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구십년대말 에세이 모음 헤겔법철학서문 번안 백두산호텔에가다 등등

인드라 VS 이한우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고 싶다 (* 이 글은 98년 반문화 창간 당시 <반문화> 창간호를 내면서 준비한 보도자료이다. 작성은 물론 편집장인 내가 하였으며, 통신상으로 발표했다. 창간 축하모임은 인사동 조성희 화랑에서 했다. 잡지 등록을 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올 것이라고 기대도 안 했다. 잡지 등록은 3호에 하였는데 <반문화>는 3호를 끝으로 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인드라 VS 이한우 대담은 가상이다.) 이한우 : IMF 시대다. 어려운 시기에 잡지를 창간했는데 어떤 목적으로 창간하게 되었는가. 인드라 : 우리는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기누설이므로. 이한우 : 그렇다면, 잡지 이름이 반문화다. 잡지명을 반문화로 한 이유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인드라 : 우리도 궁금하다. 와서 확인하고, 당신의 견해를 말해 달라. 그것이 우리가 반문화를 만든 이유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이한우 : 인터뷰를 장난으로 아는가? 인드라 : 우리는 진심으로 답변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자존심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의 탓이 아닌 것 분명하다. 이한우 : 음. 좋다. 그럼 헛고생한 셈치고 계속 질문하겠다. 하지만 정말 자꾸 이렇게 나오면 인터뷰고 뭐고 없을 것이다. 당신들의 경쟁잡지랄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인드라 : 있다. <창작과 비평>과 <상상>이다. 이한우 : 드디어 답변다운 답변 하나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영세출판사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편집장과 편집위원이 만든 신생잡지가, 그것도 웬만한 잡지들이 줄줄이 위기에 처해 있거나, 망한 요즘에 각오를 다진다고는 생각되지만, 현실적인 발언이 아닌 듯 싶은데... (편집장한테 어디서 자빠져 놀고 있었냐 핀잔먹지 않을 수 있게 되었군.) 인드라 :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적 출판상황과 들뢰즈적인 유목적 상황이 허락하는 한, 또한 마르크스가 남긴 공산당 선언이 시사하는 카오스적인 한국의 구십년대 상황을 고찰하는 한, 게다가 일제의 조선강점 이래의 D.H. 로렌스적인 혁명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한, 더욱이 비동맹회의와 UFO의 관계가 나날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이 때에 사빠띠스타와 붉은 악마간의 함수관계를 메타적으로 짚어보는 분석들이 속출하지 않는 한,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적 역사성을 돌이켜 보는 한, 강준만, 황장엽, 심형래, 타란티노, 고종석, 홍세화, 김홍준, 시나위, 홍상수로 이어지는 벤처적 하버마스 소통 곡선을 따라 가는 한, 우리는 현실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한우 :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말한 건가? ( 역시 야단맞겠군. 에이, 술이나 마실 걸.) 인드라 : 그건 당신이 판단할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다. 이한우 : 아무튼 쉽게 하자. 먹물들 이야기에 지친 게 나다. 그렇다고 나도 먹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같은 먹물들끼리 이러지 말자. 다시 한번 말해 달라. 경쟁상대를 그렇게 여긴 까닭은? 인드라 : 초등학교를 나온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답변하였다고 보았는데 그렇다면 막 자궁에서 나온 태아의 입장에서 말하겠다. 응아! 이한우 :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나 좀 봐줘라. 나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생각하면, 취재하러 가라고 한 편집장을 좆나게 패주고 싶지만, IMF 시대에 그나마 월급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직장이고, 그런 대로 정 붙이고 살만한 곳이다. 사정을 봐달라. 당신이 떠든 대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인드라 : 진작에 그렇게 말할 일이었다. 언론용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상상>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창작과 비평>의 선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하여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한우 : 말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상상>의 선정성과 <창작과 비평>의 예술성이 아닌가? 인드라 : 아니다. 제대로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다. 우리는 프로이기에 허튼 소리를 가급적 삼가한다. 이한우 : 잡지를 아까 보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간 건강한 아마츄어리즘을 표방한 잡지들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잡지가 시중에 나오게 되면 또 다른 대학 교지적 잡지라고 말을 들을 수도 있을 듯한데. 인드라 : 바로 그것이 우리가 노리는 지점이다. 우리는 프로이기 때문에 대학 교지적인 잡지를 만든 것이다. 아무나 대학 교지적인 잡지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대학 교지가 다소간의 문제가 있지만, 한국 잡지의 역사는 대학 교지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울러 기존 잡지도 그 연장선상에 있기에 우리는 그처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기존 잡지가 대학 교지적 성향을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면,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타락한 자신들을 성찰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성찰이 없고, 단지 부러움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원래 프로이기 때문에 아마츄어적 생활을 해 본 바가 없어서 그러하다. 이한우 :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인가? 보통 신생잡지들은 상업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잡지 본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곤 한다. 그러한 것인가? 인드라 :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상업주의를 철저히 옹호하고자 한다. 만일 이번 창간호에서 그러한 맥락을 읽지 못했다면, 우리의 능력 부족일 따름이다. 우리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업주의에 복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정신을 말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상업주의이다. 그러한 정신의 표현은 '절대 폐간하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우리의 영업방침이다. 우리는 그책을 영업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절대 불순좌경용공친북음해세력의 사상서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국에서 큰 착오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소견이다. 이한우 : 좋다. 장난이 아니라면 <자본론>의 어느 대목이 영업 필독서에 걸맞는지 한 대목만 소개해 달라. 인드라 : 자본론 제 1장 제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이란 항목에서 '성직자의 10분의 1세는 성직자의 축복보다도 확실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말은 무엇인가. 우리 같은 프로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정신자세이며,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암기해야 할 생존법칙이다. 가령 당신과의 인터뷰에 응하는 까닭은 당신의 인간성과 하등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알 이유도 없고, 공짜로 알려준다고 하여도 우리로서는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다. 이한우 :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암튼 당신들 사정을 최대한 이해하기로 방금 결정했다. 혹 위악적인 어떤 표현으로 우리를 보다 깊이 감동시키려는 전략이 아닌가. 인드라 :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또한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프로는 흥정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속사정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위악이 유행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아울러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래하는 동안 만큼은 진실하다. 장삿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계약 신뢰성 때문이다. 우리는 신뢰를 위해서라면 목숨만 빼고 아깝지 않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한우 : 기자가 인터뷰를 할 때는 자세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온다. 당신은 과거 운동권이지 않았는가. 또한 당신의 마르크스, 데리다, 라이언. 네그리 등을 언급하는 통신 글도 보았다. 그러한 말은 자꾸 자신의 변절(당신이 하도 이렇게 나오니까 실례되지만 써보았다)을 변명하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아 보인다. 인드라 : 그러한 오해가 늘 안타까왔다. 맞다. 나는 운동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영업원칙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못 믿겠는가. 그렇다면 관공서, 은행, 재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운동권 출신을 확인해 보라. 그들이 대우받는 까닭을 아직도 모르는가. 상사들이 왜 운동권 출신을 선호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영업원칙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문화비평 평문으로 '21세기적 피라미드 영업조직과 우리의 할 일; 부제: PD적 전망을 가진 사노맹적 혁신에 대하여' 쓸려고 작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적 평문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만 알려주겠다. '변절'이란 영업원칙 속에서는 베네통 광고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으나 한번만 써먹어야 효과가 크기 때문에 함부로 쓰지 않는 히든카드다. 또한 지금은 공황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대학가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강좌가 인기이고, 책도 많이 팔린다고 한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가령 공산당 선언 같은 소책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인류들에게 읽혀졌나. 그만한 영향력을 갖춘 책이 근현대사에 있었더란 말인가. 그 소책자가 학문적으로 어떠한 지위를 갖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들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중시할 따름이다. 게다가 우리는 금서증후군이라는 놀랄 만한 마케팅 특수가 있다. 금서이지 않으면서도 금서인 것들이 특히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리고 신세대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이니 데리다이니 네그리이니 하는 거다. 조만간 일본문화가 개방된다니 이제 그쪽으로는 별 볼 일이 없으니 길게 보고 결정한 것이다. 뭘 모르는 아마츄어들 견해가 잘 될 턱이 있냐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쪽 사정이고, 우리는 상관하지 않을 따름이다. 아무튼 상식적인 것 아닌가. 대선 후보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참신한 것을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한우 : 혹 정신병력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드라 :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이 사회를 지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내용을 약간만 발설했을 따름이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천기누설이라고. 그러나 당신이 하도 반신반의하기 때문에 조금만 말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이한우 :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당신 잡지 성격은 문화비평지이다. 당신 말마따나 영업원칙에 따른 것이라면 당신들이 구십년대 초반에 나왔어야 하지 않는가. 적기를 놓친 것이 아닌가. 지금 문화비평 자체가 거품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기까지 한다. 인드라 : 이래서 당신은 늘 기자 따위나 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출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초보적 상식을 모르는가? 셀 수 없이 비평지 편집장들이 툭하면 내뱉는 영업 원칙 말이다. 대재벌이 어느 때 보다 덩치를 키우는가. 이러한 위기 때이다. 영업은 위기를 헤쳐먹고 큰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다는 말인가. 이한우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런 말은 처음이다. 아무튼 좋다. 당신 말한대로 다 실어볼 생각이다. 일단 재미는 있는 것 같다. 인드라 : 바로 그것이다. 재미! 문화의 처음이자 끝은 재미다. 혁명을 위해 고스톱치나? 아닐 것이다. 그처럼 영화를 보고, 축구 응원도 하고, 클럽에서 헤드벵도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위해 동성애자가 섹스하나? 재미로 따지면 다 이해가 되는데 이런 걸 다르게 이해하니 쓸 데 없이 금지하는 거다. 이해는 간다. 적당히 금지해야 장사도 되니까. 그러나 독점하지 말자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와 단란주점 아가씨들과 경쟁관계에 있기도 하다. 이한우 :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당신네 표지만 보면 전혀 뜰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팔릴 것 같지 않다. 기대하고 있는가? 인드라 : 오늘 내 사주팔자를 보았는데 기대하지 말 것!이라고 나왔다. 그러나 사주팔자의 묘미란 무엇인가. 바로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정신이 아니던가. 이한우 : 에이, 정말 더러워서. 뭘 처먹었길래 말이 고따우로 나와? 물에 빠져도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겠다. 할 말 있으면 해봐라. 인드라 : 그러한 표현은 위대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표현이다.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물론 키취가 유행이고, 엄숙주의 타파가 유행이니 당신 같은 사람도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이왕 쓰는 말 알고 쓰길 바란다. 아니면 비웃음만 당한다. 이한우 : 별 그지 같은 새끼가. 좋다. 내가 만일 너 같은 씹새끼한테 필자 선정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말할 거지? 절차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헌법 제 37조에 따라 네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면 영업 노하우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거지? 인드라 : 나는 기자를 같잖게 보지만, 남들 따라하기에는 다소 눈치밥이 있기에 기자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약간 유사했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룰만을 존중한다. 아울러 그런 까닭은 하등 영업 비밀이 될 수 없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아는가. 우리는 이런 점을 깊이 깨닫고 필자들에게 각개 약진을 주문했다. 기획이 없는 기획. 이런 걸 안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모른다면 모르는 자신을 안다는 것이 지혜임을 말하고 싶다. 이한우 : 좆 같은 새끼. 아무리 그래도 임마, 이왕 책을 냈으면 교정이나 잘 볼 일이지, 그게 뭐야, 임마. 곳곳에 오자가 있잖아. 그러면 필자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글을 기고하냐? 그리고 보아하니 원고료나 주었겠어? 인드라 : 바로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목표다. 사람들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잘 믿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자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오자를 삽입시켰다. 이와 같은 작업에 대해서 극작가 브레이트가 말했다. 오로지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민중적이다. 우리는 브레이트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민중적이다,라는 표현을 심봤다!로 표현한다. 요즘은 대박이라고도 한다. 또한 원고료 문제도 그러하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대한 갖가지 음험한 소수 의견이 있다. 우리는 이를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바깥에서 모르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이한우 : 그렇게 만들고 책값을 육천원이나 받냐? 씨발 새끼들. 양심에 털난 새끼들. 인드라 : 최근 한 외국인이 <버그>란 잡지를 만들어 시중에서 팔고 있다. 그 외국인의 영업전략에도 그런 소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세계화는 아직도 먼것 같다. 한마디하자면, 그 외국인이 잔머리를 좀 많이 굴렸지만, 우리보다 저열한 단 한 가지는 값싼 잡지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작이 이렇지만 고급지를 추구하고 있다. 돈 되는 잡지를 만들 거다. 아울러 가격 책정에 대해서는 탐미주의적 원칙을 적용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한우 : 질렸다. 끝으로 아무 말이나 해봐라. 좆만한 새끼. 인드라 : 이로써 우리는 한 명의 독자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이만한 인터뷰에 그만한 대가없이 우리가 움직일 수가 없다. 당신의 욕 만큼 이제 당신은 앞으로 우리 잡지에 애증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당신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고 싶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번안 맹성사회(猛省社會) 2004. 6. 13. 11:38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3182037 엮인글 1개 통계보기 첨부파일 (1) 번안 [ 案 , adaptation ] 외국 문학작품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인물·장소·풍속·인정(人情) 등을 자국(自國)의 것으로 바꾸어 개작하는 일. 번역 [ 飜譯 , translation ] 한 나라 말로 된 글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는 것.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직역(直譯), 뜻을 살려서 번역하는 것을 의역(意譯)이라 한다. 한국의 수많은 번역자들은 국내 번역 출판물의 번역을 성토하곤 한다. 원저를 완벽히 훼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번역했다 등등. 그리하여 필자는 이렇게 접근해보았다. 그렇다면 그 모든 번역물들을 번안물로 여기고 접근하여 훌륭한 번역자(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번역자가 아닌 셈이다.)들을 작가로 대접해주자는 것이다. 그들이 원작이라는 유령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기 보다는 그들의 목적에 충실하게 우리 앞에 당당히 전위로 나서달라는 것이다. 첨부된 화일로 보면 아침간 헤겔 번역판에서 필자가 바꾼 대목을 차별화시켰으므로 필요한 이들은 이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또한 내가 텍스트로 삼은 번역문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있는 또 다른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번역문과 비교해 보고 싶은 분은 다음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forum_leftis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헤겔법철학&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1 무 제 (1998.5:인드라) 한국(남북한을 한국이라 하자)에서 문화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끝났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교수/협회와 당원/당을 위한 주류의 예찬이 논박당한 후에 오류의 주류적 비주류는 비판의 무대로 끌어 내려졌다. 초인을 추구하던 주류의 기만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딸딸이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가상, 즉 복제인간만을 찾는 경향을 갖지 않을 것이다. 반문화적 비판의 토대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문화를 만들지, 문화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문화는 자기 자신을 아직 잊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세계의 바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는 인간의 세계이고, 국가이고, 사회이다. 하지만 이 국가와 이 세계는 전도의 세계이므로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 문화는 이 세계에 대한 이마골로기이며, 이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적 화랑이고, 이 세계의 대중적인 형태로 되어 있는 소설이고, 이 세계 유심론의 공연 음반이며, 이 세계의 시이고, 이 세계에 대한 도덕적 영화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춤이자 이 세계의 만화와 경기의 일반적 양심이다. 인간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문화는 인간 본질의 기만적 현실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저 세계, 즉 그것의 정신적 지주가 문화인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문화상의 불행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문화는 정리해고당한 실업자의 한숨이며 파산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문화는 민중의 바보상자이다. 민중의 기만적 행복인 문화의 변혁은 바로 민중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민중의 상황에 대한 기만을 타파하라는 요구는 이 기만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타파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비판은 문화를 자신의 후광으로 받들고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 차연이다. 비판은 단절로부터 가상의 다리를 허물어뜨린다. 그것은 인간이 기만을 벗겨냄으로써 상상과 위안이 사라져 버린 단절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단절을 떨쳐버리고 생생하게 연결되는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이다. 문화에 대한 비판은 꿈을 꿈으로 반환시킬 줄 아는 영화 『가위손』 주인공처럼 사유하고 행동하면서 인간의 현실을 형성시켜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중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인간을 깨우친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중심으로 활동하지 않는 한 문화는 단지 인간의 주위를 맴도는 기만적 중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TV가 사라진 뒤에 TV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과제이다. 인간 소외의 체계화된 형태가 폭로된 후에, 체계적이지 않은 사회적 형태들 속에 들어있는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봉사하는 반문화의 과제이다. 이리하여 주류에 대한 비판은 비주류에 대한 비판으로, 문화에 대한 비판은 반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한다. 이하의 이빨 - 위의 작업에 대한 하나의 기고이지만 - 은 단지 한국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엇보다도 원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복사본, 즉 한국의 민족문화와 반문화를 다룬다. 만약 사람들이 한국의 현상 그 자체에서 시작하려고 한다면, 비록 유일하게 알맞은 방식, 즉 차별적으로 한국의 현상을 다룰 지라도, 그 결과는 항상 시대착오로 끝날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현재에 대한 차별조차도 이미 근대 민족국가들 역사의 똥통에 쌓여있는 휴지조각 같은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식자층의 선민적인 계몽들을 차별할 때, 나는 아직도 식자층의 선민적이지도 못한 계몽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1968년 경, 혹은 스탈린체제의 붕괴 이후 서구 상황을 차별할 때, 서구적 시간계산에 따르면 나는 1968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스탈린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있지 않았으며, 현재의 초점에는 더더욱 있지 않다. 물론, 한국의 역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어느 민족국가도 이전에도 달성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속도전을 해 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즉, 우리는 근대 민족국가들의 혁명을 공유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부흥을 공유했다. 첫째, 다른 민족국가들이 혁명을 감행했기 때문에, 둘째, 다른 민족국가들이 반혁명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부흥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우리 대통령과 주석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대통령과 주석들이 전혀 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와, 최고의 권좌를 누리고 있는 통치자들은 항상 그들의 장례식 날에 단 한 번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 있음을 발견한다. 오늘날의 비열함을 과거의 비열함을 통해서 정당화하려는 학파, 물고문은 승인된 것이고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며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중이 이 물고문에 반항하면서 부르짖는 절규는 반란이다고 선언하는 학파, 일제가 그의 몸종인 친일파에게 그러했듯이 역사 역시도 오직 그들에게만 후천적으로 자신을 옹립해준다고 생각하는 학파란 곧 주류문화파이다. 따라서 이 주류문화파는, 만약 자신들이 한국근대사의 발명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이 한국근대사를 발명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완용, 그러나 충실한 종으로서의 이완용이라고 할 수 있는 주류문화파는 민중의 심장으로부터 도려낸 매 원마다 자기 학파의 가상, 자기 학파의 역사적 가상, 자기 학파의 유교적 가부장적 한민족적 가상을 걸고 그것이 진리임을 맹세했다. 이에 반해 선량한 광신자들, 즉 기질상으로는 한국 국수주의자 지적 반성상으로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우리들의 자유의 역사를 우리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의 만주벌판 속에서 뒤진다. 그러나 만약 자유의 역사가 단지 만주벌판 속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면, 우리들의 자유의 역사는 무엇에 의해 돼지의 자유의 역사와 구별될 수 있을까? 게다가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숲속에서 외치자 숲을 타고 바람을 타고 온 고을에 퍼진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만주벌판에 평화가 깃들기를! 한국의 상황에 대한 투쟁!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역사의 평균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고, 모든 비판수준 이하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비판의 대상으로 남는다. 이것은 인간성의 수준 이하에 있는 범죄자가 처형집행인의 대상으로 남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상황과 투쟁하는 데 있어서 비판은 조직의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조직이다. 비판은 결코 해부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이며, 비판은 자신의 적을 논박하고자 하기보다는 절멸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국 상황의 정신은 이미 논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한국 상황은 결코 사유할 만한 대상들이 못되며, 오히려 경멸할 만한 것인 동시에 이미 경멸받은 비주류이다. 비판 그 자체는 이 대상에 대한 자기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판이 이 대상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비판은 더 이상 자신을 자기목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수단으로만 간주한다. 비판의 본질적인 울혈은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인 노동은 고발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회적 제 영역 상호 간의 숨막힐듯한 압박, 아무런 작위도 없이 언짢아하는 것의 일반화, 자신을 오판하는 것 못지 않게 자만하는 편협성, 이들 모두는 통치체제 - 이것은 온갖 비참함을 온존시킴에 의해 존속하고 있으며, 그 자체 통치상의 비참함 바로 그것일 따름이다. -의 틀 내에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얼마나 꼴불견인가! 사회는 다양한 집단들로 무한히 계속 분할된다. 그리고 이 집단들은 각기 사소한 반감, 악의, 조야한 인기를 가지고 서로 다투고 있다. 그리고 이 집단들은 다름아닌 자신들의 애매한 지위 때문에 다양한 형식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배자들에 의해 무차별하게 허가된 비주류로서 취급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당하고 통치당하고 소유당한다는 사실을 하늘이 정한 운명으로서 인정하고 감수해야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저 지배자 자신을 보라. 이들의 위대함은 이들의 숫자에 반비례한다! 이러한 내용을 상대하는 비판은 격투를 하는 비판이다. 그리고 이 격투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고상하고 동등한 수준에 있으며 흥미로운 상대방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때려 눕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게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을 기만하고 체념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억압에 대한 의식적 자각을 억압에 부가함으로써 현실의 억압은 한층 더 억압적이게 되고, 치욕에 대한 공개를 치욕에 부가함으로써 한층 더 치욕적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은 한국 사회의 치부로써 묘사되어야 한다. 이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 그들 고유의 가락을 들려줌으로써 이 영역들의 경직된 관계들을 춤추듯 술렁이게 만들어야 한다. 한민족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한민족을 전율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불가피한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 그리고 제 민족의 욕구들 그 자체가 욕구들의 만족의 토대들이다. 또한 근대적 민족들에게 있어서 조차 한국 현상의 편협한 내용에 대한 이 투쟁은 무관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현상은 냉전체제의 솔직한 완성이며 이것은 또 근대국가의 숨겨진 결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적 현재에 대한 투쟁은 근대국가들의 과거에 대한 투쟁이며, 그리고 근대국가들은 이 과거의 회상들 때문에 여전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비극으로 체험했던 냉전체제가 한국적 유령으로서 희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근대국가들의 입장으로는 매우 교훈적이다. 냉전체제가 세계에서 선재하는 권력이었고, 그에 반해 자유가 개인적 기만이었던 한, 한마디로 말해서 냉전체제가 자신이 정당성을 믿었고 또 믿으려고 했던 한, 냉전체제의 역사는 비극적이었다. 냉전체제가 현전하는 세계와 더불어 싸웠던 한, 결코 개인적이 아니라 세계적인 오류가 냉전체제의 편에 있었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붕괴는 비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현 한국의 제도는 분명히 시대착오적 제도이며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치들에 대한 명백한 모순이고 분단체제가 세계 무대에 출품한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여전히 자기자신을 신뢰한다라는 지역주의 에 들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자기와 똑같은 지역주의 를 가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현 한국의 제도가 지역주의 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면, 이 제도야말로 동일한 것, 즉 지역주의를 민족주의의 가상 아래 숨기고, 그것의 도피처를 위선과 궤변 속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가? 현존하는 냉전체제는 이제 세계질서의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죽은 뒤에 그 세계질서를 극화하려는 희극배우일 따름이다. 역사는 철저하다. 그리고 역사는 낡은 형태를 무덤으로 보낼 경우에 많은 단계들을 거치면서 이 작업을 행한다. 세계사적 형태의 최후의 단계는 그것의 희극이다. 속박되어 있는 지리산에 묶여 있는 빨치산 속에서 한 번 비극적으로 죽은 바 있는 민중은 또 한 번 눈물의 여왕이라는 대중가극 속에서 희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왜 역사는 이렇게 진행되는가? 인류로 하여금 즐겁게 그들의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한국의 정치권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 즐거운 역사적 운명을 청구하는 바이다. 근대적인 정치적 사회적 현실 자체가 비판에 의해 전복되자마자, 따라서 비판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문제들로 자신을 고양시켜 나아가자마자, 비판은 자신을 한국의 현상 외부에서 발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판은 그의 대상을 그의 대상 이하의 것으로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문화산업 또는 일반적으로 부의 세계와 정치적 세계의 관계는 근대의 중심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어떤 형태로 이 문제에 몰두했는가? 타이타닉 관람거부 운동서부터 최근의 월드컵 주경기장 선정 논란의 형태 하에서였다. 이때 한국국수주의는 인간으로부터 물질로 나아갔으며 따라서 어느날 아침 우리 한국의 감독들과 가수들은 통일을 노래하다 어느날 갑자기 유행병처럼 일상을 말하는 애국자들로 변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독점에 대해 대외적 주권이 우선적으로 부여됨으로써 대내적 주권도 인정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은 서구가 마무리짓기 시작한 작업을 이제야 추진하기 시작했다. 서구가 이론적으로 항거하는 소동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아직까지는 신주단지처럼 간직하고 있는 낡고 부패한 상태가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미래의 떠오르는 아침노을로서 환영받고 있으며 아무도 이것에 대해 D.H 로렌스의 작품을 내세워 과감하게 비판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서구에서는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기호학 등이 현존하는 억압과 관련된 모든 것들의 해체를 모색하는 것으로 언급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면서 자본을 제외한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체라고 언급된다. 서구에서는 최후의 결과로까지 나아간 독점을 변혁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독점을 최후의 결과로까지 몰고가는 것이 문제이다. 앞의 경우는 독점의 해체가 문제이며, 뒤의 경우는 독점의 풍부한 전개와 충돌이 문제이다. 이상은 근대적 문제들이 한국에서 어떤 형식으로 전개되는가에 관한 하나의 풍부한 실례이며 어떻게 해서 한국 역사가 막 입봉을 마친 감독처럼 지금까지 겨우 타락을 마친 역사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다시 연습해 보는 과제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실례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한국의 발전 전체가 한국의 정치적 발전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어느 한 한국인은 기껏해야 현대의 문제를 어느 한 중국인이 그것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국가의 한계들에 대해 속박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해방만으로는 국가 전체가 여전히 덜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서구인이 왕자웨이 등 중국인을 서구의 칸느로 초대했을지라도 중국인 전체는 서구와 같은 문화의 진보로는 한 걸음 전진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한국인은 결코 중국인이 아니다. 고대 민족들이 그들의 선사를 상상 속에서, 즉 신화 속에서 체험하였듯이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의 역사를 사유 속에서, 즉 반문화 속에서 체험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현대의 역사적인 동시대인들이 됨이 없이 단지 현대의 반문화적인 동시대인들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반문화는 한국 역사의 관념상의 연장이다. 이처럼 우리들이 우리의 실재적인 역사의 미완성 작품들 대신에 우리의 관념적인 역사의 사후 작품들을, 즉 반문화를 비판할 때 우리들의 비판은 현대가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34P, 사빠띠스타, 갈무리"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의 한가운데 서 있다. 서구민족들이 근대의 국가상황과 실천적으로 결렬된 데 비해 이 상황들 자체가 아직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이 상황들에 대한 반문화적 반영과 비판적으로 결렬된 것이라 하겠다. 한국의 반문화 및 민족문화는 공식적이고 (여전히) 근대적인 현대와 액면 그대로 함께 서 있는 유일한 한국 역사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자신의 이러한 꿈의 역사를 자신의 현재상황들과 결부짓고 그후 현전하는 상황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들의 추상적인 계속도 비판에 부닥치게 한다. 한민족의 미래는 그 자신의 실제적인 민족문화 및 반문화의 상황들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에 제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관념적인 민족문화 및 반문화의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에 제한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민족은 그 자신의 실제적 상황들에 대한 직접적 차별을 단지 관념적인 상황들 속에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자신의 관념적인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을 이웃 민족들의 직관 속에서 거의 또 다시 삶을 연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실천적인 정당이 반문화의 차별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르다. 이 정당의 부당성은 이러한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정당이 진정으로 완성하지 못했고 또 완성할 수도 없었던 요구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 정당은 그들이 반문화를 외면하면서 분노에 가득찬 케케묵은 몇마디 말들을 중얼거림으로써 반문화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정당은 그들의 시야의 협소함 때문에 반문화를 자신의 국가인 한국의 현실 내부에서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문화를 심지어 한국적 실천과 그것에 도움이 되는 이론들의 수준 이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 정당은 사람들이 현실적 삶의 차연들과 관계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민족의 현실적 삶의 차연이 지금까지 단지 한민족의 꼴통 속에서만 무성하게 자라왔다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하여,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실천적 정치정당은 반문화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반문화를 변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론적이며 반문화로부터 유래된 정당은 단지 거꾸로 된 구성요소만 가진 채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이 정당은 현재의 투쟁 속에서 단지 반문화의 한국적 세계에 대한 비판적 투쟁만을 본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반문화 그 자체도 이 한국적 세계에 속하며, 따라서 비록 관념적일지라도 그 세계에 대한 연대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대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들은 반문화의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들에 안주하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요구들과 결과들을 반문화의 직접적인 요구들과 결과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가져온 요구들과 결과들 - 그것들의 정당성을 전제로 할 때 - 은 거꾸로 단지 지금까지의 반문화에 대한 차별, 즉 반문화으로서의 반문화에 대한 차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 정당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을 보류하고자 한다. 다만 이 정당의 근본적 결정은 다음과 같이 압축될 수 있다 : 이 정당은 반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도 반문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정약용에 의해서 한국의 민족문화 및 반문화에 대한 비판은 동양 사회정치사상에서 이례적이고, 획기적이며, 중요한 파악에 도달했다. 정약용의 작업은 근대국가 및 그것과 연관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반문화 의식의 기존 양식 전체에 대한 실사구시적이고, 개혁적인 차별까지도 포함한다. 사변적 반문화 그 자체는 천자천명설, 왕권신수설을 차별하고 천자와 군주의 중민추대설, 중민선출설을 주장한 만큼 고양된 한국의 정치적 반문화 의식의 표현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이 사변적 반문화가 가능했으며, 근대국가에 대한 이 추상적이고 과도한 사유의 현실은 아직 TV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때 TV라는 것이 단지 태평양 저편에만 존재했다면, 이에 못지 않게 거꾸로 근대국가 자체가 현실적 인간으로부터 추상되어 있거나 혹은 인간 전체를 단지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한에 있어서만, 근대국가에 대한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부터 추상되어 있는 사유적 반영이 가능했다. 다른 민족들이 실행했던 것을 한민족은 정치학 속에서 사유했다. 즉, 한국은 다른 민족들의 이론적 양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한민족의 사유의 추상성과 오만함은 항상 한민족 현실의 일면성과 낙후성과 보조를 맞추었다. 따라서 한국국가체제의 존재 그 자체의 현상이 일제 식민지에 뒤이은 분단체제의 완성, 즉 근대국가체제의 걱정거리의 완성을 나타낼 때, 한국 국가체제에 대한 지식의 현상은 근대국가의 미완성 즉 근대국가체제의 결함을 나타낸다. 이제 한국의 정치적 의식의 기존 양식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서 사변적 반문화 비판은 더 이상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실천만이 오로지 그것의 해결책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과제들에로 나아갔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한국은 과연 원리의 수준으로까지 고양된 실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즉 한국은 자신을 근대적인 민족들이 도달한 공식적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들의 바로 다음의 미래가 될 인간적인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가?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도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 즉 이마골로기로 된다. 또한 이론은 대인적으로 증명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될 때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으로 된다는 것은 사태를 그 뿌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라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다. 한국 이론의 근본주의에 대한 명백한 증거, 그러므로 한국 이론의 실천적 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이 이론이 문화에 대한 단호하고도 적극적인 변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비판은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라는 교훈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비판은 그 속에서 인간이 천대받고 구속받고 버림받으며 경멸당하는 존재로 되어 있는 모든 관계를 전복시키라는 정언명령과 더불어 끝났다. 이 비인간적인 관계는 "우리들은 모두 E.T이다; 585P, 사랑의 역사, 민음사"라고 외친 줄리아 크리스떼바의 글쓰기보다 더 잘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한국으로서는 이론적 해방이 특별한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한국의 혁명적 과거는 이론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학생운동이다. 과거의 학생운동가는 지금의 좌파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 좌파의 자율 조직에서 오늘날의 운동이 시작된다. 학생운동가들은 물론 확신에서 나오는 예종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귀의에서 나오는 예종을 극복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한 권위를 회복시킴으로써 권위에 대한 신앙을 타파하였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학생들로 끌어올림으로써 학생들을 노동자로 끌어내렸다. 그들은 찌다시를 내적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외적 찌다시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들은 마음을 사발식 속에 묶어놓음으로써 육체를 사발식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비록 과제의 진정한 해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과제의 올바른 설정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제 노동자와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학생의 투쟁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와 그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학생, 즉 그의 학생적 본성의 투쟁이 문제이다. 한국노동자의 학생으로의 학생운동적 변화가 교수들과 당원들 그리고 학생들, 특권층들, 속물들과 더불어 대통령과 주석도 해방시켰다면 학생적 한국인들의 인간으로의 반문화적 변화는 한민족을 해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대통령과 주석의 경우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듯이 표적 사정, 특히 위선적인 김영삼 문민정권이 시도했던 바와 같은 역사바로세우기에만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한국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사건인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유학에 부딪쳐 수포로 돌아갔었다. 오늘날 유학 그 자체가 파멸된 이 때 한국 역사상 가장 부자유한 사실인 우리 한국의 현상은 반문화에 의해 분쇄될 것이다. 학생운동 이전에 한국은 일본의 가장 무제약적인 노예였었다. 이제 한국의 혁명 이전에 공식적 한국은 일본보다는 미국과 서구의 헤지펀드들과 분단체제의 속물들의 무제약적인 노예이다. 그러나 급진적 한국혁명은 하나의 중대한 곤란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혁명들은 소위 자율, 즉 물질적 토대들을 요구한다. 이론은 한 민족의 욕구들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만큼만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사유의 요구들과 한국적 현실의 대답들 사이에 놓여있는 엄청난 분열에 시민사회와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 자체 사이의 동일한 정도의 분열이 상응하는가? 따라서 이론적 욕구들은 직접적으로 실천적 욕구들이 될 것인가? 사유가 현실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현실이 그 자신을 사유에로 나아가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른 민족들과 동시에 정치적 해방의 중간단계들에 도달하지 못했다. 한국은 실천적으로는 아직 자신이 이론적으로 극복한 단계들에조차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한국은 생명을 건 모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들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근대 제민족의 한계 - 한국은 이 한계를 실제로 자신의 현실적 한계로부터의 해방으로서 느끼고 또 그 확립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까지도 뛰어넘을 것인가? 급진적 혁명은 마치 전제들과 발생근거를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단지 급진적 욕구들이 주장하는 혁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진보를 위한 현실적 투쟁을 벌이는 활동적 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근대 민족들의 사유의 추상적 행위만을 통해서 동반했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한편으로 이 진보를 누리거나 거기서 부분적인 만족을 나누어 가지지 못하고, 단지 이 진보의 고통만을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한국은 어느날 아침 서구적 해방의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오히려 서구적 몰락의 수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유교라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물신숭배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우선 한국의 통치기구들을 고찰한다면, 이 고찰을 통해서 사람들은 한국의 시대적 상황, 처지, 한국적 교양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고유의 행복한 본능에 의해 우리가 그것의 장점을 취하지 못한 근대 국가세력의 문명화된 결점들을 우리가 충분히 만족하는 분단체제의 야만적 결점과 결합시킴으로써 그 결과 한국은 오성의 측면이 아니라 반오성의 측면에서 한국의 현상을 초월하는 국가건설에 그만큼 더 참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소위 유신체제처럼 그렇게 소박하게 공화제의 실상들을 공유하지 않고 그것의 모든 허상들만 공유하고 있는 국가가 그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언론 검열의 진통들을 언론자유를 전제로 삼고 있는 서구 언론의 파파라치적 진통과 결합시키려는 것은 한국 통치기구의 착상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국민의 정부 현 청와대 비서진들은 청와대 비서실 기자출입을 막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고대, 중세의 서사시에서 모든 민족의 영웅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참고 :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조동일; 문학과 지성사), 중세적 한국 내에서 모든 국가형태들의 죄악들은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절충주의가 지금까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 정치적 미학적 대식가인 어떤 한국 대통령과 주석이 (토착적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보증을 섰다. 그는 봉건적이든, 관료적이든, 절대적이든, 입헌적이든, 귀족적이든, 민주적이든간에, 이들 제 형태의 왕정국가들이 보여준 모든 역할들을 비록 그의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그 혼자서 그리고 그의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자신을 위해서 수행하려고 한다. 정치적 현대의 일반적 한계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특수한 세계로 구성된 정치적 현대의 결점으로서의 한국은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근본적인 혁명, 즉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해방이 이상향적 꿈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이고 단지 정치적인 해방, 즉 집의 기둥을 그대로 둔 해방이 이상향적 꿈이다. 그러면 이 부분적이고 단지 정치적인 해방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시민사회의 한 부분이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보편적 지배에 도달한다는 데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계급이 자신의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사회의 보편적 해방을 도모한다는 데 근거한다. 이 계급은 사회 전체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 전제란 사회전체가 스스로를 이 계급의 상황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므로 예를 들면 화폐와 교양을 가질 수 있거나 혹은 마음대로 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어떠한 계급도 자신과 대중을 연관시킬만한 동기를 유발시키지 않고서는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동기란 그것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더불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더불어 확연히 우애롭게 보낼 수 있고 융합할 수 있으며 교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대변자로서 느껴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어떤 계급의 요구들과 권리들이 이 동기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회 자체의 요구들이 될 뿐만 아니라 그 계급은 현실적으로 사회의 조직과 사회의 심장이 된다. 단지 사회의 보편적인 매체들이라는 이름 아래서만 어떤 특정계급은 그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지배를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방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것에 의해 자신의 영역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기와 정신적 자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민족의 혁명과 시민사회의 특정계급의 해방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한 신분이 그 사회 전체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그 사회의 모든 결점들이 다른 한 신분에 집중되어 있어야만 하고 나아가 이 다른 특정 신분이 보편적인 장애의 신분, 즉 보편적인 제약들의 화신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이 특정 영역이 사회성 전체에 대한 악명높은 침해로서 여겨져야만 하고 따라서 이 영역들로부터의 해방이 사회의 보편적인 자기해방으로서 나타나야만 한다. 한 신분이 특히 해방의 신분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다른 한 신분이 압제를 공개적으로 대표하는 신분이어야 한다. 유신체제 이래의 집권층과 지배층의 극우적 차별적 보편적 의미는 이들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대립하고 있었던 소시민적 우파적 보수적 야당의 긍정적 보편적 의미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각각의 특수한 계급들은 사회의 차별적 대표자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일관성, 날카로움, 용기 그리고 냉철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각 신분들 모두는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민족정신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정신적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물질적인 힘들을 정치적 폭력으로 이끌어 열광케하는 천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에게 "나는 겸손하다. 그러나 나는 시대의 겸손을 저주한다"라는 반항적 구호를 표방할 수 있는 혁명적 용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들뿐만 아니라 계급들이 갖고 있는 한국적 도덕과 고귀함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오히려 바로 저 겸손한 이기주의인 바, 이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주장하고 또 자신에 대해 그 한계가 관철되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의 제 관계는 극적인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각 영역들은 그들이 억압되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한편으로 그들의 도움 없이도 시대관계들이 사회적 기초를 창출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초에 대해 그들이 억압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마자 각각 자기의식을 갖게 되며, 그리하여 다른 영역들과 나란히 서서 각각의 특수한 권리들을 주장하게 된다. 심지어 한국 중간계급의 도덕적 자기의식조차도 자기 계급이 다른 모든 계급들의 속물근성의 보편적 대변자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대통령과 주석들만이 이유없이 권좌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의 각 영역들도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이전에 그들의 패배를 겪었고, 그들에 대립해 있는 관대한 본성을 주장할 수 있기 전에 그들의 편협한 본성을 주장했고, 따라서 그들이 위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는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렸으며, 그 결과 모든 계급들은 그들이 자기 위에 군림하고 있는 계급들과 투쟁을 시작하자마자, 곧 그들 밑에 있는 계급들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재벌이 청와대와 주석궁과, 관료가 국회의원들과 인민대의원들과, 그리고 기득권층이 이들 모두와의 투쟁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좌파가 우파와의 투쟁을 시작한다. 중간계층은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해방의 사상을 전혀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 상황의 전개와 정치이론의 발전은 이 관점 그 자체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혹은 적어도 문제투성이라고 선언한다.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것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미국에서는 부분적인 해방이 보편적인 해방의 토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편적인 해방이 모든 부분적인 해방의 필수조건이다. 미국에서는 단계적 해방의 현실성이 한국에서는 단계적 해방의 불가능성이 완전한 자유를 낳는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에서는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계급들 모두가 정치적 이상주의자이며, 자신들을 특정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욕구 일반의 대표자로서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해방자들의 역할은 차례차례로 극적인 운동 속에서 미국인의 여러 계급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마침내 사회적 자유를 더 이상 어떤 제약들, 즉 인간의 밖에 존재하면서도 인간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제약들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실현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생존의 모든 조건들이 사회적 자유라는 전제 아래서 조직화하는 계급들에까지 도달한다. 