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구십년대말 에세이 모음 헤겔법철학서문 번안 백두산호텔에가다 등등
인드라 VS 이한우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고 싶다
(* 이 글은 98년 반문화 창간 당시 <반문화> 창간호를 내면서 준비한 보도자료이다. 작성은 물론 편집장인 내가 하였으며, 통신상으로 발표했다. 창간 축하모임은 인사동 조성희 화랑에서 했다. 잡지 등록을 하지 않은 상황이므로 기자들은 오지 않았다. 올 것이라고 기대도 안 했다. 잡지 등록은 3호에 하였는데 <반문화>는 3호를 끝으로 더 나오지 않았다. 물론 인드라 VS 이한우 대담은 가상이다.)
이한우 : IMF 시대다. 어려운 시기에 잡지를 창간했는데 어떤 목적으로 창간하게 되었는가.
인드라 : 우리는 엄청난 야심을 가지고 있으나, 지금 아무 것도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천기누설이므로.
이한우 : 그렇다면, 잡지 이름이 반문화다. 잡지명을 반문화로 한 이유 정도는 말할 수 있지 않은가.
인드라 : 우리도 궁금하다. 와서 확인하고, 당신의 견해를 말해 달라. 그것이 우리가 반문화를 만든 이유라고 충분히 볼 수 있다.
이한우 : 인터뷰를 장난으로 아는가?
인드라 : 우리는 진심으로 답변하고 있을 뿐이다. 당신의 자존심에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었다면 미안하다. 그러나 우리의 탓이 아닌 것 분명하다.
이한우 : 음. 좋다. 그럼 헛고생한 셈치고 계속 질문하겠다. 하지만 정말 자꾸 이렇게 나오면 인터뷰고 뭐고 없을 것이다. 당신들의 경쟁잡지랄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인드라 : 있다. <창작과 비평>과 <상상>이다.
이한우 : 드디어 답변다운 답변 하나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영세출판사에서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편집장과 편집위원이 만든 신생잡지가, 그것도 웬만한 잡지들이 줄줄이 위기에 처해 있거나, 망한 요즘에 각오를 다진다고는 생각되지만, 현실적인 발언이 아닌 듯 싶은데... (편집장한테 어디서 자빠져 놀고 있었냐 핀잔먹지 않을 수 있게 되었군.)
인드라 : 물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나 포스트 모더니즘적 출판상황과 들뢰즈적인 유목적 상황이 허락하는 한, 또한 마르크스가 남긴 공산당 선언이 시사하는 카오스적인 한국의 구십년대 상황을 고찰하는 한, 게다가 일제의 조선강점 이래의 D.H. 로렌스적인 혁명적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한, 더욱이 비동맹회의와 UFO의 관계가 나날이 그 정체를 드러내는 이 때에 사빠띠스타와 붉은 악마간의 함수관계를 메타적으로 짚어보는 분석들이 속출하지 않는 한, 여기에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적 역사성을 돌이켜 보는 한, 강준만, 황장엽, 심형래, 타란티노, 고종석, 홍세화, 김홍준, 시나위, 홍상수로 이어지는 벤처적 하버마스 소통 곡선을 따라 가는 한, 우리는 현실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이한우 :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고 말한 건가? ( 역시 야단맞겠군. 에이, 술이나 마실 걸.)
인드라 : 그건 당신이 판단할 몫이지, 우리 몫이 아니다.
이한우 : 아무튼 쉽게 하자. 먹물들 이야기에 지친 게 나다. 그렇다고 나도 먹물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지만. 같은 먹물들끼리 이러지 말자. 다시 한번 말해 달라. 경쟁상대를 그렇게 여긴 까닭은?
인드라 : 초등학교를 나온 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게 답변하였다고 보았는데 그렇다면 막 자궁에서 나온 태아의 입장에서 말하겠다. 응아!
이한우 : 나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말고, 나 좀 봐줘라. 나도 알고 보면 불쌍한 사람이다. 생각하면, 취재하러 가라고 한 편집장을 좆나게 패주고 싶지만, IMF 시대에 그나마 월급이 나오는 몇 안 되는 직장이고, 그런 대로 정 붙이고 살만한 곳이다. 사정을 봐달라. 당신이 떠든 대로 쓸 수는 없지 않은가.
인드라 : 진작에 그렇게 말할 일이었다. 언론용으로 말하겠다. 우리는 <상상>의 예술성을 높이 평가하는 동시에 <창작과 비평>의 선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하여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으려는 부수적인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한우 : 말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상상>의 선정성과 <창작과 비평>의 예술성이 아닌가?
인드라 : 아니다. 제대로 말한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보고 있다. 우리는 프로이기에 허튼 소리를 가급적 삼가한다.
이한우 : 잡지를 아까 보았다. 그런 점에서 볼 때 그간 건강한 아마츄어리즘을 표방한 잡지들과 그다지 달라보이지 않는데, 아마도 잡지가 시중에 나오게 되면 또 다른 대학 교지적 잡지라고 말을 들을 수도 있을 듯한데.
인드라 : 바로 그것이 우리가 노리는 지점이다. 우리는 프로이기 때문에 대학 교지적인 잡지를 만든 것이다. 아무나 대학 교지적인 잡지를 만들 수 있다면 우리는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대학 교지가 다소간의 문제가 있지만, 한국 잡지의 역사는 대학 교지의 역사이기 때문에, 아울러 기존 잡지도 그 연장선상에 있기에 우리는 그처럼 만든 것이다. 그런데 기존 잡지가 대학 교지적 성향을 비판하는 이유가 있다면, 좋았던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타락한 자신들을 성찰하기 때문이라고 보는데 우리에게는 그러한 성찰이 없고, 단지 부러움만 있을 뿐이다. 우리는 원래 프로이기 때문에 아마츄어적 생활을 해 본 바가 없어서 그러하다.
이한우 : 상업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인가? 보통 신생잡지들은 상업주의를 의식하지 않고 잡지 본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하곤 한다. 그러한 것인가?
인드라 : 전혀 그렇지 않다. 우리는 상업주의를 철저히 옹호하고자 한다. 만일 이번 창간호에서 그러한 맥락을 읽지 못했다면, 우리의 능력 부족일 따름이다. 우리로서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상업주의에 복무하려고 노력했다. 우리에게 단 하나의 정신을 말하라고 한다면, 오로지 상업주의이다. 그러한 정신의 표현은 '절대 폐간하지 않겠다'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우리의 영업방침이다. 우리는 그책을 영업 필독서라고 생각한다. 절대 불순좌경용공친북음해세력의 사상서라고 생각해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 당국에서 큰 착오가 있지 않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소견이다.
이한우 : 좋다. 장난이 아니라면 <자본론>의 어느 대목이 영업 필독서에 걸맞는지 한 대목만 소개해 달라.
인드라 : 자본론 제 1장 제 4절 상품의 물신적 성격과 그 비밀이란 항목에서 '성직자의 10분의 1세는 성직자의 축복보다도 확실하다'라는 문장이 나온다. 이 말은 무엇인가. 우리 같은 프로가 지녀야 할 필수적인 정신자세이며, 잠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암기해야 할 생존법칙이다. 가령 당신과의 인터뷰에 응하는 까닭은 당신의 인간성과 하등 관계가 없지 않은가. 그리고 우리가 알 이유도 없고, 공짜로 알려준다고 하여도 우리로서는 정중히 사양할 수밖에 없다.
이한우 :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암튼 당신들 사정을 최대한 이해하기로 방금 결정했다. 혹 위악적인 어떤 표현으로 우리를 보다 깊이 감동시키려는 전략이 아닌가.
인드라 :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 또한 우리의 목표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프로는 흥정이 완결되기 전까지는 속사정을 내비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요즘 위악이 유행이라는 첩보를 입수했다. 아울러 우리는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거래하는 동안 만큼은 진실하다. 장삿꾼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계약 신뢰성 때문이다. 우리는 신뢰를 위해서라면 목숨만 빼고 아깝지 않다는 정신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출세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한우 : 기자가 인터뷰를 할 때는 자세히 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를 획득하고 온다. 당신은 과거 운동권이지 않았는가. 또한 당신의 마르크스, 데리다, 라이언. 네그리 등을 언급하는 통신 글도 보았다. 그러한 말은 자꾸 자신의 변절(당신이 하도 이렇게 나오니까 실례되지만 써보았다)을 변명하기 위한 것밖에 되지 않아 보인다.
인드라 : 그러한 오해가 늘 안타까왔다. 맞다. 나는 운동권이었다. 그렇지만 지금도 운동권이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러한가. 영업원칙을 확고히 하기 때문이다. 못 믿겠는가. 그렇다면 관공서, 은행, 재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운동권 출신을 확인해 보라. 그들이 대우받는 까닭을 아직도 모르는가. 상사들이 왜 운동권 출신을 선호하는가. 그것은 그들이 영업원칙을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문화비평 평문으로 '21세기적 피라미드 영업조직과 우리의 할 일; 부제: PD적 전망을 가진 사노맹적 혁신에 대하여' 쓸려고 작심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프로적 평문이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 매우 안타깝기 그지없다. 하나만 알려주겠다. '변절'이란 영업원칙 속에서는 베네통 광고와 동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그만큼 영향력이 있으나 한번만 써먹어야 효과가 크기 때문에 함부로 쓰지 않는 히든카드다. 또한 지금은 공황이나 다름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대학가에서는 마르크스주의 강좌가 인기이고, 책도 많이 팔린다고 한다고 한다. 생각해 보자. 가령 공산당 선언 같은 소책자 하나가 얼마나 많은 인류들에게 읽혀졌나. 그만한 영향력을 갖춘 책이 근현대사에 있었더란 말인가. 그 소책자가 학문적으로 어떠한 지위를 갖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수많은 이들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중시할 따름이다. 게다가 우리는 금서증후군이라는 놀랄 만한 마케팅 특수가 있다. 금서이지 않으면서도 금서인 것들이 특히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이다. 그리고 신세대 취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음이니 데리다이니 네그리이니 하는 거다. 조만간 일본문화가 개방된다니 이제 그쪽으로는 별 볼 일이 없으니 길게 보고 결정한 것이다. 뭘 모르는 아마츄어들 견해가 잘 될 턱이 있냐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 그쪽 사정이고, 우리는 상관하지 않을 따름이다. 아무튼 상식적인 것 아닌가. 대선 후보를 생각하면 된다. 우리는 모두 참신한 것을 원하고 있을 따름이다.
이한우 : 혹 정신병력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드라 :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을 따름이다. 다만 이 사회를 지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내용을 약간만 발설했을 따름이다. 아까 말하지 않았는가. 천기누설이라고. 그러나 당신이 하도 반신반의하기 때문에 조금만 말할 따름이다. 그런데도 당신은 당황하고 있지 않은가.
이한우 : 당황하는 것이 아니라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러하다. 아무튼 당신 잡지 성격은 문화비평지이다. 당신 말마따나 영업원칙에 따른 것이라면 당신들이 구십년대 초반에 나왔어야 하지 않는가. 적기를 놓친 것이 아닌가. 지금 문화비평 자체가 거품이 아니냐는 지적이 있기까지 한다.
인드라 : 이래서 당신은 늘 기자 따위나 하는 것이고, 우리들은 출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위기는 곧 기회라는 초보적 상식을 모르는가? 셀 수 없이 비평지 편집장들이 툭하면 내뱉는 영업 원칙 말이다. 대재벌이 어느 때 보다 덩치를 키우는가. 이러한 위기 때이다. 영업은 위기를 헤쳐먹고 큰다!라는 말을 들어 보지도 못했다는 말인가.
이한우 :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을 들어보긴 했지만 그런 말은 처음이다. 아무튼 좋다. 당신 말한대로 다 실어볼 생각이다. 일단 재미는 있는 것 같다.
인드라 : 바로 그것이다. 재미! 문화의 처음이자 끝은 재미다. 혁명을 위해 고스톱치나? 아닐 것이다. 그처럼 영화를 보고, 축구 응원도 하고, 클럽에서 헤드벵도 하는 것이다. 동성애자의 인권운동을 위해 동성애자가 섹스하나? 재미로 따지면 다 이해가 되는데 이런 걸 다르게 이해하니 쓸 데 없이 금지하는 거다. 이해는 간다. 적당히 금지해야 장사도 되니까. 그러나 독점하지 말자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우리와 단란주점 아가씨들과 경쟁관계에 있기도 하다.
이한우 : 아무리 그렇게 말해도 당신네 표지만 보면 전혀 뜰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말해서 미안하지만 팔릴 것 같지 않다. 기대하고 있는가?
인드라 : 오늘 내 사주팔자를 보았는데 기대하지 말 것!이라고 나왔다. 그러나 사주팔자의 묘미란 무엇인가. 바로 운명을 개척하는 불패정신이 아니던가.
이한우 : 에이, 정말 더러워서. 뭘 처먹었길래 말이 고따우로 나와? 물에 빠져도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겠다. 할 말 있으면 해봐라.
인드라 : 그러한 표현은 위대한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므로 신중을 기해야 할 표현이다. 아무나 쓰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소수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물론 키취가 유행이고, 엄숙주의 타파가 유행이니 당신 같은 사람도 그런 말을 어디서 들었을 것 같기는 하다. 그러나 이왕 쓰는 말 알고 쓰길 바란다. 아니면 비웃음만 당한다.
이한우 : 별 그지 같은 새끼가. 좋다. 내가 만일 너 같은 씹새끼한테 필자 선정 어떤 식으로 했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말할 거지? 절차적 민주주의에 입각한 헌법 제 37조에 따라 네 마음대로 결정한 것이라고. 그리고 그것이 무슨 말이냐고 하면 영업 노하우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다, 이렇게 말할 거지?
인드라 : 나는 기자를 같잖게 보지만, 남들 따라하기에는 다소 눈치밥이 있기에 기자를 하는 것이라고 본다. 결론적으로 약간 유사했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리는 UN 안전보장이사회가 정한 룰만을 존중한다. 아울러 그런 까닭은 하등 영업 비밀이 될 수 없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는 말을 아는가. 우리는 이런 점을 깊이 깨닫고 필자들에게 각개 약진을 주문했다. 기획이 없는 기획. 이런 걸 안다면 더 이상 말하지 않겠다. 모른다면 모르는 자신을 안다는 것이 지혜임을 말하고 싶다.
이한우 : 좆 같은 새끼. 아무리 그래도 임마, 이왕 책을 냈으면 교정이나 잘 볼 일이지, 그게 뭐야, 임마. 곳곳에 오자가 있잖아. 그러면 필자들이 어떻게 마음 놓고 글을 기고하냐? 그리고 보아하니 원고료나 주었겠어?
인드라 : 바로 그것이 또한 우리의 목표다. 사람들은 아무리 이렇게 말해도 잘 믿지 않는다. 눈앞에 보이는 이익에만 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독자들이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대목에서 적절한 방식으로 오자를 삽입시켰다. 이와 같은 작업에 대해서 극작가 브레이트가 말했다. 오로지 적절한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민중적이다. 우리는 브레이트가 처한 역사적 맥락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에 민중적이다,라는 표현을 심봤다!로 표현한다. 요즘은 대박이라고도 한다. 또한 원고료 문제도 그러하다. 미래를 위한 투자에 대한 갖가지 음험한 소수 의견이 있다. 우리는 이를 충분히 인정한다. 그러나 바깥에서 모르고 하는 소리일 따름이다.
이한우 : 그렇게 만들고 책값을 육천원이나 받냐? 씨발 새끼들. 양심에 털난 새끼들.
인드라 : 최근 한 외국인이 <버그>란 잡지를 만들어 시중에서 팔고 있다. 그 외국인의 영업전략에도 그런 소리를 할 것인가. 우리의 세계화는 아직도 먼것 같다. 한마디하자면, 그 외국인이 잔머리를 좀 많이 굴렸지만, 우리보다 저열한 단 한 가지는 값싼 잡지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작이 이렇지만 고급지를 추구하고 있다. 돈 되는 잡지를 만들 거다. 아울러 가격 책정에 대해서는 탐미주의적 원칙을 적용했음을 강조하고자 한다.
이한우 : 질렸다. 끝으로 아무 말이나 해봐라. 좆만한 새끼.
인드라 : 이로써 우리는 한 명의 독자를 확보하게 된 셈이다. 이만한 인터뷰에 그만한 대가없이 우리가 움직일 수가 없다. 당신의 욕 만큼 이제 당신은 앞으로 우리 잡지에 애증을 가지고 바라볼 것이 아닌가. 우리는 당신들에게 '잊혀지지 않는 추억'이 되고 싶다.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번안 맹성사회(猛省社會)
2004. 6. 13. 11:38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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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안 [ 案 , adaptation ]
외국 문학작품의 줄거리나 사건은 그대로 두고,
인물·장소·풍속·인정(人情) 등을 자국(自國)의 것으로 바꾸어 개작하는 일.
번역 [ 飜譯 , translation ]
한 나라 말로 된 글을 다른 나라 말로 옮기는 것.
원어를 그대로 번역하는 것을 직역(直譯), 뜻을 살려서 번역하는 것을 의역(意譯)이라 한다.
한국의 수많은 번역자들은 국내 번역 출판물의 번역을 성토하곤 한다.
원저를 완벽히 훼손했다, 도대체 무슨 말을 했는지 알 수 없게 번역했다 등등.
그리하여 필자는 이렇게 접근해보았다.
그렇다면 그 모든 번역물들을 번안물로 여기고 접근하여
훌륭한 번역자(여기서부터는 더이상 번역자가 아닌 셈이다.)들을
작가로 대접해주자는 것이다.
그들이 원작이라는 유령의 이름으로 우리 앞에 서기 보다는
그들의 목적에 충실하게
우리 앞에 당당히 전위로 나서달라는 것이다.
첨부된 화일로 보면 아침간 헤겔 번역판에서
필자가 바꾼 대목을 차별화시켰으므로
필요한 이들은 이를 비교해 보기를 바란다.
또한 내가 텍스트로 삼은 번역문은 아니지만
인터넷에 있는 또 다른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 번역문과
비교해 보고 싶은 분은 다음 글을 참고하길 바란다.
http://neo.urimodu.com/bbs/zboard.php?id=forum_leftist&page=1&sn1=&divpage=1&sn=off&ss=on&sc=on&keyword=헤겔법철학&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251
무 제 (1998.5:인드라)
한국(남북한을 한국이라 하자)에서 문화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끝났다. 그리고 문화에 대한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이다. 교수/협회와 당원/당을 위한 주류의 예찬이 논박당한 후에 오류의 주류적 비주류는 비판의 무대로 끌어 내려졌다. 초인을 추구하던 주류의 기만적 현실 속에서 단지 그 자신의 딸딸이만을 발견했던 인간은, 그의 참된 현실을 추구하고 또 추구해야만 할 곳에서 이제 더 이상 자기 자신의 가상, 즉 복제인간만을 찾는 경향을 갖지 않을 것이다.
반문화적 비판의 토대는 바로 이것이다. 인간이 문화를 만들지, 문화가 인간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문화는 자기 자신을 아직 잊지 않았거나 혹은 이미 자기 자신을 다시 상실해버린 인간의 자기 의식이고 자기감정이다. 그러나 인간, 그는 결코 추상적이거나 세계의 바깥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 그는 인간의 세계이고, 국가이고, 사회이다. 하지만 이 국가와 이 세계는 전도의 세계이므로 전도된 세계의식을 생산한다. 문화는 이 세계에 대한 이마골로기이며, 이 세계에 대한 백과사전적 화랑이고, 이 세계의 대중적인 형태로 되어 있는 소설이고, 이 세계 유심론의 공연 음반이며, 이 세계의 시이고, 이 세계에 대한 도덕적 영화이며, 이 세계의 장엄한 춤이자 이 세계의 만화와 경기의 일반적 양심이다. 인간 본질이 아무런 진정한 현실성도 얻지 못하기 때문에 문화는 인간 본질의 기만적 현실화일 뿐이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투쟁은 간접적으로 저 세계, 즉 그것의 정신적 지주가 문화인 세계에 대한 투쟁이다.
문화상의 불행은 한편으로는 현실의 불행의 표현이자 현실의 불행에 대한 항의이다. 문화는 정리해고당한 실업자의 한숨이며 파산한 세계의 감정이고 또 정신을 상실해버린 현실의 정신이다. 문화는 민중의 바보상자이다.
민중의 기만적 행복인 문화의 변혁은 바로 민중의 현실적 행복에 대한 요구이다. 민중의 상황에 대한 기만을 타파하라는 요구는 이 기만을 필요로 하는 상황을 타파하라는 요구이다. 따라서 문화에 대한 비판은 문화를 자신의 후광으로 받들고 있는 사회에 대한 비판의 차연이다.
비판은 단절로부터 가상의 다리를 허물어뜨린다. 그것은 인간이 기만을 벗겨냄으로써 상상과 위안이 사라져 버린 단절 속에 머무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단절을 떨쳐버리고 생생하게 연결되는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서이다. 문화에 대한 비판은 꿈을 꿈으로 반환시킬 줄 아는 영화 『가위손』 주인공처럼 사유하고 행동하면서 인간의 현실을 형성시켜 나갈 수 있도록, 그리고 인간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동시에 인간에게 주어진 중력을 넘어설 수 있도록 인간을 깨우친다. 인간이 자기자신을 중심으로 활동하지 않는 한 문화는 단지 인간의 주위를 맴도는 기만적 중력일 뿐이다.
그러므로 진리의 TV가 사라진 뒤에 TV 바깥으로 뛰쳐나오는 진리를 확립하는 것은 역사의 과제이다. 인간 소외의 체계화된 형태가 폭로된 후에, 체계적이지 않은 사회적 형태들 속에 들어있는 소외를 폭로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역사에 봉사하는 반문화의 과제이다. 이리하여 주류에 대한 비판은 비주류에 대한 비판으로, 문화에 대한 비판은 반문화에 대한 비판으로, 인문학에 대한 비판은 정치에 대한 비판으로 전환한다.
이하의 이빨 - 위의 작업에 대한 하나의 기고이지만 - 은 단지 한국을 다루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무엇보다도 원본이 아니라 그에 대한 복사본, 즉 한국의 민족문화와 반문화를 다룬다.
만약 사람들이 한국의 현상 그 자체에서 시작하려고 한다면, 비록 유일하게 알맞은 방식, 즉 차별적으로 한국의 현상을 다룰 지라도, 그 결과는 항상 시대착오로 끝날 것이다. 우리의 정치적 현재에 대한 차별조차도 이미 근대 민족국가들 역사의 똥통에 쌓여있는 휴지조각 같은 사실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내가 식자층의 선민적인 계몽들을 차별할 때, 나는 아직도 식자층의 선민적이지도 못한 계몽들을 가지고 있다. 내가 1968년 경, 혹은 스탈린체제의 붕괴 이후 서구 상황을 차별할 때, 서구적 시간계산에 따르면 나는 1968년에 있지 않을 뿐 아니라, 스탈린체제의 붕괴 이후에도 있지 않았으며, 현재의 초점에는 더더욱 있지 않다.
물론, 한국의 역사는 역사의 무대에서 어느 민족국가도 이전에도 달성하지 못했고 이후에도 흉내조차 내지 못할 속도전을 해 낸 것에 대해 자부심을 갖고 있다. 즉, 우리는 근대 민족국가들의 혁명을 공유하지 않고서도 그들의 부흥을 공유했다. 첫째, 다른 민족국가들이 혁명을 감행했기 때문에, 둘째, 다른 민족국가들이 반혁명을 겪었기 때문에, 우리는 부흥되었다. 즉, 한편으로는 우리 대통령과 주석들이 겁을 먹었기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대통령과 주석들이 전혀 겁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하다. 우리와, 최고의 권좌를 누리고 있는 통치자들은 항상 그들의 장례식 날에 단 한 번 우리가 자유로운 사회에 있음을 발견한다.
오늘날의 비열함을 과거의 비열함을 통해서 정당화하려는 학파, 물고문은 승인된 것이고 대대로 물려받은 것이며 역사적인 것이기 때문에 민중이 이 물고문에 반항하면서 부르짖는 절규는 반란이다고 선언하는 학파, 일제가 그의 몸종인 친일파에게 그러했듯이 역사 역시도 오직 그들에게만 후천적으로 자신을 옹립해준다고 생각하는 학파란 곧 주류문화파이다. 따라서 이 주류문화파는, 만약 자신들이 한국근대사의 발명품이 아니었더라면, 자신들이 한국근대사를 발명해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완용, 그러나 충실한 종으로서의 이완용이라고 할 수 있는 주류문화파는 민중의 심장으로부터 도려낸 매 원마다 자기 학파의 가상, 자기 학파의 역사적 가상, 자기 학파의 유교적 가부장적 한민족적 가상을 걸고 그것이 진리임을 맹세했다.
이에 반해 선량한 광신자들, 즉 기질상으로는 한국 국수주의자 지적 반성상으로는 자유로운 정신의 소유자들은 우리들의 자유의 역사를 우리들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단군의 만주벌판 속에서 뒤진다. 그러나 만약 자유의 역사가 단지 만주벌판 속에서만 발견되어야 한다면, 우리들의 자유의 역사는 무엇에 의해 돼지의 자유의 역사와 구별될 수 있을까? 게다가 다음과 같은 속담이 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숲속에서 외치자 숲을 타고 바람을 타고 온 고을에 퍼진다. 그렇다면 한민족의 만주벌판에 평화가 깃들기를!
한국의 상황에 대한 투쟁! 물론이다! 하지만 한국의 상황은 역사의 평균수준 이하에 머물러 있고, 모든 비판수준 이하에 있다. 그러나 한국의 상황은 비판의 대상으로 남는다. 이것은 인간성의 수준 이하에 있는 범죄자가 처형집행인의 대상으로 남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국상황과 투쟁하는 데 있어서 비판은 조직의 열정이 아니라 열정의 조직이다. 비판은 결코 해부용 칼이 아니라 무기이다. 비판의 대상은 비판의 적이며, 비판은 자신의 적을 논박하고자 하기보다는 절멸시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한국 상황의 정신은 이미 논박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의식적, 의식적으로, 한국 상황은 결코 사유할 만한 대상들이 못되며, 오히려 경멸할 만한 것인 동시에 이미 경멸받은 비주류이다. 비판 그 자체는 이 대상에 대한 자기 이해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비판이 이 대상을 완전히 파악했기 때문이다. 비판은 더 이상 자신을 자기목적으로 간주하지 않고 단지 수단으로만 간주한다. 비판의 본질적인 울혈은 분노이며, 비판의 본질적인 노동은 고발이다.
한국에서는 모든 사회적 제 영역 상호 간의 숨막힐듯한 압박, 아무런 작위도 없이 언짢아하는 것의 일반화, 자신을 오판하는 것 못지 않게 자만하는 편협성, 이들 모두는 통치체제 - 이것은 온갖 비참함을 온존시킴에 의해 존속하고 있으며, 그 자체 통치상의 비참함 바로 그것일 따름이다. -의 틀 내에 만연되어 있다. 이러한 사태에 대해 서술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얼마나 꼴불견인가! 사회는 다양한 집단들로 무한히 계속 분할된다. 그리고 이 집단들은 각기 사소한 반감, 악의, 조야한 인기를 가지고 서로 다투고 있다. 그리고 이 집단들은 다름아닌 자신들의 애매한 지위 때문에 다양한 형식들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배자들에 의해 무차별하게 허가된 비주류로서 취급된다. 더욱이 그들은 자신들이 지배당하고 통치당하고 소유당한다는 사실을 하늘이 정한 운명으로서 인정하고 감수해야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저 지배자 자신을 보라. 이들의 위대함은 이들의 숫자에 반비례한다!
