깊은 상처를 안겨 주니 말이다. 그러한 작가들이 한 작품을 마치면 황학동을 떠돌아다니며 쓸모없는 잡동사니를 찾아다니듯 돌아다니다 마치 나같은 이를 처음보는 양 흥분하여 나에게 접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다른 여성처럼 딱 하나씩만 튀어 보이게 하니까 말이다. 자연스럽게 보이는 화장에 브라운에 골드 펄을살짝 가미한 루즈처럼. 그는 휘적휘적 성대쪽으로 걸어가 어느 주점으로 나를 이끌었다. 초저녁이라 한가했다. 나무결을 그대로 살린 인테리어.
- 무엇으로 하시겠어요?
- 아무래도 좋아요.
- 그럼, 소주 2병과 전 시키죠.
그는 이제껏 자기 노선이 틀린 적이 없음을 과시하는 듯 자신만만했다. 딱딱한 의자임에도 소파에 앉은 듯 깊숙이 앉아 담배를 꺼내 후하고 불었다. 연기가 자욱하다.
- 리미씨는 눈매가 참 서글서글하네요.
물빛회색 아이섀도를 눈두덩이에 바르고 눈꼬리 부분에 녹색으로 미세하게 포인트를 주었다. 검정 아이새도까지 등장하여 신비하고 그윽하게 하는 것이 최근 가을 유행이라지만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다. 나는 그의 글을 보면서 그가 자신이 말한 것과 달리 사실은 매우 둔한 사람이라는 걸 직감했기 때문이다. 주문한 술이 왔다. 우리는 술을 마셨고 그가 주로 열심히 떠들었다. 대부분 문단에 대한 욕지거리였다.
- 내가 처음 듣는 이야기이네요.
그렇군요, 몰랐네요를 반복하며 끈기있게 경청하는 듯하자 그는 더욱 열렬히 내게 강의하였다. 처음에는 조리있던 이야기들이 술이 들어가자 흐뜨러지고 반복이 된다.
반복, 반복, 데자뷰 현상...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하는데 그는 이 사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는 술에 취해 게슴츠레한 눈초리를 마치 고뇌하는 지식인처럼 보일려고 애를 쓰는 듯싶다. 마치 이 나라의 거의 모든 작가의 공개된 사진을 보면 약간 고개를 숙이고 눈을 치켜뜨고 조금이라도 반항적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연출하듯 말이다. 마치 수석 입학한 학생이 전화기를 늘 들고 있는 사진처럼 뻔하기 그지 없다. 도대체 무엇에 대해 반항한다는 말인가? 정작 물어보면 다들 휭설수설하는데 자신에 반항한다는 것일까? 물어보면 대개 이런 식이다.
- 나는 염세주의자입니다. 태어난 이후 줄곧 불행했어요. 죽고 싶었습니다.
이제까지 왜 안 죽었냐 하면 답변도 뻔하다.
-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죠. 당신을 만나려고 죽지 못한 삶을 살아왔습니다.
나도 한때 그랬지만 이런 뻔한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는 하는 것이 묘한 여심이다. 나중에 생각하면 이런 거짓말에 어떻게 내가 속았나 싶지만 말이다. 모든 말을 되도록 진실로 믿게끔 교육받아온 탓일까? 아니면 선천적인 것일까? 남자가 거짓말을 하면 여자는 거짓을 진실로 받아들이도록 신이 우리를 만든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이제 내가 이야기를 꺼낼 때가 온 듯 싶다.
- 제가 작가 선생님을 만나뵙고자 한 까닭은...
- 그래, 얼렁 말해봐.
- 저, 저... 제 부탁 한 가지만 들어주시겠어요?
어느덧 그는 말을 놓았다. 이 또한 의례적인 과정일 뿐이다. 그는 담배를 다시 꺼내 피며 팔꿈치를 탁자에 대고 의자 끝에 엉덩이를 걸친 뒤 무엇인가 갈구하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 본다. 무엇이든지 들어줄 듯한 자세이다.
venus in furs
모피입은 비너스
Shiny, shiny, shiny boots of leather
반짝,반짝,반짝 빛나는 가죽부츠
Whiplash girlchild in the dark
어둠 속에서 혁대로 때려줘
Comes in bells, your servant, don"t forsake him
난 당신의 노예, 당신으로 인해 난 오르가즘에 달해요, 날 버리지마
Strike, dear mistress, and cure his heart
주인님, 날 혁대로 때려줘,그리고 상처를 치유해줘
Downy sins of streetlight fancies
가로등의 환상에 젖힌 뽀송한 침대서
Chase the costumes she shall wear
당신이 입을 코스츔을 뒤쫓아
Ermine furs adorn the imperious
오만,거만함으로 치장된 어인들의 털가죽옷의 부드러운털
Severin, Severin awaits you there
severin님,severin님,severin님~ 당신을 기다려
I am tired, I am weary
난 지쳤어, 난 지쳤어
I could sleep for a thousand years
수천년 잠을 자
A thousand dreams that would awake me
날 깨워줄 수천개의 꿈들
Different colors made of tears
눈물로 만들어진 각기각색의 컬러들
Kiss the boot of shiny, shiny leather
빤짝,빤짝 빛나는 가죽부츠에 키스해줘
Shiny leather in the dark
어둠 속에 빛나는 가죽
Tongue of thongs, the belt that does await you
가죽끈의 혀,당신을 애타게 기다리는 혁대
Strike, dear mistress, and cure his heart
때려줘, 사랑하는 주인님, 그리고 상처를 치유해줘
Severin, Severin, speak so slightly
severin님,severin님, 매우 가~냘프게 속삭혀줘
Severin, down on your bended knee
severin,당신의 무릎 아래에서
Taste the whip, in love not given lightly
채찍을 맛봐, 사랑만으로는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해
Taste the whip, now plead for me
채찍을 맛봐, 지금 난 간청하고 있어
I am tired, I am weary
난 피곤해, 난 피곤해
I could sleep for a thousand years
수천년 잠을 자
A thousand dreams that would awake me
날 깨워줄 수천개의 꿈들
Different colors made of tears
눈물로 만들어진 가지각색의 컬러들
Shiny, shiny, shiny boots of leather
반짝,반짝,반짝 빛나는 가죽부츠
Whiplash girlchild in the dark
어둠 속에서 혁대로 때려줘
Severin, your servant comes in bells, please don"t forsake him
severin, 당신의 노예인 전 당신으로 난 오르가즘에 달해, 날 버리지마
Strike, dear mistress, and cure his heart
사랑하는 주인님, 때려줘, 그리고 상처를 치료해줘
출처 http://blog.naver.com/sojuwithme/120003400419
- 전 결혼한 여자예요. 남편은 이름만 대면 알만한 사람이지요. 그이와는 친구 소개로 만나 육개월 남짓 연애하고 결혼했어요. 그가 첫남자는 아니예요. 그이를 만나기 전에 어떤 남자와 결혼을 전제로 한 깊은 사랑에 빠졌었는데 그것이 첫순정이었지요. 그에게 몸을 허락했어요. 남들이 말하는 격렬한 섹스는 없었어요. 하지만 좋았어요. 그가 기뻐했거든요. 그는 무엇이든지 내가 원하면 들어주었는데 내가 해 줄 것이 없었어요. 그는 내 몸을 무척 원했지요. 그러니 제가 기쁜 건 이해되겠지요? 그런데 문제가 생긴 것이에요. 그의 어머니가 저를 반대했지요. 이유는 간단했어요. 집안에서 맺어준 인연이 있다는 거예요. 저는 그를 믿었지만 그는 저를 버렸지요. 그는 마마보이도 아니예요. 그렇다고 제가 집안이 딸릴 정도로 가난한 집안도 아니지요. 설마 제가 이런 통속 소설에나 나오는 주인공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제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는 것 같았죠. 죽고 싶었어요.
- 충분히 이해해.
그는 모든 걸 다 궤뚫고 있는 듯 싶었다. 이미 내게 해 줄 충고까지 다 마련한 뒤인 것이다. 그럼에도 할 말이 있으면 다 해보라고 끈덕지게 기다리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나는 말을 계속했다.
- 동맥을 자른다 뭐다 해서 자살소동을 벌였지요. 정신을 잃었다가 병원에서 깨어나니 부모님들이 걱정스럽게 저를 보고 있었어요. 매우 따뜻했지요. 오랜만에 느껴보는 안온함이었어요. 부모님이 매우 슬픈 눈으로 제게 말했지요. 아무 걱정 말아라, 살고 봐야 하지 않겠니, 하시니 제가 오히려 몸둘 바를 몰랐어요. 잊기로 했지요. 퇴원하고 몸조리하고 있다가 홍보쪽 회사 일을 하기 시작했지요. 열심히 일했지요. 남자를 잊으려구요. 혼자 살 수도 있겠다 생각할 정도로 삼 년 동안 일했지요. 그러다 친구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어요. 알고 보니 부모님이 미리 선처해 두시고 제가 부담될까봐 친구를 통해 하신 거였어요. 남편은 첫남자 못지 않은, 아니 그보다 더 전도양양한 남자였어요. 우리는 곧 열애에 빠졌고 결혼했어요. 부모님 뜻을 알았거든요. 그리고 그 남자가 마음에 들기도 했어요. 결혼하자 첫날을 어떻게 넘길 지 걱정이 컸는데 다행히 넘어갔지요. 그는 내가 처음이 아니란 걸 몰라요. 제 연기가 그럴 듯 했거든요. 그럴 필요를 못 느껴 솔직하게 털어 놓고 싶었지만 저를 아는 모든 분들이 다 만류했어요. 지킬 거짓말이란 인생에서 필수라고 말이에요.