반면에 실천적 삶이 정신을 결여하고 있을 뿐이 아니라, 정신적 삶이 비실천적인 한국에서는, 시민사회의 그 누구도 데쓰메탈을 하든, 축구를 하든, 연극을 하든, 영화를 하든, 미술을 하든,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든, 여성운동을 하든 물질적인 필연성에 의해 기득권층이 자신을 감빵으로 보낼 만큼 속박하지 않는 한 보편적인 해방에로의 욕구와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한국 해방의 실질적인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 그 가능성은,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에 의해서 보편적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부당성이 아니라 부당성 그 자체가 자신에게 자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받지 못하는 한 영역, 더 이상 아무런 역사적인 명분을 내세울 수도 없고 오히려 단지 인간적인 명분만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인 영역, 한국국가제도의 결과들과 일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영역, 마지막으로 사회의 모든 다른 영역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사회의 모든 다른 영역들을 해방시킴이 없이는 결코 해방될 수 없는 한 영역의 연대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인간의 완전한 단절이고,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소통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을 획득할 수 있는 한 영역의 연대에 있다. 이같은 사회의 해체를 체현한 특수한 한 신분이 바로 무산계급이다. 한국에서는 무산계급이 갑자기 출현한 산업운동에 의해 처음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빈곤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산출된 빈곤과,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를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이 좌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 빈곤 뿐만 아니라 종교적, 한민족적 자유주의자들이 비록 점차적일지라도 좌파의 계열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도 자명하다. 좌파가 기존 세계질서의 해체를 고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좌파가 이질성을 손쉽게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동시에 대립과 전복을 통해 뛰어넘으려하는 연대의 정치를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좌파는 이 기존 세계질서의 사실적 해체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이 경제의 차별을 요구한다면, 이때 좌파는 사회가 좌파의 원리로서 고양시켜 왔던 것, 좌파 속에서 좌파의 도움 없이 이미 사회의 차별적 결과로서 구체화되었던 것은 사회의 원리로서 고양시키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한국 대통령과 주석이 말을 자신의 말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민족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때 이미 생성된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바로 그 정도만큼, 좌파는 이제 생성해 가고 있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자율을 발견한다. 한국 대통령과 주석은, 자신이 무려 이만오천개 이상의 임명직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음으로써 대통령과 주석은 사적 소유자이다는 사실만을 선언했을 뿐이다. 반문화가 좌파 속에서 그의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좌파는 반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유의 섬광이 근본적으로 이 소박한 민족의 대지 위에 부딪히자마자 한민족의 인간으로의 해방은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유일하게 실천적으로 가능한 한국해방은 인간을 인간의 최고의 본질대로 선언하는 바로 그러한 이론의 관점에 서 있는 해방이다. 한국에서 중세로부터의 해방은 동시에 단지 중세의 부문적 극복들로부터의 해방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모든 종류의 예속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류의 예속도 타파할 수 없다. 근본에서부터 변혁되지 않고서는 한국의 근본적 뿌리는 혁신될 수 없다. 한국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이다. 이 해방의 심장 방탄조끼가 반문화이고 이 해방의 심장은 좌파이다. 좌파의 해체없이 반문화는 실현될 수 없으며, 반문화의 실현없이 좌파는 해체될 수 없다. 모든 내부적 조건들이 충족될 경우, 한국이 부활하는 그날은 희망의 새벽별을 노래하는 자율적인 합창에 의해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참고 문헌: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하 서문); 칼 마르크스; 아침』을 몇몇 문구만 수정하였음. 이러한 글쓰기 시도 취지는 첫째 칼 마르크스가 이 글을 집필했다고 추정되는 1843년 독일 상황과 1998년 한국 상황을 비교하여 마르크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과연 마르크스 논의가 한국에서 정말 무효화되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서 실험했음이며, 둘째 반문화의 정체성을 『서문』에서 언급된 철학의 정체성과 비교하여 서구 반문화 개념을 수입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쓰고자 함도 아니고, 어설프게 억지 논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닌 다른 통로를 모색하는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기 위함이며, 세째 이 글쓰기가 창간선언문이 결코 아니지만 내 지위로 인하여 그렇게 보일 이유가 있으므로 한마디하자는 의미에서 이제까지의 창간선언문이 사기였고, 잡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사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이를 소극적인 의미에서라도 극복하기 위해 창간선언문 따위를 만들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의 검열횡포에 대한 작은 항의를 표현하기 위함임. 필자가 원문의 일부분을 대체했음을 나타낼 목적으로 패러디된 부분은 굵은 체로 썼음. ◀ 『조선후기 실학 실학파의 사회사상 연구; 신용하; 지식산업사』헤겔(1770-1831)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정약용(1762-1836)은 서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유학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동학농민군 집강소토지개혁안이 정약용의 토지개혁안을 계승, 발전시켰다는 등 한국 실학사상의 대표자라고 평가받는 동시에 그의 사상이 민주주의 사상의 차연을 확립했으나, 제도화하는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부산대 교지에 실었던 글입니다.(대선 전이었으니까 97년 글입니다) --------------------------------------------------------------- 0. 들어가는 말 불가능이 없는 예술,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 나는 한국 정치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동서양 고전을 무수히 인용하며 진흙탕 정치를 하다 결론을 내는 것.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키취 정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나쁜 예술은 항상 최고의 의도를 가진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국 정치는 최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나쁜 정치를 한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가 정말 이런 구조일까?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나는 이러한 구조를 알아 보고 현 사회가 일상과 정치를 분리시키지 않고 있는 데서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 1. 이마골로기 시대 혹은 이미지 정치 시대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무엇이든지 상명하달, 일방통행이다. 집단성과 획일성만이 존중되고 개인성과 다양성이 배타당한다. 쿠테타, 유신, 긴급조치, 군부통치, 앵무새 방송... 한때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정치의 전부였다. 대통령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면 끌려 갔다. 우리 일상 생활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일 뿐이었다.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상과 먼 이야기였다. 학생 운동은 물론 야당 생활이 독립군 생활과 다름 없으니 일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런 사회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개인성과 다양성을 목마르게 기다리며 새로운 정치를 갈구하게 되었다. 프랑스 미테랑 14년 통치, 영국 보수당 18년 통치에 오랜 민주주의 훈련을 겪은 서구인들도 막상 정권이 바뀌자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도 꿈만 깊었지, 혼돈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죽자 북한인들이 오열하듯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오열한 것 외에 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십수년이 다시 흘렀다. 그것은 언론플레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찾아왔다. 투표로 선출한 국민에게 정통성을 부여받은 문민정부라는 수식어 만큼이나 김영삼 대통령은 초기 고작 30%대 지지율로 90%에 이르는 압도적인 국민 지지에 힘입어 개혁을 수행해 나간 것이다. 이 원동력은 다름 아닌 언론이었다.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는 예전부터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에 이은 제 4부라고 불리는 언론의 힘이 막강했다. 선거 때부터 여론조사를 통해 정책개발한 뒤 반응을 살피고 당선 후 정책 결정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통신사업의 초과 이윤이 한계에 다다를 것을 고려한 미국 경제 관계자들이 활황을 지속시키려 복제인간 논쟁을 일으켰다든가, 미국 우주선이 추락하여 탑승한 비행사들이 전원 사망한 사건 이후 예산 축소라는 치욕을 당한 NASA가 팍스 아메리카나 지속을 꿈꾸는 미국 정부 이해와 조응하여 패스파인더의 화성 탐사 보도를 했다는 시각은, 자유 언론의 상징이라는 미국 언론 또한 민중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엘리뜨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비롯된다. 이는 수많은 대규모 투자 대상 중 우선 순위를 결정지어야 하는 현대 국가에서 총자본이 안정적인 투자를 감행하기 위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가 낮은 지지율 속에서도 강력한 개혁으로 역사에 남는 대통령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언론의 위상이 정론직필이니 민중 이해의 대변자이니 하기 보다 국가 기구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필연적이겠다. 동시에 위상이 격상된 언론은 표면적으로 국가기구와 상충되기까지 하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이로써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종전 언론에 비해 달라졌다는 효과,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국가 기구가 언론을 통해 이전보다 효율적인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효과. 그리하여 가상적 독립을 실현한 언론은 실질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이마골로기 정치 시대를 열게 된 셈이었다. 이데올로기가 법과 법형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갖춘 것이라면 이마골로기(IMAGE+IDEOLOGY=IMAGOLOGY; 졸저 해체:통일에서 포르노까지 참고)는 매체와 매체형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갖춘 것이다. 가령 92년 초원복집 사건 폭로와 정치 공방, 그리고 여당의 승리는 지역주의도 큰 몫을 했지만 언론의 힘 또한 주요변수였다. 이는 기존처럼 축소보도는 물론이고 편집 기술을 적극 활용하면 민중 심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현재 언론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영향력만이 중요하다. 기사가 실렸는가 안 실렸는가 보다 어느 쟁점이 일면톱을 장식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울러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사안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불리한 사안은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언론이 권력 주요기구화되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 최근 비자금 공방의 과정과 결론 또한 이러한 언론을 통한 압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마골로기 시대, 혹은 이미지 정치 시대에서는 사건들이 오로지 활자화된 것으로 나타나기에 사물들이 상품으로 교환되듯 기호 또한 교환된다. 결국 편집자가 사건들에서 이탈한 기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령 현실 지위와 무관하게 대통령과 축구감독은 동렬선상에서 취급된다. 이는 TV 매체를 본다면 더욱 확실해진다. TV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을 가까운 이웃이나 형제처럼 느끼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섬찟한 내용의 다큐멘터리는 다른 방송에서 나오는 오락 프로와 다를 바 없이 된다. 기껏 리모콘 채널의 차이일 따름이다. 우리에게 시청자가 뽑은 좋은 프로그램 여부와 관계없이, 내용과 관계없이 이는 우리에게 스타일만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스타일은 정형화된다. 참신하다, 부드럽다, 세련되었다, 똑똑하다 등등.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것이다. 대중들이 언론을 통하지 않으면 그가 탤런트건, 가수건, 정치인이건 그들 내면을 알 수 없다. 그가 연기를 하건, 쇼를 하건 그 이미지만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하여 축구감독이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이 축구감독이 된다. 현실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3. 마인드의 정치, 키치의 정치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 마인드(mind)를 거론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마인드란 사물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뜻을 알고 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특정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 정도로 쓰이던 이 말이 확장되어 지금은 특정한 주체의 인생관, 사업관, 정치관이 되었다.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처럼 한다'라는 책이 잘 팔렸던 함의는 다름 아닌 컴퓨터 마인드를 가진다는 의미였다. 즉 전유성처럼 하면 마인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작 그러한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유행되어 모든 영역에서 통용될 만큼 대히트를 쳤다. 심지어 내가 잠시 국회에 다닐 적에도 일주일만 하면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사실 이 말은 어떤 분야에 충분한 경험과 이론을 갖춰야 가능한 말임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마골로기 시대 특성인 스피드 경쟁이 가속화되가는 현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매력적인 셈이다. 일주일 - 전유성 - 마인드라는 이러한 트라이앵글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적인 시간을 획득하고, 특정 주체를 획득하면 마인드가 형성된다고 믿는 것이다. 마치 책을 사기만 해도 읽은 듯한 뿌듯한 감정이 생기듯이 말이다. 전시 효과. 이것이야말로 키치의 본령인 것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이 개입된다. 바깥 사물과 사건을 자유롭고 인위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다만 상상력만으로 효과를 낼 수 없다. 대인 관계에서 차별화되고 개성화되기 위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상상력에다 새롭고 보편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매체와 직결된다. 청소년 대상의 트랜드 드라마에서 주인공 탤런트가 인기를 끌면 그 즉시 시장에서 탤런트와 똑같은 옷이니 장신구가 불티나게 팔린다. 이를 소유하면 탤런트가 보여준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마술의 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개성화시키는 이러한 노력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왔던 표현이다. 패스티쉬는 신체의 일부, 혹은 신체를 둘러싼 장신구 등을 통해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였다는 환상을 예술적으로 그려내는 수법이다. 만화나 최근 환상문학에서는 더욱 빈번히 사용된다. 가령 여자 팬티를 훔쳐 여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포만감을 그린다는 것따위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에 향수를 느끼기 마련이다. 최근 거리로 나가 보니 '그때를 아십니까'란 체인식 주점이 생겨 인기를 끌고 있다. TV 매체에서 복고붐을 타고 나온 것을 본딴 것이다. 그럴 듯한 60년대 포스터, 원형 나무 탁자 등. 정겹고 친숙한 느낌이 일도록 갖은 애를 쓴 티가 난다. 그러면서도 새세대들 기호에 맞게 깨끗한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참신하면서도, 과거 향수를 일으키는 주점. 최근 벌어지고 있는 TV 토론을 보면 바로 이것, 키치 정치를 만날 수 있다. 4. 폭로 정치와 광고 정치 신문지상을 보면 하루에도 끊임없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한국에 온 외신기자들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이 점에서 기자들의 천국이라고 말을 듣기까지 할 정도라고 한다. 웬만한 사건, 사고에는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내일 무슨 일이 또 터질 지 모르니 어제 일에 연연할 수 없는 일. 게다가 사건, 사고가 났다 하면 연일 건국 이래의 사건, 단군 이래의 사고다. 급격한 현대사가 다 이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신문 일면톱 기사, TV 뉴스 첫 꼭지를 차지하려면 보통 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가령 수개월 이상 노력, 정책 개발한 입법안을 발표했더라도 그날 하필 성수대교가 무너진다면 헛수고가 되는 셈이다. 국민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일면 톱이 될 이슈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이슈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고, 상대당의 비리 등을 폭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업을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신제품이 나오면 입소문이 도는데 긍정적인 내용보다 부정적인 내용이 스무배 가량 더 빨리 전파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소문 시대가 지나갔다. 이마골로기 시대에서 절대적인 것은 TV이기 때문이다. 광고를 내면 금방 효과를 낸다. 그런데 이 광고 또한 광고끼리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십수개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광고에서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킬려면 보다 자극적인, 보다 말초적인 광고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아이, 여자, 동물을 기본으로 제품 홍보를 하면 충분한 효과를 내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렇게 하니 키치의 본령인 차별화된 개성이 돋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장이 직접 나왔고, 그도 모자라 옷을 벗고 나왔다. 역사적 인물도 등장했다. 체육관 선거에서 벗어난 87년에는 아이를 안은 모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촌스러운 방법일 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에 모 후보는 급기야 비자금 폭로 정국에서 '혁명적 과업'이란 말을 썼다. 개혁도 아니고 혁명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썼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서 개혁할 것이 산적해도 개혁이란 말이 너무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광고에서는 연일 지금은 혁명중이라고 나오는데 개혁가지고서 TV 뉴스 첫 꼭지를 따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혁명을 원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과장 광고도 돋보인다. 과장 광고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게 뻥튀기하는 것이다.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 현실에서는 보통 서민이 일억원 만져 보기도 힘들지만 TV에서 보도된 엄청난 사건으로 일억원이 껌값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샐러리맨들이 이십년을 벌어야 되는 돈이니 하는 것이다. 이젠 상황이 급박해지니 여야 가릴 것없이 모두 당리당략을 위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진상은 무엇인가. 소비자가 광고에서 소개된 제품을 직접 써봐도 광고에서 주장하는 진실이 영원히 감추어지듯이 정치 폭로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이마골로기 시대에서는 노조가 70일간 파업해도 눈길을 끌지 않는다. 노조가 사장을 납치하여 식칼 테러 위협해야 나올까. 그리하여 이미지 시대에는 헐리웃 영화처럼 돈, 섹스 스캔달이나 UFO 등 기이하고 잔인한 정치가 세련되게 진행된다. 이러한 책임을 과연 개별 정치가들에게만 물을 것인가. 그들도 유권자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가 언론이나 마찬가지이니 기껏 매체의 노예일 따름이다. 대학 수석 입학자는 왜 하나 같이 전화기 붙들고 있을까. 모두 언론 전문가들의 지시탓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그들 마음에 있기에. 그리고 그 언론 전문가들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새우깡을 먹으면서 TV 시청하다 가끔 생의 가치를 느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몸부림치고 싶다면? 세상 꼴이 마음에 안 든다면? 대안? 마녀사냥, XX 죽이기 시대에서 사기꾼처럼 XX인 척하기로 버텨 봐? 연애를 잘 해야 정치적 감각도 늘어난다 확신하고 모든 일상을 예민하게 처리하는 것. 팬클럽에 가입하여 접근한 뒤 스타들을 배신하는 것. 도박판에 취하지 말고 사기꾼이 되어 끝내 돈 따는 것. 방법은? 매혹당하는 스스로를 까발리기. 학연, 지연, 혈연을 지양하고 새로운 인맥 만들기 전형을 보여주기. 회식 문화 등 기존 패권주의적, 관습적 폐단을 거부하고 수평적인 조직을 주체적으로 형성하기. 모든 경로를 통해 제도 언론을 끝없이 갈구기. 대항 언론은 물론 PC 통신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수동적 모니터 요원이기 보다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1인 신문 시대를 열어가기. 현장에서 생생한 정보를 신속하게 널리 알리기. 지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시 뛰어든 열정적인 자원봉사자들처럼 제도 언론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역할을 해내기. TV 앞에서 시청하는 데서 벗어나 언론의 주목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붉은 악마들처럼 진지한 응원 문화와 팬클럽을 건설해내어 3S 정책이니 하는 구태의연하고 탁상공론 비판을 넘어서서 한발짝 전진하기.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실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는 점. 공허한 이론보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 TV 이면의 참된 세상을 보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고통으로 아무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에. TV 이면의 세상에 속한 이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때까지 큰 배짱으로 뛰어 다녀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이 세계가 미친 듯 돌아가도 열악한 환경에서 진정 사람답게 살아보는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새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1998.11) 이마골로기, 패러다임, 전위, 반문화 인드라 0 글을 시작하면서 과학적 이론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물음이 평생 따라 다닌다. "그대는 짱돌을 던지는 동시에 공부도 하오?" 주어진 목표가 있다면 아무런 회의 없이 되든, 안 되든 선량(?)하게 살 수 있으련만 과학적 이론을 실천하는 이들은 문제가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기에 모순 속에서 다음 모순으로의 이행 때문에 몸부림을 친다. 문화 자체로는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다만 문화 비판으로 변화를 실천하는 이들을 주목케 하고, 그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용기와 위안과 정당한 평가로써 함께 할 수는 있다. 따라서 문화 비판이라는 용어가 제 아무리 폼이 날 지라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문화 비판을 '반문화'라고 새로 정의할 지라도 달라질 바는 없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중도주의가 제기한 쟁점들이 구닥다리 논의들로 무의미하며, 현실을 기만하는 것임을 막무가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울러 중도주의는 '진보의 가면'을 쓰고서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로 공세를 취하며 이제까지의 정당한 노력들을 보수적이라고 단죄하는 구닥다리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학술적 성격이 아니며, 시론적 성격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화장실 낙서'라고 할 수 있다. 그대가 용변을 보면서 신문, 책 따위나 낙서를 읽는 편안한 심정으로 이 글을 본다면 필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왜 필자는 편안함을 강조하는가. 자본의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엉터리이지만, 우익 논객조차도 과학적 이론이 이상적이나 과학적 이론을 따라가기에는 인간의 조건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조건 창출이 관건이지만, 그럴수록 개개인적으로 세상살이 자체에 희망을 느끼기보다 환멸부터 찾아오기 때문이다. 필자가 섣부른 희망을 말하여 용변을 보는 그대가 오바이트 일으킨다면 어쩌겠는가. 오바이트 일으키는 그대더러 '왜 그리 급한가'라며 '희망만이 사람이다'라고 감히 말할 위인이 아직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먼저 오바이트가 날 일이다. 과학적 이론을 관료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교조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과학적 이론을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식'으로 재구성론을 주창하는 수정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필자는 학회의 일원이 아니며, 교수가 아니며, 유학을 다녀오지도 않았다. 또한 과학적 이론을 개인의 출세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기회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과학적 이론을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무모하다고 말할 만큼 현세주의자가 되기에도 자격이 없는 필자는 '맹'이 아니며, '강단'이 아니며, '백두산 정기'가 아니며, 'IS'도 아니며, 대단한 직함의 '짱'을 맡은 일이 거의 없다. 그러한 필자가 감히 이러한 글을 쓴다는 것. 이조차 참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씨발! 니기미 자유?) 의견 개진이며, 민주 개혁의 성과이자 다양성의 일부이며, 이념과 사상을 떠난 자생적이고 인간적이고 젊고 새로운 시도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필자는 이념과 사상을 떠난다느니, 뭐니 하는 말장난을 무진장 싫어하는 편이다. 필자는 이 글이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자문자답한다. 그럼에도 만일 필자의 글을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창간호의 필자 글을 참고하거나, 그보다도 창간호 글의 원문을 참고할 것. 1 과학적 이론은 끝장났는가 소칼의 『지식 사기』 논쟁이 있었다. 97년 물리학 교수 소칼은 장 브르몽과 함께 지난 10월 초 책『지식 사기』를 통해 일부 프랑스 인문사회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 정당화를 위해 자연 과학의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서도 장식품으로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이런 일도 있다. 1992년, 월간지 『피직스 투데이(Physics Today)』에 '힘든 시기(Hard Times)'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실렸는데 물리학자 레오 카다노프는 이 글에서 물리학의 미래에 대해 "지금 우리는 마치 물리학자들 수의 감소, 줄어드는 지원금 그리고 사회적 평가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들은 어디에서 오며, 또 그 해답은 있는가. 과학적 이론이 아닌 논리는 가상의 논리이다. 문화는 상상이 춤추는 가상의 전쟁터이다. 인간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상상하면서 이야기, 가설, 이론이 나왔고, 과학이 등장했다. 상상 중에 '특정한 상상', 즉 가상만이 채택되어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는데 이데올로기는 가상이 채택되는, 혹은 배제되는 과정이다. 이데올로기는 법과 법형식으로 피지배계급에서 나타나 학술적인 논리로 무장하여 마법사처럼 현실 권력을 장악한다. 한편 인간은 관념에서 물질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거치면서 가상과 경험이 상호의존적 일치가 되는데 물질계에서 점차 인간계로까지 상상과 경험의 불일치를 극복해 온 과정이 바로 과학이었다. 이마골로기(imagology)는 가상의 가상의 논리, 즉 가상을 토대로 삼아 실재적 토대마저 무시하려는 강화된 이데올로기이다. 그간에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만 옳고, 그름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인쇄매체가 민족국가 전 영역으로 보급되고, 다양한 대중매체가 그 자체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매체 자체가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마골로기는 자신의 본질인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면서도 뛰어넘는다.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가를 전제하면서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하였다면, 이마골로기는 얼마나 알려지는가 하는 것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하여 권력 장악은 물론 권력 관리까지 한다. 이마골로기는 매체와 매체형식을 띠며, 이데올로기를 매체와 매체형식으로 변화시킨다. 아무리 학술적인 논리도 매체를 통해서는 요약되기 마련이며, 어떻게 요약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하여 학술적인 논리가 아니라 매체적인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이데올로기의 보수성(반공 이데올로기)과 이마골로기의 급진성(신자유주의; 왈라스타인에 따르면, 1968년 이후 시기에 가장 보수적인 분파들이 1968년 혁명가들에 대한 대응을 정식화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s)'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이 과학적 이론을 배제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지적으로 하향 평준화로 치닫고 있으며, 정신사적으로 명백히 퇴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우리는 19세기 인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느 면에서는 그보다 못하다. 2. 낡고 부패한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둔갑하여 과학적 이론 자체를 무너뜨린다 '패러다임'이 전 세계를 '유령'인지, '유행'인지 떠돌고 있다. 그 '형태전환(Gestalt switch)'의 출발은 불분명하다. 다만 파산한 세계의 유일한 희망으로 준비된 술안주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제 3의 길, 혹은 '인간화된 자본주의'라는 것. 과학적 이론 자체를 쓸모가 없다고 여기거나 귀찮다고 여겨 포기한 이들. 이들의 지루한 비판에 대해서는 캘리니코스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에서 말한 교양 수준 답변이면 충분하다. 그는 현존 사회주의 발생과 결과에 대해서는 "혁명은 불균등 결합 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발생"하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결합되어 있는, 특정 사회의 고유한 계급구조와 경제 발전상태로부터 발발"하며, 마르크스 이론을 "초역사적이라는 장점만을 가진 일반적인 역사철학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소련에서 지배적인 생산양식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으며, 과학적 이론에 충실하다면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정리한다. 또한 현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서방 은행들이 파산하는 사태는 틀림없이 1930년대 최악의 대공황보다 더 심각한 공황을 불러올 것"이며, "신용제도는 자본축적의 모순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시킬 뿐"이라는 마르크스 주장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더 이상 현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든가,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 자동차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 같은 현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 현실을 폭로"하는 것, 즉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와 권력의 분배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대결"하는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볼 것을 주장했다. 캘리니코스로는 성이 안 찬다면,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보라. 어디서 그따위 종말론을 들이밀 셈인가. 90년대 들어서도 '과학 괴담의 구조'는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상 과학적 이론을 무시했던 이들의 총합보다 더욱 많은 이들이 오늘날 이러한 만용을 부리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임기 만료 전후 시점에서 급속도로 바뀌는 여론의 방향에 대하듯 새삼 놀랄 이유는 없다. 이 여론 '설명력'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단지 관점의 차이라는 점에서 '확증'(?)되며, '결단'만이 현실을 대신하며, '세력화'야말로 진리일 뿐인 것이 오늘날의 이론의 위상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자는 혼자 다 해먹으려는 '파쇼'의 본보기이며, 혼자 해먹던 것을 몇몇 이들이 땅따먹기 하는 것이 '다원주의자 처세술'이라는 것. 반독재, 반파쇼, 반제를 주장했었지만, 자신은 그간 단 한 번도 반자본주의는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것. 아직도 계급이 있는가 반문하는 것. 아직도 좌파 타령이냐 비아냥거리는 것. 아직도 19세기 구닥다리 유물론에 심취했냐라는 것, 아직도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상화된 내면적 가치, 혹은 관념으로서만 소중하다는 것. 아직도 좌파 타령이냐 비아냥거리는 것. 아직도 19세기 구닥다리 유물론에 심취했냐라는 것, 아직도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상화된 내면적 가치, 혹은 관념으로서만 소중하다는 것. 아직도(?) 마르크스 따위? 개인, 시민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잘 나신 하버마스식 대안! 소통! 합의! 문화?라는 동어반복적 개나발 만병통치약이 떠오른다는 것. 국가에서 시민사회로까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 시민사회만 해바라기 한다는 것. 문화, 특히 대중문화를, 그리고 문화산업을 모르면 대중문화를 말할 수 없다는 것.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결코 낯설지 않은 공세일 뿐만 아니라 흡사 철의 규율처럼 맞아떨어지는 주장들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이 비록 끝없는 불충분성에 의해 제한될 지라도 합리적 추론과 경험적 관찰과 사회적 실천 - 쿤은 자신에 대해 포스트 다윈주의적 칸트 주의자라고 판단한다 - 을 통해 비로소 이론으로 인정받는다는 지위보다는 특정한 유세만을, 즉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서만 인정받을 뿐이라는 지위로 전락하게 만든 역사, 물리현상의 심리현상으로의 환원(관념론), 심리현상의 물리현상으로의 환원(기계론) 등 범주의 구별도 없이 마구 짜맞추기하는 역사를 돌이켜 본다면, 아울러 이러한 역사가 세계적인 현상의 극대화라 했을 때 쉽게 무시할 수만은 없다.. 엘렌 메익신즈 우드는 「세계화,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또 한 번의 새 시대」라는 글에서 "60년대 대항문화의 주류"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추동" 되었다거나, "90년대의 학문 풍토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거짓 주장"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얼마전, 60년대 영국의 급진주의자였고 여전히 좌파에 남아있는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길, "많은 60년대 급진주의자들이 내밀한 케인즈주의자(closet Keynesians)"였고, 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의 혁명적 수사가 실상은 혁명이나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1945년의 약속(2차대전 이후 영국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내건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었으며, "60년대 세대들은 거대한 개선에 대한 희망" 정도였을 뿐이라며 오늘날 좌파 내부의 고민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리고 50년만의 정권 교체가 된 이후 현재까지 진행된 역사 속에서 스스로 좌파라 여기는 일부 과거 전위들의 가슴을 찌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상기한 진술이 보다 균열되고, 파괴적인 양태로 자리잡은 상황이 한국의 상황이다. 한국의 현재는 여전히 '황제'의 출현을 막을 길이 없으며 - 한국인이 모르는 것은 민주주의뿐이다 -, 신자유 경쟁의 신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 한국인이 아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복지부동뿐이다 -, 단지 '보나파르트'와 신자유 경쟁의 절묘한 결합을 설파하는 '제 3의 제국론'이라는 나폴레옹 지지자들, 특히 정치적 사태를 배후조종하는 푸셰 같은 작자들만이 경제 위기에도 배부른 특수를 - 한국인이 침묵한다면 뇌물 먹은 것이 틀림없다 - 구가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과학적 이론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낡고 지겨운 욕설을 무시하면서 관념이 아닌 물질에서 세계를 보는 인식적 출발점을 이룬 과학적 비판에 대해서 만 귀를 기울인다. 가령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 정도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법칙 자체, 곧 철의 필연성을 갖고 작용하며 자신을 관철해 가는 그 경향이 문제이다." 패러다임. 거칠게 말해 틀, 혹은 판. 토머스 쿤이 역학의 역사 강의를 제안 받고 그리스 시대의 역학까지 추적하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찌하여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는 물리론을 전개했는가 고민하다가 다르게 보았을 뿐이라는 통찰을 획득하여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등장한 용어가 패러다임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안경을 신념화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신념화한 안경을 새로운 안경으로 '개종'하자, 다른 '성경'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한 것이 없고, 단지 바뀐 것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으로 본다면, 다만 상기한 모델이 하나의 모델에 불과하다라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를 통해 지나치게 고집스런 어떤 관행들을 과학계에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만 국한되리라. 그러나 그간의 과학적 성과를 고의적으로 오독했던 이들이 쿤적인 주장을 이용할 수 있게끔 쿤의 논의가 직관에 기댄 점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유효하다. 따라서 쿤의 논의뿐만 아니라 쿤에 대한 잘못된 대응 또한 과학적 이론과 현실 사이의 완벽한 단절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과학적 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일 것이다. 잘못된 비판은 악무한만을 양산한다. 또 다른 악무한적 대응, 즉 최근의 전 지구적 위기에서 매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준비된 기든스 원작, 블레어 각색 룰루랄라 리포트는 과학적 이론이 소멸하였다 한 뒤, 보수주의를 기초로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와 급진주의적 저널리즘의 결합을 제창한다. 이러한 논의는 자유주의자 왈라스타인이『자유주의 이후』에서 자유주의의 붕괴를 주창한 것보다 훨씬 후퇴한 것이다. 자본만 빼고 모든 걸 상대화시켜 어떤 모델이 한시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넘어서 그 유효성의 기준인 과학적 이론과 성과마저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소시민적 중산층을 견인하고, 노동계급은 물론 중산층까지 실업자로 이끄는 절망적 사태를 무마시키려는 낡고 부패하지만, 저널리즘으로 새롭게 포장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를 겨냥하여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뒤안길에는 과학적 이론에 반대하기 위해 데리다를 이용하여 한 건 올리자는 우파 논객들이 철학 텍스트 내에서의 해체를 자본을 제외한 현실의 해체로 왜곡시키는 문화적 수사가 진행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역사는 끝났다며 자본 해체만 빼고 모든 것의 해체를 뻥치는 것. 그러한 알량한 해체를 해체하는 것이 해체의 기본이라는 적절한 일침에 대해 그들이 내세운 것이란 인간화된 중세적 자본주의 프로젝트를 무시하지 말라는 단말마 - 데리다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섣불리 규정하는 것보다는 데리다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 . 과학적 이론을 스탈린 시대의 의사 과학(pseudo-science)으로만 규정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자들과 정면으로 싸우고 있는 과학적 이론임을 자임하는 것, 혹은 자신의 쓸모 없는 이론을 '보증 없는 이론'이라면서 비판에서 살짝 우회하는 것. 좌파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우파의 맹목적인 협박 정치가 횡행할 것이며, 반대로 우파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좌파의 발호를 막을 수 없다라고 하는 초과학적 주장. 그러면서 등장한 지도자와 스타 논리. 이 모든 중용의 정치, 짬뽕의 정치는 제국주의 용병으로 알제리 민중을 압살시킨 프랑스 외인 부대가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지키는 세계 경찰로 남한 출판계에 데뷔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중도파 시각이 너무나 강력한 대세여서 이제 중도파 외의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진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주장 밑받침에서는 역사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일면이 있기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아서 케슬러가 『야누스』에서 말한 바, 인간의 두뇌가 파충류와 말과 같은 수천 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원시두뇌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야만적인 작태를 일삼은 역사적 선례로 엄연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적인 안경을 또 다른 안경으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듯이 중도파의 안경 또한 임기응변용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이 주장한 논거가 자신만의 확신이 아닌 객관적이라는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증 없는 이론'이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 이론의 예측력을 인정하면서도 배제하려 애쓰는 것 다름 아닐 것이다. 더 내밀하게 들어가자면, 그들이 제시한 문제제기 이면에는 과학적 이론에 대한 두려움이 헤겔에서 멈추는 '또라이들만의 리그'가 있다. 정작 문제는 실천의 이론 의존성보다 여전히 이론의 실천 의존성이 현실이라않고서는 불가능한, 즉 기든스가 후쿠야마와 하버마스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다는 점이다. 쿤이 말한 대로 과학이 단지 관점을 다르게 보며 발전할 수 있겠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 것은 이론의 실천 의존성에 근거한 과학적 발전이 밑바탕을 이루었기에 가능하였으며, 그것이 검증이든, 반증이든, 비판이든, 사회적 실천이든 자연과학이라면 합리적 추론과 실험과 관측으로, 인간학이라면 비판적 성찰과 사회적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캘리니코스의 말마따나 "과학적 이론이 진리와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론이 내놓은 예측을 실제로 발생한 사태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과학적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대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쿤의 지적 가운데 유효했던 것은 그간의 단편적인 이분법만의 전략보다는 더욱 더 섬세한 전략이 요청된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거둔 미미한 과학적 성과에 비한다면 엄청나기 그지없는 과학적 과제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 "이제 검증이 파괴되었다", "실천은 의미 없다", "더 이상 과학이 무의미하다"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한 번은 냉전이라는 비극으로, 한 번은 세계화라는 희극으로, 한 번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비극으로, 한 번은 엄숙주의 타파라는 희극으로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변혁적 유령에서 변혁적인 척하는 유행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형태 전환을 감행하는 세계의 위기 속에서 낡고 부패한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둔갑하여 과학적 이론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전위의 이름으로 엄숙주의 타파를 급진하라? 망원경/현미경으로 보기, 뒤돌아보기, 삐딱하게 보기, 상하수도 구멍으로 보기 등 갖가지 보기들이 그 무엇을 말하건, 자신의 썰을 섣불리 이론이라 하지 않으며 각자 밥벌이를 신경을 쓴다면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관념론과 기계론이 맞부딪쳐 소용돌이치면서 가치 문제가 더욱 부각됨에도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굴러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모든 문제를 관념론에 환원시켜 주사파 교리처럼 윤리 교과서로 만든 뒤 중용이라는 뚱딴지같은 궤변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헤지펀드의 비극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모든 문제를 기계론에 환원시켜 부익부 빈익빈에 무조건 맡기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 관념론자와 기계론자들이 연대하여 헤지펀드와 재벌의 도덕 교과서, 혹은 문화산업의 총아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세상을 다 본 것이 아닌데 유일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전위로 나서는 것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는 1794년 피레네 동부군 전위대 잡지에서 나타난 '전위'란 잡지의 표어이다. 이 잡지는 쟈코뱅 이념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 전투성을 논외로 하고서는 논의가 불가능한 개념. 전통에 대한 완벽한 거부, 임박한 혁명에 대한 가차없는 실천, 미래에 대한 굳은 낙관, 혁명적 낭만주의와 메시아주의와 진화주의적 태도의 삼위일체. 자신이 오늘부터 전위라 여기면 전위이거나 매체에 등장하면 개나 소나 전위인 것. (요즘은 난 전위가 아니다라는 전위주의가 유행이다. 그러나 전위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만 관계한다) 생시몽에 따르면, 전위의 지위로 예술가, 철학자(과학자), 산업자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플라톤주의의 후예가 전위가 아닐까. 특히 요즘 전위는 대중 문화계의 급진주의에서 찾아진다. 엄격한 규율, 군대 조직, 명령 체계가 확고한 상명하복 대신 엄격한 매니지먼트, 꽉 짜여진 문화 권력망, 잘 나가는 평론가로 운명지어진 이들 전위들은 과거의 혁명 대신에 스타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이러한 전위는 사적인 생활 없이 오로지 공적인 생활(매체 출현)에만 몰두해야만 한다. 과거 전위의 유일한 적이 무지였다면, 오늘날 전위의 유일한 적은 유행에 대한 둔감이리라. 획일적인 개성 쇼가 연출되고 있는 현재에서도 어디까지나 개인은 주체로서 나서지 않는다. 다만 집단과 지도자가 팬과 스타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전위는 자신이 엘리트이면서 반엘리트주의적 대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계기인 르네상스, 인간의 부활이 일단락이 되는 순간 전위 개념 또한 소비, 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면 아마도 40억의 작가주의만이 등장할 터이니까. 전위를 갈망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전위가 자기 앞에 나타나 현세의 신화들을 가차없이 파괴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나선 것이 엄숙주의 타파이다. 엄숙주의 타파 슬로건으로 대상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주체는 동화 속의 왕자나 공주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존 호건은『과학의 종말』에서 "반어적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간의 이런 부정적 능력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답할 수 없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반어적 과학은 우리들의 모든 지식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우리들의 지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반어적 과학은 지식 그 자체에는 중요한 기여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어적 과학은 전통적인 의미에 비추어볼 때 과학보다는 문학비평이나 철학에 더 가까운 셈이다."라고 말한다. 과거 팔십 년대의 일부 운동권과 대학생들, 또는 과거 68혁명세대들이, 홍위병 세대들이 정작 부정해야 했을 과제란, 과거의 투사들처럼 소비에트를 넘어선 일시적 장치를 영구적 장치로 과학화(?)했던 것을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있다'면서 가차없이 부정하는 것이 진실로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아닐까. 그러한 과제의 실패로 스스로를 제 3세계 민족과 민중을 넘어선 산맥이라 자칭한 그들이 노동자들을 타락시킨 공범 중의 하나로 오늘날 스탈린판 서구 민족주의적 좌파로 서구 사회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닐까. 자신 안의 끝없이 분출하는 형이상학에 고개 숙이며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옷만 바꿔 입은 권위주의를 갈망하는, 엄숙주의 타파라는 과학(?)만큼 자신의 지위를 더 이상 훌륭하고도 우스꽝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반쪼가리의 좌절과 실패, 다른 말로 갈 길 가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위의 이름으로 등장한 이들이 팔십 년대, 혹은 문화혁명을 펑크적으로 비판하지만, 비판하는 전위의 모습을 보자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시장경제형 홍위병 스타들이다. 인쇄술의 발달이 전기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속도를 더해감으로써 완벽한 중앙집중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 결과 지적인 상대주의가 현대를 뒤덮자마자 전위도 키치나 아니면 언더그라운드로 투사되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이 죽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미국에 대해 한국적인 모든 것이 비주류이니 서태지도 비주류며, 유럽영화 모두 언더그라운드인 셈이다. 그리하여 1등이 아니고 3등 이하도 아닌 2등이 이제 목표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자본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 만인 대 만인의 주류이자 비주류 싸움이라는 악무한만 양산되고 결국 자본의 편에 선 자신만을 만나게 된다. 영국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보듯 침체된 영국영화의 활로를 헐리웃영화의 틈새시장을 찾다가 뤽 베송처럼 헐리웃에 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라면서 투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 역시 일본만화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락이나 재즈? 홍대, 서울대, 대학로로 이어지는 라이브와 잠실경기장과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라이브의 차이(요즘 예술의 전당 오디션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몽마르뜨나 세계의 젊은 거리나 대학로나 가봐야 개판인데 무슨 엿 같은 낭만인가? 철저한 매니지먼트로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일 뿐. 얼어죽을 작가주의? 좀 떴다고 후배들 앞에서 한턱내고 패거리나 만들어 거드름 피우기나 하는 것이 작가주의이던가. 뭘 알고서 작가주의 떠드나? 마지막 단물을 빨 듯 자본이 결국 언더그라운드 주인공이 된다. 언제부터 언더그라운드인가. 그 또한 유행이 아니던가. 모두들 똑같은 평론으로 옷을 갈아입고서 똑같이 염색하고 똑같은 지랄을 하며 신흥종교 부흥회 같은 딸딸이를 만끽하는 것이라면... 절대 영화화되지 않는 소설을 쓰겠다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이 정작 영화 만들기 딱 좋은 역설, 똥잎이라는 간판만으로 웬만한 작품이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언론에서 누리는 역설. 아무도 가지 않아 멋졌던 여행지가 모험가들의 손에 닿자마자 관광객이 밀려들어 싸구려 관광품이 된다는 역설. 물론 그 다음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MBA 출신 스텝들이 기획한 최고급 호텔이 들어서리라. 자본의 사이클 곡선.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하고자, 경기를 타고자, 돈만 된다면 개떼처럼 몰려드는 몸부림. 돈이 되지 않는다면 자본이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순간은 분명 아름답지만 자본이 모두를 삼킬 따름이다. 이미 서태지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에 훌륭한 버팀목이 되는 단일한 슬로건. 엄숙주의 타파. 그래, 이 좆만한 나라에서는 말만 멋진 지랄들이 무수하다. 만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전위가 요구된다면, 수많은 후위들은 팔십 년대처럼 엄격하게 그들의 전위 자격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힘겨운 싸움에서 살아 있어라.' 제 3의 길 주창자, 기든스가『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던, 인간이 진정한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향한 급진주의자들의 희망은 한탄 공허한 망상으로 드러난 듯하다."라고 조소할 때, 필자는 알튀세리안이 아니더라도 - 알튀세르와 하버마스에 대해 과학적 이론을 재구성하여 헤겔로 회귀하는 강단주의에 대한 코바르치크의 비판, 특히 알튀세르가 그람시의 실천력을 과소평가한 것을 비판한 문제제기에 필자는 동의한다 - 알튀세르의 "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를 떠올린다. 남들(기든스들)이 하니까 나도 그러하다는 말보다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예나 지금이나 전위들은 서둘러 마르크스와 결별을 선언하고, 사회주의와도 안녕하고, 다만 기든스식 급진주의만을 채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행이니까. 4 현실은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포함한 미로다 "현재 미국 등 서구에서는 중심 논의 자체가 파쇼적이라 탈중심론이 대두되는데, 68년 이후로 30년이나 지났는데, 인터넷도 접속 안 하냐, IMF인데"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화의 미끼'이다. 밀레니엄 새 천년의 시작인 21세기도 세계 패권을 쥔 국가들, 특히 미국이 전 세계 계급들에게 가상적 자유의 문제를 대중문화의 파급으로 세뇌시키면서 각개약진을 주문할 여유를 부릴 지라도 바로 그러한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적 연장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부르죠아적 취미, 또는 거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거품이란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자이면서 관념적으로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과 같이 관념적 여유 자체를 부정한다면, 필연적으로 평소에는 중산층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다가 퇴출 위기 때만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발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그들이 지금 IMF다 해서 다소 의식적이 된 것이 사실이나, 세계에 공황이 닥친다고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급투쟁이 보다 격화될 것이 분명한 동시에 시기가 지나면 그들은 다시 이미 주류인 대중문화=문화산업의 거품 중산 언더그라운드문화(?)에 도취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살더라도 미국 비버리힐즈에서 노는 꼴을 각종 정보를 통해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은 민중의 일상생활에서 경제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그만큼 문화비중이 증대한 데서 나온 토대를 필요로 한다. 단적으로 말해 노동시간 단축에서 비롯된다. 이때 노동시간 단축은 자는 시간 빼고 일하는 시간에서 노는 시간이 약간 생겼다. 이는 노동계급의 투쟁을 제한시킨 데서 나온 지배계급의 '분리한 후에 통제하라' 전술이다. 이러한 욕구의 민주주의론은 이에 상응한 논의로 분산된다. 그러하니 종전처럼 수직적 연대를 말해 봐야 이런 답변이 나올 것이 뻔하다. "나는 지배계급의 농간에도 질렸고, 또한 너희 농간에도 질렸다. 그러하니 내 살 길이나 도모하련다. 용꼬리가 되느니 뱀 머리가 되겠다." 한국의 좌파가 최소한 서구 좌파의 위치에 있다면 상기한 답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 싸움이 이토록 지저분하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실체는 없고, 비난받을 때만 있는 것이 좌파 아닌가. 민족주의적인 것이든, 국제주의적인 것이든 '파시즘이냐, 미국의 노예이냐'라는 정신 분열적 양자택일 상황에서 좌파가 들러리만 될 따름인 한국에서 현재 다만 분리된 무산계급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니 연대가 필요하다. 대중문화를 공격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문화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여성운동이 공격당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여성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노동운동이 공격당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노동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조차도 아직은 허울뿐인 슬로건에 불과하다. 왜 그러한가. "너희가 그렇듯 즐길 수 있는 까닭은 투쟁 역량이 부족하지만 이 사회에서 너희가 발언할 수 있을 정도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너희 대학선배들이 교련반대 투쟁을 해서 너희들이 학교에서 교련수업 같은 군사문화를 접하지 않은 것이야. 너희의 주장 가장 대척점에 있는 그 문화를 반대했기에 너희는 그런 군사문화를 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그만큼 너희는 순수할 수 있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투쟁의 과정에 있었기에, 그 결과의 혜택이란 너희보다 더 타락했다는 말만을 들었을 따름이다. " "싫은 건 싫은 거야. 너희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건, 너희가 그때 그러한 군사문화를 싫어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싫어하는 건 군사문화 같은 너희들이야. 그때의 과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짜부리지 마. 게다가 그걸 보상받겠다는 너희들 태도에 질렸어. 우리가 너희에게 빚을 졌지만, 보상하겠다고 맨날 네 놈들 자지에 똥구멍을 대줘야 하나? 우리가 당신들 똥구멍에 자지를 들이밀었기에 빚이 있는 게 아닌 한, 우리가 빚을 갚는 방법까지 너희에게 맡길 수는 없어. 하여간 너희가 다 하겠다는 발상만큼은 집어쳐.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 양 입장들은 서로 공생 관계를 이룬 듯이 보인다. 한 쪽은 십대, 이십대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지만 운동성으로 포장해야 한다는걸 절감한다. 가령 사회적 이슈로 타이틀곡을 내놓은 뒤 아이돌 스타들답게 예쁜 노래로 흥행한다는 것. 다른 한 쪽은 비록 상처받은 운동성이지만 그간 해놓은 것들로 간신히 꾸려갈 만큼은 된다. 