이러한 내용을 상대하는 비판은 격투를 하는 비판이다. 그리고 이 격투에 있어서는 상대방이 고상하고 동등한 수준에 있으며 흥미로운 상대방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때려 눕히는 것이 중요하다. 이 비판에서 중요한 것은 한국인에게 어느 한 순간도 자신을 기만하고 체념에 빠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억압에 대한 의식적 자각을 억압에 부가함으로써 현실의 억압은 한층 더 억압적이게 되고, 치욕에 대한 공개를 치욕에 부가함으로써 한층 더 치욕적이게 된다.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은 한국 사회의 치부로써 묘사되어야 한다. 이 한국 사회의 모든 영역들에 그들 고유의 가락을 들려줌으로써 이 영역들의 경직된 관계들을 춤추듯 술렁이게 만들어야 한다. 한민족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 위해서는 한민족을 전율하게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민족의 불가피한 욕구가 충족될 수 있다. 그리고 제 민족의 욕구들 그 자체가 욕구들의 만족의 토대들이다.
또한 근대적 민족들에게 있어서 조차 한국 현상의 편협한 내용에 대한 이 투쟁은 무관심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한국의 현상은 냉전체제의 솔직한 완성이며 이것은 또 근대국가의 숨겨진 결점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정치적 현재에 대한 투쟁은 근대국가들의 과거에 대한 투쟁이며, 그리고 근대국가들은 이 과거의 회상들 때문에 여전히 괴로움을 당하고 있다. 그들이 비극으로 체험했던 냉전체제가 한국적 유령으로서 희극으로 상연되는 것을 구경하는 것은 근대국가들의 입장으로는 매우 교훈적이다. 냉전체제가 세계에서 선재하는 권력이었고, 그에 반해 자유가 개인적 기만이었던 한, 한마디로 말해서 냉전체제가 자신이 정당성을 믿었고 또 믿으려고 했던 한, 냉전체제의 역사는 비극적이었다. 냉전체제가 현전하는 세계와 더불어 싸웠던 한, 결코 개인적이 아니라 세계적인 오류가 냉전체제의 편에 있었다. 따라서 냉전체제의 붕괴는 비극적이었다.
이에 반해 현 한국의 제도는 분명히 시대착오적 제도이며 일반적으로 인정된 가치들에 대한 명백한 모순이고 분단체제가 세계 무대에 출품한 졸작임에도 불구하고, 이 제도는 여전히 자기자신을 신뢰한다라는 지역주의 에 들떠 있을 뿐 아니라, 세계에 대해서도 자기와 똑같은 지역주의 를 가지기를 요구하고 있다. 만약 현 한국의 제도가 지역주의 에 대해 신뢰하고 있다면, 이 제도야말로 동일한 것, 즉 지역주의를 민족주의의 가상 아래 숨기고, 그것의 도피처를 위선과 궤변 속에서 구하는 것이 아닌가? 현존하는 냉전체제는 이제 세계질서의 현실적인 주인공들이 죽은 뒤에 그 세계질서를 극화하려는 희극배우일 따름이다. 역사는 철저하다. 그리고 역사는 낡은 형태를 무덤으로 보낼 경우에 많은 단계들을 거치면서 이 작업을 행한다. 세계사적 형태의 최후의 단계는 그것의 희극이다. 속박되어 있는 지리산에 묶여 있는 빨치산 속에서 한 번 비극적으로 죽은 바 있는 민중은 또 한 번 눈물의 여왕이라는 대중가극 속에서 희극적으로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었다. 왜 역사는 이렇게 진행되는가? 인류로 하여금 즐겁게 그들의 과거와 결별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들은 한국의 정치권력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이 즐거운 역사적 운명을 청구하는 바이다.
근대적인 정치적 사회적 현실 자체가 비판에 의해 전복되자마자, 따라서 비판이 진정으로 인간적인 문제들로 자신을 고양시켜 나아가자마자, 비판은 자신을 한국의 현상 외부에서 발견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비판은 그의 대상을 그의 대상 이하의 것으로서 파악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문화산업 또는 일반적으로 부의 세계와 정치적 세계의 관계는 근대의 중심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어떤 형태로 이 문제에 몰두했는가? 타이타닉 관람거부 운동서부터 최근의 월드컵 주경기장 선정 논란의 형태 하에서였다. 이때 한국국수주의는 인간으로부터 물질로 나아갔으며 따라서 어느날 아침 우리 한국의 감독들과 가수들은 통일을 노래하다 어느날 갑자기 유행병처럼 일상을 말하는 애국자들로 변한 것처럼 보이게 되었다. 그러므로 한국에서는 독점에 대해 대외적 주권이 우선적으로 부여됨으로써 대내적 주권도 인정되기 시작했다. 따라서 한국은 서구가 마무리짓기 시작한 작업을 이제야 추진하기 시작했다. 서구가 이론적으로 항거하는 소동을 일으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아직까지는 신주단지처럼 간직하고 있는 낡고 부패한 상태가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미래의 떠오르는 아침노을로서 환영받고 있으며 아무도 이것에 대해 D.H 로렌스의 작품을 내세워 과감하게 비판을 행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문제는 서구에서는 후기구조주의, 해체주의, 포스트마르크스주의, 기호학 등이 현존하는 억압과 관련된 모든 것들의 해체를 모색하는 것으로 언급되는데 반해, 한국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으로 통칭되면서 자본을 제외한 현존하는 모든 것에 대한 해체라고 언급된다. 서구에서는 최후의 결과로까지 나아간 독점을 변혁하는 것이 문제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독점을 최후의 결과로까지 몰고가는 것이 문제이다. 앞의 경우는 독점의 해체가 문제이며, 뒤의 경우는 독점의 풍부한 전개와 충돌이 문제이다. 이상은 근대적 문제들이 한국에서 어떤 형식으로 전개되는가에 관한 하나의 풍부한 실례이며 어떻게 해서 한국 역사가 막 입봉을 마친 감독처럼 지금까지 겨우 타락을 마친 역사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면서 다시 연습해 보는 과제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나타내는 하나의 실례이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한국의 발전 전체가 한국의 정치적 발전을 능가하지 못한다면, 어느 한 한국인은 기껏해야 현대의 문제를 어느 한 중국인이 그것에 관여할 수 있을 정도만큼만 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 개인이 국가의 한계들에 대해 속박되어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한 개인의 해방만으로는 국가 전체가 여전히 덜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서구인이 왕자웨이 등 중국인을 서구의 칸느로 초대했을지라도 중국인 전체는 서구와 같은 문화의 진보로는 한 걸음 전진할 수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우리 한국인은 결코 중국인이 아니다.
고대 민족들이 그들의 선사를 상상 속에서, 즉 신화 속에서 체험하였듯이 우리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미래의 역사를 사유 속에서, 즉 반문화 속에서 체험한다. 따라서 우리들은 현대의 역사적인 동시대인들이 됨이 없이 단지 현대의 반문화적인 동시대인들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반문화는 한국 역사의 관념상의 연장이다. 이처럼 우리들이 우리의 실재적인 역사의 미완성 작품들 대신에 우리의 관념적인 역사의 사후 작품들을, 즉 반문화를 비판할 때 우리들의 비판은 현대가 "당신이 여기에 온 이유가 당신의 해방이 나의 해방과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라면, 그렇다면 함께 일해 봅시다; 34P, 사빠띠스타, 갈무리"라고 말하고 있는 바로 그 문제의 한가운데 서 있다. 서구민족들이 근대의 국가상황과 실천적으로 결렬된 데 비해 이 상황들 자체가 아직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는 한국에서는 이 상황들에 대한 반문화적 반영과 비판적으로 결렬된 것이라 하겠다.
한국의 반문화 및 민족문화는 공식적이고 (여전히) 근대적인 현대와 액면 그대로 함께 서 있는 유일한 한국 역사이다. 따라서 한민족은 자신의 이러한 꿈의 역사를 자신의 현재상황들과 결부짓고 그후 현전하는 상황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자신들의 추상적인 계속도 비판에 부닥치게 한다. 한민족의 미래는 그 자신의 실제적인 민족문화 및 반문화의 상황들에 대한 직접적인 차별에 제한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관념적인 민족문화 및 반문화의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에 제한될 수도 없다. 왜냐하면 한민족은 그 자신의 실제적 상황들에 대한 직접적 차별을 단지 관념적인 상황들 속에 가지고 있으며, 또 그 자신의 관념적인 상황들의 직접적인 완성을 이웃 민족들의 직관 속에서 거의 또 다시 삶을 연장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에서의 실천적인 정당이 반문화의 차별을 요구하는 것은 올바르다. 이 정당의 부당성은 이러한 요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정당이 진정으로 완성하지 못했고 또 완성할 수도 없었던 요구 곁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는 데에 있다. 이 정당은 그들이 반문화를 외면하면서 분노에 가득찬 케케묵은 몇마디 말들을 중얼거림으로써 반문화에 대한 차별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정당은 그들의 시야의 협소함 때문에 반문화를 자신의 국가인 한국의 현실 내부에서 고려하지 않을 뿐 아니라, 반문화를 심지어 한국적 실천과 그것에 도움이 되는 이론들의 수준 이하의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다. 이 정당은 사람들이 현실적 삶의 차연들과 관계맺을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민족의 현실적 삶의 차연이 지금까지 단지 한민족의 꼴통 속에서만 무성하게 자라왔다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다. 하여,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실천적 정치정당은 반문화를 실현하지 않고서는 반문화를 변혁할 수 없는 것이다.
이론적이며 반문화로부터 유래된 정당은 단지 거꾸로 된 구성요소만 가진 채 똑같은 오류를 범한다.
이 정당은 현재의 투쟁 속에서 단지 반문화의 한국적 세계에 대한 비판적 투쟁만을 본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반문화 그 자체도 이 한국적 세계에 속하며, 따라서 비록 관념적일지라도 그 세계에 대한 연대라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자신의 상대에 대해서는 비판적 태도를 취하면서도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인 태도에 머물러 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에서 명백히 드러난다. 그들은 반문화의 전제들로부터 출발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결과들에 안주하거나 또는 다른 곳에서 가져온 요구들과 결과들을 반문화의 직접적인 요구들과 결과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 가져온 요구들과 결과들 - 그것들의 정당성을 전제로 할 때 - 은 거꾸로 단지 지금까지의 반문화에 대한 차별, 즉 반문화으로서의 반문화에 대한 차별을 통해서만 얻어질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이 정당에 대한 보다 상세한 서술을 보류하고자 한다. 다만 이 정당의 근본적 결정은 다음과 같이 압축될 수 있다 : 이 정당은 반문화를 변혁하지 않고서도 반문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정약용에 의해서 한국의 민족문화 및 반문화에 대한 비판은 동양 사회정치사상에서 이례적이고, 획기적이며, 중요한 파악에 도달했다. 정약용의 작업은 근대국가 및 그것과 연관된 현실에 대한 비판적 분석뿐만 아니라, 한국의 정치적 반문화 의식의 기존 양식 전체에 대한 실사구시적이고, 개혁적인 차별까지도 포함한다. 사변적 반문화 그 자체는 천자천명설, 왕권신수설을 차별하고 천자와 군주의 중민추대설, 중민선출설을 주장한 만큼 고양된 한국의 정치적 반문화 의식의 표현이다. 이는 한국에서도 이 사변적 반문화가 가능했으며, 근대국가에 대한 이 추상적이고 과도한 사유의 현실은 아직 TV에 머물러 있었으며, 이때 TV라는 것이 단지 태평양 저편에만 존재했다면, 이에 못지 않게 거꾸로 근대국가 자체가 현실적 인간으로부터 추상되어 있거나 혹은 인간 전체를 단지 상상적이고 허구적인 방식으로 만족시키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한에 있어서만, 근대국가에 대한 한국적이고, 현실적인 인간으로부터 추상되어 있는 사유적 반영이 가능했다. 다른 민족들이 실행했던 것을 한민족은 정치학 속에서 사유했다. 즉, 한국은 다른 민족들의 이론적 양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한민족의 사유의 추상성과 오만함은 항상 한민족 현실의 일면성과 낙후성과 보조를 맞추었다. 따라서 한국국가체제의 존재 그 자체의 현상이 일제 식민지에 뒤이은 분단체제의 완성, 즉 근대국가체제의 걱정거리의 완성을 나타낼 때, 한국 국가체제에 대한 지식의 현상은 근대국가의 미완성 즉 근대국가체제의 결함을 나타낸다. 이제 한국의 정치적 의식의 기존 양식에 대한 단호한 반대자로서 사변적 반문화 비판은 더 이상 자신 안에 머무르지 않고 오히려 실천만이 오로지 그것의 해결책으로 존재하는 그러한 과제들에로 나아갔다.
다음과 같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 한국은 과연 원리의 수준으로까지 고양된 실천에 도달할 수 있는가? 즉 한국은 자신을 근대적인 민족들이 도달한 공식적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 민족들의 바로 다음의 미래가 될 인간적인 수준으로까지 고양시킬 수 있는 혁명을 성취할 수 있는가?
비판의 무기는 물론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인 힘은 물질적인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도 그것이 대중을 사로잡는 순간 물질적인 힘, 즉 이마골로기로 된다. 또한 이론은 대인적으로 증명되자마자 대중을 사로잡을 수 있다. 그리고 이론은 그것이 근본적으로 될 때 대인적으로 증명된다. 근본적으로 된다는 것은 사태를 그 뿌리에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어서 뿌리라는 것은 다름아닌 인간 자신이다. 한국 이론의 근본주의에 대한 명백한 증거, 그러므로 한국 이론의 실천적 기에 대한 명백한 증거는 이 이론이 문화에 대한 단호하고도 적극적인 변혁으로부터 출발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에 대한 비판은 인간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라는 교훈으로 끝났다. 그러므로 문화에 대한 비판은 그 속에서 인간이 천대받고 구속받고 버림받으며 경멸당하는 존재로 되어 있는 모든 관계를 전복시키라는 정언명령과 더불어 끝났다. 이 비인간적인 관계는 "우리들은 모두 E.T이다; 585P, 사랑의 역사, 민음사"라고 외친 줄리아 크리스떼바의 글쓰기보다 더 잘 묘사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한국으로서는 이론적 해방이 특별한 실천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한국의 혁명적 과거는 이론적인 것이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바로 학생운동이다. 과거의 학생운동가는 지금의 좌파에 해당하는데, 바로 이 좌파의 자율 조직에서 오늘날의 운동이 시작된다.
학생운동가들은 물론 확신에서 나오는 예종으로 대체시킴으로써 귀의에서 나오는 예종을 극복했다. 그들은 신앙에 대한 권위를 회복시킴으로써 권위에 대한 신앙을 타파하였다. 그들은 노동자들을 학생들로 끌어올림으로써 학생들을 노동자로 끌어내렸다. 그들은 찌다시를 내적 인간으로 만듦으로써 인간을 외적 찌다시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들은 마음을 사발식 속에 묶어놓음으로써 육체를 사발식으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러나 학생운동은 비록 과제의 진정한 해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과제의 올바른 설정이었다고는 말할 수 있다. 이제 노동자와 그의 외부에 존재하는 학생의 투쟁이 문제가 아니라, 노동자와 그 자신의 내부에 존재하는 학생, 즉 그의 학생적 본성의 투쟁이 문제이다. 한국노동자의 학생으로의 학생운동적 변화가 교수들과 당원들 그리고 학생들, 특권층들, 속물들과 더불어 대통령과 주석도 해방시켰다면 학생적 한국인들의 인간으로의 반문화적 변화는 한민족을 해방시킬 것이다. 그러나 해방이 대통령과 주석의 경우에만 제한되어 있지 않듯이 표적 사정, 특히 위선적인 김영삼 문민정권이 시도했던 바와 같은 역사바로세우기에만 제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과거 한국의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었던 사건인 갑오동학농민전쟁은 유학에 부딪쳐 수포로 돌아갔었다. 오늘날 유학 그 자체가 파멸된 이 때 한국 역사상 가장 부자유한 사실인 우리 한국의 현상은 반문화에 의해 분쇄될 것이다. 학생운동 이전에 한국은 일본의 가장 무제약적인 노예였었다. 이제 한국의 혁명 이전에 공식적 한국은 일본보다는 미국과 서구의 헤지펀드들과 분단체제의 속물들의 무제약적인 노예이다.
그러나 급진적 한국혁명은 하나의 중대한 곤란에 직면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혁명들은 소위 자율, 즉 물질적 토대들을 요구한다. 이론은 한 민족의 욕구들을 구체화시키고 있는 만큼만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 하지만 한국적 사유의 요구들과 한국적 현실의 대답들 사이에 놓여있는 엄청난 분열에 시민사회와 국가, 그리고 시민사회 자체 사이의 동일한 정도의 분열이 상응하는가? 따라서 이론적 욕구들은 직접적으로 실천적 욕구들이 될 것인가? 사유가 현실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현실이 그 자신을 사유에로 나아가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나 한국은 다른 민족들과 동시에 정치적 해방의 중간단계들에 도달하지 못했다. 한국은 실천적으로는 아직 자신이 이론적으로 극복한 단계들에조차도 도달하지 못했다. 어떻게 해서 한국은 생명을 건 모험을 통해 자신의 한계들을 뛰어넘을 뿐만 아니라 근대 제민족의 한계 - 한국은 이 한계를 실제로 자신의 현실적 한계로부터의 해방으로서 느끼고 또 그 확립에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까지도 뛰어넘을 것인가? 급진적 혁명은 마치 전제들과 발생근거를 결여한 것처럼 보이는 단지 급진적 욕구들이 주장하는 혁명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이 진보를 위한 현실적 투쟁을 벌이는 활동적 정당에 참여하지 않고 근대 민족들의 사유의 추상적 행위만을 통해서 동반했기 때문에, 한국은 다른 한편으로 이 진보를 누리거나 거기서 부분적인 만족을 나누어 가지지 못하고, 단지 이 진보의 고통만을 나누어 가졌다. 따라서 한국은 어느날 아침 서구적 해방의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오히려 서구적 몰락의 수준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한국은 유교라는 질병으로 고생하는 물신숭배자에 비유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사람들이 우선 한국의 통치기구들을 고찰한다면, 이 고찰을 통해서 사람들은 한국의 시대적 상황, 처지, 한국적 교양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으로 한국 고유의 행복한 본능에 의해 우리가 그것의 장점을 취하지 못한 근대 국가세력의 문명화된 결점들을 우리가 충분히 만족하는 분단체제의 야만적 결점과 결합시킴으로써 그 결과 한국은 오성의 측면이 아니라 반오성의 측면에서 한국의 현상을 초월하는 국가건설에 그만큼 더 참여하도록 강요당하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다. 예를 들면 소위 유신체제처럼 그렇게 소박하게 공화제의 실상들을 공유하지 않고 그것의 모든 허상들만 공유하고 있는 국가가 그 어디에 있을까? 그리고 언론 검열의 진통들을 언론자유를 전제로 삼고 있는 서구 언론의 파파라치적 진통과 결합시키려는 것은 한국 통치기구의 착상임이 분명하지 않은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나 국민의 정부 현 청와대 비서진들은 청와대 비서실 기자출입을 막고 있다고 한다.) 사람들이 고대, 중세의 서사시에서 모든 민족의 영웅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처럼(참고 : 동아시아 구비서사시의 양상과 변천; 조동일; 문학과 지성사), 중세적 한국 내에서 모든 국가형태들의 죄악들은 발견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종류의 절충주의가 지금까지 전혀 예기치 못했던 수준에까지 도달했다는 사실에 대해 정치적 미학적 대식가인 어떤 한국 대통령과 주석이 (토착적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보증을 섰다. 그는 봉건적이든, 관료적이든, 절대적이든, 입헌적이든, 귀족적이든, 민주적이든간에, 이들 제 형태의 왕정국가들이 보여준 모든 역할들을 비록 그의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그 혼자서 그리고 그의 민족 전체를 위해서는 아닐지라도 자신을 위해서 수행하려고 한다. 정치적 현대의 일반적 한계들을 포기하지 않으면 특수한 세계로 구성된 정치적 현대의 결점으로서의 한국은 극복될 수 없을 것이다.
한국으로서는 근본적인 혁명, 즉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해방이 이상향적 꿈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이고 단지 정치적인 해방, 즉 집의 기둥을 그대로 둔 해방이 이상향적 꿈이다. 그러면 이 부분적이고 단지 정치적인 해방은 어디에 근거하는가? 그것은 시민사회의 한 부분이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보편적 지배에 도달한다는 데 근거한다. 다시 말하면 어떤 특정계급이 자신의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사회의 보편적 해방을 도모한다는 데 근거한다. 이 계급은 사회 전체를 자유롭게 만든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오직 다음과 같은 전제 아래서만 가능하다. 그 전제란 사회전체가 스스로를 이 계급의 상황 속에서 발견할 수 있어야만 한다는 것, 그러므로 예를 들면 화폐와 교양을 가질 수 있거나 혹은 마음대로 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민사회의 어떠한 계급도 자신과 대중을 연관시킬만한 동기를 유발시키지 않고서는 위와 같은 역할을 수행할 수 없다. 여기서 말하는 동기란 그것을 통해, 여성이 남성과 더불어,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와 더불어 확연히 우애롭게 보낼 수 있고 융합할 수 있으며 교류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보편적 대변자로서 느껴지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을 말한다. 어떤 계급의 요구들과 권리들이 이 동기를 통해서 진정으로 사회 자체의 요구들이 될 뿐만 아니라 그 계급은 현실적으로 사회의 조직과 사회의 심장이 된다. 단지 사회의 보편적인 매체들이라는 이름 아래서만 어떤 특정계급은 그 사회에 대한 보편적인 지배를 주장할 수 있다. 이와 같은 해방적 지위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이것에 의해 자신의 영역들의 이익을 위해 사회의 다른 모든 영역들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는 혁명적 기와 정신적 자부심만으로는 부족하다. 한 민족의 혁명과 시민사회의 특정계급의 해방이 일치하기 위해서는, 따라서 한 신분이 그 사회 전체의 신분으로 행세하기 위해서는 거꾸로 그 사회의 모든 결점들이 다른 한 신분에 집중되어 있어야만 하고 나아가 이 다른 특정 신분이 보편적인 장애의 신분, 즉 보편적인 제약들의 화신이어야 하고, 더 나아가 사회의 이 특정 영역이 사회성 전체에 대한 악명높은 침해로서 여겨져야만 하고 따라서 이 영역들로부터의 해방이 사회의 보편적인 자기해방으로서 나타나야만 한다. 한 신분이 특히 해방의 신분이기 위해서는 거꾸로 다른 한 신분이 압제를 공개적으로 대표하는 신분이어야 한다. 유신체제 이래의 집권층과 지배층의 극우적 차별적 보편적 의미는 이들의 바로 옆에 있으면서 대립하고 있었던 소시민적 우파적 보수적 야당의 긍정적 보편적 의미를 규정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각각의 특수한 계급들은 사회의 차별적 대표자들에게 일침을 가할 수 있는 일관성, 날카로움, 용기 그리고 냉철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각 신분들 모두는 비록 일시적일지라도 민족정신과 동일시 될 수 있는 정신적 포용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고, 물질적인 힘들을 정치적 폭력으로 이끌어 열광케하는 천재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적에게 "나는 겸손하다. 그러나 나는 시대의 겸손을 저주한다"라는 반항적 구호를 표방할 수 있는 혁명적 용맹성도 가지고 있지 않다. 개인들뿐만 아니라 계급들이 갖고 있는 한국적 도덕과 고귀함의 근거를 이루는 것은 오히려 바로 저 겸손한 이기주의인 바, 이것은 자기 자신의 한계를 주장하고 또 자신에 대해 그 한계가 관철되게 하는 것일 따름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다양한 영역들의 제 관계는 극적인 것이 아니라 서사적인 것이다. 한국사회의 각 영역들은 그들이 억압되기 시작할 때가 아니라 오히려 한편으로 그들의 도움 없이도 시대관계들이 사회적 기초를 창출할 수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기초에 대해 그들이 억압을 행사할 수 있게 되자마자 각각 자기의식을 갖게 되며, 그리하여 다른 영역들과 나란히 서서 각각의 특수한 권리들을 주장하게 된다. 심지어 한국 중간계급의 도덕적 자기의식조차도 자기 계급이 다른 모든 계급들의 속물근성의 보편적 대변자라는 생각을 바탕에 깔고 있다. 그러므로 한국 대통령과 주석들만이 이유없이 권좌를 차지한 것은 아니다. 시민사회의 각 영역들도 그들의 승리를 축하하기 이전에 그들의 패배를 겪었고, 그들에 대립해 있는 관대한 본성을 주장할 수 있기 전에 그들의 편협한 본성을 주장했고, 따라서 그들이 위대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는 기회는 나타나기도 전에 이미 사라져 버렸으며, 그 결과 모든 계급들은 그들이 자기 위에 군림하고 있는 계급들과 투쟁을 시작하자마자, 곧 그들 밑에 있는 계급들과의 싸움에 휘말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재벌이 청와대와 주석궁과, 관료가 국회의원들과 인민대의원들과, 그리고 기득권층이 이들 모두와의 투쟁에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좌파가 우파와의 투쟁을 시작한다. 중간계층은 자신의 관점으로부터 해방의 사상을 전혀 파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회 상황의 전개와 정치이론의 발전은 이 관점 그 자체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혹은 적어도 문제투성이라고 선언한다.
미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이 되기 위해서는 그가 어떤 것이 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어떤 사람이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아무도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미국에서는 부분적인 해방이 보편적인 해방의 토대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보편적인 해방이 모든 부분적인 해방의 필수조건이다. 미국에서는 단계적 해방의 현실성이 한국에서는 단계적 해방의 불가능성이 완전한 자유를 낳는 것임에 틀림없다. 미국에서는 민족을 구성하고 있는 계급들 모두가 정치적 이상주의자이며, 자신들을 특정계급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 욕구 일반의 대표자로서 깨닫고 있다. 그러므로 해방자들의 역할은 차례차례로 극적인 운동 속에서 미국인의 여러 계급들의 수중으로 넘어가고, 마침내 사회적 자유를 더 이상 어떤 제약들, 즉 인간의 밖에 존재하면서도 인간 사회에 의해 만들어진 제약들이라는 전제 아래에서 실현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 생존의 모든 조건들이 사회적 자유라는 전제 아래서 조직화하는 계급들에까지 도달한다. 반면에 실천적 삶이 정신을 결여하고 있을 뿐이 아니라, 정신적 삶이 비실천적인 한국에서는, 시민사회의 그 누구도 데쓰메탈을 하든, 축구를 하든, 연극을 하든, 영화를 하든, 미술을 하든, 동성애자 인권운동을 하든, 여성운동을 하든 물질적인 필연성에 의해 기득권층이 자신을 감빵으로 보낼 만큼 속박하지 않는 한 보편적인 해방에로의 욕구와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러면 도대체 한국 해방의 실질적인 가능성은 어디에 있는가?
그 대답은 다음과 같다 : 그 가능성은, 철저하게 속박되어 있는 한 계급, 시민사회의 계급이면서도 시민사회의 어떤 계급도 아닌 한 계급, 모든 신분들의 해체를 추구하는 한 신분, 자신의 보편적 고통에 의해서 보편적 성격을 소유하고 있으며, 어떤 특정한 부당성이 아니라 부당성 그 자체가 자신에게 자행되기 때문에 어떤 특수한 권리도 요구받지 못하는 한 영역, 더 이상 아무런 역사적인 명분을 내세울 수도 없고 오히려 단지 인간적인 명분만을 내세울 수 있을 뿐인 영역, 한국국가제도의 결과들과 일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전제들과 전면적으로 대립하고 있는 영역, 마지막으로 사회의 모든 다른 영역들로부터 자신을 해방시킴과 동시에 사회의 모든 다른 영역들을 해방시킴이 없이는 결코 해방될 수 없는 한 영역의 연대에 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가능성은 인간의 완전한 단절이고, 따라서 인간의 완전한 소통에 의해서만 자기자신을 획득할 수 있는 한 영역의 연대에 있다. 이같은 사회의 해체를 체현한 특수한 한 신분이 바로 무산계급이다.