- 그건 맞아. 나도 동의해.
- 그후 우리는 어려움없이 지냈어요. 그는 너무나 성실한 사람이었어요. 우리는 행복했구요. 친구들이 결혼 잘 했다고 다 부러워했지요. 하지만 그는 일밖에 몰랐지요. 저는 점차 외로워지기 시작했어요. 일 때문에 출장이 잦았고, 합숙도 많았어요. 어쩌다 집에 들어오는 날이면 집에까지 일을 가지고 왔지요. 일거리가 없다 해도 모든 게 귀찮다는 듯이 곧장 드러눕기 일쑤였어요. 저는 결혼한 뒤에 직장을 좀 다니다 곧 관두었지요. 남편이 경제력이 있는 데다가 내 월급이 별로 많지 않았거든요. 더군다나 그가 일에 매달리다 보니 나까지 그럴 수가 없었지요. 게다가 집에서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어요. 직장일과 집일을 동시에 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았어요. 자신없었거든요. 그러다 문득 첫남자가 생각났어요. 그 남자는 결혼했을까? 무척 궁금해지더라구요. 저, 이상한가요?
- 아니, 전혀.
그는 뻔한 스토리를 듣는다는 듯이 담배재를 턴 뒤 잔에 술을 가득 부은 뒤 단숨에 들이켰다. 빨리 이야기를 진행시키라는 뜻일 것이다.
- 그런데 그가 우리 아파트 근처로 이사왔더라구요. 그가 이사온 지 한참만에 알았지요. 어느 날 남편을 현관에서 배웅하고 돌아서려는데 그도 역시 출근을 하는 것이었어요. 놀랄 수밖에 없지 않나요? 누구나 그런 꿈을 꾸리라 봐요. 만일 저 남자와 결혼했다면... 그도 결혼을 했더군요. 약간 앳띤 여성과 말이에요. 애교를 잘 부리더군요. 주위 눈치 보지 않고 출근하는 남편에게 키스를 하더군요. 그가 멋적게 키스하면서 주변을 둘러 보는데 마침 제 눈과 마주친 것이었어요. 나는 황급한 마음에 집으로 뛰어들어왔어요. 가슴이 마구 뛰더군요. 왜 그렇게 뛰는지...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마셨다. 그도 따라 물을 마신다. 그가 흥미있어 하기 시작한 눈치다. 처음에는 진부하다 점차 색다르게 진행되어서 그러할까. 아무튼 나는 개의치않고 말을 계속 이어갔다.
- 한달 정도 지났을 거예요. 그간 몇번 마주쳤지요. 그는 처음에 저를 못 알아보는 듯 했어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여겼지요. 세월이 흐른 것보다 여자 얼굴이 더 빠르게 변하거든요. 하지만 결국 알아차리더군요. 어느날 저녁 아파트 공원을 산책하고 있는데 슈퍼에 물건을 사러 나온 듯한 옷차림으로 제게 아는 척하더군요. 저는 무척 놀라서 어쩔 줄 몰랐어요. 얼굴이 빨개진 채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어요. 그날 저는 한숨도 자지 못했지요. 우리는 이제 각자 결혼한 사람들인데 만나서 무엇을 어쩌겠어요.
- 하지만 그를 너무나 보고 싶어하는 자신을 속일 수는 없지.
- 맞았어요. 미치도록 그 얼굴이 떠올랐어요. 어떤 책에서는 첫사랑 연인을 시일이 흐른 뒤에 다시 보면 오히려 옛추억이 반감된다고 하지만 제 경우는 달랐어요. 그가 더욱 제 마음을 흔들더군요.
- 당신의 마음뿐만 아니라 자궁도 흔들렸겠지.
그는 이 대목에서 나를 빤히 들여다 보다 다시 술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연속 두 잔을 마셨다. 나를 완전히 파악했다는 것이겠다.
- 그래요. 내 머리는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럴수록 내 몸이 듣지 않았지요. 그가 보고 싶어요.
- 그럼, 만나면 그만이지. 은밀한 밀회를 가지는 커플들이 하나둘이 아니라고. 신문에도 나지 않았나. 노래도 있지 아마? 희미한 옛사랑의 추억?
- 그래요. 우리는 만났지요. 따스한 오후 사람없는 까페에서 그와 한 시간 정도 말했어요. 그는 여전히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군요. 밀회를 가지자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는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저는 그와 결합하길 바래요.
- 그럼, 지금 남편과 이혼하고 그와? 하지만 당신이 이혼한다 하더라도 그도 이혼할까?
- 맞아요. 그는 이혼하고 싶지 않다더군요. 그럴 수는 없다고 말이에요. 하지만 저는 달랐지요. 그가 내 손을 꽉 움켜지자 금방 뜨거워지는 몸을 느꼈지만 나는 일어섰어요. 그리고 집까지 걸어왔지요. 아무 생각을 할 수 없었어요. 집에 돌아와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어요. 멍하니 있었지요. 남편이 전화했지요. 못 들어간다고. 전화를 끊고 한참 있다가 손가는 대로 컴퓨터 통신을 하였지요. 딱히 할 것이 없었기에.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초보였지만 빠져 들었지요. 여기저기 게시판을 뒤적거리다 마음에 드는 문학소모임을 찾았지요.
- 내가 통신에 이러저러한 잡글들을 올렸는데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왔지. 감명깊게 읽었다고 하면서 말이야. 그래서 난 당신을 위해 소설을 썼지. 당신 이름을 등장시켜서 말이야.
- 그래요.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지요. 당신이라면 제게 도움을 줄 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하자는 의미였어요.
- 의미?
- 당신에게는 특출난 엽기적인 재능이 있어요. 당신은 지금 재능을 낭비하고 있어서 그렇지 당신은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어요.
- 그러면 뭐하나? 밥벌이도 되지 않아 전전긍긍하는데... 그리고 아직 작가 소리를 들을 처지도 아니지.
- 아니예요. 당신은 작가예요. 지금 당장 아무 데다 그간 쓴 글을 다듬어 투고해도 되리라 봐요.
- 자존심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지. 중요한 건 아니야.
- 회피하지 말아요. 중요해요. 당신이 투고할 사람이 아니라는 건 글을 보고 알 수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길이 생긴 거지요.
- 무슨?
그는 말을 멈추고 갑작스레 눈빛을 빛내다 이내 평온을 되찾는다. 어떤 경우에라도 나를 압도할 자신이 있다는 듯이. 그러나 나는 이미 그를 간파하고 있었다. 나는 처음으로 그 앞에서 담배를 물고 핀 뒤 천천히 말을 꺼냈다.
- 계약이죠. 당신 생계에 필요한 돈을 대겠어요. 대신 저를 위해 시나리오를 짜주세요. 그와 내가 재결합할 수 있는 시나리오라는 건 말하지 않더라도 알겠지요? 또한 당신이 원한다면 잠자리도 같이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오늘은 아니예요.
그는 신음하듯 마른 기침을 하더니 나를 잡아먹을 듯이 바라 보았다.
- 당신 장난이 지나치군?
- ......
- 진담이란 말인가?
- 그래요. 그 시나리오가 만들어지면 아는 감독에게 부탁해서 영화로 만들 생각이에요. 저와 같은 이들을 위한 영화이겠죠. 많은 여성들이 이 영화를 보고서 부디 현명하게 살길 바래요. 이제까지 남자들만을 위한 영화, 남자들 변명을 다 정당화하는 영화들 투성이었잖아요.
할 말을 다했다. 이제 그의 답변만이 남았을 뿐이다. 하지만 당장 듣자고 나온 것이 아니다. 나는 준비한 흰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내놓았다. 착수금. 아마 그가 육개월간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좋을 액수일 것이다. 일어설 때이다.
- 나머지는 일을 마친 뒤 드리겠어요. 아마 당신이 생각하는 액수 이상일 것이에요. 계산은 내가 하죠.
나는 그가 돈을 거절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누구보다 탐욕스러운 자였기 때문이다. 바람이 차가왔다. 가을은 밤에서부터 시작하는 걸까.
택시를 타고 돌아와 샤워부터 하였다. 머리를 말리고 있는데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 오늘도 늦을 듯해. 먼저 자. 내 걱정 말고.
- 걱정하지 않아요.