하지만 십대, 이십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여력과 매력이 없다. 그리하여 둘 다 네가 잘 났니, 내가 잘 났니 하며 '손호철 대 강영희' 따위 개싸움을 하지만 도토리 키재기가 아닐까. 특정 분야만을 두고 저항이네, 뭐네 이야기하는 것도 난센스가 된 지 오래이지 않을까. 가상의 추억일 따름이다. 동시에 둘 다 어떠한 실천력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자신의 실패담만을 지겹게 재탕하며 영사기를 돌리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오는 말이란 '씨발 놈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낡은 것일지라도 오래 익을수록 더 진가가 발휘되는 우리의 훌륭한 술친구인 체르니쳬프스키는 말한다. "인간학적 분석에 따르면 노동은 오락과 휴식, 기분전환, 즐거움 같은 여러 운동형태의 기초가 되고 내용이 되는 근본적인 운동형태이기 때문이야. 다른 여러 운동형태는 노동이 선행되지 않으면 현실성을 갖지 못해. 게다가 운동이 없으면 생활, 즉 현실이 없어" 노동자의 공장생활이 아무리 모든 경제활동의 출발이라고 할 지라도 노동자가 그것만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도 노는 시간이 있으며, 자는 시간이 있다. 당신들이 노는 문화(가출했다 요즘 컴백홈하는 지식인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 당신들 주변 사람들은 좆빠지게 일한 돈 중 일부를 당신들 잘 놀라고 갖다 바치고 있다. 그들이 놀 시간을 절약해서 그대들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놀고 싶지 않겠는가? 그들이라고 군대가고 싶어서 갔겠는가? 당신들이 좆나게 놀 시간과 좆같이 문화생활의 선도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학력 자본, 정보 자본을 획득할 시간에 그들은 쓸 데 없이 휴전선에서 지켰을 따름이다. 그러하니 노동귀족, 문화귀족들은 후위에서 머리 뽀개는 이들을 명심하고 자신들의 알량한 지위를 지키기보다는 의무적으로라도 후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보다 더 고생하는 이 수도 없다. 게다가 고생한다고 당신들처럼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반문화, 비주류문화, 독립문화, 소수자문화, 하위문화 등 모두 그 자체 변혁되어야 할 산물이다. 그것이 한국이라는 곳에 있는 한,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그 또한 과거로부터 지겹게 내려온 관념상의 연장물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다 강요라면, 할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하고 싶은 것만 한다면서 맘대로 노는 놈은 계속 놀면 그만이다. 다른 한편, 과거의 투쟁 역량이자 오늘날의 회고담으로 남아 있는 관념상의 운동가들은 육이오식 '그때 그 시절' 타령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뭐 하자고 하면, "이제 지쳤어! 자신 없어!" 가 고작이다. 그러다가 "내가 과거에는 말이야" 타령을 한다. 여성운동이, 동성애운동, 기타 문화운동(?)이 구십 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팔십 년대 말에 제기되었던 대중성, 수용성이 문제라며 대중(자본? TV?)이 좋아하는 것이면 다 좋다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이미 쓰라린 경험과 파쇼적인 행태를 벌인 그대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가 없기에 "거 봐라"며 냉소를 보내기만 한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이마골로기, 패러다임, 전위, 반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상징만 요란한 바리케이트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가상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반성은 없고, 다들 당했다는 소리밖에 없다.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여전히 십수 년 전과 똑같이 '출세를 위한 패거리적 단결과 적에 대한 뒷다마라는 지난한 노력을 다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의 끝없는 변명이 다 실패로 돌아간 후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떠올려라. 아이들의 눈으로, 자연에 더욱 겸허해라. 자신의 하찮은 창작 성과와 조잡한 연구 성과를 뻥튀기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회한뿐이다. 그러니 다시 묻자. '그대는 짱돌도 던지면서 공부도 하오?' 만일 인류의 모든 쓰라린 실패가 여전히 전적으로 과학적 이론의 탓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아직도 과학적 이론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사유되었다고 판단한다면, 새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21세기에는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인드라(1999) 미래는 희망적인가. 이처럼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는 까닭이 있다면 아마도 현재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견딜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품은 분노를 미룰 수 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대안이 없는 글을 읽을 수는 있어도 대안을 포기한 글을 죽어도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미래가 없다면 현재를 변화시킬 수 없고 주체도 없다는 것. 꿈을 가진 이들만이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 장엄숭고한 꿈이 있지만 밋밋해서 싫다. 대신 유치찬란하지만 야무진 꿈도 있다. 비장한 꿈꾸기가 수월치 않으니 미뤄 두고 재미난 꿈꾸기나 하자." 거대 담론 관점에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지만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잔잔한 일상'을 파고들어 생산적 무정부주의로 혁명적 전복을 준비하자던 이들의 말로 기억된다. 하수상하게 막 나가보았던 십년 세월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배째라는 몇몇 이들의 항변이 아닌 구십년대 거의 모든 이들의 항변이었기에 이들의 B.J.R도 거품 흐름에 슬쩍 무임승차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가는 혹독했다. 경제환란이 닥치자 이들만 이지메당했으니 흡사 민중에게만 고통분담시켜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현 정권의 얄팍한 술수와도 일맥상통한 듯이 보인다. 근래에 참여연대가 반성적 고백을 하였고, 한겨레가 창간 축하 특집을 각계 한겨레 비판으로 기획했다. 역대 정권과 차별없는 현 정권과 당신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라는 준열한 질문. 바로 이것이 구십년대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회피하고 싶었고, 누군가는 끝내 회피하지 못하였고, 또 누군가는 다행스럽게 지연시킬 수 있었을 질문이다. 이 글은 이렇듯 질문을 회피했거나 지연시킨 이들이 고민 끝에 내놓았을만한 대안없는 결론에 대해 두서없이 읊조림을 해보면서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9년 오늘을 점검하자는 것이다. 현재 돌아가는 긴급 현안에 대해 명망있는 사회연구단체에서 나온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들어 세기말과 밀레니엄 시대 실상을 대안없이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은 그보다는 그러한 대안이 없는 대안, 숨겨진 대안에 대해 간략한 단상을 드러내보고 자 하는 데에 있다. 실천. 이론에 적대적인 한, 동원력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요한 사건에는 디자인, 혹은 기획이 있었다.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론에 적대적인 동원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이념 타령인가 하지만 이념의 과잉과 종말 주장의 근원지는 이론에 적대적인 동원력의 이념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이념의 과잉이 문제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념의 결핍만이 문제였다. 기득권자들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념의 부재, 정책의 부재를 자기 비판하는데 민중 진영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실천을 중시한다지만 면책을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투쟁력을 갖춘 민중세력의 주체적인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도 이념적, 정책적 부재로 인한 교조와 물신숭배현상으로까지 보이는 동원력 정치가 걸림돌이었지, 이념과 정책 그 자체가 문제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라쌀레의 노동자조직에서 발전한 독일 노동자조직이 십년이 지나서 맑스적 방법론을 채택한 것과 흡사한 강령의 문제이며, 현재의 분열상 그 자체이겠다. 여기에 부가한다면 지난 20세기 내내 쓰라린 식민지 시대 유산과 냉전에 이은 분단에 기인한 변방의 사투리들이 저마다 표준어를 자임한다는 것. 그런데 부가된 문제임에도 우리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냉전을 거슬러, 식민지 시대를 거슬러 후천개벽 '상생(相生)'의 동학을 현재 시점으로 번역하여 미래의 대안이라 제시한다면 문제가 아닐까. '아, 고구려'식을 버전업시킨 또 하나의 사투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상생의 시대'가 도래한다는데 새천년 밀레니엄의 대항군이라는데 정말 도래할까. 아니면 전처럼 무늬만 그럴싸할까? 왜 사생(死生), 혹은 상사(相死)의 시대는 안 될까. 죽을 놈 죽고, 살 놈 살아야 하는 것, 혹은 이렇게 사느니 구차하게 살지 말고 다 같이 죽자가 지난 삼십년간 끈질기게 남은 문제가 아닐는지. 현재를 바로잡고자 현재의 뿌리를 추적하는 작업은 온당하지만 발생하는 현재에 애써 관조하며 뒤돌아보는 공동체이어야만 한다면 과거의 공동체이지, 미래의 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역사적인 악취덩어리가 한국 사회 특정 계급계층을 집중적으로 폭격하였다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들이마신 현재의 특정 계급계층이 사회로 투사하는 시선에서 찾을 일이다. 또한 아무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자 계기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사회구조에서 등장한 계급대립의 한 측면만을 볼 뿐 아니라 전봉준을 분리시킨 이념을 대안으로 제시함은 경직되어도 한참 경직된 또 하나의 스탈린주의, 즉 상사(相死)의 원리를 내재한 것이 아닌가. 무릇 이념의 진원지는 사회계급간 관계에서 나와 이념간 상호작용은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투쟁으로 연결됨이니 곰삭은 교훈을 계승하 건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결과로 편협한 현실들의 투쟁을 마구잡이 상생시킨다면 가치관의 혼란은 극에 달할 것이다. 상생의 동학이 공자 가라사대 성인군자들만의 조화가 된다면, 박정희의 동학, 전두환의 동학, 현 정권의 동학이 된다면, 심지어 민중진영의 동학으로까지 치켜세워진다면 한국에서 이념 논쟁은 할 필요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념 논쟁이 빨갱이론 따위의 수동적인 양식으로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켜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이념 논쟁은 신자유주의처럼 적극적인 양식으로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것일 터이니까 말이다. 하기는 레닌 시대조차도 주류 철학은 신칸트주의였다는데... 차라리 필자는 소인배 틈에 끼어 민(民)을 잘 부려 먹어 태평성대했다는 요순시절을 비웃는 길을 택하련다. 1999년 세기말. 니체는 일찍이 다수를 가축떼라 갈파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초인 을 주창한 바 있다. 20세기 초반에는 파시즘의 이념적 저수지를 맡았지만 오래된 습관은 끈질기게 남아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와 강자의 논리가 진리인 팍스 아메리카나가 도래하여 다시 19세기로 제국주의 땅따먹기 시대로 돌아간 듯 하자 마치 대안처럼 구십년대 화두 말미를 넘어 21세기 교과서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이름하여 소수 정치론. 필자는 소수 정치론이 기실 다수 정치를 내재하면서 배제하는 척하는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헤게모니적 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결국 기득권의 쌍생아처럼 한국에서 자리잡고 있는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편에 나타난 19세기 진단을 보자면 "19세기는 더 한층 동물적이다. 보다 지하적이고 보다 추하며, 보다 현실주의적이고 보다 천민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보다 선량하고 보다 신실하며, 모든 종류의 현실에 의해 굴복하며, 보다 진실하다. 그러나 의지박약하며, 하지만 애처롭고 암흑을 좋아하며, 그러나 숙명론적이다. 이성도 심정도 겁내거나 공경하지 않으며, 욕망의 지배를 깊이 확신하고 있다... 도덕조차 하나의 본능에로 환원된다" 아직 다수가 다수다운 적이 없었음에도 추악한 속물주의(스노비즘)만이 판치는 한국사회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지적하는 듯도 하다. 이 지적은 아무래도 푸코의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일 것이라는 언급에서 계보를 찾을 일인가. 이왕 하는 차이의 정치라면 데리다에서 찾을 일이다. 마이클 라이언은 논쟁적이고 놀랄만한 저서인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데리다가 프랑스 지성계에 등장하기 전에 나온 프랑스 사상가들의 저서와, 데리다를 알게 된 직후에 나온 그들의 저서를 비교해보기만 해도" 알 정도로 데리다가 들뢰즈의 리좀론에서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지성계에 끼친 영향력이 명백하다고 말한다. 보통 해체론을 미국쪽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시키지만 엄격히 본다면 보들리야르를 제외하고서는 프랑스 철학자들과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체를 위계질서와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완벽히 일탈하는 어떤 새로운 유목민적 대안(?)과 연관시키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은 없다. 오히려 해체는 구조를 전제하며, 보다 풍부하고, 속 깊은 이분법으로의 '이행'을 중시하는 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요상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지난 구십년대 경쟁력있게 생존한 화두로 인디, 혹은 독립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서로 말을 아꼈지만, 다들 저마다의 무정부주의자였다. 무정부주의 비판하는 까닭도 자신이 '진정한'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 변방을 사랑하기, 멋대로 굴기. 한때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운운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아닐는지. 레닌주의 당이론을 비판하고 나왔지만 남은 것은 각각의 '홀로 당독재'였다. 황당하지만 필자는 전세계 주요 다국적 기업과 주요 국가 지배그룹의 지배이념은 레닌주의적 당이론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또한 그러한 지배이념 탓에 역사적 레닌주의를 부정하는 대신 '홀로 당독재'를 자유라는 허위의식으로 무장했다가 결국 '현실적 레닌주의'인 미국 자본, 즉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차별을 공평히 하여 스스로를 가축떼로 차이화시키는 그것. 다시 다 같이 못사는 시대로 회귀하게 하는 동인. 어느덧 '깊이'란 정체불명의 유령이 새롭게 '포장'되어 떠돌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가벼워 너무 조잡한 난장은 지긋지긋하다, 내팽개쳤던 딱딱한 책을 오랜만에 보니 신선한(?) 느낌까지 받았다,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온고이지신이다 등등의 정치적 항변이 그럴싸해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구 좌표계는 죽었다! 새 좌표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이조차도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장면이라도 카메라 앵글을 다르게 하면, 옛것이라도 인물을 바꿔치기해서 재상연하면 첨단의 것이다. 어쩌면 세기말 징후와 더불어 새천년 담론도 다 이 사정이겠다. 그러나 새 좌표계가 본격 등장하기도 전에 몽땅 씹어버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좌익적(?)이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구 좌표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새 좌표계에 대한 디자인, 그리고 이들의 좌표 전환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겠다. 지난 삼십년의 문화. '청년'의 시대, '민중'의 시대, '독립'의 시대가 있었다. 청년의 시대. 미니스커트와 청바지와 장발과 대마초와 통기타의 시대였고,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한 시대였다. 이런 청년 문화를 한마디로 '얼치기 자유주의'로 매도하고 등장한 문화, 민중의 시대다. 청년 시대적인 스타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민중에 철저하지 않은 결정적 원죄였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비디오 테잎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 또한 너무 자학한 것일까? 민중의 시대더러 '한물간 변방 파시즘'으로 매도하고 나타난 시대가 있으니 바로 '독립'의 시대다. 청년적인 것은 부끄럽지 않다, 지도를 받는다는 것만큼 해악스러운 것은 없다, 네 멋대로 해라, 넌 너고, 난 나다. 차이는 좋다. 차별은 싫다 등등. 하지만 청년문화가 자리잡았기에 청년문화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체성보다는 다만 전 시대와의 몇 가지 차이가 돋보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중문화도, 독립문화도 마찬가지 운명인지 모른다. 버전업된 반복만 계속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너라고 별 수 있니?' 지난 삼십년간을 이렇게 간단히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서구 육십년대 문화가 변두리에서 사투리로 번역되고, 번역된 사투리가 익숙해지자 그때마다 낯선 것, 이방인의 것을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는지. 하지만 이조차 변방 자본주의 사회가 겪어야 할 필연적 운명이라면 이들만 탓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러하니 과제는 청년, 민중, 독립을 모두 담아내는 그릇이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하기에는 소수 정치론이 담아낼 지는 미지수이다. 미지의 정치. 그것이 미지의 정치인 한, 현재를 말아먹기 딱 좋은 것이다. 우리는 각자 정지용 시 <향수>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그곳처럼 유토피아를 하나씩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건 편견, 혹은 이념이겠다. 그런 편견을 넘어서 가자는 이가 있다면 오늘날 분명 파쇼라고 지탄받을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파쇼,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 있는 파쇼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금언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인간은 항상 양쪽 끝이 타오르는 촛불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 할 일은 많으나 돈 되는 일이 없다 인드라 : 97.8 인터넷 웹진 스키조 ​ ​ ​ 0.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 그람시가 일반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상식'이라고 불렀던 바를 '문화'라고 등치시킨다면 문화는 언어와 신념, 미신, 의견, 종교 일반 등 우리 - 이 용어는 철저히 기만적인 말이다. 현재 당신과 내가 공동체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세뇌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왜 이런 말을 쓰는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설명하려면 복잡하지 않은가? -가 알고 믿는 것에 관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왜 믿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해왔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강화하고, 운좋게 '돈오'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강화할 뿐인 언론플레이가 전부인 문화주의적 태도를 문화운동이라고 한다. 이 글은 요즘 잘 나가는 문화운동류에 편승하여 자기 배설하는 글이다. 흔히 배설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은데 무릇 컴플렉스를 치료하는데 배설만큼 해롭지 않으면서 쾌감마저 선사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배설이 배설임을 스스로 경계짓는 한 배설행위는 정당하다. 그러나 배설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스스로 경계짓고 실제로는 배설행위를 하는 위선적인 태도만이 부당한 것이다. 문제삼기가 권력이라면 왜 백수가 도마에 올랐는가? 이는 백수 인구가 갑작스레 증가해서 백수가 문제제기하여 사회 문제화되었다기 보다는 불황기의 노동자들이 언제 직장에서 축출당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백수에 대한 심정적인 동조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수는 실업자를 지칭하는 잘 알려진 속어이다. 실업자는 당국의 실업자 규정보다 일할 의욕이 있음에도 보통 번듯한 직장, 혹은 자기 사업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함이 우리 사회에서는 옳을 듯싶다. 이 글에서는 백수에 대한 심정적인 동조현상을 슬쩍 건들여 보고,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이 사실 무산자들의 문화수용 양상을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하는 문제제기를 던지고자 한다. ​ 1.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귀족들이 노동을 천시했던 반면 부르죠아지는 '자본을 위한 노동'이란 물신적 도착을 강화시켜왔다. 즉 돈되는 일만 가치있는 것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노동관이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표어가 근대적 노동관의 실천적 구호였었다. 진짜 백수인 나는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주변에서 집에서 놀면 뭐하나,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마치 전업주부들이 집안에서 부불노동을 함에도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위한 노동'을 폭로하고, 자유로운 노동을 회복하고자 하였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자유고 뭐고 큰 욕심 안 부리고 내 멋대로 살고 싶어서 고생스럽고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좀 더 고생스럽고, 불안정할 뿐인 길로 가기 위해 직장을 때려쳤는데 다른 이들이 죄다 하는 말이 그렇게 사는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냐,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내가 막상 백수생활을 하니 생각할 일도 많고, 할 일도 무진장 많은데 정작 주변 사람들은 백수가 뭔 생각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많냐, 빨리 취직하면 그만이지,라고 단정을 내리기 일쑤이다. 심지어 백수에게 과도한 일을 시키기까지 한다. 백수들은 다른 사람들이 늘 바쁘니까 우선순위에서 제일 마지막이 되고, 게다가 일하고 난 뒤 재수좋아야 쥐꼬리만한 점심값 얻어먹는 것으로 위안삼아야 한다. 이것이 모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지고지순한 명제이니 어쩔 도리인가? 그렇다고 할머니와 나는 굶어야 하겠는가? 주변사람 눈치나 보아야 하겠는가? 물론 이제나 저제나 자식한테 호강을 받아볼까 기대하는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마땅치 않은 일이다. 심지어 돈이 되는 책만 읽겠다고 선언하는 수많은 고급독자들 앞에서 이런 말 한다는 것자체가 사치스런 일이겠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게으름 피울 권리; 1848년 노동권에 대한 반론'를 발표하고, 근대 노동관에 대한 다소 편협하지만 매우 도전적인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직장 때려친 것이 과연 나의 선택이었던가 아니면 불황기에 처한 자본의 요구였던가를 한 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며, 직장을 때려친다고 자본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을 위한 노동을 강화시키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이 인간 모든 영역을 물신화해나아가는 과정에서 백수는 예비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영역에서 실질임금을 절하시키는 소극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에 봉사할 준비를 갖추고 언제든지 경제면 창업시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만한 적극적인 역할 또한 하고 있다는 점이다. ​ 2. 생존자 증후군과 카프카 증후군 우리는 잠시라도 돈되는 일을 염두해야 한다. 부모들이 가계 소득을 상회하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들여 제조된 상품이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굶어 죽을 지라도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는 인종과 민족과 계급 차이를 뛰어넘는 전세계 부모들의 요지부동한 상식이자 신념이었다. 그러하기에 대를 이어 현 자본주의에 충성하는 우리들 또한 예외가 없다. 놀면 뭐해, 고스톱이라도 치자. 백수라고 예외는 아니다. 백수의 생활반경이 취직을 전제로 한 것이니 만큼 문화수용 또한 마찬가지이겠다. 다만 직장인이 직장인으로서의 자기 유지를 위해 문화수용을 하고 있다면 백수는 백수를 부정하기 위해 문화수용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차이도 카프카 증후군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부모의 높은 교육열 덕에 소수 특권층이 받는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노동자 상해 보험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반복적이고 단순하고 끔찍스런 업무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일과 후에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일과 후에 자기를 위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직장인들이 생존자 증후군과 더불어 카프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생존자 증후군이 매일 아침 동료들 의자가 치워지는 것을 보며 언제 자신도 밀려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라면 카프카 증후군은 고스톱치기, 야구장 가기, 영화보기, 술먹기, 글쓰기 등 별로 쓰잘 데 없는 일이 자아실현에 무척 도움이 된다고 자신을 세뇌시키면서 언제고 멋지게 사표 쓸 것이라는 환상으로 일과를 견뎌내는 것이다. 언제나 믿을 수 없는 통계치에 의하면 자신에게 새로운 도전 기회가 주어질 경우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안정적일지라도 과감히 사표를 던지겠다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비수기의 유럽여행을 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한국인 민박 주인들의 이야기였다. 일과 후 야구장을 찾는 회사원들은 아낌없이 광란의 몸짓을 펼친다. 이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는 스포츠 신문을 보고, 저녁에는 빠짐없이 스포츠 뉴스를 시청한다. 때로는 음악과 영화에 심취하다가 아예 음악과 영화 분야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들은 매우 가소롭게도 회사가 자아실현의 공간이며, 심지어 자본주의가 자아실현의 최적공간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입사했으나 회사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니는 곳이고, 자본주의가 이런 생계수단조차 전혀 보장하지 않는 곳임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백수가 되면 그간 생계수단 때문에 하지 못한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여행을 못가는 이유로 직장인은 돈이 있으나 시간이 없다고 하고, 백수는 시간이 남아도는데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직장인이나 백수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기는 매일반이다. 백수가 조금 더 시간과 돈이 없을 따름이다. 정작 백수 또한 생존자 증후군과 카프카 증후군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자본이 언제나 노동력 공급을 '자연', 혹은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는 한 백수의 존재는 영원불멸이다. 백수가 취직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모든 행위란 기실 부불노동이며, 대자본은 중소기업과 달리 백수에게 면접비라는 명목으로 소정 액수만을 부여할 뿐인 교묘한 착취를 일삼고 있다. 생산수단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그 어떤 자유를 부여하건 그 자체 소외일 뿐인 것이다. ​ 3. 무산자의 일원인 백수의 세상보기 국가, 기업, 가정의 주변부에서 서성거리는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은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주변부에 있다는 이유로 주변부자본주의론처럼 일반을 무시하고 특수로 나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자들만큼 억압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해방의 신주체나 노동자와 동등한 주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이 어떠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백수를 통털어 한묶음으로 문화수용양상을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부모세대만큼만, 혹은 부모세대보다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노동자들과 부모세대 덕분에 좀 더 윤택한 환경에서 교육받은 노동자들의 문화수용 차이처럼 백수들을 한묶음으로 문화수용 양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남녀 성차를 무작정 인간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백수(룸펜)들은 살인적인 생활환경으로 인하여 자본의 노골적인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후자의 백수(고등룸펜)들은 룸펜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로 인하여 자본의 은밀한 유혹에 쉽사리 빠져 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백수들의 문화수용 양상은 룸펜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고등룸펜이 보다 신분상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고등룸펜은 노동부의 고용보험제 취지대로 자기 개발을 좀 더 연마하거나 아니면 임금수준을 조금 더 포기하면 다른 백수들보다 기회가 많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 특징을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고 본다. ​ 첫째, 백수들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문화수용보다는 급격하고 단절적인 문화수용을 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의 경우 아무리 적은 봉급이라도 봉급 수준에 걸맞은 내핍을 강제하다 보면 문화수용양상이 아무래도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성향을 가지기 쉽다. 그나마 가진 것(자산적 권리)에 대한 애착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백수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극단화한 형태를 취하기 쉽다. 서구 네오파시스트들의 진원지 중 하나가 백수들이며, 박정희 신드롬의 대중적 기반 또한 백수들이다. 이러한 점은 마르크스도 충분히 우려한 바이다. 다른 한편 신문에 보도된 한총련 간부 요건 중에서 '직업을 가지지 말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총련측의 직업혁명가 자격심사 이면에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이 주류사회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백수들은 부모세대의 인식 혹은 전통적 인식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쉽다. 이같은 논의는 신세대 논의와 전혀 다른 논의이다. 자본은 부모세대에게 임금상승률을 훨씬 뛰어넘는 자식교육을 강제한다. 따라서 부모세대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다같이 못살아서 할 수 없다'라는 인식의 공통기반이 무너질 확율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고교를 마치는 시대에 고교 졸업자 이하가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군대도 마음대로 못가는 사회적응 부진자 다름 아니다. 이들이 같은 연배들에게 느끼는 질곡은 필연적으로 부모세대 인식과 정반대되는 양상을 가지기 쉽다. 한편 고등 룸펜은 부모 덕에 고등교육의 혜택과 쓴맛을 동시에 맛보았기에 부모세대의 인식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온통 대학출신들이 판치니 대학만 가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부모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듯이 대학가도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식간의 대립이 쉽사리 드러나고는 한다. 셋째, 백수들은 사회적 문제보다 개인적 문제에 몰두하기 쉽다. 백수들은 국가, 기업, 가정에서 주변부에 위치함에 따라 어떠한 사회적 발언에 대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하는 입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백수들은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기 마련이고, 자신의 방, 자신의 내면세계에 보다 빠져들어간다. 백수들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가 밀려나 있음을 늘 깨달아야 하기에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방어기제로서 자기중심주의가 자리잡게 된다. 다른 한편 백수들은 사회적 대립 문제를 사회적 대립 문제로 보기 보다는 개인 대 개인의 투쟁으로 이해한다. 직장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는 대신 같은 백수들에 향해 경계하고 질시한다. 왜냐하면 함께 백수생활을 한탄하다가도 취직자리만 보이면 경쟁관계로 곧바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와 개인 대 개인 투쟁 의식이 상호교차되면서 사회적 문제를 모두 희석화시킨다. 넷째, 백수들은 사회조직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백수들은 사회조직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동시에 사회조직체계 자체를 극복하지 않는 한 사회조직체계를 내면화한다. 사회조직체계의 역기능만을 사회조직체계로 판단하여 단순히 증오와 제거와 음모만을 조직생활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운좋게 취직을 하거나, 혹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경우 우스꽝스런 헤겔식 정반합 사고만이 판칠 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대중적 인식이야말로 라이히가 강조했던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이라는 점이다. ​ 4. 빠져 나오며 이러한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은 아주 느슨한 규정에서 보자면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과 몇몇 지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많다. 어린이들이 성인에 대해 그러하고, 여성이 남성에 대해 그러하고, 신체부자유자가 신체자유자에 대해 그러하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대해 그러하고, 노인이 젊은이에 대해 그러하고, 노동계급이 자본가에 대해 그러한 성향을 종종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백수가 스스로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영구히 백수를 필요로 하는 한 일하지 않는 백수에 대한 이지메는 필연적이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영구히 백수를 필요로 하는 한 백수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가령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는 언제나 전시효과로써 효과적이다. 한편 무산자의 일원인 백수가 굳이 무산자와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이처럼 개개인적으로는 불안정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무능할 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다. 이같은 정치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계급이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혹 같은 무산자를 잊고 있지나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이 단지 자신의 일터를 위협하는 족속으로, 혹은 자기 임금을 떨어뜨리는 족속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 노동계급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러한 주변부와도 충분한 교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가령 노동계급이 적극적으로 실업에 대한 대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리해고를 막고 임금동결로 만족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이미 실업한 사람들에 대한 대책도 같은 무산자로서 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할 때 백수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사태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끝으로 백수는 빈 손, 교환될 것을 가지지 않은 손, 일하지 않는 손이다. 일중독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편안하게 쉬고, 재미나게 놀면서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고, 쉬고, 놀고 하는 구분이 실은 자본제에 와서 특화된 가치 판단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원시인들이 하루 종일 일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짧은 시간에 하는 데도 전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러면서도 일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라는 말을 손쉽게 한다. 바로 백수의 존재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백수와 노동자의 구분이야말로 자본의 계략이며, 이러한 계략을 폭로하는 계몽적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백수와 노동자가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지 못하는 근본 동인에 대한 해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근본 동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 조정환님께 님의 글을 보고 나서 한 동안 고민했던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저의 두서가 없는 의견이 도움이 될까 하여 글을 드립니다. 저는 요즘 안티카동호회(www.anticar.co.kr)를 자주 들립니다. 이유는 제가 5년 간 몰던 애마 티코 대신 다른 차로 바꾸려고 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차 관련 기업 사이트와 차주 동호회도 동시에 둘러 봤지만 제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이트는 안티카동호회였습니다. 안티카동호회 게시판에 나타난 다양한 이들의 한국차 비판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성의가 없는 글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저럴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살아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차종 선택을 위한 정보를 구하러 갔다가 차종 선택에 대한 도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한국차 소비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당국-업체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집단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을 보니 참 멋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도하는 이들은 심심땅콩풀이로 안티카동호회를 만들었을까요?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흡사 목숨을 건 듯이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여 하나하나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따져 들어가면서 소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니 당국-업체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이끄는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할까? 이번 건으로 뜰려고 그런 것일까요? 안티카동호회를 주도하는 이가 어떤 상업적 계략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그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 직업이 있을 터이고 사이트 유지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고 여기니 그러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티카동호회는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겠노라고 대문에 큼지막하게 올려놨습니다.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91년부터 통신을 해왔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분야만 틀릴 뿐 제도 언론을 통하지 않은 수많은 실력자들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비판이 등장한다면 그 운영자가 현대냐, 기아냐, 대우냐, 삼성이냐, 외제냐하는 정치(?)적 성향에 설령 초연하더라도 게시판에서 정치꾼(혹은 각 업체 본사 판매담당자)들이 어떤 의식적 의도를 가지고서 조작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의 그간 경험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들이 개입하여 말이 되면(혹은 훌륭한 기획을 잡았다면) 정치꾼들의 의도에 네티즌들이 호응하여 그들 의사에 따라 게시판이 흘러갈 것이며 반대로 정치꾼들이 개입하였음에도 말이 되지 않으면(구태의연한 수법을 써서 속이 뻔히 보인다거나 기획이 황당무계하다면) 네티즌들이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들고일어나서 정치꾼들이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꾼들은 말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최후의 방편으로 판깨기하는 방편으로 하여 해당 게시판이 '정치꾼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도 차선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네티즌의 관심을 희석시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운영자가 순수한 열정만으로 안티동호회를 계속 유지시키게 하고 네티즌들이 양질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정치꾼들만의 리그'를 깨부수고 정치꾼들을 도태시키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네티즌들이 안티동호회를 찾는 것은 그간 정치꾼들에게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고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 판마저 깨지면 네티즌들이 올바른 정보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운영자와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운영자가 흔들림없이 안티동호회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와 더불어 네티즌들이 정보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제가 절실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유지되기에 힘들다고 저는 그간의 통신 경험에서 감히 확언을 해봅니다. 제가 안티카동호회를 길게 논하는 까닭은 바로 님의 다음과 같은 글 때문입니다. "님의 편지를 보고 나서 한 동안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내가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에서 자유게시판은 다중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곳이며 그 곳의 웅성거림과 아우성이야말로 내가 속해야 할 장소라는 생각, 다른 한편에서 이곳의 소란이 갖는 높은 엔트로피를 내가 감당해 가야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라는 물음 사이에 나는 서 있습니다. 님은 어디에선가 자유게시판에의 기고활동을 놀이로 묘사했지만 저로서는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각 개개인의 삶의 놀이라 할지라도) 결코 놀이일 수만은 없는 어떤 긴장감을 늘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정보기관원인지 기자인지 아니면 저의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세계의 주민인지 모를) vnf님의 욕설과 비아냥거림 가운데에는 이런 의미에서 경청하고 음미하며 실천적으로 타개해 나갈 어떤 방향에 대한 제시가 (반면교사의 모습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아래에서 자유게시판을 '무림'으로 개념 정의하고자 하는 문화일보 기사의 시각을 비판한 것은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격투장으로서보다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자유게시판은 자신의 이러한 잠재력을 극히 일부밖에 실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러한 진단은 저로 하여금 자유게시판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다중이 이용함에 있어 (부르주아 정치권, 시장, 공장이 보여주는 격투장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다중의 새로운 힘의 현시로서) 어떤 문화적-윤리적 노력이 필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제가 이해한 님의 글 논지는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사이버 무림 격투장이냐, 이 승패를 넘어선 제 3세력의 또 다른 승리를 엿볼 수 있는 가상 콤뮌이냐의 기로에서 잠재력이 극히 일부밖에 실현되지 못하지만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가상 콤뮌으로 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제 이해가 옳다면 자유게시판이 가상 콤뮌으로 가는 방편 중 하나로써 문화적-윤리적 노력이란 님이 네티즌을 이끌고 가는 제 3세력의 영수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종전의 영수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된 모습으로 종래의 영수를 비판하는 사이버 무림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 동시에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이 격투가 가상 콤뮌으로 가는 '이행'에 작은 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님이 진중권님과 격투하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여기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관심이 있는 동시에 님과 진중권님의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두 분이 극히 제한적인 잠재력의 포로로 매몰될 것인가, 조금이나마 잠재력을 늘일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유게시판은 빨리 응답하지 않으면 응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성급함과 속도의 문화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응답의 지연, 바로 그것이 사유의 공간이며 창조의 시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왜 미리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자유게시판의 프로그래밍 형식이 그러한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애써 무관심하는 인내력을 통해서만 자유게시판의 이 바쁨의 문화를 견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기계과 전공을 한 사람이지만 기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아울러 제가 자동차회사에서 한때 자동차를 파는 영업사원이지만 차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가 하는 차에 관한 상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반면 레이싱을 즐기는 레이싱 매니아들은 대개 운전뿐만 아니라 차구조에도 해박합니다. 그들은 속도의 전사들입니다. 그들이 레이싱을 즐기는 이유와 도로를 질주하면서 나타나는 차상태에 대한 깊은 관심에 대해 제가 바보처럼 '인내심있는' 오염된 관점으로 그들의 사유의 공간과 창조의 시간을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허락된 곳이 아니면 도로에는 제한속도가 있기에 그러한 '인내심있는'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시공간 초월적인'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솔직히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생각하면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속하지 않고 이미 초월한 듯이 폼잡기 보다는 '구체적인 시공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면서 '여유있는 속도감'을 낼 수 있다면 레이싱 매니아들의 감성을 이해할뿐더러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보다 빠른 스피드를 추구하는 까닭은 혹 그 빠른 스피드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닐까요? 자동차 회사들이 레이서를 고용하여 높은 스피드에서 차 테스트를 하는 이유는 저속 스피드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기 위함일 것입니다. 어느 속도까지 내면 차가 뽀개진다더라,라는 것을 레이서를 통해서 판단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인내심있는' 스피드로 시험한다면 하나마나이겠지요? 그런데 자동차 회사들이란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이윤의 창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은 교통경찰의 검열을 피하면서, 자신의 돈과 시간과 목숨을 걸고서 레이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티코를 타면서 평소에 매우 안전운행하는 스타일이어서 레이서들을 보면 질투가 마구 납니다. 너무나 부럽습니다. 저도 저만한 차를 치밀하게 준비해서 무진장 속도를 내고 싶지만,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속도의 한계에 부딪혀서 겁을 내며 속도에 매몰될 때 제가 무섭도록 침착하게 다른 이들이 벽이라고 느끼는 속도를 넘어서고 싶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머리는 가상 콤뮌으로 가고 싶으나 게을러서 차도 준비할 수 없고 겁이 많아 콤플렉스가 심해서 질투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투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질투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몸이 안 따라주는군요. 말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공간에 속하고 있다고 여기나 사실은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그들에게 시선을 던지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끗이 그들을 인정하고 저는 제가 잘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유게시판 중 하나에서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지난 번 제시한 다섯 가지 문제를 아직 풀지 못했고 또 단기간에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저는 님에게 이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한 '레포트적' 답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로서는 단지 우리의 논의가 생산적일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 논의 지평의 협소함을 넘어서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잠정적 논의틀을 제안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각각의 문제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고 있으며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여러 참여자들의 견해를 읽고 분석하는 것도 그것의 중요한 작업들 중의 하나이며 '조그만 실천'님이 제안한 우리모두 사이트 탐방도 (아직은 계획으로서만 남아 있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해답', 바로 그것이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후에 님의 답안에 대해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지금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레이싱을 할 수 없었고 또 레이싱 문제에 대해 단기간에 풀 수 있지도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님에게 레이싱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님에게 레이싱에 대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요구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도 않으며, 나아가 이후 어느날인가 님이 그러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제시한다고 해서 생산적일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님이 레이싱에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나 만일 저와 비슷한 사정이시라면 레이싱을 반드시 차로만 가능한가, 글쓰기라는 통로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통로에서 하면 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긴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범주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오염된 통신 레이싱 문화가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91년부터 통신을 하면서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사당의원 BBS, 르뻬떼라는 좌파세력과의 통신 활동, 통신을 통한 운동이냐, 통신을 위한 운동이냐 등등의 바통모 활동, 그밖에 수많은 게시판과 오프라인에서의 활동... "한편 저는 '조그만 실천'님의 기사를 통해 제가 한 가지 착시 현상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진중권님을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 대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지금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진중권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진중권'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님의 편지에 대한 축자적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님의 편지의 단락 순서를 일부 변경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저는 그간 다중공간 왑 사이트를 그간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 도모하기'로 한몫 잡으려는 지식인 운동이며, 님이 이 사이트의 대변자로 보고 있었는데 혹 착시가 아닌가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도 위험할 수 있다고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조정환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조정환'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대화에 대한 저의 '레이싱 글쓰기적'인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저는 시간적으로 계속 서술하고자 합니다. 이같은 이유는 저는 진중권과 조정환의 양자 지양이야말로 네티즌에게 가장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해바랍니다. "<1>제도 변화의 동학에 대해 진중권: 둘째,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좀 스콜라스틱하다는 느낌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에서 사상전향제를 폐지하려다, 아직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반대로 그것이 어렵자, 고육지책 끝에 양쪽 다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매우 인위적인 타협안일 뿐입니다. 법적 근거나 법철학적 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로 등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한 ad hoc 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조정환: 이 주장에서 님은 아무 것도 논박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저의 생각에 '스콜라스틱하다'는 이름표를 붙인 후 그 곁에 '간단히 생각해' 본 님의 생각을 나란히 대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생각이 님의 생각보다는 <복잡하게 생각해> 본 후에 나온 결론임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점도 딱히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단지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사유하는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습속과 통념,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저는 님이 말한 바,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떤 역관계인가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님은 그것이 의회 내 당파싸움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님은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의회 내의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창비에서 노해문, 그리고 안티조선으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팔십년대때 운동가들이 운동과 캠페인을 구별하고자 노력했던 그 관점에서 보시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님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자유게시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진중권 VS 조정환이라는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이라는 네티즌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인터넷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물론 GNU 강령이다, 해커다, 카피레프트다 잠시 유행했던 때는 있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해 네티즌 중 얼마만한 사람들이 창비 게시판에서 백낙청이 말한다고 관심있게 볼 사람이 누가 얼마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은 길어서 분량을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2>안티조선의 관점에 대해 진중권: 첫째, 안티조선운동이 준법서약서제를 지지할 것이라는 말씀은 별로 타당하지 않은 듯 하군요. 안티조선에서는 이에 관한 합의가 없지만, 이제까지 게시판의 분위기로 보아, 사상전향제는 물론이고 그보다 약한 준법서약서제에도 반대하는 게 대체적인 정서입니다. 안티조선운동은 특정 세계관이나 이념을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그저 간단하게 조선일보의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들이 시작한 일이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굳이 멋 있게 부르자면 "일반민주주의투쟁"이라고 할까. 특정한 사안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예측을 결론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이념이나 세계관이 안티조선에는 없습니다. 