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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결 탄백신화(坦白神話)
2004. 5. 28. 7:1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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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97년에 쓴 것 같은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 Pontifex maximus가 뭔지 아세요?"
나는 당황하였다. 술집에서 별의별 꼬락서니가 우글대기는 하지만 등줄기에 벌레 낀 듯 나타난 그가 너무 어이없었다.
"로마 교황의 정식 명칭이죠."
그는 낯짝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문자답을 되풀이하였다. 나는 흐물대는 그에게 울분이 치밀기까지 하였지만 꼿꼿한 자세를 잃지 않았다.
밤이 이슥해질수록 카페 <히아킨토스>*1에는 모이미들 - 나는 <히아킨토스>의 단골들을 이렇게 부르길 좋아한다. -이 제법 북적였다. 요즘 <히아킨토스> 모이미들의 옷차림이 화려해졌다. 큼지막한 칼라와 십자가 목걸이를 청아하게 보이게 하는 희끗한 마이, 날카롭게 삐쳐 나온 굽 높은 구두를 옴팍 가린 통바지가 눈에 많이 띄었다. 그러나 나처럼 잘 다려 입은 양복쟁이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크로스 오버 재즈 풍의 노래가 간간이 터지는 웃음소리와 고성과 섞여 꾸깃꾸깃한 호주머니를 헤젓는 느낌이었다. 찰나적이지만 혼자이어도 좋은 분위기가 좋았다. 최소한 그가 난 데없이 내 옆에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더 이상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신청했던 반젤리스의 <어느날 오후>를 감상한 나는 <히아킨토스>가 이제 축축하기만 하였다. 육감이라는 게 있다. 스페인 풍의 무곡이 흐르는 카페를 뒤로하고 나는 거리로 나왔다.
쌀쌀한 한기가 발걸음을 휘청이게 하였다. 취기가 엄습했다. 후회하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하지만 엉망이었다. <히아킨토스>부터 말썽이었다. 결혼 이후에 찾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잦아진 걸음이다. 욱하는 알 수 없는 기운에 휩싸여 방향감각 없이 어정대는 몽환이었다. 나는 이제 경제 성장의 중축이라는 삼십대 중반이었다. 한창 일할 나이인 만큼 때로는 견디기 힘들 정도로 축적된 돌맹이들이 튀어나왔다.
오늘 석회 때였다. 소장이 실적 때문에 내게 한소리 했다. 어제 오늘이 아니었다. 또 나만 듣지도 않았다. 하지만 참고 눅눅히 넘어가기에는 내 가슴이 물쩡했다. 덕분에 동료들의 '저녁에 딱 한 잔 OK'의 유혹에 따라나섰다.
"멘스야. 이젠 우습지도 않다고."
"멘스라면 생리대라도 있지, 그놈의 멘스는 대책이 없다니까."
우리는 이냥저냥 목적 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다 가끔 소장 욕을 할 때만 반짝했다. 반복되는 일과는 퇴근 이후에도 이어졌다. 자동차 카탈로그를 보며 따분해 하는 얼굴들, 깐깐한 구입자들의 요구, 회식에서조차 가중되는 회사의 압력 등 모든 불가피한 만남이 무의미한 곡선을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강남의 미망인 이야기 들었어? 땅재벌인 일본인의 후처로 들어 갔다가 혼자되었다는 여자 말이야. 후사가 없어서 재산을 독차지 했다는데..."
"미용실 들렸다 팁으로 백만 원을 뿌렸다는 여자? 요즘 그 여자에 눈독 들이는 제비들이 비상이래. 하여간 누가 물어 갈 지 복 많은 놈일 거야."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때,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
"제기랄, 이 짓 때려 치고 나도 호스트바에 나가 님도 보고 뽕도 딸까?"
나는 말없이 소주잔만 비우다 어물쩡 한마디하였다.
"그짓도 쉬운 줄 알다간 오산이지."
순간 좌중이 조용해졌다. 내가 말을 잘못하지 않았으나 나는 잠시 동안의 떨떠름한 분위기를 이겨내지 못하였다. 술자리는 곧 화기애애해졌다. 2차로 룸카페를 가자는 결의까지 이뤄지기도 했다. 나는 슬며시 빠져 나왔다. 술을 마시고 싶긴 하였지만 혼자이고 싶었다. 사실 내가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남자가 바람 피면 여성도 피고 남자가 여창과 자면 여성도 남창과 잘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누군가가 남자들에게 그짓을 하라 시킨다면 화 낼 것이 틀림없다. 한편 남자들은 이 직업에 대해 호기심도 있다. 그러나 남자가 얼굴값으로만 사느냐는 구시대적 통념에 따라 무능력의 표본으로서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종합해 보면 설사 그런 남자가 있더라도 쉽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 내가 잘 알기라도 하는 양 말했으니 뭉턱 지나치기는 어려웠다. 그러나 사정은 마찬가지 아닌가? 자동차를 팔 건 무엇을 팔 건 웃음을 팔고 몸을 파는 것은 동일하지 않는가? 생각이 거듭되니 지하철을 타고 곧장 집으로 들어갈 마음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채린이 보고 싶으시다는데."
출근할 때 아내가 내게 한 말이었다. 나는 답변 대신 자고 있는 채린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아내도 내 답변을 기다리지 않은 듯했다. 애초에 차를 놔두고라도 집 근처의 포장마차에 들려 술 한 잔 걸치고 들어갈 요량이었다. 그러다 <히아킨토스>를 찾았다. 택시들이 많이 지나갔다. 손을 내저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런데 설핏 <히아킨토스>의 그가 어른거렸다. 내 착각인지 모른다. 그가 무어라고 지껄이는데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Pontifex maximus가 뭔지 정말 모르십니까?"
외박이 가능했는데 그 얼치기 때문에 일찍 귀가했다. 채린이가 보고 싶었다. 벌써 몇 번째란 말인가?
다음 날 아침 회사에 그가 찾아왔다. 그는 차가 필요할 지 모른다고 운을 떼었다. 그리고 그는 낮에 바쁘므로 저녁에 자기집으로 찾아왔으면 하는 뜻을 넌지시 내비쳤다. 자동차 영업을 하다 보면 고객의 집을 찾는 일이 허다했다.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그는 연락처와 약도가 적힌 메모를 내게 전해 주고 갔다. 영문을 모르는 동료들은 아침부터 운 때가 맞는다며 축하했다. 그러나 나는 심드렁할 뿐이었다. 그가 어찌 알고 회사에 찾아왔을까? 난 술에 취했었다. 내가 그에게 명함을 전해 주었는가? 기억이 없다. <히아킨토스>의 주인이 가르쳐 주었는가? 아니다. 불문율이었다. 그럼 어떻게 알고 왔을까? 능글맞은 그가 꾀를 내어 수를 내었다. 선량한 이들의 쓸데 없는 자비심으로부터 내 거처를 알아냈음이다. 그래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서점으로 향했다. 책을 뒤적였다. 그의 수수께끼를 알아낼 작정이었다. 다행히 찾을 수 있었다.