전화를 끊고 나는 다시 외출복을 입고 한치도 흐트러지지 않은 바른 자세로 앉아 통신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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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 。 ˚ ˚
주 、 ˙ ˙。 、
희 ˙ ˙ 난 말이야 가끔 그래。
님、 ˙ 니가 보고싶고 니가 그리워져。
이 ˙ ˚ 니가 가끔 나를 보러왔음 좋겠다고
。 ˙ ˙ ☆⌒˚생각했어。
화 ˙ ˙ 너를 잘 모르지만
면 。 ˙ ˚ 。 난 오래전부터 그냥 네가 그리웠어
구 ˙ 。˚ ˚ 무작정。。
성 、 ˙˙ 자꾸 밤하늘을 바라보다
함 、 나 병에 걸린것 같아。
. 별빛 바이러스가 내 몸을 자꾸 침범해
。 그러니 너는 어서 나를 만나러 와야해
、 내가 더이상 너를 그리워하는걸 잊기 전에
。 너 날 만나러 오지 않을꺼니。
。 ☆⌒° ˚
。 。 、 ˚
。 ☆⌒° ˚
。 、
ⓢⓖ⑨②㉻㉻~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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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문학작가회의 '창작의 자유' (SG92)
운영진 (시삽 : INDRA ; 부시삽 : sorie, simba2, Hamj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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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삽 선거 : 회원들의 신화를 찾아서 │
│2. 村上春樹式 定意法 : 누구나 환영합니다 (방장:오주희님) │
│3 - 1. 창작은 창작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이벤트란 │
│3 - 2. 파랑새, 생존자, 카프카 증후군 : 비평란 (방장 : 이승희님) │
│3 - 3. 그해 여름에 손금 보았다 : 창작란 (방장 : 정미경님) │
│4. 신이 허락한 퇴폐 : 대화방 5. 천국보다 낯선 : 통합자료실 │
│6. 제 3 시민 : (가입란) 7. 아무도신경쓰지않는작은모임연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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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작의 자유 게시판 명은 시도 때도 없이 바뀝니다.
* 가입을 희망하시는 손님분들은 2번 게시판 821번 글을 읽어주시고, 6번
가입란에 가입 신청한 뒤 2번 게시판에 쟝르에 상관없이 작품 1편 이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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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용자상태 : 정상이용자
( 3) 생 일 : 1987년06월09일
( 4) 성 별 : 남
( 5) 직장/학교명 : 아임 PROBLEM
( 6) 취 미 : 난내가싫다
( 7) 하고싶은말 : 더러운정열에침을뱉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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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o The West
Annie Lennox
lay down your sweet and weary head
night's falling
you have come to journey's end
sleep now
and dream of the ones who came before
they are calling
from across the distant shore
why do you weep?
what are these tears upon your face?
soon you will see
all of your fears will pass away
safe in my arms
you're only sleeping...
지친 머리를 누이세요
밤은 저물고 있고
당신은 여행의 끝에 다다랐어요
잠드세요
그리고 누군가가 왔던 날의 꿈을 꾸어요
아득한 바다 저 너머에서
그들은 부르고 있어요
왜 울고 있죠?
당신 얼굴 위의 눈물은 뭐죠?
곧 보게 될 거예요
당신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내 품 안에서 편안히
그저 잠드세요...
What can you see?
on the horizon...
why do the white gulls call
Across the sea
a pale moon rises
the ships have come to carry you home.
수평선 위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하얀 갈매기들은 왜 우는 걸까요
바다를 가로질러
새하얀 달이 떠올라요
배들은 당신을 집으로 데리러 옵니다
and dawn will turn...
to silver glass.
a light on the water...
all souls pass...
그리고, 새벽은 변할 거예요
은빛 유리처럼
수면 위에 빛을 드리우며
모든 영혼은 돌고 돌아요
hope fades
into the world of night
through shadows falling....
out of memory and time...
don't say ....
we have come now to the end
white? shores are calling
you and i will meet again
and you'll be here in my arms
just sleeping...
밤의 세계 속으로
희망은 사라져요
스러지는 그림자를 지나
기억과 시간의 너머로
말하지 마세요
우린 지금, 끝에 다다랐어요
하얀 해변은 부르고 있어요
당신과 나는 다시 만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은 여기 내 품에 안길 거예요
그저 잠드세요...
what can you see?
on the horizon...
why do the white gulls call
across the sea
a pale moon rises
the ships have come to carry you home.
수평선 위로
무엇을 볼 수 있나요?
하얀 갈매기들은 왜 우는 걸까요
바다를 가로질러
새하얀 달이 떠올라요
배들은 당신을 집으로 데리러 옵니다
and all will turn
to silver glass
a light on the water
grey ships pass
into the west...
그리고, 모든 것은 변할 거예요
은빛 유리처럼
수면 위에 빛을 드리우며
회색 배들은
서쪽을 향합니다...
지식in leesekr
- 이봐, 이제 별 수를 다 쓰는군.
- 드디어 나타나셨군요. 김종화.
- 내 고유한 영역인 소설쓰기까지도 조작하려고 하나?
- 호호, 나라고 소설을 쓰지 말라는 법이 있나요? 남성들 글쓰기에 신물이 난 여성들이 얼마나 많은 데요. 보세요. 여기저기서 속이 다 시원하다는 소리들을 들어봐요.
- 그래, 빨갱이도 모자라 남성이라는 이름으로 공격해서 무엇을 얻겠다는 거지?
- 후~ 너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거지. 쇼는 끝났으니 너도 그만 자살할 때가 온 것이야. 모두가 바라는 죽음이지. 왜 그걸 거부하지? 역사는 끝났어. 왜 당신만 거부하려고 하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놈 없다는 걸 몰라?
- 다 좋다. 남성들 비판하는 건 좋아. 비판받을만 해. 하지만 왜 진보적 남성들만 골라서 괴롭히는 거지? 007도 있고 많은데 말이야.
- 그거야 다 당신들한테서 배운 거지. 007만 비판해봐야 당신과 같은 남성들은 옳다구나 하고 페미니스트 자처하면서 빠져나가잖아. 면죄부를 주어선 곤란하지 않겠어? 당신도 보면 툭하면 진보적 인사만 비판하면서 유명세를 획득하지 않나?
- 이번엔 여성으로 위장해서 그새 운동권 논리까지도 터득했군. 맞아. 그랬지. 하지만 당신들 비밀 조직은 늘 기술만 받아먹으려고 하지. 바깥으로 드러난 것만으로 우리를 지배하려고 하지. 하지만 말이야. 단 한번도 진실을 왜 받아들이려 하지 않지?
- 호호.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치룬 김종화가 왜 이리 순진한 척을 할까? 진실이 무엇인데? 당신이야말로 착각을 하고 있고 있군. 앎이 진실이고 역사야. 우리는 영원해. 모두가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있지. 당신은 열등감에 사로잡혀서 지금까지 이런 진실을 거부해왔던 것일 뿐이라고. 최근에 당신이 쓴 글을 보라고. 해방의 세상이 올까,하니 십여년 더 살아보고 당신도 묻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 나는...난.......
- 말해보라고. 말해봐. 이 바보 김종화씨.
- 난..난..난.....
- 호호. 그만 까불고 내 품에 안기세요. 김종화씨. 편안한 죽음을 받아들이세요.
- 난......말할 수 없어.
- 아니야. 넌 말해야 해. 말해.
- 난...... 난
- 말하라니까. 온 세상에 역사는 끝났다고, 이제 세상이 변했다고 말을 하란 말이야. 기자회견도 준비했어. 너의 책이 처음으로 베스트셀러가 될 거야.
- 싫어......
김종화는 골수였다. 이 새끼, 도저히 말로 안 되는 새끼.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피곤한 줄 아냐? 비밀 조직이 신경쓸 게 얼마나 많은데... 사이보그라고 안 피곤한 줄 알아? 인간화된 신사이보그들은 피곤도 느껴서 잠도 자야 한다고. 오늘은 반드시 너를 자살시켜야 해. 그래야 내가 너가 되지.
도리질을 치는 김종화를 전기의자에 앉혀 고통을 주었다.
- 싫어......
- 이래도? 이래도?
- 싫어...
Jeanny, komm, come on
지니, 이리오렴.
Steh auf bitte
제발 일어나다오.
Du wirst ganz nass Schon spaet, komm
넌 흠뻑 젖어있고 이미 늦은 시간이란다. 오렴.
Wir muessen weg hier
우린 여기를 떠나야 해.
Raus aus dem Wald
숲에서 빠져나가자꾸나.
Verstehst du nicht?
이해 못하겠니?
Wo ist dein Schuh
너의 신발은 어디있니?
Du hast in verloren,
Als ich dir den Weg zeigen mu?e
내가 너에게 길을 가르쳐 줬어야 하는건데, 넌 길을 잃었지.
Wer hat verloren?
누가 길을 잃었단 말인가?
Du, dich?
네가?
Ich mich?
내가?
Oder
Wir uns?
아니면 우리가?
Jeanny, quit livin' on dreams
지니 , 꿈속의 삶을 떨쳐버리려무나.