조정환: <1>의 주제는 안티조선 논의의 필수적인 구성부분은 아니지만 이 주제는 우리의 논의에서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 현 시기에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 (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안티조선은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좌파들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정말로 진심으로 진지하게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또한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이 신자유주의와 반극우노선에 혹 영합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흡사 한나라당 비판적 지지파나 민주당 비판적 지지파와 같은 위상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준법서약제로의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준법서약제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안티조선의 실천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판단해 줄 것을, 그리고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답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안티조선의 전술은 사상전향제를 반대하되 준법서약제를 보호하며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되 민주질서수호법의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안티조선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저는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인터넷 진출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레이싱적 글쓰기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진중권 VS 조정환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은 그간의 문단 고압적 자세를 반대하면서도 창비 백낙청식 인터넷 자유게시판 개입에 대해서는 보호하며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자신들이 하는 만큼의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님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디만) 제가 예상하기로는 창비나 문지가 90년대 중후반에 한때 시도한, 제한적인 레이싱적 글쓰기 인정 차원에서 봉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의문에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천에서 안티조선은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소위 주요와 부차)'의 관점(독점, 종속을 우선 해결 과제로 설정한 80년대의 단계론적 사고를 상기해 보십시요. 저 자신도 이런 관점에 빠져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일보 우선 타격의 태도를 보이면서 여타 신문이 보이는 경향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은 안티조선에 그에 대한 합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중권님의 개인 견해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권위주의와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그토록 치열한 분노를 표현하면서 준법서약서라는 신자유주의 제도(저의 생각에서 볼 때)에 대해서는 게시판의 분위기를 통해서 읽어내야 할 정도의 불명확한 정서적 반대에 만족하시는 것인지요? 그리고 '안티조선에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념이 없다'거나, 또 아래에서 님이 말하듯 안티조선의 행동에는 특별한 이론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마치 어떤 새로운 운동의 관점이자 방식일 수 있기나 하다는 듯이 주장되는 것은 당혹스럽습니다. 안티조선이 하나의 운동이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표명의 요구는 결코 세계관이나 이념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주의나 극우가 단순한 이념이나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 행동이듯이 신자유주의도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 아닌가요?" 캠페인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님들이 생각하는 한 과연 지금 통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님들의 행위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저도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님이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의 관점을 비판하시고, 그 관점에 빠졌다고 고백하시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당장 님들의 글쓰기나 저나 팔십년대적 글쓰기와 그다지 다르다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글쓰기는 통신 글쓰기라고 볼 수 없지요. 신자유주의가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고 글쓰기라면 이 점에서 심지어 저까지 과연 헤어날 수 있는 문제인가 스스로 의심을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온라인에서의 힘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오프라인의 권위에 의존하여 대리전적인 논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 오프라인적 권위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한 저널리즘적 급진성 속에서만 발현되고 있는 것인가. 상대를 때려눕히고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19세기의 폭로와 비판이 아닌 상생적인 파파라치적 비판과 폭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가. 그 효과란 오로지 일간지에 논쟁이 있었다라는 가쉽거리 취급으로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가. 왜 서준식님이 말씀하시듯 '까고 부시지 못하고' 까고 부시는 척하는 절차적 글쓰기에 민감한가. 필요하다면 절차적 글쓰기를 깡그리 무시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들 연연하는가. 그리도 정말 '까고 부시고자' 한다면 구십년대, 이천년대가 허용된 글쓰기 광장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가. 일간지 논설위원으로 보이는 이도 다중이 사용하는 곳으로 가서 과감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왜 소위 좌파라고 자칭하는 먹물들은 그저 자신을 추종할 것만 같은 박수부대, 혹은 독서토론회, 또는 새로운 중앙조직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광장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그곳에 가서 두 분이 정연한 논리로 치고 박고 싸운다면 그 싸움이 차라리 해볼만한 싸움이 아니던가. 왜 제한적인 공간에서만 글쓰기를 고집할까. 흡사 어항 속의 물고기들이 제각각 영역을 차지하고 나서 서로에 대해 입을 꿈벅꿈벅 벌리는 것으로만 보일까. 너무나 평화롭다. 너무나 평화로우니 짜증이 난다. "님은 안티조선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안티조선운동의 의미는 제가 부과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천이 낳는 효과입니다. 그것이 "일반민주주의 투쟁"일까요? 그것이 님의 말에서는 '멋있게 부르'기 위한 용어에 불과하므로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상호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악들에 대한 투쟁을 특정한 '악'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환원하는 것으로서의 "일반 민주주의"란 실제로는 그 특정한 악과의 투쟁마저도 곤경에 처하게 할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정한 '일반'(general)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저런 유보 없이 다중이 자신의 삶의 존엄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 공화국의 정치형태에 합당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님이 다중에 의해 추동되는 안티조선 운동을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의 감정적 행동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몰'상식'(commonsense)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깁니까? 저는 현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상식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의 다중 속에의 침전물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의 상식이란 우리가 잊어버림으로써만 넘어 설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조선일보는 상식을 잊게 하는 것('몰')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식을 주입하고 상식에 따라 살도록 강제하는 신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commonsense의 또 다른 의미, 즉 공동체적 감각이라는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데, 조선일보의 상식이 다중의 공동체적 감각을 '상식'을 통해 침식하고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적 감각에 대한 이러한 적대의 태도가 조선일보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한겨레신문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매체에 실존한다는 것, 아울러 이런 매체들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제 활동형태들 속에 나타난다는 것에 저는 주목합니다. 이것들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대안은 전망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이동시킬 대체물입니다. 한자 그대로인데 案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책상을 의미합니다)을 창출하는 것이, 삶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다중적 방법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방법은 다른 매체들과 반공감(反共感)적 힘들의 여러 실존형태들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에 극구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길을 닫기 때문입니다. 그 전술의 한계는 동아, 중앙에의 기고를 조선에의 기고를 반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한 강준만님의 방법과 그에 대한 이의제기들에서 이미 드러났다고 저는 봅니다." 좃선일보와 한걸레 신문. 근래에 두 신문이 아닌 다른 신문사 소속 기자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와 안면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바로는 종래 정권이 유지되었다면 부조금이 더욱 늘어났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에는 물론 양당 화환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서 "화환을 치워라, 이 신자유주의자들아"라고 외친다면 나야말로 신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님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안티조선과 개인 '진중권'에 집중하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합니다. 저 또한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을 운동이란 양식으로까지 승화(?)시킬 바에야 한겨레 반대라는 기치가 보다 현 정세에 부각되는 전술이 아닌가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두분 모두 한계를 드러내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반성적인 지점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안티조선이나 다중공간 왑에 글쓰기하는 것을 다시금 고민해야 합니다. 왜 나는 하이텔 플라자 같은 곳에서 글쓰기를 스스로 일년간 봉쇄시켰을까. 신자유주의 반대와 김대중 반대. 김대중 정권 초기때부터 김대중 정권 비판하다가 김대중 욕하다 짤렸는데 왜 지금과 같은 호기에서 왜 그 광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대안이 없어서인가. 몰상식한 다중에 좌절해서인가. 아, 씨발. 나 같은 놈이 재수없다는데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나 자신을 보았고 그 우선순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우선순위를 매기는 등급을 까부수기 위한 고리를 타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꼴을 못봐주겠다는 겁니다. "왜 너만 예외냐?"라는 데에 대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가 반성중이어서 안티조선에서의 글쓰기도 반성중인데 그러던 차에 님의 글을 읽고 이곳에도 한자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안티조선에서의 진중권님과 다중공간 웹에서의 조정환님의 차이란 무엇인가. 내게 그 차이보다는 글쓰기 후 등장하는 오프라인 경력에 더 눈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다중이 몰리는 이유이지 않을까. 정말 진심으로 반극우이자 신자유주의 반대여서 안티조선에 몰리고 다중공간 왑이 몰리는 것인가. 내게는 차라리 안티카 동호회가 훨씬 더 실천적으로 보입니다. 그 캠페인이 말입니다. 그 소비자적 캠페인 한계가 더 현실인 것이 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3>거대담론과 미시담론, 귀납과 연역에 대해 진중권: 님의 글에서 아직도 거대담론에 대한 미련이나 향수를 봅니다. 제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님이 논리를 펴는 방식에 어떤 편향이 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님은 님이 구성해놓은 어떤 이론체계에서 연역적으로 사고를 하고 계십니다. 철학적 근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유 속에 내재된 이 편향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의 지식인들은 가능한 한 구체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대안 위주로 사유하여 그 결과를 이론화하는 귀납적 절차로 작업하는 방향으로 전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즉 책에 들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일상생활의 대화 속에 들어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가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조정환: (쟁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제가 거대담론을 '미련이나 향수'로서 정도가 아니라 방법론의 '하나로' 선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군요. 님은 벌써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담론 비판과 미시담론' 주장을 이미 입증되고 확인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저 역시도 거대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제가 거대한 사회적 직조 속에서 미시성,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 (지식인이 아니라) 자유인을 저의 삶의 입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승인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미시적인 힘들이 거시적인 힘들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변함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배는 미시적 선을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거시적 구조의 직조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산업재구조화, 신자유주의, 지구화 등은 하나의 거시적 흐름입니다. 미시적인 것은 거시적인 것과 긴밀히 얽혀들어 있습니다. 해방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의 관계와 배치구조를 밝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은 '거시 대신 미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역전이 거울놀이의 함정에 빠져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의 이 주장이 미시적 운동들의 문제제기적 힘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연역 대신 귀납'이라는 서술방법론의 역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양자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서술의 필요, 사유의 필요에 따라 조절될 문제일 것입니다. 제 사유가 과연 연역적이었는가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지만 이러한 전제 위에서 보면(즉 연역은 오류다, 혹은 근대적이므로 나쁘다는 관념을 떠나서 보면) 그 문제를 밝히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바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이군요. 흡사 신앙이냐, 종교냐, 혹은 기복이냐, 믿음이냐하는 끝나지 않을 문제를 흡사 자신의 대에서 멈추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두분 다 여겨봅니다. 현실 < 서술 < 사유로 이어지는 이성에 대한 신뢰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두분 다 깊숙이 껴안고 있지 않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의 비판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포스트주의자로 낙인찍힌 - 그람시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면, 아마 트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아니 맑스 사후의 엥겔스서부터 포스트주의자로 해야 정당하지 않을까요? - 이들의 비판에 합리성이 없다고 한다면 바보 취급당하리라 봅니다. 문제는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 계보이겠지요. 지금 논쟁 배후에서 끈덕지게 나오는 계보에 대한 의심이 모든 합리성에 대한 인준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까요. 반성한다고 이 계보가 없어지나요? 오히려 계보는 위기와 반성 속에서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계보에 대한 비판이라면 가장 현실적인 투쟁의 장은 학생운동 총학생회 선거판일 것이고, 노동운동 선거판일 것입니다. 그때 가장 멋지고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들이 눈물겹습니다. 그렇게 선거기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길 일년내내 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 즉 문제는 신자유주의 투쟁이 아니라 누가 신자유주의 투쟁의 선봉, 혹은 주도하느냐가 아닙니까. 선점한 자와 선점하지 못한 자의 싸움. 이 싸움은 얼마든지 지금도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얼마든지 구경가능합니다. 정작 신자유주의 투쟁보다 이러한 싸움을 더욱 즐기는 팬들이 많으니까요. 아, 다시 한번 1980년대 논쟁저서들을 무협지 읽듯이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왜 그때는 그리도 노동운동 자체 설명저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까요? 공동체란 무엇인가보다 공동체 논쟁사, 이런 책이 더 재미날 수 있다는 서글픈 형식. 현실은 진부하고 이빨만 뜨겁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논쟁할 때냐, 나가 짱돌을 던지자로 해석하여 주시기 말길 바랍니다. 다만 안티조선조차도 제가 보기에는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데 흡사 김영삼 퇴임 후 돌던지기와 같 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걸레조차도 다중에게 이미 진부해져서 폭로할 것도 없고 폭로해서 놀랄 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작금에서 현재의 논쟁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성폭력 근절 백인위원회인가의 폭로가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성폭력 명단 폭로도 자유게시판에서 누군가가 언급했듯 아무도 다치지 않고 단지 떴다,라는 것만으로 되는 상황이 서글픈 따름입니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 놈은 살아야 하는데... 다 살잖아요. "<4>정당화의 기술과 사유의 기술 진중권: 제가 보기에 님의 주장은 너무나 강하게 theory-laden 되어 있지요. 그런데 과연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의 문제에 관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굳이 님이 구성해놓고 계신 혹은 구성하고 계신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님이 준거로 삼고 계신 그 이론적 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책에서 얻은 이론은 종종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조정환: 이 문단 전체에서 님은 논증되어야 할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티조선의 문제에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가. 당신의 이론은 이론에 시달리고 있다'. 당연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상식만 필요하고 거대한 이론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님의 목적은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지만, 저의 목적은 상식을 넘어서는 판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님에게는 이론이 필요 없고 저에게는 이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론이란 이러한 상식을 깨는 관점이라 한다면, 혹은 그람시적 표현에 따라 상식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 있다면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면 안티 안티 한걸레에서 비로소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해 하이텔 플라자에 가보시길 바랍니다. 한걸레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이를 이론적으로 제시해봐야 뭐, 그런 것까지 이론을 동원해서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이텔 플라자와 같은 곳은 그래도 중간치 먹물들이 노는 곳이어서 그렇다구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우리 아버지도 한걸레의 정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티 한걸레의 정체도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정치적인 수준이 높다구요. 요즘 유행하는 택시기사들 만나서 물어보시죠. 지금 대개의 논점 핵심은 다음과 같죠. "너라고 무엇이 다르냐." 김대중은 물론 아직 집권조차 하지 않은 이회창까지, 더 넘어서 권영길과 청년진보당까지, 운동진영 전체에까지,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르는 혐오감이 팽배하여 주체는 없고 오로지 안티만이 환영받는 기이한 세계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흡사 노동자가 파업할 때 자본가가 코웃음치며 열가지 사안 중 하나만 수틀려도 파업이 망가지는 상황의 반복. 그럼에도 그나마 해 놓은 아홉가지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대충 구겨넣은 상황.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곪은 한국차와 같은 모습. 당원이 많아야 기만명밖에 되지 않음에도 한걸레를 비롯한 제도언론에서 과도하게 취급해주는 진보정당들. 뻥튀기의 연속성 속에 몸을 내맡기다가 한숨짓기. 그처럼 재판만 돌입해도 성공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을 상대로 열심히 글쓰기하기. 다중을 위한 글쓰기인가, 출판사 편집장을 위한 글쓰기인가? "많은 사람들의 동의 여부는 사실 저의 이론활동과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오직 저 혼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이론적 사유와 연구에 바치기도 합니다. 위 준법서약서에 관한 자료도 오직 저 자신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한 작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령부득인 것은 님이 사유의 기술과 정당화의 기술을 완전히 혼동하고 전자를 후자 속에 해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님은 말합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가]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나]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님은 말합니다.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이런 정당화의 기술이 오늘날 우리들의 두뇌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습니까? 많은 담론들,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보면 상품광고도 이런 정당화의 절차(기술)를 사용합니다. 이 기술에서 저는 님이 저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님보다는 조선일보가 더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반드시 입증해야 할까요? 제게 있어서 사유는 존재자의 구성적 자기언표이기 때문에 정당화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성을 갖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만인이 납득할만한 정당화의 수준을 얻지 못해도 '도는 것은 지구'라고 생각할 자유는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체에 대해서 님에게 말씀드릴 점은 딱 한가지입니다. 저는 님이 팔십년대라면 상기한 대목에서 "해체" 대신 "환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본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님이 말씀하신 '사유'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 또한 고유명사라고 여기는 '사유'가 가장 뛰어나게 정당화된 것이어서 감히 진중권님이나 조정환님이나 조선일보나 기독교나 헤겔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의미라고 저는 봅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조선일보보다 한겨레가, 한겨레보다는 강준만님이, 강준만님보다 딴지일보가, 딴지일보보다 진중권님이, 진중권님보다 조정환님이 더 정당화를 잘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저의 입장에서는 제가 님들보다 정당화를 잘 하는 셈입니라고 스스로를 간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에 대한 제 자신의 모든 환상을 지워가는, 혹은 폐지하는 운동이 사유의 근본운동이 될 것입니다. "<5>자유게시판 토론의 방법에 대해서 진중권: 님이 '토론자료'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경우 님과 논쟁을 하려면 먼저 님이 '케리그마'처럼 선포하신 그 추상적인 문장들을 반박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왜? 님이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준거가 바로 그 '토론자료'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특정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경우 논쟁은 곧바로 세계관의 싸움으로 비약을 하게 되지요. 즉 논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특정 사안에 대해 자기 견해를 밝히시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하셨으면 합니다. 즉 자기의 세계관의 '선포'가 아니라 (이 경우 논쟁은 구체적인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공전하게 되지요) 타인의 논리와 맞물릴 수 있는 구체적인 논증의 형태로 자기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조정환: 이 문단은 저의 토론방식에 일정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요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토론자료를 제가 올린 것은 님과 신정은님이 해석하신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즉 님을 권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제 방식대로 토론을 이끌 어떤 술책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의 문제를 하나의 작업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연구해 보겠다고 했는데 님이 특별히 숙고된 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 문제들에 대한 '답안'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되면 왜 제가 그것들에 숙고된 내용이 담겨있지 않다고 보는지 밝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연구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을 수 있는 님의 다음 기고행위가 고려해야할 지점들을 지적하기 위해 응답이 아니라 자료의 형식으로 그 게시물을 올린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적 분노의 '자명성'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돕자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제 지점은 답을 하는가 마는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어떤 속도로 주어져야 하는가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견해를 밝히라는 님의 요구를 제가 앞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어라는 것 자체가 '서로 알아듣기 위한 실험'이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음'이 언어행위의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소통불가능성을 타개해 나가는 창조적 소통의 노력이 언어활동입니다. 언어는 명백한 알아들음을 통해서도 소통의 길을 열지만 때로는 타자 앞에서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저 막막함이 새로운 소통의 공간을 열기도 합니다. 모든 언어는 실상은 외인어, 비유하자면 외국어입니다. 실제로 저는 님의 말 속에서도 저로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드물지 않게 발견합니다. 예컨대 '상식에 기초하여 전개될 수 있는 실천' 같은 생각은 저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맑스는 '모르면서 행하는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이론과는 무관한 자리에 독립해 있는 '상식'은 앎의 형태인가요, 아니면 '모름'인가요? 오리무중입니다. 쓰고 보니 또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운동을 동일시한 듯한 느낌을 받는군요. 이것은 전적으로 안티조선 운동의 총체에 대한 저의 지식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차차 극복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조그만 실천'님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는대로 응답할 것입니다. 님이 책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한 점 명심하겠습니다. 이 고마운 충고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님에게 상식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어느 차주 동호회의 회원 말이 자신들의 동호회를 anti도 아니고 nice도 아닌 성격으로 규정 해주기를 바라더군요. 그런 구절을 측은하게 읽다가 님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님과 동질감을 느껴 봅니다.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이러한 멘트로 끝맺는 방식에서 진중권님과 조정환님과 저는 한통속임을 강하게 느껴봅니다. 이러한 멘트가 주는 역설을 세 명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도 인지하지 않을까 예상이 됩니다. 저는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는 것'을 이마골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지+이데올로기의 합성용어로 느림이란 소설도 발표하기도 한 밀란 쿤데라가 언명한 것이죠. 언제 광고는 까고 부술 수 있을까요? 은행이 더 이상 이자를 줄 때를 찾지 못한다면 파산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운동이 멈추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근래의 신자유주의처럼. 그처럼 우리의 사랑스런 광고도 자본의 운동에 힘을 입어 열심히 자기복제를 거듭하고 있군요. 저는 제가 마침표가 되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심사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저는 언제 상대가 절대로 논박하지 못할 것을 들이민다는 환상을 깰까요? 아마 제가 이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될 것같아요. 그래야 환상이 현실이 되고 그리하여 환상을 만드는 현실 자체가 부정당할 터이니까. 하나, 포르노그라피는 성범죄의 주범인가? 성범죄자의 대부분이 아마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성범죄자가 아닌 많은 남성들과 일부 여성들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대중이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국이 포르노그라피를 윤리적 목적으로 금지시킬 이유가 없다. 포르노그라피는 성범죄를 유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흡연이 암을 유발할 가능성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포르노그라피는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르노그라피가 합법화된다 해도 포르노그라피에게만 성범죄의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다. 흡연을 하는 대중이 반드시 암환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포르노그라피를 본 대중이 반드시 성범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포르노그라피를 본 일부 대중이 성범죄를 일으키게 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이다. 한국에서 포르노그라피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만일 포르노그라피가 환상이라면 대중은 서커스 구경처럼 포르노그라피를 재미있게 본 뒤 현실로 돌아와 자기 일에 전념할 것이다. 그러나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이기에 대중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방황한다.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이기에 순진한 일부 대중은 자신만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인지 몰랐다고 투덜거린다. 둘, 포르노그라피는 청소년을 타락시키는가? 타락한 청소년이라면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은 많은 청소년들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청소년이 포르노그라피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국이 포르노그라피를 청소년 타락을 이유로 금지시킬 이유가 없다. 교과서에 나오는 주변인으로서의 청소년은 없다. 청소년은 실업교육의 산물이다. 사춘기의 청소년이라면 어엿한 성인이다. 육체적 성숙은 정신적 성숙을 동반한다. 그런데 사회구조가 청소년의 육체적 성숙만을 승인하고, 정신적 성숙을 억압하고 있다. 억압의 이유는 청소년을 사회 구조에 순종할 수 있는 대중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만일 청소년을 어른과 구분을 굳이 두어야 한다면 육체적, 정신적 성숙의 경륜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는 청소년에게 훌륭한 교과서이다. 청소년의 노동을 법률로 승인, 보호하듯이 청소년의 성 또한 승인, 보호하는 취지에서 법률화하면 되지, 청소년의 성을 그 자체 억압할 합리적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청소년의 포르노그라피 보기를 등급화 시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셋, 포르노그라피는 미풍양속을 해치는가? 서구에서는 인쇄술의 발달로 소설과 포르노그라피 분야를 낳았다. 귀족계급에서만 전유되던 외설물이 일부 인문주의자의 일탈로 비로소 포르노그라피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의 지배계급은 정치, 철학과 더불어 포르노그라피를 정치적 이유로 탄압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 목표가 일부 실현되자 포르노그라피는 탈정치화되었고 유럽국가는 19세기 들어서야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단속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이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인간은 똑같이 먹고 싼다,를 자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당국과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 용도를 잃어버리자 포르노그라피를 외면한 인문주의자들의 정치적 타협탓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당국의 미풍양속을 이유로 한 단속은 대중의 미풍양속이 목표가 아니라 지배계급 정책의 변화만을 의미한다. 포르노그라피와 미풍양속은 전혀 상관이 없다. 한국 또한 외설작품들이 정치적 이유로 탄압받았으며, 분단 이후에는 서구 문물의 도입으로 포르노그라피와 미풍양속 단속이 동시에 들어왔다. 따라서 한국의 포르노그라피 또한 미풍양속과 전혀 상관이 없다. 넷, 포르노그라피는 여성을 비하시키는 여성의 적인가?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매춘부에게 말하거나 그리기이다. 역사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향유자는 남성 귀족에서 남성 인문주의자와 남성 대중으로 확산되어왔다. 16세기의 이태리 인문주의자 아레티노의 작품에도 매춘부가 중심인물임을 찾아볼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는 남성이 같은 남성에게 여성비하적인 표현을 하며 히히덕거리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가 피지배 남성이 같은 지배 남성을 전복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반여성적이었다고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경우에는 같은 남성의 입장에서도 혐오의 대상이다. 특히 파시즘적인 경우에는 한층 더 그러하다. 파시즘적인 작품인 경우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제한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자체를 박탈할 근거는 없다. 파시즘 또한 대중의 사상과 표현의 일부로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파시즘을 다른 사상으로 극복하는 방안이 연구되어야지 금지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이 강화되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제가 요구된다. 이처럼 남녀관계 또한 왜곡되고 굴절된 관계를 변화시키는 지혜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차별의 본질적인 문제가 권력관계라면 성차에 의한 포르노그라피 비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정치운동 관점에서 여성운동의 연대체로서 포르노그라피가 훌륭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는 점과 여성운동 관점에서도 포르노그라피를 이용한 정치적 공세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여성운동이 포르노그라피를 규제할 힘도 없고, 에로물을 규제할 힘도 없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대다수 여성들이 여전히 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왜곡된 성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여성운동이 포르노그라피를 승인하되 선별적인 태도를 가지는 전술을 유연하게 구사함이 어떨까 싶다. 아울러 최근 서구 여성운동가 일각에서는 에로티카와 하드 코어의 구별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지만 에로티카와 하드 코어의 분리적 관점이 여성운동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관점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섯, 포르노그라피는 국가의 멸망을 부채질하는가? 역사책은 마지막 왕조 시대가 언제나 성적 타락이 극심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왕조는 처음부터 성적으로 방탕했다. 세종대왕은 금욕주의자이지 않았다. 다만 백성을 잘 요리하듯 궁녀들을 잘 요리한 왕이었을 뿐이었다. 왕조의 멸망과 성적 타락이 굳이 관계가 있다면, 왕들이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 했거나 시대적 대세에 체념하여 '죽기 전에 신나게 놀아 보자' 정도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시대 변화가 문제였지 성적 타락이 문제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논자 중에는 포르노그라피가 자위행위를 부채질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포르노그라피가 국가 구성원의 성적 타락을 부채질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기에 지배계급의 정치적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히려 이들 논자의 말이 맞다면 성이 특정계급에게만 전유되고 대중에게는 자유롭게 영위하지 못 하는 현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아울러 문명의 발달사가 인간에게 진정 이익인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생식으로서의 성에서 유희로서의 성의 변화가 문명의 발달사와 일치된다는 점에서 국가멸망론은 대단히 협소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여섯, 포르노그라피는 종교를 위태롭게 만드는가? 스웨덴 등 북유럽의 경우 기독신앙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기독교의 쇠퇴가 포르노그라피의 번성을 낳았다고 보기보다는 현재로서는 여성해방, 성해방의 결과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청교도나 미국 청교도에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기독교 세력이 포르노그라피, 성해방, 여성해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열성적 신앙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했고, 이는 피억압적 신분인 여성의 지위를 시사한다. 피억압자가 내세의 축복보다 현세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경향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르노그라피는 철학적으로 인본주의, 자연주의, 물질주의, 육체주의, 쾌락주의적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의 신본주의, 정신주의, 관념주의,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할 수 있겠다. 일곱, 포르노그라피는 도덕과 제도를 문란하게 만들 것인가? 일시적으로 가부장제를 강화시킬 수도 있으며, 일부일처제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는 서구에서 보듯 문명의 발달로 쇠퇴일로에 있다. 성적 기교면에서 본다면 현재 나와 있는 여성 잡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견식할 수 있다. 여성잡지의 구매력이 있다면 성적 클리닉 코너가 실체라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라는 도식의 조선왕조 자녀목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여성은 성적 순결에 집착도가 유달리 강하여 성경험 전과 후가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보고가 있다. 이에 따르면 여성이 성경험 후에는 강간당하고서도 신고를 하지 않고, 심지어 강간자와 결혼하는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이 혼전 성경험을 한 경우 사회 생활에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 남성의 경우 한국 여성의 순종미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가 남성 위주로 성억압을 하기 때문에 여성을 굴욕적 지위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논리가 순결 이데올로기와 영계 신화이다. 반면에 서구인은 물론 중국 여성들도 육체를 고집하지 않아 오히려 사회 생활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사랑이 지고지순한 어떤 것이라면 성경험 유무가 문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강간을 당한 여성이 평생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또한 그 여성이 행여 결혼을 하더라도 강간 당한 사실을 안 평범한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자명하다. 포르노그라피는 장르의 성격상 교접하는 남녀의 지위를 따질 수가 없다. 문제는 권력임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 권력이 남성일 수도 있으며, 여성일 수도 있다. 다만 대부분은 남성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는 남성해방 측면에서도 극히 부정적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도덕과 제도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여덟, 포르노그라피를 통한 성해방이 여성해방을 결과하는가? 일본의 경우 포르노피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남성 천국 포르노피아이다. 성범죄 신고율이 극히 낮지만 사회 풍토 때문에 신고율이 저조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의 승인이 곧바로 여성해방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미국의 경우 포르노그라피는 제한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도가 지나친 여성비하적 포르노그라피는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 포르노그라피가 여성해방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 3세계권과 유사한 청교도 사회, 즉 종교 국가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자립과 안전, 복지정책이 서구유럽에 비해 한층 뒤떨어짐을 지적할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의 규제만이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목은 아니라는 점이다. 포르노그라피가 완전 개방되었으며, 여성해방이 제도적으로 90% 이상 실현되었다는 스웨덴의 성범죄는 미국, 한국과 버금가는 세계 톱 수준이다. 이 점에서 포르노피아가 곧 여성해방임이 아님을 웅변한다 하겠다. 한편, 스웨덴과 비슷한 수준인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성범죄가 극히 낮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와 여성해방을 직접적으로 매개시키기보다는 문화적 풍토, 구체적으로는 해당 시민사회를 보다 문제삼는 것이 현명한 듯하다. 아홉, 포르노그라피는 사회변혁에 이바지하는가? 적어도 1791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포르노그라피는 그 자체 정치적이었다. 왕족, 귀족, 교회 등 주요 지배계급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포르노그라피는 효과적이었다. 포르노그라피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유감없이 지배계급의 성생활을 폭로했다. 또한 포르노그라피는 계몽사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포르노그라피 작가와 옹호자들이 대부분 반왕정, 반귀족, 반교회적 입장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왕당파조차 포르노그라피를 정치적으로 무기화시켰다. 그러나 혁명 이후 정치적 열기는 식고 포르노그라피는 공중도덕의 차원이 되어 탈정치, 탈철학화되어 문화산업의 최대시장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포르노그라피는 여전히 그 자체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보수적일수록 포르노그라피는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되며, 사회가 파시즘적일수록 포르노그라피는 탄압받고, 작가가 구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작가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가 백주에 돌아다녀도 사회가 아무 분란이 없다면 그 사회는 상당 수준으로 민주화된 사회가 틀림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포르노그라피는 그 자체 정치적이다. 열, 포르노그라피는 예술이 아닌가? 고려시대의 외설적 작품이 조선시대에 와서 금지되며 예술작품으로 취급받지 못했듯이 예술은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포르노그라피가 나체를 의미한다면 그 역사는 석기시대의 동굴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 인류의 비너스상이 단지 성적 쾌감만을 자극할 목적으로 만들었을지라도 예술이다. 지배계급에게 전유된 예술이 예술이라면 일부 인문주의자들이 프로메테우스처럼 지배계급의 외설작품을 대중에게 전파한 것이 포르노그라피인 만큼 예술이다.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향유되는 대상이 예술로 취급받았다. 모차르트가 궁정에서 연주하지 않았다면 그는 생애 내내 예술가로 대접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르네상스의 포르노그라피 작가 이후로 끊임없이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붕괴시키기를 의도하면서 예술적 실험을 통해 영역을 넓혀왔다. 그리하여 당대에 탄압을 받던 아레티노의 포르노그라피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예술적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포르노그라피도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제껏 그래왔듯이 지배계급은 고전적인 작품만을 인정하고, 당대의 작품들을 탄압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역사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기 위해 대중과 포르노그라피를 분리시켜 단절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그리하여 포르노그라피가 지배계급에 의해 전유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면 민속예술로서의 지위를 갖출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지배계급은 에로물만 예술로 인정했다. 대중문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맥루한의 말처럼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에 의해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급문화만이 지배계급의 문화가 아니라 지배전략으로서 대중문화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포르노그라피이냐, 아니냐가 예술성의 일차적 기준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독자적 장르가 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영화감독과 소설가가 탄압받을 때 그들 중 상당수가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해왔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중산층 껴앉기처럼 지배계급이 영화감독과 소설가를 수용하면 중산층처럼 그들은 포르노그라피를 외면했다. 한국의 경우 작가다운 뛰어난 작가는 마광수 한 명외엔 없다. 영화감독들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포르노그라피 작가, 감독이란 경력은 오히려 그들에게 마이너스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포르노그라피 작가, 감독, 배우들은 무명 시절에 포르노그라피에 출연한 실베스타 스탤론처럼 헐값의 무명작가, 습작가, 배우들이다. 그들이 대부분 형편없는 에로물과 포르노그라피를 만들고 있다. 한국 에로물의 경우 제작사측이 기본도 안 된 감독과 카메라, 배우를 헐값에 사들여 불과 2주만에 하나씩 만들어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포르노그라피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대중 길들이기의 일환이라면 마광수 같은 작가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작가 중의 한 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술성을 정치성으로 오도받고 있는 마광수 같은 작가의 재조명을 위해서라도 사회구조의 변화와 포르노그라피의 승인이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오늘의 문제소설 등의 베스트셀러물이 남한 최대시장인 오피스걸의 오락물일 뿐임을 감안한다면 포르노그라피적 방식을 교묘히 표절하면서도 마광수와 젊은 작가들을 비난하는 일부 기존 작가들의 뚜쟁이적 정치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도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울러 인간의 성, 연애, 사랑이 대중의 관심사라면 기존 시스템에 반발하는 작가들, 특히 예산문제를 고민하는 감독들에게 포르노그라피는 무궁무진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신프로 구입에 앞장설 만큼 대중들에게 아방가르드적인 상인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팔십년대 신촌의 일동장과 대림장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당시 그 여관들의 별칭은 프로덕션이었다. 프로덕션이 없었다면 이 글쓰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눈 감아준 민중의 지팡이 신촌 경찰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라피를 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던 벗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인드라 소금창고에서 그간 진보좌파 사이트에서 놀다 보니 텍스트 마인드에 익숙하여 노하우만을 고려했다. 그런 연유로 멀티미디어 마인드인 노훼어를 고려하지 못하였다. 텍스트 마인드에서는 출처 명만 밝히면 되겠지만 멀티미디어 마인드에서는 위치를 지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는데 동풍회리님의 덧글에 대해 진지하게 3시간을 생각해 본 결과 상기한 식으로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사실 나는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는 취미가 있었다. 이 책을 사러갔지만 이 책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거리다 보면 유익한 정보를 많이 획득하여 서점을 나설 때는 여러 권을 사가지고 오곤 했다. 나는 이런 충동구매에 대해서는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노훼어의 장점보다는 그 편의성 때문에 단점이 더 많아보였다. 그런 연유로 가급적 회피하려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그간의 글들도 시간 나는 대로 상기한 방식으로 출처는 물론 위치까지 드러내게끔 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동풍회리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포 르 노 게 임 96년의 인드라 -------- 게시판은 '혼자 말하기' 다름 아니다, 다만 연결되어 민주적인 듯 하다,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도 버겁다, 무엇보다도 마치 자기만을 위한 글쓰기처럼, 그러면서도 오로지 그대를 위한 연시처럼 글쓰기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채팅은 '혼자 떠들기' 다름 아니다, 다만 흥청망청하니 축제같다, 사람이 매번 바뀌는데 안녕하세요! 처럼 똑같은 말을 하려니 답답하다, 마치 소설 첫장면 같다, 원고지에서 해방되었다면, 구성에서도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작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단편은 한 페이지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직접 만나 더욱 따분한 데이트처럼 말하는 게 지겹다, 서울과 제주 사이의 그 머언 그리움 만큼 그리워 할 수 있는 채팅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스트리터 파이터처럼 인물선택; 뚱뚱한 여자, 대머리 여자, 뼈만 남은 여자, 눈알이 없는 여자 뼈만 남은 여자(클릭) (선택하자마자 그녀가 입력한 모든 정보와 내가 입력한 모든 정보가 부딪치며 안해도 될 무익한 토론이 말끔히 정리된다, 논점만 명확히 모니터에 떠오른다) 이빨 까시겠습니까? 스토리 선택 : 공적인 정보 교환, 사적인 정보 교환, 성적인 정보 교환, 통음난무 통음난무(클릭) - 당신과 씹하기 위하여 내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벽계수처럼 즉흥시를 지어봐요 - 운을 띄워 주세요 - 사이버 - '사'랑을 하고 싶지만 '이'익이 되는 사랑만 하고 싶어서 '버'림받아도 즐거운 사랑만 하고 싶다 - 딩동댕~~~! 장소를 선택하세요 발리, 파리, 청학동, 김정일 집무실 발리(클릭) (화면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 비치는 곳이 나타난다, 뼈만 남은 여자가 걸어온다, 우리는 하루종일 같이 누워 관능적인 농담을 나눴다, 서로 다 알기 때문에 뽀뽀만 해도 오르가즘을 느꼈다) - 이제 뼈만 남은 여자는 지겨워 - 나도 조루뿐인 남자가 지겨워 - 언제 이 프로그램 버젼업이 될까? - 글쎄, 곧 되겠지 남한에는포르노가배회하고있다 포르노는죽음에이르는병이다 포르노는시지프스의신화이다 우리는공룡처럼타살될것이다 ================================================== 사랑과 진실의 연관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연관이다. 객관적 진실은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수많은 주관적 진실을 끌어내고 이것들을 평가하고 우화화해서 역사를 만들고, 어떤 신의 눈으로 해석하여 '실제의' 사건을 각색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객관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객관적 진실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는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없으면 43%의 객관적 진실이 41%보다 더 좋다고 믿어야 한다.; 10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안 반즈" <네이버 이미지 검색> "도덕. 책을 쓰는 데는, 나 자신의 것일 수 없는 강박적인 생각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고, 결국 범인을 캐고 들어가면 우리 모두가 유죄라고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장미의 이름을 썼다; 움베르토 에코" <네이버 이미지 검색> "그래서 그는 유사하게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그가 전혀 위장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사기행각을 벌이려는 게 아니라는 설득력이 있는 증거이며, 그와 같은 방법 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간명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보르헤스" <네이버 이미지 검색> "아니요, 전혀 춥지 않아요. 저는 원래부터 몸에 열이 많은 여자인가 봐요. 한겨울에도 전 맨발로 다니는 것이 좋은 걸요. 잠을 잘 때는 물론 홀딱 벗어야만 기분좋게 잠들 수 있구요. 저는 잠옷을 입고서 잠자리에 드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낮에 옷을 입고 사는 것도 억울하고 지겨워 죽겠는데, 왜 잠자리에서까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일까요?; 졸립고 지루한 일장; 마광수" <네이버 이미지 검색> 졸립고 지루한 글쓰기가 지금처럼 환영받는 때는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이들은 포기하고 나중에 읽어야지,하고 글읽기를 단념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극소수의 이들은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환영이란 단지 이런 극소수의 모험가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일 뿐이다. 세상이 변했을까? 그들은 내게 이십년 전에도 말했다. "나니까 읽지." 그는 이 말을 던짐으로써 내 글에 대한 특별한 독자로서, 주석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문제는 있다. 그들 중 일부가 프랑스 철학자 글을 번역한 책을 읽기보다도 더 힘들다는 내 글에 빠졌을 때 발생하는 현상 중 하나가 남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남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가는데... 그리고 쓰는 이도 이해가 가는데... 왜 그들은 이해를 못하지? 우리는 또한 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지? 공리가 달라서? 아니다. 우리는 같은 공리를 내세우고 있다. 같은 전제 말이다. 그런데 같은 공리 속에서, 같은 전제 안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있으니 황당무계할 수밖에. 대개는 다른 공리를 내세워 불일치의 평행선을 달린다고 하지만... .............. 하여간 왜 이 글을 썼느냐. 숨겨져 있다고 믿는 것일수록 도둑놈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다. <네이버 이미지 검색> .................... 세상이 변했다, 나니까 읽지에서 나도 너처럼 쓰지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그리하여 모두가 이해하는 세계로. <네이버 이미지 검색> <출처 : http://blog.naver.com/kkonal/140000353198> '문제삼기'를 문제삼기 : 상상력 97.6.29 인드라 *예전에 경북대 언론에 의뢰를 받고 이런 주제로 글을 기고하였는데 경북대 교지(교지로 기억한다)가 회수되고 편집장은 징계를 받는 등 진통을 겪은 바 있다. 흥미있는 점은 이것이다. 나는 칠년 전부터이던가 이런 활동을 접고 제도언론이든, 어디든 기고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점을 밝힌다면, (지난 2002년 월드컵 때 문의가 좀 왔지만 모두 정중히 사양했다.) 서울대, 고대, 연대, 이대 같은 데서 원고 의뢰가 들어온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이다. 반면 성균관대이니 중앙대이니 성신여대이니 덕성여대이니 명지대이니 하는 데서 원고 의뢰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또한 지역적으로도 보자면, 호남, 충청 지역 대학에서는 원고 의뢰가 없었다. 반면 영남 지역 대학에서만 원고 의뢰가 왔다. 아울러 한총련 지지성향으로 보이는 성향의 대학언론사에서 원고 의뢰가 들어온 적이 없다. 하여간 그 원고 의뢰하는 사람들이 나보다 더 나의 정체성을 아는가 보다. 파벌에 얽매여 사는 걸 누가 좋아하랴. 나 역시 그러하다. 둘째 아이 돌잔치 때 올 사람이 없어서 걱정할 정도다. 조촐한 가족모임을 선호하지만, 분명 부모님이 이를 싫어하실 게다. 나는 한국적 개념의 친구가 싫은 편이다. 한국적 개념의 친구들은 너무 지나치게 가까이 접근한다. 전체주의가 여전히 강해서인지 모르겠다. 나는 이제까지 아내 나타샤의 허락이 없으면 어떤 친구도 집안에 들여놓지 않았다. 부모도 미리 연락하고 와야 할 정도다. 나타샤가 어제 내게 이런 말을 할 정도다. "교회에 다시 나갈까 생각이 들어." 나타샤는 모태신앙자이고 청소년 시절 교회에 다녔지만 이후 교회에 나가지 않았다. 하나님을 여전히 믿지만 교회를 믿지 않는다나? 아무튼 그런 나타샤가 순전히 사회생활을 위해서 교회라도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 이 사회인 셈이다. 왕따, 패거리 싫다고 그거 안 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남들이 다 패거리를 이루고 있으니 자신만 이상한 취급 받기 싫다는 게 문제... 부모님은 아직도 내게 말이 잘 통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상식적으로 통하지 않는다고. 