한국에서는 무산계급이 갑자기 출현한 산업운동에 의해 처음 생성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자연발생적으로 발생한 빈곤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산출된 빈곤과, 사회적 궁핍에 의해 기계적으로 몰락된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의 급격한 해체를 특히 중간계층의 해체로부터 출현한 사람들이 좌파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자연발생적 빈곤 뿐만 아니라 종교적, 한민족적 자유주의자들이 비록 점차적일지라도 좌파의 계열 속으로 편입되었다는 사실도 자명하다.
좌파가 기존 세계질서의 해체를 고지한다면, 그것은 단지 좌파가 이질성을 손쉽게 동일성으로 환원시키지 않는 동시에 대립과 전복을 통해 뛰어넘으려하는 연대의 정치를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좌파는 이 기존 세계질서의 사실적 해체이기 때문이다. 좌파가 이 경제의 차별을 요구한다면, 이때 좌파는 사회가 좌파의 원리로서 고양시켜 왔던 것, 좌파 속에서 좌파의 도움 없이 이미 사회의 차별적 결과로서 구체화되었던 것은 사회의 원리로서 고양시키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하여 한국 대통령과 주석이 말을 자신의 말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한민족을 자신의 백성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때 이미 생성된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는 바로 그 정도만큼, 좌파는 이제 생성해 가고 있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 자율을 발견한다. 한국 대통령과 주석은, 자신이 무려 이만오천개 이상의 임명직에 대한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음으로써 대통령과 주석은 사적 소유자이다는 사실만을 선언했을 뿐이다.
반문화가 좌파 속에서 그의 물질적 무기를 발견하듯이 좌파는 반문화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무기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유의 섬광이 근본적으로 이 소박한 민족의 대지 위에 부딪히자마자 한민족의 인간으로의 해방은 완성될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요약해 보자.
유일하게 실천적으로 가능한 한국해방은 인간을 인간의 최고의 본질대로 선언하는 바로 그러한 이론의 관점에 서 있는 해방이다. 한국에서 중세로부터의 해방은 동시에 단지 중세의 부문적 극복들로부터의 해방인 경우에만 가능하다. 한국에서는 모든 종류의 예속을 타파하지 않고서는 어떤 종류의 예속도 타파할 수 없다. 근본에서부터 변혁되지 않고서는 한국의 근본적 뿌리는 혁신될 수 없다. 한국의 해방은 인간의 해방이다. 이 해방의 심장 방탄조끼가 반문화이고 이 해방의 심장은 좌파이다. 좌파의 해체없이 반문화는 실현될 수 없으며, 반문화의 실현없이 좌파는 해체될 수 없다.
모든 내부적 조건들이 충족될 경우, 한국이 부활하는 그날은 희망의 새벽별을 노래하는 자율적인 합창에 의해 의해 고지될 것이다. .
참고 문헌:
◀『헤겔 법철학 비판 서문(이하 서문); 칼 마르크스; 아침』을 몇몇 문구만 수정하였음. 이러한 글쓰기 시도 취지는 첫째 칼 마르크스가 이 글을 집필했다고 추정되는 1843년 독일 상황과 1998년 한국 상황을 비교하여 마르크스의 권위를 내세우기 위함이 아니라 과연 마르크스 논의가 한국에서 정말 무효화되었는가 하는 문제제기에서 실험했음이며, 둘째 반문화의 정체성을 『서문』에서 언급된 철학의 정체성과 비교하여 서구 반문화 개념을 수입해서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해 쓰고자 함도 아니고, 어설프게 억지 논리를 만들기 위함이 아닌 다른 통로를 모색하는 '현재진행형'임을 말하기 위함이며, 세째 이 글쓰기가 창간선언문이 결코 아니지만 내 지위로 인하여 그렇게 보일 이유가 있으므로 한마디하자는 의미에서 이제까지의 창간선언문이 사기였고, 잡지를 만드는 우리 또한 사기일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이를 소극적인 의미에서라도 극복하기 위해 창간선언문 따위를 만들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며, 마지막으로 한국사회의 검열횡포에 대한 작은 항의를 표현하기 위함임. 필자가 원문의 일부분을 대체했음을 나타낼 목적으로 패러디된 부분은 굵은 체로 썼음.
◀ 『조선후기 실학 실학파의 사회사상 연구; 신용하; 지식산업사』헤겔(1770-1831)과 거의 동시대 인물인 정약용(1762-1836)은 서학에 관심이 많았으나 유학자로서 일생을 마쳤다. 동학농민군 집강소토지개혁안이 정약용의 토지개혁안을 계승, 발전시켰다는 등 한국 실학사상의 대표자라고 평가받는 동시에 그의 사상이 민주주의 사상의 차연을 확립했으나, 제도화하는 수준까지는 발전하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부산대 교지에 실었던 글입니다.(대선 전이었으니까 97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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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들어가는 말
불가능이 없는 예술, 불가능에 도전하는 예술. 나는 한국 정치를 단적으로 이렇게 표현한다. 수많은 정치인들이 동서양 고전을 무수히 인용하며 진흙탕 정치를 하다 결론을 내는 것.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키취 정신을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나쁜 예술은 항상 최고의 의도를 가진다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처럼 한국 정치는 최상 정치를 실현하기 위해 가장 나쁜 정치를 한다고 강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 정치가 정말 이런 구조일까? 그리고 이러한 구조가 어떻게 성립되었는가? 나는 이러한 구조를 알아 보고 현 사회가 일상과 정치를 분리시키지 않고 있는 데서 핵심을 찾아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자 한다.
1. 이마골로기 시대 혹은 이미지 정치 시대
독재정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무엇이든지 상명하달, 일방통행이다. 집단성과 획일성만이 존중되고 개인성과 다양성이 배타당한다. 쿠테타, 유신, 긴급조치, 군부통치, 앵무새 방송... 한때 이것이 우리가 아는 정치의 전부였다. 대통령에 대해 함부로 언급하면 끌려 갔다. 우리 일상 생활과 거리가 먼 어떤 것일 뿐이었다. 저항이 있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상과 먼 이야기였다. 학생 운동은 물론 야당 생활이 독립군 생활과 다름 없으니 일상과 격리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오랜 기간 이런 사회에 익숙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개인성과 다양성을 목마르게 기다리며 새로운 정치를 갈구하게 되었다. 프랑스 미테랑 14년 통치, 영국 보수당 18년 통치에 오랜 민주주의 훈련을 겪은 서구인들도 막상 정권이 바뀌자 잠시 혼란에 빠졌다고 한다. 우리도 꿈만 깊었지, 혼돈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김일성이 죽자 북한인들이 오열하듯 박정희 대통령이 죽자 오열한 것 외에 다른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리고 십수년이 다시 흘렀다. 그것은 언론플레이라는 말을 유행시키며 김영삼 대통령과 함께 찾아왔다. 투표로 선출한 국민에게 정통성을 부여받은 문민정부라는 수식어 만큼이나 김영삼 대통령은 초기 고작 30%대 지지율로 90%에 이르는 압도적인 국민 지지에 힘입어 개혁을 수행해 나간 것이다. 이 원동력은 다름 아닌 언론이었다. 미국 등 서구 국가에서는 예전부터 행정부, 사법부, 입법부에 이은 제 4부라고 불리는 언론의 힘이 막강했다.
선거 때부터 여론조사를 통해 정책개발한 뒤 반응을 살피고 당선 후 정책 결정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보통신사업의 초과 이윤이 한계에 다다를 것을 고려한 미국 경제 관계자들이 활황을 지속시키려 복제인간 논쟁을 일으켰다든가, 미국 우주선이 추락하여 탑승한 비행사들이 전원 사망한 사건 이후 예산 축소라는 치욕을 당한 NASA가 팍스 아메리카나 지속을 꿈꾸는 미국 정부 이해와 조응하여 패스파인더의 화성 탐사 보도를 했다는 시각은, 자유 언론의 상징이라는 미국 언론 또한 민중의 이해와는 무관하게 엘리뜨들의 이해를 관철시키는 것이라고 보는 입장에서 비롯된다. 이는 수많은 대규모 투자 대상 중 우선 순위를 결정지어야 하는 현대 국가에서 총자본이 안정적인 투자를 감행하기 위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설득력을 가진다. 따라서 김영삼 정부가 낮은 지지율 속에서도 강력한 개혁으로 역사에 남는 대통령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언론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언론의 위상이 정론직필이니 민중 이해의 대변자이니 하기 보다 국가 기구의 한 부분으로 자리매김되는 것은 필연적이겠다. 동시에 위상이 격상된 언론은 표면적으로 국가기구와 상충되기까지 하는 주장을 펼치게 된다. 이로써 두 가지 효과를 낳는다. 하나는 종전 언론에 비해 달라졌다는 효과, 다른 하나는 이를 통해 국가 기구가 언론을 통해 이전보다 효율적인 정책을 수행할 수 있다는 효과. 그리하여 가상적 독립을 실현한 언론은 실질적인 힘을 갖추게 되었다. 이제 이마골로기 정치 시대를 열게 된 셈이었다.
이데올로기가 법과 법형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갖춘 것이라면 이마골로기(IMAGE+IDEOLOGY=IMAGOLOGY; 졸저 해체:통일에서 포르노까지 참고)는 매체와 매체형식을 물질적 기반으로 갖춘 것이다. 가령 92년 초원복집 사건 폭로와 정치 공방, 그리고 여당의 승리는 지역주의도 큰 몫을 했지만 언론의 힘 또한 주요변수였다. 이는 기존처럼 축소보도는 물론이고 편집 기술을 적극 활용하면 민중 심리를 주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없다면 어려운 일이다. 현재 언론에서는 역설적이게도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 중요하지 않다. 영향력만이 중요하다. 기사가 실렸는가 안 실렸는가 보다 어느 쟁점이 일면톱을 장식하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아울러 지배계급에게 유리한 사안은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불리한 사안은 양비론적 시각을 견지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언론이 권력 주요기구화되었다는 점을 충분히 시사하고 있다. 최근 비자금 공방의 과정과 결론 또한 이러한 언론을 통한 압력이 결정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이마골로기 시대, 혹은 이미지 정치 시대에서는 사건들이 오로지 활자화된 것으로 나타나기에 사물들이 상품으로 교환되듯 기호 또한 교환된다. 결국 편집자가 사건들에서 이탈한 기호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가령 현실 지위와 무관하게 대통령과 축구감독은 동렬선상에서 취급된다. 이는 TV 매체를 본다면 더욱 확실해진다. TV는 기본적으로 모든 사물을 가까운 이웃이나 형제처럼 느끼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섬찟한 내용의 다큐멘터리는 다른 방송에서 나오는 오락 프로와 다를 바 없이 된다. 기껏 리모콘 채널의 차이일 따름이다. 우리에게 시청자가 뽑은 좋은 프로그램 여부와 관계없이, 내용과 관계없이 이는 우리에게 스타일만을 강조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스타일은 정형화된다. 참신하다, 부드럽다, 세련되었다, 똑똑하다 등등. 사실 여부와 관계없는 것이다. 대중들이 언론을 통하지 않으면 그가 탤런트건, 가수건, 정치인이건 그들 내면을 알 수 없다. 그가 연기를 하건, 쇼를 하건 그 이미지만 받아들일 뿐이다. 그리하여 축구감독이 대통령이 되고, 대통령이 축구감독이 된다. 현실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3. 마인드의 정치, 키치의 정치
우리는 흔히 주변에서 마인드(mind)를 거론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마인드란 사물을 생각하는 주체로서의 마음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런 뜻을 알고 쓰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특정 분야에 일가견이 있다 정도로 쓰이던 이 말이 확장되어 지금은 특정한 주체의 인생관, 사업관, 정치관이 되었다. '일주일만 하면 전유성처럼 한다'라는 책이 잘 팔렸던 함의는 다름 아닌 컴퓨터 마인드를 가진다는 의미였다. 즉 전유성처럼 하면 마인드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작 그러한 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말은 곧 유행되어 모든 영역에서 통용될 만큼 대히트를 쳤다. 심지어 내가 잠시 국회에 다닐 적에도 일주일만 하면 정치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사실 이 말은 어떤 분야에 충분한 경험과 이론을 갖춰야 가능한 말임을 새삼 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이마골로기 시대 특성인 스피드 경쟁이 가속화되가는 현대에서 살아남으려면 일주일이라는 시간이 더 매력적인 셈이다. 일주일 - 전유성 - 마인드라는 이러한 트라이앵글을 통해서 우리는 보편적인 시간을 획득하고, 특정 주체를 획득하면 마인드가 형성된다고 믿는 것이다. 마치 책을 사기만 해도 읽은 듯한 뿌듯한 감정이 생기듯이 말이다. 전시 효과. 이것이야말로 키치의 본령인 것이다. 여기에는 상상력이 개입된다. 바깥 사물과 사건을 자유롭고 인위적으로 형성할 수 있다.
다만 상상력만으로 효과를 낼 수 없다. 대인 관계에서 차별화되고 개성화되기 위한 욕망을 충족시키려면 상상력에다 새롭고 보편적인 의미를 상징적으로 부여해야 하는 것이다. 이는 전적으로 매체와 직결된다. 청소년 대상의 트랜드 드라마에서 주인공 탤런트가 인기를 끌면 그 즉시 시장에서 탤런트와 똑같은 옷이니 장신구가 불티나게 팔린다. 이를 소유하면 탤런트가 보여준 이미지를 소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판 마술의 신물이 아닐 수 없다. 사물이 지니고 있는 속성을 그대로 개성화시키는 이러한 노력은 그리 놀랄 만한 일이 아니다. 문학에서는 오래전부터 사용해왔던 표현이다. 패스티쉬는 신체의 일부, 혹은 신체를 둘러싼 장신구 등을 통해 원하는 대상을 소유하였다는 환상을 예술적으로 그려내는 수법이다. 만화나 최근 환상문학에서는 더욱 빈번히 사용된다. 가령 여자 팬티를 훔쳐 여성을 소유하고 있다는 포만감을 그린다는 것따위이다. 또한 우리는 과거에 향수를 느끼기 마련이다. 최근 거리로 나가 보니 '그때를 아십니까'란 체인식 주점이 생겨 인기를 끌고 있다. TV 매체에서 복고붐을 타고 나온 것을 본딴 것이다. 그럴 듯한 60년대 포스터, 원형 나무 탁자 등. 정겹고 친숙한 느낌이 일도록 갖은 애를 쓴 티가 난다. 그러면서도 새세대들 기호에 맞게 깨끗한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한다. 참신하면서도, 과거 향수를 일으키는 주점. 최근 벌어지고 있는 TV 토론을 보면 바로 이것, 키치 정치를 만날 수 있다.
4. 폭로 정치와 광고 정치
신문지상을 보면 하루에도 끊임없이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한국에 온 외신기자들 표현에 따르면 한국은 이 점에서 기자들의 천국이라고 말을 듣기까지 할 정도라고 한다. 웬만한 사건, 사고에는 무감각해질 수밖에 없다. 내일 무슨 일이 또 터질 지 모르니 어제 일에 연연할 수 없는 일. 게다가 사건, 사고가 났다 하면 연일 건국 이래의 사건, 단군 이래의 사고다. 급격한 현대사가 다 이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신문 일면톱 기사, TV 뉴스 첫 꼭지를 차지하려면 보통 일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가령 수개월 이상 노력, 정책 개발한 입법안을 발표했더라도 그날 하필 성수대교가 무너진다면 헛수고가 되는 셈이다. 국민의 관심을 전혀 끌지 못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일면 톱이 될 이슈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그 이슈는 긍정적인 것보다는 부정적인 것이고, 상대당의 비리 등을 폭로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업을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일이다. 신제품이 나오면 입소문이 도는데 긍정적인 내용보다 부정적인 내용이 스무배 가량 더 빨리 전파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입소문 시대가 지나갔다. 이마골로기 시대에서 절대적인 것은 TV이기 때문이다. 광고를 내면 금방 효과를 낸다. 그런데 이 광고 또한 광고끼리 치열한 경쟁을 해야 한다. 십수개가 연속적으로 등장하는 광고에서 시청자들에게 각인시킬려면 보다 자극적인, 보다 말초적인 광고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아이, 여자, 동물을 기본으로 제품 홍보를 하면 충분한 효과를 내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렇게 하니 키치의 본령인 차별화된 개성이 돋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장이 직접 나왔고, 그도 모자라 옷을 벗고 나왔다. 역사적 인물도 등장했다.
체육관 선거에서 벗어난 87년에는 아이를 안은 모습이면 충분했다. 하지만 지금은 촌스러운 방법일 뿐. 아무도 주목하지 않기에 모 후보는 급기야 비자금 폭로 정국에서 '혁명적 과업'이란 말을 썼다. 개혁도 아니고 혁명이라는 것이다. 왜 이런 말을 썼을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에서 개혁할 것이 산적해도 개혁이란 말이 너무 진부해졌기 때문이다. 광고에서는 연일 지금은 혁명중이라고 나오는데 개혁가지고서 TV 뉴스 첫 꼭지를 따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정말 혁명을 원하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다. 아울러 과장 광고도 돋보인다. 과장 광고란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게 뻥튀기하는 것이다. 왜 이럴 수밖에 없는가. 현실에서는 보통 서민이 일억원 만져 보기도 힘들지만 TV에서 보도된 엄청난 사건으로 일억원이 껌값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실감나게 표현하기 위해 샐러리맨들이 이십년을 벌어야 되는 돈이니 하는 것이다. 이젠 상황이 급박해지니 여야 가릴 것없이 모두 당리당략을 위해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진상은 무엇인가. 소비자가 광고에서 소개된 제품을 직접 써봐도 광고에서 주장하는 진실이 영원히 감추어지듯이 정치 폭로 또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5. 나오는 말
이마골로기 시대에서는 노조가 70일간 파업해도 눈길을 끌지 않는다. 노조가 사장을 납치하여 식칼 테러 위협해야 나올까. 그리하여 이미지 시대에는 헐리웃 영화처럼 돈, 섹스 스캔달이나 UFO 등 기이하고 잔인한 정치가 세련되게 진행된다. 이러한 책임을 과연 개별 정치가들에게만 물을 것인가. 그들도 유권자를 만나는 유일한 통로가 언론이나 마찬가지이니 기껏 매체의 노예일 따름이다. 대학 수석 입학자는 왜 하나 같이 전화기 붙들고 있을까. 모두 언론 전문가들의 지시탓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모든 것이 그들 마음에 있기에. 그리고 그 언론 전문가들을 고용한 사람들이 자본주의 사회를 지배하고 있고. 우리는 새우깡을 먹으면서 TV 시청하다 가끔 생의 가치를 느끼면 될 일이다. 하지만 몸부림치고 싶다면? 세상 꼴이 마음에 안 든다면? 대안? 마녀사냥, XX 죽이기 시대에서 사기꾼처럼 XX인 척하기로 버텨 봐? 연애를 잘 해야 정치적 감각도 늘어난다 확신하고 모든 일상을 예민하게 처리하는 것. 팬클럽에 가입하여 접근한 뒤 스타들을 배신하는 것. 도박판에 취하지 말고 사기꾼이 되어 끝내 돈 따는 것. 방법은? 매혹당하는 스스로를 까발리기. 학연, 지연, 혈연을 지양하고 새로운 인맥 만들기 전형을 보여주기. 회식 문화 등 기존 패권주의적, 관습적 폐단을 거부하고 수평적인 조직을 주체적으로 형성하기. 모든 경로를 통해 제도 언론을 끝없이 갈구기. 대항 언론은 물론 PC 통신 등 일상적인 공간에서 수동적 모니터 요원이기 보다 적극적이고 의식적으로 1인 신문 시대를 열어가기. 현장에서 생생한 정보를 신속하게 널리 알리기. 지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시 뛰어든 열정적인 자원봉사자들처럼 제도 언론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역할을 해내기. TV 앞에서 시청하는 데서 벗어나 언론의 주목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붉은 악마들처럼 진지한 응원 문화와 팬클럽을 건설해내어 3S 정책이니 하는 구태의연하고 탁상공론 비판을 넘어서서 한발짝 전진하기.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현실 경험이 풍부해야 한다는 점. 공허한 이론보다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 TV 이면의 참된 세상을 보는 것이 여전히 필요하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고통으로 아무도 믿지 못하는 이들이 많기에. TV 이면의 세상에 속한 이들이 역사의 전면으로 나올 때까지 큰 배짱으로 뛰어 다녀야 하는 것이 기본이 아니겠는가. 아무리 이 세계가 미친 듯 돌아가도 열악한 환경에서 진정 사람답게 살아보는 세상을 꿈꾸며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존재하기에.
새 시대는 도래하지 않았다 (1998.11)
이마골로기, 패러다임, 전위, 반문화
인드라
0 글을 시작하면서
과학적 이론을 실천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물음이 평생 따라 다닌다. "그대는 짱돌을 던지는 동시에 공부도 하오?" 주어진 목표가 있다면 아무런 회의 없이 되든, 안 되든 선량(?)하게 살 수 있으련만 과학적 이론을 실천하는 이들은 문제가 '해석이 아니라 변혁'이라는 점을 깨닫고 있기에 모순 속에서 다음 모순으로의 이행 때문에 몸부림을 친다. 문화 자체로는 어떤 것도 변화시킬 수 없다. 다만 문화 비판으로 변화를 실천하는 이들을 주목케 하고, 그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용기와 위안과 정당한 평가로써 함께 할 수는 있다. 따라서 문화 비판이라는 용어가 제 아무리 폼이 날 지라도 그 자체로는 무의미하며, 문화 비판을 '반문화'라고 새로 정의할 지라도 달라질 바는 없다. 이러한 의미의 연장에서 필자는 이 글에서 최근 중도주의가 제기한 쟁점들이 구닥다리 논의들로 무의미하며, 현실을 기만하는 것임을 막무가내로 이야기하고자 한다. 아울러 중도주의는 '진보의 가면'을 쓰고서 대중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신자유주의의 대변자로 공세를 취하며 이제까지의 정당한 노력들을 보수적이라고 단죄하는 구닥다리 코미디를 연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한다
이 글은 학술적 성격이 아니며, 시론적 성격도 아니며, 굳이 말하자면 '화장실 낙서'라고 할 수 있다. 그대가 용변을 보면서 신문, 책 따위나 낙서를 읽는 편안한 심정으로 이 글을 본다면 필자의 의도는 성공한 셈이다. 왜 필자는 편안함을 강조하는가. 자본의 세상이 말할 수 없이 엉터리이지만, 우익 논객조차도 과학적 이론이 이상적이나 과학적 이론을 따라가기에는 인간의 조건이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지만, 여전히 가치 법칙에서 벗어날 수 있는 현실적 조건 창출이 관건이지만, 그럴수록 개개인적으로 세상살이 자체에 희망을 느끼기보다 환멸부터 찾아오기 때문이다. 필자가 섣부른 희망을 말하여 용변을 보는 그대가 오바이트 일으킨다면 어쩌겠는가. 오바이트 일으키는 그대더러 '왜 그리 급한가'라며 '희망만이 사람이다'라고 감히 말할 위인이 아직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먼저 오바이트가 날 일이다. 과학적 이론을 관료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교조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과학적 이론을 '달면 삼키고 쓰면 내뱉는 식'으로 재구성론을 주창하는 수정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필자는 학회의 일원이 아니며, 교수가 아니며, 유학을 다녀오지도 않았다. 또한 과학적 이론을 개인의 출세 이데올로기로 전락시킨 기회주의자가 될 자격이 없는, 과학적 이론을 '불을 찾아 헤매는 불나비'처럼 무모하다고 말할 만큼 현세주의자가 되기에도 자격이 없는 필자는 '맹'이 아니며, '강단'이 아니며, '백두산 정기'가 아니며, 'IS'도 아니며, 대단한 직함의 '짱'을 맡은 일이 거의 없다. 그러한 필자가 감히 이러한 글을 쓴다는 것. 이조차 참여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자유로운(씨발! 니기미 자유?) 의견 개진이며, 민주 개혁의 성과이자 다양성의 일부이며, 이념과 사상을 떠난 자생적이고 인간적이고 젊고 새로운 시도라고 전혀 말할 수 없다. 오히려 필자는 이념과 사상을 떠난다느니, 뭐니 하는 말장난을 무진장 싫어하는 편이다. 필자는 이 글이 어떠한 의미도 없다고 자문자답한다. 그럼에도 만일 필자의 글을 기대하는 이가 있다면 차라리 창간호의 필자 글을 참고하거나, 그보다도 창간호 글의 원문을 참고할 것.
1 과학적 이론은 끝장났는가
소칼의 『지식 사기』 논쟁이 있었다. 97년 물리학 교수 소칼은 장 브르몽과 함께 지난 10월 초 책『지식 사기』를 통해 일부 프랑스 인문사회 과학자들이 자신들의 이론 정당화를 위해 자연 과학의 개념들을 잘 이해하지도 못하고서도 장식품으로 아무렇게나 사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또 이런 일도 있다. 1992년, 월간지 『피직스 투데이(Physics Today)』에 '힘든 시기(Hard Times)'라는 제목의 에세이가 실렸는데 물리학자 레오 카다노프는 이 글에서 물리학의 미래에 대해 "지금 우리는 마치 물리학자들 수의 감소, 줄어드는 지원금 그리고 사회적 평가의 하락을 막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혼란들은 어디에서 오며, 또 그 해답은 있는가. 과학적 이론이 아닌 논리는 가상의 논리이다. 문화는 상상이 춤추는 가상의 전쟁터이다. 인간은 상상을 할 수 있다. 상상하면서 이야기, 가설, 이론이 나왔고, 과학이 등장했다. 상상 중에 '특정한 상상', 즉 가상만이 채택되어 지배이데올로기가 되는데 이데올로기는 가상이 채택되는, 혹은 배제되는 과정이다. 이데올로기는 법과 법형식으로 피지배계급에서 나타나 학술적인 논리로 무장하여 마법사처럼 현실 권력을 장악한다. 한편 인간은 관념에서 물질로의 인식론적 전환을 거치면서 가상과 경험이 상호의존적 일치가 되는데 물질계에서 점차 인간계로까지 상상과 경험의 불일치를 극복해 온 과정이 바로 과학이었다. 이마골로기(imagology)는 가상의 가상의 논리, 즉 가상을 토대로 삼아 실재적 토대마저 무시하려는 강화된 이데올로기이다. 그간에는 발신자와 수신자 사이에서만 옳고, 그름만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인쇄매체가 민족국가 전 영역으로 보급되고, 다양한 대중매체가 그 자체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자 매체 자체가 위력을 발휘하게 되었다. 이마골로기는 자신의 본질인 이데올로기를 관철시키면서도 뛰어넘는다. 이데올로기가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가를 전제하면서 옳고, 그름의 가치 판단을 하였다면, 이마골로기는 얼마나 알려지는가 하는 것을 옳고, 그름의 잣대로 하여 권력 장악은 물론 권력 관리까지 한다. 이마골로기는 매체와 매체형식을 띠며, 이데올로기를 매체와 매체형식으로 변화시킨다.