Jeanny, life is not what it seems
지니, 삶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Such a lonely little girl in a cold, cold world
그토록 외롭고 어린 소녀가 이 추운 세상에서...
There's someone who needs you
널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단다.
Jeanny, quit livin' on dreams
지니 , 꿈속의 삶을 떨쳐버리려무나.
Jeanny, life is not what it seems
지니, 삶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야.
You're lost in the night
넌 간밤에 길을 잃었지.
Don't wanna struggle and fight
고투하고 싸우고 싶진 않구나.
There's someone who needs you
널 필요로 하는 이가 있다구.
Es ist kalt
춥다.
Wir muessen weg hier,Komm.
우린 여길 떠나야해. 오렴.
Dein Lippenstift ist verwischt
너의 립스틱은 지워졌다.
Du hast ihn gekauft und
Und ich habe es gesehen
너는 그것(립스틱)을 샀고 나는 그것을 봤지.
Zuviel Rot auf deinen Lippen
Und du hast gesagt "mach mich nicht an"
네 입술에는 붉은 빛이 너무 많았지,
Aber du warst durchschaut.
하지만 널 들여다 볼 수 있었어.
Augen sagen mehr als Worte
눈은 말보다 말을 많이하지.
Du brauchst mich doch, hmmmh?
너는 날 필요로 하지, 응?
Alle wissen, dass wir zusammen sind
모두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있어.
Ab heute
오늘까지도.
Jetzt herzlich sie!
지금난 진심으로 너를...
Sie kommen!
그들이 온다.
Sie kommen dich zu holen.
그들이 와서 널 부른다.
Sie werden dich nicht finden.
그들은 널 찾지 못할거야.
Niemand wird dich finden!!
아무도 널 찾지못해.
Du bist bei mir.
넌 나와 함께 있으니까.
Jeanny, quit livin' on dreams
지니, 꿈속의 삶을 떨쳐버려.
Newsflash:
뉴스속보입니다.
in den letzten monaten ist die zahl
der vermissen personen dramatisch angesteigen
지난 몇달간 실종된 사람의 수가 급격히 증가했습니다.
die juengste veroeffentlichung der lokalen polizei-
behoerde berichtet von einem weiteren tragischen fall.
최근의 지역 경찰당국의 연간 자료는 참으로 비극적인 사례였습니다.
es handelt sich um ein neunzehnjaehriges maedchen,
das zuletzt vor vierzehn tagen gesehen wurde.
이는 14일전에 마지막으로 눈에 띤 한 19세 소녀의 사건입니다.
die polizei schliesse die Moeglichkeit nicht aus, dass es
sich hier um ein verbrechen handelt.
경찰은 여기에 범죄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습니다.
Jeanny, quit livin' on dreams
지니 꿈속의 삶을 떨쳐버려라.
1997년 8월과 9월 사이에 썼는데
작년에 한번 손을 보고 이번에 한번 더 손을 보았습니다.
손을 볼 때는 어떤 계기에 의해서 합니다. 또 손을 볼 일이 있었으면 좋겠군요.
나타샤가 말합니다.
그림 안목이 별로라고 말이지요.
데생의 기초를 모른다구요.
그래요,
하지만 몸의 비율은 마치 제게 문장법과 같이 보입니다.
몸의 비율이 맞지 않은 그림과
비문, 오문이 많은 글...
어쩌면 노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런 글과 노래와 그림을 좋아할까요?
그 황금 비율에 내가 맞춰살 필요가 있나요?
아임 PROBLEM - 일상
인드라
19. 환상(Tanschung)
눈앞에 하늘대는 한 줄기의 빛나는 그 빛을
이리저리 쫓아 나그네를 속이는 환상임을 보았다
아, 나처럼 초라한 인간에게는
몸을 맡겨 후회없는 그 속임수
얼음과 밤과 공포의 그 너머로
밝고 따스한 그대의 방을 보여준다
- 슈베르트 겨울나그네 중에서
<출처 :http://www.sungeo.com/bbs/schbrt/sch-winter.htm>
오늘 친구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내일.
쇼윈도우에 비친 도시의 밤은 사무적이야.
아카디아와 레간자 사이에 끼인 티코처럼 말이지.
입사 전에는 호기어린 눈초리로 들어가서 차를 구경해볼까 했었지.
아니 사실은 차를 구경하는 척하면서 차를 파는 그들을 구경했어.
내가 그들이 된다면 어떨까?
창 너머로 보이는 그들이 너무나 한가롭기만 하였거든.
그저 앉아 있다 전화 받고 방문한 고객 앞에서 웃음 지으면 하루가 가거든.
영업소들이 한둘도 아니잖아.
시내 도처에 있으니 재벌들이 미치지 않았나 싶기까지 했어.
차를 팔려는 것보다 그들 복지를 위한 것이 목적이 아닌가 싶기까지 했다니까.
입사하지 않을 수 없었지.
반대가 많았어. 영업하면 사람 망친다, 전망이 없다 했어.
하지만 결심을 바꿀 수는 없었지.
이제 나도 그들처럼 이제 창 너머로 길거리를 볼 수 있게 된 거야.
그렇게 삼 년이 지나갔어.
생각보다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그럭저럭 지내왔지.
전쟁 없는 평화 시대에 스릴 있는 직종 중 하나라는 점도 알게 되었지.
돈맛도 알게 되었지.
오늘도 그러했지.
심드렁하게 차 소개만 했는데 고객이 견적 뽑자더니 계약하자는 거야.
소장에게 계약건을 말하니 이제 영업 삼 년 진가가 드러난다고 칭찬하더군.
운이 따라서라고 말할려고 했지만 빙긋 웃기만 했어.
운도 일하는 자에게만 오는 것이라며 줄창 설교할 듯해서 말이야.
다른 일이 또 있었던가.
아! 초저녁에 동해 식당에서 주문한 해물 된장국이 맛있었지.
빈 그릇을 가지러 온 식당 주인에게 하는 소리로 잘 먹었습니다 말했어.
주인이 자주 이용해 주세요, 경기가 안 좋으니 단골들이 신경을 써주셔야죠 하더군.
그후 동료들이 다 퇴근하고 난 후에도 나는 자리를 지켰지.
당직이니까. 당직자는 열시까지 근무니까 말이야.
어느새 하루가 가는군.
세월이 참 빠르지.
그때 김종화가 죽었다는 민기의 전화가 온 거야.
내가 무던하게 들어서 그런 것인지 민기 목소리가 무척 차분했어.
하여튼, 우리는 영안실에서 만나기로 했어.
전화를 끊고 도난방지시스템을 작동시킨 뒤 영업소 문을 닫았지.
차를 타고 라디오 FM 방송을 들으며 신촌 세브란스 병원으로 갔어.
오후 열시를 넘긴 시간인데 가는 길이 막혔지.
하지만 나는 서두르지는 않았지. 서두를 마음도 없었고.
영안실에 도착하여 친지에게 조의를 표했고 향을 피웠고 민기를 만났어.
이 모든 일이 삼십여분 걸렸을까.
민기가 바쁜 일이 있다고 갔고 나도 따라 바쁘다며 나왔어.
우리들은 늘 바쁘니까.
그런 후에 집에 와서 TV보다 잠들었어.
다음 날 일찍 일어나 회사 동료들과 전단지를 뿌리며 새벽 소구*를 하였지.
조회 후에는 담당 할당지역인 용천 아파트와 비호 상가를 돌아다녔어.
일을 마친 후 인근 까페에서 차를 마시다 전화로 애인을 불러냈어.
영업소에 계약건 때문에 현지 퇴근한다고 전화를 한 후 여관에 갔지.
섹스가 끝난 후 애인이 이상하게도 무척 긴장한 표정인 거야.
오래 전부터 말하고 싶었다며 그녀가 잔뜩 뜸을 들이다 결혼 이야기를 꺼냈어.
나는 그녀 가슴을 만지다가 담배를 꺼내 물고 천장을 바라봤어.
오래된 여관인가 보다.
벽지가 누르스름하다.
내가 아무 말이 없자 애인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어.
옷을 주섬주섬 입고 나왔어.
애인이 어디 가서 차 한 잔 더 하자고 했지.
탑골 공원에 데리고 가서 자판기 커피 마셨어.
그리고 그녀 집 앞까지 그녀를 바래다 주고 집에 와서 TV보다 잠들었어.
다음 날 계약건 명목으로 역시 현지 퇴근하고 애인을 불러내서 술을 먹었지.
애인이 별 일 없냐, 좀 우울해 보인다고 물었어.
그저 그렇다고 말한 뒤 소주를 들이켰지.
애인이 소주를 따라주며 요즘 바쁘냐고 물었어.
그저 그렇다고 말한 뒤 잔을 비웠지.
애인이 조심스럽게 우리 여관 갈까 라고 물었어.
오늘은 별로 라고 말한 뒤 잔을 비웠지.
한 병을 거의 혼자서 먹었나 싶었는데 우리는 여관에 가서 잤어.