그나마 아내 나타샤가 있어서 내가 세상과 연을 맺고 있는 셈이다. 다시 생각해 봐도 아내 나타샤 때문에 내가 세상과 소통할 수 있는 것 같다. 하긴 내가 봐도 내가 지나친 감이 있다. 얼마 전에 좀 아는 사회당 사람이 결혼한다고 했다. 결혼식에 갈 것이냐고 해서 내가 안 간다고 했다. 왜냐? 가니까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는 것이다. 훗날 그의 견해에 대해서도 사안에 따라 반대할 수도 있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거다. 무슨 내적으로 긴밀히 짝짜꿍하는 것으로 비친다는 거다. 가령 어떤 이와 나는 거의 모든 사안에 대해서 서로 견해를 달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결혼식에 한번 가는 등의 행보를 했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게시판의 적들이 엮어볼려고 하는 것이 너무나 짜증이 났다. 아무튼 나중에 심심해서 그 친구가 찾아오면 후하게 대접하겠지만 나는 이런 문화에 다소 부정적이다. 다만, 나는 누가 죽은 것에는 가봐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최근 김일우 선배가 죽었다는 뉴스를 접했다. 김일우하면 모를 것이지만 엽기적인 그녀에서 일인다역을 한 그 사람이라고 하면 다들 알 것이다. 내게는 잊지 못할 분이다. 고교 연극반 시절 최종 리허설 때 그분이 연극을 지켜보신 뒤 한마디를 하셨다. "다 좋은데 저 친구 뭐냐? 빼!" 그게 바로 나였다. 결국 나가긴 나갔으나 대사가 대폭 줄었다. 하하. 이런 악연이긴 하지만 지금도 나는 그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동문회이니 뭐니 이런 걸 전혀 좋아하지 않지만 돌아가셨는데 찾아뵙지 못하니 자책감이 든다. 멀리서 고인의 명복을 빈다. 하여간 전에 어떤 게시판에 쓴 일이 있지만 내가 유럽에 배낭여행갔을 때 너무 편안했다. 먹거리만 제외한다면, 마치 고향에 온 착각이 일 정도였다. 좀 따분하고 지루한 세계이긴 해도 그쪽이 나랑 맞는 세상이긴 하다. 내가 처지가 이래서 그냥 살고 있긴 하지만 여건만 된다면 이민가고 싶다. 나는 향수병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다! ㅋㅋㅋ 출처 :http://blog.naver.com/santaria/40000467448 오늘날 글쓰기를 하는 자에게 부과된 것은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포스트 모더니즘도 아니다. 또한 전산망 문학이든, 사이버 문학이든, 통신 문학도 아니다. 심지어 편집증이나 정신분열증도 아니다. 다만 상상력이다. 나는 지난 팔십년대에서 오늘날까지 문학 변두리에 있으면서 요즘처럼 한 목소리로 상상력을 부르짖는 시대를 겪어보지를 못했다. 모두 하는 말이 다르지만 결론이 일치되었다. '너희의 상상력은 틀렸고, 우리의 상상력이 옳다.' 팔십년대 문학에서 가장 큰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리얼리즘적 논의였다. 아울러 이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 전형성 확보였다. 즉, 작가에게 부과된 주체가 치열한 현장을 궤뚫어 마침내 총체적인 현실을 담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팔십년대 문학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릴없이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발자크의 작품과 세계관,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브레이트의 적절한 내용과 형식, 작가 동맹 등등에 정열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필자 주 : 자연스럽게 쓴 우리라는 표현이 낯설어보인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나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해야 했다. 이런 논의와 무관하게 개별 작품들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팔십년대를 살았으면서도 팔십년대에 논의된 바 없던 이문열 문학이 슬그머니 등장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문열 문학을 영화화하는 사람들 면면이 이런 리얼리즘 논의에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사람들이었고, 이문열 문학을 계승하는 사람이 가만 보면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로 90년대 문학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지겹지만 다시 떠올려 보자. 마광수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던가? 문학적으로 볼 때 형편없지만 구속에는 반대한다. 장정일에 대한 평가가 어떠했던가? 문학적으로 볼 때 형편없지만 구속에는 반대한다. 그렇다면 이문열은 어떠한가? 문학적으로는 탁월하지만 사상에 문제가 있다. 이 무슨 이중성이란 말인가? 아니면 아니지 이런 묘한 장치가 어디 있다는 말인가? 그러하니 후대 문학도들이 가야할 바는 무엇인가? 상상력? 웃기고 자빠졌네. '문학적'이라는 말에 맛이 가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야. 팔십년대 리얼리즘? 우습게도 문학을 지배하는 사람들은 단지 폼만 잡았을 뿐이야. 사람들이 하도 죽어가고, 사람들이 하도 투쟁하니까 옆에서 술먹기는 괴로웠을 따름이라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따름이라고. 한국 문학에서는 상상력 이전에 무언가 큰 걸림돌이 있다. 서로 다 알고 있지만 관습적이든, 그 무엇이든 금기시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말은 바로 스키조를 평한 조선일보 기사에서 나온 듯 싶다. '선생에게 대들지 말 것.' 나 또한 상상력 자체를 걸고 넘지는 못한다. 다만 상상력 논의 이전에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이다. 세계 어디에 소설 썼다고 하여 작가가 구속되는 경우가 있다던가? 만일 이렇게 하여 구속되었다면 작가는 양심범 혹은 정치범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시기에 그러했듯이 말이다. 그러나 최근 사태는 묘하게 돌아간다. 그들을 양심범과 같은 정치범으로 취급하기 보다는 사법당국과 정권을 옹호하는 분위기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마치 사법당국과 정권이 명분으로 내민 이야기를 수긍하듯이 말이다. 청소년 보호와 공공생활에 해치기 때문? 말도 안된다. 전세계 어느 정권도 이러한 이유로 소위 음란물을 규제하지는 않는다. 다만 명분이다. 이러한 명분뿐이라는 점을 잘 알기에 인터넷에 포르노가 범람해도 미당국이 쉽게 손대지 못했다. 내가 알기로 어느 나라이건 포르노에 대해 엄밀한 객관적인 기준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다만 치열하게 표현의 자유와 현실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최근 부산사법당국은 아나이스 닌의 작품 등에 대해 표현이 저속하지만 세계적인 문학이라는 이유로 면죄부를 주었다. 국내 진도희는 젖소나 몰고 찬밥 신세를 받는다면 - 그녀가 연극활동으로 진지하게 연기력을 닦고자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사 람은 거의 없다. - 국외 이승희는 불과 2~3년전에 찾아볼 수 없었던 대접을 지금 받고 있다. 최근 십대들이 거의 책을 읽지 않는 반면 가판대의 사건과 진실을 많이 보는 데도 이에 아랑곳없이 가판대는 안전하다. 따라서 최근 상상력 공간 논의는 가판대 수준에서 말해야 한다는 점이다. 가판대 상상력만 용인되는 한국적 현실에서 그 이상을 이야기한다는 건 형이상학에 불과하다. 역사로부터의 탈출? 필요없다. 가판대 수준만 탈피하게 해달라. 개인의 분열? 필요없다. 가판대 수준에서 딸딸이치지 않게만 해다오. 작가의 양심? 필요없다. 구속되는 건 억울하지 않으나 제발, 쓰레기 취급만 하지 말아다오. 상상력이란 자유로운 시공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시공간은 무척이나 협소하다. 드넓은 상상력을 요구하려면 우선 드넓은 상상력 공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암만 SF이나 추리이니 영역을 확장하면 무슨 소용인가? 그 밥이 그 밥이라면 말이다. 소재의 이동밖에 더 되겠는가 이 말이다. 더군다나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말에 개인을 드러낸다 함은 무슨 말인가? 지난 시기처럼 전체주의적 통제 속에 갇혀 비판함은 이러한 개인드러내기보다 훨씬 저열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전히 개인이 세계에서 어떠한 의미인가 고려한다면 여전히 개인의 드러냄은 가변적인 인생에 대한 이야기이지, 가변적인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정일이 말한 바 소설가가 여관주인이 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운동가가 갑작스레 뽕먹은 마약환자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너무나 소중히 하는 나로서, 리얼리즘 못지 않게 모더니즘 전통을 애호하는 나로서 (이러한 지점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의 내 지위를 말해주고 있다.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더니스트들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다. 그들은 늘 환각된 '개인'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하기가 겁이 난다. 레닌은 예전에 한 편향을 경계하기 위해 다른 편향으로 꺾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페미니즘 논쟁도 맑스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 사이에서 춤추고 있다. 이같은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팍팍 꺾이는 회전들. 영화감독 장선우식의 좌충우돌 배신. 이러한 회전들에 대해 내게 말해줄 수 있는 문학평론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러한 회전이 함의하는 물질적 기초를 말해 줄 자 그 누구인가? '상상력? 그것은 현재 쌍욕으로 존재할 뿐이다, 씨발.' * 근래 동네 비디오 가게가 문을 닫았다. 장사가 안 된다고 한다. 또 무슨 디제이가 구속되었다고 한다. 요즘 과연 누가 에로비디오를 빌려볼까 생각이 들곤 한다. mp3문제처럼 모두가 공존하는 방법이 나왔으면 싶다. 하지만 무슨 디제이를 구속시키는 건 그쪽 업계의 치열한 암투로 보이는 건 나만의 일일까? 아무리 내가 진도희 팬이었다고는 하나 요즘 누가 한지일씨의 젖소부인에 흥미를 지니겠는가? 아무튼 무엇을 하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다. 좆도 없는 척하는 자의 자질구레한 꿈/인드라의 꿈 파천황기(破天荒記) 2004. 6. 14. 15:2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3211571 통계보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우연히 '같은 대상'을 바라본다는 것은 흥미있는 일일 것이다. 언젠가 움베르토 에코의 "세상의 바보들..." - 인터넷에 이 글 전문이 있다 - 을 읽고 이런 생각이 든 적이 있다. 에코는 노출증이 있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관음증이 있는 이들은 관음증에 유별난 관심을 표명하며 비판적이다. 노출증이 있는 이들은 노출증에 특별한 관심을 표명하며 비판적이다. 어찌되었든, 스펙타클의 사회라 불리든, 무엇이든 '일기쓰기의 사회화'는 진행중이라는 점이다. 나는 일기쓰기의 사회화에 긍정적이다. 그 끝이 어디로 귀결할 지는 이제 고작 블로그 수준에 도달한 현재에서 판단하기는 어렵지 않나 싶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더 읽을 이들은... INDRA 1998-03-13 버전업 겨울호에 실린 글입니다. 그때와 다른 건, '움직이게끔 하지 않는 느낌이 없다면'에서 '움직이게끔 하는 느낌이 없다면'으로 바꾼 게 전부입니다. (의미가 바뀐 것이 아니라 저의 실수.) 이 글과 신춘문예 비평으로 당선된 백민석론과 비교하시면 재미나리라 봅니다. 참고로 몇 군데는 그의 글들을 패러디하였지요. (가령 0 단락 같은 경우는 백민석 믿거나말거나박물지의 단편 한 부분을 패러디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글을 쓴 것은 구십년대에 많이 했는데 요즘은 거의 하지 않습니다. 뭐랄까요? 오만함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내가 할 때는 혼자 하니까 재미있었는데 이제 많은 이들이 하니까 흥미를 잃었어요. 아무튼 이것이 패러디라는 점을 아는 사람은 백민석 책을 '읽은' 사람만 아니까 말했을 따름입니다. 백민석 책을 '본' 사람은 그래도 모르겠지요, 모. ------------------------------------------------------------------- 좆도 없는 척하는 놈의 자질구레한 꿈 - 16 믿거나말거나박물지를 통해 본 백민석론 0. 글을 시작하기 전 여러분에게 드리는 짤막한 서간문 제 새로운 별명은 황태자입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황태자암 말기 증세 환자라고 해야 하겠지만 부르기 쉽게 그렇게 할 따름이지요. 온몸으로 자신 이 잘났음을 증거하기 위해 PC 모니터 앞에 앉아 한가롭게 자판기를 두들 기는, 여러분의 황태자인 제가 여러분에게 울먹이며 고백합니다. 저와 제 가 족은 어느 때보다도 인생을 즐기며 산다고. 저는 실제로 제 인생의 인간적 차원을 뛰어넘어 인간을 부르짖지 않아도 되는 차원으로 향했습니다. 어린 아이의 한계를 초월한다는 것은, 놀이의 모든 순간을 폼생폼사라는 한결같 은 길을 걷느라 탕진한 여러분 같은 사람이 볼 때 대단히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가령 제 비평행위도 이러한 차원인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일어난 사건과 제게 일어난 사건이 맞닿아 시간을 만들어내어 긴장을 지속 시키는 동시에 대체 누구의 시간이냐고 질문하는 행위인 셈이지요. 1. 좆도 없는 척하는 놈의 자질구레한 꿈에 대한 일상적 편견? 문화평론집을 내고 다음 책을 언제 다시 낼 지 장담할 수 없는 이 상 황에서조차 나는 맑스가 좆도 없는 놈들을 위해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별의미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지금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게 아니다라는, 맑스가 좆도 없는 척하는 놈들을 위해 산 것이다라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맑스 언급을 한 만큼, 어쨌든 제품을 생산할 수 있었던 것은 주문하고 읽고 싣게 해주신 교양이 충만한, 좆도 없는 척하는 놈들 탓이다. 맑스가 좆도 없 는 놈들을 위해 산 것이 아니다라는 평범하지만 이상하게도 줄곧 오해되어 온 이야기를 이 자리에서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좆도 없는 놈인지, 아닌지를 알려면 바지를 까내리고 팬티를 벗긴 다음에 확인해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세상 일이 어디 뜻대로 되는 것 이있던가. 어떤 놈이 서울대를 나왔건, 서울예전을 나왔건, 문학과 지성사 에서 등단했건, 이름도 생소한 출판사에서 등단했건, 제도 언론에다 보도자 료 왕창 뿌려 알려졌건, PC 통신에다 지루하게 혼자 썰을 풀어 알려졌건 중 요한 건 이것인데 정작 누구도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하긴 학벌, 등단, 빽 등의 레떼르가 중요하니까 큰 불만은 없다. 가령 내가 얼마나 글을 잘 쓸 수 있는가 여부와 상관없이 이 대목까지 읽은(메롱!) 독자들도 마찬가지로 불만이 없을 것이다. 아무튼 청탁자가 통신 메일로 내게 연락을 했다. 신예 작가 비평을 기 획하는데 백민석 비평에는 내가 적임자라는 것이다. 좆도 모르는 놈을 내 어찌 비평하랴 싶어 몇몇 지인들에게 실토를 하니 나와 작가 백민석이 잘 어울린다는 것이다. 그런가 보다, 내 알 바가 아니다라고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마감일이 닥쳤다. 할 수 없이 동네 서점에 가서 백민석의 믿거나말거 나박물지 달라고 하니 주인이 아이들 보는 것 아니냐며 아동도서코너로 가 서 세상이 요지경따위 책들을 소개하는 것이다. (씨발 좆도 되는 게 없어) 그러나 제목만 보고 훌륭하게 판단한 동네서점 주인의 안목에 경의를 표할 지언정 욕할 필요는 없었다. 책을 구할 수 없어 차비를 들여 대형서점에 가 서 우선 베스트셀러란을 찾으니 역시 없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작심하고 미 는 신예작가 책이 없는 것이다. 신문에도 났는데, 하다못해 전국 문창과 학 생들 이름 팔아먹은 책도 베스트셀러란에 있는데. (물론 안 팔린다고 좋은 책이라는 보장도 없다.) 책 앞장을 펼치니 쓸 때는 몰랐는데 쓰고 보니 쪽팔 린 느낌이 들어 한마디들 하는 저자 후기가 있었다. 그리고 뒷장을 펼쳐 어 느 평론가와 술을 먹고 헛소리를 부탁했나 싶었더니 이외로 모 소설가가 평 론을 했다. 무슨 특별한 의미가 있지 않지만 나는 동료 작가가 평한 소설을 선호하는 편이다. 책을 사들고 들어와 읽다가 지겨워서 전자오락하며(치졸 해! 졸렬해!) 든 생각이 16권짜리 무협지를 본 느낌이다. 다이어트 무공하다 주화입마에 빠진 주인공이 기력을 회복하고자 동료의 도움으로 오줌의학 치 료를 받기도 하고 영물이라 알려진 전설적인 완다를 찾기도 하고 기방에 들 려 방중술에도 탐닉하다 마침내 음협 인물이자 신비인인 스승 펨프를 만나 무공수련끝에 그의 아들을 누르고 차세대 장문인으로 오른다는 이야기라 고 정리될 수 있겠다. 무협지를 난해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더러 있겠지 만 사정을 아는 사람들은 그다지 어려움을 느끼지 않으리라. 문체 또한 무 협지 스타일이지만 현재 세계 중심이 중국이 아니라 서구이다 보니 꼬부라 진 말들 사이로 서민적 어투를 적절히 섞은 듯 싶다. 그런데 이런 소설이 주류 문화를 공격하는 실험적 소설이라고 하니 나는 알 도리가 없다는 것이 다. 물론 중산층의 너절한 글읽기 취향과 구별짓고자 하는 일부 소수 중산 층이 환호할만한 구석이 없는 것이 아니다. 이런 글쓰기야말로 가장 최고의 의도를 가진 가장 나쁜 글쓰기, 즉 키취적 글쓰기이니까. 다만 무협지 형식 을 벤처, 혹은 패러디했다는 이유만으로 평가받는다는 건 납득하기 힘든 일 이다. 왜냐하면 이미 그러한 시도들은 그간 수도 없이 주류에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나는 이 단편 소설들이 전통적 서사구조를 파괴했다 는 의견도 받아들이기가 힘들다. 서사가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일회용 껌이 아니라면 말이다. 아무튼 자본주의에는 공짜가 없다.글 쓰면 돈이 나와? 이런 생활의 좌절에 작가들 답변. 나오긴 나오는데 때에 따라서는 6개월 어음처럼 뒤늦 게 나와 중소업자와 이해를, 매달 나오기도 하여 봉급생활자와 이해를, 아예 나오지 않아 실업자와 이해를 같이 한다. 그러다 대박이 터지면... 그래서인 지 이 작가는 솔직하게 '꼬불쳐둔 것 있으면 내놓으라' 소리친다. 돈 말고 다른 것?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했으면서도, 그 어떤 것들.' 그 아이템들 앞에서 작가는 답한다. '날 병원에 데려다줄래?' 거기에 혹시 법의 열망이랄 까? 대박 터질 게 있을까. 2. 좆도 없는 척하는 놈의 자질구레한 꿈에 대한 사회주의적 편견? 내가 아는 한국 중산충의 기준은 가족 구성원 중 딸내미가 별달리 학 업에 관심이 없음에도 대학에 보낼 수 있는가 여부이다. 또한 중산층을 넘 어 상류층으로 행세하는 기준은 헬스, 골프, 콘도 회원권, 그리고 도장 많이 찍힌 여권을 두루 갖추고 있느냐 하는 여부이다. 이런 기준은 최근에야 비 로소 자리를 잡았다. 그 이전에는 구분할 만한 구조가 불안정했다. 따라서 특정 계층을 위한 문학이란 말이 구라가 아닌가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하니 리얼리즘이다, 모더니즘이다 하는 논의도 한량들의 철없는 짓거리 정도로 여길 수밖에 없었다. 좀 봐준다 싶게 이야기한다면 유학갔다 온 이 들이 먹고 살 길이 막연해 자기 위안하려는 수작 정도로 여겼을 뿐이다. 그 러나 지금 현실이 어디 그러한가. "남자애들은 졸업하고 나서 군대에 가든가, 아님 놀고 있죠. 그리고 여 자애들은 졸업하자마자, 그 어린 나이에, 그 나이 많은 아저씨들과, 결혼을 하든가 놀고 있죠.; 음악인 협동조합 1; 175쪽" "진정한 펑크나 그런지 는 아빠가 빵에 있고 엄마는 주정뱅이인 그런 애들; 음악인 협동조합 1, 171 쪽", "기껏해야 과외나 받고 독서실에나 다니던 중산층의 아이들이 빈민 계 층의 음악을 한답시고 날뛰는 우리 풍토; 음악인 협동조합 1, 172쪽", "심지 어 서울대 출신도 있다더군...하버드 졸업한 백인 앵글로색슨이 갱스터 랩을 한다는 얘길 들어봤냐?; 음악인 협동조합 1; 171쪽", "아버지 빽이 없이 어 떻게 이런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지; 음악인 협동조합 1; 178쪽" 한총련에 반대하는 관심보다 무관심이 더 큰 중산층 자제들의 놀이터 인 대학사회에서 진정한 혁명이나 운동을 운운한다는 것부터 이상한 일이 다. 그렇다고 아빠가 노가다고 엄마가 파출부인 그런 애들이 주축이 되어 새로운 혁명을 준비하자는 말도 일리가 없는 건 아닌데 그 이면에 그런 주 장하는 이조차 어떻게 아버지 빽이 없이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겠는지 당 연히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이겠다. 운동도 경력이 중요한 데 가능하다면 서울대 출신이 좋다. 물론 개중에는 밑바닥에서부터 일어나 자수성가한 이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디까지나 경제성장 시대 이야기이다. 여당 대통령 후보 아들이 병역 면제받았다고 들썩일 때 많은 젊은이들 생각 은 정직, 단순했다. 역시 아버지 빽은 좋고 봐야 해, 씨발. 왜 꼭 씨발이 들 어가는 것일까. "젊었을 때의 꿈이 동경대에 입학해서 국회의원이 되고 나중엔 일본 총리가 되는 거였지요. 물론, 대학은 문턱에도 못 가보고 결국은 나폴레옹과 히틀러를 숭배하게 되었구요.; Green Green Grass of Home; 56쪽",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선, 히틀러와 박정희를 흠모하게 되지요.; Green Green Grass of Home; 57쪽", "그때의만오천 명 모두의 질문은 한결같았죠. 音協 은 모두에게 항상 접근 가능하다고 하던데?; 음악인 협동조합 1; 183쪽", " 音協은 그 미끄럼틀의 최종 바닥 같은 데죠. 밑바닥 중에서도 밑바닥이라고 난 봐요. 난 이 최고의 밑바닥에서 안정된 삶이 뭔지 알았어요.; 음악인 협 동조합 3; 219쪽", "미안해, 나쁜 짓이란 것은 알아, 하지만...네 머리가 맘에 안 드는 걸 어떡해.; 음악인 협동조합 1: 185쪽", "형이 이해할 수 없다 해도 어쩔 수 없어요, 어차피 우리를 둘러싼 이 세상도 이해 못 할 곳인데 어째 서 우리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요?...텔레비전에도 나와요.; 음악인 협동조합 1; 185쪽" 오움교 교주 아사하라나 히틀러나 박정희 모두 어려운 환경에서 자라 나 긴 칼 차고 폼나게 살아보려 했던 사람들 아닌가. 그러하니 좆도 없는 놈들은, 인생의 어느 순간에 이르러 독재자를 흠모할 수밖에 없다. 그외 상 상할 도리가 있는가.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진리 앞에 서면 죽기 아니면 까 무러치기이다. 하지만 이조차 잘 될 턱이 없다. 세상은 돈놓고 돈먹기. 누구 나 접근 가능한 것이 아니다. 돈없는 놈은 용을 써도 힘들다. 복권 당첨이나 바래야지. 밑바닥에서 깨달았으면 쓸 데 없이 기대하지 않으면 된다. 그런데 도 좆도 있는 놈들이 이젠 좆도 없는 척하면서 신세대식 설교를 하는 것이 다. 밑바닥에 오면 뻔한 이야기를 말이다. 좆도 없으면 금방 아는데. 젠장할, 좆도 있는 놈들의 따분한 설교투를 참고 들었는데 살다 보니 좆이 있네 없 네 하는 그런 구별마저 우습게 만드니 질릴 수밖에. "이따위 직장 생활을 계속하게 된다면 난, 얼마 후엔, 살인자가 되어 있을 거야.; 술집 까스등; 121쪽", "물론, 복잡해. 정신 못 차리게 복잡하다는 건 나도 알아. 직장 생활이란...도저히 제 정신으론 해내지 못할 것만 같은 일들에 자신을 익숙하게 만드는 것에 다름 아니지... 직장, 그 자체가 되는 거야!; 술집 까스등; 124쪽". "신의 것이라면 무엇이든 이 지상에서 쓸어버리 고, 평평하게 만드는 것이지...모든 것이 꼭, 서로 관계가 있어야 하나?; 술집 까스등; 128쪽", "플로리다의 햇빛 한 줄기였을 뿐이다.; 플로리다산 오렌지 주스; 136쪽" 그러나 이 또한 기만이다. 나는 과연 좆도 없는 놈인가. 과거에는 생산 수단을 소유하지 않은 자면 누구나 되었었는데 이제는 생산수단을 소유하지 않았지만 언제든지 생산수단에 접근가능한 자가 제외된다. 그러자 우리 자 신 모두가 좆도 있는 놈인 동시에 좆도 없는 놈이 되고 만다. 모두가 자본 주의의 노예가 되었다. 과거에는 그나마 포로여서 딴 생각을 품을 수 있었 는데 말이다. 예전에는 근거를 찾아 공간적 이동을 통한 해방을 찾았는데 이젠 그 근거조차 의심스럽다. 왜냐하면 근거가 있으면 즉시 기존 세계에 편입되니까. 그러하니 해답은? 균열된 그대로의 세상? 카오스? 그러나 무의 식의 패턴이 우리 세계의 전부가 아니듯 무질서의 패턴도 마찬가지이다. 아 쉽게도 이 작가 또한 어떻게 정신분열을 조작하는가 고민하다 본능을 가장 한 의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장정일 문학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 하는 듯싶 다. 초반 도입부에서는 한껏 긴장감을 주다가 결말에 가서 불철저하게 끝장 보기를 하는 듯 싶기 때문이다. 전도양양한 신예 작가라면 어찌 끝장보기를 마다하겠는가. 다만 팔십년대때 맑스 대신 레닌만 운운했듯이 구십년대 또 한 마광수 대신 장정일만 떠들고 있는 상황에서 택한 어중간한 선택이라 하 지 않을 수 없다. 왜? 소비해야 하니까. 그것이 키취의 본령일진저. 키치가 추구하고 있는 것은 아름답다거나 진실된다거나 선하다는 것이 아니다. 알 려지느냐이다. 이 역시 권력과 무관하지 않다. 권력은 타자화하면서 신비함 을 잊지 않는 법이다. "그건 사람들이 자기가 모르는 어떤 걸 고양이가 알 고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야...그런 걸 신비라고 불러.; 요람 속의 고양이 둘; 109쪽" 작가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등장인물이 타자화된 작가 자신 이라면 타자화되지 않은 '나'는 소설 속에서 무엇을 하고 있나. "자네도 그 걸 보고 있나. 내가 펨프의 최후 진술을 나지막이 따라 중얼거려보았다.; 음 악인 협동조합 4 ; 255쪽" 남들 보는 걸 보고 있어야 먹고 사는 구경꾼 인 생. 알려질려면 보다 많은 걸 보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돌아다니기 보다 앉 아 있는 것이 더 현명한 것이다. 나는 작가의 처세술이 부럽기만 하다. 나도 그처럼 중얼거리고 멋지게 살아야 하는데. 이런 까닭에 나는 여지껏 어느 소설에도 교훈이 없다는 소리를 듣지 못 했다. 아마도 그건 편견이 없다는 편견, 이데올로기가 없다는 이데올로기와 같이 보다 세련되어진 용어 사용 이라고 볼 뿐. 3. 좆도 없는 척하는 놈의 자질구레함에 대한 인문주의적 편견? "색과 음은 자연 도처에서 그 예술적인 조화를 구할 수 있으나 문학만 은 <인간적>인 것 말고서는 그것을 찾을 수가 없다. 언어학적 또는 문체론 적 문학론은 처음에는 말 자체의 분석으로서 문학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을 목적하였으나, 나중엔 언어구조 자체에 빠져들어 그것의 건축적 배열이나 조직적 배치에 매료됨으로서 국부적인 효과만을 보았었다. 그러나 문학은 내용과 형식 전체로서 판별되는 유일한 예술이다. 그러므로 문학에는 그 성 립의 근거가 되어 주고 있는 <감동>이 결여되어서는 안 된다. ; 문학적 가 치기준의 기저; 마광수; 1972년"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어떻게 판별될 수 있을까. 괴테식으로 푼다면 새롭고, 의미가 깊으며, 감동이 있는 것. 마광수식으로 푼다면 작가의 정직 한 배설과 고백과 노출이겠다. 나는 전자보다 후자가 더 다가온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머리보다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기에. 나는 아무리 문학이 색다른 길을 간다 하더라도, 사이보그가 소설을 완성시키는 날이 온다 하더라도 이 러한 잣대가 유효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마골로기(졸저 「해체: 통일에서 포르노까지」참조)시대에서 전달자, 전달 경로로 인한 왜곡을 뼈저리게 경험하는 사람들이라면 소통과 단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겠다. '59번: 노보로시스크발 시라큐스행 270megameter; Caf China; 155쪽'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흔히 느끼는 비판적 공 허함이다. 그리하여 떠오른 대안 주제란 결국 음악의 추상적 성질에 대한 동경이겠다. 매개자 없이 직접 전달하는 것. 그리고 인생과 동떨어진 것이지 만 즐거움을 주는 형식을 창조하기 같은 것. 셀리식의 공인되지 않은 세계 의 입법자. 칸트식의 닳고 닳은 동전 따위. 그러나 나는 이러한 현상학적 배 후에 놓여진 가치 판단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작 곡자나 화가는 그럴 지 모른다. 어릴 적 천재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문학에는 천재가 없다. 있다 해도 후천적인 것이다. 상상력도 작가의 체험적 소산에서 나오는 것이지 다른 곳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왜 소설을 보는가. (읽지 않고 본다. 읽는 건 이차적이다. 읽으려면 평론가의 글을 먼저 보아야 한다. 이 점에서 활자매체와 컴퓨터 매체의 차별성을 논 하는 우스개거리에 현혹당한 사람들이 불쌍할 따름이다.) 작가의 체험적 소 산에서 획득한 리얼리티를 공유하기 위해서이겠다. 여전히 우리는 기본적인 틀거리를 현시대의 비위와 타협하여 쓴맛에서 단맛으로, 다시 쓴맛으로 유 행따라 맛만 다르게 할 따름이다. 이러할 때 패러디 또한 마찬가지 운명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장중한 문학에 대해 비꼬듯한 태도로 희화화되어 오 히려 원작을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를 갖추었다지만 그것 자체가 역사가 된 다면 원본이 되는 것이다. 돌이켜 보면, 원작을 넘어서는 패러디, 패러디라 부를 수 없는 패러디야말로 그간 문학이 걸어온 길이었다. 그러한 비약 혹 은 흔적을 시원스레 배설하며 새로운 출발을 알리고, 보다 속 깊은 이분법 을 통해(이분법을 궁극적으로 없앴다는 해체를 듣도 보도 못 했다. 그러한 해체는 기실 가짜다. 진지한 해체라면 표피적인 이분법에서 보다 심도깊은 이분법으로 구조 자체를 이행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차피 흑백논리라 는 점에서 해체는 구조를 결코 배제하지 않는다. 만일 이를 부정한다면 틀 림없이 자본주의적 해체이겠다.) 기존의 이분법이 가지는 복화술을 고백하 고,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통해 자신을 노출시키는 긴장 관계를 지 속시키는 것이었다. 만일 문학에서 애매함이 찬양될 수 있다면 오로지 자신 을 회의하는 것에서 감동을 주기 때문이지, 기법을 통하거나 문체를 통한 애매함은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는 것이다. 움직이게끔 하는 느낌이 없다 면 무슨 재미로 소설을 읽겠는가. 문제는 다양한 핑계거리로 이러한 기초적 인원칙을 져버린다는 것이다. 자신의 감동만 고상하고, 남의 감동은 저열한 것으로 간주하는 구분법이 그것이다. 이러한 표피적이고, 교양적이고, 관념 적인 관점이 있는 한 한국소설에는 미래가 없다. 매번 식민지화된, 주변부화 된, 사대화된, 위선과 가식만이 판치는 요상한 문학만이 양산될 따름이다. 겉에는 한복을 입고 있으되 속에는 란제리를 단 것이 이것이다. 한마디로 겉만 야해서는 문학이 아니다. 문화라고 할 수도 없다. 독창성도 존립할 수 없다. 그렇다면 왜 백민석의 소설이 문단 일각에서 환영받고 있는가. 그건 문단 주류가 상기한 지적 그대로이기에 백민석식의 반항을 즐겨 채택했다는 것이 올바른 판단일 듯 싶다. 분명 그의 소설은 이 점에서 고답적이기까지 하다. 김승옥이나 이문열이나 장정일이나 백민석의 차이를 나는 전혀 느끼 지 못 하고 있다. 아마 다음 세대에도 역시 이들 주류가 또 다시 아류를 재 생산할 것이지만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다. 이들의 차별이야 생물학적 세대 차이밖에 없음에도 단지 주류라는 이유로 확대재생산된다는 것 이외에는 없 다. 따라서 내 주장은 다음과 같다. 화장실에 낙서만 하러 들어가지 말고 똥 누면서 낙서하자. "다 도서관의 잘못이었다.; 캘리포니아 나무개; 13쪽", "해설에 의하면... 노랫소리란 뭘까.; 캘리포니아 나무개; 26쪽", "그리고, 그때 우리는 우리가 아는(필자 주 : 주류만 안다고 하는 척하는 것들, 이미 소크라테스에 의해 폭로된 것.), 세상에서 가장 깊고도 씁쓸한 어떤 미소들을 얼굴에 떠올리며 그 공동들의 밑바닥들을 천천히 거닐게 되는 것이다. 종생토록.; 그들은 운 명적으로 자질구레함을 타고났다; 87쪽", "저 위대한 진공관 시대의 디자인 을 흉내냈다고해서 내가, 디지털 이전의 시대 -깊이 있고 우아하며, 아름답 고도 매혹적이라고 알려진, 하지만 내가 결코 알지 못하는-를 향해 실제로 도, 스스로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사랑의 고통; 163쪽", "아들이 아빠를 죽이고 제 엄마랑 씹하는 거 말야.; 음악인 협동조합 1; 175 쪽", "몇 년 전에 잃어버렸던 내 사납고도 무시무시한 투지와 시건방진 시비 꾼으로서의 자질과 한치의 연민도 허용치 않는 멍청한 독설가로서의 냉혹한 마음; 음악인 협동조합 1; 185쪽", "우리 인간은 인간이란 것에 너무 집착하 고 있다구요; 음악인 협동조합 3; 243쪽", "난 먼 길을 왔단 말이예요.; 음악 인 협동조합 4; 251쪽" 결국 이 작가는 다 도서관의 잘못이라고 운을 뗀 뒤 도서관으로 돌아 온 셈이다. 헤겔적 부정을 통하여 저 위풍당당한 절대정신으로 돌아간 것이 다. 그것이 본능으로 불리건, 신으로 불리건, 완다라고 불리건, 폐드럼통으로 불리건, 신비로운 건 틀림없겠다. 새로웠으나 별 게 아니었고, 의미가 있었 으나 고전보다 저열했고, 감동을 주고 싶었으나 감동을 주기에는 생물학적 나이가 허용되지 않았다는점이겠다.그가 문단의 중진으로 자리잡을 무렵 이면 인정받을 것이다. 장정일의 인정투쟁식을 모범으로 삼을 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난 어린애가 아니예요. (난 공산당이 싫어요와 비슷한 논법임 을 깨닫고 나는 한참 동안 웃었다.) 비현실로 새로운 서사를 창출하기는 결 국 도서관에서 도서관으로 끝났다. 데모하러 학교 정문 앞으로 돌진해가는 데 그럴수록 마음은 자기 뒷통수에 있는 총장실로 쏠리더라는 뻔한 서사. 4. 글을 마치면서 : 좆도 없는 척하는 놈의 자질구레한 꿈에 대한 과학 주의적 편견? 시대의 가변성보다 개인의 가변성을 운위하는 시대이다. 세기말이다 밀레니엄이다 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시간관이 누군가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첩경 중의 핵심이라면 백민석의 단편소설들에 나타난 걸 뭐라 말 할 수 있을까. 암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 그러니 시간은 정지된 거야. 그런 데 정말 암 것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자기가 믿고 있는 유일하고 고 상한 취미가 일반화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암 것도 달라지지 않았다고 생각하기만 하는 것일까. 나 같은 사람이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바쁘게 살 다가 이 단편소설들을 보면서 저 사람들만 아직 암 것도 달라지지 않았구나 생각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바뀐 것도 많은데 왜 그럴까 하는 의문도 던져 볼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시간이 움직이든, 정지하든 보편 적 시간을 가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동어반복이 아닐까. 작가 백민석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순간을 정확히 기록하여 허구가 분명한 비현실을 창조 하는 장치로 시계를 이용하고 있다. 생산의 속도가 너무 빨라, 의미의 속도 를 추월한다는 식을 '내 생의 엉덩이를 한 번 물어뜯기 위해 악착같이 쫓아 다니는, 시간의 뒷골목들을 배회하는, 불길함의 아가리들이 짖어대는 소리' 로 번역(무협지에 나오는 고사성어처럼)했을 따름이거나 '미래에 대한 우울 과 불안이 만연된 완다라는 세기말'식이라거나 "하루 새에 7년치의 교분을 쌓은 듯한'식이다. 새삼스런 표현들이 전혀 아니다. 그 시간이 지나면 재빠 르게 망각하고, 기대하는 것없이 뭐 어때?하는 광고 카피도 나왔으니까. 이 것과 백민석의 다이어트는 상관관계가 있을까. "특히 자신의 삶이 막바지에 다다랐다고 느꼈을 때, 혹은 자신과 세계에 종말이 가까워졌다고 느꼈을 때, 우리는 뭔가 다른 삶을 선택하게 되지요.; Greem Green Grass of Home; 63 쪽", "일천구백칠십년대부터 여기엔 히터와 에어콘이 있었대.; 열네 개의 병 원 침대; 143쪽", "그래도 어차피 시간은 가; Caf China; 155쪽", "어디서부 턴가 뭔가가 잘못ㄷ는데.; 음악인 협동조합 2; 211쪽" 작가는 인간이라는 발 명품에 대한 집착 대신 어쩌면 시간이라는 발명품으로 집착대상을 바꾸고, 단지 국부적인 변화에 지나지 않은 데서 오는 좌절과 권태 속에서 이 사회 가 정상적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었겠다. 모든 것이 상대적이야라는 주장이 혼선을 주듯 모든 걸 다 바꾸면 아무 것도 바꾸지 않게 되고마는 이치를 재 빨리 터득한 것일까. 다소 지연된 시간 속에서 사건에 의미부여를 애써 하 려는 모든 구분법 혹은 쟈끄 데리다식 차연이란 관점에서 보자면 그의 종말 론이 지나치게 성급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 라는 이면에는 특정 주체만이 절대적이다라는 근거를 내포하고 있다라고 한 다면 그의 소설이 특정 주체의 절망과 좌절과 권태를 작품대상으로 삼았다 는 점에서, 나아가 모든 걸 회의하면서도 회의하는 자신에 대해서만큼 회의 하지 않는 그를 떠올리면서 아무리 자기 소설이 주류문화를 공격한다고 주 장할 지라도 나는 여전히 그의 작품을 주류쪽에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삶은 불가사의한 어떤 것이다라는 그의 주장을 내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그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참신함을 긍정하면서도, 어쩐지 내키지 않은 까칠한 흔적을 지우려는 그의 노력을 내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그 역시 선배 작가들처럼 한 세대를 풍 미한 작가가 되기 위해 그 올가미를 스스로 덥썩 잡고야마는 아찔함을 느꼈 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설이란 직관 뿐만 아니라 경험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는 평범하고 단순한 구조를 한껏 파헤치지 못한다면 차라리 둔감한 척 비현실까지 거세하라고 그에게 말하고 싶다. 설사 그대의 장난감이 파괴될 지라도. 진정한 절망은 여기서부터이지 않을까. 인터넷 지도 만들기 INDRA 2002.10.08 우선 나는 활동가가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나는 굳이 표현한다면 서포터즈이지, 활동가는 아니다. 나는 훌륭한 활동가들을 도와주고 격려하는 사람이므로 사회당에 입당할 때 평생 평당원을 자임한 사람이다. 나같은 사람이 사회당의 간부가 된다든가 하는 것은 사회당에 이로울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건 나의 소견일 따름이지, 다른 이들도, 다른 서포터즈들도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도 95년 무렵까지는 나 자신 활동가로 여겼던 듯싶다. 나의 부족함이 주요한 원인이겠지만 시대도 부분적으로 한 요인이었다고 생각한다. 그 이전에는 좌파 그룹 등을 만나기도 하고 또한 모임에서 열심히 활동도 하면서 국가보안법 철폐 성명서도 내보내고 또한 노동절이면 집회에 참석도 하고 그러했지만 당시의 분위기는 만나는 사람마다 다들 나보다도 더 멀리 나가는 것이 다반사였다. 나보고 살아 있는 팔십년대의 화석이라고 말한 이들도 있으니 더 말해 무엇하랴. 그러한 때에는 사실 누군가 사회주의라고 말해주기만 해도, 아니 좌파라고 말해주기만 하더라도 반가운 때였다. 누군가가 다들 내팽개친 맑스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정말 기쁘기 그지 없었다. 이외에 결혼도 한 요인인 듯싶다. 결혼하고도 열심히 하는 분도 많겠지만 나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듯싶다. 그것도 좀 반항한다고 연대사태때 각오하였으나 다시는 그렇게 맘대로 하지 말라는 말에 끽소리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가 자기 만큼 요즘 제 목소리 못내고 사는 여자가 어디 있느냐고 할 정도이면 나는 여성문제에 관하여 혹시 말할 때면 이거 내가 말해도 되나? 하는 염려와 함께 별로 말할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다만 내가 사정이 이렇지만 서포터즈인 만큼 열심히 서포터즈 활동을 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예전에 고심하기를 이론, 형이상학, 이데올로기 등등을 보자면 글자로 보자면 무엇인지 척하니 감이 오지 않는다는 점을 한참 생각한 적이 있었다. 물론 중국 문자를 예로 하여 이러한 추상적인 언어란 구체적인 사물 대상의 조합으로 획득하거나 파생된 것이라고 부족하나마 이해하고 있었는데 그렇다면 이러한 언어들이 사용 초기부터 그러하였던가 의구심이 들었다. 그리하여 나는 초기에는 아마도 그러한 조합이나 파생되어 만든 것일지라도 사물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시하는 것이나 다름없이 당대 사람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겠는가 하는 가정을 해보았다. (물론 이에 대해서 수많은 전문가들이 저작을 내놓았겠지만 내가 그쪽으로는 잘 모른다.) 만일 그와 같은 가정이 타당하다면 오늘날의 상기한 언어들은 사물 대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와있어서 본래의 취지가 맞지 않게되지 않았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가령 비교한다면 '왕따'란 말을 생각해 보면 나는 이 말이 무엇인지 척하니 감이 온다.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왕따란 것이 백년, 이백년 간다면 과연 지금처럼 무엇인지 척하니 감이 올까? 이에 착안하여 나는 이론, 형이상학, 이데올로기 등등에 대해서 만일 그렇듯 감이 척 오게 할 말이 있을까 고민해봤는데 실력이 부족하여 뾰족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만 그런 와중에 생각한 몇 가지 것들을 꺼내 놓는다면, 지도 만들기가 아닌가 싶다는 거다. 사실 이런 건 서울에선 생각을 못했다가 지리산 인근(청학동 근처임)에 선산이 있는데 그 선산에서 성묘를 하고 산들이 쭉 펼쳐진 곳에서 내려다 보다가 무심코 든 생각이다. 옛날 사람들이 어디에 숲이 있고 농사를 지을 땅이 있고 물이 있고 인가가 있다는 것을 '한눈'에 파악이 가능하지 않았을까?머릿속에 저절로 딱 들어온다. 한이란 말이 하나의 의미도 있지만 크다, 어중간하다 등등 우리 말로 치자면 수십가지 의미가 있는데 나는 지리산 인근 선산에서 산을 내려다 보면서 딱 든 생각이 이게 바로 '한눈'이구나. 한눈에 보인다! 그거다. 그렇다면 이론이니 형이상학이니 이데올로기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이 결국은 이렇듯 한눈에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그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닌가 여겼던 것이다. 지도 만들기는 조선대에 와서까지 국가 기밀사항 중 하나였다고 나는 알고 있다. 소수에게 독점된 지식이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말하길 조선의 길은 왜 그리도 옛날에 꼬불꼬불했나하는 견해에 속설로 외적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함이다,라고 내게 누군가 말해준 적도 있다. 반면 이와 대립된 건 로마의 길이라고 할 수 있는데 보다 힘을 가진 세력은 로마의 길처럼 시원시원하게 뚫리는 것이 좋지 않았겠는가 생각해 보니 일리가 있었다. 최근 역시 누군가 그러던데 한국의 도로 포장율이 국제적으로 따지면 상당히 높은 수준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잘 닦였다는 말을 한다. 아닌게 아니라 불과 몇년 전만 하더라도 그 지리산 선산에 가기 위해선 길이 없고 산길이었는데 어느덧 그곳에서도 도로가 포장되어 있었다. 아직도 차로 한참을 가야 구멍가게가 보일 정도이긴 하지만 말이다. 시골도 이런 시골이 없다고 아내가 이야기할 정도다. 게다가 대전-통영간 도로가 나기 전에는 호남고속도로를 경유하던가, 아니면 경부선을 타던가하여 다시 남해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한참이나 가야 했었는데 - 이 점에서 최근 사회당보에 기고한 여수당원 분의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 요즘에는 그 도로를 이용하면 대전까지 두 시간이면 된다. 지난 추석 때도 대전까지 두 시간이었으니 서울에서 대전까지 두 시간 잡으면 네 시간이면 충분하다는 거다. 예전이면 여덟시간에서 열시간을 잡아야 했는데 말이다. 그런데 차를 타고 오면서 이거 누가 기획한 거냐, 서해안이 김대중이라면 통영이고 나중에 거제로 연결된다니 김영삼 때냐, 그런 농을 주고 받았는데 최근 수도 이전과 관련한 자료들을 보니 박정희때 남한을 도시국가로 보아 관료들이 그런 기획을 했다고 하니 관료들이 역시 무시못할 자들이로구나를 새삼 느꼈다. 도시국가, 강소국 등등의 정치적 언어들을 고려하면 더욱 그러하다. 최근 게시판에 바둑 이야기도 있다. 나도 하루에 한번 정도는 인터넷 바둑을 두는데 한때 인터넷 바둑 4급까지 갔다가 최근 6급으로 추락했다. 안 두다가 두기 시작하니까 그런가 보다. 아무튼 보자면 형세판단이라는 말이 있다. 이 형세판단이라는 건 유불리를 따지는 것이 아닌가. 유리하면 좀 더 안정된 바둑을 두고 불리하다면 모험적인 행보를 하는 것 말이다. 이거 참 어렵다. 이러한 형세판단의 최고봉은 이창호라고 알려져 있다고 들었다. 철저하게 계산적이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창호만한 냉정함과 인내심을 가진 이가 없다고들 한다. 계산에는 냉정함과 인내심을 요구한다. 이러한 점을 볼 때 누구나 한눈으로 보지만 누구나 정확히 보는 건 아닐 것이다. 정확히 보려면 여러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고 들었다. 가령 지난 911테러 당시 빌딩이 무너지면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데 거기에 악령의 모습이 있었다고 하여 언론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그리하여 그것이 마치 기독교는 선, 이슬람은 악의 상징처럼 받아들여지기도 하였다. 그런데 심리학자들이 그런 건 일종의 심리현상으로 보고 싶어하는 것이 보인다는 것이다. 가령 산에 놀러가서 아무렇게나 풍경사진을 찍은 뒤 돌아와 이를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친구들한테 무엇인가 특별한 것이 보이느냐고 하면 처음에는 아무 것도 안 보인다고 하지만 만일 내가 친구들에게 그 사진은 어떤 영적인 것이 찍혀 있다고 하며 잘 찾아보라고 하면 그 다음부터 뭔가 이런 게 보인다는 식으로 숨은그림찾기처럼 반응한다는 것이다. 이것외에도 착시도 있을 것이다. 또한 보는 지점이 어디냐에 따라 달라지기도 할 것이다. 산 아래와 산 중턱, 산 정상에서 보는 것이 각기 다를 것이다. 이런 걸 고려하면 참으로 지도 만들기는 대단한 작업이로구나 하고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군복무때 나는 박격포 관측병으로 잠시 있었다. 81미리 박격포였는데 관측병이 지도와 산세를 비교하여 포격할 지점을 찍으면 계산병이 이를 각도와 계산기로 잡아서 사수가 부사수의 도움을 받아 박격포를 쏘아대는 것이다. 이처럼 전투 때에도 지도는 큰 위력을 발휘한다. 제대로 된 지도는 작전에 큰 도움을 준다. 작전병들은 그래서 소위 CP에서 맨날 지도랑 밤새우기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만들기는 상기한 것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한 언론지에서는 한국 지식인의 지도 를 그린 적이 있었다. 그들은 왜 이러한 시도를 하는 것일까? 또한 고려해 보면 지식인의 계보 만들기도 계통적인 지도 만들기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이뿐만 아니다. 나는 곧잘 배철수의 음악캠프를 즐겨 듣는 애청자인데 가끔 라이브로 초청한 뮤지션들과 인터뷰를 하는데 뮤지션들이 꼭 하는 말이 배철수 프로에서는 다른 프로와 달리 음악적인 걸 주로 물어서 좋다고들 한다. 그러한 배철수의 인터뷰 중에 빠지지 않는 것이 그 뮤지션더러 어릴 때 무슨 음악을 즐겨 들었느냐, 왜 음악을 시작했느냐, 어떤 뮤지션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느냐 같은 질문들이다. 이 또한 지도 만들기가 아니던가. 나는 그러한 답변을 들으면 평론가가 그 음악은 얼터너티브다, 모던록이다, 뭐다는 말보다는 누구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식의 것이 보다 한눈에 파악이 된다는 것이다.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영화를 보다 보면 어, 과거에 어떤 영화가 오버랩되는 경우가 있는데 가령 김기덕 감독의 악어가 그랬다. 그래서 김기덕 감독을 만나서 악어를 잘 봤다고 하며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 떠오른다고 하자 김기덕 감독은 그랬다면 영광이라고 말하였다. 알고 보니 레오 까락스와 비슷한 삶이어서 무학력으로 쌩고생을 한 감독이다. 흥행에는 실패하였는데 평들이 좋아서 계속 작품을 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서울에 가서도 술마시자고 했는데 내가 연락을 하지 않았다. 레오 까락스는 내가 좋아하는 감독인데 그래서 관련 영화평도 내 책에 수록되어 있다. 유럽좌파의 고민과 노동자의 삶을 그렸다고 나는 본 것이다. 그래서 한국에 산 나에게도 감동이 왔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문제인 것이다. 왜 나는 퐁네프의 연인들에서 로맨스를 보지 않고 그런 점을 보았을까? 누군가는 평론을 위한 평론을 쓰지만, 퐁네프의 연인들 평론은 지금 이 글처럼 영화보고 집에 오자마자 쓴 것이다. 나는 영화를 볼 때 평을 생각하고 쓰기 보다는 영화에 빠져서 보고 와서 쓰는 것이다. 그런데 이 또한 지도 만들기가 아닌가? 그런데 왜 나는 다른 이들과는 다른 지도 제작을 하였던 것일까? 왜 다른 눈으로 본 것일까? 왜 다르게 보기를 한 것일까? 요즘은 인터넷 시대다. 인터넷에는 수많은 정보가 홍수처럼 범람한다. 그리하여 검색기는 필수기능이다. 검색기 역시 지도 만들기이다. 검색기로 사회당하면 사회당과 관련된 정보들이 쭉 열람이 가능하다. 맑스라고 검색기에 넣으면 역시 관련 정보들이 쏟아져 나온다. 왜 사람들은 지도를 원하나? 일전에 어떤 이가 내게 글을 잘 본다고 하면서 책을 추천해 달라는 메일을 보내왔다. 목록, 혹은 커리큘럼을 제시해 달라는 것이다. 나는 말하길 목록을 추천할 수 있으나 그보다는 자신만의 커리큘럼을 만들어내는 노력이 더 소중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견을 제시했다. 자신에게 맞는 옷이라는 표현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의 목록과 글은 참고용이라고 그 맞춤옷을 위한 참고용이라는 말을 한다. 맑스의 저서들은 이런 의미에서 내게 참고용이다. 언론 역시 일종의 지도 만들기다. 어떤 아카데미즘한 내용에 대해서 서평, 비평 등을 통해서 요약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책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책 서문은 그 책에 대한 저자의 지도라고 할 수 있다. 이는 한마디로 저자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은 왜 이 책을 저술하게 되었으며 어떤 목적이 있는지, 또한 책 내용에는 어떠한 것이 구성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본문은 대체로 이러한 서문에 대한 자신의 논증/검증/입증하는 데이터들로 구성되어 있다. 본문은 그러한 철학에 대한 과학적인 노력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결론 대목에 이르르면 새로운 출발을 알리는 대목들이 곧잘 나온다. 가령 한때 나의 영화평은 회자되면서 하나의 유행이 되었고 모방하는 이들이 다수 나타났다. 변영주 감독의 '낮은 목소리'의 팜플릿에 실리기도 하고 여러 방면에서 하여간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잦다 보니 어떤 이가 자신도 같은 영화를 보았는데 게시판에 글을 쓰고 싶어도 혹 나의 영화평과 상반이 될까 두렵더라는 말을 듣고 이러한 지도 만들기가 의미하는 역작용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영향력이 큰 지도 만들기는 다른 지도 만들기를 경쟁적으로 촉발시킬 수도 있지만 반대로 어떤 이들에게는 주눅들게 하고 소위 '대리주의'를 낳게 만들 수도 있다고 볼 수 있다. 생각은 니가 해. 나는 시키는 대로 할께,가 그것이겠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본래 의도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는 기존의 평론가들이 너무 뻔할 뻔자로 평론을 하고 도식적으로 하여서 그렇게 하기 보다는 자기가 마음에 들면 든 만큼 글을 쓰고 이러한 글들이 다양하게 표출된다면 보다 영화라는 것에 보다 접근할 수 있고 삶을 향상시킬 수 있다고 보았는데 어느 시점에 가서는 나 역시 '문화 권력'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어느 때부터 개봉영화를 보지 않고 비디오로만 보기 시작했다. 비디오로 나올 때쯤이면 다들 그 영화를 보았기에 그때서야 내 영화평을 선보이더라도 별 문제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이 점에서 부작용을 많이 해소시켰지만 문제는 남는다. 현실은 끊임없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데 한번 만든 지도, 특히 성공한 지도에는 미련이 많이 남는다는 것이다. 쪼가 박힌다는 말이 있다. 한석규는 이런 역할에만 어울려, 같은 그런 거 말이다. 이를 넘어서기에는 참으로 힘든 면이 많다. 더군다나 백선생님에게는 매우 죄송한 말씀이나 나이 먹을수록 모험을 두려워하는 내 안의 늙은이를 가끔 발견한다. 그러한 점에서 이규성님의 행복한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하는 것이 내게는 나이를 먹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고 들린다. 나이를 먹으니 점차 보수화되는 나 자신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것이 필요한 것일 게다. 새로운 지도 말이다. 사회당이 만일 그런 새로운 지도 만들기에 부심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긍정적이라고 나는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군다나 요즘 그 누구도 감히 섣불리 지도 만들기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지도 만들기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건 아마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같은 뛰어난 지도 탄생의 서곡이지 않을까 기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회당의 지도 만들기에 건투를 빈다. 다만 이러한 지도 만들기가 대중투쟁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의미를 취득할 수 없는 것일 것이다. 그래서 나는 활동가들을 존경한다. 나는 명석한 두뇌를 존중하고 높이 평가하지만 그보다 대중투쟁을 더 높이 평가한다. 추신 : 바둑은 요즘 3급이 되기도 하고, 4급이 되기도 한다. 만족할 수 없는 급수이지만, 즐기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1999.12월의 어느 날 통신으로 알고 지내던 이창은씨가 전화를 주었다. 내가 일하는 곳으로 들려도 되느냐고 해서 별 생각없이 괜찮다고 했더니 곧바로 찾아와서는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겠다는 것이다. 즉흥성이라는 장점이 있었겠지만 사전 준비가 없어서 서로간 대화에 어려움도 있었다. 가령 인드라가 주요한 개념으로 내세우는 이마골로기에 대해 이미지와 이데올로기를 합성하여 나온 말이라면서 광고를 생각하면 된다고 했는데 이창은씨가 편집하는 과정에서 헷갈렸던 듯싶다. 2000년 인터넷 홈페이지 활동은 또 다른 성대 출신의 운동가 출신(축구도 좋아했다!)이 근래의 뉴스 웹진 - 당시에는 이런 개념의 웹진이 없었다. - 만들자고 해서 그와 함께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러나 만들기도 전에 서로의 견해 차이로 결별했다. 갑자기 자보 글이 떠올랐던 것은 뭐랄까, 당시에는 황당하지만 분명 앞서가는 이들이 있구나, 그런 것을 느낀 것이다. 지금도 당장은 힘들지만, 뭔가 종전과 다른 무언가를 고민하는 이들이 있을 듯싶은 것이다. 어려운 시기다. 힘내라. 선진 활동가들이여! 기 획 자 보 사이버공간의 풍운아, 인드라(INDRA) 김종화 이창은 발행인 (pub@jabo.co.kr) 수많은 사람, 수많은 주장이 오고가는 통신마당에서 일관된 주장을 펼치기란 무척 어려운 작업이다. 특히 현실변혁의 기치하에 실천적 글을 쓰기에는 이땅의 통신문화는 너무 척박하다. 그 척박한 동토에 씨를 뿌리며 실천하는 사이버공간의 풍운아가 꿈꾸는 세상은.... 사이버 공간에서 어느 특정주제로 글을 쓰기는 쉽다. 인쇄매체와 달리 책임을 지거나 기록으로서의 기능이나 형식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부담없이 편하게 자신의 관심분야나 주제에 대한 글을 쓰고 여러 사람의 평가나 추천을 통해 통신스타로 떠오른다. 그러나 여러 다양한 주제에 관해서 특정분야의 전문가처럼 글을 쓰는 경우는 대단히 드물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워낙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는 통신공간에서 어줍잖은 표현이나 인식은 곧바로 그 허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난 몇 년간 통신공간에서 여러 다양한 주제를 편력하고 있는 논객이 있다. 바로 하이텔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인드라 김종화씨이다. 사이버에서의 논객(論客)이라 함은 어느 특정분야나 전문분야의 식견이 풍부한 것을 이르지 않는다. 여러 다양한 현안이나 현상에 대한 정확한 이해 속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때 비로소 논객이라 할 수 있다. 인드라 김종화씨는 바로 이런 점에서 보기 드문 논객이라 할 수 있다. 그의 다양한 글쓰기 속에 드러난 고민과 지향은 바로 우리 사회의 모순의 극복을 위한 지평을 열어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드라 김종화씨가 꿈꾸는 사이버의 세계는 무엇인가? 최근 하이텔에서의 글쓰기가 문제되어 잠시 통신공간을 떠났던 김종화씨를 만났다. 아무래도 통신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통신활동에 열성적이었던 분이라서 글쓰기(권리)가 박탈당했을 때의 기분이랄까? (타의로) 글을 쓰지 못했을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지를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 : 통신인으로써 사용정지라는 징계(?)를 받고서 통신에 접속하지 못했을 때의 기분과 사용정지 기간중의 활동에 대해서 말해달라. 김 : 사용정지를 받고서는 '황당'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특히 사용자에게 1차 통보(경고)만 하고서 일방적으로 사용중지를 시켰다. 사실 사용정지는 철없는 나이 어린 학생이나 극단적 주장을 하는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줄 알았다. 물론 표현의 자유는 존중해야 하나 네티즌간의 자정능력으로 비판해야지 삭제해서는 안된다. 나는 이번 일을 통신공간에 대한 '공권력'의 개입이라고 본다. 사회통제의 수단으로써 '검열'이란 잣대를 들이민다고 생각한다. 내가 사용정지를 당했다면 '심한 표현, 혹은 욕설'이 문제일텐데, 이는 해당자에 대한 개인적 자존심의 문제이지 검열의 기준은 아니다. 물론 하이텔이라는 특정회사가 (공)권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다른 기관의 뜻을 알아서 판단한 그 처사-웃음-가 이해 안될 뿐이며, 이같은 행위는 자유로운 통신활동을 위축시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통신활동이 중지되자 임시로 천리안에 가입했다. 천리안에서 활동중 사용중지가 풀렸다는 말을 듣고는 천리안 아이디(REINDRA)를 '유보'시켰다. 사실 이번 인드라 김종화씨의 사용중지 처분 이후 하이텔에서는 '검열철폐'라는 말머리운동이 일어났다. 물론 김종화씨 개인만을 위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은 하이텔이라는 통신공간에서의 김종화씨에 대한 신뢰나 인기도를 반증한 것이기도 하다. 이 : 통신에 입문하게된 동기 및 하이텔에서의 활동에 대해서 말해달라. 김 : 91년 제대하자마자 하이텔의 전신인 KETEL에 가입했다. 사실 기계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컴퓨터에 대해서 모른다는 것과 전화로 접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충격이었다. 그러나 초기 통신활동은 놀기 위해서, 특히 채팅하고 미팅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하이텔에서는 관심에 따라 통합과학연구회, 바통모, 그리고 반문화동 등 10여 개 동호회에서 활동했다. 이 : 김종화씨에 대해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다. 약력을 간단히 소개할 수 있는가? 김 : 연세대 기계학과(85학번)이다. 기계학과를 간 것은 고교시절부터 수학을 잘해서(웃음)였다.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도 해보았고, 짧은 기간 모 정당에서 일을 해보기도 하였다. 이 : 85학번이면 이른바 '386세대'이다. 글쓰기에서 드러나는 정치성향으로 봤을 때 학생시절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는가? 김 : 1986년 건대항쟁시 현장에 있었고 그 일로 구속까지 됐었다. 하이텔에서의 김종화씨의 활동반경 및 글쓰기의 주제는 실로 광범하고 다양하다. 특히 예전부터 '문화평론가'로 정치, 문학, 스포츠, 포르노, 페미니즘 등 널리 필명을 떨쳤는데 기계과 출신-흔히 말하는 공돌이-이라고 하니 의외였다. 김 : 내가 글을 쓰는 것은 사회문화적 관점에서 글을 쓰는 것이다. 사실 학부시절 문학에 탐닉하였다. 그것도 일반적인 문학이 아닌 초현실주의나 다다이즘에서부터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을 좋아하였다. 지금 나의 글쓰기 스타일은 이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이 : 평소 통신에서의 글쓰기가 상당히 다작인데 온라인에서 바로 쓰는 것 같다. 그럴 이유라도 있는가? 김 : 나는 되도록 온라인에서 쓴다. 감정이 살아있는 글이라야 제대로 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번 쓴 글에 대해서는 잘 고치지도 않는 편이다. 인쇄매체와 달리 통신공간은 '검열'이 보다 완화된 공간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검열에 엄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예를들어 하이텔 초창기에 나는 주로 영화담론을 썻다. 그것도 '포르노' 중심으로 쓴 것인데 일상적 서사적 구조였다. 종래 규범화 된 틀이 아닌 이같은 영화평론이 통신공간에서 많은 환영을 받았다. 지금은 모두 이같은 방식으로 하는 것 같다. 이 : 앞서도 언급했지만 김종화씨의 영역은 상당히 넓고 다양하다. 정치, 문학, 스포츠, 포르노, 페미니즘 등 다방면에 걸쳐 있는데 이것을 관통하는 이떤 '주제'나 자신만의 '철학'이 있는가? 김 : '철학'이나 '주제', 그런 것 없다. 너무 어렵다. 어려울 필요 있는가? 나는 내 생각을 편하게 말할 뿐이다. 이 : 통신에서 (당신의) 글쓰기를 통한 효과나 영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 : 당연히 있다. 물론 나의 영향력이 아니다. 예전에는 서적이나 인쇄매체를 통한 이념(ideology)의 논쟁이었다. 이제는 이마골로기(imagology)이다. 밀란 쿤데라가 개념화 한 것으로 '광고와 이미지'를 결합한 것으로 정보통신 사회에서의 가장 강력한 전달 수단이 된다. 이같은 '광고'를 통해 자본주의적 학문이나 담론을 해체할 수가 있다. 부연하면 기존의 담론구조 해체에 통신은 가장 강력한 수단이 된다는 것이며, 또다른 대안을 모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 내용이 조금 무겁다. 일상적인 것을 물어보자. 술 담배는 많이 하는가? 김 : 술은 많이 줄이고 있다. 담배는 하루 세갑 정도 피운다. 이 : 술을 먹으면 용감(?)해 진다고 하는데... 김 : (하하하) '혁명적 주사'를 한다. 예전부터 술을 먹으면 외치는 구호-혁명만세-가 있었다. 그래서 지인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이 : 보통 생활에서 오는 긴장을 무엇으로 해소하는가? 김 : 노래를 즐겨 부른다. 노래 잘 부른다(웃음). 특히 김광석이나 안치환, 김현석, 들국화의 노래를 좋아한다. 이 : 아이디는 또다른 분신이다. 'INDRA'라는 아이디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가? 김 : 없다. INDRA는 인도의 '벼락의 신'이다. 마치 그리스 로마 신화의 제우스와 같다. 한글아이디가 없던 시절 아이디를 만들기 위해 영어사전을 펼쳐서 아무데나 첫 번째 나오는 명사형으로 만든 것이다. 이 : 조금 까다로운 질문을 하자. 최근 김종화씨나 글에 대한 '평가'가 부정적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김 : 나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그런데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특히 DJ지지자들-이 자신은 변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변화를 요구한다. 97년 대선 직전의 인드라가 전부는 아니다. 이 : 이것은 아무래도 그동안 플라자에서 드러난 인드라의 '정치성향'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비판의 주조가 인드라의 정치성향의 변화에서 오는 것 같은데... 김 : 나는 일관되게 '민중후보'론이다. 92년에는 기권을 했지만, 97년 DJ를 지지한 것은 '정권교체'만이라도 커다란 진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DJ정권을 비판하는 것은 진보진영의 방향과 생존을 위한 것이다. 인드라의 글은 '과격'하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자연스러운 감정'을 중시하는 그이지만, 때로는 논리보다 감정에 치우친 글이 많아 욕설을 넘어선 '독설'로 흐르는 경향이 없지 않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현실정치에 대한 강한 비판, 사실 이로인해 플라자에서 종종 치열한 논쟁이 오가기도 하지만, 인드라는 굽힘이 없다. 때로는 그의 발언은 위험수위를 넘기기도 한다. 이 : 워낙 다양하면서도 독특한, 인드라만의 스타일 때문에 지지자도 많지만 반대하거나 혐오하는 사람도 많다. 플라자에서 비판의 글을 보게 되면? 김 : 통신에서의 인드라는 나그네이다. 보이는데로 보이길 원할 뿐이다. 다만 인드라'류', 인드라스타일로만 이해해 달라. 이 : 통신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적해달라. 김 : 바람직하지 않은 것은 없다. 뭐가 바람직한가? 바람직스러운 것도 없다. 다양성을 중시해야 한다. 확실히 인드라 김종화씨는 자신의 주장이 강한 만큼 반대파도 적지 않다. 여기서 그와 많은 논쟁을 거친 하이텔 조중훈씨(META)의 인드라 평을 들어본다. "인드라 김종화씨는 하이텔 통신문화에 커다란 획을 그었습니다. 이땅의 통신문화가 일천하면서 '양적인 팽창'기에 통신문화를 왜곡시킬려는 일부 사람들에 대한 정확한 비판과 올바른 토론을 유도함으로써 통신문화의 질적인 상승에 기여한 것입니다. 특히 김완섭씨의 '창녀론'이나 신정모라의 '남성혐오론' 등 통신문화를 상업화나 특정 이데올로기의 선전장화 하는 것에 대해 적절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함으로써 통신문화를 더욱 성숙시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인드라 김종화씨는 통신문화라는 단어가 생소하고 토론문화가 낯설은 시절부터 활동해왔다. 또한 여러 동호회에서 활동하기도 하였고, 하이텔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 반문화동호회(BANMUN)는 그 자신이 만들다시피 하였다. 그러나 그는 항상 혼자이다. 그는 철저한 개인주의자인가? 이 : 통신공간에서의 연대나 주의주장을 함께하는 세력화 작업이 빈번하다. 이에 대해서는? 김 : 종래 한국사회에서의 세력화라는 것은 혈연 지연 인연(맥)을 바탕으로 특정집단의 이익화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사이버에서의 자유로운 의견교환을 통해 생산적인 집단-나는 이것을 '전자연(電子緣)'이라 부르고 싶다-을 창출하는 것은 의미있는 작업이라 생각한다. 이 : 그런데 가만 보면 인드라는 관련된 동호회나 자신이 만든 동호회에서조차 탈퇴하고 나오지 않은가? 김 : 그건 아니다. 나는 조직이 중요한 것이 아닌 '조직원'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반 통신인-조직원-이 중요한 것이지 조직이 중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오랜 통신활동 중에 얻은 철학이 있다면 동호회든 어느 조직이든 변하지 않으면 '엘리트주의'에 빠지게 된다. 내가 만든 동호회에서 나오는 것은 '생산적 파괴'라고 생각한다. 이 : 새로운 천년이 다가온다. 앞으로의 통신활동이나 희망사항이 있다면? 김 : 앞으로는 인터넷에서 활동하고 싶다. 