Pontifex maximus : 로마 교황의 정식 명칭. 원래 의미는 다리를 놓는 사람. 고대 로마의 국가 제례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나타내었던 말이 후일 국가의 수장을 일컫는 명칭이 되었고 기독교의 영토 확장에 따라 종국에는 교황의 이름으로까지 쓰여짐.
다리를 놓는 사람? 건설업계에 있을까? 아니면 카톨릭계에 있을까? 자동차 영업 사원 입장에서는 고객의 직업을 염두해야 한다. 처음에는 차를 살 사람인가, 안 살 사람인가였다. 그 다음에 그의 연락처였다. 그가 서둘렀지만 나는 그의 명함을 청하지 않았다. 그가 차를 구입할 위인이 아니라는 직감탓이다. 내 영업 경력이 횟수로 사년이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고 영업 삼년이면 달동네 사람도 덤태기를 씌운다. 나는 그의 집에 가지 않겠다고 결정했다. 택시 AS때문에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사정이었다. 운행 중 계기판 RPM이 춤을 춰서 말썽이었다. 밤새 근처 카센타에서 주물럭거렸다 한다. 그러나 원인 불명이었다.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와서 전화를 걸었다.
"차 가져가슈."
대뜸 하는 말이었다. 신경이 곤두설만하였다. 차로 먹고 사는 사람 아닌가? 밤새 차와 씨름을 하였다니 욕이 안 나옴이 불행중 다행이었다. 이미 차가 공장에 있었다. 먼저 출근했던 동료가 연락을 받아 놓았다. 나는 택시 운전사와 종일 공장에 있었다. 엔진과 연결되는 흡기 계통이 문제였다. 차를 고치니 볼멘소리하던 택시 운전사가 무척 기뻐했다. 그와 헤어져 사무실로 돌아올 때 아내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연락을 취했다.
"나야. 어머니가 며칠 더 있으래. 몇 번 사양해도 저러시니 할 수 없잖아. 채린이는 잘 있어. 그럼 이만."
그를 만나러 가야겠다. 나는 차를 몰고 묻고 물어 찾아가니 그가 없었다. 몇 번 문을 두들겨도 인기척이 없었다. 내 예상이 맞았다. 믿을 수 없는 위인이다.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의 속셈은 무엇인가? 허탈하기가 그지 없었다. 도깨비에게 홀린 기분이었다. 내 꼴이 뭔가? 이럴 때 처참함은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나는 학생 지하 조직에 가입했다. 졸업하고 재야 단체에서 상근자로 일했다. 그러다 동료들이 하나둘 빠져나갈 때마다 나는 내가 먼저 나갈 일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그때 구소련이 붕괴되었다. 나는 재야 단체에서 나왔다. 이럴 때 역시 술이었다. 피로는 쌓이고 짜증은 더해 가고 일상은 엿같았다.
일탈이 유행이었다. 결혼한 이들이 한두 번쯤 혼외정사를 했다 한다. 아내를 떠난 것이 아니라 대개 매너리즘을 탈피하려는 수준이었다. 안 했다는 사람이 되려 거짓말쟁이로 몰리기 일쑤였다. 나 역시 최초의 시청 이후로 에로 비디오를 일탈 도구로 삼았다. 그때 최초의 감흥을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고교 시절 나는 선생님들에겐 말썽꾸러기였다. 나의 환경은 유복했다. 다만 내가 하는 일마다 꼬이었다. 이상하게 마땅치 않았다. 어릴 적부터 화장실을 가서 나란히 오줌을 누지 못했다. 탈의실 같은 공간이 질색이었다. 사촌형은 사춘기라고 단정했지만 나는 수긍할 수 없었다. 반 친구들은 일찌감치 나를 유별나게 취급했다. 준수도 마찬가지였다. 준수는 자신의 신상 내력에 대해 말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입 통신은 그가 포주 아들이라 하였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가지지 않았지만 서로에 대해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어느 날 오후, 준수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속삭이듯 말했다.
"우리 집에 갈래?"
나는 준수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준수집은 정말로 창녀촌으로 알려진 여관 골목가에 있었다. 준수는 큼성큼성 언덕을 올라가서 한 여관 건물을 가리켰다.
"우리 집이야. 들어와."
정말 준수는 포주 아들일까? 나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한번도 여관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인의 입이 두려웠다. 한편으로 포주 아들이면 어때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준수가 제안을 했고 내가 승낙한 일이지 않는가? 사내가 약속을 하면 삼수갑산이어도 간다. 나는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여관 문을 열었다.
끼이이이이이이.....................................
"뭐하고 있니? 빨리 올라와."
준수가 계단 위에서 나를 불렀다. 계단을 올라갔다. 각층마다 누렇게 니스칠한 문들이 쪼르르 열을 지어 있었다. 층마다 칫솔, 치약, 수건 등이 놓여져 있었다. 준수의 방은 4층 외진 골방이었다. 그를 따라 들어갔다.
"별 거 없지?"
그의 말대로였다. 책상과 이동식 옷장, 침대와 TV. 책꽂이에는 교과서와 참고서 몇 권과 어느 집에도 꼭 있는 전집류가 제멋대로 꽂혀 있었다. 벽에는 전영록 사진이 어지럽게 붙여 있었다. 당시 전영록의 인기는 천정부지였다. 우리는 짜장면을 배달시켜 맛있게 먹었다. 나는 준수더러 키는 작아도 귀엽게 생긴 친구라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지 않느냐 물었다. 준수는 아니라 답변했다. 그가 안경을 벗고 안경을 닦을 때 그가 소담스러이 웃으며 뭘 보니 할 때 나는 그가 참 멋있었다. 준수는 학교 공부에 흥미가 없었다. 대신 잡학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여관 이야기도 숨기지 않았다. 그는 나보다 어른스러웠다. 세파와 성에 대해 예민할 여건에 있으면서도 유난스럽게 긍정적이지도 부정적이지도 않았다. 가끔씩 어처구니 없이 일을 벌였다.