아무리 학술적인 논리도 매체를 통해서는 요약되기 마련이며, 어떻게 요약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리하여 학술적인 논리가 아니라 매체적인 논리가 우위에 서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이데올로기의 보수성(반공 이데올로기)과 이마골로기의 급진성(신자유주의; 왈라스타인에 따르면, 1968년 이후 시기에 가장 보수적인 분파들이 1968년 혁명가들에 대한 대응을 정식화하고자 했을 때 그들은 스스로 '신자유주의자(neoliberals)'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이 과학적 이론을 배제시키는 것으로 귀결된다. 오늘날 이러한 상황은 지적으로 하향 평준화로 치닫고 있으며, 정신사적으로 명백히 퇴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면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21세기를 바라보는 우리는 19세기 인간보다 낫다고 말할 수 없으며, 어느 면에서는 그보다 못하다.
2. 낡고 부패한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둔갑하여 과학적 이론 자체를 무너뜨린다
'패러다임'이 전 세계를 '유령'인지, '유행'인지 떠돌고 있다. 그 '형태전환(Gestalt switch)'의 출발은 불분명하다. 다만 파산한 세계의 유일한 희망으로 준비된 술안주는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제 3의 길, 혹은 '인간화된 자본주의'라는 것. 과학적 이론 자체를 쓸모가 없다고 여기거나 귀찮다고 여겨 포기한 이들. 이들의 지루한 비판에 대해서는 캘리니코스가 『마르크스의 혁명적 사상』에서 말한 교양 수준 답변이면 충분하다. 그는 현존 사회주의 발생과 결과에 대해서는 "혁명은 불균등 결합 발전 과정의 결과로서 발생"하며, "자본주의 세계체제에서 차지하는 지위와 결합되어 있는, 특정 사회의 고유한 계급구조와 경제 발전상태로부터 발발"하며, 마르크스 이론을 "초역사적이라는 장점만을 가진 일반적인 역사철학 이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며, "소련에서 지배적인 생산양식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자본주의"였으며, 과학적 이론에 충실하다면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타도를 위해 진정으로 노력해야" 한다고 정리한다.
또한 현존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서방 은행들이 파산하는 사태는 틀림없이 1930년대 최악의 대공황보다 더 심각한 공황을 불러올 것"이며, "신용제도는 자본축적의 모순을 철폐하는 것이 아니라 지연시킬 뿐"이라는 마르크스 주장의 타당성을 강조했다. 아울러 더 이상 현존 자본주의는 자본주의가 아니다라든가, "노동자계급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노동자들이 자동차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는 사실" 같은 현상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 배후에 놓여 있는 사회 현실을 폭로"하는 것, 즉 "현대 자본주의에서 부와 권력의 분배라는 근본적인 문제와 대결"하는 "생산관계에서 차지하는 위치"에서 볼 것을 주장했다. 캘리니코스로는 성이 안 찬다면,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을 보라. 어디서 그따위 종말론을 들이밀 셈인가. 90년대 들어서도 '과학 괴담의 구조'는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역사상 과학적 이론을 무시했던 이들의 총합보다 더욱 많은 이들이 오늘날 이러한 만용을 부리고 있다. 이에 대해 대통령 임기 만료 전후 시점에서 급속도로 바뀌는 여론의 방향에 대하듯 새삼 놀랄 이유는 없다. 이 여론 '설명력'에 따르면, 모든 이론은 단지 관점의 차이라는 점에서 '확증'(?)되며, '결단'만이 현실을 대신하며, '세력화'야말로 진리일 뿐인 것이 오늘날의 이론의 위상이라는 것. 이러한 주장을 부정하는 자는 혼자 다 해먹으려는 '파쇼'의 본보기이며, 혼자 해먹던 것을 몇몇 이들이 땅따먹기 하는 것이 '다원주의자 처세술'이라는 것. 반독재, 반파쇼, 반제를 주장했었지만, 자신은 그간 단 한 번도 반자본주의는 아니었다고 고백하는 것. 아직도 계급이 있는가 반문하는 것. 아직도 좌파 타령이냐 비아냥거리는 것. 아직도 19세기 구닥다리 유물론에 심취했냐라는 것, 아직도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상화된 내면적 가치, 혹은 관념으로서만 소중하다는 것. 아직도 좌파 타령이냐 비아냥거리는 것. 아직도 19세기 구닥다리 유물론에 심취했냐라는 것, 아직도 사회주의는 인간의 이상화된 내면적 가치, 혹은 관념으로서만 소중하다는 것. 아직도(?) 마르크스 따위? 개인, 시민사회, 국가, 세계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잘 나신 하버마스식 대안! 소통! 합의! 문화?라는 동어반복적 개나발 만병통치약이 떠오른다는 것. 국가에서 시민사회로까지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이 아닌, 시민사회만 해바라기 한다는 것. 문화, 특히 대중문화를, 그리고 문화산업을 모르면 대중문화를 말할 수 없다는 것. 해방 이후 남한에서는 결코 낯설지 않은 공세일 뿐만 아니라 흡사 철의 규율처럼 맞아떨어지는 주장들이라 할 수 있다.
이론이 비록 끝없는 불충분성에 의해 제한될 지라도 합리적 추론과 경험적 관찰과 사회적 실천 - 쿤은 자신에 대해 포스트 다윈주의적 칸트 주의자라고 판단한다 - 을 통해 비로소 이론으로 인정받는다는 지위보다는 특정한 유세만을, 즉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에게서만 인정받을 뿐이라는 지위로 전락하게 만든 역사, 물리현상의 심리현상으로의 환원(관념론), 심리현상의 물리현상으로의 환원(기계론) 등 범주의 구별도 없이 마구 짜맞추기하는 역사를 돌이켜 본다면, 아울러 이러한 역사가 세계적인 현상의 극대화라 했을 때 쉽게 무시할 수만은 없다.. 엘렌 메익신즈 우드는 「세계화, 포스트모더니티, 그리고 또 한 번의 새 시대」라는 글에서 "60년대 대항문화의 주류"가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추동" 되었다거나, "90년대의 학문 풍토를 만드는 데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사람들이었다고 거짓 주장"을 해서는 안 될 것이라면서 "얼마전, 60년대 영국의 급진주의자였고 여전히 좌파에 남아있는 사람이" 쓴 글을 인용하길, "많은 60년대 급진주의자들이 내밀한 케인즈주의자(closet Keynesians)"였고, 그 의미는 "많은 사람들의 혁명적 수사가 실상은 혁명이나 사회주의에 관한 것이 아니었"고, "1945년의 약속(2차대전 이후 영국 노동당이 집권하면서 내건 약속)을 이행하라는 것"이었으며, "60년대 세대들은 거대한 개선에 대한 희망" 정도였을 뿐이라며 오늘날 좌파 내부의 고민을 솔직하게 토로했다. 군사 독재가 막을 내리고 50년만의 정권 교체가 된 이후 현재까지 진행된 역사 속에서 스스로 좌파라 여기는 일부 과거 전위들의 가슴을 찌를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상기한 진술이 보다 균열되고, 파괴적인 양태로 자리잡은 상황이 한국의 상황이다. 한국의 현재는 여전히 '황제'의 출현을 막을 길이 없으며 - 한국인이 모르는 것은 민주주의뿐이다 -, 신자유 경쟁의 신화는 끝이 없을 것이며 - 한국인이 아는 것은 복지가 아니라 복지부동뿐이다 -, 단지 '보나파르트'와 신자유 경쟁의 절묘한 결합을 설파하는 '제 3의 제국론'이라는 나폴레옹 지지자들, 특히 정치적 사태를 배후조종하는 푸셰 같은 작자들만이 경제 위기에도 배부른 특수를 - 한국인이 침묵한다면 뇌물 먹은 것이 틀림없다 - 구가할 따름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에 대해 과학적 이론은 '결정론(determinism)'이라는 낡고 지겨운 욕설을 무시하면서 관념이 아닌 물질에서 세계를 보는 인식적 출발점을 이룬 과학적 비판에 대해서 만 귀를 기울인다. 가령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자본주의적 생산의 자연법칙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적대관계의 발전 정도의 높고 낮음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법칙 자체, 곧 철의 필연성을 갖고 작용하며 자신을 관철해 가는 그 경향이 문제이다." 패러다임. 거칠게 말해 틀, 혹은 판. 토머스 쿤이 역학의 역사 강의를 제안 받고 그리스 시대의 역학까지 추적하다가 아리스토텔레스가 어찌하여 무지몽매하기 짝이 없는 물리론을 전개했는가 고민하다가 다르게 보았을 뿐이라는 통찰을 획득하여 1962년에 『과학혁명의 구조를 발표했는데, 이때부터 등장한 용어가 패러다임이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안경을 신념화하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신념화한 안경을 새로운 안경으로 '개종'하자, 다른 '성경'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사실은 변한 것이 없고, 단지 바뀐 것은 '성경'이라는 것이다. 그의 주장으로 본다면, 다만 상기한 모델이 하나의 모델에 불과하다라는 방법론적 상대주의를 통해 지나치게 고집스런 어떤 관행들을 과학계에서 비판했다는 점에서 유효하다고 할 수 있다는 것으로만 국한되리라. 그러나 그간의 과학적 성과를 고의적으로 오독했던 이들이 쿤적인 주장을 이용할 수 있게끔 쿤의 논의가 직관에 기댄 점 때문에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비판도 유효하다. 따라서 쿤의 논의뿐만 아니라 쿤에 대한 잘못된 대응 또한 과학적 이론과 현실 사이의 완벽한 단절을 극복할 수 없는 것이며 과학적 이론의 발전을 가로막는 일일 것이다. 잘못된 비판은 악무한만을 양산한다. 또 다른 악무한적 대응, 즉 최근의 전 지구적 위기에서 매체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준비된 기든스 원작, 블레어 각색 룰루랄라 리포트는 과학적 이론이 소멸하였다 한 뒤, 보수주의를 기초로 신자유주의적 시장 경제와 급진주의적 저널리즘의 결합을 제창한다. 이러한 논의는 자유주의자 왈라스타인이『자유주의 이후』에서 자유주의의 붕괴를 주창한 것보다 훨씬 후퇴한 것이다. 자본만 빼고 모든 걸 상대화시켜 어떤 모델이 한시적으로 유효하다는 것을 넘어서 그 유효성의 기준인 과학적 이론과 성과마저 부정하는 데까지 이르는 것. 그것은 다름 아닌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소시민적 중산층을 견인하고, 노동계급은 물론 중산층까지 실업자로 이끄는 절망적 사태를 무마시키려는 낡고 부패하지만, 저널리즘으로 새롭게 포장된 전략이 아닐 수 없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좌파를 겨냥하여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뒤안길에는 과학적 이론에 반대하기 위해 데리다를 이용하여 한 건 올리자는 우파 논객들이 철학 텍스트 내에서의 해체를 자본을 제외한 현실의 해체로 왜곡시키는 문화적 수사가 진행되기 일쑤였던 것이다. 역사는 끝났다며 자본 해체만 빼고 모든 것의 해체를 뻥치는 것. 그러한 알량한 해체를 해체하는 것이 해체의 기본이라는 적절한 일침에 대해 그들이 내세운 것이란 인간화된 중세적 자본주의 프로젝트를 무시하지 말라는 단말마 - 데리다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섣불리 규정하는 것보다는 데리다에 대한 과학적 비판이 선행한다고 할 수 있다 - . 과학적 이론을 스탈린 시대의 의사 과학(pseudo-science)으로만 규정하면서 자신들이야말로 신자유주의자들과 정면으로 싸우고 있는 과학적 이론임을 자임하는 것, 혹은 자신의 쓸모 없는 이론을 '보증 없는 이론'이라면서 비판에서 살짝 우회하는 것. 좌파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우파의 맹목적인 협박 정치가 횡행할 것이며, 반대로 우파에 대해서는 자신들을 지지하지 않는다면 좌파의 발호를 막을 수 없다라고 하는 초과학적 주장. 그러면서 등장한 지도자와 스타 논리. 이 모든 중용의 정치, 짬뽕의 정치는 제국주의 용병으로 알제리 민중을 압살시킨 프랑스 외인 부대가 어느 날 갑자기 지구를 지키는 세계 경찰로 남한 출판계에 데뷔한 사정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제는 중도파 시각이 너무나 강력한 대세여서 이제 중도파 외의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여진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그러한 주장 밑받침에서는 역사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비판적으로 성찰한 일면이 있기에 수긍이 가기도 한다. 아서 케슬러가 『야누스』에서 말한 바, 인간의 두뇌가 파충류와 말과 같은 수천 년간 거의 변하지 않은 원시두뇌도 아울러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때로 이성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야만적인 작태를 일삼은 역사적 선례로 엄연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쿤적인 안경을 또 다른 안경으로도 얼마든지 바꿀 수 있듯이 중도파의 안경 또한 임기응변용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그들이 주장한 논거가 자신만의 확신이 아닌 객관적이라는 근거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보증 없는 이론'이라고 말했다는 것 자체가 과학적 이론의 예측력을 인정하면서도 배제하려 애쓰는 것 다름 아닐 것이다. 더 내밀하게 들어가자면, 그들이 제시한 문제제기 이면에는 과학적 이론에 대한 두려움이 헤겔에서 멈추는 '또라이들만의 리그'가 있다. 정작 문제는 실천의 이론 의존성보다 여전히 이론의 실천 의존성이 현실이라않고서는 불가능한, 즉 기든스가 후쿠야마와 하버마스 사이에서 교묘한 줄타기를 한다는 점이다. 쿤이 말한 대로 과학이 단지 관점을 다르게 보며 발전할 수 있겠지만, 충분조건은 아닌 셈이다. 관점을 다르게 볼 수 있게 한 것은 이론의 실천 의존성에 근거한 과학적 발전이 밑바탕을 이루었기에 가능하였으며, 그것이 검증이든, 반증이든, 비판이든, 사회적 실천이든 자연과학이라면 합리적 추론과 실험과 관측으로, 인간학이라면 비판적 성찰과 사회적 실천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것은 캘리니코스의 말마따나 "과학적 이론이 진리와 얼마나 가까운지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이론이 내놓은 예측을 실제로 발생한 사태와 비교"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 과학적 이론은 여전히 유효하며, 이데올로기에 대해 상대화될 수 없다는 점이다. 쿤의 지적 가운데 유효했던 것은 그간의 단편적인 이분법만의 전략보다는 더욱 더 섬세한 전략이 요청된다는 것이며, 지금까지 거둔 미미한 과학적 성과에 비한다면 엄청나기 그지없는 과학적 과제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는 것이지, "이제 검증이 파괴되었다", "실천은 의미 없다", "더 이상 과학이 무의미하다"라고 볼 수 없다. 그것은 한 번은 냉전이라는 비극으로, 한 번은 세계화라는 희극으로, 한 번은 네 멋대로 해라라는 비극으로, 한 번은 엄숙주의 타파라는 희극으로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변혁적 유령에서 변혁적인 척하는 유행으로 바꾸어야만 하는 형태 전환을 감행하는 세계의 위기 속에서 낡고 부패한 패러다임이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둔갑하여 과학적 이론을 무너뜨리려는 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3 전위의 이름으로 엄숙주의 타파를 급진하라?
망원경/현미경으로 보기, 뒤돌아보기, 삐딱하게 보기, 상하수도 구멍으로 보기 등 갖가지 보기들이 그 무엇을 말하건, 자신의 썰을 섣불리 이론이라 하지 않으며 각자 밥벌이를 신경을 쓴다면 그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관념론과 기계론이 맞부딪쳐 소용돌이치면서 가치 문제가 더욱 부각됨에도 과거와 전혀 다를 바 없이 굴러가고 있다. 한쪽에서는 모든 문제를 관념론에 환원시켜 주사파 교리처럼 윤리 교과서로 만든 뒤 중용이라는 뚱딴지같은 궤변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장담하고, 다른 한편에서는 헤지펀드의 비극을 몸소 체험하기 위해 모든 문제를 기계론에 환원시켜 부익부 빈익빈에 무조건 맡기자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들 관념론자와 기계론자들이 연대하여 헤지펀드와 재벌의 도덕 교과서, 혹은 문화산업의 총아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그들이 세상을 다 본 것이 아닌데 유일한 희망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들이 전위로 나서는 것이다.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 이는 1794년 피레네 동부군 전위대 잡지에서 나타난 '전위'란 잡지의 표어이다. 이 잡지는 쟈코뱅 이념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전위. 혹은 아방가르드. 전투성을 논외로 하고서는 논의가 불가능한 개념. 전통에 대한 완벽한 거부, 임박한 혁명에 대한 가차없는 실천, 미래에 대한 굳은 낙관, 혁명적 낭만주의와 메시아주의와 진화주의적 태도의 삼위일체. 자신이 오늘부터 전위라 여기면 전위이거나 매체에 등장하면 개나 소나 전위인 것. (요즘은 난 전위가 아니다라는 전위주의가 유행이다. 그러나 전위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만 관계한다) 생시몽에 따르면, 전위의 지위로 예술가, 철학자(과학자), 산업자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플라톤주의의 후예가 전위가 아닐까. 특히 요즘 전위는 대중 문화계의 급진주의에서 찾아진다. 엄격한 규율, 군대 조직, 명령 체계가 확고한 상명하복 대신 엄격한 매니지먼트, 꽉 짜여진 문화 권력망, 잘 나가는 평론가로 운명지어진 이들 전위들은 과거의 혁명 대신에 스타를 향해 진군하고 있다. 이러한 전위는 사적인 생활 없이 오로지 공적인 생활(매체 출현)에만 몰두해야만 한다. 과거 전위의 유일한 적이 무지였다면, 오늘날 전위의 유일한 적은 유행에 대한 둔감이리라. 획일적인 개성 쇼가 연출되고 있는 현재에서도 어디까지나 개인은 주체로서 나서지 않는다.
다만 집단과 지도자가 팬과 스타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전위는 자신이 엘리트이면서 반엘리트주의적 대표성을 지닌다는 점에서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계기인 르네상스, 인간의 부활이 일단락이 되는 순간 전위 개념 또한 소비, 또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누구나 스타가 될 수 있다면 아마도 40억의 작가주의만이 등장할 터이니까. 전위를 갈망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전위가 자기 앞에 나타나 현세의 신화들을 가차없이 파괴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하여 나선 것이 엄숙주의 타파이다. 엄숙주의 타파 슬로건으로 대상에 대한 공격은 무자비하기 그지없다. 그런데 그 주체는 동화 속의 왕자나 공주처럼 신비롭기만 하다. 존 호건은『과학의 종말』에서 "반어적 과학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인간의 이런 부정적 능력에 기여한다는 점이다. 답할 수 없는 물음을 제기함으로써, 반어적 과학은 우리들의 모든 지식이 반쪽짜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리고 우리들의 지식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가르쳐준다. 그러나 반어적 과학은 지식 그 자체에는 중요한 기여를 하지 않는다. 따라서 반어적 과학은 전통적인 의미에 비추어볼 때 과학보다는 문학비평이나 철학에 더 가까운 셈이다."라고 말한다. 과거 팔십 년대의 일부 운동권과 대학생들, 또는 과거 68혁명세대들이, 홍위병 세대들이 정작 부정해야 했을 과제란, 과거의 투사들처럼 소비에트를 넘어선 일시적 장치를 영구적 장치로 과학화(?)했던 것을 '나는 나를 파괴할 수 있다'면서 가차없이 부정하는 것이 진실로 그들의 목표를 실현하는 아닐까. 그러한 과제의 실패로 스스로를 제 3세계 민족과 민중을 넘어선 산맥이라 자칭한 그들이 노동자들을 타락시킨 공범 중의 하나로 오늘날 스탈린판 서구 민족주의적 좌파로 서구 사회 권력을 차지한 것이 아닐까. 자신 안의 끝없이 분출하는 형이상학에 고개 숙이며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동시에 옷만 바꿔 입은 권위주의를 갈망하는, 엄숙주의 타파라는 과학(?)만큼 자신의 지위를 더 이상 훌륭하고도 우스꽝스럽게 설명할 수 없는 그러한 반쪼가리의 좌절과 실패, 다른 말로 갈 길 가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전위의 이름으로 등장한 이들이 팔십 년대, 혹은 문화혁명을 펑크적으로 비판하지만, 비판하는 전위의 모습을 보자면 독버섯처럼 자라나는 시장경제형 홍위병 스타들이다.
인쇄술의 발달이 전기 테크놀러지의 발달로 속도를 더해감으로써 완벽한 중앙집중을 이루어낸 것이다. 그 결과 지적인 상대주의가 현대를 뒤덮자마자 전위도 키치나 아니면 언더그라운드로 투사되었다. 하지만 형이상학이 죽은 것은 아니다. 어차피 미국에 대해 한국적인 모든 것이 비주류이니 서태지도 비주류며, 유럽영화 모두 언더그라운드인 셈이다. 그리하여 1등이 아니고 3등 이하도 아닌 2등이 이제 목표다. 명칭이야 어떠하든 자본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상대화하면 만인 대 만인의 주류이자 비주류 싸움이라는 악무한만 양산되고 결국 자본의 편에 선 자신만을 만나게 된다. 영국영화 <트레인스포팅>에서 보듯 침체된 영국영화의 활로를 헐리웃영화의 틈새시장을 찾다가 뤽 베송처럼 헐리웃에 저항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이다라면서 투항하는 것으로 끝나는 결말. 역시 일본만화영화도 마찬가지이다. 락이나 재즈? 홍대, 서울대, 대학로로 이어지는 라이브와 잠실경기장과 세종문화회관과 예술의 전당 라이브의 차이(요즘 예술의 전당 오디션도 재미만 있으면 된다고 한다)? 몽마르뜨나 세계의 젊은 거리나 대학로나 가봐야 개판인데 무슨 엿 같은 낭만인가? 철저한 매니지먼트로 틈새시장을 노리는 것일 뿐. 얼어죽을 작가주의? 좀 떴다고 후배들 앞에서 한턱내고 패거리나 만들어 거드름 피우기나 하는 것이 작가주의이던가. 뭘 알고서 작가주의 떠드나? 마지막 단물을 빨 듯 자본이 결국 언더그라운드 주인공이 된다. 언제부터 언더그라운드인가. 그 또한 유행이 아니던가. 모두들 똑같은 평론으로 옷을 갈아입고서 똑같이 염색하고 똑같은 지랄을 하며 신흥종교 부흥회 같은 딸딸이를 만끽하는 것이라면... 절대 영화화되지 않는 소설을 쓰겠다던 밀란 쿤데라의 작품들이 정작 영화 만들기 딱 좋은 역설, 똥잎이라는 간판만으로 웬만한 작품이 누려보지 못한 호사를 언론에서 누리는 역설. 아무도 가지 않아 멋졌던 여행지가 모험가들의 손에 닿자마자 관광객이 밀려들어 싸구려 관광품이 된다는 역설. 물론 그 다음에는 라스베가스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MBA 출신 스텝들이 기획한 최고급 호텔이 들어서리라. 자본의 사이클 곡선. 자본의 이윤율을 회복하고자, 경기를 타고자, 돈만 된다면 개떼처럼 몰려드는 몸부림. 돈이 되지 않는다면 자본이 왜 관심을 가지겠는가. 순간은 분명 아름답지만 자본이 모두를 삼킬 따름이다. 이미 서태지는 모범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에 훌륭한 버팀목이 되는 단일한 슬로건. 엄숙주의 타파. 그래, 이 좆만한 나라에서는 말만 멋진 지랄들이 무수하다. 만일 이 시대에도 여전히 전위가 요구된다면, 수많은 후위들은 팔십 년대처럼 엄격하게 그들의 전위 자격을 요구하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힘겨운 싸움에서 살아 있어라.' 제 3의 길 주창자, 기든스가『좌파와 우파를 넘어서』에서 "마르크스가 말했던, 인간이 진정한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향한 급진주의자들의 희망은 한탄 공허한 망상으로 드러난 듯하다."라고 조소할 때, 필자는 알튀세리안이 아니더라도 - 알튀세르와 하버마스에 대해 과학적 이론을 재구성하여 헤겔로 회귀하는 강단주의에 대한 코바르치크의 비판, 특히 알튀세르가 그람시의 실천력을 과소평가한 것을 비판한 문제제기에 필자는 동의한다 - 알튀세르의 "나는 지성의 회의주의와 의지의 낙관주의라는 그람시가 인용한 소렐의 말에 결코 찬성하지 않는다. 나는 역사에서 의지주의를 믿지 않는다. 그 대신 나는 지성의 명철함을 믿으며, 또 지성에 대한 대중운동들의 우위를 믿는다."를 떠올린다. 남들(기든스들)이 하니까 나도 그러하다는 말보다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부터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반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대중운동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예나 지금이나 전위들은 서둘러 마르크스와 결별을 선언하고, 사회주의와도 안녕하고, 다만 기든스식 급진주의만을 채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유행이니까.
4 현실은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포함한 미로다
"현재 미국 등 서구에서는 중심 논의 자체가 파쇼적이라 탈중심론이 대두되는데, 68년 이후로 30년이나 지났는데, 인터넷도 접속 안 하냐, IMF인데"라고 반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화의 미끼'이다. 밀레니엄 새 천년의 시작인 21세기도 세계 패권을 쥔 국가들, 특히 미국이 전 세계 계급들에게 가상적 자유의 문제를 대중문화의 파급으로 세뇌시키면서 각개약진을 주문할 여유를 부릴 지라도 바로 그러한 여유를 제공하기 위해 한국의 노동자들은 임금 삭감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관념적 연장에서 여유를 부릴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부르죠아적 취미, 또는 거품이라고 간주할 수 있다. 이 거품이란 대다수 노동자들이 노동자이면서 관념적으로는 자신을 중산층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과 같이 관념적 여유 자체를 부정한다면, 필연적으로 평소에는 중산층의 일원이라고 생각하다가 퇴출 위기 때만 노동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의 반발이 야기될 수밖에 없다.
그러한 그들이 지금 IMF다 해서 다소 의식적이 된 것이 사실이나, 세계에 공황이 닥친다고 종말이 오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계급투쟁이 보다 격화될 것이 분명한 동시에 시기가 지나면 그들은 다시 이미 주류인 대중문화=문화산업의 거품 중산 언더그라운드문화(?)에 도취될 것이다. 한국인들은 한국에서 살더라도 미국 비버리힐즈에서 노는 꼴을 각종 정보를 통해 보았다. 그런데 이러한 배경은 민중의 일상생활에서 경제비중이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그만큼 문화비중이 증대한 데서 나온 토대를 필요로 한다. 단적으로 말해 노동시간 단축에서 비롯된다. 이때 노동시간 단축은 자는 시간 빼고 일하는 시간에서 노는 시간이 약간 생겼다. 이는 노동계급의 투쟁을 제한시킨 데서 나온 지배계급의 '분리한 후에 통제하라' 전술이다. 이러한 욕구의 민주주의론은 이에 상응한 논의로 분산된다. 그러하니 종전처럼 수직적 연대를 말해 봐야 이런 답변이 나올 것이 뻔하다. "나는 지배계급의 농간에도 질렸고, 또한 너희 농간에도 질렸다. 그러하니 내 살 길이나 도모하련다. 용꼬리가 되느니 뱀 머리가 되겠다." 한국의 좌파가 최소한 서구 좌파의 위치에 있다면 상기한 답변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지도 모른다. 싸움이 이토록 지저분하게 연결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데 실체는 없고, 비난받을 때만 있는 것이 좌파 아닌가. 민족주의적인 것이든, 국제주의적인 것이든 '파시즘이냐, 미국의 노예이냐'라는 정신 분열적 양자택일 상황에서 좌파가 들러리만 될 따름인 한국에서 현재 다만 분리된 무산계급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하니 연대가 필요하다. 대중문화를 공격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문화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여성운동이 공격당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여성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노동운동이 공격당한다면 무산계급적이지 않은 노동귀족이 공격 대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조차도 아직은 허울뿐인 슬로건에 불과하다. 왜 그러한가. "너희가 그렇듯 즐길 수 있는 까닭은 투쟁 역량이 부족하지만 이 사회에서 너희가 발언할 수 있을 정도로 투쟁했기 때문이다. 너희 대학선배들이 교련반대 투쟁을 해서 너희들이 학교에서 교련수업 같은 군사문화를 접하지 않은 것이야. 너희의 주장 가장 대척점에 있는 그 문화를 반대했기에 너희는 그런 군사문화를 접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지. 그만큼 너희는 순수할 수 있었어.