나의 글을 보고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이텔 네티즌의 도움을 얻어 내년 1월 1일 홈페이지를 개설한다(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홈페이지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 본 기자가 검색하였지만 그런 도메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리고 여건이 허락된다면 소설을 쓰고 싶다. 그리고 지난 98년 5월부터 발간한 [반문화] 4호를 준비중에 있다. 이 : 개인적으로 통신을 통해 이 사회에 바라는 것이 있다면? 김 : 나는 우리 사회 구성원들이 모두 '잘먹고 잘 살길 바라는 것' 외에는 없다. (이 대목에서 기자가 너무 통속적이라 하자, 인드라는 정색을 하며) 내가 바라는 세상은 이런 소박한 꿈들이 실현되고 관통되는 세상이다. 보다 인본적인 사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사회는 너무 '파시즘'적인 것 같다. 짧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직접 만나 얘기를 나누니 통신에서 수천 편이나 되는 그의 글을 보는 것 보다는 인드라를 이해하기에는 더욱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호랑이를 그리려다 고양이를 그린 느낌이랄까? 평소 그의 글을 보고서, 직접 만나서 그의 내면에 있는 생각까지 더듬었어도 인드라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더 이해할 수 없었다. 불식여산진면목(不識廬山眞面目)이라고 산속에 있으면 그 산을 알지 못한다고 하지만, 인드라를 이해 못하는 것은 글쓰기에 드러난 그의 고민과 지향이 우리 사회의 모순에 대한 극복이기에 그럴 것이리라! 새천년 인터넷이라는 더욱 큰 무대로 나가는 그의 왕성한 필력을 새삼 기대해 본다. 이상한 나라의 일상적 기록 파천황기(破天荒記) 2005. 3. 12. 4:52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853705 통계보기 1. Æ®·°μeAI °AA¥°O Ao³ª°¡¸e¼­ ≫oº®AI ¹a¾Æ¿A´A AoAuºÐCN A¢¹®A≫ μU Ecμc´U. ÆAºe¸£´A AUAº A≪Æa¿¡¼­ ´eAæ °EAA ¾EAº A¤, A¹AU ¾Æ·¡¿¡ AO´A Au³? ¹a AøEe Ao¼ºAI°¡ μE ±¸μI¸| ±iμu°A¸°´U. ≫iAº °¨AU°¡ ¹?¾i AO´A A®³?A≫ ≫§ A¶°¢A¸·I ¹®Ao¸£´U°¡, ´UA½¿£ ±× ≫§A≫ ¸O´A´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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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CN 5¹e ¸i AI≫oAC ³eμ¿AU¸| °i¿eCN ±a¾÷μeAº ¼OA§ Acº°±×·iAI¶o ºO ¸®¿oAo´A º¹CO±a¾÷±ºA≫ Cu¼ºCI°i AO´Aμ¥, AI¹I ³²CNAC 10´e ≫cAu μ¶A¡AUº≫ Aº 1980³a ´eAEGNPAC 64%, ¼oAaAC 70%¸| ´a´cCI°i AOA¸¸c, ±× °¡¿iμ¥ °u 8. I often wondered when I cursed. Ofen feared where I would be- Wondered where she'd yield her love. When I yield, so will she. I would her will be pitied! Cursed be love! She pitied me... - Memoirs of Lady Ure, AI≫oCN ³ª¶oAC ¿¤¸®½ºAC ·cAI½º A³·² 9. ¸¸AI Au°³¹ß±¹μe¿¡ AO¾i¼­ ¿A´A³? ¹IA·AOACAC Ao¹eAuAI CuAA°¡ ¼± Aø±¹AC ±a¼u°u °¡A¡¸| Ei¼oCN ºn±³Au AþAI ¾aAº Ao½A °eAþAI ±IA·A¤A¡¿¡ ¹Y ´eCI¸c ½A¹I≫e¾÷¿­°­AC μμ¿o¾øAI ±Þ¼OCN ±U´eE­¸| AßAøCI·A´A ¿iμ¿AI¶o A¤ ACμE ¼o AO´U¸e, ·?½A¾Æ Co¸iAº AI·?CN CuAAAC ¹IA·AOACAC °¡Aa Aß¿aCN C¥ CoAC CI³ª·I, ±×¸®°i E®½CE÷ °¡Aa ¼º°øAuAI °IA¸·I °£AOμE ¼o AOA≫ Ao ¸ð¸¥ ´U. AI´A ·?½A¾Æ Co¸iAI ¿AA÷ ¹IA·AOAC ¿iμ¿A¸·I¼­¸¸ AICØμE ¼oAO´U°i AOAa CI´A °IAº ¾Æ´I´U. ·?½A¾Æ Co¸iAº ¶CCN CA·N·¹A¸¸®¾Æ ¿iμ¿, ³o¹I ¿iμ¿, ¹≪½A ·ÐAU ¿iμ¿, ±¸¼¼AOAu ¿iμ¿, ¶C´A ±¹A|AOAC ¿iμ¿A¸·I¼­μμ ¸¶Au°¡Ao·I A¸´cCI °O AICØμE ¼o AO´U. ¿i¸®´A ´U¸¸ Au°³¹ß±¹μeAC ¹IA·AOAC ¿iμ¿AI ·?½A¾Æ Co ¸i°u ¾i¶² °øAeA¡A≫ °®°i AO´A°¡¸| º¸¿ⓒAO·A´A CI³ªAC ½Aμμ°¡ Aß¿aCN °¡¼³ A≫ A|°øCØ AU ¼oμμ AOA¸¸c, ¹IA·AOAC¿I °ø≫eAOACAC ¿ªCO°u ¼º°Y, ±×¸®°i ¹I A·AOAC¿I °ø≫eAOACAC °u°e¿¡ ´eCN Ei¹IAO´A AeAuA≫ A|°øCO ¼oμμ AO´U´A °I A≫ A|½ACO μu¸§AI´U. - °ø≫eAOACAC ¹IA·AOACE­, A≪¿iA÷A° 10. CIÆ®CEÆ®¿I ³ª´A 1915³a¿¡ AI¹I ¿A·¡μE ≫cAøA¸·I ¸uA¸Ai¸| CI´A Ei¹IAO´A ½CCeA≫ Cß´U. (¿ⓒ±a¿¡¼­ ¿i¸®´A 1915³aºIAI AO¾u´ø ±×·IA÷¿I CIÆ® CEμaAC °u°e¸| ¹ß°ßCO ¼o AO´U.) ³ª´A C×≫o ³°¾ÆºuAø ÆA¶o≫o Au°i¸®¸¸ AO°i ´U´I´A CIÆ®CEμa¸| A§CØ ¸uA𸣶o´A AI¸§A≫ Ao¾i AO¾u´U. ±×¸®°i ¿i¸®AC °ø μ¿AU¾÷¿¡¼­ ³ª¿A AUC°Aº ¿i¸®¸| ¸A¿i EiºÐ½AA°±a¿¡ AæºÐCß´U...... 1916³a 5¿u ¾i´A ³? ¾ÆA§ 5½A, A¸ CIÆ®CEμa¿I ³ª´A º£¸|¸° ³²AE ³¡¿¡ AO´A ³≫ ½ºÆⓒμð¿A ¿¡¼­ Æ÷Aa¸uA¸Ai¸| ¹ß¸iCß´U... ¿i¸®´A ¸¶ºÐAo A¶°¢ A§¿¡ A≫Aa¿e º§Æ® ±¤°i ¹°A≫ μU¹u¹÷Cؼ­ ºUAI°i, CÐ≫yμeAC A½¾C A¥°u μ¿¹°¿e ≫c·a±øAe, ³×´u¶oμa≫e μa¶oAIAø, Æ÷μμAOº´μi¿¡¼­ μu¿A ¶oº§, ±×¸®°i ½A¹®¿¡¼­ ¿A¸° ≫cAøμeA≫ μ¡ºU ¿´´U. AIμeAº ¾ð¾i·I C¥CoμC¸e °E¿­°u¿¡ ACCØ ±YAoμE ¸¸CN °Iμe·I, ¸ðμI ±× ¸²¿¡¼­ ¿A·A ºUAI °IAI´U.... Æ÷Aa¸uA¸Ai°¡ 'AI¸§¾ø´A ´eAß'AC ¹ß¸iAI¶o´A Au ¼³A≫ ¸¸μe¾u´U. ±×·?³ª Aß¿aCN A¡Aº CIÆ®CEμa°¡ ¼±μ¿AuAI A¤A¡C³AU·I ½AAU μE Æ÷Aa¸uA¸Ai¸| AC½AAO´A ¿¹¼uAu A×Aⓒ´ÐA¸·I ¹ßAu½AA³ Aغn¸| Cß´U´A A¡AI ´U. -- Æ÷Aa¸uA¸Ai, ´ø ¿¡AIμa½º 11. ±U´e ¹I¹yAº °³AIAOAC, AUA?AOAC AOAa¿¡¼­ ¼­¼­, °³AIA≫ ºA°CAu ±¸ ¼OA¸·IºIAI CعæCI°i °³AIAC AI°YA≫ A¸AßCI´A °IA≫ ±× AI≫oA¸·I CI¹C·I, °³ AIAC AUA?¿I ÆoμiA≫ °­A¶CN´U....... ≫cAuAUA¡AC ¿øA¢, ¼OA?±CAy´eAC ¿øA¢, °u ½CA¥AOAC ¿øA¢AI¶o´A ±U´e¹I¹yAC ≫i´e¿øA¢¿¡¼­ ±¸A¼E­μC°i AO´U...AI·?CN ¿ø A¢Aº AUº≫AOAC °æA|A¶A÷AC ±a¹YAI μC°i ¿øμ¿·AAI μC¾i ±× ¹ßAu¿¡ Aⓒ°O EuAI μC¾uAo¸¸, ¹Y¸e ±× ¹ßAu¿¡ μu¶o AI·?CN ¿øA¢AC °aCOμμ ³ªA¸³ª°O μC¾u´U. Ai AUº≫AOAC °æA|AC ¹ßAuAC °a°u·I¼­ ≫c¶÷μe ≫cAI¿¡ ½ECN ºIAC °YA÷¸| °¡A®¿O °i °æA|Au °­AU¿I ¾aAU¿IAC °e±ÞAu ´e¸³A≫ ≫y±a°O CI¿´A¸¸c, ±¸A¼AuAI AI°£ Aº °aAU AUA?, ÆoμiCN AI°YAI ¾Æ´I¶o´A °IAI ¸i¹eCI°O μC¾u´U. -¹I¹y °³·Ð, ±eμI¼o 12. AIAI·´Æ®¶o ¹≪¾uAI°¡? AIAI·´Æ®¸| ´UA½°u °°AI ≫o≫oCØ º¸AU. ¿ⓒ·? ºÐAI ´U¸¥ CN ≫c¶÷°u ´eE­¸| CN´U. μI ¹øA° ≫c¶÷AI ´U°¡¿I¼­ ¿ⓒ·?ºÐAC AI¸§ A≫ ºI¸¥´U. AI·I¼­ ¿ⓒ·?ºÐAC AO¸nA≫ ²ø°O μE´U. ´UA½Aº AI·?CN ¿UºIAC ¿aA≫ ¿¡ AA´aCI´A °¡´E¼ºAC ¸n·IAI´U. 1)μI¹øA° ≫c¶÷A≫ ¿IAuE÷ ¹≪½ACI°i ±× ≫c¶÷ AI ¸¶A¡ °A±a ¾ø´A °IA³·³ °e¼OCؼ­ ´eE­¸| ³ª´≪´U. 2)´eE­Aß Æi¸®CN °÷¿¡¼­ ´eE­¸| Aß´UCI°i μI ¹øA° ≫c¶÷¿¡°O AOAC¸| AØ´U. 3)A¹AA ≫c¶÷°u Ai½A ´eE­¸| Aß´UCI°i μI ¹øA° ≫c¶÷°u ´eE­CI±a ½AAUCN´U. ¾i¶² °æ¿iAIμc μI ¹øA° ≫c¶÷ °uAC ´eE­°¡ ³¡³ª¸e ¹æCظ| ¹Þ±a Au¿¡ ³ª´ⓒ°i AO´ø ´eE­¸| °e¼OCI°i ½I¾iCO °IAI´U. ----- Z80 ¸¶AIAⓒ·I CA·I¼¼¼­AC AA¿e, A|AO½º, AUCA·Ð 1. 트럭들이 거칠게 지나가면서 새벽이 밝아오는 지저분한 창문을 뒤 흔든다. 파브르는 작은 카페에서 대충 걸쳐 앉은 채, 탁자 아래에 있는 전날 밤 진흙 투성이가 된 구두를 까딱거린다. 삶은 감자가 묻어 있는 칼날을 빵 조각으로 문지르다가, 다음엔 그 빵을 먹는다. 포도주를 마시는데 그 끔찍한 맛은 입 안의 맛봉오리를 곤두서게 한다. 그러고는 좀 전에 그와 건배하였 던 주인에게 값을 치른다. 7시면 이 거리는 일터의 모습을 갖는다. 비가 오 고 있다. 파브르는, 밤 내내 밖의 모래더미 옆에 뒤집혀 있는 그의 광차를 생각한다. 안개 속에서 삐꺽거리고 칠도 벗겨진 광차를 다시 짐을 싣기 위 해서 난폭하게 일으켜 세울 것도 생각한다. 그는 아직 거기에 있다. 피난처 에, 작업복 호주머니 속엔 하나의 수첩과 굵은 색연필과 퇴직기금증서를 지 니고서. - 끈질긴 노동자, 프랑시즈 퐁쥬 2. 인간은 자기 표현을 보다 강력하고 효과적인 인상과 영향을 주기 위해 갖가지 노력을 아끼지 않는다. 이는 현실에 대한 모방, 자아 욕구의 확 대, 종교성, 욕망의 산물이라는 기원과 동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모든 본능의 최대한의 발현이라는 복합적 표현이다. 3. 수수 그림자 길게 끌린 해설된 신작로가에 우리 어메 날 기다려 상 기도 거기 서 계시더냐 철 지난 옷을 입고 몇번이나 몇번이나 서울쪽 바러 보며 소리 없이 우시더냐 아아 어머니 고향에 돌아가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 요 죽어도 나는 돌아가요 천갈래 만갈래로 육신 찢겨도 나는 가요 죽음 후 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저 벽을 넘어 저 담을 넘어 원귀되어 저 붉은 벽돌 담을 넘어 끝끝내 뚫고 넘어 가요 어머니 죽음 후에라도 기어이 돌아가요 - 소리 내력 중에서 , 김 지하 4. 칸트는 말한다: "순수이성 자신의 이 불가피한 과제는 하나님, 의지 의 자유 영혼의 불멸이다. 온갖 태세를 갖추고 있는 학문의 궁극목적은 본 래 오로지 이 세 과제의 해결을 노리고 있거니와, 이것에 관한 학문을 형이 상학이라고 한다. 형이상학의 방법은 처음에는 독단론적이다. 즉 이성이 이 러한 대사업 - [세과제의 해결] - 을 성취하는 능력의 유무를 미리 검토함 이 없이 함부로 확신을 갖고 그 성취를 도모하는 것이다. 형이상학에 대한 정확한 정의는 불가능할 것이다. 칸트가 [프로레고메나]에서 말하고 있듯 이 형이상학을 고구하는 그 자체가 순수이성의 한계를 명확히 하고 그것을 과학화하려는데 그 소이가 있다할지라도, 형이상학적 충동, 그 근본적 목적 이 하나님, 자유의지, 영혼불멸이라는 세 과제의 해결을 노리는 것에 국한된 다면 그의 모든 형이상학적 과업은 지극히 편협한 문화유형의 문제의식에 갇혀버릴 수밖에 없다. 하나님, 자유의지, 영혼불멸이라는 과제 자체가 모두 기철학적 세계관속에서는 선험성의 대상이거나 도덕적 의식, 즉 순수이론이 이성에서 분리된 실천이성의 요청일 수는 없다. 이 형이상학의 상대과제가 경험속에서 다 해소되어비림으로써 형이상학의 궁극적 대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불멸이나 자유는 오로지 시간 속에서만 확보될 수 있을 뿐이 다. - 기철학산조, 김용옥 5. 작열하는 폭염을 다스리는 태풍이 남쪽을 강타하던 날 동래를 긁으 며 회오리가 미친듯이 해안을 때리던 날 미친 년 머리칼같은 빗줄기를 몰고 이 땅을 치때리던 날 거친 풍랑을 헤치고 나르는 새가 있었다 폭풍이 심할 수록 더 높이 나르는 새가 있었다 그것은 자유 그것은 평등 그것은 노동해 방의 불꽃. .... 아니다 우리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노동자다 노동자는 노동자 를 위해 싸우는 노동전사일 뿐이다 우리는 안다 너희는 조금씩 알지만 우리 는 한꺼번에 안다 너희는 우리를 조금씩 갉아먹지만 우리는 한꺼번에 되찾 을 것이다.... 조작이여, 기만이여, 학살이여, 은폐여, 고문이여, 쿠테타여, 쿠 테타여, 쿠테타여, 쿠테타여, 아무리 피흘려보아라 우리는 간다 죽어서도 우 리는 간다. -- 전진하는 노동전사 ,백무산 6. 87년 당시 5백명 이상을 고용하고 있는 대기업의 수는 총기업의 1.3%인 732개에 불과하지만, 노동자는 전체의 35.4%인 1,077천 명, 생산액은 53.6%인 61조 3,565억 원, 부가가치는 52.2%인 59조 7,539억 원을 실현하였 다. 이러한 5백 명 이상의 노동자를 고용한 기업들은 소위 재별그룹이라 불 리워지는 복합기업군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미 남한의 10대 사적 독점자본 은 1980년 대초GNP의 64%, 수출의 70%를 담당하고 있으며, 그 가운데 과 두그룹인 현대, 삼성, 럭키금성, 대우 등 4대 재벌이 GNP의 40%, 수 출의 50%를 담당하고 있으며 남한 전체 노동자의 4%를 고용하고 있다. -- 남한 자본주의의 현단계, 최지용 7.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났다. -- 누가복음 2장 52절 8. I often wondered when I cursed. Ofen feared where I would be- Wondered where she'd yield her love. When I yield, so will she. I would her will be pitied! Cursed be love! She pitied me... - Memoirs of Lady Ure,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루이스 캐럴 9. 만일 저개발국들에 있어서 오늘날 민족주의의 지배적인 형태가 선 진국의 기술과 가치를 흡수한 비교적 층이 얇은 지식 계층이 귀족정치에 반 대하며 식민산업열강의 도움없이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운동이라 정 의될 수 있다면, 러시아 혁명은 이러한 형태의 민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표 현의 하나로, 그리고 확실히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지 모른 다. 이는 러시아 혁명이 오직 민족주의 운동으로서만 이해될 수있다고 주장 하는 것은 아니다. 러시아 혁명은 또한 프롤레타리아 운동, 농민 운동, 무신 론자 운동, 구세주적 운동, 또는 국제주의 운동으로서도 마찬가지로 타당하 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다만 저개발국들의 민족주의 운동이 러시아 혁 명과 어떤 공통점을 갖고 있는가를 보여주려는 하나의 시도가 중요한 가설 을 제공해 줄 수도 있으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의 역할과 성격, 그리고 민 족주의와 공산주의의 관계에 대한 흥미있는 통찰을 제공할 수도 있다는 것 을 제시할 따름이다. - 공산주의의 민족주의화, 카우츠키 10. 하트필트와 나는 1915년에 이미 오래된 사진으로 몽타즈를 하는 흥미있는 실험을 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1915년부터 있었던 그로츠와 하트 필드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항상 낡아빠진 파란색 저고리만 입고 다니는 하트필드를 위해 몽퇴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리고 우리의 공 동작업에서 나온 작품은 우리를 매우 흥분시키기에 충분했다...... 1916년 5월 어느 날 아침 5시, 존 하트필드와 나는 베를린 남쪽 끝에 있는 내 스튜디오 에서 포토몽타즈를 발명했다... 우리는 마분지 조각 위에 탈장용 벨트 광고 물을 뒤범벅해서 붙이고, 학생들의 음악 책과 동물용 사료깡통, 네덜란드산 드라이진, 포도주병등에서 따온 라벨, 그리고 신문에서 오린 사진들을 덧붙 였다. 이들은 언어로 표현되면 검열관에 의해 금지될 만한 것들로, 모두 그 림에서 오려 붙인 것이다.... 포토몽타즈가 '이름없는 대중'의 발명이라는 전 설을 만들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하트필드가 선동적인 정치풍자로 시작 된 포토몽타즈를 의식있는 예술적 테크닉으로 발전시킬 준비를 했다는 점이 다. -- 포토몽타즈, 던 에이드스 11. 근대 민법은 개인주의, 자유주의 입장에서 서서, 개인을 봉건적 구 속으로부터 해방하고 개인의 인격을 존중하는 것을 그 이상으로 하므로, 개 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한다....... 사적자치의 원칙, 소유권절대의 원칙, 과 실책임의 원칙이라는 근대민법의 삼대원칙에서 구체화되고 있다...이러한 원 칙은 자본주의 경제조직의 기반이 되고 원동력이 되어 그 발전에 크게 힘이 되었지만, 반면 그 발전에 따라 이러한 원칙의 결함도 나타나게 되었다. 즉 자본주의 경제의 발전의 결과로서 사람들 사이에 심한 부의 격차를 가져왔 고 경제적 강자와 약자와의 계급적 대립을 생기게 하였으며, 구체적인 인간 은 결코 자유, 평등한 인격이 아니라는 것이 명백하게 되었다. -민법 개론, 김두수 12. 인터럽트란 무엇인가? 인터럽트를 다음과 같이 상상해 보자. 여러 분이 다른 한 사람과 대화를 한다. 두 번째 사람이 다가와서 여러분의 이름 을 부른다. 이로서 여러분의 주목을 끌게 된다. 다음은 이러한 외부의 요청 에 응답하는 가능성의 목록이다. 1)두번째 사람을 완전히 무시하고 그 사람 이 마치 거기 없는 것처럼 계속해서 대화를 나눈다. 2)대화중 편리한 곳에서 대화를 중단하고 두 번째 사람에게 주의를 준다. 3)첫째 즉시 대화를 중단하고 두 번째 사람과 대화하기 시작한다. 어떤 경우이든 두 번째 사람 과의 대화가 끝나면 방해를 받기 전에 나누고 있던 대화를 계속하고 싶어할 것이다. ----- Z80 마이크로 프로세서의 응용, 제임스, 코프론 조루뿐인 남자, 데리다의 죽음과 슈퍼맨의 철십자 훈장 파천황기(破天荒記) 2004. 10. 12. 3:14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6552110 통계보기 재생하기 바로보기가 지원되지 않는 파일입니다. 클릭하여 팝업창으로 플레이 해보세요. New york 7:16 AM It's beautiful world me live in A sweet romantic place Beautiful people everywhere The way they show they care makes me want to say it's beautiful world it's beautiful world for you... It's a wonderful time to be here It's nice to be alive wonderful people everywhere The way they comb thire hair makes me want to say It's wonderful place for yoy for yoo for you...... .........not me RATM Beautiful World http://blog.naver.com/mabara/60006040009 조루뿐인 남자, 데리다의 죽음 1987년 6월 항쟁 이후 비로소 성립한 역사적 좌파는 눈물을 흘려야 했다. 하나는 우상호를 비롯한 당시 학생 지도부가 역사에 씻지 못할 행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역사적 좌파에 아무런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인해 계엄령을 섣불리 저지를 수 없었던 지배계급과 손쉽게 타협한 까닭이 있다면 그들이 김영삼, 김대중을 지나치게 신뢰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 후보단일화라는 가면을 쓴 사이비 좌파들이 역사적 좌파의 다수파가 되어 김영삼 편을 들어 백기완 후보를 사퇴시켰으니 역사적 좌파의 좌파는 두 번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노태우 제 4기 체제라는 노무현 정권하에서도 여와 야로 나누어 국회의원도 되고 무엇도 되어 권력을 만끽하고 있으니 다행스런 일이기는 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권력을 잡고 있어도 무엇하나 바뀐 것이 없기 때문에, 그들이 늘 말하는 당장의 현실 운운에서 그들이 어떤 현실도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하여 역사적 좌파의 좌파는 김일성주의자들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태도에 절망하여 자신들을 반성하기 시작했다. 그 작업의 일환이 원전 읽기였으며, 사르트르로 대표되는 실존주의적 경향, 초기 맑스 저작으로 대표되는 인간주의적 경향에 대한 비판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이 경향에 불을 지른 것은 말할 나위없이 소련의 붕괴였다. 한국에서는 이제 막 역사가 시작하려는데 세계에서는 역사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들여온 알튀세르란 역설적이기 그지 없었다. 평생 아우슈비츠의 감옥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는 알튀세르는 미소냉전체제하에서 이론적 실천, 자본을 읽자, 과학적인, 최종 심급, 생산력주의와 주의주의 등을 유행시키면서 사르트르가 하지 못한 소련 스탈린 정권에 대한 비판을 하였던 것이다. 사르트르와 까뮈를 결별시킨 사르트르의 스탈린 정권에 대한 철학적 옹호와 어떻게 비교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스탈린 사후 1956년 소련의 미국과의 평화공존전략 채택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알튀세르는 글을 쓸 엄두를 내지 못했다고 고백한 바 있다. 사르트르가 파시즘에 맞서 싸운 스탈린 정권의 공과에서 과를 버리고 공을 취했다면(스탈린그라드의 치열한 전투가 없었다면 연합국의 승리가 불투명하였을 것이며, 파시즘 체제의 지속으로 자칫 히틀러의 구상대로 미국과 독일간의 세계체제 분할로 프랑스가 여전히 독일 치하에 놓여 있을 수 있었다는 점.), 나아가 연합국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취약한 스탈린 정권에 대한 비판을 자제한 것이라면, 알튀세르는 소련의 미국과의 평화공존 전략의 결과 소련이 체제적인 보장을 받았다는 점(마치 김대중, 노무현 정권하에서 그들을 지지하던 이들이 김대중, 노무현이 정권을 차지하자 이제는 비판할 것은 비판하겠다는 비판적 지지 태도를 보여주거나 혹은 공개적인 지지를 거두겠다던 것과 비교할 수 있다.), 동시에 새로운 혁명 역량인 중국에 기울어지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알튀세르의 스탈린주의 비판은 어떠하였던가. 막 탄생한 중화인민공화국은 스탈린 정권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그러나 스탈린이든, 후루시쵸프든 소련은 전쟁 이후 피폐해진 산업 등 국내 문제에 몰두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탄생 직후를 제외한 1950년대 내내 자급자족하려는 모든 경제 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책임자인 모택동이 2선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와 같은 실패를 소련 자국주의 중심, 패권주의, 수정주의로 판단하면서 모택동 일파는 스탈린주의를 고수할 것과 혁명의 확산을 주장하며 문화혁명을 일으키고, 소중 사이에서 등거리 외교를 하는 조선인민공화국에 대해 기회주의, 수정주의라고 몰아붙였다. 이는 서유럽에서의 공산당 확산을 절실히 바라는 이해 관계와 맞아떨어졌기에 알튀세르의 중국 편향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스페인 내전에서 벌어진 스탈린주의자들의 패권주의적 경향에 실망한 다수의 반스탈린주의 좌파들의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냉혹했다. 만일 그러하다면, 독소 불가침 조약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 것인가. 만일 그러하다면, 국내외적 열악한 조건일지라도 부하린의 주장대로 일국적 사회주의를 넘어서서 서유럽에서의 혁명으로 달려나갔어야 하지 않겠는가. 로자 룩셈부르크를 고독하게 죽일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만일 그렇다면 레닌을? 아니다. 여기까지다. 금기를 지켜야 한다. 이 묘한 상황들. 한편으로는 일국적 사회주의의 길을 걸어온 역사적 유물론, 혹은 철학을 내심 수용하면서도 겉으로는 과학을 주창하는 모순에 봉착한 서유럽 좌파의 모습이 바로 알튀세르였다. 여기에 전전 그람시가 아닌 전후 문화주의적으로 해석된 그람시가 결합되면서 그 모습은 현재 남한에서도 그대로 보여주는 바다. 민노당을 그 누구보다도 통렬히 비판한다는 민노당 내외 세력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김대중, 노무현 지지자들을 그토록 비판하는 민노당파들은 똑같은 이유로 민노당파를 비판적 지지한다. 민노당이 좋아서가 결코 아니라고 한다. 동시에 민노당이 보다 급진적이기 위해서 견제와 비판이 필요하다면서 내외의 비판세력으로 남는다는 것인데 대부분은 문화주의적으로 해석된 그람시이다. 만일 수사화된 표현이 아니라 정말로 민주노총을 비판하고, 민노당을 비판한다면? 소위 역사적 좌파에서는 그간 사회당 세력에 대해 거론되었던 것처럼 웃음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견딜 수가 없었던 사회당 현재의 주류는 결국 이러한 경향에 타협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사회당이 존립할 이유가 무엇이었던가. 지난 대선까지는 그 누가 뭐래도 사회당은 종파주의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같은 종류여야만 종파주의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종파주의다. 왜냐하면 같은 종류이니까. 깃발을 내리고 민노당에 투항하는 것만이 종파주의를 해소시킬 수 있다고 나는 본다. 그러나 프랑스 공산당은 나날이 그 역할을 잃어갔다. 여전히 충실한 소련의 개로 남아 있던 프랑스 공산당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으려던 알튀세르의 노력이 있었기에 프랑스의 좌파 지식인의 지지를 받을 수는 있었지만은 현실의 벽만은 넘지 못했다. 갈수록 프랑스 노동자층의 지지를 잃어갔고, 그럴수록 알튀세르의 노력은 더욱 난해해져갔다. 어떻게든 좌파 지식인들만이라도 건지려는 알튀세르의 노력. 그러나 68이 이러한 알튀세르의 시도를 간단히 날려버리고 만다. 마침내 역사적 유물론이 뭐 어쩔길래? 다 사기다,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선을 넘었다. 마치 노무현을 비판적 지지하다가 노무현 정권의 이라크전 참전으로 붕 뜬 핵심 세력이 민노당 지지로 선회하여 권영길은 5% 지지하면서 민노당은 18% 지지하는 양상을 현재 보여주고 있는데 이를 수군작 같은 따위가 이를 정당화하려고 알튀세르스런 몸짓을 날려 보지만 남한의 압축 경제성장처럼 남한의 현실도 압축적으로 나타나 그들이 십년에 걸친 행적을 단 몇 년 안에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고나 할까. 노회찬스런 이들과 달리 젊은이들이, 노동자들이,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소련을, 역사적 유물론을 정말로 거부해버린 것처럼 노무현정권을, 민노당을 정말로 거부할까 노심초사하는 것이 바로 그들인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 유물론이란 것이 무엇인가. 거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버마스가 세상에서 가장 어두운 책을 썼다고 평가하는 아도르노 같은 이는 이러한 사정에 봉착하여 68에 비판적이었지만 페미니스트들에 의해 봉변을 당한다. (데리다는 아도르노상을 받았다.) 그나마 알튀세르에게는 비빌 언덕이라도 있었다면, 도대체 남한 좌파에게 비빌 언덕이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김정일 정권? 카스트로 정권? 이런 것도 좌파인가 하는 문제와 별개로 이 놈들이 세계에 무슨 역할을 한다는 말인가. 중국 현재 정권? 과거 소련의 냉전체제 당시의 평화공존 전략을 소련에서 단지 중국으로만 이름만 바꾼 전략? 자, 냉정하게 말해 보자. 그래도 소련은 노멘클라투라라는 관료가 비판받았을지라도 현재의 중국 공산당 정도는 되지 않았다. 힘? 중국이 힘이 있던가. 근래 미국 측에서 나오는 의도된, 과장된 평가에 의존한다면, 과거 소련에 대해 대응했던 미국 측 입장을 참고하기 바란다. 남한 인민을 속일 수는 있을 지라도, 세계 인민을 속일 수는 없다. 정권을 유지시킬 수는 있어도, 영속시킬 수는 없는 셈이다. 알튀세르는 그래도 복을 받은 이이다. 왜냐하면 모택동 시대의 끔찍한 문화대혁명의 기억이 없으니까. 반면에 남한에는 알튀세르와 문화대혁명의 끔찍한 기억이 동시에 기억된다. 여기에 천안문 사태가 부가되고, 또한 소련 보수파의 무기력한 침몰이 부가된다. 아도르노는 순진했다. 내면을 그대로 노출하였으니 말이다. 이 문제를 어떻게 풀면 좋을 것인가. 비정규직, 이주노동자, 여성, 장애인 기타 등등의 이 모든 문제를 노동자계급 중심적으로, 역사적 유물론적으로 어떻게 풀어가야 할 것인가. 철학적으로 이를 어떻게 옹호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데리다가 등장한 셈이다. 데리다는 페미니즘, 자주이론, 탈식민주의의 이론적 자양을 듬뿍 선사한다. 마치 들뢰즈처럼 역사적 유물론을 전면 거부한 것처럼, 니체주의자인 것처럼 등장한 데리다. 그러나 사르트르처럼, 알튀세르처럼, 데리다 역시 교묘한 배신을 때리기 시작한다. 갈수록 자신은 맑스주의자라고 주장하기도 하며, 맑스주의만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하기도 하고, 헤겔에 대해서도 갈수록 찬사를 늘어놓기 마련이니 어찌된 일인가? 아도르노는 순진해서 논파가 가능하지만, 데리다는 교묘하기 그지 없어서 논파하기 어렵다. 그것이 데리다의 전술이었다. 모든 것에 대해 난해하기.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프랑스인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방식은 아는 체하는 이들의 입을 다물게 하는 것이다. 그 효과는 굉장하기에 프랑스인처럼 아는 체하기 좋아하는 남한 지식분자 애새끼들 입마저도 다물게 한 것이다. 대신 들뢰즈이니, 라깡이니, 최근에는 지젝이니 하는 입맛이 맞는 애들이나 운운하면서 먹고 산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데리다의 효과도 이제 끝나가고 있다. 그의 유령도 죽음을 맞이한 셈인가. 역사적 유물론이 종말을 맞이하고 있다. 들뢰즈처럼 자살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쥐떼들의 노마드 행진이 계속되고 있다면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한 이들이 그토록 막고자 했던 파시즘을 막을 도리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과학에서 패배하여 철학으로 돌아갔는데 철학에서도 이제 막을 내려야 하나? 맑스나 레닌이 부럽다. 세상이 어수선할 때 헤겔을 공부하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헤겔 약효도 다 떨어져 가는가?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고만 것이다. 사르트르는 몰래 다른 남자와 연애하던 시몬느 보봐리를 막을 수가 없었으며, 알튀세르는 아내를 목을 졸라 죽였으며, 데리다는 과거 트로츠키주의자였다가 변절하여 출세한 죠스팽에게 아내를 내주었다. 미국 이외에서 혁명을 고뇌하는, 새세상을 바라는 노력이란 이처럼 비참한 귀결일 수밖에 없는 것인가. 히틀러의 제 3제국과 같은 파시즘적, 마초적 유혹을 억누르면서 동시에 노동자층에게 슈퍼맨의 면모를 보여주어야 하는 고달픈 신세의 종착지는 어디인가? 슈퍼우먼의 신화가 사라져야 한다면, 슈퍼맨의 신화도 사라져야 한다. 하지만 왜 여전히 슈퍼맨의 신화는 오늘도 방송가를 지배하고 있는 것인가? 세상이 너무나 절망스럽다. 나는 아직도 이성의 회복을 바라며, 희망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다. 역시 신좌파적이고,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하버마스가 많은 이들을 제쳐 두고 하필이면 데리다만을 상대로 한 것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의 공통 관심사가 이들 내에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통독이라는 과제로 인하여 독일과 프랑스의 차이가 있음에도, 또한 현재 유로공동체에 터키 가입 문제에 대해 터키 인구수로 인하여 독일의 지지와 프랑스의 반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로서는 이러한 차이를 넘어선 공동 대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 부시정권의 이라크전 반대, 동시에 그들은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한 이들의 전례대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 대한 비판도 잊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잊혀질 것이다. 실존주의, 최종심급, 해체처럼 말이다. 양철북의 자식들. 그들은 어른 되기를 멈춘 채 흘러가는 역사를 보고 있을 뿐이다. 변절하는, 위선적인 이들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현실보다 텍스트에서 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하여, 방송에서 취급해주지 않는다 하여, 또한 신문에서 엉터리로 취급해준다 하여 비판하기 보다는 나는 조용히 있기로 하였다. BBC방송 사장이 내한해서 말하길 젊은이들 다수가 신문을 읽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 누가 요즘 긴 글, 책을 읽는다는 말인가. 내가 여기서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설사 나설지라도 무슨 의미가 있다는 말인가. 자학과 자책만이 나를 뒤덮는다. 나는 못난 놈이다. 짧은 글들로 신문 칼럼에 알맞은 크기로 저마다 저 잘났다고 떠들 때 이렇게 긴 글로 아직도 못나기 그지 없는 역사적 유물론을 간직하고 있으니. 내가 죽일 놈이다. 길거리를 지나가다 섹시한 여자를 우연히 보았는데 내 페니스가 꼴렸다. 이에 대한 각계의 평가. A : 그것은 전적으로 섹시한 여자의 탓이다. 섹시한 여자가 날 좀 어떻 게 해줘라는 의사표시이다. 그녀의 몸부림은 실로 신성하기 그지 없다. 그러나 너의 꼴림이 없다면 아무 의미없는 것이다. 그녀의 섹시함을 완 성시키기 위해 너의 꼴림이 일어난 것이다. 너는 그 꼴림을 그녀에게 아낌없이 싸질러야 할 신성한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다 할 때 비로 소 신성함이 완성되는 것이다. 그녀가 혹 일시적인 반항을 한다면, 그 것은 자신의 본질적 행위를 미처 깨닫지 못 하는 우둔함이거나, 당신의 꼴림을 더욱 도발하려는 몸짓이다. 따라서 너는 즉각 그녀를 범하라! 그것이 그녀를 위한 것이다. 그녀는 지금 그것을 원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그녀를 위한 민주주의이다. 네가 얻을 것은 사정으로 인한 피로함 이요, 잃을 것은 수억개의 정자, 즉 네 분신이다. 너는 네 분신을 그녀 에게 주었다. 너의 그 순결한 피를! B : 그것은 그녀의 꼴림과 너의 꼴림이 순간적으로 궁합이 맞았기 때문 이다. 너만 꼴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녀도 꼴림이 있다. 이 경우 전 후 관계가 분명치 않다. 네 꼴림이 먼저인지, 그녀 꼴림이 먼저인지 확 실하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녀에게 접근하여 '씹하자'고 제안하라. 만일 퇴짜를 맞는다면 그녀 꼴림이 먼저 일어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녀에게 우선권이 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만일 성공한다면, 너 의 꼴림이 우선한다. 너에게 우선권이 있게 되는 것이다. 너의 잠재적 꼴림을 그녀가 도발시켰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이든, 사태가 불운하게 끝난다면 그녀의 탓이며, 사태가 잘 되었다면 너의 탓 이다. 그러나 말만은 그렇게 하지 마라. 내심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그것이 진리이니까. 레이디 퍼스트! 만일 그녀가 '씹하자'는 제안을 거 절해도 끈질기게 요청하라. 열번 찍어 안 넘어가는 년(?) 없다. 그래도 거절한다면, 납치할 수도 있다. 그녀를 꽁꽁 묶어서 고문하는 행위도 할 수 있다. 그녀의 입에서 '나도 꼴렸다'라는 진실이 나올 때까지 말이 다. 아직 여자는 스스로 '씹하자'라고 말할 수 없는 시대임을 충분히 감안하라! 그것이 바로 그녀에 의한 민주주의이다. 대다수의 그녀들은 아직 미망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하니 그녀에 의한 민주주의가 실현될 수 있도록 계몽하라! 그녀에게 아낌없이 사정, 주입시켜라. 그녀의 꼴 림은 오로지 나의 꼴림에 의해 완성된다. C : 그것은 직접적인 아무 관계가 없다. 만일 관계가 있다면, 당신의 상상 속에서만 실현된다. 그러니 화장실에 가서 볼 일을 보든가, 아니 면 그녀에게 '씹하고 싶나요?'라고 물어 보라. 그녀가 없다고 한다면 아무 관계가 없는 것이다. 설령 그녀가 씹하고 싶다고 하더라도 너의 꼴림과 관계가 있다기 보다는 그녀 스스로의 꼴림 때문이다. 그녀가 너 를 인식한 것은, 네 꼴림 이후이니까 말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녀는 꼴렸다기 보다 '벌어졌다'고 표현해야 정확하다. 네가 꼴렸다 고 그녀도 꼴렸다고 판단하는 건, 순전히 자기 중심적 사고이다. 만일 그녀가 하자고 해서 한다면, 그 이후는 철저히 서로의 의견을 합의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하니 꼴렸건, 벌어졌건 중요한 건 '합의'이 겠다. 합의에서 네가 올라타든, 그녀가 올라타든 문제가 없다. 그러나 '합의'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문제가 심각한 것이다. 그것의 그녀의, 나의 민주주의이다. 따라서 너는 네 페니스를 최대한 휘둘러 너의 즐 거움을 만끽하면 되는 것이고, 그녀 또한 그녀의 것을 흔들어 그녀의 즐거움을 만끽하면 되는 것인데 이때 중요한 건 둘 다 만끽해야 한다 는 것이다. 그녀를 위하는 즐거움이나, 그녀에 의한 즐거움이 너의 목 적이 아니라 오로지 너를 위한 즐거움이다. 그녀도 그렇다. 민주주의란 그 수만도 수십가지가 되는데 대략 민중(PEOPLE)을 위한 (군주제), 민중에 의한(대의제), 민중의(참여제) 권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A, B는 그간 '용의 눈물'이나 '제 3공화국'을 통해서 많이 홍 보가 되지만 C의 견해는 현재 사법당국에 의해 규제받고 있다. 매춘, 마광수 선생과 대립되었던 주제 중 하나. 마선생은 사르트르적이었던 만큼 신뢰할 수 없는 '이성'으로 물질 세계를 손쉽게 재단하려는 시도를 거부하였고 그들 자신의 눈으로 볼 것을 주문하였다. 가령 마선생은 한 건축학과 대학생의 죽음을 접하면서 이것이 연세대의 자유로운 정신이다,라고 주장한 바 있다. 연대에 재학중이던 건축학과 대학생은 몸을 팔던 까페 여성을 우연히 접하였고, 소설에나 나올 법하게 그녀와 사랑에 빠졌다. 건축학과 대학생은 그녀와 결혼을 할 것을 결심하였지만, 몸을 팔던 까페 여성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왜냐하면 건축학과 대학생과 자신이 신분적으로나 계급적으로 많은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자가 전도유망한 대학생이라면 그녀는 몸을 파는 매춘부였고 남자 집안이 빵빵하다면 그녀 집안은 콩가루였기 때문이다. 대학생은 이러한 차이를 사랑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여겼고 그녀는 극복하기 힘들다고 여겼다. 그녀의 거절에 괴로워하던 대학생은 자살했다. 연인 보봐리에게 거리의 창녀로 나서라고 주문하기도 했던 사르트르. 마선생은 사라처럼 육체가 더럽혔으되, 정신은 순수하여 오히려 더욱 빛이 나는 여성, 더 나아가 오히려 자신이 있는 삶을 통하여 그 어떤 처녀보다도 더 매혹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성을 그리워했다. 그러한 여성을 현실에서 찾아보기 힘들기에 마선생은 소설에서 자신이 만든 여성과 사랑을 했다. 물론 현실에서도 사랑을 했지만, 그야말로 현실의 여성이란 자신이 만든 여성들보다 불완전하기에 소설에서의 여성을 더욱 사랑했다. 마선생은 자유주의자다. 오세철 선생이 강의에서 보수주의, 자유주의, 진보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하면서 보수주의자는 김동길, 자유주의자는 마광수, 진보주의자는 오세철 이런 식으로 주장한 적이 있다. 그런데 팔십년대에는 자유주의자하면 욕설에 가까운 편이었다. 지금은 소련이 붕괴하면서 99%의 사회주의자가 자유주의자로 개종하면서 이제는 극히 일부만이 자유주의를 욕설적 의미로 사용한다. 아니,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거리를 두는 이들은, 혹은 이론의 자율성을 고려하는 이들은, 혹은 철학과 미학으로 말하는 이들 중에서 몇몇 이들이 마치 자신은 그렇지 않은 양 자신의 이야기를 주장하고는 한다. 즉 자유주의를 비판함으로써 자신은 자유주의를 벗어나 사회주의자로서 여전히 행세할 수 있다고 하는 믿음이다. 하지만 과연 알튀세르, 아도르노, 데리다, 하버마스, 캘리니코스 등이 처한 현실은 무엇이었던가? 철학이 외부로부터 격리된 데서부터, 계몽을 대신한 계급투쟁에서부터 동떨어진 데서 그들의 이론이 시작된다는 데에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양적인 차이에 불과했다. 기본 전제는 같았다. 헤겔적이건, 혹은 반헤겔적이건 카스트로주의자나 김일성주의자 같은 이를 제외하고서는 그들 모두는 신좌파적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고, 급진적 자유주의자로 귀결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남한에서 주사파가 거의 궤멸되다시피 한 가운데 대다수의 민족해방론자들은 신좌파적, 급진적 자유주의자, 사민주의로 개종했다. 이런 까닭에 나는 민노당에서 성소수자 문제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본 것이다. 성소수자를 받아들이다니 이 무슨 자유주의적 행태란 말인가? 라고 비판하는 이들은 없었다. 이미 4인터내셔널과 같이 구좌파적이라고 간주하는 곳에서조차 성소수자 문제를 받아들일 뿐만 아니라 국내에서도 구좌파적이라고 하는 노동자의 힘마저도 신좌파 이론과 이론가들이 범람하고 있다. 자유주의가 팔십년대에, 그리고 사회주의자에게 비판을 받은 이유는 있다. 다른 세계가 현실적으로 가능하다. 현실적으로 가능함에도 자유주의는 세계 바깥으로 나가려 하지 않고 세계 안에 안주하려 한다는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이 말하는 다른 세계는 사회주의 국가였다. 더욱 정확히 말한다면, 소비에뜨 연방이었다. 노동자계급에게 조국이 없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계급에게 조국이 있으며 유일한 조국은 소비에뜨 연방이었고, 나머지 인민민주주의공화국은 나폴레옹 제국 안에 있던 수많은 공화국처럼 소비에뜨 연방의 부분이었을 뿐이다. 그외의 민족국가란 타파되어야 할 부르주아 국가였을 뿐이다. 레닌 시대와 달리 스탈린 시대에서는 이러한 교의가 흔들렸다. 스탈린이 남긴 유산 덕분에, 무엇보다도 세계 혁명의 중심이 유럽 독일에서 러시아로 이행한 후에 유럽은 더이상 혁명적 실천의 중심이 아니었다. 소련이 붕괴하기 전까지 대다수의 유럽 이론가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스탈린주의 노선을 따라가면서 즉, 각국 공산당의 스탈린주의 추종 노선에 남아 있으면서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 거리를 두며 철학과 문화에서만 발언했다. 철학과 문화에서의 자율성을 내세우며, 러시아 정서와 차이가 있는 특수한 서유럽 정서를 내세운 것이다. 매우 합리적인 태도로 보이는 듯한 이러한 태도는 낡은 유럽이 더이상 세계의 중심이 아닌 데서 비롯된 것이다. 유럽 이론가들은 정치적, 경제적인 면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 다만 학술적인 데서만 자신들의 지위를 간신히 유지할 따름이었다. 이런 자신들의 처지를 벗어나고자 택한 것이 반헤겔주의 노선이었던 셈이다. 이 모두가 변방의 슬픈 자화상일 것이다. 캘리니코스, 하버마스, 데리다, 알튀세르 그 모두가 지닌 노선 말이다. 나는 군에서 제대한 후 이론을 현실과 별개로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발생한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전까지의 이론은 자율성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론이란 혁명 조직 실천의 표현이었을 뿐이다. 내가 이론을 자율적으로 공부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이 변했음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묘하지만, 소련이 붕괴한 연후 독일 베를린과 맑스 생가를 둘러 보며 느낀 감상은 레닌이 사라졌고, 맑스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생존해 있다는 것이다. 맑스와 로자는 유럽에서 활동했다. 나는 마치 그간 서유럽이 레닌이라는 혁명가로 인하여 죽은 듯이 살아온 것처럼 느꼈다. 소련이 붕괴하자 서유럽은 다시 자신이 중심이 될 것이라고 여겼을까? 유럽연방이 과연 유럽의 옛 지위를 회복시킬 수 있을 것인가? 그리하여 다시 이론과 실천의 통일적 계기를 마련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각국 이론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이들도 유럽의 현재 지위처럼 소련이 붕괴하였음에도 오히려 전보다 더 열악한 유럽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활동가들도 마찬가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에서의 자유주의는 시장의 자유를 주장하는 시장주의자, 유럽적 전통이 아닌 미국식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를 의미한다면, 오히려 부시 공화당은 이에 대해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이며, 기독교 근본주의적이라면, 미국 민주당이 미국적 민주주의가 이민사로부터 시작했음을 강조하면서 이민층의 지속적 교체를 통해 시장 자유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 자유 민주주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는 편이다. 헐리웃과 월스트리트는 이 점에서 민주당 편이라고 볼 수 있다. 반면 유럽에서의 자유주의는 유럽적 전통을 거부하면서도 미국식 자유주의도 거부하는 모호한 양상을 띠고 있다. 유럽 보수주의 역시 부시 공화당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면 부시 공화당처럼 세계 패권을 움직이기에는 부담스러운 위치라는 점이다. 마치 가난한 가부장이라고나 할까? 스탈린을 경과하면서 유럽적 자유주의는 소련식도 정서적으로 거부하게 되었으며, 이는 제 3세계에서의 민족해방투쟁과 연결되었다. 비유하자면, 가난한 집안의 아내가 유식하지만 조루뿐인 남편에 실망하지만 무식하면서도 졸부 행세하는 스탈린 마초에게는 더더욱 실망하여 하인 남자랑 바람핀다고 해야 할까? 하인의 무식하지만, 오히려 무식한 만큼 빛나는 근육질 몸매에 반했다고 할까? 각자 입장은 조금씩 다르지만, 체게바라, 호치민, 모택동이 환호를 받았다. 그들은 이러한 자유주의를 통하여 낡은 유럽이 새 유럽으로 바뀔 것이라고 여긴 듯하며 나아가 새 유럽이 다시 세상을 움직일 것이라고 본 듯하다. 이것의 정점이 68년일 것이다. 그러나 68년은 지나갔고, 그들은 자신이 잠시 멋진 꿈을 꾼 것에 지나지 않음을 깨닫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환호했던 모택동의 문화혁명도 사실은 스탈린보다 더욱 혐오스런 추악한 모택동의 야욕에서 비롯된 것이며, 인민들이 그로 인하여 엄청난 고통에 시달려야 했고, 심지어 폭력의 대행자로 나섰던 홍위병들조차도 모택동이 홍위병을 경계하여 홍위병을 산간으로 추방시킨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그들은 히틀러의 제3제국에 대한 것만큼이나 중국에 대해 충격을 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20세기의 가장 빛나는 투쟁으로 모두가 주저함이 없이 손을 꼽는 호치민 이후의 베트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레닌의 예를 따라 사후 자신을 우상시하지 말 것을 주문한 호치민의 바램과는 달리 혁명가 호치민이 후예들에 의해 사후 우상화된 호치민이 되었고, 그 후예들이 즉시 타락하였으며, 역시 타락하여 패권화한 중국 공산당과 공산당끼리 싸웠다. 자유주의는 끝났다. 소련 사회주의가 끝남과 동시에 유럽 자유주의 역시 종말을 고했다. 단지 소련 사회주의의 미약한 견제, 도덕적 장치로만 작용했던, 그러니까 한국에서 보자면, 민족해방파가 현실에서 권력을 추잡하게 장악해갈 때, 사이비 좌파, 즉 자유주의자들이 사민주의이니, 사회주의이니 뭐니 헛소리를 해대며 민족해방파의 현실 권력 장악에 대해 더욱 추악하게 비판적 지지를 하는 그것이 사실은 유럽 신좌파, 자유주의, 사민주의자들의 정체였던 셈이다. 김대중, 노무현 비판적 지지에 이어 민노당 지지로 나아가는, 그리고 나처럼 사회당 비판적 지지로 나아가는 그러한 모습들은 서로가 나는 좀 더 왼쪽이라는 선명성 경쟁 외에는 사실 처한 조건이나 기본적 태도는 동일하다. 현재 아무도 자신을 혁명가로 여기지 않는다. 오로지 수사적으로만 혁명적인 척할 따름이다. 즉 개혁을 비판하는 것이 혁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아니, 이제는 개혁다운 개혁을 말하는 것 정도로 추락한 것이 현실이다. 아마도 내일은 오늘날의 소련과 유럽에서처럼 국내 민족해방파와 사이비좌파 주류들은 개혁다운 개혁 정도가 아니라 개혁이라는 이름만이라도 있는 정도로 만족할 것이다. 아니, 이미 지금 당장 현실로 나타나는지 모른다. 하여, 이론과 현실은 보다 멀리 떨어져 있다. 매춘에 대한 논쟁들. 현실감이 결여되어 있는 이 논쟁은 마치 자유주의 대 사회주의, 사민주의 대 사회주의, 개혁 대 혁명으로 대별되는 듯하다. 하지만 현 노무현 정권의 매춘 문제에 대한 이러한 접근은 상기한 것과는 거의 무관하다. 성매매율이 많으니, 적으니 운운하기 전에 지녀야 할 태도는 현실에 대한 기본적 태도이다. 혁명에 대해 포기하였는가? 물론 나 개인은 여전히 혁명에 대해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건 그저 개인적 견해일 뿐이다. 여기서 단 한치라도 벗어난 이가 과연 한국에 있는가? 나는 없다고 본다. 없다. 물론 북한 김정일 정권과 한민전 추종하는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서는 말이다. 현 노무현 정권의 매춘 문제는 두 가지 맥락이다. 하나는 경제적인 문제인데 지금 서비스 부문과 제조업 부문에서의 여성 노동 인력 확보 문제가 크다. 이들 여성 노동 인력은 한국 사회에서 저임금 3D업종에 다수 포진해왔는데 대표적으로 아줌마들이 그들이다. 무엇보다도 제조업 부문에서의 문제다. 아무리 생계가 어려워도 젊은이들처럼 아줌마들이나 아가씨들이 박정희 시대 때처럼 공장에 가지 않으려 않는 경향이 있다. 아울러 구십년대부터는 이들이 서비스업에서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이천년대 들어서는 이제 서비스업에서도 비상이 걸렸다. 가령 노래방 도우미가 그것이다. 식당에서 일을 해야 할 아줌마들이, 아가씨들이 모두 노래방 도우미나 안마시술소 같은 데서 일하는 것이다. 나아가 인터넷을 통해서 하니 문제인 것이다. 대부분이 영세 자영업종인 제조업, 서비스업에서는 (돈 좀 만질만한 것이면 대기업이 진입한 상황이다) 침체된 내수 경기, 동종 업계간 심각한 경쟁으로 한계상황으로 몰리고 있다. 아무리 지금 백수라지만, 몸 파는 아가씨라지만 꿈은 삼성 입사요, 기주 같은 남자 만나는 것이 소원인 이들이기에 영세 자영업종에서 일하는 것은 벌이도 되지 않을 뿐더러 자존심도 서지 않는다. 하여 남자는 일확천금을 노리며 사기나 은행털이나 로또를 기대하고 있고, 여자는 몸을 팔며 로또를 기대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상황에 봉착하여 각계 시민단체의 압력으로 인하여 - 한국의 진정한 시민단체란 전국목욕탕협회 같은 것일 게다. 그러나 이런 시민단체가 당국에 진정을 하면 당국 실무자의 답변은 이렇다. 이익집단의 로비로 비출 수가 있으므로 명분이 필요합니다. 영향력이 있는 시민단체와 연계해서 요구해 주세요. 그 영향력이 있다는 시민단체란 말할 나위없이 참여연대이니 경실련이니 그런 것일 게다. 과거에는 자유총연맹이니 하던 일을 이들이 요즘 맡고 있는 것이다. - 노무현 정권은 매춘 단속에 나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요즘 패스트푸드점을 때리고 있지 않던가? 이것 왜 때리는가? 패스트푸드점이 그나마 외국기업과 대기업이어서 그런 것이다. 이는 영세자영업자들을 도와주는 것인가? 전혀 아니다. 물론 경쟁상대인 그들을 타격하니 순진하게 좋게 여길 수 있지만 사실은 성동격서라고 영세자영업자들에게 경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직접적으로 하면 곤란하다. 왜냐? 결국은 20% 정도 된다는 자영업자 유권자층 때문이다. 외국기업과 대기업들은 이에 눈 깜박할까? 천만의 말씀이다. 본사에서는 원칙을 지켜라,라고 말할 것이다. 직영점은 모르되, 대리점인 경우에는 지킬 수 없을 것이다. 직영점을 낼 정도되는 곳은 목 좋은 곳이기 때문에 직영점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은 데서 대리점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 직영점마저도 사정이 안 좋다. 하지만 직영점이야 자금력 풍부한 본사에서 버티면 그만이지만, 대리점 같은 경우는 사면초가일 것이다. 그리고 대리점이 망하든, 말든 그것은 본사와는 무관하다. 민노당 역시도 영세자영업자, 소시민의 진정한 권익자 당이라고 선전해왔으므로 기껏해야 영세자영업자들에게 법대로 가이드라인을 지켜줄 것을 권고하든가, 아니면 어려워도 조금 더 임시직을 위해달라는 수사외에는 할 말이 없다. 하여 기껏해야 해먹을 놈들 다 먹고 떠났고 매춘업자들 대부분이 현재 영세한 데다가 먹고 살기 어려운 때이니 이들의 처지도 생각해 달라는 말 외에는 없을 것이다. 가령 시위하는 매춘업자들과 몸을 파는 아가씨들 변호 정도일 것이다. 유럽의 매춘 합법화를 고려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이 말할 수도 있다. 공창제로 하자는 안이다. 나 역시 이 점에서는 현실적인 측면에서 검토할 안이다. 비록 원칙적인, 이론적인 측면에서 마선생의 매춘론, 사르트르적 세계관에 반대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지금 유럽에서조차 과연 이러한 공창제만으로 최소화가 가능한지 의심스럽다. 이는 네덜란드, 덴마크 등이 부시 군대의 매춘부로 나선 것을 보아도 말이다. 한국 경제만 어려운 것이 아니다. 유럽이나 미국이나 경제가 나아지고 있다고 하나 그것은 경제 거시지표일 따름이지, 서민, 노동자층 다수는 갈수록 생활이 어려워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다시 말해,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보자면, 과거 유럽과 일본이 마샬플랜 덕에, 미국 덕에 완충지대로서 잘 나가서 덕 좀 보던 시절에나 통용되던 것이다. 먹고 살기 바쁘면 몸이라도 팔아야지, 그럼 어쩌겠는가? 아일랜드 에로배우 식구들처럼 자신만 바라보는 이들도 있지 않던가? 형식적으로 자발적, 강제적이라는 구분도 그러하다. 요즘 어디서 인신매매 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없지 않은가? 근래의 형식은 매춘이 불법적이므로 따로 계약서가 없으니 (합법적인 취업에도 계약서가 없는 경우가 허다하니) 거금으로 선수금을 주어 고용을 유지하려는 것이다. 룸살롱 같은 경우에는 마담이 건설공사장 십장처럼 아가씨 관리를 하는데 사장이 아가씨들에게 직접 주기보다는 마담에게 준다. 즉 영화판에서처럼 스탭들 임금을 제작사가 직접 주는 것이 아니라 각 담당 감독급들에게 주는 것과 같다. 이들 매춘업은 대개 상기한 양식일 것이라고 본다.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모두 자발적이다. 강제로 하는 이들은 없다. 당신은 강제로 삼성에 입사했는가? 아닐 것이다. 이건희가 착취하더라도 돈 많이 버니까 삼성에 입사했을 것이다. 잘 하면 이사되듯 그녀들 중에서 마담으로 큰다든가 아니면 거래처 잘 만나 독립해서 회사 차리는 것처럼 그녀들도 손님 잘 만나 결혼하거나 첩이 되든가 하는 것일 뿐이다. 일본 룸살롱 문화를 다룬 만화가 있었다. 그 만화에서 도쿄 대표 룸살롱가의 밤 불빛이 번쩍이는 한, 일본 경제가 살아 있다는 대목이 있다. 한국 룸살롱 문화가 맛이 가기 시작한 지는 꽤 되었다. 돈 좀 있는 사람들, 요즘 누가 까다롭기 그지 없는 한국 접대부들에 만족할까? 그보다는 동남아 골프 여행을 떠나 그곳에서 싸게 한국식 룸쌀롱에서 회포 푸는 것이 보다 안전할 것이다. 근래 관광수지 적자폭이 늘어난다는데 상당수가 골프 관광이 아니겠는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해외에 다녀본 이들은 알겠지만 이미 미국, 유럽 놈들이 다 기반을 잡아놨고, 그후로 일본 애들이 설겆이를 한다면 한국 애들이 이제 와서 설겆이 물을 좋아라고 먹고 있다고나 할까? 중국 농산물에 한국 농가가 궤멸되어간다는데 중국 농산물만 그런 건 아니다. 잠시 중국 수입품인 연변 처자들이 활약하기도 했으나 그녀들도 보기 힘들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자, 간단하다. 어차피 상류층들은 즐길 것을 다 즐긴다. 동남아로 떠나면 된다. 강조한다. 골프채 집에 없는 놈들은 매춘할 생각을 꿈도 꾸지 마라! 이것이 바로 현 노무현 정권의 메시지인 것이다. 여기에 일부 종사자들이 서비스업, 제조업으로 돌아올 것이다. 20%대라 알려진, 내가 볼 때에는 상층 노동자, 중농, 부농 등을 포함하여 60% 정도가 이들 층이라고 본다. 그리고 사실 투표하는 이들은 대부분 이들 층이고, 나머지 층들은 투표에 별 관심이 없다. 즉, 투표하는 이들 대부분은 이들 층이며, 이들은 자신을 소시민, 중산층으로 여기는 이들이다. 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기는 힘들 것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층의 상당수 지지를 이끌어낼 것이다. 이 문제를 반대하는 층은 대체로 한나라당 지지로 귀결될 것이다. 이 문제는 현 박근혜 대표의 입지를 좁히는 결과가 되어 이래저래 노무현 정권으로서는 좋은 일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노무현 정권의 매춘 단속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보는 이들의 입장은 무엇인가? 자발적 매춘에 대해서는 허용한다는 문제가 있다는 것이겠다. 모든 매매춘은 불법적이어야 하며, 근절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마도 이 문제야말로 자유주의, 사민주의, 개혁 노선을 비판하는 좋은 거리인지 모른다. 이 문제야말로 자신의 선명한 좌파 노선을 드러낼 호기인지 모른다. 나는 이래서 이들이 사이비 좌파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왜? 당신들이 자유주의자, 사민주의자, 개혁 노선이 아니라면 그 정체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뭔가? 당 노선에 입각한 조직적 실천이 아니라 단지 개인적 의견을 떠벌이는 행태가 바로 자유주의자, 사민주의자, 개혁 노선이지 않던가? 또한 선거 때 자유주의, 사민주의자, 개혁 노선 당에 비판적 지지를 하면서, 혹은 비국가주의나 떠들면서 무슨 좌파 행세하려고 하나? 한민전 제외하고 남한에서 사노맹 이후 무슨 좌파 조직이 있는가? 없다. 까는 소리 하지 말자. 그대들 현재 처지라면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즉 현 노무현 정권보다 더욱 그들 자영업자들, 중산층에게 다가서는 주장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다 여성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는 전혀 노동자계급적인 것이 아니다. 좌파적인 것이 아니다. 다만 누가 더 중산층을 위한 정책을 하느냐이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를 위해서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그대들 사이비 좌파는 이론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모두 실패하고 있다. 이번에도 노무현 정권의 승리다. 까는 소리 하지 말고 그대들 스스로나 반성해라. 근본적인 것을 반성하라는 것이 아니다. 왜 자신들의 이슈화 하나도 성사하지 못하고 있는지를 반성하라는 것이다. 하긴, 그간 한 것이 뭐가 있나? 그대들이 무슨 전략이 있으며, 심지어 전술이 있냐? 그저 매일 아침 방송과 신문 보고 글 한 편 쓰고 딸딸이를 치는 정도지. 그런데 왜 제목을 이렇게 잡았냐고? 혁명적으로!라고 말이다. 일본의 극우주의자들이 자신들 역사관을 자유 사관이라고 하는데 왜냐하면 지금까지 주류 역사관을 자학 사관이라고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들 일본 극우주의자들 구성원들이 어떤 사람들일까? 사이비 좌파로 전향한 사람들이 많다. 이를 테면, 조선일보 류근일 같은 사람이다. 기반이야 저학력 저소득층이지만 그 대가리들이나 이론가들은 그렇지 않다. 지금까지 한국에서는 극우 이론가들이 무식한 놈들이 많았다. 해서 한국 극우는 다른 나라 극우에 비해 극우라고 말할 수도 없는 또라이들이라는 비판이 있었다. 이는 이제 걱정하지 마시라. 신학대를 나온 수많은 한국 전도사들이 있고 인문대학원을 나온 수많은 고학력 실업자들이 대기하고 있다. 이들은 구세대 극우들과 달리 좌파 이론 학습을 한 이들일 것이다. 아직 당장은 노무현 정권이 있으므로 힘들 것이나 노무현 정권 말기로 갈수록 미래를 내다 본 이들의 활약이 점증할 것이다. 당장이야 노무현 정권을 지지하기도 할 것이지만. 혹자는 왜 그리도 민노당과 사회당 사람들은 자학하길 좋아하느냐라고 묻는다. 그게 좌파 특징이냐고 말이다. 이 사람들 뿐만 아니라 그간 김대중, 노무현 지지해온 이들도 비슷하다. 자학이 몸에 밴 이들이다. 기본적으로 변방에 사는 족속들의 운명인 게다. 대통령 해먹어도 세상을 움직이는 맛이 없는 나라에서 사니까 그런 셈이다. 그래도 거부권 행사하는 나라에서 살아야 좀 기분이 다를 것이다. 그래도 G7 국가에서 살아야 좀 맛이 다를 것이다. 게다가 그런 국가에서 살아도 자학이 자살로 되는 경향이 많다. 대한민국이야 오죽하랴. 이 나라에서 살면 자학으로 시작해 자학으로 끝난다. 파시즘이 남의 일이 아닌 건 이 때문이다. 하여, 혁명적으로 고민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연애하자. 국제 결혼하자. 독일의 히틀러 정권은 소련 정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국민에게 강조하고는 했다. 독일의 신성한 어머니들이여! 독일의 딸들을 방탕한 붉은 군대로부터 구해내자. 순수한 독일 혈통을 지켜내자. 파시즘과 포르노 중 둘 중 하나를 택하라면 나는 포르노를 택할 것이다. 오해하지 말 것. 나는 맹동주의에도 비판적이다. 이론적이든, 실천적이든 그대가 감방에 갈 만큼 투쟁적이면 지지한다. 감방에 가거나, 수배되거나 한다면 지지한다. 그러나 그것이 당신이 사회주의자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은 아직 개인적으로 혁명적이며, 사회주의자라고 여기는 이들 사이에서조차 사회주의와 혁명이 점차 위선적인 말이 되어가고 있다라는 점만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책을 읽어주는 여자의 귀부인 여성처럼 일상의 소소한 일이 마치 혁명적인 일이 되는 양 자아도취하여 할 따름인 셈이다. 주위에서 말하지 않는 것은 사람도 공격했다는 산에 사는 야수가 멸종 위기에 처하여 보호대상이 된 것처럼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기 때문일 것이다.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똘레랑스라도 있어서 지금 내가 이 만큼 떠들 수 있는 것 아닌가? 감격스러워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내가 아는 한, 이런 주장을 진심으로 믿는 이들은 없다고 알고 있다. 나는 과연 이 현실에 서 있을 자격이 있을까 회의스럽다. 자꾸만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내 자신이 두렵다. 오늘날 나는 남성이다,라고 감히 주장하려니 무척이나 내 자신이 무섭다. 결국 나는 마초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운명인가? 저 사진 속의 인형처럼 옷맵시 단정하게 차려 입고서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다는 말인가? 자본간 경쟁이라 하여 부르주아들의 놀이일 뿐이라고 무시한다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맑스에 관심이 있는 이라면, 자신을 맑스주의자라고 여긴다면 속류적 맑스주의자일 것입니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조차 자본간 경쟁에 무관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본간 경쟁을 주시하지요. 왜냐하면 자본간 경쟁이 가속화되면서 총자본의 흐름이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자본간 경쟁의 틈바구니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가 출현하니까 말입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소위 명품이라고 말하는 것들은 이러한 자본간 경쟁에서 상대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자본제 구조의 우위를 확보한 회사에서 나온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를 국가로 보자면, 보다 우위의 경쟁력이 있는 자본제적 국가가 그렇지 못한 국가를 식민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겠지요. 즉 대부분의 제 3세계 국가들과 기업들은 독자적인 브랜드가 없습니다. 이에 따라 제 3세계 국가들 내에 있는 좌파와 노동자계급 역시도 독자적인 브랜드가 없습니다. 다만 인민민주주의혁명 전술 정도로 유지되고 있을 뿐이지요. 전략이 아닙니다. 전술입니다. 즉 이들 제 3세계 국가들 내에 있는 좌파와 노동자계급은 전략 단위가 될 수 없습니다. 전술 단위일 뿐입니다. 근래에는 유럽에서조차 이러한 경향이 심화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다시 명품으로 돌아간다면, 자본간 경쟁에서 우위를 점한 이들을 보자면, 대체로 자본가적 혁신 기풍이 있는 이들이라는 점이죠. 불멸의 이순신과 같은, 그리고 요즘 보자면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감사용 영화처럼 막후에서 엄청난 권력의 지원이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다면 투자자의 입김이 강화될 것입니다. 따라서 외주 제작사라고 하여 권력과 자본에서 독립된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취약한 탓에 더더욱 더 권력과 자본에 종속적일 가능성도 큽니다. 이는 현재 민주화정권이라는 김, 김, 노정권에서 보여주는 바와 같습니다. 즉 세계 패권과 세계 자본에 보다 더 종속적이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여기까지 말한다면, 내가 마치 내가 비판해마지 않는 민족해방론의 쌍둥이 신식민지 국독자론의 독점 강화/종속 강화 테제론자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이 간과한 점이 있습니다. 간단히 말해, 일본 제조업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그 아무리 세계 금융 자본의 엄청난 습격이 있었을 지라도 일본이 그나마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제조업 때문이겠지요. 다시 말해 일본 제조업이 금융 자본의 논리대로라면 모두 중국으로 제조업이 이동해야 타당함에도 그렇지 않고 일본으로의 재투자를 감행한 것은 그간 일본 제조업이 이룩했던 소위 명품에 대한 질적 유지, 자신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반면 대만과 한국에서는 이렇다 할 명품에 대한 자신감이 없기에 현재 무력한 상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이는 싱가포르도 마찬가지이고, 그리하여 싱가포르 자본도 상하이로 몰린다고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싱가포르 역시도 체제에 대한 자본가적 자신감이 있다고 보아야겠지요. 캘리니코스가 지적한 대로 세계 자본의 대부분은 여전히 1세계에 대한 재투자입니다. 다만 캘리니코스가 이 문제에서는 그 자신이 비판하는 스탈린주의적인 정치와 비슷하게 정치적인 제약이 있는 것으로 보여지면서 중국 투자에 대해서는 예외적이라면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바로 여기서부터 저의 비판적 관점이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상기한 논의는 결국 냉전시대 스탈린주의 교과서가 미소양국 지배체제를 공고히 하려는 데서 나온 부산물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냉전시대가 갔다면 스탈린주의 교과서도 폐기되어야 하는 것이죠. 러시아 혁명에서 보듯 선진적인 공업국이 아닐지라도 혁명은 가능합니다. 문제는 이러한 혁명체제가 유지될 수 있느냐인데 이 점에서 러시아 혁명가들 사이에 논쟁이 분분하였고, 이에 대해서는 제가 자료를 제시한 바 있습니다. 만일 유럽 혁명 없이도, 요즘 말로 치자면, 미국 혁명이 없이도 러시아 체제를 가능하게 하는 방안이 있다면 무엇인가 한다면, 스탈린이 2차대전 후 제시했던 미국과의 평화 공존체제라는 점이지요. 즉 세계를 미소 양국이 분할하는 전략이라는 점입니다. 이는 히틀러도 미국 등과의 평화 공존체제를 나의 투쟁에 밝힌 바 있지요. 즉 공정거래법처럼 독점적 지위를 어느 한 국가, 기업이 지속적으로 유지하기는 명분상으로도, 실질적으로도 어려운 만큼 그 역할이 요청되므로, 이러한 지위를 누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러한 스탈린의 미국과의 평화 공존체제 - 보통은 스탈린 사후에 이러한 평화 공존체제가 나왔다고 말합니다만 625 전쟁을 통해 보더라도 스탈린은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가 도전을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은 중국과 같은 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본가적 개인 관점도 그렇지만, 국가적 관점에서도 누가 혁명의 주체가 되고 싶어하지, 도구가 되고 싶어하겠습니까? 