"우리 포르노 볼래?"
준수는 손님들한테 보여 주는 비디오를 몰래 보자 하였다. 준수가 TV 뒤쪽을 만지작거린 뒤 전원을 켰다. 영화가 막 시작되었다. 자막이 없다. 아쉬웠다. 하지만 이해를 할 수는 있었다.
한 독신 여교사와 두 명의 고교생이 등장 인물이었다. A학생은 여교사를 연모하고 있었다. B학생은 이를 눈치채고 여교사를 미행했다. 여교사는 퇴근길 버스에서 흥분을 했다가 승객이 쳐다보자 여교사는 안색을 차렸다. 옆 건물에서 망원경으로 B학생이 감시하는 줄도 모르고 집에 도착한 여교사는 자위 행위를 했다. B학생은 여교사에게 위협을 가했다. 협박을 못이긴 여교사는 출근 옷차림을 하얀 블라우스의 노브라로 입었다. 실수인 척 B학생은 그녀의 옷에 물을 끼얹었다. 크고 동그란 그녀의 가슴이 드러났다. 학생들이 술렁거렸다. A는 어쩔 줄 모르면서도 그녀의 가슴에 매혹된다.
우리는 얼굴을 붉히며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았다. 우리는 서로가 같은 사람이었음을 알았다. 우연스레 서로의 손이 살며시 겹쳐졌다. 그의 손이 참 포근했다. 나는 그의 손을 쥐었다. 그도 내가 하는 대로 놔두다 손을 올려 나의 머리칼을 만졌다. 나도 그의 머리칼을 만졌다. 그의 머리칼이 허기진 목구멍처럼 엷게 떨렸다. 그는 나의 머리가 무척 차갑다 말했다. 어둠 속에서 TV 화면처럼 우리는 서로의 눈을 마주쳤다. 그의 눈은 뜨락에서 솔잎을 흔들고 가는 바람 같은 눈이었다. 그후 우리는 '함께 포르노 보기'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우리는 비밀을 지켰다. 그후 우리는 수인선을 타고 소래 포구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숨가쁘게 소금 내음이 일던 갯벌에서 우리는 회를 먹으며 어린아이들처럼 사진도 찍으며 놀다가 왔다.
집에 다다랐다. 운전이란 묘했다. 할수록 방만해졌다. 처음엔 대개 걸어다녔는데 점차 꼼짝하기 싫었다. 다리부터 느슨해지더니 배가 푸둥푸둥하고 목이 뻐근해지고 시야가 가물해지고 마침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운전은 편리했다. 하지만 온 몸이 쑤셔 대는 통에 무엇이 편리하고 편리하지 않은 지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삶이란 이럴까? 아내의 친정행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심사가 울컥대었다. 훌훌 털어 내고 싶지만 거머리 달려들듯 내 삶에 꽉 붙어 있었다. 나는 아내를 사랑한다. 보고 싶었다. 처가에 연락했다.
"당신? 보고 싶다고? 다 지난 일 아냐? 밤이 깊었어. 이만 끊을께."
모두 공평히 똑같이 태어난다면 얼마나 좋을까? 영화 <데드 링어>에서는 쌍둥이들의 분리된 삶과 공동 운명체라는 내용을 다루었다. <데드 링어>의 사전적 의미는 꼭 같이 닮은 사람이나 물건이라는 속어였다. 아내와 나는 그럴 수 없는가? 아내를 처음 만날 때 나는 실업자였다. 젊은 날의 절망은 누구나 치루는 홍역이긴 해도 내 경우는 심했다. 그때, 나를 구출한 사람이 바로 그녀였다. 그녀는 날 감동시켰다. 우리는 결혼했다. 운이 풀려 나는 취직을 했고 일년 후 채린이가 태어났다. 내가 소망하던 가정 생활이었다. 흔들의자에 앉아 재간둥이 채린이가 엉금엉금 기는 걸 보며 나는 누구인지도 모를 신에게 감사를 드렸다. 대량 구입을 받아 놓은 때여서 힘에 부쳐도 어느새인가 모르게 솟구치는 희열을 느꼈다. 죽을 힘 다해 여기까지 왔다. 그런데 왜 우리 부부가 이렇게 되어야만 했는가? 준수가 보고 싶었다. 그라면 내게 말 없이도 위로를 해줄텐데... 그러나 준수는 내 곁에서 떠났다. 메마른 딸꾹질처럼 담배를 끊임없이 물어 대도 길고 긴 밤이었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출근했다. 동료들은 속절없이 간밤에 무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괜한 참견을 하였다.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사무실을 나와 한강 고수 부지로 차를 일찌감치 몰아넣고 드러누웠다. 청량한 하늘을 바라보았다. 끝없이 준수가 생각났다. 준수가 떠난 이유는 치정이었다. 나는 그와 대학 입학 후에도 자주 만났다. 그를 만나면 내 마음이 쾌활해졌다. 가진 물건을 서슴없이 주었다. 준수는 특유의 싱긋하는 얼굴로 멋쩍게 웃었다. 매년 우리는 우리가 처음 만난 날을 정해 소래 포구로 갔다. 대학 3년때 만선에 늘어선 아낙네들의 생(生)절은 횟감을 안주삼아 걸쭉한 막걸리를 들이키며 우리는 서로 선물을 주고 받았다. 그는 내게 반젤리스 앨범을 주었다. 나는 한 돈 짜리 금반지를 선사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준수가 나를 피하는 눈치였다. 준수의 행동이 점차 눈에 알리자 나는 깊고 어두운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였다. 행복이 깊으면 불행은 더 깊다던가? 막걸리를 얼굴에 부어 대며 드러내 놓고 울부짖었다. 그러나 한번 떠난 준수의 마음은 돌아서지 않았다.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나는 억수로 소주를 먹고서 준수를 찾아가 따졌다.
"나, 애인 생겼어."
날벼락이었다. 이 무슨 얼토당토한 말인가? 준수는 잘 쓸어서 담듯 사근사근 내게 설명했다. 나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래도 추한 모습 보이기 싫어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간신히 축하한다는 말만 하고 뒤돌아 서서 뛰어갔다. 그의 연인은 음대생이었다. 음악을 좋아하던 준수의 선택다웠다. 난 끓어오르는 질투가 머리끝까지 꿰뚫었다.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에게 나는 그를 죽도록 사랑한다 말했다. 그를 놓아 달라고 말했다.
"준수씨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하지만 이젠 그를 놓아주세요."