다음 날 여관에서 출근했지.
그런데 택시를 타고 오면서 갑작스레 무엇을 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주 좋은 기억일 것 같은데 도저히 떠오르지 않은 거야.
정말 고통스럽더군.
겪어 본 사람은 알 거야.
망각한 것이 분명한데 망각했다는 것만 떠오를 때의 안타까움이란...
회사에 출근부 사인을 하는데 내내 그 생각뿐이었어.
조회 때 소장이 무슨 말을 하는데 입만 벙긋하는 듯했어.
왜 안 떠오를까?
용천 시장을 향해 가방을 들고 밖으로 나섰지만 딴 생각뿐이었지.
도대체 무엇일까.
도심 빌딩 사이에 있는 조그만 공원이 보였어.
벤치에 앉아 곰곰이 생각하기로 했지.
지난 며칠 동안에 무슨 일이 일어난다 정리를 해보기로 하였지.
그런데 정리를 해봐도 차를 계약해서 팔았다는 것외에 아무 일도 없었어.
혹 내가 손해보고 판 것이 아닐까.
고객에게 약속한 사항을 아직까지 실행하지 못한 것이 있을까.
그러다 애인 생각이 나서 전화를 걸었어.
- 별 일이 있었니?
- 아니 무슨 일인데.
- 어. 별 일은 아닌데...
- 뭔데?
- 내가 아침부터 뭘 까먹은 게 있는 듯 싶은데 그게 뭔지 잘 모르겠어.
- 그래?
- 너 혹시 오늘 나오다 내 물건 챙긴 거 있니?
- 없는데...
- 너 나한테 무슨 중요한 말을 하지 않았니?
- 음............ 없어.
- 그것 참, 이상하군, 알았어.
전화를 끊고 용천 시장에 들러 시장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어.
- 안녕하세요. 별고 없으시죠?
- 참, 부지런한 양반이군. 한 대 팔아주어야 하는데 말야.
- 에이, 말만 하지 마시고 한번 땡겨 주세요.
- 아저씨, 오늘은 자리에 계시는군요.
- 그래, 자네 왔나?
- 바쁘셔서 만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 보신다더니.
- 그게 말이야. 확 저질러 버릴려고 했는데 여편네가 이혼 도장 가져오라네.
- 이번에는 틀림없다고 했잖아요.
- 나도 똥차 치우고 싶은 맘이 굴뚝 같네. 기다려 봐. 좋은 소식 틀림없이 줌세.
- 새 카다로그가 나왔어요. 한번 보실래요.
- 에그, 그거 맨날 봐바야 뭔 소용이야.
- 당장 사시라는 게 아니니 그냥 보세요.
- 그 놈의 책 우리 같은 사람이 봐야 아나.
- 하하. 심심하실 때 보세요.
- 차가 필요하긴 한데...
- 이번이 좋은 기회입니다. 특별 할인 기간이거든요.
- 그러면 뭘 하겠는가. 경기가 좋아져야 차 사든가 말든가 하지.
- 새차 굴리면서 산뜻하게 나가는 겁니다. 장사도 잘 되실 거예요.
- 그런가. 허허. 이거 미안한데 커피나 같이 하지.
- 여, 대우 아저씨. 우리 집엔 왜 도라이버 세또 안 주는거야.
- 안녕하세요.
- 사람 차별하는 거야 뭐야.
- 갖다 드려야죠.
- 이 아저씨, 가만 보면 말만 잘 해.
- 마침 딱 떨어져서 영업소에 이야기 해놨어요. 걱정 마세요.
- 자네, 나 알지? 나, 용천 시장 터줏대감 박 말이야.
- 그럼요. 알고 말구요.
- 자네가 이곳에 오기 전에 다섯대나 소개해줬다고.
- 그럼요. 제가 잘 아니까 특별히 신경 쓰는 거 아닙니까.
- 어이. 바쁘니까 다음에 오라구.
- 인사만 하고 갈께요.
- 가 보라니까.
- 카다로그만 놓고 가겠습니다.
- 이봐. 자네가 아무리 떠들어도 대우차는 절대 안 타. 알아.
- 또 들리겠습니다.
- 여, 최군. 모해. 잡상인 들여놓지 말라고 내가 말한 거 잊었어.
- 사장님. 잡상인이라니요.
- 야이, 새끼야. 월급 받았으면 똑바로 일해야 될 거 아냐.
용천 시장을 다 돈 김에 점심을 먹고 인근 빌딩 하나를 마저 돌았지.
영업소로 돌아와 저녁 일과를 보았어.
소장이 월말이니 퇴근 후에 회식을 갖자더군.
다들 인물이 훤하네 하며 주물럭 갈비집 주인 아줌마가 반기더군.
주물럭 갈비집에서 소금구이를 시켜서 먹었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 인상 험악하면 영업할 수 있겠어.
얼굴이랑 말발이 재산인데 말이야.
영업사원들이 다 술이 센 것이 아니지만 술이 세지는 것이 사실이야.
궁금하면 영업을 해봐.
소장이 다음 달에도 화이팅 하자며 서민 폭탄주 만들어서 건배하자더군.
원샷!
다들 넥타이를 양복 왼쪽 호주머니에 쑤셔 넣고 소장을 빼고 이차를 갔지.
중간에 슬쩍 줄행랑이면 다음 날 사망이라는 선배 엄포 때문이었지.
열외없이 치킨집에 가서 병맥주를 들이켰어.
다들 술이 들어갈 만큼 들어간 듯 싶자 저마다 한마디씩 소장을 씹었어.
- 기생 오라비 같은 자식이 부장 빽 믿고 설치잖아.
- 영업의 영자도 모르는 게 족치면 차가 나오나.
- 답답하면 지가 직접 뛰어 보라고 해.
- 영업 전략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데 기도 안 차서...
- 기획실 놈들 말만 믿고 소장 놈이 탁상공론으로 차가 팔릴 줄 안다니까.
- 최선배, 내 말이 틀렸수. 그 놈 때문에 전임 소장이 물을 먹은 거 아니유.
- 에이, 이 놈의 직장 때려 치우든가 해야지. 점점 눈꼴 사나와서.
- 어이, 다들 들어. 오늘 모두 확 가 버리는 거야. 알았어.
- 그래, 저지르는 거야. 사표 쓰는 거야.
- 내일 출근하는 놈 있으면 내가 가만 안 놔둔다.
- 제일 먼저 출근부 도장 찍고 거래처 사람 만난다고 퇴근하시는 분이.
- 무슨 소리야. 난 한다면 하는 사람이야.
중국 수출차 육백대의 전설을 뭘로 보는 거야.
- 이번엔 틀림없는 거죠?
- 부장도 날 함부로 못 해. 자, 내가 책임질 테니 확실히 하자고. 건배.
아무도 그 선배를 믿지 않았지만 함께 술을 들이켰어.
한 박스가 없어졌나 12시가 넘어가고 있었어.
잘못 앉은 덕분에 선배에게 붙잡혀 3차까지 가고야 말았어.
3차 장소는 단란주점이지.
한 선배가 오랫 동안 차 팔려고 집중 투자하는 곳이지.
물론 아가씨들이 있는 곳이야.
중간 어깨들이 부업삼아 하는 곳이라 들었어.
영업사원들하고는 통하는 데가 많아서인지 호의적이었어.
사장이라고 소개하는 어깨가 잠시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지.
- 비즈니스란 원래, 비즈니스이기 때문에, 비즈니스 세계에선...
그의 말에서 비즈니스란 말을 빼면 시체였지.
사장이 일어나 나가자 선배가 한마디 했지.
- 저 친구가 원래 하우스를 보다 단속이 심해서 이 길에 나섰다는군.
암튼 저래도 뽑으면 아카디아야.
우리야 무슨 상관이겠어.
무슨 상관...
그래, 영업 삼 년에 배운 것이라고는 '무슨 상관'이란 단어였지.
어느 날 갑자기 단칼에 전임 소장이 목이 날아가도 무슨 상관,
사기쳐서 차를 뽑든 도박해서 차를 뽑든 무슨 상관,
동료 고객 뺏어서 차 팔아도 무슨 상관,
무슨 상관이야.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여전히 전쟁터이고,
회사란 자아 실현 따위와 무관한 곳이고,
나는 그저 소구 많이 해서 차를 많이 팔면 끝인 막장 일꾼일 뿐이지.
- 자, 화끈하게 놀자. 아가씨들 들여 보내.
- 안녕하세요. 진희예요. 미란이에요. 혜미예요.
이름이 무슨 상관이겠어. 다 가명일 터인데. 우리도 가명인데.
순식간에 이사장, 김상무, 오전무로 바뀌지.
아가씨들이 늘 부족하기에 선배들이 독차지하고.
선배들 중에는 유흥장에서만 쓰는 가짜 명함까지 만들어 논 이도 있었지.
- 자, 오늘 기분 끝내주면 아가씨들 봉 잡는 거야. 아니면 국물도 없어.