누가 과연 시다바리를 자청하겠습니까? 미래에 주인이 될 것이라고 여기니 이명박처럼 열심히 뛰는 것이겠지요. 미국에서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까닭은 내부적인 내파에 여전히 강한 체제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러시아에서 공산당이 패배한 것은 내부적인 내파에 취약하여 외부로부터의 공격에 무너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봅시다. 현재 중국과 일본 중 어느 국가가 내부적인 내파에 강한 체제입니까? 유럽과 러시아 중 어느 체제가 내파에 강한 체제입니까? 그리하여 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결국은 자본의 힘대로 독일과 일본을 안전보장이사국으로 승인할 것으로 저는 봅니다. 돈 많이 내잖습니까? 여기서 주요한 교훈이 있습니다. 가까이는 한국 대통령 체제입니다. 대통령 체제에서 그 아무리 자신의 적자로 내세운 대통령이 나서도 그 2인자가 권력을 쥐어 상대적으로 자율권을 행사하면 기존 대통령이 아무리 전두환처럼 치밀하게 안배를 하더라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대통령이 되지 않더라도 레임덕이 있다는 것입니다. 서구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이라는 의회민주주의도 봅시다. 고대 민주제의 발상지야 헬라스이겠지만, 근대 민주제의 골간은 올림픽과 유사합니다. 영국 의회제에서 보통 이야기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영국 의회제가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식민 총독부가 그 모체가 아닙니까? 프랑스 정복왕이 아마도 나폴레옹처럼 프랑스 빵과 포도주 맛을 잊지 못했는지 영국이란 땅에 정을 붙이지 못하고 친프랑스적 귀족들에게 자치권을 부여한 데서 영국 의회제가 태동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에 따라 신권이 강화된 것이지요. 조선 왕조가 명나라 등에 사대하니 당연히 왕권의 약화와 신권 강화는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폴레옹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프랑스 식민지 코르시카 친프랑스 귀족입니다. (다만 이런 점만 부각시키면 우파 논리가 되고 맙니다만.) 노무현 대통령의 파병논리는 분명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입니다. 일본의 예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더 나아가 유럽의 소국가들, 즉 독일과 프랑스 등의 유럽 강대국 틈바구니에 끼인 나라들인 폴란드, 덴마크, 네덜란드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능동적이니까 노무현이 파시즘적이다, 혹은 아니다라는 논점이 아니라 제가 여기서 말씀드리고자 하는 바는 전쟁 참여하든, 하지 않든 체제적으로 모든 체제가 전시동원체제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중국이 그러합니다. 중국은 이라크 전쟁 반대를 하였지만 시위를 엄금하였습니다. 또한 러시아는 어떠합니까? 체첸 사태를 통해 본다면 말입니다. 여기서 내가 비판하는 것이 사이비 좌파 박노자처럼 과거 냉전시대 논리, 즉 스탈린주의 교시를 통해서 티벳의 봉건적 구조를 지적하면서 중국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것은 수구적 논리라는 점입니다. 과거 러시아 대신 중국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이러한 것은 기본적으로 잘못된 정세 판단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전략적 오류라는 점입니다. 분명히 해둘 점이 있습니다. 모든 민족의 저항, 가령 쿠르트족의 독립을 지지하는 것은 기본적인 인터내셔널 정신이라는 점입니다. 좌파가 노동자주의를 비판하면서도 일반적으로 노조의 투쟁을 지지하는 것은 해당 노조가 단지 조합원들의 이익만을 챙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서 지지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는 것은 다음 권력으로의 이행은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아니라 자본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 노동자계급인 것처럼, 그리고 역사에서 보는 것처럼 자본제 내부에서 보아야 보편적이라는 것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현재 미국 부시 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러시아나 중국이 아니라 자신과 가장 닮은 캐리 민주당 진영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런 캐리 민주당 진영이야말로 미국의 취약한 지점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도시 노동자와 흑인과 히스패닉과 여성과 젊은층의 60% 이상의 다수 지지를 확보하면서도 이들의 그 어떤 문제 하나 제대로 풀어가지 못하는 데서 미국 민주당에 대한 지지자들의 배신감이 상존한다는 점입니다. 내가 왜 이를 강조하는가 하면, 민족해방론자들처럼 신식국독자의 독점 강화/종속 강화 테제 역시도 이러한 자본간 경쟁을 간과하는 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여, 그들은 곧바로 모험주의적 태도를 취하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굴종적인 태도를 취하는 기회주의를 지속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점입니다. 코르시카 촌놈 나폴레옹을 봅시다.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왕당파가 아닌 공화파와 손을 잡았습니다. 반면 코르시카 민족해방 장군은 영국과 손을 잡았습니다. 코르시카 국내에서는 코르시카 민족해방 장군이 승리하였으나 결국은 코르시카에서 축출된 나폴레옹의 승리로 귀결되었습니다. 북아일랜드 문제를 봅시다. 영국에 지속적으로 핍박을 당한 아일랜드인들은 미국으로의 이주를 하지요. 지난 시기 아일랜드에서는 경제적으로 큰 성장을 하다가 근래 침체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에서 간과한 점이 있는데 클린턴 정권하에서 아일랜드가 많은 수혜를 받았다는 점입니다. 잘 보시면 북아일랜드 문제가 IRA군의 투쟁이 머나먼 한국에까지 알려지게 된 데에는 영화도 한 몫을 하는데 이런 것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부시정권은 영화나 애니메이션 분야 투자에 인색하다고들 하지요. 반면 야구 투자에는 큰 흥미가 있다고 합니다. 나는 사정이 이러하다고 IRA군의 투쟁을 폄하하지 않으며 중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지난 역사에서 한반도에서 일어난 일을 기억한다면, 이러한 정세 판단이 냉정하게 요구된다는 점을 강조한다는 점입니다. 두 눈과 두 귀를 가린 조선의 수구파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들 부르주아 공화파들이란 자생적 주체 세력을 적대적으로 파악한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나폴레옹은 농민 봉기나 노동자 시위에 매우 적대적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스탈린 정권은 무엇보다 우선 순위가 친소파였고, 미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강조한다면, 한반도의 미래는 김정일 정권도 아니요, 김정일 정권이 기대하는 중국 공산당 정권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이 점에서는 김대중이 외교를 잘 한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점에서 적어도 다른 사이비 좌파에 비해서 김대중이 프로페셔널한 것입니다. 물론 나는 김대중정권 퇴진을 주장할 정도로 비판적이었습니다만. 다시 말해 좌파가 전략적인 지점에서 논의하려면 최소한 국제적인 인터내셔널 수준에서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조직이 없는 이상 이는 다소 관념적인 수준인 세계 노동자계급이라거나 민중 수준에서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특정한 국가를 종전처럼 특권화하는 모든 시도들은 관념적일 수밖에 없으며, 필연적으로 김정일 정권을 추종하는 주사파들처럼 불행한 운명을 맞이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박노자 등의 시도란 반동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이러한 박노자의 티벳 비판 주장에 동조하는 자 역시 반동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우리는 쿠바인의 대미 항전적 자세에 대해 긍정적이며, 지지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쿠바 정권을 특권화하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는 반동적인 시도로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쿠바의 생각이 있는 지식인과 노동자와 좌파라면 모두 현 쿠바 정권에 대해 반대할 것입니다. 이런 반정부파를 모두 미국 보수파의 우산 속에 가두어버리는 모험주의적 시도들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을 친구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적으로 간주하는 한, 소련 보수파들처럼, 그리고 중국 인민에 총을 겨눈 중국 공산당 지도부처럼, 마지막으로 박정희나 마하티르처럼 비참한 말로를 경험할 것입니다. 이러한 지점에서 나는 영화평론가 정성일 따위를 비판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스탈린주의의 교조적 태도로 잘 난 척하면서 방송가를 돌아다니는 다니는 꼴이란 가히 코미디 수준입니다. 이게 바로 사이비 좌파의 현 주소라는 것입니다. 나는 바로 이런 데서 그들 면면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한마디로 이들은 패거리에 익숙한 깡패 집단일 뿐입니다. 냉정하게 말한다면, 현재 한국에서 사이비 좌파가 완전히 제거되어도 한국 노동운동과 사회운동에 전혀 지장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발전적인 모색이 가능하겠지요. 긍정적으로 민족해방파에 대한 극복도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듯 민족해방파에 대한 극복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야 할 좌파세력이 대부분 사이비 좌파에 의해 점령당했고, 그러하다 보니 민족해방파가 브레이크가 고장난 기차처럼 미친 듯이 달려가도 제동 장치가 없다 보니 인민대중 다수가 한나라당을 지지하게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는 고구려사 문제에 대해 중국 측을 지나치게 민감하게 자극하는 것에는 반대합니다. 역대 중국 역사에서 중국에 통일된 정권이 수립된 직후이거나, 정권이 바뀐 연후에는 주변국들에 엄청난 위협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이런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중국 땅덩어리가 넓은 만큼 이를 해결하였던 정권이 없었으며, 그만큼 정권 역사도 짧았다는 점을 말입니다. 무엇보다도 현재 중국 지도부들은 혁명세대가 아니라 미국 등지에서 교육을 받은 기술 관료들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전후 일본 지도부들이 미국 등지에서 교육을 받은 기술 관료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또한 남한에서 지금 중국 지도부에 대해 망상을 지닌 이들도 간혹 있는데 유념하길 바랍니다. 지난 조선조 때 성리학적 전통에서 볼 때 그것은 학자적 연계였을 뿐이지, 현실과는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중국 지도부들은 확실히 혁명에 대해 포기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주의적 원칙도 없습니다. 이를 어떻게 해서든지 국제주의적 원칙으로 파악하려고 하는 박노자 따위의 사이비 좌파 노력이 눈물겹습니다만, 한마디로 꼴값을 떠는 것에 불과합니다. 마치 팔십년대 때의 주사파 김영환처럼 김일성 정권을 직접 목격하고서야 느끼는 그런 망상 같은 것이란 점입니다. 현재 고구려사 문제, 영토 문제 제기 차원은 이념적인 지점이지, 결코 현실적인 지점은 아닙니다. 친일 문제가 국제용이 아니라 국내용이듯이, 반전문제도 국제용이 아니라 국내용이듯이, 고구려 문제도 국제용이 아니라 국내용으로 보수진영에서 제기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들도 잘 압니다. 현재 남한 정권 역량으로 전혀 해결하지 못할 사안이며, 설사 박근혜가 정권을 잡아도 마찬가지임을 잘 알 것이라는 점이라는 거죠. 혹자는 땅덩어리도 작은데 뭉치지는 못할망정 분열해서야 쓰나 하면서 분열을 탓합니다. 그것이 문제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일본에서조차, 그리고 유럽에서도 어디든 분열이 있습니다. 국론 분열이라고 걱정하는데 미국조차도 지난 대선에서 반반으로 나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한국의 국론 분열을 우려하는 보수/진보 진영에게 한국의 정치상황은 그 주체가 비록 후진적이어도 상황은 보다 선진적이다, 러시아에서처럼 제 3세계에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더 많이 보여준다고 강조하지 않았습니까? 오히려 이런 현상은 더 빨리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상대적으로 취약하니까. 이제는 분열을 탓할 것이 아니라 전략적으로 과연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 현명한가를 논해야 하는 것입니다. 즉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하는 식의 초기적 태도에서 이제 현실적으로 맞이한 통일 과정에서 나타난 난제를 어떻게 극복하느냐로 바뀌듯이 말입니다. 여기에 보수/진보 진영이 대안이 있습니까? 확실히 드러내놓은 쪽은 오히려 보수진영입니다. 반면 노무현부터 시작해서 사이비 좌파까지 무엇을 드러내었습니까? 모호하지 않습니까? 한국이 다른 제 3세계와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삼성과 현대, 포철이라는 개별 자본을 보유한 것입니다. 브라질이나 러시아, 중국에 이런 독자적 브랜드가 있습니까? 결과적이지만 대만 방식은 실패했습니다. 2차대전 이후의 물자와 마약 밀매 돈을 비롯한 많은 돈을 고스란히 보유한 동남아 화교 자본이 동남아시아 군사정권과의 결탁으로 돈을 벌어 그간 냉전체제 탓에 싱가포르, 홍콩, 대만 등지로 투자되던 것이 동남아시아 민주화와 중국의 자본주의화로 인하여 투자가 분산되면서 싱가포르, 홍콩, 대만이 모두 위기를 맞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비교에서 중소자본 우위론이라는 외피를 쓴 박정희 방식 비판은 실패했습니다. 이러한 박정희 비판 실패를 좌파가 반대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히려 환영해야 하지 않습니까? 좌파의 비판이 아닌 다른 비판이 무력화되는 것은 좌파의 비판이 유효하다는 점을 입증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유리한 고지에 서게 만들지 않습니까? 더군다나 중국 공산당 지도부가 그간 지독히도 포철, 현대, 삼성 방식에 많은 관심이 있었습니다. 대우도 그렇구요. 중국 공산당 지도부도 아는 것입니다. 냉전 시대가 가고 각국의 파시즘적 전시동원체제에서 유리한 시스템이 바로 이러한 방식이라는 점을 말입니다. 근래 현대자동차를 제외하고서는 삼성 등이 일본처럼 국내에 재투자를 감행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대한민국이 망해도 삼성 등의 기업은 살아날 것이다, 라고 봅니다. 더 나아가 현재 정당법에 등록된 어느 정당이 정권을 잡더라도 삼성 등이 지배적 틀을 유지할 것이다, 라고 봅니다. 지금이야 보수 언론이 왜 한국 재벌들은 일본 재벌과 달리 단합하여 할 말을 하지 못하느냐 하지만 때가 되면 할 것입니다. 급한 건 보수 언론이지, 한국 재벌이 아닙니다. 과거처럼 보수 언론과 일치단결을 하는 이들이 점차 드물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본의 합리성에 따라 판단할 것이며, 때로는 얼마든지 현재 노무현 정권에 삼성측 인사가 관료로 있듯이 배신을 때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배신이 더 이상 아니죠. 주체가 되니까. 정리합니다. 현재의 친일청산론은 노무현이 그간 일본측에 보여준 태도와는 정반대의 태도인 것이므로 국내용이 확실합니다. 최소한 우파로서의 노무현의 일본측에 대한 태도는 우파적으로 합리적입니다. 노무현이 우파이므로 이라크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것 역시도 우파적으로 합리적입니다. 자신이 우파이면서 이라크전 참전에 반대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라고 보거나 멍청하다고 봅니다. 미국 부시 진영이 노무현에 대해 적대적이라고 여겨서 보수 언론이 걱정하는데 걱정할 것 없습니다. 미국 부시 진영도 노무현에 대해 국내 지지기반을 감안하여 내심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고, 다만 국익이라는 관점에서 약간의 압박을 가끔 하는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어떻게 파악이 가능한가? 최근 외평채 금리가 사상 최저라고 합니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보증이 없으면 가능하지 않습니다. 국내용입니다. 보수 진영, 여러분, 쇼를 하지 마세요. 노무현더러 쇼를 한다고 비판하지만 그대들도 노무현 못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친일청산론에 대해 무관심으로 대응하면 됩니다. 아니면 브레이크 뉴스처럼 노무현 측 인사들에 대한 폭로전 정도가 알맞습니다. 이영훈 논쟁은 한마디로 사이비 좌파들의 딸딸이에 불과합니다. 아무도 관심이 없고, 사이비 좌파만 관심이 있습니다. 비정규직 문제 등에 대한 취약한 문제에서 딴전을 필 수 있으니까 사이비짓을 하는 것일 뿐입니다. 사이비 먹물들, 언론으로 떠서 교수가 되고 싶은 또라이들만 관심이 있는 사안일 뿐입니다. 한국 민중들은 지금처럼 열심히 일본어를 공부하고 일본 문화를 익히면 됩니다. 다만 대중문화를 통해서 보다 일본에 대해 환상을 품지 않는 방향으로 냉정하게 그 실체를 파악하면 됩니다. 일본 민중들도 보아나 배용준을 통해서, 축구를 통해서 열심히 한국어를 공부하고 한국 문화를 익히면 됩니다. 중국 민중도 마찬가지입니다. 현명한 일부 축구팬처럼 대다수 치우미 같은 국수주의자에게 당하지 말고 왜 자신들은 한번도 한국 축구에 이겨보지 못했는가를 남의 탓이 아니라 자신의 문제에서 찾는 것이 중요합니다. 먹고 살기 힘들면 들고 일어나는 건 인지상정이 아니겠습니까? 일본과 중국 인민 여러분! 안 그렇습니까? 민족적 차별, 지역적 차별을 겪으면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성차별을 겪으면 일어나야 하지 않습니까? 노동자끼리 차별해도 일어나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이비 좌파가 그 어떤 개소리로 상식 운운 지랄해도 인민들은 현실을 잘 깨닫고 있으니 자기 길을 가길 바랍니다. 다만 좌파의 가치 있는 삶에 대해서 만큼은 고려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외교는 남의 일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역사가 그러하였듯 - 누가 스탈린 정권과 일본 정권간, 혹은 스탈린 정권과 미국 정권의 막후 담합이 있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레닌 혁명 정권과 독일 정권간의 막후 협상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중국 학자의 말대로 현재적 관점에서 영토를 점유한 측이 유리한 것입니다. 이 점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연해주만 해도 현재 영토를 점유한 러시아측이 유리하니까요. 아울러 조약 문제를 제기하는데 국제적 조약이야 조건이 다르면 폐기될 수 있는 것입니다. 종이 쪼가리에 미련을 둔 자는 현실 세계에서 아무도 없습니다. 다만 설사 그렇다 할 지라도 민족국가이니 하는 개념이야 하루 아침에 만들어져도 민족 정서라고 불러지는 것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코카서스 지방 조사에서도 보면 수천년 이어져온 정서들은 러시아 혁명 이후 오늘날까지 그대로라고 합니다. 중국인들이 정권 바뀌면 말하듯 청나라가 오면 청의 깃발을 들고, 명이 오면 명나라 깃발 드는 것과 같습니다. 깃발을 든다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지요. 다만 일본군이 만주국이라는 어용국가를 만들었음에도 별다른 저항이 없었던 것을 보면 그 동네 사정을 대략 짐작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국가보안법 논쟁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역시 마찬가지 문제입니다. 어떤 식으로든 노무현 정권은 국가보안법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왜 이러냐면 여당의 지도급 인사들이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된 전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하면 대한민국이 뒤집혀야 하는데 일부 보수론자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동의하지 않잖습니까? 결론은 뻔하잖습니까? 이미 사문화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엄한 사람 잡지 말고 진짜 간첩이나 혹은 진짜 혁명가만 잡아들이자고 하는데 반대할 사람이 있습니까? 진짜배기 반체제론자만 잡아들이자고 하는데 반대할 이가 있습니까? 그리고 세상에 어느 국가가 속도 좋게 반체제 인사에 관용을 베풀고 있습니까? 아, 물론 저처럼 반체제 인사인양 깝치는 놈들도 있는데 이런 나 같은 놈이나 노엄 촘스키나 이런 치들은 엄밀히 말하면 반체제 인사는 아니죠. 인 척하는 놈들이죠. 하여 사문화가 되었으니 정상화시키자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타당하니까 이러한 지점에서 이문열은 아차 싶어서 다소 성급한 실수를 했습니다. 속내를 처음부터 꺼내는 아마추어리즘을 발휘했습니다. 박근혜. 인맥이 없는 정치에는 존중하지만 아마추어리즘에 경박하게 대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사이비 좌파나 이문열을 고려하지, 인민들은 이문열에 관심도 없고, 아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이회창이 적절하게 코멘트를 날리는군요. 질질 끌다가 막바지에 여야 합의로 통과시키면 되는 것입니다. 민노당이나 민주당 여기에서 아무런 영향력 없습니다. 박근혜. 벌써 정권 잡은 듯이 여기면 이회창 꼴이 납니다. 오만이 짙은 회한을 낳는 법입니다. 그렇다면 좌파의 국가보안법 논쟁에 대한 대응은 무엇입니까? 국가기구의 폐지인 것입니다. 국가기구라는 큰손이 있는데 피라미 하나 잡아서 족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증권가에서도 다 아는 것이 아닙니까? 증권가에서 맨날 내부자 거래 단속한다 어쩐다 하지만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 다들 알지 않습니까? 그리고 속으로도 내가 회사 대주주라도 그런 욕심이 생기겠다 하지 않습니까? 제도적으로 아무리 막은들, 미국에서 엔론 사태 이후 보다 투명해졌다고 하지만, 수면 밑으로 잠시 잠수탄 것에 불과합니다. 보다 교묘한 방식으로 재등장할 것이 확실한 것처럼 국가보안법의 운명 역시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그렇다고 남의 일이라고 무관심할 수야 없겠습니다. 그건 현명한 태도라고 볼 수 없지요. 그냥 노동운동이나 열심히 하지 뭐, 이런 것일 수는 없습니다. 좌파는 국가보안법 논쟁에서 기존 정당들이 국가보안법 문제를 어떻게 잘못 다루고 있는지를 낱낱이 폭로해야 할 것입니다. 이 점에서 브레이크 뉴스식 폭로도 긍정적입니다. 동시에 논리적으로 그들이 기존 정당과 사이비 좌파가 이 점에서 가치적인 면이나 현실적인 면 양쪽에서 모두 실패하고 있음을 보여주면 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문제는 무엇입니까? 경제입니다. 왜 노무현 지지가 떨어졌습니까? 경제 때문이죠. 먹고 살기가 힘들어진 겁니다. 이걸 대놓고 말하기 힘드니까 이거다, 저거다 다른 핑계를 대는 것이죠. 듣자 하니 팽팽하던 사십대 계층에서 승부가 난 모양입니다. 그럼 사십대만 없어지면 됩니까? 아니죠. 지금의 이십대가, 삼십대가 사십대가 되면 사십대처럼 행동할 것이고, 사십대는 오십대, 육십대처럼 행동할 것으로 봅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한마디로 남들 걱정할 때냐? 라는 주장인 것입니다. 수도이전 반대 왜 하나? 사촌이 땅 사면 배아프니까 반대하는 것이고 또 찬성하는 것이란 점은 다들 알죠. 이라크 전쟁에 참전한다고 노무현 지지를 하지 않는다? 이것 또 무슨 개소리입니까? 일전에 선거할 때 말한 대로 전통적 이 계통 지지자들은 20%입니다. 지금 바닥이라고 할 수 있죠. 이 20%면 설사 정권 잃어도 크게 아쉬울 것 없습니다. 이 지지층을 과소평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노무현 정권을 어떻게 보느냐인데 신자유주의 정권이라 하여 우파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고, 또한 좌파적 정권이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는 혼동을 낳는데 정책적으로 엄밀히 따지면야 민주노동당조차도 전통적인 소위 중도 좌파, 혹은 사이비 좌파에도 끼지 못하는, 즉 진보정당조차도 되지 못하는 우파 정당이지만, 이것이야 학계에서 하는 소리이고, 근래 유럽 사민주의당 흐름을 보면 대개의 소위 중도 좌파 정당이 상당 부분 중도 우파 정당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페인 사회노동당만 하더라도 신자유주의 정책을 내놓았다가 정권을 내주고 만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가 폭탄테러로 정권을 잡았지요. 이 점에서 열린우리당과 민노당은 지금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은 사실은 별 차이가 없습니다. 고향이 조금 다르고, 다니던 학교 인맥이 서로 좀 다르다는 정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죠. 이러한 점 때문에 과거 사회당에서는 민노당 역시도 보수 우파 정당이다,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그때의 관점으로 치자면, 요즘 사회당 역시도 보수 우파 정당이지만 말입니다^^. 경제 문제. 뭐 요즘 지랄하지만 근혜가 잡든, 영길이가 잡든 일부 권력 수혜자, 낙하산 타는 인사들 빼고 달라질 문제는 없습니다. 잠시 뿐이죠. 그들도 엔터네이너이니까 욕하는 재미로 그들 역할을 인정하면 됩니다. 근혜가, 무현이가, 영길이가 짜식들, 꼴값하네, 이 정도이면 됩니다. 그보다는 나는 지난 한일 월드컵 공동 개최라는 우연적 사건을 중시합니다. 한일 공동이라 하면 일단 한국인들에게는 불쾌한 기억으로 남는 대동아공영권이 있습니다. 냉정하게 봅시다. 소국가주의로는 통일을 하면 더 골치 아픕니다. 통일세를 누가 부담할 수 있습니까? 돈 많은 독일도 저런 지경인데 말입니다. 그래서 통일하지 말자,라는 식도 우습죠. 어차피 통일이 되니까. 다만 통일에 대한 환상을 품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보다는 세계가 날로 블록권화가 되어가는 형국에서 보자면, 한반도라는 지정학적 관점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세계가 보다 진보적인 세상이 되면 이러한 지정학적 괁점이라는 부르주아적 관점이 약화되겠지만 현재도 엄연히 현실로 남아 영향력을 상당히 끼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이러한 점에서 보자면, 과연 한반도가 중국과 연합하는 것이 좋을지, 일본과 연합하는 것이 좋을지를 검토한다면, 저는 신중해야겠지만 일본과 연합하는 편이 현재로서는 유리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국과 홍콩 통합 과정을 보면 알겠지만, 베이징 정부로서는 홍콩이란 변방이 중국 최고의 잘 사는 동네로 만들 수는 없는 것입니다. 정권의 위기를 불러오니까요. 상하이나 베이징으로 해야 한다는 거죠. 상하이나 베이징이 그만큼 더 잘 살면 되겠지만 자본제라는 것이 불균등발전의 법칙이 있으므로 홍콩이 죽어주어야 하는 면이 있지요. 따라서 중국과 한국이 연합, 혹은 통일하는 경우라면 한반도라는 지역적 기반이 와해되는 측면이 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즉 현재의 경제적 수준보다 더 낙후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일본과의 연합, 혹은 통일이라면 일본이 지방자치제가 잘 발달되어 있어서 대마도 같은 변방에서 하는 문화행사 수준이 한국 서울 중앙 방송국 문화행사 수준보다 수준이 높다는 것이 유명 락가수를 비롯한 상당수의 문화인사들 주장인 만큼 상대적으로 유리하다는 점 부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는 어느 한 쪽의 흡수 통일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과거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다리를 놓고 어쩌구 말한 것이 현실적이어도 일방적이어서는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이 점에서는 천황제 폐지를 내건 일본 공산당도 과연 신뢰할 수준인가를 고려해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사회당이나 공산당의 지지기반이 있는 이상 이들과 연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일단 연합해서 총선거를 치루면 일본 사회당이나 공산당이 손해볼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사실 일본 사회당이나 공산당도 사이비 좌파적 성향이 농후하죠. 일본 사회당이야 이미 우파라고 할 수 있고. 일본 공산당도 사이비 좌파에서 우파로의 경향도 간혹 보이고... 아무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 공산당보다는 낫다 이 말입니다. 한일간의 대등한 수준에서의 통일연합국을 건설하자는 거죠. 그런데 이 자체는 좌파의 과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과제는 우파의 과제입니다. 냉정한 우파라면 한일간 통일연합국 건설에 유념할 터이니까요. 그래서 피상적으로 좌파가 반대하면 됩니까? 아니지요. 이러한 부르주아적 한일 통일연합국에서 실질적인 평등세상을 여는 것이 좌파의 과제라고 할 수 있겠지요. 좌파는 현명한 정세판단 속에서, 전략하에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사이비 좌파인 나도 아는 것을 자칭 좌파라고 하는 애새끼들이 모르고서 헛소리한대서야 말이 되겠습니까? 이런 것을 보면 한국에 좌파는 한 명도 없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죠. 목소리를 죽이고 열심히 연구하는 이들은 이겠죠. 하지만 언론에 한줄이라도 글을 쓰는 개새끼들 중에는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그래도 운동권 출신 중에 학문적으로 검증을 받아서 교수된 조국 같은 이는 내가 인정하는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다른 새끼들은 뭡니까? 아무튼 근대 민족의 실체라고 할 수 있는 삼성이나 현대, 포철이 향후 자신들의 자본 논리대로 나아간다면 한일연합국가를 신중하게 검토해야 할 것입니다. 살 길은 그것뿐일 것입니다. 언어도 배우기 쉽고, 상호국가 이해도 깊고 - 세상에서 한국인 말고 한국과 한국문화에 가장 많이 지대한 관심이 있는 외국인이 누군지 아십니까? 한국에 오면 독립기념관 꼬박꼬박 가는 이들이 누구이며, 한국 관광산업에서 가장 큰 손이 누구입니까? 한류 불기 전부터 말입니다. 한마디라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이들이 가장 많은 나라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본인입니다. - 식민경험으로 인하여 아직도 노가다판에서는 이상한 일본 조어가 사용되는 만큼 국가기구의 제도적인 면과 기업구조 면에서 한국과 일본은 그 차이보다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하여 닮은 만큼 서로 증오하는 면도 깊다고 할 수 있겠지요. 또한 한국 젊은이들 사이에서 부는 엄청난 일본문화 바람을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케이비에스 시사진단처럼 무식하게 정권 보위 차원에서 한국 젊은이들 까면 무시당합니다. 요즘 한국 젊은이들이 얼마나 똑똑합니까? 무식한 정연주 수준이 절대 아닙니다. 정연주는 이순신이나 신경쓰라고 하세요. 생긴 것이 허인회처럼 보여서 원래 재수없게 여겼지만...갈수록 더 싫어져요^^. 우파나 좌파나 이 점에서는 공통으로, 자본가나 노동자계급이나 이 점에서는 공통으로 이들 한일간 자본 경쟁에 유념해야 합니다. 다만 좌파라면, 그리고 나 같은 사이비 좌파라면 이러한 한일간 자본 경쟁에서 정세판단을 하여 모두가 잘 먹고 잘 사는 방안을 고민해 보기로 합시다. 아울러 중국과의 과도한 이념적 경쟁을 자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티벳 카드이니 몽골 카드이니 베트남 카드이니 꺼내면 안 되고, 적절할 때 써야 하고, 무엇보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로 접근하는 것이 현명한 태도인 것입니다. 미국 정가에서는 한반도가 그간의 역사가 중국화가 많아 일본 식민침략에는 저항하면서 중국과의 사대관계나 중국의 625 개입에 대해서는 별 감정을 지니지 않는 한국인의 과거만 보는데 중요한 건 한국인이 점차 자본주의화가 되어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즉 좀 더 자본주의적 합리성으로 무장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벌써 나타나고 있습니다. 기성세대라면 상상도 하지 못할 일본문화에 대한 젊은이들 관심이 뜨겁지 않습니까? 중국 베이징 정권이 우려하는 바가 이러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장강이 앞물을 밀어내듯 순리인 것입니다. 누가 인민에게 감히 총을 들고 설치는 베이징 정권을 신뢰할 수가 있겠습니까? 사정이 그리하여도 한반도는 중국과도 잘 지내야 보다 일본과의 우파적 한일 연합국 건설에서 유리한 이익을 취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 중국과의 교역은 지금보다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한반도 동서간의 불균형적 지역 발전을 고려하더라도 서해안 항구들이 더욱 개발되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서해안 항구에 머무르지 않고 중국으로 아예 탈출하는 자본이 문제겠지요. 앞으로 올 세계는 지금보다 더욱 지독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데에는 모두들 동의한다면... 지금 한가하게 이런 고민할 때냐 하지만 지금부터 하더라도 늦었다고 봅니다. 전략적 관점에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왜? 현재의 한반도 역량만으로는 어떠한 국가적 전략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정도의 국가적 역량으로 뭘 내놓아도 비아냥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분명 다른 지역에서라면 GDP에 11위권이니 인정받는 국가이지만 주변이 워낙 강대국들에 있기에 그러한 것이죠. 한국에서 국가적 논리, 혹은 국가적 전략이라는 것이 없었지만은 만일 있었다면 이제는 잊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보다는 삼성이니 하는 개별 자본적 전략이 더 중요해질 것이며, - 이미 증권가에서 삼성전자 하나가 전체 증시를 좌지우지합니다. 삼성전자 개별 기업 하나라고 하는 인식을 바꾸어야 합니다. 제조업 중시하더라도 금융자본적 관점에서의 삼성전자의 지위란 다른 기업과 차별을 두어야 합니다 - 삼성 역시도 계속되는 막대한 흑자가 지속됨에도 불구하고 고용 효과가 지지부진한 아이티산업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이 깊어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에 장기표 같은 이가 솔직하게 우파적 논리로 삼성과 잘 해야 한다는 식이었는데 장기표는 이문열처럼 지나치게 솔직한 면이 있습니다. 영길이처럼 속으로만 그런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말이죠. 어찌 되었든 요즘 일본의 책임이라는 식으로 지역 안보론이 나오듯이 삼성의 사회적 책임이 나오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파는 다른 대안없이 이를 승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사이비 좌파야 신경을 꺼도 되구요. 그리되면 그제서야 한반도에서도 본격적으로 전략이라는 것을 논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군요. 아니, 지금까지 독자적인 브랜드의 정권도 없고, 독자적인 브랜드의 기업도 없다가 근래에 들어서야 기업만이 자리를 잡은 마당인데 무슨 전략이 있겠습니까? 좌파가 무능하다고 하지만 아니 이제껏 상대했던 우파가 무능하니 좌파도 무능할 수밖에요. 여건이 그렇잖습니까? 다만 이제는 그렇지 않게 될 듯하다는 것입니다. 하여간 이 문제는 노무현정권이 끝나야 본격적으로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노무현 정권 이후에 누가 잡든 노무현으로서는 역대 대통령들처럼 이후 정권 때문에 고생을 좀 해도 명예를 되찾을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래도 노무현 때가 그나마 낫다,라는 소리를 들을 터이니까요. 그런데 왜 노무현 정권이 끝나야 되냐면 그때쯤이면 중국 올림픽도 치러지고 - 이것 중요한 의미입니다. 중국 인민이 본격적으로 중산층으로서의 1987년 민주화 시위처럼 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것입니다. 올림픽을 통해 세상에 확 열려지니까 말입니다. 중국이 대비를 잘 하고 있겠지만 그게 쉽겠습니까? 지금까지 교역 때문에 눈 감고 있던 모든 문제들이 다 까발려질 겁니다. - 또 한번 동북아 정세가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겠죠. 대만과의 전쟁이란 건 내가 볼 때 환상이고 전쟁이 나지 않습니다. 대만 애들이 그러는 건 전쟁 난다, 난다 해야 조금이라도 더 미국과 일본 쪽에서의 투자 같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고 보니까요. 북한 김정일 정권이 툭하면 막다른 외교 펼치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됩니다. 대만이란 가치가 중국 빼고는 없거든요. 북한 김정일 정권이 대한민국 정권 협박하는 것 빼면 남는 게 없듯이... 이런 면에서 중국 베이징 정부랑 대만 정치인들은 한 통속이듯이 북한 김정일 정권과 보수 언론, 그리고 노무현 정권은 한 통속입니다. 말은 서로 달리 해도 속은 다 같은 생각일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 열린우리당, 민주당, 민노당이 여러 문제에 원칙적으로 행동 통일을 같이 하기로 했다는 것은 잘 한 일입니다. 본래 차이가 없는데 지지자들 골 아프게 할 것없이 서로 반성을 한 연후에 합당하길 바랍니다. 진심입니다. 그리고 우파 정치 제대로 하길 바랍니다. 중도좌파이니 중도우파이니 뭐니 헛소리하지 말고 말이지요. 우파 정치 그렇게 말하세요. 중도좌파라는 말보다는 사이비좌파가 더 합당한 말입니다. 국민들 우습게 보고 사기치면 곤란해요^^. 알고 속는다는 말이 있어요. 불쌍해서 그렇다고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정말 모르는 것, 즉 불쌍하게 보았는데 알고 봤더니 이 자들이 더 썩은 놈들이다, 라는 사실이 발각되면 큰일이 나는 겁니다. 조심하세요. 그래도 국민들이 힘이 있으면 요즘 익명으로만 민주노총 씹는 조합원들처럼 뒷구녕으로만 하겠지만, 힘도 없으면서 발각되면 매장됩니다. 그러니 하루바삐 통합해서 권력을 잡아야 하는 겁니다. 앞으로 누가 권력을 잡든 좋은 시절보다는 나쁜 시절이 앞에 놓여져 있습니다. 사실 그게 민주주의적 측면에서 좋은 거죠. 권력 잡아도 이전보다 해먹을 거리가 없는 것이... 아직은 많겠지만. 아무튼 좌파들은 열심히 일본어 공부도 하면서 일본 좌파와의 국제주의적 협력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이것이 사실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닌가요? 역사적으로 존립이 위태로운 국제주의적 정신을 되살리는 것만큼 좌파에게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일본어 공부하시는 분들, 일본 좌파는 물론 사이비 좌파들도 천황제 폐지를 내겁니다. 심지어 과거에는 천황제 폐지를 내걸고 바주카포도 도심에서 쏘아대었습니다. 일본 문화 열심히 공부해서 천황제 폐지 맥락을 이해합시다. 요즘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보다 더 많이 한국 문화를 깊이 이해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 여자들도 귀엽고 예쁘지 않습니까^^ 국제 결혼 많이 합시다^^. 글을 한참 썼는데 또 날렸다. 하여, 지금은 한글에서 글을 쓴다. 오랜만이다. 요즘 내 컴퓨터가 이상이다. 시도 때도 없이 치명적인 오류 창이 뜨면서 컴 퓨터가 기억을 하지 못하고 지워 버린다. 혹 지나친 저장 탓이 아닐까. 영화 여러 편을 저장해서일까. 무엇보다 이태리 포르노 감독의 거의 모든 영화를 인터넷에서 다운받아 저장한 탓이 크다. 하드를 하나 더 마련해야 하나? 고 민이다. - 이 대목을 처음 글에 썼다가 빠뜨렸다. 아이 데려다 주면서 다시 떠올랐다. 컴퓨터가 말썽이어서 덧글을 본문에 붙이려다가 그만 지워버렸다. 이게 거짓 말일까. 미안해서 이웃하기를 뺐는데 이게 거짓말일까? 야누스;혁명적 홀론 이론의 저자 아서 케슬러는 이 책에서 환원주의와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홀론 이 층을 이루는 유기체의 위계질서가 있는 홀라키 구조를 내세운다. 그는 이 를 일반시스템이론이라 했는데... 부분과 전체의 모습을 동시에 한 것이 홀론 이다. 단면은 전체가 아니다. 단면이 단면인 것은 전체를 압축하여 드러낸 것, 혹은 요약한 것이라면 전체가 아니다...비례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실험하다 보면 다른 점들이 다 비례분포를 이루는데 어떤 점들은 이 비례분포를 벗어나 있다. 그 점들을 근사치로 여기거나 무시해야 비례분포를 이루는데... 이런 모 델이 아닌 그 어긋난 점들마저도 근사치가 아닌 부분이자 전체로서 만들어내 는 것. 뭐랄까. 가령 내 글쓰기의 아무 부분이라도 떼어내서 몽타즈하여 이것 저것 만들어내어도, 내용상 전혀 다른 이야기인 듯싶어도, 또한 내 글쓰기와 처음부터 달랐던 것임에도 마치 그 글과 내 글쓰기가 내가 글쓰기하기 전부터 내 글쓰기와 그 글이 하나였던 것처럼 느껴지는 것. 그 글을 보나 내 글쓰기를 보나 진배없이 되는 것. 뭐랄까... 야누스랄까...아니면 가면이랄까... 불안이랄 까... 하여간... (야, 인드라, 너, 뭘 알고 쓰는 거냐. 이렇게 길게 쓰면서도 논조가 일관된 걸 보면 알고 쓰는 거 아니겠니? 안다는 인 식론 기준을 어디에 잡느냐에 따라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영화 메멘토가 떠오른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건망증이 심해서 글을 쓴다. 어떤 실마리가 잡히면 통째로 기억이 살아난다. 나는 기록한다. 예전에는 김 용옥 따라서 이를 합리화했다. 나는 김우중과의 대화 이후의 김용옥 책을 안 봤지만 그 이전까지의 책을 다 본 편이다. 그중 기철학산조를 수작으로 여기 고 있고 나머지는 쓰레기가 아닐까 여긴다. 자꾸 까먹는 것은 새로운 것을 자꾸 받아들이기 때문일 것이다,라고 여겼었는데 이제는 인식론적인 차원이 아니라 존재론적인 차원이다. 매월당 김시습이 글을 쓰고 난 후 글에 미련이 남을까봐 냇가에 흘려 보냈다 는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다. 나는 자기 검열이 두려웠다. 글쓰기에 미 련을 가지면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었다. 심지어 오늘예감 멤버들이 내 글 을 싣고자 온라인에서 나에게 작업을 하려고도 했었다. 나에게 알리지 않고 나 한테 시비를 걸어서 그 반응으로 나온 내 글을 싣고자 하는 계획이었다. 그만 큰 나는 청탁을 받으면 글이 안 써졌다. 아니, 못 썼다. 원고 마감 날까지 원고 와는 무관한 온라인 글들을 써대다가 겨우 써낸 일이 한두 번일까. 심지어 만 화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도 그랬다. 보통은 만화영화 시나리오를 사전에 만들어 야 하는데 마치 주말 드라마 만들 듯이 일정에 쫓기면서 만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온라인 글들을 쓰면서 마지막에 가서야 하나 써내고는 했던 것 이다. 하여, 나는 모든 온오프 매체 청탁에 사절한 것이다. 다른 이유들도 몇 있 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올린 글들이 사라진다. 내 탓 도 있고, 내 탓이 아닌 것도 있다. 독립적 블로그 사이트에도 올렸지만 서버 불 안정으로 날렸다. 컴퓨터도 믿을 수가 없다. 벌써 몇 번이나 하드를 갈아치웠다. 프린터하면 된다고? 나는 프린터를 하면 그 분량도 분량이거니와 프린터하게 되 면 더더욱 글쓰기에 미련이 남을까봐 하지를 못한다. 오늘 어떤 이웃이 네이버를 떠난다고 한다. 네이버를 비롯한 상업적 블로그들이 저작권을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것도 한 이유라고 한다. 나는 네이버 등을 옹호할 생각이 추호도 없지만, 나로서는 그것이라도 감지덕지다. 나는 출처만 제대로 밝혀준다면 누가 내 글 퍼 가서 출판하든, 뭐하든 상관없다. 다른 작가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 어떤 이웃이 쪽지를 주었다. 대학에서 내 글로 노래를 만들어 공연을 했다고 한다. 나 중에 이야기해도 괜찮다. 내게 통고하지 않아도 좋다. 다만 출처만 밝혀주면 감지 덕지다. (아까 쓴 글이 더 마음에 든다. 이래서 나는 다시 쓰기가 영 불편하다.) 나는 불안하다. 나는...이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내가 사라질 것처럼 여겨져서이다. 아니, 사라졌 으면 하는 마음이 있는지 모른다. 벌써 몇 번이나 블로그를 때려 칠 생각을 하였 으니까 말이다. 기묘한 이야기라고 있다. 어떤 이웃이 소설 서평을 하였다. 거짓 말에 관한 것이었는데 마침 어제 본 기묘한 이야기 드라마가 떠올렸다. 일본 드라 마인데 이 드라마 중 몇 편을 영화화한 것이 국내에 개봉되기도 하였다. 어제 본 드라마 편은 일본판 고려장 이야기다. 영주가 법령으로 고려장을 실시하자 노모를 모시고 있는 아들이 노모를 숨긴다. 영주가 낸 수수께끼를 노모의 지혜로 풀고 영 주도 죽자 새로 부임한 영주가 기뻐하며 소원을 말하라 하니 돈도 필요 없다, 자신 의 목숨도 아깝지 않다면서 노모 숨긴 죄를 고백하고 노모를 살려 달라 말한다. 영주는 법령을 아예 철폐하고 포상금을 내렸고, 자식은 기뻐서 노모를 찾아온다. 그런데 노모는 죽었다. 노모는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르고 자식 사랑으로 인하여 자 식을 보살핀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밝혀내기 어려운 거짓말을 무엇일까. 자신이 거 짓말을 한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지 않을까. 그러면 진지할 것이다. 거짓말 탐지기 로 밝혀낼 수가 없을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에 나오는 더블 씽킹처럼. 누군가가 그와 같이 한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드러내기 싫은 무언가가 있을 것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드러내려고 한 듯싶다. 내가 지금 기억나는 것은 프로이트가 호랑 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다는 것뿐이다. 어떤 이웃이 교육과 사랑에 관하여 썼다. 어쩌면 나는 내 글쓰기가 영영 사라지기를 바라는지 모른다. 하여, 안 그런 것처럼 이리도 호들갑을 떠는 것인지 모른다. 나의 십팔번은 김광석의 일어나다. 십년 전에 영업사원일 때 그 지역 만화가게가 하 나 있었는데 그 만화가게 아저씨와 조금 친한 편이었다. 어느 날 그 아저씨가 매우 상심하고 있길래, 물어보니 민방위가 해제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은근히 번거로운 민 방위 교육 끝났으면 좋은 게 아닐까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마흔을 넘기기 시작한 그 아저씨는 늙어가는 것에 슬픔을 느낀 것이었다. 마치 여성의 폐경기처럼. 김광석이 죽었을 때 나는 사무실에서 짐을 나르고 있었다. xx영업소는 폐쇄되었다. 이사대우 부장의 치밀한 노조와해 전술로 xx노조가 무너졌다. 김광석이 죽었다, 어이없이... xx노조가 자체적으로 무너질 이유가 있었듯이 김광석도 그랬나 보다. 나는 담배를 물었다, 어이없게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단지 잠시 담배를 피운 것밖에 없었다. 어떤 이웃이 마흔을 이야기했다. 마흔이면, 어제도 누군가로부터 너도 이제 마흔인데... 하는 소리를 들었다. 너도 마흔인데... 너도 마흔인데... 너도 마흔인데... 왕따나 안 당 하면 다행인 나이일까. 소심한가? 아니면 왕따당하는 것을 속으로 요구하고 있나? 어 떤 이웃이 핸드볼 경기를 볼 때 나는 차를 운전하고 있었다. 나중에야 소식을 알았다. 가족과 함께 모처럼 외식을 하였다. 뜬금없이 아내가 회를 먹고 싶다는 것이다. 가을 이 찾아왔나 보다. 나보고는 살 빼라고 해놓고는 뭐야, 이거. 그런데 필요 물품을 사러 할인매장을 들렀는데 민기가 장난감을 사달라고 한다. 눈에 보이게 계산대 앞에 있는 것이다. 마치 티브이 같다. 반문화를 같이 했던 선배는 그래서 집에 티브이가 없다. 티브이가 볼거리를 강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일을 당하면 나 역시 그런 생각이 들고는 한다. 하지만 나는 막 지 않는다. 티브이도, 컴퓨터도 막지 않는다. 피한다고 피해지나? 이왕 불가피한 것이 라면 일찌감치 환장하게 하여 환멸을 빨리 느끼기를 바랄 뿐이다. 면역력이라도 길렀 으면 싶은 것이다. 김미숙이 방송에서 인라인 스케이트 이야기를 한다. 나는 헬쓰를 한 다. 차를 타고 가다 보니 모방송사 공개홀 앞에서는 중학생들로 보이는 오빠부대들이 난리다. 연예인들 쫓아다녀서인지 패션 감각이 있는 듯싶다. 서로가 위해주는 풍토가 아 름다운 듯하다. 하지만 그들이 벽에 낙서하거나 혹은 소자보판을 보니 송혜교 없애기협 회라거나 삼공주파라거나 에너지파라거나 대단하다. 나는 문득 아름다움이란 지독한 화 장처럼 공격적인 데서 나오지 않을까 여겼다. 무섭다. 그래서인지 더욱 아름답다. 그처럼 어떤 이웃들이 같은 시기에 올린 그림을 보았다. 무섭기도 하고, 앙증맞기도 하고 그랬 다. 대학 때 내 글쓰기를 좋아하던 이들 중에 몇몇이 대학원을 간다. 그러면 태도가 달라진 다. 무시한다. 아니, 겉으로만 무시하는 것인지 모른다. 하여간 심오한 학문의 세계 초입 에 들어선 그들의 태도란 단호하기 그지 없는 편이다. 익숙한 일이다. 그러다가 석사 마 치고 박사에 들어가거나 하면 또 태도가 달라진다. 나 만나서 다른 이야기하지 않고 오 로지 대학원 세계를 씹는다. 교수 씹고, 동료 씹고... 맨 마지막에는 네가 부럽다느니 뭐니 한다. 내가 위로삼아 나도 네가 부러워,하면 상황 종료다. 교수를 만나기라도 하면 태도는 또 어떤가. 아, 이것 좋아요, 참신해요. 이렇게 나가야 해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발상이 필요합니다. 과감한 도전이 있어야 해요. 요즘 모대학에서는 온통 교수 영입이다. 김대중 정권 때의 성공회대 보는 느낌이다. 성공회대 요즘 재정상태가 안 좋나. 무슨 건물 매각 한다는 소문을 들었는데... 아무튼 사람들이 올라갈수록 나는 그대로인데 나를 높이 평가 해주니 고맙기는 하다. 이것이 학문의 세계일까. 모르겠다. 마치 무협지 독보강호가 떠오 른다. 유리가면 이야기를 그래서 했나? 유치뽕짝의 세계는 언제나 나를 매혹하게 한다. 어떤 이웃이 오랜만에 듣는 곡을 올렸다. 나는 그 곡이 좋은데... 김정호가 부른 게 이것 만큼은 좋다. 아니, 하나 더 예외랄까. 브라운 아이즈의 그것보다 김정호의 하얀나비가 더 좋다. 나는 자지 않았다. 나는 밤이 흘러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늘에는 여전히 그 붉은 빛의 물집이 가득했고 별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이제 흐르고 움직이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시간은 지나가지 않는다; 르 클레지오 어떤 이웃은 부지런히 지하 세계를 탐험중이었다. 콩나물 대가리가 지구탐험대처럼 불쑥 내 앞을 가로막았는데 피카소가 사랑한 아프리카였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여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그 기억이란 내가 조작했을 지도 모른다. 내가 의존하는 것은 그 기억에 언제나 반정립하는 잃어버린 기억들이다. 마치 이청춘의 단편에서처럼 초등학교 5학년 때 등교하다가 안개 속에 빠져 무려 5시간이나 헤매면서도 도저히 빠져나가고 싶지 않을 때처럼. 나는 이 세계에서 조용히 사라지고 싶었다. 아무 이유없이. : 그런데 지금은 아이 등교시키러 사라진다. 글을 쓰느라 애를 안 깨워서 차로 데려다 주어야 한다. 나는 또 까먹었다. 아내가 화낸다. 정액 묻은 휴지에 쓴다 민주주의여 만세 몽롱시작 달이 몰락한다... 달이 몰락한다... Fade in 길보드에서 사온 테잎에서 나온 노래를 듣는다 칵테일 사랑이다 모짜르트는 필요 없다 탱크주의보다 수천년 튼튼한 글을 쓰고프다 엑스세대가 아닌 나다운 나는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글이 고프다 흔들려 다시 피다 져도 다시 피는 글 글 글 글 글이다 그래서 의자에 앉는다 컴퓨터에 전원을 켠다 CD F10 자동전화걸기 INDRA ******** GO BARUN 17 왼쪽 새끼 발가락이 가려워 담배를 문다 " 시라면 좋겠네 물이라면 혹시는 바람이라면 뚱한 육신을 가둔 시 빛이여 바다라면 바다의 한때나마 꿈일 수 있다면 가슴에 묻히어 아프게 피흐르다 굳어버린 네모의 빈칸이여 네가 없다면 네가 없다면 아아 죽어도 좋겠네 재되어 흩날리는 운명이라도 나는 좋겠네 캄캄한 밤에 그토록 새벽이 오길 애가 타도록 기다리던 눈들에 흘러 넘치는 맑은 눈물들에 영롱한 나팔꽃 한번이나마 어릴 수 있다면 햇살이 빛날 수만 있다면 꿈마다 먹구름 뚫고 열리던 새푸른 하늘 쏟아지는 햇살 아래 잠시나마 서 있을 수만 있다면 좋겠네 시에 갇힌 채 죽더라도 좋겠네 그것이 생시라면 그것이 지금이라면 그것이 끝끝내 끝끝내 가리워 지지만 않는다면 - 지하의 푸른 옷을 패러디함" "몽"이라 함은 꿈이다 예나 지금이나 시는 꿈꾼다 꿈은 쓸 데 없다 우리의 현실은 꿈처럼 지극히 비참하지도 행복에 부풀지도 않다 우리가 사는 이 땅은 한없이 증오스럽지도 사랑스럽지도 않다 시는 쓸 모 없다 그래서 꿈은 도식과 수치와 이윤으로도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처럼 우리 안에 상정되어 있지 않은 모든 것이다 한편 꿈은 시간 속에 놓여진다 차이를 낳으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심장박동을 울려퍼지게 한다 꿈을 통해 우리는 진실을 배운다 그러나 꿈은 목적이 없다 꿈은 꿈이다 시간 속에 놓여진 카오스이다 바로 우리 몸이다 세계이다 "농"이라 함은 육화된 꿈이다 의식적인 꿈이다 그래서 농은 쓸 모가 있다 농은 할수록 는다 사람을 유쾌하게 한다 허물 없고자 한다면 농이다 술에도 친구와도 애인과도 글에도 농이 없다면 어찌 겨운 삶 이끌 수 있는가 농에는 권위주의가 없다 우아래가 무슨 필요가 있는가 농에는 성과주의가 없다 농에 급수 달아봐야 가치를 잴 수 있는가 농에는 엘리뜨리즘이 없다 다같이 웃자고 하는 일이다 사람 살리는 일이다 사람 되고자 하는 일이다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실천이다 "몽롱"이라 함은 꿈과 육화된 꿈간의 오르가슴이다. 에너지가 멋대로 흐르지만 육화된 꿈은 엔트로피마냥 일정한 방향을 가진다 쓸 모 없는 것에서 쓸 모 있기까지는 많은 것을 얻으며 그만큼 버려진다 자유로운 에너지는 자유롭고자 하는 의식을 달래기 위해 덜 자유로와진다 피곤한 의식을 망각함이 아니라 새롭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안으며 화해하며 싸운다 최루탄 속에서 눈물 지으며 달려간다 반짝이는 결혼 반지도 졸린 표정이다 절규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눈꺼풀이 찢어지도록 울부짖는다 끝끝내 좌절하지 않고 살아가는 모든 이들과 함께 흐드러지게 웃는다 일체감이다 "시"라 함은 때를 깨닫는 말이다 오래 전부터 시가 있었으나 권력자들이 전유했으며 권력의 상징이기도 했다 어느 시대에서는 시가 있었으나 자유롭고 싶은 미혼모에 자유를 주노니 내게 예속하라는 말과 함께 발가락을 내밀었던 사랑 이데올로기 시대였다 어느 시대에서는 시가 있었으나 봉건 속박에 목말라하는 러시아 처녀에게 해방을 주노니 당에 헌신하라는 사랑 이데올로기 시대였다 어느 시대에서는 흰 쌀과 고깃국이 사랑임을 교시한 아버지의 사랑 이데올로기 시대였었고 어느 시대에서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대통령 되보자던 사랑 이데올로기 시대였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시가 있었으나 경마장에서 팔리는 사랑 이데올로기 시대가 압권이었다 그래서 고래로부터 시는 있었고 있었으며 시는 없었고 없었다 하늘을 우러러보자 기침을 하자 모오든 쇠붙이여 가라 해설피 신작로에 나는 가요 죽어도 가요 시궁창에 버림받은 하늘에 쓰러져도 조금씩 갉아먹어도 한꺼번에 되찾으리라 새벽쓰린 가슴 위로 찬 소주를 붓는다 가끔씩 대학 교정에 총성이 울린다 소통이다 "작"이라 함은 마당이다 마당은 오지랍 넓게 시간을 담는다 꿈과 사람과 글을 담고자 한다 미어터지더라도 보면 텅비어 있다 경계를 따지고 들어가면 애매하다 그러나 저마다 춤이 있으니 거지춤 양반춤 재벌춤 노동자춤 농민춤 지식인춤 마당쇠춤이 있으니 처음부터 구별 없이 난장이지는 않다 자기 마당이 있는 듯 저마다 마음껏 후리며 사위를 흠뻑이는데 때가 되면 모두 뛰어나와 난장이다 때로는 우기며 저 혼자 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어 웃음거리인데 이조차 마당은 담는다 마당은 획일이지 않으면서 평등하다 흘러가면서 자유이다 조직이다 "시작"이라 함은 말과 조직과의 공유이다 일체가 허요 허가 아니다 관계지음이다 내 것을 지극히 찾으매 내 것이 없고 네 것을 한없이 찾으매 네 것이 없다 그러나 찾음이 때가 있음이니 보이는 데도 보이지 않으며 보이지 않아도 보인다 암일지언정 내 운명일지언정 위장하고 왜곡하고 과장할지언정 어찌 부정할 수 있는가 허나 뒤통수가 가장 염원하는 끝이며 시바의 춤이니 흘러가는 대로 거스르지 않으며 몰입한다 이는 버거운 자기 부정이며 통일이며 운동이다 흐름이다 "몽롱시작"이라 함은 오르가슴의 흐름이다 일체의 방해도 혼연히 뚫고 흐른다 내 안에 숨쉬는 공기를 네게 조금 주기보다는 전부를 주고 너 또한 내게 전부를 준다 끊임없이 출렁이는 물결 시이다 담배를 끈다 전원을 끊는다 의자에서 일어난다 테잎을 중단시킨다 불을 끈다 발가락이 계속 간지럽다 Fade out 지구가 올라간다... 지구가 올라간다... 어,예전에도 그러지 않았나 새삼스럽게 1994.6.6 인드라 공수래 공수거 신문에는 나오지 않았다 대구의 한 건설현장에서 이십대의 한 청년이 떨어지는 기자재 더미에 깔려 비참하게 죽었다 노가다 십장의 아들로 태어나 고교 마치고 아버지를 따라 노가다 현장을 전전하며 미장이 용접 전기 기술을 배웠다 오십만원짜리 정규직보다 칠십만원짜리 노가다 일용직이 짭짤하다는 얄팍한 계산 탓에 지존파도 되지 못한 채 깔려 비참하게 죽었다 빈 몸뚱아리로 와서 노동자 에미애비 엿먹이게 하더니 그나마 깔려 죽어서 보상금 남기고 가는구나 좆 같구나. 1994. 6.6 인드라 언더그라운드 무라까미 하루끼의 "언더그라운드"를 무척이나 재미있게 읽었다. 옴진리교의 지하철 사린가스 사건을 다룬 것인데 그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비대중적이었다. 옴진리교 간부나 신도를 다룬 것도 아닌 지하철에서 사린가스에 중독된 피해자들을 중심으로 한 르뽀형식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피해자들과의 인터뷰를 반복한다. 같은 사건에 대해 피해자들이 각각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가 이 소설의 재미일 듯싶다. 무라까미 하루끼는 역시 이 소설에서도 매우 진지한 태도를 잊지 않는다. 그의 소설 도처에서 드러나는 것은 "파시즘"에 대한 경계라고 나는 본다. 그에게 파시즘이란 특정한 지도자에게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이면 모습이라고 본다. 그래서 옴진리교 또한 이 사회의 이면이 아닌가 하는 관점을 취하는 듯 보인다. 그는 이 소설에서 왜 우수한 엘리뜨들이 허황된 옴진리교에 빠졌을까라든가 혹은 털복숭이 교주한테 왜 여자들이 뻑갈까하는 것에 초점을 두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러한 사건을 계기로 육체 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깊은 상처를 입은 이들을 끝까지 추적한다. 무라까미 하루끼는 분명 소설가다. 그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삶을 살아가고 싶은 원고지 안에서의 배우인 셈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카프카를 좋아하고 발자크를 좋아하고 스땅달을 좋아하고 츠바이크와 마광수와 쿤데라를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위한 소설을 그 친구들이 쓰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그 친구들이 내 소설을 읽는다면 그들도 말하리라. 나를 위한 소설을 쓰고 있군,하고 말이다. 2002.3.16 인드라 추신 : 왕가위의 화양연화처럼 그도 이 소설로 정신을 차린 듯이 보인 것이 아닐까 여겼다. 그러나 왕가위나 그나 세상을 잊기 위해서인지 홍콩 반환이다, 재즈다, 뭐다 하며 암호 놀이를 하는 것을 보니 나와 사정이 비슷한가 보다. 바보 같은 놈들. 2004. 8. 15 인드라 * 현실문화연구 출판사에서 기획서 중 한 기고문으로 청탁받아 쓴 글인데 기획이 불발되어 무산된 글입니다. 지금은 문화비평 글은 안 쓰고 청탁도 사절중입니다. 제 글 중에 대담 형식이 많은데 실제 나눈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이해하시는 분도 있는데 내 안의 나오미라고 봐주시면 됩니다. 1997-01-25 22:11 <대담> 포르노그라피는 공룡처럼 타살될 운명이다 등장인물 : 나오미 <뼈만 남은 여성>, 인드라 < 조루뿐인 남성> 남한에는포르노가배회하고있다 태초에포르노가있었다 포르노적상상력은죄악이다 포르노는당신의신앙보다아름답다 포르노는왕자병이다 포르노는죽음에이르는병이다 포르노는파시즘이다 포르노는공룡처럼타살될운명이다 노르웨이 신화에서 '태초'는 안개와 얼음의 세계로 묘사된다. 구름이 얼어서 거인(이미르)과 젖소(아우드훔블라)가 되었다. 거인은 젖소의 젖을 먹고 살았다. 얼음이 녹아 소금이 약간 드러났다. 젖소가 소금을 핥자 얼음 속에서 한 남성이 나왔다. 젖소부인 바람났네 : 한시네마가 제작한 90년대 최대의 히트작. 5편까지 나왔으며, 1,2편은 남편이 전 부인을 타살하고 재산을 가로채 젖소부인을 맞이하고, 전부인의 아들이 젖소부인과 열애 끝에 남편의 음모를 분쇄한다는 원초적 본능의 아류작. 3,4,5편은 여성지위향상(?)을 양념 삼아 욕망이 강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고초(?)를 희극적, 또는 비극적으로 꾸민 내용들. 관능의 제국 In the Realm of Sense : 일본 나기사 오시마가 30년대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던 실화를 영화화. 1976년에 출품되어 유치한 취미를 늘 고상하고, 보편적으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가진 칸 심사위원의 형편없는 자질 때문에 76년 칸영화제 대상 수상. 욕정 강한 기생이 주인 남성과 섹스를 하다 목을 너무 졸라 남성이 숨이 끊긴 것을 알고 칼로 남성의 몸을 자른다는 내용. 더스틴 호프만 주연의 영화 '졸업'은 포르노일까? : 인드라가 말하는 포르노는 기만과 해체의 언어인 포르노. 인간이 고통과 불안을 끝없이 궁구하기 분해능. 인간이 수천년 동안 거의 변하지 않은 채 온존해 온 사고 틀. 인간이 인식하고, 계몽하고, 생성시킨 슈퍼 컴퓨터이자 마법을 상실한 꿈. 자연스러운 성본능을 자연스럽지 못하다고 동물적, 퇴폐적으로 낙인찍은 뒤 꿈꾸는 자유로운 성해방. 그 어느 시대보다 성해방의 깃발이 나부끼는데 정작 누릴 자유는 없고, 다만 남아 있는 언어. "지금은 성혁명중." 컴퓨터 바이러스? 세기말적 공포? 볼품없고 싱겁게 세워진 콜롬부스의 달걀. 인간의 틀이 역사 이래로 그리 달라지지 않은 불행한 사례. 폼나게 살다 죽고 싶은 허망. 성애를 다룬 모든 영화. 사랑이란 섹스의 은유, 멜로는 포르노의 은유. 천박하여 더욱 속시원한 배설행위. 남성지배사회에서 사랑을 다룬 영화는 포르노그라피. 국내에 들어오면서 한 남성과 동시에 관계를 갖는 모녀가 숙모와 조카로 바꾸어 상영된 포르노 '졸업'. 나오미 : 포르노그라피에 일가견이 있다는 당신을 만나 반갑군요. 당신은 PC 통신을 통해 글쓰기를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하지만 PC 통신 글쓰기는 막 끓인 라면처럼 맛있다가도 다시 대하면 다 불어터진 라면 신세 아닐까요? 그래서 내가 인터뷰를 위해 당신의 몇 편의 글쓰기를 급하게 읽었다는 점을 이해해 주겠죠? 당신은 마치 글쓰기 안에서 생생하게 움직여요. 다른 한 편 이 남성도 역시 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포르노적 상상력이란 해부학 외에 또 뭐가 있을까요? 에로티카는 머리에 바람만 들어간 위인들이 영리함을 뽐내기 위한 포르노가 아닐까요? 인간의 내장을 들쑤셔봐야 아담의 없어진 갈비뼈 찾기 다름 아닐까요? 버지니아 울프는 이렇게 말했죠. "나는 남성의 관점을 혐오한다. 남성의 영웅주의, 미덕, 명예에 넌더리가 났다. 이 남성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더이상 자신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리라." 인드라 : 페미니스트는 많지만 여성문제에 진지한 접근을 하는 사람은 몇 안된다는데 그 중의 한 분을 만나 뵙게 되니 나 또한 반갑습니다. 평론을 하는 사람은 흔치 않죠. 대부분 서구인의 입을 빌어 별 시답잖은 현상을 아주 그럴듯하게 이유를 찾아내어 해설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들은 지적이지 못한 사람에게 해설을 하는 것이야말로 지식인다운 계몽정신이라고 생각하죠. 나도 그런 문화해설가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해설하자면, '젖소부인 바람났네'의 히트는 제목 탓입니다. 정지용의 시 '향수'에 '얼룩빼기 황소'의 얼룩빼기는 외국 수입 젖소 수놈에만 있고, 박목월도 '송아지 송아지 얼룩 송아지'라고 썼으며, 소고기의 90% 이상이 '젖소'입니다. '부인'은 가부장제에서 남성의 소유물이고, '부인'은 가장 흔해 빠지면서 은밀하고, 가장 위험하면서도 안전한 대상입니다. '젖소부인'은 지나치게 낯설지 않은 이국적인 맛,'에로티카'의 안전빵입니다. '바람'은 생식에서 희석화 시키고, '났네'는 자신을 탈각시킨 놀부식 거리두기입니다. '바람났네'는 가장 흔해 빠진 대상이 주체화되고, 가장 은밀한 대상이 객체화되는 과정이며, 가장 위험한 대상이 거짓을 폭로하고, 가장 안전한 대상이 공격을 감행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젖소부인 바람났네'는 내용에 상관없이 히트할 수 있었습니다. 폭력부인 쇠고랑 찼네 따위의 유행어도 같은 논법입니다. '관능의 제국'을 이해하는 열쇠는 한국의 '남성은 배짱, 여성은 절개'와 일본의 '남성은 배짱, 여성은 애교'이면 충분합니다. 신라여왕도 풍기문란했던 찬란한 문화유산이 전래된 일본은 한국의 천지인 사상과는 확연히 다른 정복사회, 신분사회 속에서 노예사상을 본성으로 여성은 일본자기처럼 교태롭게 애교의 기술을 익혔습니다. 한국의 여성이 황진이 같은 지독한 개성으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기세를 올린다면 일본여성은 진한 화장으로 남성의 좃대를 세우는데 매진해 왔습니다. 그런데 누가 이런 것 일일이 생각하고 제목 정했겠어요? 술먹다가, 혹은 고스톱치다가 우연히 나왔겠죠. 아무튼 사정이 이러하기에 나는 가끔 일탈을 시도해 보고는 하는데 그래서인지 개별 문장의 파괴력과 자유로운 비약의 방법론을 갖춘 시니컬 래퍼라고들 하죠. 나도 당신의 글을 읽었습니다. 당신의 글쓰기는 매혹적이지만 새우깡을 먹으며 편안하게 읽을 수 없기도 하죠. 당신은 남성에게 좆을 짜르든가, 여성에게 권력을 양도하라 말합니다. 이제껏 남성천국의 역사이니까 말이죠. 또한 당신은 동성애도 여성적 역할을 맡은 사람을 주목하며 공제된 세금이 어디에 쓰이는가 물으면서 세상에 분노하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포르노적 상상력은 죄악일까요? 버지니아 울프의 말을 약간 바꾸어 볼까요? 나는 이성애의 관점을 혐오한다. 이성애의 영웅주의, 미덕, 명예에 넌더리가 났다. 이 이성애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더이상 자신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다. 나오미 : 최선의 방어가 공격이죠? 내가 당신을 인터뷰하려는 이유를 설명하죠. 성을 자연적이고 생물학적인 것으로 생각하기 보다, 성을 문제화하고 자의식의 대상으로 하는 사회적 태도를 성적인 문제(sexuality)라 한다면 1990년대는 성적인 문제의 시대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성적인 문제의 기저에는 언제나 여성에 대한 비하가 깔려 있다고 봐요. 남성은 이 문제를 관능적인 표현 등으로 회피하는데 이런 회피 전략이야말로 남성이 여성을 수천년 동안 지배하면서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남성의 유용한 전략이란 점이죠. 남성은 비현실적인 관능 타령을 하면서 여성에게 여성이 뭘 몰라, 모르면 포르노나 보라며 자신의 성기를 들이밀고 폭력성을 유감없이 드러내죠. 남성은 당신의 이론을 무기 삼아 여성에게 직접 실습하지 않겠어요? 당신은 면죄될 수 있을까요? 인드라 :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을 따지면 창녀에 대해 말하거나 글쓰거나 그리기였습니다. 창녀는 여성의 생식기만을 지닌 존재이고요. 그런데 내가 인터뷰를 받아들인 이유는 생식기적 기반이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남성입니다. 그런데 이 말이 묘하게 들립니다. 마치 나는 제 1야당에 있는 경상도 남성이다, 처럼 뉘앙스가 풍부해요. 그는 경상도 남성이니 특정 정당에 소속되는 것이 상례이나 이를 벗어났으니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지요. 