하지만 우리는 그런 투쟁의 과정에 있었기에, 그 결과의 혜택이란 너희보다 더 타락했다는 말만을 들었을 따름이다. " "싫은 건 싫은 거야. 너희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건, 너희가 그때 그러한 군사문화를 싫어했듯이, 오늘날 우리가 싫어하는 건 군사문화 같은 너희들이야. 그때의 과제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고 강짜부리지 마. 게다가 그걸 보상받겠다는 너희들 태도에 질렸어. 우리가 너희에게 빚을 졌지만, 보상하겠다고 맨날 네 놈들 자지에 똥구멍을 대줘야 하나? 우리가 당신들 똥구멍에 자지를 들이밀었기에 빚이 있는 게 아닌 한, 우리가 빚을 갚는 방법까지 너희에게 맡길 수는 없어. 하여간 너희가 다 하겠다는 발상만큼은 집어쳐. 우리 문제는 우리가 알아서 해." 양 입장들은 서로 공생 관계를 이룬 듯이 보인다. 한 쪽은 십대, 이십대 젊은이들을 사로잡고 있지만 운동성으로 포장해야 한다는걸 절감한다. 가령 사회적 이슈로 타이틀곡을 내놓은 뒤 아이돌 스타들답게 예쁜 노래로 흥행한다는 것. 다른 한 쪽은 비록 상처받은 운동성이지만 그간 해놓은 것들로 간신히 꾸려갈 만큼은 된다. 하지만 십대, 이십대 젊은이들을 사로잡을 여력과 매력이 없다. 그리하여 둘 다 네가 잘 났니, 내가 잘 났니 하며 '손호철 대 강영희' 따위 개싸움을 하지만 도토리 키재기가 아닐까. 특정 분야만을 두고 저항이네, 뭐네 이야기하는 것도 난센스가 된 지 오래이지 않을까. 가상의 추억일 따름이다. 동시에 둘 다 어떠한 실천력을 보여주지 않고, 다만 자신의 실패담만을 지겹게 재탕하며 영사기를 돌리고 있다는 것. 그리하여 나오는 말이란 '씨발 놈들!'. 그렇다면 무엇을 할 것인가. 낡은 것일지라도 오래 익을수록 더 진가가 발휘되는 우리의 훌륭한 술친구인 체르니쳬프스키는 말한다. "인간학적 분석에 따르면 노동은 오락과 휴식, 기분전환, 즐거움 같은 여러 운동형태의 기초가 되고 내용이 되는 근본적인 운동형태이기 때문이야. 다른 여러 운동형태는 노동이 선행되지 않으면 현실성을 갖지 못해. 게다가 운동이 없으면 생활, 즉 현실이 없어" 노동자의 공장생활이 아무리 모든 경제활동의 출발이라고 할 지라도 노동자가 그것만으로 생활하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도 노는 시간이 있으며, 자는 시간이 있다. 당신들이 노는 문화(가출했다 요즘 컴백홈하는 지식인 문화)를 선도하기 위해서 당신들 주변 사람들은 좆빠지게 일한 돈 중 일부를 당신들 잘 놀라고 갖다 바치고 있다.
그들이 놀 시간을 절약해서 그대들에게 바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라고 놀고 싶지 않겠는가? 그들이라고 군대가고 싶어서 갔겠는가? 당신들이 좆나게 놀 시간과 좆같이 문화생활의 선도자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학력 자본, 정보 자본을 획득할 시간에 그들은 쓸 데 없이 휴전선에서 지켰을 따름이다. 그러하니 노동귀족, 문화귀족들은 후위에서 머리 뽀개는 이들을 명심하고 자신들의 알량한 지위를 지키기보다는 의무적으로라도 후위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당신들보다 더 고생하는 이 수도 없다. 게다가 고생한다고 당신들처럼 누가 알아주지도 않는다. 반문화, 비주류문화, 독립문화, 소수자문화, 하위문화 등 모두 그 자체 변혁되어야 할 산물이다. 그것이 한국이라는 곳에 있는 한, 어떤 이름으로 불리건, 그 또한 과거로부터 지겹게 내려온 관념상의 연장물일 따름이다. 하지만 이런 논의 자체가 다 강요라면, 할 필요 없는 것이다. 그러하니 하고 싶은 것만 한다면서 맘대로 노는 놈은 계속 놀면 그만이다. 다른 한편, 과거의 투쟁 역량이자 오늘날의 회고담으로 남아 있는 관념상의 운동가들은 육이오식 '그때 그 시절' 타령이나 하고 있을 따름이다. 뭐 하자고 하면, "이제 지쳤어! 자신 없어!" 가 고작이다. 그러다가 "내가 과거에는 말이야" 타령을 한다. 여성운동이, 동성애운동, 기타 문화운동(?)이 구십 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팔십 년대 말에 제기되었던 대중성, 수용성이 문제라며 대중(자본? TV?)이 좋아하는 것이면 다 좋다 식으로 나아가지 않는가. 이미 쓰라린 경험과 파쇼적인 행태를 벌인 그대들이 이러한 사정을 모를 리가 없기에 "거 봐라"며 냉소를 보내기만 한다. 구체적인 현실에서 변화를 읽어내는 것이 이마골로기, 패러다임, 전위, 반문화를 변화시키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상징만 요란한 바리케이트에는 과거를 추억하는 가상만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반성은 없고, 다들 당했다는 소리밖에 없다. 그리고 술자리에서는 여전히 십수 년 전과 똑같이 '출세를 위한 패거리적 단결과 적에 대한 뒷다마라는 지난한 노력을 다 하는 것이다. 당신이 안심할 수 있을 만큼의 끝없는 변명이 다 실패로 돌아간 후 할 수 있는 마지막 말을 떠올려라. 아이들의 눈으로, 자연에 더욱 겸허해라. 자신의 하찮은 창작 성과와 조잡한 연구 성과를 뻥튀기 해봐야 결국 돌아오는 것은 회한뿐이다. 그러니 다시 묻자. '그대는 짱돌도 던지면서 공부도 하오?' 만일 인류의 모든 쓰라린 실패가 여전히 전적으로 과학적 이론의 탓이라면, 그리고 당신이 아직도 과학적 이론이 누군가에 의해 독점되거나 사유되었다고 판단한다면, 새 시대는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21세기에는 촛불잔치를 벌려보자
인드라(1999)
미래는 희망적인가. 이처럼 형이상학적 질문을 던지는 까닭이 있다면 아마도 현재를 참을 수 없기 때문이리라. 견딜 수 있다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위해 품은 분노를 미룰 수 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는 대안이 없는 글을 읽을 수는 있어도 대안을 포기한 글을 죽어도 읽을 수 없다고 말한다. "미래가 없다면 현재를 변화시킬 수 없고 주체도 없다는 것. 꿈을 가진 이들만이 미래의 주인이라는 것. 장엄숭고한 꿈이 있지만 밋밋해서 싫다. 대신 유치찬란하지만 야무진 꿈도 있다. 비장한 꿈꾸기가 수월치 않으니 미뤄 두고 재미난 꿈꾸기나 하자." 거대 담론 관점에서는 시시하기 짝이 없지만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상당한 '잔잔한 일상'을 파고들어 생산적 무정부주의로 혁명적 전복을 준비하자던 이들의 말로 기억된다. 하수상하게 막 나가보았던 십년 세월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배째라는 몇몇 이들의 항변이 아닌 구십년대 거의 모든 이들의 항변이었기에 이들의 B.J.R도 거품 흐름에 슬쩍 무임승차한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대가는 혹독했다. 경제환란이 닥치자 이들만 이지메당했으니 흡사 민중에게만 고통분담시켜서 위기를 모면하려는 현 정권의 얄팍한 술수와도 일맥상통한 듯이 보인다. 근래에 참여연대가 반성적 고백을 하였고, 한겨레가 창간 축하 특집을 각계 한겨레 비판으로 기획했다. 역대 정권과 차별없는 현 정권과 당신들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라는 준열한 질문. 바로 이것이 구십년대 우리들이 지속적으로 회피하고 싶었고, 누군가는 끝내 회피하지 못하였고, 또 누군가는 다행스럽게 지연시킬 수 있었을 질문이다. 이 글은 이렇듯 질문을 회피했거나 지연시킨 이들이 고민 끝에 내놓았을만한 대안없는 결론에 대해 두서없이 읊조림을 해보면서 21세기를 목전에 둔 1999년 오늘을 점검하자는 것이다. 현재 돌아가는 긴급 현안에 대해 명망있는 사회연구단체에서 나온 구체적인 통계 수치를 들어 세기말과 밀레니엄 시대 실상을 대안없이 드러낼 수도 있겠지만, 이 글은 그보다는 그러한 대안이 없는 대안, 숨겨진 대안에 대해 간략한 단상을 드러내보고 자 하는 데에 있다.
실천. 이론에 적대적인 한, 동원력만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의 주요한 사건에는 디자인, 혹은 기획이 있었다. 이론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지만, 이론에 적대적인 동원력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아직도 이념 타령인가 하지만 이념의 과잉과 종말 주장의 근원지는 이론에 적대적인 동원력의 이념이었다. 더군다나 한국에서는 이념의 과잉이 문제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이념의 결핍만이 문제였다. 기득권자들도 이유야 어찌 되었든 이념의 부재, 정책의 부재를 자기 비판하는데 민중 진영 또한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실천을 중시한다지만 면책을 자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세계적인 투쟁력을 갖춘 민중세력의 주체적인 역사적 맥락으로 보아도 이념적, 정책적 부재로 인한 교조와 물신숭배현상으로까지 보이는 동원력 정치가 걸림돌이었지, 이념과 정책 그 자체가 문제인 적은 없었다. 오히려 여전히 요구되는 것은 라쌀레의 노동자조직에서 발전한 독일 노동자조직이 십년이 지나서 맑스적 방법론을 채택한 것과 흡사한 강령의 문제이며, 현재의 분열상 그 자체이겠다. 여기에 부가한다면 지난 20세기 내내 쓰라린 식민지 시대 유산과 냉전에 이은 분단에 기인한 변방의 사투리들이 저마다 표준어를 자임한다는 것. 그런데 부가된 문제임에도 우리 것이라는 환상 속에서 냉전을 거슬러, 식민지 시대를 거슬러 후천개벽 '상생(相生)'의 동학을 현재 시점으로 번역하여 미래의 대안이라 제시한다면 문제가 아닐까. '아, 고구려'식을 버전업시킨 또 하나의 사투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상생의 시대'가 도래한다는데 새천년 밀레니엄의 대항군이라는데 정말 도래할까. 아니면 전처럼 무늬만 그럴싸할까? 왜 사생(死生), 혹은 상사(相死)의 시대는 안 될까. 죽을 놈 죽고, 살 놈 살아야 하는 것, 혹은 이렇게 사느니 구차하게 살지 말고 다 같이 죽자가 지난 삼십년간 끈질기게 남은 문제가 아닐는지. 현재를 바로잡고자 현재의 뿌리를 추적하는 작업은 온당하지만 발생하는 현재에 애써 관조하며 뒤돌아보는 공동체이어야만 한다면 과거의 공동체이지, 미래의 공동체는 아닐 것이다. 역사적인 악취덩어리가 한국 사회 특정 계급계층을 집중적으로 폭격하였다면 이 모든 것을 몽땅 들이마신 현재의 특정 계급계층이 사회로 투사하는 시선에서 찾을 일이다. 또한 아무리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사건이자 계기라고는 하지만 조선시대 사회구조에서 등장한 계급대립의 한 측면만을 볼 뿐 아니라 전봉준을 분리시킨 이념을 대안으로 제시함은 경직되어도 한참 경직된 또 하나의 스탈린주의, 즉 상사(相死)의 원리를 내재한 것이 아닌가. 무릇 이념의 진원지는 사회계급간 관계에서 나와 이념간 상호작용은 필연적이며 불가피한 투쟁으로 연결됨이니 곰삭은 교훈을 계승하 건 뜻 깊은 일이다. 그러나 역사발전의 결과로 편협한 현실들의 투쟁을 마구잡이 상생시킨다면 가치관의 혼란은 극에 달할 것이다. 상생의 동학이 공자 가라사대 성인군자들만의 조화가 된다면, 박정희의 동학, 전두환의 동학, 현 정권의 동학이 된다면, 심지어 민중진영의 동학으로까지 치켜세워진다면 한국에서 이념 논쟁은 할 필요없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이념 논쟁이 빨갱이론 따위의 수동적인 양식으로 사건의 본말을 전도시켜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이념 논쟁은 신자유주의처럼 적극적인 양식으로 기득권을 강화시켜주는 것일 터이니까 말이다. 하기는 레닌 시대조차도 주류 철학은 신칸트주의였다는데... 차라리 필자는 소인배 틈에 끼어 민(民)을 잘 부려 먹어 태평성대했다는 요순시절을 비웃는 길을 택하련다.
1999년 세기말. 니체는 일찍이 다수를 가축떼라 갈파하고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넘어선 초인 을 주창한 바 있다. 20세기 초반에는 파시즘의 이념적 저수지를 맡았지만 오래된 습관은 끈질기게 남아 현존 사회주의의 붕괴와 강자의 논리가 진리인 팍스 아메리카나가 도래하여 다시 19세기로 제국주의 땅따먹기 시대로 돌아간 듯 하자 마치 대안처럼 구십년대 화두 말미를 넘어 21세기 교과서를 노리고 있는 듯하다. 이름하여 소수 정치론. 필자는 소수 정치론이 기실 다수 정치를 내재하면서 배제하는 척하는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헤게모니적 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결국 기득권의 쌍생아처럼 한국에서 자리잡고 있는가 하고 의문을 던진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 편에 나타난 19세기 진단을 보자면 "19세기는 더 한층 동물적이다. 보다 지하적이고 보다 추하며, 보다 현실주의적이고 보다 천민적이며, 바로 이 때문에 보다 선량하고 보다 신실하며, 모든 종류의 현실에 의해 굴복하며, 보다 진실하다. 그러나 의지박약하며, 하지만 애처롭고 암흑을 좋아하며, 그러나 숙명론적이다. 이성도 심정도 겁내거나 공경하지 않으며, 욕망의 지배를 깊이 확신하고 있다... 도덕조차 하나의 본능에로 환원된다" 아직 다수가 다수다운 적이 없었음에도 추악한 속물주의(스노비즘)만이 판치는 한국사회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이 지적하는 듯도 하다. 이 지적은 아무래도 푸코의 21세기는 들뢰즈의 시대일 것이라는 언급에서 계보를 찾을 일인가. 이왕 하는 차이의 정치라면 데리다에서 찾을 일이다. 마이클 라이언은 논쟁적이고 놀랄만한 저서인 『해체론과 변증법』에서 "데리다가 프랑스 지성계에 등장하기 전에 나온 프랑스 사상가들의 저서와, 데리다를 알게 된 직후에 나온 그들의 저서를 비교해보기만 해도" 알 정도로 데리다가 들뢰즈의 리좀론에서 푸코의 권력의 미시물리학에 이르기까지 프랑스 지성계에 끼친 영향력이 명백하다고 말한다. 보통 해체론을 미국쪽의 포스트모더니즘과 연관시키지만 엄격히 본다면 보들리야르를 제외하고서는 프랑스 철학자들과 포스트모더니즘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인다. 해체를 위계질서와 이분법적 사고로부터 완벽히 일탈하는 어떤 새로운 유목민적 대안(?)과 연관시키는 것만큼 의미없는 일은 없다. 오히려 해체는 구조를 전제하며, 보다 풍부하고, 속 깊은 이분법으로의 '이행'을 중시하는 전략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서는 요상하게 진행되는 것이다. 지난 구십년대 경쟁력있게 생존한 화두로 인디, 혹은 독립이라는 데에 이의를 달 사람은 없을 듯하다. 서로 말을 아꼈지만, 다들 저마다의 무정부주의자였다. 무정부주의 비판하는 까닭도 자신이 '진정한' 무정부주의자이기 때문이라는 거다. 기존 질서로부터의 해방, 변방을 사랑하기, 멋대로 굴기. 한때 엄청난 위력이었다. 하지만 '진정한' 운운이 나온다는 것 자체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 것을 알려주는 시금석이 아닐는지. 레닌주의 당이론을 비판하고 나왔지만 남은 것은 각각의 '홀로 당독재'였다. 황당하지만 필자는 전세계 주요 다국적 기업과 주요 국가 지배그룹의 지배이념은 레닌주의적 당이론이 아닌가 여기고 있다. 또한 그러한 지배이념 탓에 역사적 레닌주의를 부정하는 대신 '홀로 당독재'를 자유라는 허위의식으로 무장했다가 결국 '현실적 레닌주의'인 미국 자본, 즉 신자유주의로 귀결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모든 차별을 공평히 하여 스스로를 가축떼로 차이화시키는 그것. 다시 다 같이 못사는 시대로 회귀하게 하는 동인. 어느덧 '깊이'란 정체불명의 유령이 새롭게 '포장'되어 떠돌기 시작했다는 소문도 들린다. 가벼워 너무 조잡한 난장은 지긋지긋하다, 내팽개쳤던 딱딱한 책을 오랜만에 보니 신선한(?) 느낌까지 받았다,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온고이지신이다 등등의 정치적 항변이 그럴싸해 보인다. 이유야 어찌 되었든, 구 좌표계는 죽었다! 새 좌표계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로 들리는 것은 나만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누군가는 이조차도 식상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같은 장면이라도 카메라 앵글을 다르게 하면, 옛것이라도 인물을 바꿔치기해서 재상연하면 첨단의 것이다. 어쩌면 세기말 징후와 더불어 새천년 담론도 다 이 사정이겠다. 그러나 새 좌표계가 본격 등장하기도 전에 몽땅 씹어버린다는 것은 지나치게 좌익적(?)이다. 지금 요구되는 것은 구 좌표계에 대한 냉정한 평가와 새 좌표계에 대한 디자인, 그리고 이들의 좌표 전환을 매끄럽게 하는 것이겠다.
지난 삼십년의 문화. '청년'의 시대, '민중'의 시대, '독립'의 시대가 있었다. 청년의 시대. 미니스커트와 청바지와 장발과 대마초와 통기타의 시대였고, 박정희 유신독재에 항거한 시대였다. 이런 청년 문화를 한마디로 '얼치기 자유주의'로 매도하고 등장한 문화, 민중의 시대다. 청년 시대적인 스타일은 여전히 남아 있었지만 부끄러운 것이 되었다. 왜냐하면 민중에 철저하지 않은 결정적 원죄였기 때문이다. 광주항쟁 비디오 테잎 하나면 충분하다. 그러나 이 또한 너무 자학한 것일까? 민중의 시대더러 '한물간 변방 파시즘'으로 매도하고 나타난 시대가 있으니 바로 '독립'의 시대다. 청년적인 것은 부끄럽지 않다, 지도를 받는다는 것만큼 해악스러운 것은 없다, 네 멋대로 해라, 넌 너고, 난 나다. 차이는 좋다. 차별은 싫다 등등. 하지만 청년문화가 자리잡았기에 청년문화였던 것은 아니었다. 그런 정체성보다는 다만 전 시대와의 몇 가지 차이가 돋보였을 뿐이다. 마찬가지로 민중문화도, 독립문화도 마찬가지 운명인지 모른다. 버전업된 반복만 계속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너라고 별 수 있니?' 지난 삼십년간을 이렇게 간단히 말하면 지나친 것일까? 서구 육십년대 문화가 변두리에서 사투리로 번역되고, 번역된 사투리가 익숙해지자 그때마다 낯선 것, 이방인의 것을 참신한 것으로 받아들인 것은 아닐는지. 하지만 이조차 변방 자본주의 사회가 겪어야 할 필연적 운명이라면 이들만 탓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은 아닐 게다. 그러하니 과제는 청년, 민중, 독립을 모두 담아내는 그릇이 나와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하기에는 소수 정치론이 담아낼 지는 미지수이다. 미지의 정치. 그것이 미지의 정치인 한, 현재를 말아먹기 딱 좋은 것이다.
우리는 각자 정지용 시 <향수>의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의 그곳처럼 유토피아를 하나씩 지니고 있는지 모른다. 아마도 그건 편견, 혹은 이념이겠다. 그런 편견을 넘어서 가자는 이가 있다면 오늘날 분명 파쇼라고 지탄받을 것이다. 필자는 마지막 파쇼, 스스로를 파괴시킬 수 있는 파쇼를 꿈꾸는지도 모른다. 로자 룩셈부르크의 금언으로 글을 맺을까 한다.
"인간은 항상 양쪽 끝이 타오르는 촛불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
할 일은 많으나 돈 되는 일이 없다
인드라 : 97.8 인터넷 웹진 스키조
0. 글에 들어가기에 앞서
그람시가 일반 사람들의 세계에 대한 전통적 개념을 '상식'이라고 불렀던 바를 '문화'라고 등치시킨다면 문화는 언어와 신념, 미신, 의견, 종교 일반 등 우리 - 이 용어는 철저히 기만적인 말이다. 현재 당신과 내가 공동체적인 입장이라는 것을 세뇌시키고자 하기 위함이다. 왜 이런 말을 쓰는가? 편리하기 때문이다. 설명하려면 복잡하지 않은가? -가 알고 믿는 것에 관한 것을 말한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왜 믿는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인식하지 못해왔다. 이러한 비판적 인식을 강화하고, 운좋게 '돈오'하는 경우를 제외하고 강화할 뿐인 언론플레이가 전부인 문화주의적 태도를 문화운동이라고 한다. 이 글은 요즘 잘 나가는 문화운동류에 편승하여 자기 배설하는 글이다. 흔히 배설을 비난하는 이들이 많은데 무릇 컴플렉스를 치료하는데 배설만큼 해롭지 않으면서 쾌감마저 선사하는 방식이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배설이 배설임을 스스로 경계짓는 한 배설행위는 정당하다. 그러나 배설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스스로 경계짓고 실제로는 배설행위를 하는 위선적인 태도만이 부당한 것이다.
문제삼기가 권력이라면 왜 백수가 도마에 올랐는가? 이는 백수 인구가 갑작스레 증가해서 백수가 문제제기하여 사회 문제화되었다기 보다는 불황기의 노동자들이 언제 직장에서 축출당할 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백수에 대한 심정적인 동조현상이 일어났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백수는 실업자를 지칭하는 잘 알려진 속어이다. 실업자는 당국의 실업자 규정보다 일할 의욕이 있음에도 보통 번듯한 직장, 혹은 자기 사업이 없는 사람으로 규정함이 우리 사회에서는 옳을 듯싶다. 이 글에서는 백수에 대한 심정적인 동조현상을 슬쩍 건들여 보고,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이 사실 무산자들의 문화수용 양상을 확장시킨 것에 불과하지 않은가하는 문제제기를 던지고자 한다.
1.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귀족들이 노동을 천시했던 반면 부르죠아지는 '자본을 위한 노동'이란 물신적 도착을 강화시켜왔다. 즉 돈되는 일만 가치있는 것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근대적 노동관이며,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표어가 근대적 노동관의 실천적 구호였었다. 진짜 백수인 나는 매우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흔히 주변에서 집에서 놀면 뭐하나,하는 말을 자주 들었다. 마치 전업주부들이 집안에서 부불노동을 함에도 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고 무시당하는 것처럼 말이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위한 노동'을 폭로하고, 자유로운 노동을 회복하고자 하였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고 있는 나로서는 매우 힘든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자유고 뭐고 큰 욕심 안 부리고 내 멋대로 살고 싶어서 고생스럽고 불안정하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좀 더 고생스럽고, 불안정할 뿐인 길로 가기 위해 직장을 때려쳤는데 다른 이들이 죄다 하는 말이 그렇게 사는 인간이 얼마나 행복한 인간이냐,라고 반문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내가 막상 백수생활을 하니 생각할 일도 많고, 할 일도 무진장 많은데 정작 주변 사람들은 백수가 뭔 생각할 일이 많고, 할 일이 많냐, 빨리 취직하면 그만이지,라고 단정을 내리기 일쑤이다. 심지어 백수에게 과도한 일을 시키기까지 한다. 백수들은 다른 사람들이 늘 바쁘니까 우선순위에서 제일 마지막이 되고, 게다가 일하고 난 뒤 재수좋아야 쥐꼬리만한 점심값 얻어먹는 것으로 위안삼아야 한다. 이것이 모두 '일하지 않는 자여, 먹지도 말라'는 지고지순한 명제이니 어쩔 도리인가? 그렇다고 할머니와 나는 굶어야 하겠는가? 주변사람 눈치나 보아야 하겠는가? 물론 이제나 저제나 자식한테 호강을 받아볼까 기대하는 부모 입장에서 보자면 마땅치 않은 일이다. 심지어 돈이 되는 책만 읽겠다고 선언하는 수많은 고급독자들 앞에서 이런 말 한다는 것자체가 사치스런 일이겠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는 '게으름 피울 권리; 1848년 노동권에 대한 반론'를 발표하고, 근대 노동관에 대한 다소 편협하지만 매우 도전적인 문제제기를 한 바 있다. 직장 때려친 것이 과연 나의 선택이었던가 아니면 불황기에 처한 자본의 요구였던가를 한 번쯤 생각해야 할 것이며, 직장을 때려친다고 자본을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는 것인가 아니면 자본을 위한 노동을 강화시키는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자본이 인간 모든 영역을 물신화해나아가는 과정에서 백수는 예비노동자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 영역에서 실질임금을 절하시키는 소극적인 역할뿐만 아니라 새로운 영역에서 자본을 위한 노동에 봉사할 준비를 갖추고 언제든지 경제면 창업시대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만한 적극적인 역할 또한 하고 있다는 점이다.
2. 생존자 증후군과 카프카 증후군
우리는 잠시라도 돈되는 일을 염두해야 한다. 부모들이 가계 소득을 상회하는 노동력 재생산 비용을 들여 제조된 상품이 우리 자신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는 굶어 죽을 지라도 자식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는 인종과 민족과 계급 차이를 뛰어넘는 전세계 부모들의 요지부동한 상식이자 신념이었다. 그러하기에 대를 이어 현 자본주의에 충성하는 우리들 또한 예외가 없다. 놀면 뭐해, 고스톱이라도 치자. 백수라고 예외는 아니다. 백수의 생활반경이 취직을 전제로 한 것이니 만큼 문화수용 또한 마찬가지이겠다. 다만 직장인이 직장인으로서의 자기 유지를 위해 문화수용을 하고 있다면 백수는 백수를 부정하기 위해 문화수용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까? 그러나 이러한 차이도 카프카 증후군을 넘어서는 것은 아니다.