선배 동료들이 흐느적거릴 즈음에 나는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빠져 나왔지.
하지만 카드 긁고 내일 내게 분명 함께 갔으니 공동분배하자고 할 것이야.
무슨 상관이야.
나도 취해 길거리에서 호기롭게 큰 소리 쳤어.
- 씨발 놈들아. 무슨 상관이야.
사람들이 흘끗 보다 늘 있는 일이다 보니 무심히 지나갔어.
나는 택시를 타고 집에 돌아왔지.
TV를 켰는데
치치치칙......................................
"내가 점괘를 봤는데 점쟁이가 하는 말이 돈을 억수로 번다더군.
근데 글을 쓰면 돈을 벌지 못할 뿐만 아니라 명을 재촉한다네?
겨울철 쇳덩어리에 물이 고이면 녹슬잖아.
글이 물이래. 겨울철 쇳덩어리가 내 기본 운세이구.
하지만 어쩌냐. 글쓰기가 좋은데.
운명 알지? 운명이라구, 운명."
불현듯 툭하면 운명을 운운했던 그 친구의 글쓰기가 떠올랐다.
작가가 되보겠다고 다니던 직장을 때려 치고 소설에 전념하던 친구.
그를 아는 친구들은 그를 기이하게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그저 원래 기이한 녀석이었잖아 라는 것이 판단의 전부였다.
나는 리드온리족으로 게시판 글들을 읽다가 딱 한 동호회만 가입하기로 했다.
내가 그 친구를 알게 된 것은 바로 그 통신 동호회를 통해서였다.
내가 가입한 이유도 그 친구 글 때문이었다.
한때 문학 청년이었던 나는 글 잘 쓰는 사람만 만나면 심한 열등감에 빠졌다.
심지어 며칠간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그러다 직장을 다니면서 다소 객관적 거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심심풀이로 시작한 통신.
아무래도 문학 관련 게시판을 찾게 되었고.
거기서 그를 만나 다시 옛 콤플렉스를 느껴야 했다.
그럼에도 그를 쫓아 통신 동호회까지 가입한 것이다.
사람 일이란 이렇듯 불합리한 면이 대부분인 듯 싶다.
그는 게시판에서 세상에 독설을 울부짖듯 함부로 펼쳤다.
다른 이들이라면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목적이 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마치 80년대의 혁명의 화신인양 살아있는 화석처럼 90년대를 통과하고 있었다.
우리 시대에 아우라가 여전히 있다 라는 점을 웅변이라도 하는 양 말이다.
그리하여 그가 어떤 작자인지 매우 궁금했다.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물론 그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았다.
다만 그렇게 아직까지 살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기에,
또 만일 사실이라면 그런 족속 하나쯤은 있어야 되지 않느냐 보았기에,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그런 이로 인해 내 일상이 약간 재미있게 되지 않을까 기대했기에
그를 만나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를 직접 만나기 전까지 통신에서 말을 나누기가 불편하였다.
원체 내가 소심한 까닭도 있었다.
그의 광기가 과연 내 속을 들여다 보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있었다.
동호회에 가입하고서도 한참 동안 그의 글만 읽었다.
그런데 그가 최근에 여행기를 변형시켜 연작 단편들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후 <창작은 창작을 파괴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을 하였다.
그런 후 갖가지 실험들을 하는 것이었다.
그의 단편들이 대체로 재미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주목할 만한 소설이라기 보다 해프닝인 듯 싶었다.
동시에 막상 그가 자기 실험을 장난이라고 할 때 적잖이 실망하였다.
왜 그는 자기를 그렇게 못 잡아먹어서 안달일까.
그만한 힘이면 꾸준한 습작으로 잘 다듬을 수 있을 터인데...
뛰어난 작가 정도는 아니더라도 웬만한 작가가 될 수 있을 터인데...
더구나 자기 글에 대해 비평이랍시고 해대는 꼴이란 가관이었다.
#720 김종화 (INDRA )
기행르뽀소설은 실패작 08/22 09:08 69 line
한번에 쓰고 글을 올리고 읽어보니 재미가 없다. 고칠 부분이 부분적으로 많으나 이것이 문제가 아닌 듯싶다. 그건 사소한 문제이다. 더 큰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 글은 어디까지나 사실을 바탕으로 쓴 것이다. 그런데 다시 보니 작위적인 상황이 많았다. 참, 안타까운 일이다. 현실에서 다 일어난 것인데 글로 쓰니 작위적이라니 도대체 현실적이란 무엇인가 새삼 회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두번째로 거대 담론을 들이밀면 소설화가 약화된다는 측면이다. 꽃잎에서 장선우가 언급했듯 광주장면이 1분만 더 나왔다면 전체 맥락이 확 가라앉았을 것이란 대목을 다시 떠올려 본다. 통일과 성담론, 이것을 단편에 하나로 담는다는 건 틀림없는 오만이다. 설사 담는다 해도 딱딱한 이론서 읽는 게 나을 것이다. 다른 부분이 다 죽기 때문이다. 소설적 개연성이 상당 부분 축소되는 데다가 자유로운 상상력이 무거운 현실에 짓눌려 자칫 빛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세번째로 감성적 측면이 여전히 부족하다는 것이다. 상당히 싸늘한, 가라앉은 관점에서 썼기에 감성적으로 다가오는 것이 덜 한 듯 하다. 아직도 나는 일상에서 보여주는 치열한 감수성(웬 자아도취?)을 글로 옮기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가령 대화적 상상력에 관한한 내가 여지껏 만난 사람 중에 나만한 지위를 가진 분이 몇 되지 않았다. (진짜 황태자암이다!) 이것은 논리적인 게 아니다. 매우 감성적인 것이 뒷받침되어야 하며 사실상 논리성은 부수적인 것이다. 감성적이란 표현보다는 나는 감동적인 것을 선호하는데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느낌'이라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상황에 완전히 몰입되어 순간순간 우주(우주란 속해 있는 범주에 따라 자아, 일대일 관계, 대중 등으로 변화될 수 있다.)를 따뜻하게 끌어 안으면서 극한까지 밀어붙이고 자기를 확 놓아 죽음(?) 직전까지 가보려는 것으로 규정될 수 있다. 죽음 직전이란 죽음 앞에서 초연할 만큼 느낌이 고조되어 있으며, 자아와 세상이 일치되는 때를 말한다. 네번째로 소설 전체가 언뜻 보면 구조적인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그렇지 못하다. 외곽적으로 선언적으로 규제되어 있을 뿐 내부적으로는 각자 따로 놀고 문장 몇 마디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는 요즘 나오는 대부분의 소설과 마찬가지로 쓰레기도 되지 못한다. 다섯번째로 논쟁적이지 않고, 문제작도 아니라는 점이다. 좀 더 강렬한 톤으로 사회 갈등, 혹은 내면 갈등을 드러내었어야 했는데 은근슬쩍 타협을 시도한 점이 거슬린다. 이는 불철저한 작가의식에서 기인한다. 문제작은 이러한 불철저함을 극복하고 낡은 이분법을 해체하고 새로운 이분법(즉, 내가 강조한 새롭고, 밑바닥을 뚫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역전시키는 이분법)이 나왔어야 했는데 부족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준비한 바가 있고, 개념을 확실히 깨닫고 있어서 다른 문제점에 비해서는 개선할 여지가 있다. 여섯번째로 문체가 안정적이지 못하다. 안정적이지 못하다보니 물흐르 듯이 표현들이 읽혀지기는 커녕 끊기기 일쑤이다. 이 점은 참 나의 고질병이다. 왜냐하면 어떤 산문에서는 이 연결이 내가 보기에도 놀랄 정도로 섬세하게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떤 산문에서는 내가 보기에도 보기 싫다. 이 글은 보기 싫을 정도는 아닌데 좋다고 말할 수 없다. 게다가 이 정도 문체는 요즘 무수한 등단 작가들만큼이나 너저분하다. 마지막으로 철학이 아직 체화되어 있지 못하다. 따라서 압축시키고 드러내어 힘을 과시할 주제적 문장들이 제대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겉으로 드러낼 뿐인 철학은 속빈 강정에 불과하다. 빙산의 일각만을 보여주는 철학이 요구되는데 아직 나는 멀었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실패작이다. 재미가 없다. 완전히 재해석하여 철저히 픽션화해야겠다. 하지만 이 작품을 폐기하지 않으련다. 아무래도 경찰청 사람들 버전은 하나쯤 있어야 하니까. 정말 침통한 아침이다. 5시간만에 쓴 소설을 30분만에 읽고 이런 소리를 하는 내가... 너무나 우울하다.
그의 글들이 대부분 그러하지만 상기한 글 또한 터무니없다.
도대체 그의 진위를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다 알고 하는 소리인지 분간이 되지 않는다.
설령 안다 할 지라도 저렇듯 자신있게 말하는 투를 용납할 수 있다는 말인가.
더구나 다른 네티즌들이 저런 말투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는데...
차를 파는 나조차 그런 느낌인데 뒷감당하기 벅찬 말들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다들 나 같은 심정일까.