그녀는 동성애를 이해하였다. 준수가 이미 고백했다 말했다. 내 치졸한 계산이 엉망이 되었다. 동성애를 말하면 정나미가 떨어질 줄 알았는데 허사였다. 나는 이미 이성을 던져 버렸다. 그의 비밀을 털어놓기로 하였다.
"그가 남창이었다는 사실도 아십니까?"
제대로 먹혔다. 그녀는 어지러움에 쓰러질 뻔했다. 나는 보다 단호히 말해야했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어야 한다. 나는 음대생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다. 나와 준수는 나란히 대학에 실패하였다. 우리는 대학 진학 때까지 만남을 자제하기를 서약했다. 나는 학원 등록하여 열심히 공부했다. 가끔 머리를 식힐 겸 짬 내어 들리는 곳이 희망 다방이었다. 희망 다방은 야한 비디오를 잘 보여 준다는 소문 때문에 꽤 장사가 잘되었다. 더구나 희망 다방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대형 화면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소문과 달리 감칠 맛나는 영화는 드물었다. 상영된 영화 제목들만 보아도 뻔히 알 수 있었다.
여감방, 밀림의 야성녀, 저주 받은 성, 불륜의 정사 등등...
나는 비디오만 보면 머리가 개운하게 풀렸다. 커피 한 잔을 시켜 놓고 들여다 보고 있으면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어느 날 준수가 찾아왔다.
"너? 남창이라고 알아?"
나는 놀랐다. 그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밴드에도 가입한 고교 선배가 있어 준수는 연습실에 잘 들렸다. 그연습실에는 고교 선배와 아는 사람이 가끔씩 왔는데 그중 한 사람이 준수를 보고 색다른 제안을 하였다. 여자들과 만나 술 먹고 이야기만 잘 나누면 용돈 정도는 넉넉히 벌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악기를 구입할 수도 있는 액수인가요?"
준수는 큰 흥미를 느꼈다. 악기 값이 만만치 않았다. 집에서 모르는 일이니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가 간 곳은 암존(暗尊)동의 어느 바였다. 준수에게 제안했던 사람이 지배인이었다. 처음 일을 할 때는 무척 긴장했었는데 예상 외로 싱겁게 끝났다. 지배인 말대로 여자들이 술 먹을때 잔 채워 주고 묻는 말에 고분고분 답하기만 하면 되었다. 가끔씩 여자들의 짓궂은 농담에 준수는 얼굴만 홍시처럼 되었다. 일이 끝나고 지배인은 준수에게 네 얼굴을 발가스름하게 만들고 싶다며 오히려 칭찬했다. 그러나 준수는 악기를 구입하면 그만두리라 생각했다. 그날도 별 일없이 끝난 하루였다. 그런데 지배인이 준수에게 메모를 전달했다. 메모에는 숫자가 씌어 있었다. 준수는 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럼 그간의 네 몫은 없어."
지배인은 그에게 협박을 하였다. 준수는 호텔에 갈 수 밖에 없었다. 선택이 없었다. 문을 열었다. 중년 여인이 누워 있었다.
"숫총각이라며?"
그는 옷을 벗었다. 이불속으로 들어갔다. 빨리 치루어야 했다. 그녀의 입이 하마처럼 벌어졌다. 하마의 매캐한 냄새가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는 이불을 제쳤다. 하마의 몸체가 드러났다. 쭈글쭈글한 아랫배가 태질을 당한 개구리 배처럼 들쭉날쭉했다. 하마의 거시기가 보이지도 않았다.
"했어? 했구나."
그는 끝내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누구보다도 그를 잘 알았다. 그는 다만 공부에만 전념한다고말했다.
음대생은 마른 숨조차 쉬기를 거부한 듯 한참 동안 울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던 울음이 정력이 드센 남자의 분출처럼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나는 그녀에게 수건을 건네주었다. 그녀는 고맙다고 했다. 나는 준수가 음대생과 헤어졌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준수는 나에게로 다시 돌아오겠지. 그러나 준수는 내 예상을 빗나가게 하였다. 준수는 군대 간다고 말했다. 나는 가지 말라 애원하였다. 준수는 체념한 사람처럼 반지를 놓고 내 흐느낌을 뒤로했다. 그는 제대 후에 가족을 따라 남미로 이민을떠났다. 나에게 아무런 소식도 전해 주지 않았다. 그때 내가 재야에서 이제나저제나 손을 놓으려는 때였다. 그가 떠났다는 소식을 듣자 나는 재야 일을 때려치웠다. 그리고 폭음을 하였으며 아무 데서나 취해 잠들었다. 더이상의 환난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때 음대생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시켜 주었다. 그녀가 바로 지금의 아내였다.
삐삐가 호되게 울렸다. <히아킨토스>의 그였다. 어제는 급한 사정이 있었다고 하였다. 지금 만나고 싶으니 괜찮다면 집으로 오라고 말했다. 나는 안 된다고 따끔하게 말해 주었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그럼 오늘 아무 때나 오고 싶을 때 오라며 할 말 다했다는 듯이 전화를 끊었다. 나는 불쾌했다. 이런 무례한 자가 또 있을까? 방귀뀐 놈이 성낸다더니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이다. 땅거미가 서서히 지고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그를 찾아갔다. 그에게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의 무례함을 따지기 위해서였다. 문은 열려 있었다. 나는 몇 번 소리쳤다. 아무 반응이 없었다. 이왕 온 걸음이었다.
문을 여니 좁다란 계단이 소라 껍질처럼 나타났다. 내가 마치 하데스에게 납치 당한 펠로세포네 같았다. 계단을 따라 내려갈수록 깜깜했다. 마지막 계단을 내려섰다. 지옥이었다. 그러나 시야가 어둠을 이기자 의외로 아늑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지옥이라는 뜻의 영어 HELL이 본디 자궁을 모셔 둔 곳, 부활을 위한 성스러운 동굴이라는 본디 뜻처럼 말이다. 문득 어둠 속에서 빛날 때가 가부장제를 넘어서는가 하는 의문이 떠올랐다. 내부는 방 하나와 거실겸 부엌의 단촐한 구조였다. 그리고 벽면을 몰아세우듯 대형 액자들이 그득했다. 에펠탑 전경, 맨해턴 야경, 고대 축조물로 보이는 아치형 가교, 그가 찍은 것으로 보이는 끊어진 성수 대교 등등. 그는 역시 없었다. 나는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비디오 테잎 하나가 눈에 띄었다. 결정을 내렸다. 테잎의 표제는 야곱의 사다리였다. 나는 비디오를 켜고 TV화면을 응시했다. 그가 올 때까지 기다리자.