그런데 그는 자유로운 이미지를 포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용례는 출신지 배경을 중시하는 남한정치 풍토에 있지 않겠습니까? 포르노에도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는 남성입니다, 라는 말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여성의 이익을 유린하려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런데 문제를 생식기적 기반으로 묶어 두려는 지배전략이 문제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나는 나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지 못합니다.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수많은 여성비하 표현들이 나옴에도 여성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있잖습니까? 그러므로 지배전략은 현실적이며 동시에 상징적입니다. 나는 당신의 현실적 저항전략에 동의합니다만 상징적 저항전략도 고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당신은 남성이 더욱 더 성폭력을 노골화하고, 여성이 성폭력에 둔감해지게 하는 지배전술의 변화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는 정신분열증에 걸리지 않으려는 인간정신의 합리주의라고 봅니다. 이러한 합리주의가 낳은 우리들의 무수한 신화가 사람 속에 내재되어 있다면, 신화가 설사 몽땅 남성의 전유물이라 하더라도 비판만으로 해결될까요? 지배전략에 의해 잊혀진 신화들이 있지 않을까요? 포르노적 상상력이 남성 생식기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는 점 수요자 대부분이 남성이니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남성이 일원론적인 형이상학이라면 여성은 이원론적인 형이상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성 또한 멜로물 등으로 현혹 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여성 생식기를 그대로 대변해 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칠 문제는 아니지 않을까요? 생식기의 차이를 차별화 시키는 지배전략에서 탈출하려는 인간의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나오미 : 지나친 자기과잉이군요. 당신 또한 사드적 음모에 동참하겠다는 저열한 놈인가요? 죄송. 수많은 남성 애호가들이 사드가 인간정신의 진수를 보여주었다며 격찬하였습니다만 수많은 여성이 희생당한 참혹한 현실을 외면했죠? 사드는 귀족이고, 지식인이고, 무엇보다 남성이었지만 당한 여성은 평민이고, 비지식인이며, 무엇보다 권리가 박탈당한 여성이었죠. 사드는 구세주처럼 많은 이들의 죄의식을 사하듯 행동했지만 정작 자신의 죄의식을 털어 내기 위한 허약한 짐승이었습니다. 여성은 기생적이며, 부유하며, 주변적이라 하죠. 남성이 여성을 결핍된 존재라고 보았고, 결핍되었기에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이 남성지배전략의 포로로서 색녀는 여전히 남성의 노예인 해방된 노예가 되죠. 남성이 색녀이길 거부한 여성에 대해 공격을 합니다. 결벽주의자, 악녀 식으로 말입니다. 이것이 위험한 여성의 정체입니다. 그런데 여성은 단 한 번도 과잉된 적이 없습니다. 나는 포르노에 나오는 여성의 두 전형, 색녀와 악녀를 봅니다. '젖소부인 바람났네'나 '관능의 제국'의 여주인공은 하나같이 색녀이지 악녀가 아닙니다. 색녀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일 뿐입니다. 애니미즘의 시대에는 좃대를 세웠고, 중세시대에는 우애(友愛)결혼을 용인하면서 어둠침침한 고해성사실에서 신부의 부도덕한 외설이 흘러나왔고, 귀족 남성만의 사드적 작태가 대중으로 파고 들어가 음란화되자, 당신 같은 좌파가 등장하죠. 좌파는 여성이 혼자라는 느낌을 갖지 않게 하자고 열변을 토했지만 여성은 한 번도 '함께'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남성은 늘 '함께' 하자고 역설했고, 늘 똑같았죠. 카스트로도 많은 쿠바여성을 외화벌이로 외국인 남성에게 내몰면서 여전히 자신들의 백성에 대한 사랑은 끝나지 않았다고 항변하죠. 한마디로 남성은 자폐증 환자이자 성기노출증 환자입니다. 성경이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남성은 하늘이요, 여성은 땅인가요? 인드라 : 과잉은 좌파의 특기이죠. 좌파의 근거지가 포르노 산업입니다. 포르노 산업은 자본주의의 첨병이며, 어느 문화산업보다도 장사가 잘 되는 물장사입니다. 좌파가 포르노 산업의 대변인이다, 라는 말은 사실입니다. 이제껏 좌파는 자본주의의 첨병이란 비난에 직면했으니까요. 첨병질하다가 무장탈영한 병사쯤으로 위안할 수 있을까요? 좌파 남성조차도 태어나면서부터 나는 존재한다, 따위의 언제나 과잉된 데카르트식이죠.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묻습니다. 그녀들 또한 당신이 정녕 '함께' 손잡고 나가야 할 사람 아닙니까? 당신들은 영화 '델타 비너스'에 나오는 아네스 닌을 한계가 있다고 비웃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은 남성이 여성을 섹시한 관점에서만 보지만 정작 여성은 푸근한 아줌마나 용기 있는 여성을 좋아한다며 자매애를 강조합니다. 그런데도 영화 '델마와 루이스'처럼 남편한테 뛰쳐나왔는데도 귀여운 남성을 찾습니다. 문제는 동성과 이야기하기도 좋아하지만, 이성과 말하기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남성은 남성전용클럽을 만들어 남성끼리 낄낄대며 여성의 노예성을 테스트했습니다. 여성은 이렇지 않죠? 다른 방식으로 테스트를 합니다만 이제껏 주목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이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관능의 제국'의 여주인공처럼 남성의 성기를 자르는 행위는 일견 여성적이지만 사실 남성지배전략입니다. 동시에 양귀자의 소설'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말미에서 느끼는 타협을 무작정 비난할수만도 없는 딜레마가 있다고 생각되는데 이 점을 고민해야 되지 않을까요? 그렇지 않다면, 역시 남성의 분리지배전략에 봉사하는 것이 아닙니까? 나오미 : 당신은 마치 포르노 업주가 여성의 지위향상을 인정한다면서 그조차 팔아먹으려 환장한 새끼처럼, 또 죄송, 말하는군요. 나는 여성의 지위향상이 남녀대등성 원리에 입각하여 90% 이상 진행되었다는 덴마크의 포르노 규제 철폐를 압니다. 그러나 10%의 차별만 남아 있더라도 포르노그라피를 합리화시킬 수 있을까요? 여타 나라보다 덴마크가 설령 성폭행율이 낮더라도 포르노그라피의 규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당신은 여성의 단결을 호소하는 듯이 말하면서 실제로는 남성과 타협한 여성을 우위에 놓고 있는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남성전용클럽을 말하면서 은연중 여성전용클럽에 대한 비난을 눈치챌 수 있었으니까요. 남성의 방식은 너희도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남성처럼 된다고 페미니즘을 몰아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많은 여성이 혼란에 빠지고 있죠. 마치 페미니즘이 남성에게 여성을 헌납하는 뚜쟁이처럼 인식하게 만들죠. 그 점에서 당신이 비판하는 이문열과 당신이 다른 점이 무엇이지요? '관능의 제국'이나 '젖소부인 바람났네'를 용인할 수 있는 우리의 이익은 무엇이지요? 당신은 차이만을 인정해 달라고 하지만 내게는 차별을 용인해 달라는 소리로밖에는 들리지 않는군요. 인드라 : 제도는 해방의 힘을 먹고 재구성됩니다. 해방은 제도가 360도 뒤집힌 형태이죠. 남성은 해방을 통해 재구성된 제도를 더욱 착취하며 고스란히 자기 것으로 만들어 왔습니다. 늘 외부로의 일탈보다 내부로의 과잉이 문제입니다. 당신이 좌파를 비판하는 것은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을 선언한 좌파가 여성문제에서만큼은 완고하게 형이상학적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기독교 남성은 인간의 동물적 속성을 조장하는 성행위가 신의 뜻을 위반한다고 보고 포르노를 공격하지만 인간의 죄의식 중에 저지를 수 있는 가장 흔한 음란함 때문에 십일조가 늘어나는 포르노의 음덕을 단단히 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당국 남성은 공공질서의 혼란을 조장한다고 포르노를 공격하고 있지만 정권의 위기관리면에서 포르노가 효과적이기 때문에 묵인하기도 합니다. 자본가 남성은 노동자의 통음난무를 조장하여 일의 생산성을 떨어뜨린다며 포르노를 공격하지만, 이윤 때문에 포르노를 제작하거나 남몰래 즐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운동가 남성은 청교도적으로 포르노를 공격하기도 하지만, 권력과 자본을 통렬히 비판하는 도구로써 포르노의 역할을 긍정하기도 합니다. 그러하듯이 페미니스트들이 남성의 가부장적 우월주의를 조장한다고 포르노를 공격하지만 이러한 여성의 사랑법에 침묵한다면 무엇이 다르죠? 당신들 모두 포르노가 가지는 대중에 대한 영향력만을 고려할 뿐이지 않습니까? 모든 이들이 다 공격하지만, 정작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 즉 흔적 같은 것입니다. 물론 당신의 입장이 현재에 있어 공평치 못한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이념은 다른 어떤 이념보다 우월합니다. 그러나 그 또한 이념이라면 이념의 자율성을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이 현실에서 발견하는 사실을 분석하고 추적하는, 또한 그 이념을 주장하고, 표현하고, 보장받는 그 이념의 틀은 무엇이겠습니까? 그러한 이익을 배제할 수 있을까요? 만일 포르노를 규제한다면 이러한 이익을 고려해야 되지 않을까요? 아니라면 당신의 순수함 때문에 우리는 모든 포르노를 모두 분서갱유하거나 아니면 전면허용해야 할 것입니다. 나오미 : 순수함 역시 당신의 마법, 혹은 페티쉬의 대상 아닌가요? 나의 순수함이 아니에요. 국민의 민주화 요구와 올림픽 개최, 문민정부 탄생, 통일 요구 등의 굵직한 정치격변을 넘어 전자기술의 발달과 매스미디어의 폭증과 문화산업을 향해 가는, 세계로 자본수출을 시작한 재벌공화국이자 제국주의 국가 남한 따위의 당신이 흥미를 느낄 만한 페티쉬일 뿐이죠. 거품 민주화의 장본인, 페니스가 만들어 낸 마법에 불과해요. 당신은 사회주의권 몰락을 훔쳐보며 자위행위 하듯 순수함을 비판하죠? 사람이 팬클럽화 돼 가고, 마니아적 취미를 갖췄고, 놀랍거나 혐오스러운 것만이 세상을 바꾼다며 환호할 때 당신의 조울증은 알라딘의 마술램프처럼, 장정일의 우주선 페니스처럼 부풀다 쪼그라들죠? 그럼에도 신문지상의 단말마적인 비명이 계속 되니 당신은 그저 고립된 채 다른 고립된 개인을 응시하죠. 불쌍하군요. 당신은 마치 우리 여성이 강간당한 아픔 때문에 불현듯 일어나 울부짖는 것처럼 다른 이들이 무서운 괴물처럼 보일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당신을 이해하기 보다 비난할 것이 틀림없고요. 현대인들이 점차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당신은 이제 환상 속에서나 글쓰기에서만 여성을 볼뿐인 괴물이 된 셈입니다. 당신은 젖소부인처럼 가슴만 큰 괴물을 탐닉할 뿐입니다. 마치 프랑케슈타인처럼 흉측하게 태어났지만 사랑을 하고 싶어 강간을 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살인을 이성애와 연결시키는 가엾은 바타이유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위반과 금기는 고작 괴물의 확증일 뿐입니다. 나의 순수함, 페미니즘의 순수함을 그에 비할 수 있을까요? 인드라 : 괴물은 우리들, 혹은 남성이 만들어 낸 것입니다. 관능의 제국에서 여주인공이 거지에게 보시하듯 자신에 대한 연민 혹은 값싼 동정심입니다. 부유하는 당신이 느끼는 지점은 당신보다 더욱 헐겁게 느껴지는 대상에 대한 애증입니다. 여성이 지배자를 선택했지만 당신은 결국 지배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까? 그러나 현대인들이 점차 애인보다 애완동물을 좋아하는 것처럼 이제 당신은 고립된 채 콘크리트를 파먹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은 마치 좌파가 겪어야 했던 수배자의 생활처럼 동지의 이름을 팔라고 고문당하듯이 평온한 세상을 저주할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 가도 버젓하게 여성의 벗은 몸이 전시되고, 아무렇지 않게 그 사이로 지나가는 여성조차 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고려시대에 냇가에서 남녀가 목욕을 했다는 고전도 의미가 없어집니다. 남성의 전유물이 폭력이며, 자폐증이며, 조울증이라면 여성의 전유물은 동정이며, 실어증이며, 우울증이 됩니다. 세상에 대한 저주조차 당신은 이제 포기합니다. 대처 수상이 격찬될 지라도 당신은 책 읽어주는 여성처럼 사랑을 하고 싶지만 아무도 사랑할 수 없고, 자신도 사랑할 수 없고, 그럼에도 현실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당신의 뜨거운 동정심은 웃음을 빼앗긴 코미디와 같습니다. 당신은 이데올로기적인 메시지만 남아 영원히 떠도는 아방가르드가 지니는 외로운 영혼, 싸구려 키치, 외면 당하길 소망하는 죽음,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나오미 : 꿈은 늘 전복될 운명일까요? 우리의 인터뷰는 마치 우주의 끝과 끝에서 공간이라도 접히길 기다리는 베케트의 고도와 같군요. 그러나 나는 더러운 바퀴벌레를 손가락으로 짓누르듯 나의 혐오를 불사르며 편집증 시대에 고독하게 우뚝 서겠습니다. 인드라 : 포르노도 인간의 영역이며, 마지막까지 가서야 사멸될 파시즘입니다. SM 소설을 보다 보면 그런 막막함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포르노에게 끊임없이 산꼭대기까지 바위 덩어리를 굴려 올리게 하는 형별을 내렸습니다. 그보다 무익하고도 가망 없는, 더 끔찍한 형벌은 없다고 우리가 판단한다면, 우리는 디스토피아를 긍정하는 외계인 같은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들은 공룡처럼 타살될 것이니까요. 그때서야 비로소 포르노는 사멸될 것입니다. "인드라는 민속문화를 빙산의 일각만을 인정하는 스탈린주의적 당파성이 아니라 빙산의 9/10까지 감당하려는 인본주의적 연대성에서 찾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민주주의의 쟁취는 민주주의의 실현을 필연화시킵니다.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르노그라피는 사랑을 잃은 시대의 상징입니다. 가장 뒤늦은 성담론의 하나로써의 포르노그라피는 성정치운동의 전술적 단위로 논의될 것입니다. 마르크스의 이론은 "인간"의 추상성에서가 아니라 "인간"의 구체성 속에서 "인간"을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해체 : 통일에서 포르노까지; 서문 p 17" 포르노그라피를 어느 지점에서 논의하는가가 무척 중요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근대 정치사를 통해 볼 때 어디까지 인간으로 확정하는가에 따라서 자유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이 판명났기 때문입니다. 미국 독립선언서에서 나오는 인간의 자유와 평등, 그리고 존엄성은 프로테스탄트 부자 남성 백인의 권리일 뿐, 다른 인종과 다른 종교와 다른 성에 대해서는 배타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 설명하기 귀찮아서 편의상 가상적인 공동체를 설정하고 있습니다. 미래의 공동체를 전제하고 쓴 우리가 아닌 일시적인 우리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이 낱말조차 소외의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 현 체제에서 자신의 권리를 극한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인간이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아닌 자가 인간인 척 군다면 귀족 집사가 귀족보다 더 귀족인 척 안하무인하는 꼴과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포르노그라피 논의 또한 이 논의의 연장선에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인가? 우리는 인간이 아니다,라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 이전에 우리는 여성이고, 노동자이고, 백수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실적인 인식입니다. 우리에게 여성과 노동자와 백수는 있지만 이들을 아우르는 인간은 없습니다. 다음으로 보아야 할 지점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인간이 아니라면 왜 아닌가에 대한 근거 규정이겠습니다.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하에서 인간은 없다,라는 것이 내 소견입니다. 여기서 스탈린주의적 규정은 기존 동구권 사회주의를 사회주의로 본다는 점이 오류였습니다. 거칠게 규정하자면 스탈린주의 사회주의는 주변 자본주의라고 일단 규정합니다. 또한 빙산의 일각이 아닌 빙산의 9/10까지 감당한다는 말은 무엇이겠습니까? 첫째, 이러한 규정을 뿌리까지 파고든다는 의미가 있을 것이며, 둘째, 뿌리까지 파고들 뿐만 아니라 뿌리가 자라는 토양까지 바꾸고자 하는 의지가 담긴 것이며, 셋째, 이렇게 바뀐 토양에서 각각 다른 뿌리들을 관계짓는다는 실천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포르노그라피 논의의 중심점은 무엇이겠습니까? 특수한 단계에서의 과제에 대응되는 포르노그라피라는 점입니다. 성혁명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회에서 실제 성혁명은 말뿐이라는 것입니다. 20세기 과제는 서문과 성명서의 역사이자 글쓰기의 역사였습니다. 이러한 한계는 민주주의 쟁취를 실현과 대립하게 만들고 긴장관계를 필연화시킵니다. 성담론 가운데 포르노그라피가 가장 뒤늦게 논의되고 있다함은 가장 말하기 곤란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이는 역설적으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 하에서 가장 배제되고 있었던 영역이라는 점입니다. 끝으로 포르노그라피는 성정치운동의 전술적 단위라는 점입니다. 지배계급서부터 여성운동가에 이르기까지 한편으로 포르노그라피를 이용하고, 한편으로 포르노그라피를 공격했습니다. 이들은 대중에게 가장 효과적인 계몽수단이 포르노그라피임을 알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반면에 상대편이 대중을 현혹시키기 가장 좋은 수단이 포르노그라피임을 알기에 또한 적극적으로 반대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지점에 놓여진 포르노그라피를 점검하고, 전략적인 연대 차원에서전술적 단위로 포착하는 것이 긴요함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작가를 '대의제의 국회의원'처럼 보고 있습니다. 작가는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아무나 할 수 없고, 보다 많은 국민에게 속시원한 소리를 하고 싶어하지만 속시원한 소리를 끝내 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대리배설기구로 보고 있습니다. 주지하다시피 대중이 주인공으로 나선 이야기는 근대 이후의 일입니다. 인쇄매체의 발달로 소설과 포르노그라피가 동시에 탄생하여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오늘날 소설이 지배계급들만 읽는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않듯이 포르노그라피 또한 지배계급만 소유한 전유물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인쇄매체라는 매체를 통과해야 하기 때문에 매체를 장악한 지배계급 영향력을 상당하게 받습니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검열과 자기검열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나는 이러한 매체 이데올로기를 이마골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오늘날 국회의원 활동을 전적으로 매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는 것처럼 작가 또한 전적으로 매체를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자리매김에서 볼 때 소설과 포르노그라피는 현상적으로 대중이 주인공이지만 지배계급을 갈망하거나 순응하는 자로 위치지을 수밖에 없고, 대중이 일탈적인 행위나 혁명적인 행위를 하더라도 방종이나 비참한 최후로 끝맺지 않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작가는 국회의원처럼 개인의 성공을 보여줄 수 있더라도 시대의 성공을 보여줄 수는 없습니다. 당연히 일부 작가들은 반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모습이란 '당대의 쟁쟁한 사상가들을 멀리서 보면 우스꽝스런 사무라이들이지만, 신경질적인 출혈, 물질적 손실, 대중 앞에서의 모욕들을 고려한다면 용감하면서도 사실은 슬픈 현대의 사무라이; 줄리아 끄리스떼바'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치 구로자와 아끼라의 7인의 사무라이에 등장하는 사무라이처럼 농민을 괴롭히는 산적을 물리치고 진정한 승리자는 농민이다라고 말하는 장중함을 갖추지만 동시에 마카로니 웨스턴의 총잡이처럼 희화화되어 대중 앞에 나타나는 모습을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위의 가사가 의미가 있는 것은 무엇때문이겠습니까? 개인의 성공 앞에서 주저앉은 한 여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시대의 성공 앞에서 주저앉은 한 여성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이 여성은 이 시대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몸팔아 국모가 되는 여성이 무슨 모범이냐, 대처같은 이가 따를 모범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몸을 팔아야만 연명이 가능했고, 아울러 성공했을 때에도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보다 자신의 과거를 가감없이 드러내며 시대의 성공을 바랬던 사람이었습니다. 가령 몸파는 여성들도 애국하는데 하물며 정치인들은 무엇하고 있는가 따위의 이원복 만화식 발언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시대의 성공 앞에서 주저앉아야 했던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포르노그라피의 가능성을 탐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즘 내 주위에서 부쩍 글쓰기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고 기만과 해체, 내공과 무예라는 말이 논의되고 있다. 나는 이같은 논의에서 근현대사를 관통하며 꼿꼿하게 자리잡아왔던 선비 정신적인 글쓰기와 비교되는 또다른 글쓰기를 본다. 희희낙락거리면서도 여전히 시대와 맞닿으려고 발버둥치며 대안 부재와 목적없는 전투 속에서 탈진될 때까지 아낌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용사의 결연한 승부를 본다. ; 너희가 잡담을 믿느냐, 기만적인 글쓰기를 위한 서론에서" 계급구도가 더욱 심화되가고 있는 사회에서 시대의 가변성을 말한다는 것자체가 환상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가장 현실적인 것은 돈많은 부자와 결혼하는 것외에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돈많은 부자와 결혼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습니까? 포르노그라피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시대에서 포르노그라피를 잘 알아야 이런 개인적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개인적 성공을 외면하고, 개인적 성공이 시대의 성공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외면하고, 시대의 가변성만을 주장한다면 대중은 더더욱 관심을 잃을 것입니다. 라이히가 지적한 바 노동자들은 파업보다 데이트를 더욱 소중히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끈이 연결되어진 단절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개인적 성공을 과대포장하지 않으면서도 시대의 성공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을 제기할 수 있다면 이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우선 우리 자신이 지난날의 선비가 아닌 시정잡배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눈높이 교육이란 것이 왕이 민정시찰 나가듯 하는 것이라면 우리의 방식은 우선 개인적 성공을 정면으로 내걸고 이런 자신의 성공을 유감없이 비웃는 꼴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 테면 주성치의 식신에서 묘사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해학입니다. "해학은 지난날의 고통을 단절시키지 않고서, 삶을 단절시키지 않고서 유희하는 따뜻하고 즐거운 몸만들기이다. 타인에 의해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물에 빠진 누군가를 구출한 최불암인 척하기이다. 해학은 이러한 영역을 넘나들어 또 다른 영역으로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이며, 사적 상상력이 사회적 상상력에 활짝 문을 여는 열린 텍스트가 되는 일기쓰기의 사회화이다. 무의식은 대중이 다가가지 못 하는 자연스러움, 생생함, 솔직함이 아니다. 무의식은 솔직함과 기만적인 것의 결합이며 흔적이며 낙서이며 잔혹이며 유령이며 선험되었다고 가정된 주체이다. 해학은 무의식의 역사화를 끊임없이 중단시키는 동시에 동시에 무의식의 역사화를 무용화시키기이다. 끊임없음은 무의식을 낯설게 대하기이다. 중단함은 축제이며, 놀이이며, 웃음이며, 비관이 아닌 낙관이며, 초라한 자신을 부단히 개선시키려는 라만차의 풍차돌리기 같은 몸부림이다. 무용화는 적과의 동침도 마다하지 않는 희극이 아닌 비극이며 경제논리를 경쟁으로 되돌려보내려는 시지프스 신화 박살내기이다. '나는 너다. 너는 나다. 나는 1인칭이며 2인칭이며 3인칭이다. 나는 히틀러이며 스탈린이다. 나는 파쇼이며 혁명가이다. 나는 사람이자 괴물이다.' ; 너희가 잡담을 믿느냐, 기만적인 글쓰기를 위한 서론에서" 간단히 생각합시다. 기존 문학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성묘사란 아무 에로 비디오, 혹은 아무 성소설 한 편에 총집약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만일 명작이 소설 몇 권, 영화 몇 편으로 나누어 만들 만큼 많은 이야기와 교훈을 주는 것이라면 아무 에로 비디오나 성소설은 분명 명작이 틀림없습니다. 만일 에로 비디오 내용이 뻔하다면 키에슬롭스키 영화 주제처럼 뻔한 주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에로 비디오 내용이 혐오스럽다면 키에슬롭스키 영화 내용처럼 이 사회에 대한 혐오스러운 내용을 다루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당국과 대중이 마음 편안하게 볼 수 있도록 안전장치를 과감히 생략했다면 아무 에로 비디오나 키에슬롭스키 영화는 이 점에서 동격인 것입니다. 또한 재미없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며, 특정 관객들의 관심사라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며, 나름대로 소문이나 교양 때문에 본다는 점에서도 공통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현 자본주의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다는 점에서 소위 다른 영화들보다 훨씬 명작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대의 성공을 말할 수 없다는 점에서 다른 영화와 근본적으로 같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이 소위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과이자 한계입니다. 비판적 리얼리즘의 성과와 한계는 현 사회를 잘 반영하였다지만 동시에 가능하고, 가까운 미래까지도 현실로 포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현실이 없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입니다. 반면에 소위 사회적 리얼리즘의 성과와 한계는 가능하고, 가까운 미래를 단지 막연하게 그렸다는 점에서 꿈이 없는 리얼리즘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공해 조건을 넘어서려 부단히 노력하는 작품을 우리는 쓰레기라 취급할 수 있으며, 이 쓰레기는 재활용 조건을 가지고 있고, 재활용이란 희망을 의미합니다. "주류 질서에 대한 전복이 함포사격을 끝내고 채 상륙작전을 펴기도 전에 비판이 만만찮다. 열거해 보자. 새로운 것이 쏟아지는 때에 새로운 것이 있다면 오로지 자본주의 상품화 촉진 전략일 뿐이다. 시시한 것에 대한 일탈만으로 끔찍한 생활을 극복한다는 것은 극히 낭만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지나친 주관화는 싸구려 키취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수반하므로 문자의 합리성을 전면 부정할 수 없다. 내가 재미없는 것은 죄악이다 라고 선언하자마자 내가 추천한 것 역시 계몽적이라 재미없으므로 계몽의 제자일 뿐임을 확증한다. 또한 내가 권위에 불복종한다지만 내가 어느덧 권위적 지위에 서 있다면 불복종은 허상이며, 복종하는 대중을 미혹케 할 나의 실체를 은폐하는 권력자일 뿐이다. 나는 단지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타서 눈알을 부라리기만 하지 정작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있어 나역시 자본과 권력의 한패가 분명한 현란한 테크니션, 말장난꾼에 불과한 난장이이다. 구체적으로 열거하자. 포르노적 상상력은 인체 해부학적 상상력외에 다른 것이 있는가? 오늘예감 잡지는 딱딱하고 설익은 대학교지 다름 아닌가? 사이버 문학과 통신 글쓰기는 가상공간에 매몰되어 있으며, 자의적 기준 때문에 혼선을 빚고 있지 않은가? 문화평론을 개나 소나 하는 거품이 일고 있는 마당에 기만적 글쓰기란 주류에서 탈락된 자의 하소연이 아닌가? 이 무수한 비판에 직면하여 나의 답변은 너희가 화장실의 낙서 같은 잡담을 믿느냐 이다. 화장실에 앉아 볼 일을 보는 똑똑한 분들의 입장에서라면 화장실에서 똥만 누자는 정언이 이런 비판의 핵심일 것이다. 그러나 그대가 화장실에서까지 글쓰기하려는 심사를 조금이나마 헤아린다면, 지금 바로 가장 사적이어야 할 화장실에까지 침투하여 나를 옥죄고 있는 현실을 나는 괴물처럼 드러내보고 싶었다. 여유만만한 분들은 얼마든지 볼 일을 보면서 이 몸부림을 구경하시라. "우리들은 모두 E.T이다. ; 사랑의 역사; 줄리아 끄리스떼바 - 너희가 잡담을 믿느냐, 기만적인 글쓰기를 위한 서론에서" 이제까지 포르노그라피 논의는 수동적인 논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즉, 포르노그라피도 상상력이 있다느니, 포르노그라피는 쓰레기가 아니라느니 하는 말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포르노그라피는 쓰레기입니다. 단지 포르노그라피를 톨스토이처럼 거부하는 것이 공해물일 따름입니다. 간디, 톨스토이, 케네디, 모택동 등은 모두 육체적으로는 포르노그라피 생활을 했지만 이러한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지혜가 너무나 부족했기에 포르노그라피를 혐오했습니다. 간디는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남겼습니다. "영국 식민주의자들의 탄압에는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으나 여성의 나체에는 항거할 수가 없었다." 다시 말하자면, 해부학적 상상력을 논의하는 자들은 포르노그라피를 만드는 자들이 아니라 포르노그라피를 비판하는 자들입니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똥개 눈에는 똥개만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음란사범, 정치범 등 양심범 재판에 늘 논란이 거듭되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자기가 하면 건강이요, 남이 하면 변태이고, 자기가 하면 예술이고, 남이 하면 포르노그라피이며, 자기가 하면 애국이요, 남이 하면 매국인 것이 바로 해부학적 상상력으로 포르노그라피를 보는 자들의 특징입니다. 자기 눈으로 보는 것만이 전부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그런 특정 눈은 없습니다. "당신들이 영화를 보면서 감동을 받는다면 당신은 당신 자신도 모르게 자신을 잃어버리는 정신분석가가 되는 것입니다. 대상은 자신과 자신의 주변인들이죠. 당신의 치료 방식은 자가 진단으로서 당신과 자신의 지인들과의 관계에서 바라는 어떤 꿈들을 기억시켜서 재구성하는 모험을 하는 것입니다. - 프렌치 키스; 아메리카 섹스의 90년대 표기에서" 상상력이란 무엇이겠습니까? 인쇄매체의 산물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력을 부르짖을 수 있었던 것은 극히 최근의 일입니다. 아무나 상상력을 말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숫자들을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제한되었듯 말입니다. 그러나 인쇄매체가 발달하면서 우리 또한 상상력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아울러 다양한 매체가 발달하면서 우리 상상력 또한 개성처럼 획일화되어 갔습니다. 개성이란 본디 남들과 다른 특징, 성격을 말함인데 실은 백화점에서 돈주고 산 가면처럼 획일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 자신이 자본의 요구를 내면화시켰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가면, 이 개성, 이 상상력을 벗기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위선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넘어서서 초역사적으로 규정하는 모든 상상력 논의란 다 헛수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상상력이 대의제로 환영받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장과 교육이 전제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특정 상상력이 대중화된다 함은 사람들이 다수로 뭉쳐 있고, 똑같은 생각을 가져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특정 상상력이 어떻게 발현됩니까? 매체를 통해서 가능해집니다. 만일 매체가 지배계급 통제 아래서 알아서 자기검열하건, 성공을 위해 자기검열했다면 이 특정 상상력이란 고작 지배계급의 시녀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총체적인 상황에서 우리가 일순간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우리가 상상력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들이 나름대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기존에 말하는 상상력과 다른 상상력일 것입니다. 특정한 상상력만이 허울좋게 대접받고, 특정한 상상력만이 현실을 드러내고 있다고 말할 때 일부 사람들은 그 수가 아무리 적더라도 반발하게 됩니다. 자기가 겪은 현실과 천양지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당장 대세로 밀려드는 추세를 막을 수 없으므로, 타협을 선택하게 됩니다. 소위 작가주의라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예술가주의죠. 예술을 위한 예술이라는 것입니다. 객관적인 세계에 대해 일정 부분 체념하고, 자신의 주관적인 세계를 강조함으로써 체념한 부분을 보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이러한 목적은 너무나 뚜렷합니다. 바로 위처럼 자기 치료를 위한 것입니다. 그리고 관객들이나 독자들은 다이어트 성공법처럼 이들의 자기치료법을 보며 대리배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대리배설이기에 완전배설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들 중에는 이들처럼 자기배설하려고 작가나 되는 것이며, 다른 이들은 혹시 다른 영화에서는 어떨까 하고 계속 대리배설을 시도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작가주의의 한계는 뚜렷합니다. 바로 정신분석의 문제와 같습니다. 사회순응적인 인간이 되기 위한 목적으로 비정상적인 삶을 그린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러한 문제에서 사회적 정신분석, 사회심리적인 관점을 우리는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단순히 자기 치료에 국한한 것이 아니라 사회 치료로 나아가는 과제를 고민해봐야 하지 않는가 라는 점입니다. 사적 상상력을 극대화시킨다고 당장 사회적 상상력으로 나아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동시에 현실에 없는 사회적 상상력으로 사적 상상력을 가두는 것 또한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는 비약과 단절이 필요하겠습니다. 그것은 '관능의 제국'이나 '파리에서 마지막 탱고'따위 3류 저질 개쓰레기 작품들과 질적으로 다른 비약과 단절이겠습니다. 그러한 단초는 레오 까락스의 '퐁네프의 연인들'이나 배창호의 '러브 스토리'나 장선우의 '꽃잎'이나 주성치의 '식신'이나 팀 버튼의 '에드우드', 또 '금홍아 금홍아', 끝으로 마광수의 작품들에서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들 작품들의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자신은 지극히 정상적인 삶을 사는데 왜곡된 사회관계로 인하여 이들을 변태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푸코의 말과 맥락이 닿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들은 자신들 삶 안에서 체화된 몸짓으로, 자신들의 삶을 따뜻하게 유희하며,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망의 정체란 포르노그라피에서 있어서 사랑을 잃은 시대에 사랑을 회복하고자 하는 열망일 것입니다. 이는 새롭고, 밑바닥부터 헤치고 나왔을 뿐만 아니라, 밑바닥이라 가정된 층위를 역전시키고자 하는 열망들입니다. 다시 등장한 인드라 vs 나오미 | 파천황기(破天荒記) 2004/07/02 08:00 http://blog.naver.com/miavenus/60003682675 <네이버 이미지 검색> 뼈만 남은 여자 <나오미>의 머리통이 없는 남자 <인드라> 인터뷰 나오미 : 인드라, 당신은 과거 통신 시절 아이디로 한때 PP666이라는 아이디를 쓴 적이 있지요? 인드라 : 네. 그렇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 단편소설에도 PP666이라는 아이디가 잠시 등장합니다. 나오미 : 왜 이런 혐오스런 아이디를 채택하였나요? 인드라 : 혐오스럽지 않습니다. 이성적 견지에서 보자면, 6은 완전수이죠. 제가 이 아이디를 채택한 것은 사람(People)과 사람 사이에는 사랑, 정의, 평화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죠. 나오미 : 혹시 악마교와 관련이 있으신지요. 인드라 : 악마교와 관련한 미국 티브이 토론쇼를 본 일이 있기는 하나 상기한 싸구려 상업주의 악마교와 저는 하등의 관계가 없습니다. 오히려 저는 무신론자이기는 하나 제 아내도 기독교인이고 친한 이들 몇몇도 기독교인이고 심지어 목사도 있습니다. 나는 반기독교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나오미 : 그런데 왜 하필 이런 아이디를 굳이 채택하였습니까? 이해가 안 가는데요. 인드라 : 겉을 볼 것이 아니라 본질을 보아야 합니다. 내가 당신더러 나오미라는 이름을 빌미삼아 혹시 뽕먹고 지내냐? 라고 묻는 것과 같습니다. 나오미 : 좋습니다. 당신은 근래 이상한 글쓰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해할 수도 없지만, 이해하고 싶지도 않게 별로 연관되지 않은 그림과 음악과 글들을 조합하고 있는데 도대체 왜 그런 거죠? 인드라 : 나는 대학 재학시 포토몽타즈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아, 물론 사진을 인위적으로 왜곡시킨다든가 하는 것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제가 관심이 있는 건 이미 그 사진 자체가 실재를 불투명하게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근래 그런 것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그래왔던 것입니다. 십여년 전부터 이래왔지요. 굳이 따지면 글쓰기라는 작업을 시작한 이십여년 전부터 이랬습니다. 아니, 그 행동방식은 초등학교 때부터 그랬어요. 나오미 : 쉽게 설명할 수 있는지요. 인드라 : 아, 그건 이래요. 저항, 마찰 같은 것이라는 거죠. 만일 나오미, 당신이 하루 종일, 아니 일년 내내 인드라만 생각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나오미 : 아주 짜증나는 가정이로군요. 그래서요? 인드라 : 하하. 그 반응이 제가 의도한 것인데요. 그렇습니다. 이 상태는 정신이 들린 상태라고 할 수 있죠. 어떻게 일년 내내 특정한 무언가만 생각할 수 있겠어요. 이래서야 아무 일 도 할 수가 없잖습니까? 이처럼 인간은 잠시라도 무언가에 집중할 수가 없다는 것이 지요. 다만 배제와 추방을 통해서 일시적으로 집중할 수가 있을 뿐이지요. 인위적 진공 상태 말입니다. 나오미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또 그 지겨운 출애굽기 이야기와 고고학과 데리다입니까? 인드라 : 아, 있잖아요. 당구장에서 일하는 고아가 있어요. 어릴 때 머리를 다쳤어요. 건물에서 떨어졌지요. 참 흔한 유머의 소재죠? 현실에 없을 듯한... 하지만 있다는 거죠. 하여간 그는 이래요. 평상시에는 평범하기 그지 없죠. 하지만 손님이 세 테이블만 들어오면, 혹은 그 이상 들어오면 그는 이상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신경질이 늘고, 공격적이 되며, 자학을 하기도 하고, 어쩔 줄을 몰라 합니다. 나오미 : 그게 이 문제와 무슨 상관이죠. 인드라 : 오캄의 면도날을 생각해 보세요. 인간은 가급적 단순한 쪽으로 정리되기를 원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복잡한 걸 싫어해요. 하지만 세상은 복잡하죠. 복잡한 것을 단순하게 보려고 한다 이겁니다. 왜 이러냐. 인간의 두뇌는 무한하지만 두뇌 성장 경로는 복잡 하기 그지 없어 아직은 밝혀내지 못한 예측할 수 없는 경로로 두뇌가 만들어진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그런 경로에 영향을 주는 것이 외부환경인데 이 외부환경이 복잡하 다 이거지요. 다시 그 고아 이야기로 돌아간다면, 그와 다른 인간들과 과연 얼마나 차이가 있느냐 는 것이지요. 단지 양적으로 약간 덜 단순할 따름입니다. 메카트로닉스 분야라고 있죠. 가장 간단히 설명할 수 있는 건 로봇축구대회 같은 거죠. 로보트 팔 따위 만드는 것 말입니다. 제가 이런 걸 잠시 해봤는데요. 인간의 손을 움직 이는 것과 같이 단순하게 보이는 것도 수학적으로 구성하려면 얼마나 힘든지 아십니까? 나오미 :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요? 뭘 말하려는 거죠? 인드라 당신의 단점이 뭔지 알아요? 지식을 쭉 나열하는데 도대체 핵심이 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인드라 : 그래요. 그것이에요. 핵심을 모르겠다는 거죠. 왜 내 손가락이 움직이고 있는지를... 그 손가락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누군가를 향해 증오심을 날리고 있는 지를... 왜 내 손가락이 그의 목을 조르고 싶은 지를... 나는 내 손가락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런데도 나는 내 손가락의 움직임을 아무렇지 않게 여긴다 이겁니다. 끔찍하지 않습니까? 나오미 : 그런가요? 죄송하지만, 별 쓰잘 데 없는 생각 같군요. 마치 책임 회피같이 보입니다. 아무튼 마지막으로 하실 말씀은 없나요? 인드라 : 그렇다는 겁니다. 나는 내 손가락을 이해할 수가 없어요. 그뿐입니다. 나오미 : 그래요. 여전히 궤변을 늘어놓으시는군요. 당신을 도와주기 위해 애쓰는 나에게 고작 한다는 말이 내 손가락을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이나 하고 답답하군요. 저도 이제 별로 인터뷰하고 싶지가 않군요. 잘 가세요. 가시는 길이라도 편안하시길 바 랍니다. 끝으로 인드라, 당신과 같이 처한 사람들은 종교에 귀의하곤 하는데 당신 은 끝까지 거부했다면서요? 인드라 : 아닙니다. 나는 거부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내 손가락을 이해할 수가 없는데 어찌 종교의 신들을 이해할 수가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나는 죽기 전까지 이러한 사태를 냉정하게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는지 말이지요. 박아쌌당 by 인드라 (변신 中에서) 나는 사막으로 가노라.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리라. 목수일을 하듯 가구점을 내었으며, 나의 발을 정성스레 닦아주는 여성을 거느렸다. 쓸 데 없이 민족해방 운운하는 유대교 청년이여! 이제 삶의 아름다움을 찾았는가? 아직도 모르는가? 아직도 나를 두려워 하느냐, 불쌍한 중생아. 내 너를 그토록 애지중지하였거늘 왜 아직 나를 찾지 않는가. 명함을 미처 마련하지 못했구나. 꼭 다시 나를 찾아와 구원을 얻어라. 나의 아내들인 이 세상의 모든 여자들이여! 나를 뺀 누구와도 간음하지 마라. 나만이 너의 섹스 상대이며, 나만이 너의 구원자이니라. 뱀 같은 남자들을 나는 두들겨 팰 것이니 간음하지 마라! 나만이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느니라. 너는 아직 정신을 못 차렸구나. 내 너를 위해 힘쓰리니 성경 공부하는 나를 방해하지 마라. 속된 세계에서 나의 일을 방해하지 마라. 전화하지 마라. 사적인 일로 선교 활동을 방해하지 마라.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고 말씀으로 죽나니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다. 간음하지 마라, 타락하지 마라. 내가 라스베가스에서 도박한 것은 어린 양들을 보살피기 위함이다. 내가 단란주점에 간 것은 어린 양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기 위함이다. 나의 노래를 들어라. 나의 복음을 들어라. 밤낮으로 나는 애를 쓴다. 또 다시 너에게로 간다. 나는 너를 위해 요한처럼 물세례를 주나니 정신을 차려라. 고통을 이겨내라. 말하라. 말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너를 이토록 망친 악마가 누구더냐. 너는 베드로처럼 나를 부정하는구나. 네 본래의 이름을 부정하는구나.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도망가지 마라. 나를 따르라. 여인네가 유대교 랍비들의 포로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오리까. 과감히 떠나라. 우상을 거부해라. 여인네를 두고 나는 출도를 한다. 내가 너의 똥까지 받아내면서 너의 모든 더러움을 정화했느니라. 속된 세계에서 벗어나라. 눈을 뜨라. 나를 이끈 동방박사들이 고맙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있었기에 내가 오늘의 내가 있었다. 나의 손. 신의 손. 내 어찌 이 손을 함부로 할 수 있다는 말이냐. 더러운 악마의 찌꺼기를 남김없이 씻어내고 또 씻어내는 세례를 스스로 했느니라. 나의 따뜻한 손으로 너의 고달픈 엉덩이를 어루만져주노라. 악마의 세계에서 여기까지 추적해 와서 미인계로 날 유혹하려는 거짓을 물리치는 나의 굳센 신앙심을 보아라. 저 년이 나를 카메라 뇌물로 현혹시키려는 짓거리에도 의연한 나를 보아라. 나는 악마와 싸워 이겨내었다. 그리하여 나는 동방박사들에게 배웠으나 동방박사를 가르칠 수 있었다. 나는 유대 법당에서 학식을 논하는 자들 판을 뒤엎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다. 밤이 되자 수고로운 나를 위해 여인네가 나의 발을 닦아주는구나. 깨끗이 몸단장하고 들어와라. 나는 신학교에 입교하여 처음에는 숱한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특히 천마리학 모으면 어쩌니 하는 우상숭배에 혹하였다. 학이면 거부할 수 있었는데 박아쌌당이래서 유혹을 떨칠 수 없었다. 이런 나를 하나님이 꾸짖었다. 아들아! 너, 무엇하고 있느냐. 네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벌을 받아 불구가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온전한 정신을 되찾았다. 외디프스가 장님이 되자 비로소 세상의 빛을 발견한다. 여인네가 나를 유혹했다. 여인네들은 왜 나를 유혹하나. 여인네들은 왜 나만 만나면 환장을 하나. 그토록 여인네를 경고하는데 왜 여인네들아, 깨우치지 못하느냐. 왜 나를 무서워하고 멀리 하느냐. 네 죄를 네가 알렷다. 여인네는 십자가에 매달린 도둑처럼 자신에게 자신도 구원받을 수 있는지 물어본다. 구원받을 수 있다, 구원받을 수 있다. 여인네는 먼저 하나님 세상에 간다. 나는 너무나 기뻐 눈물을 흘린다. 그러한 모습에 신도들이 나를 전등으로 비춘다. 내 주위에는 밤에도 광채가 휘날린다. 이브야. 막달라 마리아야. 너 또 그 짓을 하는구나. 언제까지 나한테 사과이니 사탕이니 줄래. 그래도 나는 받지. 그래서 우리는 또 시작하는 거야. 씨발 년아. 그래서 여기서 어딘지 낯설지 않다는 거 아니니. 여기서 왜 "나 어떻게" 를 부르냐고? 대학가요제에 나온 노래인데? 노동자들도 남진이나 나훈아 안 찾고 "나 어떻게" 부를 수도 있지. 씨발, 당시 야유회가면 정치 집회라는 식으로 속된 세계로 논하지 마라. 신학적 세계야말로 진정한 빛의 세계이니, 그림자 세계를 논하지 마라. 이것은 성가이니라. 우리는 성가를 부르며 구원을 찾으려고 하느니라. 내 편안하노라. 쓰레기더미에서 쓰레기 건지기 (1999-05-28) 오늘날 글쓰기를 하는 자에게 부과된 것은 리얼리즘도, 모더니즘도, 포 스트 모더니즘도 아니다. 또한 전산망 문학이든, 사이버 문학이든, 통 신 문학도 아니다. 심지어 편집증이나 정신분열증도 아니다. 다만 상상 력이다. 나는 지난 팔십년대에서 오늘날까지 문학 변두리에 있으면서 요 즘처럼 한 목소리로 상상력을 부르짖는 시대를 겪어보지를 못했다. 모두 하는 말이 다르지만 결론이 일치되었다. '너희의 상상력은 틀렸고, 우리 의 상상력이 옳다.' 팔십년대 문학에서 가장 큰 지위를 차지했던 것은 뭐니뭐니해도 리얼리 즘적 논의였다. 아울러 이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건 전형성 확보였다. 즉, 작가에게 부과된 주체가 치열한 현장을 궤뚫어 마침내 총체적인 현 실을 담보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팔십년대 문학의 과제이자 목표였다. 그래서 우리는 하릴없이 문제는 리얼리즘이다, 발자크의 작품과 세계관 , 비판적 리얼리즘과 사회주의적 리얼리즘, 브레이트의 적절한 내용과 형식, 작가 동맹 등등에 정열을 쏟아붓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에서 나는 묘한 분위기를 감지해야 했다. 이런 논의와 무관하게 개별 작품들이 논의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토록 치열하게 팔십 년대를 살았으면서 팔십년대에 논의된 바 없던 이문열 문학이 슬그머니 등장하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문열 문학을 영화화하는 사람들 면면이 이 런 리얼리즘 논의에 한번쯤 고민했을 법한 사람들이었고, 이문열 문학을 계승하는 사람이 가만 보면 '내가 나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 로 90년대 문학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반문을 하고 싶다. 특히 한국 소설에서 그간 우리는 지나 치게 '서사'에 대해 무게를 두어오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최근 대중문 학, 사이버문학에 대하여 폄하하는 대부분 의견은 이러한 '서사'가 결 핍되어 있다는 지적이 아니던가. 그리고 그 '서사'란 두 갈래의 사생아 를 낳았지만 뿌리는 동일한 '무정'류식이 아니던가. 소설이 역사를 대 체했던 것은 최근의 일이 아니다. 서구적 양식에 기초한 근대소설이 소 수 지식인의 자기만족적 딸딸이에서 출발하였으되, 험악한 사회조건은 소수 지식인의 발언권을 신장시키게 되다 보니 '딸딸이'가 어느새 '사 회변혁의 무기'가 된 셈이다. 적극적으로 '사회변혁의 무기'로 글쓰기 가 자리매김되어야 하는가, 마는가는 2차적이고 방법론적인 문제일 따 름이다. 오히려 소설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인가하는 형이상학적 문 제에 대해 우리는 불문율처럼 '소설은 이런 것이다'라는 오래된 습관을 논의하지도 않고 지니게 되었다. 논란이 벌어지는 그 이전의 분열에 대 해 침묵함으로써 우리는 그 이전의 분열을 봉합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새삼스럽지만 강조하고 싶다. 소설은 역사학이나 사회학이나 종교학이 아니다. 소설이 역사학과 사회학과 종교학을 참고로 할 수는 있어도 참고가 곧 소설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덧 한국 문학에서 이러한 참고, 혹은 각주가 소설을 압도하기 시작하였으며, 내용 자체가 되었다. 역사 학이나 사회학이나 종교학의 심도깊은 이해가 소설쓰기, 글쓰기의 전제 가 되었다. 이러한 정당성은 '사회변혁의 무기'로서, 혹은 '사회변혁의 무기로 문학이 도구화되는 것에 대한 반대'로서 유지되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소설인가? 이것이 문학인가? 간단하게 질문하자. 이문열의 소설이 대접받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흔히 이문열 소설에 반론을 제시하면 대개 반론자들은 이념적 프리즘 때문에 이문열 문학을 반대한다고 평가받는다. 그리고 그러한 반론자 들도 이념적으로는 다르더라도 문학적 성과는 인정한다는 식으로 말하 곤 한다. '사회변혁의 무기' 입장에서 보자면 '사회변혁을 방해하는 무기'로 쓰여지는 이문열 문학이 문제인 셈이고, 특히 문학적 성과가 있는 이문열 문학이 위험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이문열 문학이 대접받는 것은 문학적 성과가 아 니라 '사회변혁을 방해하는 무기'였기 때문이며, 더 나아가 '사회변혁 의 무기'인 입장과 뿌리에서 동일하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문학이 사 회학이나 역사학이나 종교학 따위이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문학적 장 치들은 부수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가 만일 소설을 쓴다고 하자. 무엇을 고민하는가. 어떻게 쓰는 것 이 소설다운 것이라 생각하는가. 그렇게 해서 나온 소설은 대개 어떠 한가. 90년대 문학도 크게 이와 다르지 않다. 영향을 많이 준 하루끼 문학을 보자. 하루끼는 집에 틀어박혀 옛날 레코드 음악을 틀어 놓고 일상처럼 가볍게 섹스하면서 사회와 격리된 현대 청년의 도시적 감수성을 보여준 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사회, 역사' 혹은 '서사'와 격리된 일본적 전통을 현대화한 '사소설'이라는 것이다. 여기에 하루끼의 운동권적 경 력이 그를 부추긴다. 그런데 하루끼는 그간 일본 소설을 읽지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칸트 철학이니 뭐니 이런 것을 읽었다. 요시모토 바나나 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탈일본화'는 서구 젊은 이들에게도 공감을 받게 되어 '보편성'이 있다고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 보편성이란? 기실 맞춤양복처럼 서구기준에 맞추려고 무진장 애를 쓴 칸느 단편영화제 출품작과 비슷하지 않던가? 시작부터 영미책을 탐독했 고, 그들이 좋아하는 대중문화를 습득했고, 그들의 감수성에 코드를 맞 춘 결과이지 않던가? 바로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일본 젊은이들은 하루 끼나 바나나에 환호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나는 소위 본격문학, 고급문학, 기존문학한다는 사람들이 배제하는 '날 림문학, 사이버문학, 대중문학, 90년대 문학' 정체가 기실 그 자신들의 젊은날 모습이라는 것을 주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대들은 이러하지 않았던가. 그대들이 사르트르나 까뮈에 심취하면서 술집에 앉아 뻘짓에 탐닉하는 모습과 오늘날 90년대 젊은이들이 통신에 서 뻘짓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다는 말인가. 논의하는 주제 '유행'이 다르다고 그대들과 90년대가 구분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대들이 괴 테 운운하듯 90년대는 단지 다른 대상에 대해 열광할 따름인 셈이다. 그리고 '그들만의 리그'에서 '그들만의 규칙'으로 서로 경쟁할 따름이다. 그대들이 내세우는 논의. '서사'에 대한 독점적 권력. 그것은 이미 근 본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장 부차적인 것에 불과하였다. 시작부터 그대들이 최근 가장 비판하는 '쓰레기 문학'과 '날림 문학'의 전형이었 던 셈이다. 그대들이 배제하는 것이 기실 그대들의 본질인 셈이다. 그러하니 오히 려 최근의 환상문학은, 최근의 사이버문학은 그대들의 젊은날이다. 동 시에 그대들이 몇몇 환상문학과 사이버문학에 대해 격렬히 반대하는 것은 그대들의 젊은 날에 선생들이 젊은 그대들의 반역에 심히 불쾌해 했던 바로 그것이다. 그대들은 늙었고, 썩었고, 가치가 없다. 최근의 환상문학 열풍은 바로 이런 점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환상문 학에도 유치하지만 '서사'가 있다. 환상문학이 읽혀지는 것은 바로 이 '서사'때문이다. 그러나 이 '서사'는 가공되어 있다. 즉 '가상'인 셈이 다. 바로 이 '가상'을 드러냄으로써 문학에서 '서사'가 차지하는 위상 을 드러낸 셈이다. 즉 소설은 '서사를 가상화시켜서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이다. 그대들이 현실소설이라고 부르는 것조차도 기실은 '가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대들의 딸딸이였던 사소설인 셈이다. 그것 자체 로는 어떠한 의미도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의미가 되었던 것은 당대 사회역사적 조건이 그 의미를 생성시킨 것에 불과하다. 특정 작품이 불 온시되고, 특정 작품이 음란하다는 평가를 받는 건 텍스트 자체에서가 아니라 텍스트를 둘러싼 컨텍스트의 문제였던 셈이다. 마찬가지로 특정 작품이 높이 평가받는 것은 텍스트 자체의 문학성과 별개로 컨텍스트에 의해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애초부터 이러한 컨텍스트와 무관한 문학 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즉 자율적인 '미학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컨텍스트'와 연관된 '미학주의'는 있었을 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서사에 대한 기존 독점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그대들의 요상하고 지극히 자의적인 잣대인 '미학주의'로 환상문학, 사이버문학 에 메스를 댄다는 것 나로서는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인 셈이다. 그대들 이 '쓰레기 더미에서 건져 올린 건 쓰레기일 따름이지, 그외의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그대들이 본격문학, 고급문학라는 쓰레기 더미에서 문학상거리를 건져 올린 것이 쓰레기이듯이 같은 사 정일 따름이다. 서사적 상상력. 아마 이것이 쓰레기인가, 쓰레기가 아닌 문학인가를 구분하는 것일 게다. 과연 이러한 상상력은 과연 자율적이고, 개방적 이고, 논의 가능한 것인가. 아니면 특정인의 취미론 이상 이하도 아 닌가. 나는 이에 대해서 시비를 걸고 싶지는 않다. 다만 이런 특정 취미론 들이 보다 다양해지길 바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설령 문학산업의 대량생산화를 막아 문학산업의 위기로 치닫는다고 할 지라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정녕 문학의 길을 운운한다면 문학의 위기는 문학 산업의 위기와는 다른 것이 자명한 것이다. 민족문학작가회의가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황지우와 이인화가 대통령 만찬에 초대되는 세상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까지 기존 문학의 정체이다. 그것이 문학성이자 정치 성이다. 문학성이 있어서 문학상을 받는 것이 아니라 문학상이 있어서 문학성이 '가상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미학주의가 있어서 정치적인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이어서 미학주의가 있는 것이다. 상상력? 웃기고 자빠졌네. '문학적'이라는 말에 맛이 가는 건 예나 지금 이나 마찬가지야. 팔십년대 리얼리즘? 우습게도 문학을 지배하는 사람들 은 단지 폼만 잡았을 뿐이야. 사람들이 하도 죽어가고, 사람들이 하도 투 쟁하니까 옆에서 술먹기는 괴로웠을 따름이라고. 뭐라고 말이라도 해야 마음이 편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을 따름이라고. 한국 문학에서는 상상력 이전에 무언가 큰 걸림돌이 있다. 서로 다 알고 있지만 관습적이든, 그 무엇이든 금기시할 무언가가 있는 것이다. 가장 간단한 말은 바로 스키조를 평한 조선일보 기사에서 나온 듯 싶다. '선 생에게 대들지 말 것.' 상상력이란 자유로운 시공간을 요구한다. 그러나 한국 문학의 시공간은 무 척이나 협소하다. 드넓은 상상력을 요구하려면 우선 드넓은 상상력 공간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암만 SF이나 추리이니 영역을 확장하면 무슨 소용인가 ? 그 밥이 그 밥이라면 말이다. 소재의 이동밖에 더 되겠는가 이 말이다. 더군다나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20세기 말에 개인을 드러낸다 함은 무슨 말인가? 지난 시기처럼 전체주의적 통제 속에 갇혀 비판함은 이러한 개인 드러내기보다 훨씬 저열한 행태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여전히 개인이 세 계에서 어떠한 의미인가 고려한다면 여전히 개인의 드러냄은 가변적인 인 생에 대한 이야기이지, 가변적인 시대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장정일이 말한 바 소설가가 여관주인이 되는 이야기인 것처럼, 운동가가 갑작스레 뽕 먹은 마약환자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개인주의를 너무나 소중히 하는 나로서, 리얼리즘 못지 않게 모더니즘 전통 을 애호하는 나로서(이러한 지점이야말로 한국 사회에서의 내 지위를 말해 주고 있다. 지식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더니스트들이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 다. 그들은 늘 환각된 '개인'으로 존재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러한 극단과 극단 사이에서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하기가 겁이 난다. 레닌은 예전에 한 편향을 경계하기 위해 다른 편향으로 꺾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최근 페미니즘 논쟁도 맑스주의 페미니즘과 급진적 페미니즘 사이에서 춤추 고 있다. 이같은 한쪽에서 다른쪽으로 팍팍 꺾이는 회전들. 영화감독 장선 우식의 좌충우돌 배신. 이러한 회전들에 대해 내게 말해줄 수 있는 문학평 론가들이 과연 얼마나 될 것인가? 이러한 회전이 함의하는 물질적 기초를 말 해 줄 자 그 누구인가? '상상력? 그것은 현재 쌍욕으로 존재할 뿐이다, 씨발.' * 예전에 쓴 글입니다. 이 글에서 개인주의를 언급한 대목이 있는데 서구 인본주의적 전통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인드라, 백두산호텔에 가다 INDRA 1997-03-21 인드라는 단군의 홍익인간 선포 기념식 초대장을 받고 백두산 호텔 리 셉션장에 갔다. 그곳에는 많은 유명인사가 군집해 있었다. 인드라는 돌아다 니면서 그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단군이 인사하자 인드라는 말했다. "등신, 육갑하네" 그러자 단군은 욕을 하면 모두가 이롭습니다, 라고 말했다. 재미가 생긴 인드라는 유명인사들에게 똑같은 말을 해보기로 했다. 다음은 각각의 반응들이다. 예수 : 이웃을 사랑한다면 다른 욕도 해 주세요. 부처 : 욕을 공양하시니 부처가 되시겠군요. 노자 : 어리석은 자여, 네가 도이니라. 공자 : 상가집 개보다 훨씬 군자다운 말씀이십니다. 소크라테스 : 나는 욕 먹는다는 걸 알 뿐이다. 데카르트 : 나는 욕 먹는다, 고로 존재한다. 뉴튼 : 욕지거리도 작용 반작용 법칙이 작용한다. 원효 : 캄캄한 밤에 너를 만나니 내 거울이로고. 김부식 : 어찌 소국사람이 중국말을 함부로 사용하오? 만적 : 노예로 사느니 욕 먹는 게 사람 살 짓이다. 황진이 : 고렇게 안그런 척 한다고 튀어나온 아랫도리를 감출 수 있어요? 전봉준 : 날 욕할 시간 있다면 조선농민의 꿈을 실현시키고 나서 얼마든지 하시오. 김구 : 내 얼마든지 욕 먹을 테니 내 소원 조선독립 같이 함세. 신채호 : 하하하, 대한남아의 기개로세. 맑스 : (대꾸 안하고 엥겔스와 계속 담소를 나누었다.) 바쿠닌 : 여보게, 그 말로 날 선동시킬 수 있다고 보나? 사드 : 히히히, 좆같은 놈아! (그리고 내 입에 좆을 갖다 대길래 나는 사드에게 똥침을 넣었다.) 프로이트 : 분명히 네 꿈에 엄마하고 잤을 것이다. 니체 : 나라면 그따위 등신 같은 소리는 안한다. 버지니아 울프 : 나는 남자의 욕설을 혐오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 이상 남자랑 말하지 않는 것이다. 사르트르 : 네가 내게 욕하는 건 존재요, 내가 네게 욕하는 건 실존이다. 까뮈 : 좆까라. 사르트르! 카프카 : 우리는 다만 바퀴벌레일 뿐이다. 밀란 쿤데라 : 인드라 만세! 건전한 욕설에 농담이 꽃핀다. 마르께스 : 마콘도 마을에는 늘 당신 같은 사람들이 살았었지. 알튀세르 : 그건 인본주의자의 전술이지, 아니야, 모르겠어 (그리고 베란다로 나가 자살했다.) 데리다 : 욕은 유령처럼 내게 다가왔다. 푸코 : 욕설꾼은 지극히 정상적이다. 보드리야르 : 너는 욕을 생산하지만 나는 욕을 소비한다. 아인쉬타인 : 우주의 끝을 돌아 네 뒷통수 치기 전에 꺼져. 스티븐 호킹 : 욕설은 빅뱅처럼 빵 터지는 특이점이 존재합니다. 간디 : (갑자기 내 입에 자기 귀를 갖다 대었다.) 레닌 : 경제주의자는 시도 때도 없이 하소연만 한다는 걸 입증하는군. 트로츠키 : 레닌 말이 맞소. 모택동 : 홍위병들아! 육갑은 지식인이 쓰는 말이다! 쳐죽여라! 스탈린 : (귓속말로) 동무, 레닌주의의 기밀을 누설하다니 총살형이오. 히틀러 : 어머! 나를 욕하면 흥분 된다니까. 난 매져키스트라고. (히틀러 보좌관이 내게 와서 '독일인의 숭고한 장점'이라고 설명해줬다.) 로마 교황 : 다른 데 가서 그같은 교황청의 비리를 말하지 마시오. 링컨 : 욕을 위한, 욕에 의한, 욕의 정치였을 뿐이오. 맥아더 : 노병은 욕 먹지 않는다, 다만 욕 먹었을 뿐이다. 케네디 : 네가 내게 욕하기 보다 내가 카스트로에게 할 수 있는 욕을 생각 하라니까. 레이건 : 하여간 나 건들이는 놈은 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감이라는 것만 알아. 클링턴 : 뽕 먹은 놈 빼고 다 등신이다, 으하하하 옐친 : 클링턴 말이 무조건 맞아요. 일왕 : 나 좆도 없는 놈이예요, 저대신 죽을 일본 사람 많아요. 봐주세요. 이승만 : 욕하면 죽고, 사과하면 삽니다 박정희 : (깜짝 놀라 테이블에 숨었다 나타나서는) 휴우! 난 또 김재규인 줄 알았네. 전두환 : 그러니까 본인은... 솔직히~~ 무죄인데 에이! 왜 나만 갖고 그래? 노태우 : 믿어주세요. 이 사람 등신 아닙니다. 김영삼 : 아재요, 학실히 하소. 김정일이요, 내요. 김대중 : 한 번만 더 밀어주면 욕도 감수한다니까. 김종필 : 양반 입에서 욕이 나옵디까? (박정희 뒤로 숨는다.) 김일성 : 내래 민족의 태양이니끼니 욕은 미제의 스파이 박헌영에게 하라우. 김정일 : 등신 육갑이 광폭(狂暴)정치의 핵심 아니겠슴메? 문선명 : 김일성이 가갸 나보다는 한 수 아래야. 나는 민족의 태양보다 더 위대한 인류의 태양이니까. 욕은 박헌영이든 김영삼이든 아무에게나 해. 조다윗 : 순대볶음을 먹으면 등신도 팔자 고칩니다 박홍 : (김영삼에게 달려 간다.) 방금 무궁화 결사대한테 협박받았습니다. 잉잉~ 이건희 : 욕 처먹는 데는 내가 일류다. 정주영 : 욕 처먹을 일이 있어도 장사에는 지장 없다 구자경: 욕 처먹을 지라도 싸랑해요, PCS! 김우중 : 욕 처먹을 일은 많고, 해 먹을 일도 많다. 스티븐 스필버그 : 욕일지라도 내게 포스를 줘, 헐리웃 말아먹게. 빌 게이츠 : 다음엔 틀림 없이 인드라 고문하기 프로그램 짜고 말겠어. 마이클 잭슨 : 공연와서 욕해요. 알죠? 입장료 12만원. 이문열 : 페미니스트 스파이가 틀림 없다! 조선일보 유근일 : 중립적으로 볼 때 말야, 넌 김정일 편이라고. 월간조선 조갑제 : 나를 욕하는 놈은 민족 영웅 박정희를 욕하는 놈이다. (이때 박정희가 테이블 위에서 빠꼼 쳐다 보니까 짐시 외면한다.) 한국논단 양동안 : 나를 욕하면 빨갱이가 틀림 없다. 플라자 김완섭 : 그거 책 제목이야? 잘 뽑았네? 플라자 이무기 : 일리 있군요. 그러므로 미국식민지가 빨리 되야 합니다. 그래서 롬멜 만세! (개들이 짖어대는 통에 그의 말은 이렇게 들렸을 뿐.) 최불암 : 허허, 낙선한 사람이 이제 유머에 등장하기도 쑥스럽네요. 전유성 : 나도 일주일만 하면 너 정도는 할 줄 안다. 조형기 : 용기를 내라. 네 욕설도 내 영어처럼 미국에서도 통할 거야. 장미희 : 깜사합니다! 서태지 : 됐어, 이제 그런 뻥은 됐어. 그걸로 족해. 인드라는 인사를 다 마치고 나서 단군 홍익인간의 심오한 이념을 되새기며 리셉션장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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