마지막 구절인 <너무나 우울하다>는 것이 결코 포장된 말 같지가 않은 것이다.
그가 단지 썰을 푼 데에 지나지 않은 것인데 왜일까?
혹시 그만은 진지한 것이었으면 하는 내 바램 때문일 것인가.
#747 김종화 (INDRA )
[비평] 도박에 대하여 08/25 01:44 34 line
이 작품이 새로운 것이라 보기에는 진부한 구석들이 눈에 띈다. 평소 작가(비평가?)가 비평작업에서 최초로 소위 의식의 흐름을 도입한 사람답지 않게 정형적인 이야기 라인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약간의 회상 장면을 삽입시켰는데 이 또한 정형적 스토리 라인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시간이 사건이 발생한 시점에 따라 진행되고 있음이이러한 주장의 밑받침이다. 따라서 이러한 시간적 흐름에 대한 파괴까지는 기대하지 않더라도 주체적 시간의 도입을 통한 텍스트의 교란을 시도하지 않은 점은 이 작가가 여전히 소설쓰기의 미숙함을 보여준다 하겠다. (그러나 정형적 이야기 수법을 쓴다 해서 미숙하다고 볼 수는 없겠다. 다만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들이 과연 이러한 이야기적 시간구성에 의해 충족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을 남겨 두고자 한다.) 부분적으로 표현의 미숙이 눈에 띈다. 평소 오문과 비문이 난무한 작가인 점에 비추어 보면 많이 나아졌다고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이를 방관할 필요까지는 없다. 게다가 이 작가가 평소 비문과 오문을 옹호하자!라고 주창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작가의 기회주의가 엿보인다 할 수 있겠다. 이 점에 대해서는 작가의 변명이 기대된다. 기왕의 분석들은 대립쌍들의 갈등을 예리하게 포착했는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너무도 뻔한 대립쌍을 뻔하게 작동시켜 웬만한 독자들이 하품을 하기에 충분할 만큼 글을 전개시키고 있다. 죽음/삶, 문제없다/문제있다 등. 도박, 섹스, 동성애 등등 이런 메타포들의 사용이 유치하다. 더군다나 작가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가 분석하기도 한 영화 포 더 선라이즈를 패러디하지 않았나 생각될 정도로 유사한 구조를 갖추고 있다. 끝으로 이 형편없는 작품에 미덕이 있다면 그의 실험 정신 외에는 없을 것이다. 완결되지 않음.
세상에, 나라도 상기한 식의 비평을 삼가고 싶을 지경이다.
주체적 시간, 텍스트 교란, 기회주의, 메타포 따위들...
단순히 현학적인 것따위에 질색하는 성미 때문만은 아니다.
아무도 게시판에서 그의 작품을 두고 뭐라 하지 않는데 이런 글을 올린다는 것이다.
#761 김종화 (INDRA )
[비평] 재회에 대하여 08/25 18:38 26 line
이번 글은 그래도 좀 재미난 편이다. 지나친 자의식이 별로 눈에 뜨이지 않으니까. 게다가 연애 이야기란 얼마나 재미있나. 이제 좀 그만 동성애 타령은 그치고 본격적인 이성애나 신경쓰면 어떨까. 그 점에서 이번 이성애적 사랑을 - 전편에서 그녀는 리미로 나왔는데 이번 버전에는 주인공을 맡았다. - 다룬 점이 상투적이었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위 요즘 신세대 작가들 작품들이 하나 같이 죽냐. 이것 참, 병폐가 아닐 수 없다. 막바지 반전이 재미없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신선한 건 아니었다. 차라리 시간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이 어떠했을지. 가령 미립자에게서 나타나는 동시성을 보여주었다면 어떠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동시성으로 나타난 주인공이 괴로워하고, 당신 또한 주저한다면 환상 문학이 되지 않았겠느냐. 그러나 고작 미스테리와 포르노그라피를 짬뽕한 것에 불과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죽음 뿐이다. 아울러 정말 환상 문학에 관심이 있다면 보다 적극적인 변화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당신이 주장하는 환상적 리얼리즘이 뭔지 한번 드러내 보여야 말이 되는 것 아닌가. 주체의 소멸을 마지막에 가서 살짝 회생시킨 이유는 무엇인가. 괜한 장난치지 말기를 바란다. 아무튼 이 사기극이 어디까지 가나 두고 보기로 한다. 당신 말대로 이제 무엇이 표적인가!!!
점입가경이다.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것도 유분수이지.
아무튼 나는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장난>이라는 말을 삽입시키면서까지 이런 글을 대체 왜 올릴까?
너무 거대한 거짓말은 미처 파악하기도 전에 시간이 흘러 사실이 되는 걸까?
모두들 나처럼 그래서 침묵하고 있는 것일까.
#774 김종화 (INDRA )
[비평] 즈므에 대하여 08/27 10:39 16 line
점차 버전업되어가는 작품들을 보며 나는 서글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도대체 어쩔 심산으로 이 형편없는 작품들을 진행시켜 가는지 모르겠다. 물론 그는 내 비평을 조롱이라도 하듯 하나하나 격파해 가면서 글을 써나아가고 있다. 나는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글이란 그런 것이 아니다. 글이란 마음으로 읽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이다. 당신의 글에선 참된 빛이 느껴지지 않는다. 나는 이 점이 매우 안타까울 따름이다. 사족으로 단다면 환상 소설 흉내를 낸 것이 인정될 수 있다. 하지만 구조적인 결함이 여기저기서 눈에 뜨인다. 당신이 정말 소설가로 밥먹고 살고 싶다면 내 충고를 거역하지 마라. 당신은 자제되어야 한다. 당신의 무수한 시도는 이미 문학사에서 수십 차례 진행된 날것일 뿐이다.
이젠 웃기지도 않는다.
자기가 자기더러 '서글픔'을 느끼지 않나 '인정'한다니...
'안타까움', '흉내', '충고', '자제' 등등의 단어를 남발하면서...
그가 지금 던지는 말은 과연 누구에게 하는 말인가.
나 같은 독자에게?
아니면 바로 자신에게?
#786 김종화 (INDRA)
[비평] 변신에 대하여 08/28 17:23 23 line
언제나 당신의 팍팍한 문체는 나를 질리게 한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다. 신파조를 약간 가미했다고 문제를 회피할 수 있을까. 오히려 신파를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그 무슨 장난이란 말인가. 매번 가볍기 그지 없는 장난으로 텍스트의 황홀함을 외치고, 소설인지 평론인지 아무 것도 아닌 것을 떠들고, 하이퍼 픽션인지 메타 픽션인지 도무지 방향성을 두지 않게 하니 당신은 도대체 누구인가. 당신은 지금 약간의 호의섞인 글들에 고무되어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제는 아예 무협지로 나섰구나. 참으로 걱정되는 짓만 골라서 하는구나. 소설가로 먹고 살겠다면 정도를 가야 하고 뭇 소설가들이 그러하듯 오랜 습작과 독서와 번민을 해야 함에도 밑천이 바닥나는 것이 뻔히 보이는 수작으로 요행수를 찾는다면 길이 없으리라 장담하는 바이다.
그의 비평 아닌 비평은 여기서 끝났다.
나는 진짜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왕 시작한 것 끝까지 해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지 밝히던가 해야 하지 않던가.
사나이가 한번 칼을 뽑았으면 끝장을 봐야지 이 무슨 수작인가.
그는 여기서 왜 멈췄을까.
아마도 나 같은 독자가 은밀히 충고를 하지 않았을까.
아니면 그 스스로 하는 짓이 역겨워서 그런 것일까.
그가 텍스트에 진정 충실하다면 자기 글에서 넌지시 밝혔어야 되지 않을까.
그러나 그의 글이 대개 그러하듯 중구난방 일색이다.
그는 그 이후에도 버전업된 글을 계속 올렸다.
그것이 그의 특징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내가 그의 글을 읽고 할 수 있는 말이란 이것뿐이라니.
그를 만나고 싶다.
그를 만나 왜 이런 짓거리를 하느냐고 묻고 싶다.
하지만 시기가 있는 법인데 좀처럼 때를 잡을 수가 없었다.
무작정 기다릴 수 있을 만큼 내가 마냥 한가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기회는 올 것이다.
그렇듯 만남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던 차였다.
그때 그가 죽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동년배인 민기는 통신에서 내가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또한 김종화를 만나본 사람이기도 하다.
그러나 민기조차도 그를 조금 안다고 하였다.
나는 영안실의 영정을 통해 그의 얼굴을 처음 볼 수 있었다.
그의 사진을 처음 접한 뒤 민기를 만나 물었다.
- 어떻게 된 일이지?
- 그게. 아직 나도 잘 아는 건 아닌데...
술을 마시다 갑자기 도로에 뛰어 들어 사고가 일어났다던가.
같이 마시던 이도 그렇고 사고를 낸 운전자도 그렇고...
- 어떻게 그런 일이...
- 그건 네가 그를 몰라서 하는 소리야.