카프카는 프라하의 유태인 가정에서 자수성가한 사업가의 아들로 태어났고, 부모의 높은 교육열 덕에 소수 특권층이 받는 수준높은 교육을 받았으며, 노동자 상해 보험국에서 사망한 노동자에게 보상금을 지급하는 반복적이고 단순하고 끔찍스런 업무로 생계를 유지했다. 그는 일과 후에도 동료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일과 후에 자기를 위한 소설을 쓰는 것으로 위안을 삼을 뿐이었다.
오늘날 수많은 직장인들이 생존자 증후군과 더불어 카프카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 생존자 증후군이 매일 아침 동료들 의자가 치워지는 것을 보며 언제 자신도 밀려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것이라면 카프카 증후군은 고스톱치기, 야구장 가기, 영화보기, 술먹기, 글쓰기 등 별로 쓰잘 데 없는 일이 자아실현에 무척 도움이 된다고 자신을 세뇌시키면서 언제고 멋지게 사표 쓸 것이라는 환상으로 일과를 견뎌내는 것이다. 언제나 믿을 수 없는 통계치에 의하면 자신에게 새로운 도전 기회가 주어질 경우 현재 다니고 있는 직장이 안정적일지라도 과감히 사표를 던지겠다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비수기의 유럽여행을 가는 한국인 중 상당수가 직장을 그만두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하기 위한 시간을 갖기 위한 사람들이라는 것이 한국인 민박 주인들의 이야기였다. 일과 후 야구장을 찾는 회사원들은 아낌없이 광란의 몸짓을 펼친다. 이보다 더욱 많은 사람들이 아침에는 스포츠 신문을 보고, 저녁에는 빠짐없이 스포츠 뉴스를 시청한다. 때로는 음악과 영화에 심취하다가 아예 음악과 영화 분야에 뛰어들기도 한다. 이들은 매우 가소롭게도 회사가 자아실현의 공간이며, 심지어 자본주의가 자아실현의 최적공간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입사했으나 회사가 생계를 꾸리기 위해 할 수 없이 다니는 곳이고, 자본주의가 이런 생계수단조차 전혀 보장하지 않는 곳임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백수가 되면 그간 생계수단 때문에 하지 못한 많은 일을 할 수 있으며, 충분한 휴식을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정반대이다. 여행을 못가는 이유로 직장인은 돈이 있으나 시간이 없다고 하고, 백수는 시간이 남아도는데 돈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직장인이나 백수나 돈도 없고 시간도 없고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기는 매일반이다. 백수가 조금 더 시간과 돈이 없을 따름이다. 정작 백수 또한 생존자 증후군과 카프카 증후군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라는 점이다. 자본이 언제나 노동력 공급을 '자연', 혹은 '보이지 않는 손'에 맡기는 한 백수의 존재는 영원불멸이다. 백수가 취직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 모든 행위란 기실 부불노동이며, 대자본은 중소기업과 달리 백수에게 면접비라는 명목으로 소정 액수만을 부여할 뿐인 교묘한 착취를 일삼고 있다. 생산수단에서 자유로운 노동자에게 그 어떤 자유를 부여하건 그 자체 소외일 뿐인 것이다.
3. 무산자의 일원인 백수의 세상보기
국가, 기업, 가정의 주변부에서 서성거리는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은 기본적으로 생산수단으로부터 자유로운 노동자와 같다고 할 수 있다. 단지 주변부에 있다는 이유로 주변부자본주의론처럼 일반을 무시하고 특수로 나아간다고 보기는 어렵다. 노동자들만큼 억압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어도 해방의 신주체나 노동자와 동등한 주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들 자신이 어떠한 집단적 정체성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백수를 통털어 한묶음으로 문화수용양상을 말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부모세대만큼만, 혹은 부모세대보다도 더욱 열악한 환경에서 자라나고 교육받은 노동자들과 부모세대 덕분에 좀 더 윤택한 환경에서 교육받은 노동자들의 문화수용 차이처럼 백수들을 한묶음으로 문화수용 양상을 표현한다는 것은 남녀 성차를 무작정 인간으로 환원시키는 것과 같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전자의 백수(룸펜)들은 살인적인 생활환경으로 인하여 자본의 노골적인 유혹에 쉽게 노출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후자의 백수(고등룸펜)들은 룸펜보다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지위로 인하여 자본의 은밀한 유혹에 쉽사리 빠져 들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전제하고 정체성이란 측면에서 백수들의 문화수용 양상은 룸펜을 중심으로 이해하는 것이 수월하지 않나 생각한다. 왜냐하면 아무래도 고등룸펜이 보다 신분상 이동이 자유롭기 때문이다. 고등룸펜은 노동부의 고용보험제 취지대로 자기 개발을 좀 더 연마하거나 아니면 임금수준을 조금 더 포기하면 다른 백수들보다 기회가 많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 특징을 짚어보자면 다음과 같다고 본다.
첫째, 백수들은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문화수용보다는 급격하고 단절적인 문화수용을 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의 경우 아무리 적은 봉급이라도 봉급 수준에 걸맞은 내핍을 강제하다 보면 문화수용양상이 아무래도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성향을 가지기 쉽다. 그나마 가진 것(자산적 권리)에 대한 애착이 강화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백수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어버린 상태이므로 극단화한 형태를 취하기 쉽다. 서구 네오파시스트들의 진원지 중 하나가 백수들이며, 박정희 신드롬의 대중적 기반 또한 백수들이다. 이러한 점은 마르크스도 충분히 우려한 바이다. 다른 한편 신문에 보도된 한총련 간부 요건 중에서 '직업을 가지지 말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한총련측의 직업혁명가 자격심사 이면에 직업을 가지지 않는 것이 주류사회에 대한 급격한 변화를 바라는 정체성이 유지된다고 하는 계산이 깔려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 백수들은 부모세대의 인식 혹은 전통적 인식과 다른 양상을 보이기 쉽다. 이같은 논의는 신세대 논의와 전혀 다른 논의이다. 자본은 부모세대에게 임금상승률을 훨씬 뛰어넘는 자식교육을 강제한다. 따라서 부모세대에게서 발견될 수 있는 '다같이 못살아서 할 수 없다'라는 인식의 공통기반이 무너질 확율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부분이 고교를 마치는 시대에 고교 졸업자 이하가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군대도 마음대로 못가는 사회적응 부진자 다름 아니다. 이들이 같은 연배들에게 느끼는 질곡은 필연적으로 부모세대 인식과 정반대되는 양상을 가지기 쉽다. 한편 고등 룸펜은 부모 덕에 고등교육의 혜택과 쓴맛을 동시에 맛보았기에 부모세대의 인식과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온통 대학출신들이 판치니 대학만 가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는 부모와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듯이 대학가도 별 볼 일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식간의 대립이 쉽사리 드러나고는 한다.
셋째, 백수들은 사회적 문제보다 개인적 문제에 몰두하기 쉽다. 백수들은 국가, 기업, 가정에서 주변부에 위치함에 따라 어떠한 사회적 발언에 대해 스스로 자기검열을 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꺼야 하는 입장에서 더욱 그러하다. 따라서 백수들은 자신의 문제에 몰두하기 마련이고, 자신의 방, 자신의 내면세계에 보다 빠져들어간다. 백수들은 모든 면에서 우선순위가 밀려나 있음을 늘 깨달아야 하기에 오히려 심리적으로는 방어기제로서 자기중심주의가 자리잡게 된다. 다른 한편 백수들은 사회적 대립 문제를 사회적 대립 문제로 보기 보다는 개인 대 개인의 투쟁으로 이해한다. 직장인들에 대한 열등감을 숨기는 대신 같은 백수들에 향해 경계하고 질시한다. 왜냐하면 함께 백수생활을 한탄하다가도 취직자리만 보이면 경쟁관계로 곧바로 들어서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중심주의와 개인 대 개인 투쟁 의식이 상호교차되면서 사회적 문제를 모두 희석화시킨다.
넷째, 백수들은 사회조직에 대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있다. 백수들은 사회조직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만 동시에 사회조직체계 자체를 극복하지 않는 한 사회조직체계를 내면화한다. 사회조직체계의 역기능만을 사회조직체계로 판단하여 단순히 증오와 제거와 음모만을 조직생활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운좋게 취직을 하거나, 혹 다른 일을 하게 되는 경우 우스꽝스런 헤겔식 정반합 사고만이 판칠 뿐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대중적 인식이야말로 라이히가 강조했던 파시즘의 대중적 기반이라는 점이다.
4. 빠져 나오며
이러한 백수의 문화수용 양상은 아주 느슨한 규정에서 보자면 사회적 약자들의 입장과 몇몇 지점에서 일치하는 점이 많다. 어린이들이 성인에 대해 그러하고, 여성이 남성에 대해 그러하고, 신체부자유자가 신체자유자에 대해 그러하고, 동성애자가 이성애자에 대해 그러하고, 노인이 젊은이에 대해 그러하고, 노동계급이 자본가에 대해 그러한 성향을 종종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는 백수가 스스로 그러한 존재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지기 때문이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자본주의가 영구히 백수를 필요로 하는 한 일하지 않는 백수에 대한 이지메는 필연적이다. 동시에 자본주의가 영구히 백수를 필요로 하는 한 백수에 대한 환상적인 이미지(가령 노동으로부터의 자유?)는 언제나 전시효과로써 효과적이다.
한편 무산자의 일원인 백수가 굳이 무산자와 구별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면 이처럼 개개인적으로는 불안정하지만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는 일정한 비율로 존재하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경제적으로는 무능할 지 몰라도 정치적으로는 여전히 의미가 있는 존재들이다. 이같은 정치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노동계급이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혹 같은 무산자를 잊고 있지나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노동계급이 단지 자신의 일터를 위협하는 족속으로, 혹은 자기 임금을 떨어뜨리는 족속으로만 취급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이다. 그간 노동계급은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만도 무척 힘들었다. 그러나 노동계급이 발전하면 할수록 이러한 주변부와도 충분한 교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가령 노동계급이 적극적으로 실업에 대한 대처를 요구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정리해고를 막고 임금동결로 만족하는 노동계급이 아니라 이미 실업한 사람들에 대한 대책도 같은 무산자로서 요구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할 때 백수들 또한 대기업 노동자들의 파업사태시 적극적인 지지를 보낼 수 있으리라고 본다.
끝으로 백수는 빈 손, 교환될 것을 가지지 않은 손, 일하지 않는 손이다. 일중독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나 편안하게 쉬고, 재미나게 놀면서 살고 싶어한다. 그런데 이렇게 일하고, 쉬고, 놀고 하는 구분이 실은 자본제에 와서 특화된 가치 판단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질문해봐야 하지 않을까? 원시인들이 하루 종일 일했을까? 그들은 우리보다 불행한 삶을 살았을까? 전보다 훨씬 많은 일을 짧은 시간에 하는 데도 전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뭘까? 그러면서도 일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라는 말을 손쉽게 한다. 바로 백수의 존재 때문이다.
나는 이렇게 주장한다. 백수와 노동자의 구분이야말로 자본의 계략이며, 이러한 계략을 폭로하는 계몽적 작업이 필요하다. 동시에 백수와 노동자가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살 수 있지 못하는 근본 동인에 대한 해체 작업이 필요하다. 이러한 근본 동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겠는가?
조정환님께
님의 글을 보고 나서 한 동안 고민했던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에 대해 저의 두서가 없는 의견이 도움이 될까 하여 글을 드립니다. 저는 요즘 안티카동호회(www.anticar.co.kr)를 자주 들립니다. 이유는 제가 5년 간 몰던 애마 티코 대신 다른 차로 바꾸려고 차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획득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른 차 관련 기업 사이트와 차주 동호회도 동시에 둘러 봤지만 제게 가장 도움이 되었던 사이트는 안티카동호회였습니다. 안티카동호회 게시판에 나타난 다양한 이들의 한국차 비판은 섬뜩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성의가 없는 글도 없지 않았지만 그보다는 어떻게 저럴 정도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을까 감탄이 저절로 나올 만큼 살아 있는 글들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글들을 읽으면서 차종 선택을 위한 정보를 구하러 갔다가 차종 선택에 대한 도움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한국차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한국차 소비자들이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으며, 또한 당국-업체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과 실천을 통해 자신의 권리를 집단적으로 풀어가려는 노력을 보니 참 멋있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주도하는 이들은 심심땅콩풀이로 안티카동호회를 만들었을까요? 지금까지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흡사 목숨을 건 듯이 정확한 정보에 근거하여 하나하나 현장에서 확인하면서 따져 들어가면서 소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니 당국-업체에서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그렇다면 이러한 것을 이끄는 사람은 왜 이런 일을 할까? 이번 건으로 뜰려고 그런 것일까요? 안티카동호회를 주도하는 이가 어떤 상업적 계략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냐,라는 비판이 그것입니다. 아닌 게 아니라 자기 직업이 있을 터이고 사이트 유지도 만만치 않은 것이라고 여기니 그러한 의문이 들 수 있다 여겼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안티카동호회는 철저히 아마추어리즘을 고수하겠노라고 대문에 큼지막하게 올려놨습니다. 이를 이해할 수 있을까요? 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91년부터 통신을 해왔는데 그간의 경험으로 분야만 틀릴 뿐 제도 언론을 통하지 않은 수많은 실력자들이 '순수한 열정'만으로 각자의 영역에서 열심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비판이 등장한다면 그 운영자가 현대냐, 기아냐, 대우냐, 삼성이냐, 외제냐하는 정치(?)적 성향에 설령 초연하더라도 게시판에서 정치꾼(혹은 각 업체 본사 판매담당자)들이 어떤 의식적 의도를 가지고서 조작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도 저의 그간 경험으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습니다. 정치꾼들이 개입하여 말이 되면(혹은 훌륭한 기획을 잡았다면) 정치꾼들의 의도에 네티즌들이 호응하여 그들 의사에 따라 게시판이 흘러갈 것이며 반대로 정치꾼들이 개입하였음에도 말이 되지 않으면(구태의연한 수법을 써서 속이 뻔히 보인다거나 기획이 황당무계하다면) 네티즌들이 등을 돌리거나 아니면 들고일어나서 정치꾼들이 도태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정치꾼들은 말이 되면 가장 좋겠지만 최후의 방편으로 판깨기하는 방편으로 하여 해당 게시판이 '정치꾼들만의 리그'가 되는 것도 차선이라고 여길 것입니다. 네티즌의 관심을 희석시켰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운영자가 순수한 열정만으로 안티동호회를 계속 유지시키게 하고 네티즌들이 양질의 정보를 획득하기 위한 최선의 길은 '정치꾼들만의 리그'를 깨부수고 정치꾼들을 도태시키는 것이어야 하겠지요. 왜냐하면 네티즌들이 안티동호회를 찾는 것은 그간 정치꾼들에게서 올바른 정보를 얻지 못하고 그들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이 판마저 깨지면 네티즌들이 올바른 정보를 구할 곳이 마땅치 않게 된다는 점에서 그렇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운영자와 네티즌들은 자신들의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운영자가 흔들림없이 안티동호회를 유지해야 하는 과제와 더불어 네티즌들이 정보에 대한 현명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스스로 공부하고 노력하는 과제가 절실합니다. 이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유지되기에 힘들다고 저는 그간의 통신 경험에서 감히 확언을 해봅니다. 제가 안티카동호회를 길게 논하는 까닭은 바로 님의 다음과 같은 글 때문입니다.
"님의 편지를 보고 나서 한 동안 '자유게시판'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의 삶의 어디에 자리잡고 있는가, 내가 자유게시판을 통해서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편에서 자유게시판은 다중의 목소리가 드러나는 곳이며 그 곳의 웅성거림과 아우성이야말로 내가 속해야 할 장소라는 생각, 다른 한편에서 이곳의 소란이 갖는 높은 엔트로피를 내가 감당해 가야한다면 어떤 이유에서인가라는 물음 사이에 나는 서 있습니다. 님은 어디에선가 자유게시판에의 기고활동을 놀이로 묘사했지만 저로서는 그것이 (넓은 의미에서 각 개개인의 삶의 놀이라 할지라도) 결코 놀이일 수만은 없는 어떤 긴장감을 늘 수반하기 때문입니다. (정보기관원인지 기자인지 아니면 저의 상상력이 미치지 않는 어떤 세계의 주민인지 모를) vnf님의 욕설과 비아냥거림 가운데에는 이런 의미에서 경청하고 음미하며 실천적으로 타개해 나갈 어떤 방향에 대한 제시가 (반면교사의 모습으로) 깃들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제가 아래에서 자유게시판을 '무림'으로 개념 정의하고자 하는 문화일보 기사의 시각을 비판한 것은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격투장으로서보다는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자유게시판은 자신의 이러한 잠재력을 극히 일부밖에 실현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하는데, 이러한 진단은 저로 하여금 자유게시판이라는 디지털 테크놀로지를 다중이 이용함에 있어 (부르주아 정치권, 시장, 공장이 보여주는 격투장의 논리를 넘어설 수 있는 다중의 새로운 힘의 현시로서) 어떤 문화적-윤리적 노력이 필요한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듭니다."
제가 이해한 님의 글 논지는 자유게시판이 승패를 가리는 사이버 무림 격투장이냐, 이 승패를 넘어선 제 3세력의 또 다른 승리를 엿볼 수 있는 가상 콤뮌이냐의 기로에서 잠재력이 극히 일부밖에 실현되지 못하지만 잠재력을 극대화시켜 가상 콤뮌으로 갈 수 있는 방안은 무엇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제 이해가 옳다면 자유게시판이 가상 콤뮌으로 가는 방편 중 하나로써 문화적-윤리적 노력이란 님이 네티즌을 이끌고 가는 제 3세력의 영수가 되고자 하는 '순수한 열정'으로 종전의 영수와 다를 뿐만 아니라 발전된 모습으로 종래의 영수를 비판하는 사이버 무림 격투를 벌이고 있는 것인 동시에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이 격투가 가상 콤뮌으로 가는 '이행'에 작은 효과를 낼 수도 있겠다는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저는 님이 진중권님과 격투하는 것을 매우 흥미롭게 여기며 누가 승자가 될 것인가 관심이 있는 동시에 님과 진중권님의 '실천적 노력' 여부에 따라 두 분이 극히 제한적인 잠재력의 포로로 매몰될 것인가, 조금이나마 잠재력을 늘일 것인가를 지켜보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의 자유게시판은 빨리 응답하지 않으면 응답이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성급함과 속도의 문화에 오염되어 있습니다. 응답의 지연, 바로 그것이 사유의 공간이며 창조의 시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왜 미리부터 배제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자유게시판의 프로그래밍 형식이 그러한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새로운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애써 무관심하는 인내력을 통해서만 자유게시판의 이 바쁨의 문화를 견뎌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비록 기계과 전공을 한 사람이지만 기계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습니다. 아울러 제가 자동차회사에서 한때 자동차를 파는 영업사원이지만 차에 대해 아는 바도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제가 하는 차에 관한 상식은 극히 제한적입니다. 반면 레이싱을 즐기는 레이싱 매니아들은 대개 운전뿐만 아니라 차구조에도 해박합니다. 그들은 속도의 전사들입니다. 그들이 레이싱을 즐기는 이유와 도로를 질주하면서 나타나는 차상태에 대한 깊은 관심에 대해 제가 바보처럼 '인내심있는' 오염된 관점으로 그들의 사유의 공간과 창조의 시간을 배제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물론 허락된 곳이 아니면 도로에는 제한속도가 있기에 그러한 '인내심있는' 문화를 강제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시간순으로 데이터를 축적하며 과거를 현재 속으로 다시 끌어들이기가 매우 어려운 직선적 프로그램 구조말입니다. 현재와 과거, 미래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만날 수 있게 하는 '시공간 초월적인' 자료저장 형식이 개발되기까지는 저로서는 속도에 솔직히 콤플렉스를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다시 생각하면 '구체적인 시공간' 속에 속하지 않고 이미 초월한 듯이 폼잡기 보다는 '구체적인 시공간' 한복판으로 뛰어들어 이러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면서 '여유있는 속도감'을 낼 수 있다면 레이싱 매니아들의 감성을 이해할뿐더러 넘어설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보다 빠른 스피드를 추구하는 까닭은 혹 그 빠른 스피드 속에서도 냉정을 잃지 않고 침착하려는 의지의 소산이 아닐까요? 자동차 회사들이 레이서를 고용하여 높은 스피드에서 차 테스트를 하는 이유는 저속 스피드에서도 얼마든지 견딜 수 있기 위함일 것입니다. 어느 속도까지 내면 차가 뽀개진다더라,라는 것을 레이서를 통해서 판단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인내심있는' 스피드로 시험한다면 하나마나이겠지요? 그런데 자동차 회사들이란 좋은 차를 만들기 위함이 목적이 아니라 이윤의 창출에 목적이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아마추어 레이서들은 교통경찰의 검열을 피하면서, 자신의 돈과 시간과 목숨을 걸고서 레이싱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티코를 타면서 평소에 매우 안전운행하는 스타일이어서 레이서들을 보면 질투가 마구 납니다. 너무나 부럽습니다. 저도 저만한 차를 치밀하게 준비해서 무진장 속도를 내고 싶지만, 그리하여 다른 이들이 속도의 한계에 부딪혀서 겁을 내며 속도에 매몰될 때 제가 무섭도록 침착하게 다른 이들이 벽이라고 느끼는 속도를 넘어서고 싶지만, 몸이 따라가지 않습니다. 머리는 가상 콤뮌으로 가고 싶으나 게을러서 차도 준비할 수 없고 겁이 많아 콤플렉스가 심해서 질투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질투가 백해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질투할 시간에 다른 일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요? 몸이 안 따라주는군요.
말로는 다양하고 창조적인 공간에 속하고 있다고 여기나 사실은 획일적이고 폐쇄적인 공간에서 그들에게 시선을 던지니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깨끗이 그들을 인정하고 저는 제가 잘 하는 곳에서 열심히 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자유게시판 중 하나에서
님의 글을 읽었습니다.
"저는 지난 번 제시한 다섯 가지 문제를 아직 풀지 못했고 또 단기간에 풀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저는 님에게 이 다섯 가지 문제에 대한 '레포트적' 답안을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겠지요. 저로서는 단지 우리의 논의가 생산적일 수 있기 위해, 다시 말해 논의 지평의 협소함을 넘어서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잠정적 논의틀을 제안한 것에 불과합니다. 저는 그 각각의 문제에 대해 지금 생각해 보고 있으며 자유게시판에 오르는 여러 참여자들의 견해를 읽고 분석하는 것도 그것의 중요한 작업들 중의 하나이며 '조그만 실천'님이 제안한 우리모두 사이트 탐방도 (아직은 계획으로서만 남아 있지만) 하지 않으면 안될 과제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상식 해답', 바로 그것이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후에 님의 답안에 대해서 언급할 기회가 있을지는 지금 정확하게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저는 제가 레이싱을 할 수 없었고 또 레이싱 문제에 대해 단기간에 풀 수 있지도 않다고 생각할 뿐만 아니라 중장기적으로도 풀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님에게 레이싱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님에게 레이싱에 대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요구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님이 그러한 답안을 제시하는 것은 자유겠지만 제가 거기에 반드시 응답해야 할 의무가 있지도 않으며, 나아가 이후 어느날인가 님이 그러한 '문화적 - 윤리적' 답안을 제시한다고 해서 생산적일 것이라고 추호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님이 레이싱에 관심이 있는지는 모르나 만일 저와 비슷한 사정이시라면 레이싱을 반드시 차로만 가능한가, 글쓰기라는 통로로도 가능하지 않겠는가, 라는 생각을 하실 수도 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통로에서 하면 되는 것이지 않을까 여긴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며 어떤 단계도 건너뛸 수 없는 범주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 님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시는 오염된 통신 레이싱 문화가 제게는 시간을 바쳐 풀어야할 문제로 다가오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마도 님에 대한 답변의 형식을 취하기보다 제가 91년부터 통신을 하면서 제시한 논의틀에 대한 자기응답의 형식을 취하게 될 것 같습니다. 블라디미르, 사당의원 BBS, 르뻬떼라는 좌파세력과의 통신 활동, 통신을 통한 운동이냐, 통신을 위한 운동이냐 등등의 바통모 활동, 그밖에 수많은 게시판과 오프라인에서의 활동...
"한편 저는 '조그만 실천'님의 기사를 통해 제가 한 가지 착시 현상을 갖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금 받고 있습니다. 그것은 나도 모르게 진중권님을 안티조선 운동의 지식인 대변자 중의 한 사람으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지금 저는 느끼고 있습니다. 진중권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진중권'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님의 편지에 대한 축자적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님의 편지의 단락 순서를 일부 변경하는 것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편 저는 그간 다중공간 왑 사이트를 그간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 도모하기'로 한몫 잡으려는 지식인 운동이며, 님이 이 사이트의 대변자로 보고 있었는데 혹 착시가 아닌가 여기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저는 이 시각도 위험할 수 있다고 지금 느끼고 있습니다. 조정환님과의 대화는 우선 개인 '조정환'과의 대화로 진행되어야 하며 안티조선운동을 안티하기 운동과의 대화는 그것의 효과로 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에 저는 도달했습니다. 다음은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대화에 대한 저의 '레이싱 글쓰기적'인 응답입니다. 제 응답의 필요에 따라 저는 시간적으로 계속 서술하고자 합니다. 이같은 이유는 저는 진중권과 조정환의 양자 지양이야말로 네티즌에게 가장 필요한 작업이 아닌가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양해바랍니다.
"<1>제도 변화의 동학에 대해
진중권: 둘째,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좀 스콜라스틱하다는 느낌입니다. 간단히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민주당에서 사상전향제를 폐지하려다, 아직 의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한나라당과 자민련의 반대로 그것이 어렵자, 고육지책 끝에 양쪽 다 만족시키기 위해 억지로 만들어낸 매우 인위적인 타협안일 뿐입니다. 법적 근거나 법철학적 논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로 등장한 것도 아니고... 그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한 ad hoc 제도라고 할 수 있지요. 이렇게 보는 게 더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조정환: 이 주장에서 님은 아무 것도 논박하지 못했습니다. 단지 저의 생각에 '스콜라스틱하다'는 이름표를 붙인 후 그 곁에 '간단히 생각해' 본 님의 생각을 나란히 대치시키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생각이 님의 생각보다는 <복잡하게 생각해> 본 후에 나온 결론임을 저는 인정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님처럼 생각해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러울 것'이라는 점도 딱히 반대할 의사가 없습니다. 단지 그 자연스러움 속에서 힘을 행사하는 것은 사유하는 인간의 지성이 아니라 습속과 통념, 다시 말해 이데올로기라고 생각할 따름입니다.
저는 님이 말한 바, 사상전향제에서 준법서약제로의 변화가 '현실의 역관계 속에서' 등장했다는 점에 동의합니다. 그러나 어떤 역관계인가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보았습니다. 님은 그것이 의회 내 당파싸움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님은 '부르주아 계급이 새로운 작전을 짠 결과'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의회 내의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창비에서 노해문, 그리고 안티조선으로의 변화에서 한국지배계급의 지배전략의 변화를 보는 것은 타당하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나아가 다중들의 힘과 지성이 소통되는 가상 코뮌으로 자리잡을 필요성을 강조"한다고 보는 것은 단견이 아닐까요? 저는 그것이 자본과 노동의 역관계의 투영이라고 봅니다. 다시 말해 팔십년대때 운동가들이 운동과 캠페인을 구별하고자 노력했던 그 관점에서 보시면 이해가 빠르지 않을까 생각이 듭니다. 님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정서, 새로운 관계를 창출하는 생산공간으로 자유게시판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구성된 진중권 VS 조정환이라는 당파싸움의 핵심은 누가 다중이라는 네티즌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싸움입니다. 즉 이들의 당파싸움 자체가 지배를 위한 법적, 제도적 개혁의 방향을 결정짓는(즉 새로운 작전을 짜는) 일종의 구수회의라고 한다면 제가 너무 지나친 것일까요? 이러한 개혁들에 법적, 법철학적 논거가 있어야 하는 것일까요? 설마 님이, 지금까지의 인터넷 제도들이 (힘이 아니라) 어떤 법이나 법철학에 근거를 두고 구축되어 온 것이라고 보시지는 않겠지요. 물론 GNU 강령이다, 해커다, 카피레프트다 잠시 유행했던 때는 있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솔직히 까놓고 말해 네티즌 중 얼마만한 사람들이 창비 게시판에서 백낙청이 말한다고 관심있게 볼 사람이 누가 얼마나 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다음 대목은 길어서 분량을 나누어서 보겠습니다.