야곱의 사다리는 야한 영화가 아니었으나 나에게 묘한 흥분을 자아내게 하였다. 제이콥이라는 주인공이 베트남전 참전 당시 자신도 모르게 군당국에 의해 복용되었던 환각제로 - 환각제의 이름이 사다리 LADDER였다. - 인해 종전 이후에도 끊임없이 환각의 고통에 시달리며, 그 고통의 뿌리를 찾으려고 애쓰다가 결국에는 죽는다는 이야기였다. '플래쉬 댄스', '나인 하프 위크', '은밀한 유혹' 등 감각적인 영화를 만든 아드리안 라인 감독다운 작품이었다. 약을 먹은 병사들이 제 정신이 아닌 채 마구 총질을 해대는 끔찍한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한 명을 강간하면 재미없다, 수십 명을 강간해야만 흥미롭다. 내 고통과 슬픔을 보상할 수 있다면.사랑을 해도 지독하게 물고 늘어져야 한다. 하지만 죽음을 두려워하고 삶에 매달린다면 악마가 영혼을 삼킬 것이며 스스로 죽음을 받아들인다면 그 악마가 바로 고통을 해방하고 평화를 주는 천사가 되리라는 대사는 너무나 불쾌하였다. 무슨 소리인가? 죽어라?
그때 인기척이 났다. 그가 왔다. 나는 그제야 그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영화배우 마이클 더글라스처럼 툭 튀어나온 주걱턱, 팀 로빈스같은 훤칠한 이마, 그리고 직선으로 내리꽂는 코는 강인한 인상을 심어 주었다. 해병대 스타일이었다. 그러나 눈매만은 누런 담배 연기같았다. 준수와는 전혀 달랐다. 그는 약간 흐릿한 눈으로 나를 힐끗 보더니 냉장고에서 술을 꺼냈다. 찬장에서 먹다 남은 이상한 안주를 꺼냈다. 고추장과 마요네즈를 섞어 만든 멸치 사라다였다. 그는 나에게도 한 병을 주더니 병째로 마시고 말을 꺼냈다.
"Pontifex maximus의 뜻을 안 것을 축하하오."
이 무슨 기분 나쁜 말인가? 마치 나를 잘 안다는 그의 말투가 충분히 내 기분을 상하게 하였다. 게다가 반말조라니 보기에도 한참 밑인 듯한 이십대 중반인데. 나도 홧김에 술병을 비웠다. 그는 술이 좀 더 들어가니 내가 따질겨를이 없이 마구 말을 내뱉었다. 대개 혼잣말이었다. 에펠탑의 설계자 구스타프 에펠은 본래 꿈이 화학자였는데 인연이 그를 위대한 기술자로 이끌었다. 사람들은 다리 길이를 전장 길이로 따지지만 실제로는 교각, 혹은 주탑 사이의 길이, 즉 경간이 건설업계의 관례이다. 산업 혁명은 철과 콘크리트의 신소재로부터 이루어졌는데 특히 철의 발전이야 말로 우리가 눈여겨봐야 된다. 다리의 역사는 곧 근대화의 척도이다. 내가 듣건 말건 떠들었다. 그는 또 테크노 파워이니 라멘교의 구조이니 아치교의 원리 등을 떠들었다. 각 다리의 세세한 구조를 찬미하기도 했다.
"골든게이트 브리지에서 매해 자살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오? 사람들이 신문에서 한강 다리에서 자살 소동을 벌이는 기사를 읽고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한다면 죄악이오. 아시겠오. 왜 하필 그들이 다리 위에 올라가 떠나간 애인을 부르짖다가 강물로 뛰어드는 것인지 모른다면 이 현실은 정말 엿 같은 세상이란 말이오."
나는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그의 뒤편 사진을 감상했다. 금문교였다. 그의 말은 계속되었다.
"단 한 번이라도 목숨을 걸고 날기 위해 몸을 던지는 것이오. 에펠탑이 이를 증명하오. 다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시키며 이 세상과 저 세상을 연결시키며 현실과 꿈을 연결시키며 땅과 하늘을 연결시키며 마침내 삶과 죽음을 연결시키는 것이오. 에펠탑은 세워 놓은 다리 다름 아니오. 아무리 공장의 굴뚝이라는 형태의 공업기술을 파리 속에 끌어들인 졸작, 추악한 철덩이라 중상모략을 받아도 미지의 것과 연결시키려는 인간의 위대한 투쟁이었오. 하지만 긴 다리의 꿈은 좌절되었소.경제성 때문이오. 근대의 신화를 이끌어 왔던장대교(長大橋)의 좌절은 곧 근대의 좌절이며 자본주의의 좌절이오.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오. 한 번도 날지 못했오. 사람들이 추락한 시체만을 볼뿐인 교훈만 남기고 근대는 몰락하고 있오."
그는 흡사 교주처럼 장중한 톤으로 소리쳤다.
"몰락하라, 그대 우리 삶을 송두리째 가져가다오!"
나를 무슨 학생으로 아는 듯 강의실의 교수처럼 쉬지 않고 떠들어대었다. 하지만 그의 말이 전혀 쓸데 없지는 않았다. 영화 <졸업>에서 더스틴 호프만이 차를 타고 다리를 건너는 장면이 떠올랐다. 아직까지 내 가슴 속에 남아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몇 번을 봤지만 그 장면만이 내게 깊은 인상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내 의견을 묵살했다.
"다리란 언제고 붕괴하는 법이오. 1871년 영국인 토머스 바우치는 스코틀랜드 티만에 전장 3200M, 경간 75M, 총공사비 35만 파운드의 최첨단 다리를 착공했오. 이 다리가 영국인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끼쳤는지 빅토리아 여왕은 그에게 작위를 수여했을 정도요. 그리고 시인 맥나갈은 노래했다오.
티강에 걸린 아름다운 다리여
이 세상 최초의 기적의 다리여
그대는 티 강에 색동옷을 입혔도다
신이여, 다리를 건너는 당신의 백성을
지켜 주소서
재난에서 멀리 있게 하소서
그리고 불과 2년뒤 열차가 진입할 즈음 티교는 무너졌소. 그 원인이 분분하지만 결국은 근대성의 법칙에 따른 것이었소. 다리는 무너지오. 그리고 또다시 시인 맥나갈은 노래했소.