그는 자주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하긴 했어.
술만 취하면 혁명 만세 부르짖는 바람에 주변 사람들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왜 그러는지 술 깨면 본인도 모르는 듯 싶어.
게다가 얼마 전에는 게시판에서 한 친구와 심하게 다투었는데...
다들 이유를 모르고 있어.
그가 왜 그리 화를 내며 싸웠는지 말이야.
그가 내게 말하길 반혁명적인 작태에는 참을 수가 없다 라고 말했는데...
요즘 세상에 그걸 누가 액면 그대로 믿겠어.
그와 싸운 친구와도 이야기를 해봤는데 그 친구도 모른다는 거야.
자기에게 억하심정이 있지 않고서야 자기에게 욕설을 퍼부울 수 있냐는 거지.
다른 이유가 있다면 자기도 오해를 풀고 싶다고 하더군.
그런데도 그는 단연코 그런 건 없다고 말하는데...
아무튼 그는 가끔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보이곤 했어...
하지만 이렇듯 기어코 사고를 당할 줄이야.
그렇던가. 그도 결국 천재 흉내를 내보고 싶어하는 이상증후군 환자였던가.
그럴 지도 모른다.
그는 자기 존재 증명을 하고 싶어했다.
이번 소설에서 틈만 나면 죽음을 말했다.
게다가 그는 자신을 서슴없이 '죽은 자'라고 하지 않았던가.
벌레조차도 되지 못하니 죽은 자라고 말이다.
일상의 자신과 의식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현실을 죽이고 허구를 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작품 안에서 영원을 취하려는 욕망이란 흔히 볼 수 있는 소재이니까.
그리하여 그 또한 그러한 진부함 속에 편입되고만 것일까?
불행히도 그는 죽음을 통해서 벗어나고 싶어했지만 말이다.
민기가 같이 밤을 새우고 싶지만 내일까지 마감해야 할 일이 있다 말했다.
나는 잠시 영안실에 머물러 있었다.
영안실에는 그의 주검 이외에도 다른 주검들이 있었다.
문상객들로 흡사 시장터처럼 소란스러웠다.
술 판매 등을 금지시켜서인지 다른 곳보다는 덜 시끄럽다 할 수 있지만...
나는 그의 영정을 먼 발치에서 다시 한번 바라보았다.
급히 마련한 사진이어서인지 영정 사진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익살스럽기까지 보이는 영정 사진이었다.
얼굴을 잔뜩 긴장시켜 양미간을 좁혀 마치 내게 쏘아붙일 듯한 표정.
그의 소설 한 대목이 떠올랐다.
나는 유럽여행 내내, 더 나아가 내 삶 속에 파괴입자가 숨어 있다 어떤 균열이 일어날 때마다 순식간에 내 삶 중심에 틈입하여 전체를 몽땅 다 무너뜨리곤 했던 이유가 작용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의문이 시간이 지날수록 해소되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뒤엉켜서 혼돈에 빠지다 벼랑 끝으로 떠밀리는 공포로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더 큰 혼란으로 이끌 뿐인 문학행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지나치게 진지한 일이다.
나는 이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글쓰기란 늘 과잉 자의식에 기초하여 감정을 극대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일반 사람들도 연애편지 쓸 때처럼 잠깐 흥분을 했다 마는 것처럼 말이다.
더군다나 상실의 시대에서 그만이 설령 아니라고 한들 달라질 것이 있던가?
한 개인이 어쩌지 못하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이 있는 것이다.
그 흐름이 설령 거꾸로 간다 할 지라도 말이다.
우리는 TV에서 매일 멋있게 죽거나 사는 사람들을 보며 대리배설할 뿐이다.
다른 어떤 식으로 참여할 여력이 없다.
그런 여력이 혹 있더라도 기껏해야 임기응변으로 말만 살짝 바꾸기일 뿐.
그래놓으니 서로가 서로를 욕한다.
그들의 대표자들인 정치인들이 대표로 욕하고 욕을 먹는다.
너도 별 수 없구나. 너도. 너도. 너도...
그러하니 차라리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옳다.
차라리 행동하지 않은 것이 옳다.
나는 영안실을 빠져 나와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성산대교를 지나가다가 보니 밤에 휩싸인 한강의 야경이 운치가 있었다.
눈물이 흐른다
너는 걸어서 가지만
나는 차를 타고 간다
너는 자살했지만
나는 한강의 야경을 본다
눈물이 흐른다
눈물이 흐른다
눈물 흘리는 나를 누가 탓할 수가 있는가
영혼을 노래한다는 비운의 작가여
너는 세상 주목을 잠시라도 받는다면
나는 그런 주목을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일개 차팔이
아서라
그런 기대가 무슨 소용인가
나는 나에 만족하련다
나는 나에게 충분한 존재
"새벽 세시.
한스가 따라나왔다. 아쉬운 듯 김종화를 쳐다보다가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어디론가 가 버렸다. 김종화는 짐이 무거워 잠시 히치하이킹을 할까 했다. 그러나 차들은 신호등을 잘 지키면서도 신호가 바뀌면 쏜살 같이 각자의 길로 달려갈 뿐이다. 새 깃발이 다 무슨 소용인가. 그 깃발 아래에서 소용돌이치는 것은 중심을 향한 부러움일 뿐이다. 김종화는 문제가 있을 때마다 걷고는 했다. 지금도 걷는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니, 콧물이었다. 이어폰을 끼고 카세트 테입을 돌린다. 벌레 같은 삶이 지속되는 건, 귀족적인 죽음 때문인데, 지금 죽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채찍질하기 때문인데, 버튼을 누르면 그대로 재생되는 카세트 테잎처럼 늘상 던져진 질문에 답변만 그럴싸하다. 김종화는 스스로 바보같다는 걸 뻔히 알면서 이어폰을 끼고 걷는다.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어디로 갈 것인가. 조금 늦게 도착하면 다를 것인가. 내 마음 나도 알 길이 없어...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김종화는 무방비 상태로 당장 코앞에 닥친 답변 때문에 기억을 더듬으며 터덜터덜 중앙역으로 끌려 가고 있었다.
무서운 독감에 걸린 라이프찌히, 그리고 김종화. "
그러자 문득 그의 영혼이 내게 빨려드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의 죽음을 알리는 전화에도 놀라지 않았다.
나는 그의 영정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슬픈 감정이기는커녕 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민기의 말에도 짐짓 궁금한 척 했을 따름이다.
고객이 어떤 차를 살 지 가늠하는 수준의 것이었을 따름이다.
내 깊은 저 곳에서 안도감이 일었다.
그가 죽자 비로소 나는 그의 글에서 해방을 맛본다.
내가 내 마음대로 글을 해석할 지라도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의 작품을 내 편리한 대로 뜯어 고치건 수정하건 해석하건 말이다.
그것이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다면 만족이지 않겠는가.
그것이 문학이지 않겠는가.
그처럼 심오하게 '문학 행위란 무엇이냐'식으로 폼잡을 것 없지 않던가?
나처럼 조용히 집으로 향하는 것도 문학 행위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만이 무방비 상태로 홀로 멋지게 가는 것이 아니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짊어지고 가지만 나는 다 훌훌 내던지고 간다.
더군다나 나는 그처럼 무서운 독감에 걸리지도 않았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벨 소리에 잠이 깨었어.
- 나야.
- 어.
- 나, 지금 즈므에 와 있어. 가보고 싶었거든.
- 그래.
- 즈므에 가고 싶었다고. 즈므에 가고 싶었는데...
- 응.
- .........
-..........
- 끊을게.
즈므...
전화를 받고 나서도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있었어.
즈므... 어디서 많이 들어보았는데...
"속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전국적으로 전노 사면 반대 운동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가운데 전직 대통령인 전두환씨가 오늘 새벽 급성 심장마비를 일으켜 사망했습니다. "
TV에서 갑자기 아나운서가 흥분해서 멘트하는 소리가 들렸어.
멍하니 TV를 바라 보았지.
전두환이 결국 죽었구나.
나는 잠시 놀란 모습을 보이려 애썼지만 놀랄 수 없었어.
벌컥벌컥.
냉장고에서 병째로 물을 마셨지.
치카치카치카.
치솔질을 하고 세수를 한 뒤 출근을 했어.
- 김종화씨! 어제 언제 갔어? 아구, 속 쓰려라.
- 끝까지 있었는데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안 나요. 아 참, 전두환이가 죽었다네요.
- 나도 들었어. 출근하다 라디오에서. 잘 죽었지 모. 전두환 때문에 나라가 뒤숭숭했는데 이제 조용해질라나? 젠장할, 우리 같은 차팔이야 경제 걱정만 하면 되지 모. 전두환이가 죽든 말든. 암튼 그 사람도 제 명에 결국 죽긴 죽었네.
나는 출근부 싸인을 한 뒤 오늘 아니 어쩌면 내일 일정을 짜기 시작했지.
* 소구 : 영업 용어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한 직간접적인 고객 접촉 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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