"<2>안티조선의 관점에 대해
진중권: 첫째, 안티조선운동이 준법서약서제를 지지할 것이라는 말씀은 별로 타당하지 않은 듯 하군요. 안티조선에서는 이에 관한 합의가 없지만, 이제까지 게시판의 분위기로 보아, 사상전향제는 물론이고 그보다 약한 준법서약서제에도 반대하는 게 대체적인 정서입니다. 안티조선운동은 특정 세계관이나 이념을 전제하고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마십시오. 그저 간단하게 조선일보의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들이 시작한 일이라고 생각해 두십시오. 굳이 멋 있게 부르자면 "일반민주주의투쟁"이라고 할까. 특정한 사안에 대한 지지와 반대의 예측을 결론으로 끄집어낼 수 있을 정도로 체계적인 이념이나 세계관이 안티조선에는 없습니다.
조정환: <1>의 주제는 안티조선 논의의 필수적인 구성부분은 아니지만 이 주제는 우리의 논의에서 필수적입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 현 시기에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 (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 안티조선은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물론 좌파들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그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저는 여기서 한가지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국 사회의 여러 좌파 부분들이 정말로 진심으로 진지하게 신자유주의(의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에 대한 비판에 집중하고 있는가를 묻고자 합니다. 또한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까지 포괄하는) 반극우(미디어) 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신자유주의에 대한 실천적 옹호로 비치고 있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일부 좌파가 좌파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국가주의적 경향성 속에서 권위주의 세력과 부단히 영합하는 경향을 띠는 현상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이 신자유주의와 반극우노선에 혹 영합하고 있지 않는가에 대해 응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여기에 대한 저의 질문은 간단합니다. "지금 여러분은 인터넷에서 무엇을 위해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흡사 한나라당 비판적 지지파나 민주당 비판적 지지파와 같은 위상으로 지금 우리 앞에 서 있는 것은 아닌가요?
"저는 준법서약제로의 변화를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준법서약제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한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안티조선의 실천이 가져오는 효과에 대해 판단해 줄 것을, 그리고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답해 달라는 요청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안티조선의 전술은 사상전향제를 반대하되 준법서약제를 보호하며 국가보안법을 반대하되 민주질서수호법의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안티조선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직 저는 모르고 있습니다)"라고 한 구절은 그 이상의 어떤 의미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의 인터넷 진출에 대해서는 신자유주의적 제도개혁의 일부로 파악하기 때문에 제가 제시한 자료는 (레이싱적 글쓰기 자체에 대한 논의를 제기하는 것이라기보다) 현재의 진중권 VS 조정환이 신자유주의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는지 알고 싶다는 것입니다. "제가 판단하기에 진중권님과 조정환님은 그간의 문단 고압적 자세를 반대하면서도 창비 백낙청식 인터넷 자유게시판 개입에 대해서는 보호하며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보다는 자신들이 하는 만큼의 레이싱적 글쓰기에 대한 보존을 지지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에 대해 실제로 님들이 어떤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저는 아직도 모릅니디만) 제가 예상하기로는 창비나 문지가 90년대 중후반에 한때 시도한, 제한적인 레이싱적 글쓰기 인정 차원에서 봉합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저의 의문에 답할 수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까지의 실천에서 안티조선은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소위 주요와 부차)'의 관점(독점, 종속을 우선 해결 과제로 설정한 80년대의 단계론적 사고를 상기해 보십시요. 저 자신도 이런 관점에 빠져 있었던 사람 중의 하나입니다)과 유사한 방식으로 조선일보 우선 타격의 태도를 보이면서 여타 신문이 보이는 경향들, 특히 신자유주의적 경향들에 대한 태도표명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님은 안티조선에 그에 대한 합의가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중권님의 개인 견해는 무엇입니까? 어째서 권위주의와 극우 이데올로기에 대해서 그토록 치열한 분노를 표현하면서 준법서약서라는 신자유주의 제도(저의 생각에서 볼 때)에 대해서는 게시판의 분위기를 통해서 읽어내야 할 정도의 불명확한 정서적 반대에 만족하시는 것인지요? 그리고 '안티조선에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이념이 없다'거나, 또 아래에서 님이 말하듯 안티조선의 행동에는 특별한 이론이 불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마치 어떤 새로운 운동의 관점이자 방식일 수 있기나 하다는 듯이 주장되는 것은 당혹스럽습니다. 안티조선이 하나의 운동이고자 한다면 그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게다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태도표명의 요구는 결코 세계관이나 이념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닙니다. 권위주의나 극우가 단순한 이념이나 세계관에 머물지 않는 행동이듯이 신자유주의도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 아닌가요?"
캠페인이 아니라 운동이라고 님들이 생각하는 한 과연 지금 통신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님들의 행위에 상응하는 관점 확립을 피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는 저도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님이 스딸린주의적 정치활동의 시대에 유행했던 '무엇이 우선인가'의 관점을 비판하시고, 그 관점에 빠졌다고 고백하시지만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무엇이 달라졌습니까. 당장 님들의 글쓰기나 저나 팔십년대적 글쓰기와 그다지 다르다 여기지 않습니다. 이런 글쓰기는 통신 글쓰기라고 볼 수 없지요. 신자유주의가 이념이자 정책이고 또 행동이고 글쓰기라면 이 점에서 심지어 저까지 과연 헤어날 수 있는 문제인가 스스로 의심을 던져 봅니다. 왜 우리는 온라인에서의 힘이 아니라 이미 형성된 오프라인의 권위에 의존하여 대리전적인 논쟁이 되어야만 하는가. 그 오프라인적 권위는 신자유주의가 선사한 저널리즘적 급진성 속에서만 발현되고 있는 것인가. 상대를 때려눕히고 절멸시키고야 말겠다는 19세기의 폭로와 비판이 아닌 상생적인 파파라치적 비판과 폭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인가. 그 효과란 오로지 일간지에 논쟁이 있었다라는 가쉽거리 취급으로 스스로 만족해야 하는가. 왜 서준식님이 말씀하시듯 '까고 부시지 못하고' 까고 부시는 척하는 절차적 글쓰기에 민감한가. 필요하다면 절차적 글쓰기를 깡그리 무시할 수도 있는데 왜 그리들 연연하는가. 그리도 정말 '까고 부시고자' 한다면 구십년대, 이천년대가 허용된 글쓰기 광장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있는가. 일간지 논설위원으로 보이는 이도 다중이 사용하는 곳으로 가서 과감하게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데 왜 소위 좌파라고 자칭하는 먹물들은 그저 자신을 추종할 것만 같은 박수부대, 혹은 독서토론회, 또는 새로운 중앙조직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는가. 왜 당신들은 광장으로 달려가지 않는가. 그곳에 가서 두 분이 정연한 논리로 치고 박고 싸운다면 그 싸움이 차라리 해볼만한 싸움이 아니던가. 왜 제한적인 공간에서만 글쓰기를 고집할까. 흡사 어항 속의 물고기들이 제각각 영역을 차지하고 나서 서로에 대해 입을 꿈벅꿈벅 벌리는 것으로만 보일까. 너무나 평화롭다. 너무나 평화로우니 짜증이 난다.
"님은 안티조선에 '너무 많은 거창한 의미'를 부여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안티조선운동의 의미는 제가 부과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실천이 낳는 효과입니다. 그것이 "일반민주주의 투쟁"일까요? 그것이 님의 말에서는 '멋있게 부르'기 위한 용어에 불과하므로 진지하게 대할 필요는 없겠지만 상호연결되어 있는 수많은 악들에 대한 투쟁을 특정한 '악'에 대항하는 투쟁으로 환원하는 것으로서의 "일반 민주주의"란 실제로는 그 특정한 악과의 투쟁마저도 곤경에 처하게 할 하나의 환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진정한 '일반'(general) 민주주의가 있다면 그것은 이런저런 유보 없이 다중이 자신의 삶의 존엄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는 절대적 공화국의 정치형태에 합당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님이 다중에 의해 추동되는 안티조선 운동을 '몰상식한 행태에 열받은 시민'의 감정적 행동으로 격하시키는 것은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몰'상식'(commonsense)이라는 용어는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숨깁니까? 저는 현존하는 부르주아 사회의 상식이 부르주아 이데올로기들의 다중 속에의 침전물이라고 봅니다. 사실 이런 의미에서의 상식이란 우리가 잊어버림으로써만 넘어 설 수 있는 그 무엇입니다. 조선일보는 상식을 잊게 하는 것('몰')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에게 상식을 주입하고 상식에 따라 살도록 강제하는 신문입니다. 물론 우리는 commonsense의 또 다른 의미, 즉 공동체적 감각이라는 의미를 알고 있습니다. 제가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의미에서인데, 조선일보의 상식이 다중의 공동체적 감각을 '상식'을 통해 침식하고 파괴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이 공동체적 감각에 대한 이러한 적대의 태도가 조선일보에 국한되지 않고 때로는 한겨레신문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매체에 실존한다는 것, 아울러 이런 매체들에서만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의 제 활동형태들 속에 나타난다는 것에 저는 주목합니다. 이것들에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대안은 전망이 아니라 우리를 현재 서 있는 자리에서 이동시킬 대체물입니다. 한자 그대로인데 案은 아이디어가 아니라 책상을 의미합니다)을 창출하는 것이, 삶의 행복을 찾아나갈 수 있는 다중적 방법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므로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방법은 다른 매체들과 반공감(反共感)적 힘들의 여러 실존형태들에 저항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는 것이어야 합니다. 제가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에 극구 반대하는 이유는 그것이 그 길을 닫기 때문입니다. 그 전술의 한계는 동아, 중앙에의 기고를 조선에의 기고를 반대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용하고자 한 강준만님의 방법과 그에 대한 이의제기들에서 이미 드러났다고 저는 봅니다."
좃선일보와 한걸레 신문. 근래에 두 신문이 아닌 다른 신문사 소속 기자의 결혼식에 간 적이 있습니다. 그와 안면이 없어서 그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 들은 바로는 종래 정권이 유지되었다면 부조금이 더욱 늘어났을 것인데 하는 안타까움을 표했다고 합니다. 결혼식에는 물론 양당 화환이 걸려 있었습니다. 제가 그 자리에 가서 "화환을 치워라, 이 신자유주의자들아"라고 외친다면 나야말로 신자유주의자일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는 님이 온몸으로 저항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안티조선과 개인 '진중권'에 집중하는 것에 한편으로 동의합니다. 저 또한 조선일보 반대라는 기치에 찬성하면서도 기고 반대라는 그 전술을 운동이란 양식으로까지 승화(?)시킬 바에야 한겨레 반대라는 기치가 보다 현 정세에 부각되는 전술이 아닌가 여긴다는 점입니다. 그 점에서 저는 두분 모두 한계를 드러내지 않았는가 생각합니다. 사실 저도 반성적인 지점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안티조선이나 다중공간 왑에 글쓰기하는 것을 다시금 고민해야 합니다. 왜 나는 하이텔 플라자 같은 곳에서 글쓰기를 스스로 일년간 봉쇄시켰을까. 신자유주의 반대와 김대중 반대. 김대중 정권 초기때부터 김대중 정권 비판하다가 김대중 욕하다 짤렸는데 왜 지금과 같은 호기에서 왜 그 광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가. 대안이 없어서인가. 몰상식한 다중에 좌절해서인가. 아, 씨발. 나 같은 놈이 재수없다는데 할 말이 없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우선순위를 매기는 나 자신을 보았고 그 우선순위를 포기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 우선순위를 매기는 등급을 까부수기 위한 고리를 타격하고자 하였는데 그 꼴을 못봐주겠다는 겁니다. "왜 너만 예외냐?"라는 데에 대한 답변을 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잠시 스트레스를 해소하고 있다가 반성중이어서 안티조선에서의 글쓰기도 반성중인데 그러던 차에 님의 글을 읽고 이곳에도 한자쓰게 된 것이었습니다. 도대체 안티조선에서의 진중권님과 다중공간 웹에서의 조정환님의 차이란 무엇인가. 내게 그 차이보다는 글쓰기 후 등장하는 오프라인 경력에 더 눈이 가더라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이 다중이 몰리는 이유이지 않을까. 정말 진심으로 반극우이자 신자유주의 반대여서 안티조선에 몰리고 다중공간 왑이 몰리는 것인가. 내게는 차라리 안티카 동호회가 훨씬 더 실천적으로 보입니다. 그 캠페인이 말입니다. 그 소비자적 캠페인 한계가 더 현실인 것이 이 신자유주의적 상황이라는 것입니다.
"3>거대담론과 미시담론, 귀납과 연역에 대해
진중권: 님의 글에서 아직도 거대담론에 대한 미련이나 향수를 봅니다. 제가 앞에서 지적한 두 가지 점을 잘 생각해 보십시오. 님이 논리를 펴는 방식에 어떤 편향이 있음을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님은 님이 구성해놓은 어떤 이론체계에서 연역적으로 사고를 하고 계십니다. 철학적 근대에 대한 포스트모던의 비판에 합리적 핵심이 있다면, 근대의 합리주의적 사유 속에 내재된 이 편향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 우리의 지식인들은 가능한 한 구체적인 문제에서 출발하여 구체적인 대안 위주로 사유하여 그 결과를 이론화하는 귀납적 절차로 작업하는 방향으로 전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즉 책에 들어 있는 이론이 아니라 신문, 잡지, 방송, 인터넷, 일상생활의 대화 속에 들어 있는 현실에서 출발하여 위로 올라가는 그런 방식 말입니다.
조정환: (쟁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제가 거대담론을 '미련이나 향수'로서 정도가 아니라 방법론의 '하나로' 선택하고 있다고 이야기하는 편이 낫겠군요. 님은 벌써 포스트모더니즘의 '거대담론 비판과 미시담론' 주장을 이미 입증되고 확인된 진리로 받아들이는 것입니까? 저 역시도 거대담론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에 합리성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제가 거대한 사회적 직조 속에서 미시성, 자유로운 사회적 개인들, (지식인이 아니라) 자유인을 저의 삶의 입장으로 설정하고자 하는 것은 이러한 승인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거시적 시각은 여전히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미시적인 힘들이 거시적인 힘들에 포착되어 있는 것이 현대 부르주아 사회의 변함없는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지배는 미시적 선을 따라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거시적 구조의 직조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오늘날 산업재구조화, 신자유주의, 지구화 등은 하나의 거시적 흐름입니다. 미시적인 것은 거시적인 것과 긴밀히 얽혀들어 있습니다. 해방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의 관계와 배치구조를 밝히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은 '거시 대신 미시'라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시각역전이 거울놀이의 함정에 빠져있음을 보여줍니다. (저의 이 주장이 미시적 운동들의 문제제기적 힘을 무시하는 것으로 이해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똑같은 이유에서 '연역 대신 귀납'이라는 서술방법론의 역전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양자 중 어떤 방법을 선택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서술의 필요, 사유의 필요에 따라 조절될 문제일 것입니다. 제 사유가 과연 연역적이었는가라는 문제가 여전히 남지만 이러한 전제 위에서 보면(즉 연역은 오류다, 혹은 근대적이므로 나쁘다는 관념을 떠나서 보면) 그 문제를 밝히는 데 더 이상 시간을 바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여전히 반복되는 문제이군요. 흡사 신앙이냐, 종교냐, 혹은 기복이냐, 믿음이냐하는 끝나지 않을 문제를 흡사 자신의 대에서 멈추리라고 생각하지 않으시리라 두분 다 여겨봅니다. 현실 < 서술 < 사유로 이어지는 이성에 대한 신뢰는 합리성이라는 이름으로 두분 다 깊숙이 껴안고 있지 않습니까.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이름의 비판은 아무짝에도 쓸모 없으나 포스트모더니스트, 혹은 포스트주의자로 낙인찍힌 - 그람시도 이 범주에 들어간다면, 아마 트로츠키나 로자 룩셈부르크, 아니 맑스 사후의 엥겔스서부터 포스트주의자로 해야 정당하지 않을까요? - 이들의 비판에 합리성이 없다고 한다면 바보 취급당하리라 봅니다. 문제는 합리성이 아니라 합리성 계보이겠지요. 지금 논쟁 배후에서 끈덕지게 나오는 계보에 대한 의심이 모든 합리성에 대한 인준에 선행하는 것. 그것이 현실적인 발언이 아닐까요. 반성한다고 이 계보가 없어지나요? 오히려 계보는 위기와 반성 속에서 강화되는 것은 아닐까요. 이 계보에 대한 비판이라면 가장 현실적인 투쟁의 장은 학생운동 총학생회 선거판일 것이고, 노동운동 선거판일 것입니다. 그때 가장 멋지고 열심히 투쟁하는 동지들이 눈물겹습니다. 그렇게 선거기간 동안 열심히 뛰어다니길 일년내내 했다면 많이 달라졌을 터인데. 즉 문제는 신자유주의 투쟁이 아니라 누가 신자유주의 투쟁의 선봉, 혹은 주도하느냐가 아닙니까. 선점한 자와 선점하지 못한 자의 싸움. 이 싸움은 얼마든지 지금도 망원경과 현미경으로 얼마든지 구경가능합니다. 정작 신자유주의 투쟁보다 이러한 싸움을 더욱 즐기는 팬들이 많으니까요. 아, 다시 한번 1980년대 논쟁저서들을 무협지 읽듯이 읽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왜 그때는 그리도 노동운동 자체 설명저서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을까요? 공동체란 무엇인가보다 공동체 논쟁사, 이런 책이 더 재미날 수 있다는 서글픈 형식. 현실은 진부하고 이빨만 뜨겁다. 그러나 이것이 지금 논쟁할 때냐, 나가 짱돌을 던지자로 해석하여 주시기 말길 바랍니다. 다만 안티조선조차도 제가 보기에는 퇴조의 기미를 보이는데 흡사 김영삼 퇴임 후 돌던지기와 같
은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한걸레조차도 다중에게 이미 진부해져서 폭로할 것도 없고 폭로해서 놀랄 것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린 작금에서 현재의 논쟁이란 무슨 의미를 가질까요?
성폭력 근절 백인위원회인가의 폭로가 더 의미가 있지 않나 생각이 드네요. 그러나 성폭력 명단 폭로도 자유게시판에서 누군가가 언급했듯 아무도 다치지 않고 단지 떴다,라는 것만으로 되는 상황이 서글픈 따름입니다. 죽일 놈은 죽이고 살 놈은 살아야 하는데... 다 살잖아요.
"<4>정당화의 기술과 사유의 기술
진중권: 제가 보기에 님의 주장은 너무나 강하게 theory-laden 되어 있지요. 그런데 과연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의 문제에 관해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굳이 님이 구성해놓고 계신 혹은 구성하고 계신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게다가 님이 준거로 삼고 계신 그 이론적 틀에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의를 해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책에서 얻은 이론은 종종 사람을 속일 수가 있습니다.
조정환: 이 문단 전체에서 님은 논증되어야 할 것을 이미 전제하고 있습니다. '안티조선의 문제에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 ...거대한 이론이 필요한가. 당신의 이론은 이론에 시달리고 있다'. 당연히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에는 상식만 필요하고 거대한 이론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님의 목적은 상식적인 판단을 내리는 데 있지만, 저의 목적은 상식을 넘어서는 판단을 내리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님에게는 이론이 필요 없고 저에게는 이론이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강조하지 않을 수 없군요.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 되었습니다. 이론이란 이러한 상식을 깨는 관점이라 한다면, 혹은 그람시적 표현에 따라 상식에 대한 비판적 의식에 있다면 안티 한걸레도 이미 상식의 수준이면 안티 안티 한걸레에서 비로소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요? 이에 대해 하이텔 플라자에 가보시길 바랍니다. 한걸레는 이미 많은 이들에게 더 이상 충격적인 단어가 아닙니다. 이들에게 이를 이론적으로 제시해봐야 뭐, 그런 것까지 이론을 동원해서 할 필요가 무엇이 있느냐라고 말할 것입니다. 하이텔 플라자와 같은 곳은 그래도 중간치 먹물들이 노는 곳이어서 그렇다구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우리 아버지도 한걸레의 정체를 잘 알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안티 한걸레의 정체도 알고 있기까지 합니다. 우리 아버지가 정치적인 수준이 높다구요. 요즘 유행하는 택시기사들 만나서 물어보시죠. 지금 대개의 논점 핵심은 다음과 같죠. "너라고 무엇이 다르냐." 김대중은 물론 아직 집권조차 하지 않은 이회창까지, 더 넘어서 권영길과 청년진보당까지, 운동진영 전체에까지,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 이르르는 혐오감이 팽배하여 주체는 없고 오로지 안티만이 환영받는 기이한 세계에서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행해지고 있는 신자유주의. 흡사 노동자가 파업할 때 자본가가 코웃음치며 열가지 사안 중 하나만 수틀려도 파업이 망가지는 상황의 반복. 그럼에도 그나마 해 놓은 아홉가지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시간에 쫓겨 대충 구겨넣은 상황. 겉보기에는 번지르르하지만 속은 곪은 한국차와 같은 모습. 당원이 많아야 기만명밖에 되지 않음에도 한걸레를 비롯한 제도언론에서 과도하게 취급해주는 진보정당들. 뻥튀기의 연속성 속에 몸을 내맡기다가 한숨짓기. 그처럼 재판만 돌입해도 성공적이라고 여기고 있는 출판사 편집장을 상대로 열심히 글쓰기하기. 다중을 위한 글쓰기인가, 출판사 편집장을 위한 글쓰기인가?
"많은 사람들의 동의 여부는 사실 저의 이론활동과는 완전히 독립된 별개의 문제입니다. 저는 오직 저 혼자를 설득하기 위해서 적지 않은 시간을 이론적 사유와 연구에 바치기도 합니다. 위 준법서약서에 관한 자료도 오직 저 자신을 이해시키고 설득시키기 위한 작업 중의 하나였습니다. 요령부득인 것은 님이 사유의 기술과 정당화의 기술을 완전히 혼동하고 전자를 후자 속에 해체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님은 말합니다. "어쩐 주장이든, 그것을 정당화하는 절차는 간단합니다. [가]그 주장을 논리적 조작이나 경험적 증거의 제시를 통해 모든 사람이 납득하는 상식의 수준으로 끌고 내려가, [나]그 특수해 보이는 주장이 실은 만인이 납득할 만한 상식과 동의적 표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또 님은 말합니다. "그리고 준거가 되는 이 사회상식이라는 것은 가능한 한 덜 theory-laden되어 있을수록 옳을 확률도 크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질 확률도 크지요." 이런 정당화의 기술이 오늘날 우리들의 두뇌를 얼마나 짓누르고 있습니까? 많은 담론들, 나아가 넓은 의미에서보면 상품광고도 이런 정당화의 절차(기술)를 사용합니다. 이 기술에서 저는 님이 저보다 더 뛰어난 기술을 갖고 있다는 점을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님보다는 조선일보가 더 탁월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여기서 반드시 입증해야 할까요?
제게 있어서 사유는 존재자의 구성적 자기언표이기 때문에 정당화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성을 갖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사실이 만인이 납득할만한 정당화의 수준을 얻지 못해도 '도는 것은 지구'라고 생각할 자유는 존엄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해체에 대해서 님에게 말씀드릴 점은 딱 한가지입니다. 저는 님이 팔십년대라면 상기한 대목에서 "해체" 대신 "환원"이라는 표현을 썼으리라 본다는 점입니다. 아울러 님이 말씀하신 '사유'는 보통명사가 아니라 고유명사일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님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 또한 고유명사라고 여기는 '사유'가 가장 뛰어나게 정당화된 것이어서 감히 진중권님이나 조정환님이나 조선일보나 기독교나 헤겔에 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학적이라는 의미라고 저는 봅니다. 저의 관점에서는 조선일보보다 한겨레가, 한겨레보다는 강준만님이, 강준만님보다 딴지일보가, 딴지일보보다 진중권님이, 진중권님보다 조정환님이 더 정당화를 잘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저의 입장에서는 제가 님들보다 정당화를 잘 하는 셈입니라고 스스로를 간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에 대한 제 자신의 모든 환상을 지워가는, 혹은 폐지하는 운동이 사유의 근본운동이 될 것입니다.
"<5>자유게시판 토론의 방법에 대해서
진중권: 님이 '토론자료'를 올려놓는 방식으로 논의를 이끌어가려고 하시는 것은 바로 그런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경우 님과 논쟁을 하려면 먼저 님이 '케리그마'처럼 선포하신 그 추상적인 문장들을 반박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왜? 님이 준법서약서나 안티조선에 대해 내리는 판단의 준거가 바로 그 '토론자료'라는 이름으로 올라온 특정한 '이론'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보기에 이 경우 논쟁은 곧바로 세계관의 싸움으로 비약을 하게 되지요. 즉 논쟁이 아니라 신들의 전쟁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으로는 특정 사안에 대해 자기 견해를 밝히시고, 그 근거가 무엇인지 가능한 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제시하셨으면 합니다. 즉 자기의 세계관의 '선포'가 아니라 (이 경우 논쟁은 구체적인 접점을 찾지 못하고 공전하게 되지요) 타인의 논리와 맞물릴 수 있는 구체적인 논증의 형태로 자기 주장을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겠지요.
조정환: 이 문단은 저의 토론방식에 일정한 해명이 필요하다는 요구로 받아들이겠습니다. 토론자료를 제가 올린 것은 님과 신정은님이 해석하신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입니다. 즉 님을 권위적으로 무시하거나 혹은 제 방식대로 토론을 이끌 어떤 술책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다섯 가지의 문제를 하나의 작업과제로 설정하고 이를 연구해 보겠다고 했는데 님이 특별히 숙고된 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그 문제들에 대한 '답안'을 내놓았기 때문입니다. 기회가 되면 왜 제가 그것들에 숙고된 내용이 담겨있지 않다고 보는지 밝히겠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연구의 시간을 확보하고 있을 수 있는 님의 다음 기고행위가 고려해야할 지점들을 지적하기 위해 응답이 아니라 자료의 형식으로 그 게시물을 올린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나쁜 것은 나쁜 것이다'라는 동어반복적 분노의 '자명성'을 다시 생각해 보도록 돕자는 취지를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보기에 문제 지점은 답을 하는가 마는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답이라고 생각하는가, 답은 어떤 속도로 주어져야 하는가에서 발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견해를 밝히라는 님의 요구를 제가 앞으로도 충족시킬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언어라는 것 자체가 '서로 알아듣기 위한 실험'이지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음'이 언어행위의 전제조건은 아니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소통불가능성을 타개해 나가는 창조적 소통의 노력이 언어활동입니다. 언어는 명백한 알아들음을 통해서도 소통의 길을 열지만 때로는 타자 앞에서의 알아들을 수 없는 저 막막함이 새로운 소통의 공간을 열기도 합니다. 모든 언어는 실상은 외인어, 비유하자면 외국어입니다. 실제로 저는 님의 말 속에서도 저로서는 '알아 들을 수 없는 언어'를 드물지 않게 발견합니다. 예컨대 '상식에 기초하여 전개될 수 있는 실천' 같은 생각은 저를 몹시 어리둥절하게 합니다. 맑스는 '모르면서 행하는 것'이 곧 이데올로기라고 말했지요? 그렇다면 이론과는 무관한 자리에 독립해 있는 '상식'은 앎의 형태인가요, 아니면 '모름'인가요? 오리무중입니다.