티 강에 놓인 아름다운 다리여
이 무슨 탄식을 선물하는가
그렇게 허망하게 목숨을 빼앗아 가다니
이 한은 죽어서도 풀 길이 없노라"
그러나 나는 아내와 딸을 둔 평범한 가장이며, 자동차 영업을 하는 건실한 대기업 회사원이다. 다리와 내가 무슨 상관이 있는가? 비디오 <야곱의 사다리>와 관련되어 그가 어떤 환각제를 먹지 않았는지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설령 근대성이 무너진들 내 생이 바뀌는가? 준수는 돌아오는가? 아내와 영원한 화합을 누리는가? 기대할 수 없는 친구였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다. 그는 다리를 살 위인일지는 몰라도 차 살 위인이 아니었다. 나는 눈치봐서 일어서야겠다며 엉덩이가 반쯤 일어서서 나가려했다. 그때 그가 병을 깼다.
"가지마! 어딜 가려는 거야? 어디로 도망가서 또 누구를 배반할텐가."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나는 털퍼덕 주저앉았다.
"그 사람을 만화방에서 만났오. 나는 외로웠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일찍 돌아가셨고 어머니가 가출했오. 할아버지가 어머니를 범했오. 할아버지는 시내에 건물도 있을 만큼 부자였오. 할아버지는 내가 어머니와 똑같은 놈이라며 매일 혼찌검이셨오. 나는 집에 들어가기가 무서웠오. 나는 갈 데가 없었오. 그때 그가 나타났오. 부랑자였오. 아무도 그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오. 나는 아무도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동정했오. 우리는 자주 만났오. 우리는 승천교(昇天橋) 밑으로 자주 갔오. 악취 나는 좁고 긴 도랑과 먼지를 흠씬 맞은 푸성귀들이 듬성 대던 승천교 밑에서 난 그와 본드를 흡입했오. 그가 말했오. 진짜 하늘을 날라오르려는 자는 다리 위에 있는 인간이 아니라 우리처럼 다리 밑에 있다고 말했오.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하늘로 올라간 느낌이었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내게 제안했오. 아무 여자 아이나 데려오면 재미난 구경을 시켜 준다 하였오. 난 그가 시키는 대로 평소 잘 아는 초등학생 아이를 데려왔오. 그런데 초등학생을 데려오자마자 그의 눈빛이 마치 맹수의 눈빛으로 돌변했오. 그는 마치 할아버지처럼 내게 엄한 소리로 말하는 것이오. 꿈쩍할 수 없었오. 그가 시키는 대로 처음 나는 섹스란 걸 하게 되었오. 내가 허겁지겁 일을 치루자 그는 태연스레 빙그레 웃고 어느새 준비했는지 가위로 주저함 없이 그녀의 혀를 잘랐오. 사방에 난사된 피, 완전히 일그러진 얼굴, 가냘픈 숨소리. 이윽고 자지러질 듯한 소리를 지르는 여자애의 뺨을 주먹으로 몇 번 내지르더니 힘없는 그녀를 벽에 세우고 소름끼치게 웃으며 그녀의 사타구니에 자신의 성기를 대었오. 울음 소리는 처연한 자국으로 남아 뗏국물처럼 덕지덕지 뭉쳤다 흩어졌다 끝내는 침묵이었오. 난 너무나 소름이 끼쳐 도망가고 싶었으나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오. 그때 도망쳤어야 했는데 잔인한 호기심과 스릴, 통쾌감이 열다섯 살의 나에게 스쳤오. 그는 그녀를 끝내 비릿내나는 생선을 패대기치듯 쓰러뜨린 뒤 구석에 쳐 박혀 있던 나를 쳐다봤오. 그의 식지 않은 다리가 내 안으로 들어 왔오. 살아 있는 이물질의 축축함, 아기의 발가락 같은 꼼지락거림, 찢어질 듯 들쑤셔 대는 밀물과 잠시 멈춰 끔찍이 공허한 썰물, 의식의 아련함. 난 연신 헛구역질을 토해 냈오. 벽을 수십 번 부딪쳐야 했오. 그래도 소리조차 지를 수 없었오. 그의 손에 들린 가위를 생각해야했오. 그는 말했오.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가고 있다. 지금 어디? 다리. 내게 무엇이 있니? 가위. 지금 어디? 다리. 내게 무엇이 있니? 가위. 우리는 지금 천국으로 날아가고 있다. 나는 내내 다리와 가위만 떠올렸오. 가위와 다리만."
그는 그의 고백이 끝났음에도 계속 가위와 다리만 되뇌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초등학생 아이는 결국 죽었다. 그는 그 부랑자를 다시는 만나지 못 했다. 부랑자는 집요한 경찰의 추적 끝에 체포되었으며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죽었다. 그는 무수한 상처 덕분에 피해자가 되었다.
나는 장작불처럼 눈물이 솟구쳤다. 그를 동정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 내 비밀을 말하기 때문이다.
"남창은 준수가 아니라 나였어. 나는 그 썩어문드러질 하마와 잤어. 준수의 악기를 위해 그짓을 감행했어. 그러나 그 기억이 지긋해서 대학에 들어가자 미친 듯이 운동했어. 하지만 운동을 하면 할수록 그 기억이 새록새록 내 가슴을 짓찢었어. 나의 유일한 구세주는 준수였지. 내 곁을 떠나는 준수는 상상할 수조차 없었어. 나는 음대생에게 거짓말을 했어. 준수는 홀로 무게를 지고 말없이 반지를 놓고 떠났어. 난 음대생의 소개로 결혼까지 하였어. 나이 들어 <히아킨토스>에 들리는 사람들이 끔찍했지. 나이가 들어 과연 나는 어찌될 것이냐. 이 척박한 풍토에 내가 서있을 자리가 있더냐. 에라! 가자. 남들처럼 나도 독하게 살자. 드디어 내 소망을 이뤘어. 준수와는 여지없이 무너졌고 아내와는 나의 가정을 건설했지. 그러나 또 다시 무너져야 했어. 내 삶이 아니었어. 오직 준수만 나는 사랑했어. 나는 최근 아내와 잠자리를 하지 않았지. 내 유일한 사랑은 오직 준수인데 내 구차스런 가정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포기해야 했어. 그래서 유일한 사랑이 바들바들 대다 마침내 내 깊은 가슴 속에서 꾀애애애액 소리를 질렀어. 내가 그녀와는 도저히 함께 살지 못하고 이혼도 하지 못함을 아내는 알게 되었지. 나는 준수를 사랑했고 가정을 꾸미고 싶었어. 그녀는 내가 치밀한 계산으로 사람들을 파멸로 이끈다 하였어. 나의 변명이 악랄한 합리화라고 하였어. 그러나 나의 고통을 누가 이해할까? 같은 이반*2)도 아내도 준수까지도 날 기회주의자로 몰아붙이고 있어. 난 왜 평범하게 살면 안되지?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그놈의 육감. 젠장할!"