쓰고 보니 또 진중권님과 안티조선운동을 동일시한 듯한 느낌을 받는군요. 이것은 전적으로 안티조선 운동의 총체에 대한 저의 지식부족에서 연유하는 것인데 차차 극복해 나가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조그만 실천'님이 제기한 문제에 대해서도 준비가 되는대로 응답할 것입니다. 님이 책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라고 한 점 명심하겠습니다. 이 고마운 충고에 대한 보답으로 저는 님에게 상식에 속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어느 차주 동호회의 회원 말이 자신들의 동호회를 anti도 아니고 nice도 아닌 성격으로 규정
해주기를 바라더군요. 그런 구절을 측은하게 읽다가 님의 마지막 구절을 읽으면서 님과 동질감을 느껴 봅니다. "그런데 중권님, 우리 이렇게 해서 '뜨는' 게 확실합니까? 실수가 없어야 할 텐데......아뭏든 뜨는 것도 참 고생스럽네요" 이러한 멘트로 끝맺는 방식에서 진중권님과 조정환님과 저는 한통속임을 강하게 느껴봅니다. 이러한 멘트가 주는 역설을 세 명뿐만 아니라 다수의 사람들도 인지하지 않을까 예상이 됩니다. 저는 '모르는 척하면서 행하는 것'을 이마골로기라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지+이데올로기의 합성용어로 느림이란 소설도 발표하기도 한 밀란 쿤데라가 언명한 것이죠. 언제 광고는 까고 부술 수 있을까요? 은행이 더 이상 이자를 줄 때를 찾지 못한다면 파산하겠지요. 그렇다고 해서 자본의 운동이 멈추지는 않을 듯 합니다. 근래의 신자유주의처럼. 그처럼 우리의 사랑스런 광고도 자본의 운동에 힘을 입어 열심히 자기복제를 거듭하고 있군요. 저는 제가 마침표가 되리라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은 없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심사는 말하지 않아도 아시겠지요? 저는 언제 상대가 절대로 논박하지 못할 것을 들이민다는 환상을 깰까요? 아마 제가 이 세상을 지배한 이후에 될 것같아요. 그래야 환상이 현실이 되고 그리하여 환상을 만드는 현실 자체가 부정당할 터이니까.
하나, 포르노그라피는 성범죄의 주범인가?
성범죄자의 대부분이 아마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성범죄자가 아닌 많은 남성들과 일부 여성들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대중이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당국이 포르노그라피를 윤리적 목적으로 금지시킬 이유가 없다.
포르노그라피는 성범죄를 유발시킬 수 있다.
하지만 흡연이 암을 유발할 가능성보다 훨씬 적을 것이다.
현재 한국에서 포르노그라피는 금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포르노그라피가 합법화된다 해도
포르노그라피에게만 성범죄의 책임을 전가시킬 수 없다.
흡연을 하는 대중이 반드시 암환자가 되는 것이 아니듯이
포르노그라피를 본 대중이 반드시 성범죄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포르노그라피를 본 일부 대중이
성범죄를 일으키게 하는 사회 구조가 문제이다.
한국에서 포르노그라피는 환상이 아니라 현실이다.
만일 포르노그라피가 환상이라면
대중은 서커스 구경처럼 포르노그라피를 재미있게 본 뒤
현실로 돌아와 자기 일에 전념할 것이다.
그러나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이기에 대중은 현실과 환상 사이에서 방황한다.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이기에
순진한 일부 대중은 자신만 포르노그라피가 현실인지 몰랐다고 투덜거린다.
둘, 포르노그라피는 청소년을 타락시키는가?
타락한 청소년이라면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그러나 타락하지 않은 많은 청소년들도 포르노그라피를 좋아할 것이다.
청소년이 포르노그라피에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다면
당국이 포르노그라피를 청소년 타락을 이유로 금지시킬 이유가 없다.
교과서에 나오는 주변인으로서의 청소년은 없다.
청소년은 실업교육의 산물이다.
사춘기의 청소년이라면 어엿한 성인이다.
육체적 성숙은 정신적 성숙을 동반한다.
그런데 사회구조가 청소년의 육체적 성숙만을 승인하고,
정신적 성숙을 억압하고 있다.
억압의 이유는 청소년을 사회 구조에 순종할 수 있는 대중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만일 청소년을 어른과 구분을 굳이 두어야 한다면
육체적, 정신적 성숙의 경륜 정도일 것이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는 청소년에게 훌륭한 교과서이다.
청소년의 노동을 법률로 승인, 보호하듯이
청소년의 성 또한 승인, 보호하는 취지에서 법률화하면 되지,
청소년의 성을 그 자체 억압할 합리적 이유는 아무 것도 없다.
청소년의 포르노그라피 보기를 등급화 시키면 아무 문제가 없다.
셋, 포르노그라피는 미풍양속을 해치는가?
서구에서는 인쇄술의 발달로 소설과 포르노그라피 분야를 낳았다.
귀족계급에서만 전유되던 외설물이
일부 인문주의자의 일탈로 비로소 포르노그라피가 된 것이다.
이런 이유로 유럽의 지배계급은 정치, 철학과 더불어
포르노그라피를 정치적 이유로 탄압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 목표가 일부 실현되자
포르노그라피는 탈정치화되었고
유럽국가는 19세기 들어서야 미풍양속을 해친다는 이유로 단속할 수 있게 되었다.
대중이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인간은 똑같이 먹고 싼다,를 자각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당국과
포르노그라피의 정치적 용도를 잃어버리자
포르노그라피를 외면한 인문주의자들의 정치적 타협탓이 그 원인이다.
따라서 당국의 미풍양속을 이유로 한 단속은
대중의 미풍양속이 목표가 아니라 지배계급 정책의 변화만을 의미한다.
포르노그라피와 미풍양속은 전혀 상관이 없다.
한국 또한 외설작품들이 정치적 이유로 탄압받았으며,
분단 이후에는 서구 문물의 도입으로 포르노그라피와 미풍양속 단속이 동시에 들어왔다.
따라서 한국의 포르노그라피 또한 미풍양속과 전혀 상관이 없다.
넷, 포르노그라피는 여성을 비하시키는 여성의 적인가?
포르노그라피의 어원은 그리스적 의미에서 매춘부에게 말하거나 그리기이다.
역사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향유자는
남성 귀족에서 남성 인문주의자와 남성 대중으로 확산되어왔다.
16세기의 이태리 인문주의자 아레티노의 작품에도 매춘부가 중심인물임을 찾아볼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는 남성이 같은 남성에게 여성비하적인 표현을 하며
히히덕거리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가 피지배 남성이 같은 지배 남성을 전복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있지만
여성의 입장에서는 언제나 반여성적이었다고 충분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드의 경우에는 같은 남성의 입장에서도 혐오의 대상이다.
특히 파시즘적인 경우에는 한층 더 그러하다.
파시즘적인 작품인 경우 표현과 사상의 자유에도 불구하고 제한할 이유가 충분히 있다.
그러나 표현과 사상의 자유 자체를 박탈할 근거는 없다.
파시즘 또한 대중의 사상과 표현의 일부로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다면
파시즘을 다른 사상으로 극복하는 방안이 연구되어야지
금지시킨다고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시즘이 강화되는 사회 구조를 변화시키는 과제가 요구된다.
이처럼 남녀관계 또한 왜곡되고 굴절된 관계를 변화시키는 지혜가 요구된다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차별의 본질적인 문제가 권력관계라면
성차에 의한 포르노그라피 비판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성정치운동 관점에서 여성운동의 연대체로서
포르노그라피가 훌륭한 역할을 맡기도 한다는 점과
여성운동 관점에서도 포르노그라피를 이용한 정치적 공세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문제는 현재의 여성운동이 포르노그라피를 규제할 힘도 없고,
에로물을 규제할 힘도 없다는 점이며,
이로 인해 대다수 여성들이 여전히 성에 대해 무지하거나
왜곡된 성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여성운동이 포르노그라피를 승인하되
선별적인 태도를 가지는 전술을 유연하게 구사함이 어떨까 싶다.
아울러 최근 서구 여성운동가 일각에서는
에로티카와 하드 코어의 구별 폐지론이 대두되기도 하지만
에로티카와 하드 코어의 분리적 관점이
여성운동에서 본격적으로 제기된 관점임을 지적해 두고자 한다.
다섯, 포르노그라피는 국가의 멸망을 부채질하는가?
역사책은 마지막 왕조 시대가 언제나 성적 타락이 극심했음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왕조는 처음부터 성적으로 방탕했다.
세종대왕은 금욕주의자이지 않았다.
다만 백성을 잘 요리하듯 궁녀들을 잘 요리한 왕이었을 뿐이었다.
왕조의 멸망과 성적 타락이 굳이 관계가 있다면,
왕들이 시대적 변화를 감지하지 못 했거나
시대적 대세에 체념하여 '죽기 전에 신나게 놀아 보자' 정도였을 뿐이었다.
따라서 시대 변화가 문제였지 성적 타락이 문제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또한 논자 중에는 포르노그라피가 자위행위를 부채질한다는 주장을 하는데
포르노그라피가 국가 구성원의 성적 타락을 부채질했다는 뚜렷한 증거도 없기에
지배계급의 정치적 주장으로 간주될 수 있다.
오히려 이들 논자의 말이 맞다면
성이 특정계급에게만 전유되고
대중에게는 자유롭게 영위하지 못 하는 현실을 말해준다는 점에서 시사적이다.
아울러 문명의 발달사가 인간에게 진정 이익인지는 따지지 않더라도
생식으로서의 성에서 유희로서의 성의 변화가
문명의 발달사와 일치된다는 점에서
국가멸망론은 대단히 협소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여섯, 포르노그라피는 종교를 위태롭게 만드는가?
스웨덴 등 북유럽의 경우 기독신앙자가 급격히 줄고 있다.
기독교의 쇠퇴가 포르노그라피의 번성을 낳았다고 보기보다는
현재로서는 여성해방, 성해방의 결과로 기독교가 쇠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미국 청교도나 미국 청교도에 영향을 많이 받은 한국 기독교 세력이
포르노그라피, 성해방, 여성해방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열성적 신앙자는 남성보다 여성이 월등했고,
이는 피억압적 신분인 여성의 지위를 시사한다.
피억압자가 내세의 축복보다 현세의 축복을 받아들이는 경향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포르노그라피는 철학적으로
인본주의, 자연주의, 물질주의, 육체주의, 쾌락주의적 입장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종교의 신본주의, 정신주의, 관념주의, 금욕주의적 입장에서
근본적으로 대립된다 할 수 있겠다.
일곱, 포르노그라피는 도덕과 제도를 문란하게 만들 것인가?
일시적으로 가부장제를 강화시킬 수도 있으며,
일부일처제를 강화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가부장제와 일부일처제는 서구에서 보듯 문명의 발달로 쇠퇴일로에 있다.
성적 기교면에서 본다면 현재 나와 있는 여성 잡지를 통해서도 얼마든지 견식할 수 있다.
여성잡지의 구매력이 있다면
성적 클리닉 코너가 실체라는 점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보다 중요한 문제는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라는 도식의
조선왕조 자녀목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이다.
확인되고 있지는 않지만 한국 여성은 성적 순결에 집착도가 유달리 강하여
성경험 전과 후가 너무나 차이가 난다는 보고가 있다.
이에 따르면 여성이 성경험 후에는 강간당하고서도 신고를 하지 않고,
심지어 강간자와 결혼하는 사례도 있다는 것이다.
아울러 여성이 혼전 성경험을 한 경우
사회 생활에 자신감을 잃는 경우가 상당수라는 것이다.
이 때문에 외국 남성의 경우 한국 여성의 순종미를 무척 좋아한다고 한다.
이는 사회가 남성 위주로 성억압을 하기 때문에
여성을 굴욕적 지위로 고착시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논리가 순결 이데올로기와 영계 신화이다.
반면에 서구인은 물론 중국 여성들도 육체를 고집하지 않아
오히려 사회 생활을 건강하게 보낼 수 있다고 한다.
만일 사랑이 지고지순한 어떤 것이라면 성경험 유무가 문제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은 강간을 당한 여성이 평생 고통을 짊어지게 된다.
또한 그 여성이 행여 결혼을 하더라도
강간 당한 사실을 안 평범한 남편이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는 자명하다.
포르노그라피는 장르의 성격상 교접하는 남녀의 지위를 따질 수가 없다.
문제는 권력임을 극명히 드러낸다.
그 권력이 남성일 수도 있으며, 여성일 수도 있다.
다만 대부분은 남성이라는 것이 문제일 뿐이다.
이는 남성해방 측면에서도 극히 부정적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도덕과 제도를 건강하게 할 것이다.
여덟, 포르노그라피를 통한 성해방이 여성해방을 결과하는가?
일본의 경우 포르노피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일본은 남성 천국 포르노피아이다.
성범죄 신고율이 극히 낮지만
사회 풍토 때문에 신고율이 저조하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의 승인이 곧바로 여성해방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미국의 경우 포르노그라피는 제한적으로 승인되고 있다.
도가 지나친 여성비하적 포르노그라피는 금지되어 있다.
그럼에도 성범죄는 세계 수위를 달리고 있다.
포르노그라피가 여성해방을 가로막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유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제 3세계권과 유사한 청교도 사회, 즉 종교 국가임을 감안해야 한다.
또한 여성에 대한 자립과 안전, 복지정책이
서구유럽에 비해 한층 뒤떨어짐을 지적할 수 있다.
포르노그라피의 규제만이 여성해방으로 가는 길목은 아니라는 점이다.
포르노그라피가 완전 개방되었으며,
여성해방이 제도적으로 90% 이상 실현되었다는 스웨덴의 성범죄는
미국, 한국과 버금가는 세계 톱 수준이다.
이 점에서 포르노피아가 곧 여성해방임이 아님을 웅변한다 하겠다.
한편, 스웨덴과 비슷한 수준인 네덜란드의 경우에는 성범죄가 극히 낮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와 여성해방을 직접적으로 매개시키기보다는
문화적 풍토, 구체적으로는 해당 시민사회를 보다 문제삼는 것이 현명한 듯하다.
아홉, 포르노그라피는 사회변혁에 이바지하는가?
적어도 1791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에
포르노그라피는 그 자체 정치적이었다.
왕족, 귀족, 교회 등 주요 지배계급을 공격하는 수단으로 포르노그라피는 효과적이었다.
포르노그라피는 대중의 사랑을 받으며 유감없이 지배계급의 성생활을 폭로했다.
또한 포르노그라피는 계몽사상과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했다.
포르노그라피 작가와 옹호자들이 대부분 반왕정, 반귀족, 반교회적 입장이었다.
심지어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왕당파조차 포르노그라피를 정치적으로 무기화시켰다.
그러나 혁명 이후 정치적 열기는 식고
포르노그라피는 공중도덕의 차원이 되어
탈정치, 탈철학화되어 문화산업의 최대시장이 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세계 곳곳에서 포르노그라피는 여전히 그 자체 정치적이다.
왜냐하면 사회가 보수적일수록 포르노그라피는 정치적 성격을 가지게 되며,
사회가 파시즘적일수록 포르노그라피는 탄압받고,
작가가 구속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 작가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없더라도 말이다.
따라서 포르노그라피가 백주에 돌아다녀도 사회가 아무 분란이 없다면
그 사회는 상당 수준으로 민주화된 사회가 틀림이 없다고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포르노그라피는 그 자체 정치적이다.
열, 포르노그라피는 예술이 아닌가?
고려시대의 외설적 작품이 조선시대에 와서 금지되며
예술작품으로 취급받지 못했듯이
예술은 통시적으로나 공시적으로 보편적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다.
포르노그라피가 나체를 의미한다면
그 역사는 석기시대의 동굴화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원시 인류의 비너스상이 단지 성적 쾌감만을 자극할 목적으로 만들었을지라도 예술이다.
지배계급에게 전유된 예술이 예술이라면
일부 인문주의자들이 프로메테우스처럼 지배계급의 외설작품을 대중에게 전파한 것이
포르노그라피인 만큼 예술이다.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에 의해 향유되는 대상이 예술로 취급받았다.
모차르트가 궁정에서 연주하지 않았다면
그는 생애 내내 예술가로 대접받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리하여 작가들은 르네상스의 포르노그라피 작가 이후로
끊임없이 고급과 저급의 경계를 붕괴시키기를 의도하면서
예술적 실험을 통해 영역을 넓혀왔다.
그리하여 당대에 탄압을 받던 아레티노의 포르노그라피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훌륭한 예술적 작품인 것이다.
따라서 현대의 포르노그라피도 얼마든지 예술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제껏 그래왔듯이 지배계급은 고전적인 작품만을 인정하고,
당대의 작품들을 탄압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지배계급은 역사적으로 포르노그라피의 예술적 가치를 부정하기 위해
대중과 포르노그라피를 분리시켜 단절을 끊임없이 시도해왔다.
그리하여 포르노그라피가 지배계급에 의해 전유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대중의 사랑을 받아왔다면 민속예술로서의 지위를 갖출 수 있다.
한국의 경우 지배계급은 에로물만 예술로 인정했다.
대중문화의 단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다.
맥루한의 말처럼 대중문화는 지배계급에 의해 부과된 것이기 때문이다.
고급문화만이 지배계급의 문화가 아니라
지배전략으로서 대중문화 또한 지배계급의 문화이다.
따라서 지배계급의 포르노그라피이냐, 아니냐가 예술성의 일차적 기준이다.
포르노그라피는 독자적 장르가 될 수 있는가?
역사적으로 영화감독과 소설가가 탄압받을 때
그들 중 상당수가 포르노그라피를 통해 자신들의 불편한 심기를 표출해왔다.
그러나 지배계급의 중산층 껴앉기처럼
지배계급이 영화감독과 소설가를 수용하면
중산층처럼 그들은 포르노그라피를 외면했다.
한국의 경우 작가다운 뛰어난 작가는 마광수 한 명외엔 없다.
영화감독들도 외면하기는 마찬가지이다.
포르노그라피 작가, 감독이란 경력은 오히려 그들에게 마이너스이다.
그리하여 대부분의 포르노그라피 작가, 감독, 배우들은
무명 시절에 포르노그라피에 출연한 실베스타 스탤론처럼
헐값의 무명작가, 습작가, 배우들이다.
그들이 대부분 형편없는 에로물과 포르노그라피를 만들고 있다.
한국 에로물의 경우 제작사측이 기본도 안 된 감독과 카메라, 배우를 헐값에 사들여
불과 2주만에 하나씩 만들어 짭짤하게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럼에도 포르노그라피가 대중에게 어필하는 동시에
지배계급의 대중 길들이기의 일환이라면
마광수 같은 작가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반역적이고 혁명적인 작가 중의 한 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예술성을 정치성으로 오도받고 있는 마광수 같은 작가의 재조명을 위해서라도
사회구조의 변화와 포르노그라피의 승인이 필수불가결하다.
또한 오늘의 문제소설 등의 베스트셀러물이
남한 최대시장인 오피스걸의 오락물일 뿐임을 감안한다면
포르노그라피적 방식을 교묘히 표절하면서도
마광수와 젊은 작가들을 비난하는 일부 기존 작가들의 뚜쟁이적 정치성을 폭로하기 위해서도
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 필요하다.
아울러 인간의 성, 연애, 사랑이 대중의 관심사라면
기존 시스템에 반발하는 작가들,
특히 예산문제를 고민하는 감독들에게
포르노그라피는 무궁무진한 원천이 될 수 있다.
신프로 구입에 앞장설 만큼
대중들에게 아방가르드적인 상인 정신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던
팔십년대 신촌의 일동장과 대림장 주인에게 감사의 말을 전한다.
당시 그 여관들의 별칭은 프로덕션이었다.
프로덕션이 없었다면 이 글쓰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눈 감아준 민중의 지팡이 신촌 경찰에게도 심심한 사의를 표한다.
무엇보다도 포르노그라피를 보며
열띤 토론을 벌였던 벗들에게 행운이 있기를!
인드라 소금창고에서
그간 진보좌파 사이트에서 놀다 보니
텍스트 마인드에 익숙하여 노하우만을 고려했다.
그런 연유로 멀티미디어 마인드인 노훼어를 고려하지 못하였다.
텍스트 마인드에서는 출처 명만 밝히면 되겠지만
멀티미디어 마인드에서는 위치를 지적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이런 점을 미처 깨닫지 못하였는데
동풍회리님의 덧글에 대해 진지하게 3시간을 생각해 본 결과
상기한 식으로 출처를 밝히는 것이 옳다고 여겼다.
사실 나는 서점에 가서 이 책 저 책 뒤적거리는 취미가 있었다.
이 책을 사러갔지만 이 책을 찾기 위해
여러 가지 책들을 뒤적거리다 보면
유익한 정보를 많이 획득하여
서점을 나설 때는 여러 권을 사가지고 오곤 했다.
나는 이런 충동구매에 대해서는 고칠 생각이 전혀 없다.
나는 이런 점을 고려하여
노훼어의 장점보다는 그 편의성 때문에
단점이 더 많아보였다.
그런 연유로 가급적 회피하려 했는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 같다.
그간의 글들도 시간 나는 대로
상기한 방식으로 출처는 물론 위치까지 드러내게끔
할 생각이다.
다시 한 번 동풍회리님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포 르 노 게 임
96년의 인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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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시판은 '혼자 말하기' 다름 아니다,
다만 연결되어 민주적인 듯 하다,
실시간으로 소통하기도 버겁다,
무엇보다도 마치 자기만을 위한 글쓰기처럼,
그러면서도 오로지 그대를 위한 연시처럼
글쓰기를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채팅은 '혼자 떠들기' 다름 아니다,
다만 흥청망청하니 축제같다,
사람이 매번 바뀌는데
안녕하세요!
처럼 똑같은 말을 하려니 답답하다,
마치 소설 첫장면 같다,
원고지에서 해방되었다면,
구성에서도 해방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정작 하고 싶은 말만 한다면,
단편은 한 페이지로도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도 직접 만나 더욱 따분한 데이트처럼
말하는 게 지겹다,
서울과 제주 사이의 그 머언 그리움 만큼
그리워 할 수 있는 채팅을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스트리터 파이터처럼
인물선택;
뚱뚱한 여자, 대머리 여자, 뼈만 남은 여자, 눈알이 없는 여자
뼈만 남은 여자(클릭)
(선택하자마자
그녀가 입력한 모든 정보와 내가 입력한 모든 정보가 부딪치며
안해도 될 무익한 토론이 말끔히 정리된다,
논점만 명확히 모니터에 떠오른다)
이빨 까시겠습니까?
스토리 선택 :
공적인 정보 교환, 사적인 정보 교환, 성적인 정보 교환, 통음난무
통음난무(클릭)
- 당신과 씹하기 위하여 내가 준비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 벽계수처럼 즉흥시를 지어봐요
- 운을 띄워 주세요
- 사이버
- '사'랑을 하고 싶지만
'이'익이 되는 사랑만 하고 싶어서
'버'림받아도 즐거운 사랑만 하고 싶다
- 딩동댕~~~!
장소를 선택하세요
발리, 파리, 청학동, 김정일 집무실
발리(클릭)
(화면에 뜨거운 태양이 내리 비치는 곳이 나타난다,
뼈만 남은 여자가 걸어온다,
우리는 하루종일 같이 누워 관능적인 농담을 나눴다,
서로 다 알기 때문에 뽀뽀만 해도 오르가즘을 느꼈다)
- 이제 뼈만 남은 여자는 지겨워
- 나도 조루뿐인 남자가 지겨워
- 언제 이 프로그램 버젼업이 될까?
- 글쎄, 곧 되겠지
남한에는포르노가배회하고있다
포르노는죽음에이르는병이다
포르노는시지프스의신화이다
우리는공룡처럼타살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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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진실의 연관이야말로 제일 중요한 연관이다. 객관적 진실은 획득할 수 없다는 것을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우리는 수많은 주관적 진실을 끌어내고 이것들을 평가하고 우화화해서 역사를 만들고, 어떤 신의 눈으로 해석하여 '실제의' 사건을 각색한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이렇게 객관적 사실이 왜곡되고 있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우리는 여전히 객관적 진실을 획득할 수 있다고 믿는다. 또는 우리가 이것을 믿을 수 없으면 43%의 객관적 진실이 41%보다 더 좋다고 믿어야 한다.; 101/2장으로 쓴 세계 역사; 줄리안 반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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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 책을 쓰는 데는, 나 자신의 것일 수 없는 강박적인 생각이 따라붙는다. 그것은, 책이라고 하는 것은 스스로 말하는 것이라는 생각이고, 결국 범인을 캐고 들어가면 우리 모두가 유죄라고 하는 생각이다.; 나는 이렇게 장미의 이름을 썼다; 움베르토 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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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는 유사하게 만들려는 모든 노력을 포기했다. 그가 전혀 위장하려고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사기행각을 벌이려는 게 아니라는 설득력이 있는 증거이며, 그와 같은 방법 외에 상대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간명한 방법은 없다고 생각했다; 황당무계한 사기꾼 톰 카스트로; 보르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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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전혀 춥지 않아요. 저는 원래부터 몸에 열이 많은 여자인가 봐요. 한겨울에도 전 맨발로 다니는 것이 좋은 걸요. 잠을 잘 때는 물론 홀딱 벗어야만 기분좋게 잠들 수 있구요. 저는 잠옷을 입고서 잠자리에 드는 여자들을 이해할 수 없어요. 낮에 옷을 입고 사는 것도 억울하고 지겨워 죽겠는데, 왜 잠자리에서까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일까요?; 졸립고 지루한 일장; 마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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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립고 지루한 글쓰기가
지금처럼 환영받는 때는 일찌기 찾아볼 수 없었다.
물론 여전히 수많은 이들은 포기하고 나중에 읽어야지,하고 글읽기를 단념하지만,
바로 그러한 이유로 극소수의 이들은 도전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환영이란 단지 이런 극소수의 모험가들이 조금 더 늘어났다는 것일 뿐이다.
세상이 변했을까?
그들은 내게 이십년 전에도 말했다.
"나니까 읽지."
그는 이 말을 던짐으로써
내 글에 대한 특별한 독자로서, 주석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한다.
문제는 있다.
그들 중 일부가 프랑스 철학자 글을 번역한 책을 읽기보다도 더 힘들다는 내 글에 빠졌을 때
발생하는 현상 중 하나가 남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남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해가 가는데... 그리고 쓰는 이도 이해가 가는데...
왜 그들은 이해를 못하지?
우리는 또한 왜 그들을 이해할 수 없지?
공리가 달라서?
아니다.
우리는 같은 공리를 내세우고 있다.
같은 전제 말이다.
그런데 같은 공리 속에서,
같은 전제 안에서 전혀 다른 결론을 도출하고 있으니 황당무계할 수밖에.
대개는 다른 공리를 내세워 불일치의 평행선을 달린다고 하지만...
..............
하여간 왜 이 글을 썼느냐.
숨겨져 있다고 믿는 것일수록 도둑놈의 손쉬운 먹잇감이 된다는 것이다.
<네이버 이미지 검색>
....................
세상이 변했다,
나니까 읽지에서
나도 너처럼 쓰지로...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세계로,
그리하여 모두가 이해하는 세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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