나의 독백을 듣던 그가 고개를 쳐들었다.
"바로 네가 부랑자이오. 사람들을 파멸로 이끄는 자! 그후로 난 정상적인 섹스를 할 수 없게 되었오. 여자이든 남자이든 그 누구와도 할 수 없었오. 하지만 나는 알았오. 오직 너 같은 부랑자만을 내 더러운 욕망이 갈구하오. 난 동성애자가 아니오.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아니오. 그럼 나는 무엇이오?"
나는 또 다시 배반을 하였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정말로 다리 밑에서 가위로 싹둑싹둑 자르듯이 서로를 격렬히 껴앉았다. 금문교 다리가 빛나고 있었다.
주1 히아킨토스 : 그리스 신화의 인물. 아폴론과 동성애를 나눴던 청년.
아폴론의 원반 던지기에 우연히 맞아 죽는다.
주2 이반 : 일반(이성애자)에 대칭되는 동성애자를 지칭
바리케이트 탄백신화(坦白神話)
2004. 5. 28. 7:1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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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년 10월 28일 건대에서 열린 [애학투]의 결성식은 예기치 못했던 정권의 엄청난 무력진압으로 농성으로까지 이어지게 된다. 어떠한 준비도 없이 갑자기 치루어진 농성은 엄청난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투적인 분위기에서 조직적으로 전개되었다. 하지만, 대중의 정서와 수준을 고려하지 못하고 주관적으로 정세를 파악하여 전개한 반공이데올로기 분쇄투쟁은 오히려 사회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정권의 탄압의 빌미를 주고 말았을 뿐 아니라 애학투의 잘못된 조직 위상은 애학투를 학생대중에 기반하지 못한 선도적 정치투쟁체로 만들어 학생대중으로부터까지 고립되게하여 진압과정에서의 그 엄청난 폭력을 학생대중의 공분으로 받아칠 수 있는 투쟁까지를 어렵게 만들고 말았다. ; 80년대 학생운동사; 형성사"
그 동안 학생운동이 가져왔던 오류들을 극대화시켜 뼈저리게 느끼게 함으로써 이후 투쟁에서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게 하였다는 건대 투쟁에서 나는 끝까지 있다가 잡힌 1525명의 연행자 중에 구속된 사람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때 나는 2학년, 저녁에 술을 먹고 있다가 선배의 연락을 받고 친구들과 모였다.
"내일 중요한 집회가 있는데 자원자!"
가도 좋고, 안 가도 좋다는 선배의 말이었다. 예닐곱 명 중에 서너명이 손을 들었다. 나도 들었다. 그 집회가 애학투 결성식인 줄도 몰랐다. 그냥 집회니까. 전두환 정권과 투쟁한다니까.
떠밀렸다. 숨 쉴 사이도 없이 나는 친구들과 떨어져 건대 본관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며칠이 흘렀다. 나는 친구들과 함께 있는 학생들이 부러웠다. 나는 늘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 혼자 있는 편이었다. 물만 먹었다. 먹을 게 없었다. 잠을 잘 수 없었다. 10월말이라 날씨가 쌀쌀했다. 게다가 유리창이란 유리창은 다 깨졌다.
여러 생각이 스쳐갔다. 내가 왜 여기까지 왔지? 전태일의 전기를 보았다. 밤새 눈물을 흘렸다. 광주항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봤다. 눈물이 났다. 나는 사실 운동이 마땅치 않은 사람이었다. 세상이 무척 마음에 안들어 홀로 떨어져 있다가 난생 처음 데모란 것을 봤다. 돌을 던지는 사람이나, 최루탄을쏘는 사람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문득 난 분노가 치밀었다.
"이 따위가 대학이야? 내가 꿈꾸던 대학이야? 토론이 꽃피고 자유를 만끽해야 하는 대학? 웃기고 있네"
나는 무작정 나가 하늘 높이 돌을 던졌다. 돌은 바로 내 코 앞에 떨어졌다. 과의 학회 친구가 이를 봤다.
"함께 공부하지 않을래?"
나는 운동권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와 정서가 잘 맞지 않았다. 그래도 그를 따라간 것은 사회가, 대학이 너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학회도 마찬가지였다. 답답했다. 친구들은 31운동이 33인의 운동이 아니라 민중의 운동이다라고 하면 고개를 끄덕였다.
왜 민중의 운동이지? 내가 민중인가? 정말 민중의 정서가 느껴져 고개를 끄덕이는 거야? 하지만 내 짜증은 다른 곳으로 돌릴 수가 없었다. 달리 선택할 공간이 없었다. 그래,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야지. 여기서부터 바꾸면 되는 것 아니야?
그리고 2학년이 되었다. 그 동안 이루지 못한 사랑도 해봤고, 방황도 해봤고, 또 노동자의 생활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그래서 여기까지 왔나? 2학년 1학기는 공백이었다. 경찰의 추적으로 조직이 와해되어 6개월을 쉬었지만 집회가 있는 날이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수업 땡땡이를 치고 집회 언저리에서 두리번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언더 여자 선배를 찾았다. 다시 운동을 하고 싶습니다. 아무 조직에나 넣어 주세요. 그래서 여기까지 왔다.
나흘째다. 매일 불침번을 설 수밖에 없었다. 밤마다 경찰들이 기습을 벌인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지금 바깥 세상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도대체 정권이 왜 이러나? 도대체 집행부는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정권이 이래? 나는 농성 도중에도 애학투라는 말을 듣지 못했다. 아무튼 급히 꾸려진 집행부가 농성내내 건대 본관 내에 있는 북한관련자료실을 출입통제시켰다. 다른 곳은 다 들어가도 그 곳만은 들어가지 못하게 했다. 혹시 그 때문에?
나는 뭐가 뭔지 몰랐다. 다만 내가 아는 사실이라고는 건대 집회에 참석할 사람 거수하라는 선배의 말을 듣고 손을 들었고, 다음날 새벽에 건대에 들어갔으면서도 집회를 제대로 듣지 않고 뒤에서 담배만 피고 있었고, 집회 도중에 경찰이 진입하자 흥분해서 돌을 던지다가 경찰에 떠밀려 학생들을 따라 건대 본관으로 올라갔었고, 그리고 며칠째 이곳에 영문을 모르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며칠째 이러고 있으니 문득 지리산의 빨치산 생각이 났다. 그들도 이랬을까? 고립된 자들만의 특유한 동료의식들이 번져갔다. 동료들 사이에 특별한 이야기는 없었다. 괜히 여유있는 척하려고 서로 농담하기 바빴다. 만일 이같은 고립이 한 달만 계속 되었다면 사람이 훈련소에서 군바리로 탈바꿈하듯이 나는 사람에서 빨치산으로 탈바꿈했을 것이다.
순번을 정해 남학생들만 자원자에 한해 불침번을 섰다. 남학생중 탈진한 사람 몇몇을 제외한 대다수가 자원했다. 나도 자원했다. 내가 예상 외로 건강하구나. 그러나 며칠째 잠을 자지 못하고, 물만 먹으니까 가끔씩 머리가 핑 돌았다. 라면국물이라도 먹고 싶었다. 따뜻한 방에서 자고 싶었다. 땀이 차갑게 식어 내 온몸을 들쑤셔대었다. 극도로 체력이 저하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날에도 불침번을 섰다. 모닥불을 피워놓고 몸을 지지는 사이에 자꾸만 졸음이 쏟아졌다. 불침번을 서고 나서도 건물 내부로 내려가지 않고 그냥 옥상에 남아 있었다. 너무 추워서 본관 총장실에서 가져온 태극기를 덮고 옥상에서 잠시 잠들었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외쳤다. 경찰이 온다!!! 경찰이 온다!!!
순간 증오심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이 개자식들아! 올테면 와라!" 나는 너무 춥고 배고파서 그런지 고함이 절로 나왔다. 정말 이를 악물었다. 정말 내 손에 쥔 각목에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건물 옥상 맨앞에 있던 나를 향해 고가사다리를 탄 경찰이 직격탄처럼 물대포를 쏘았다. 이런 상황에서 맞아 본 사람만이 느끼는 무력감! 그러다 정신을 가까스로 수습하니 헬기가 떴다. 벌써 도서관 건물은 함락되었다.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도서관 옥상에서 저항하던 몇몇 학우들이 전경들에게 개패듯 얻어 맞아 하나둘씩 쓰러지고, 다른 전경들은 내가 있는 건대 본관에다가 직격탄을 날리고 있었다. 헬기에서도 마구 뭔가 떨어지고 있다. 사과탄인가? 이게 뭔가? 건물 밑에서 불길이 타올랐다. 여기저기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특히 여학생들의 비명소리는 너무나 섬찟했다. 드디어 바리케이트를 쳐놓았던 옥상문이 전경들에게 걷어차였다. 뚫렸다. 위에서 떨어지고, 옆에서 직격탄 쏘아대고, 밑에서는 다연발 지랄탄과 소방수가 뿌려지고, 건물 한층씩 무술경관으로 보이는 전경들이 치고 올라왔다. 싸움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물리력으로 될 리가 없는 싸움이었다. 저들은 물대포와 헬기와 직격탄으로 치고 들어오는데 내가 가진 건 오로지 각목 하나뿐이었다. 내가 지금 살 수 있을까? 공포 그 자체였다. 그냥 서 있을 수도 없었다. 나는 정신없이 뛰어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누군가 내 머리를 묵직한 것으로 때렸다. 나는 무릎밑까지 잠기는 옥상바닥에 쓰러졌다. 발길질도 당한 것같다. 몇 번 걷어차인 것같았는데 정신이 혼미해져갔다. 그때의 아늑함이란!
정신을 차려 주위를 살펴 보니 나는 옥상 한가운데에 있었다. 전경들이 쓰러진 학생들을 질질 끌어 한가운데에 집합시키는 것을 보니 나 또한 그리 끌려 왔나보다. 전경중대장인 듯 한 자가 모두 머리에 손을 올리라고 했다. 우리는 토끼뜀 뛰는 자세로 있어야 했다. 시도 때도 없이 이 전경 저 전경이 발길질을 했다. 비명 소리! 또 비명 소리! 그러다 전경중대장이 만류하는 듯했다. 그러자 어디선가 여학우의 아침이슬 노래가 흘러나왔다. 절로 눈물이 났다.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나도 무의식 중에 따라했다. 아아악! 그 여학생이 비명을 질렀다. 다시 비명소리! 비명소리! 무차별적으로 우리는 얻어맞았다. 우리는 굴비 엮듯 포승줄에 묶여 건대 본관 계단을 내려왔다. 내려오면서도 전경들은 시종 이단옆차기를 시도했다. 하도 맞으니까 또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 덜 아팠다. 정말이다. 유격장에서 유격체조 마구 한 뒤 넘어져 본 사람은 알 것이다. 덜 아프다.
나는 지금도 안다. 나같은 2학년, 그리고 나보다 1년 늦은 1학년이 사상에 대해 알 리는 만무하다. 내가 대학 입학 전부터 아무리 무정부주의적 사고를 가졌다 하더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공상적 수준이다. 더구나 그때 3학년조차 사상에 대해 제대로 아는 이가 없었다. 소위 사상을 가진 학생은 4학년 중에서도 정책담당자 정도였던 듯하다. 총학생회장을 맡은 이도 가끔은 사상이 뭔지 모르는 이가 많다. 다들 민주주의가 좋아서, 멋있는 선배 따라서, 전두환이가 미워서 왔다. 실제 유치장에서 이야기 들어보면 그중 내가 그나마 제일 사상에 관심이 있는 편이었다. 그래서 내가 유치장에서 경찰에게 애학투련이란 말을 처음 듣고 학우들에게 애학투련에 대해 토론하자고 하니 다들 잘 몰랐을 정도였다. 서울대 국제경제학과 2학년이 조금 아는 척을 했는데 아무 소용도 없는 이야기였다. 모르니 토론이 될 리가 없었다. 그저 우리는 유치장에서 주는 짠밥을 맛있게 먹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여학생들은 연신 구역질 등을 하며 밥도 제대로 먹지 못했다. 목사가 와서 우리에게 빵을 준 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말했는데 오늘 나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신을 믿는다, 고로 존재한다." 라는 소리를 하고 갔다. 나는 빵을 먹는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집행부는 딴 곳으로 이송되어갔다. 우리는 또 다시 개같이 얻어터졌다. 우리는 경찰에 있는 동안 별로 말 할 필요가 없었다. 거의 묻지 않았고, 맞기만 했다. 내가 빨갱이로 유일하게 낙인찍힌 경우는 다음과 같다. 구치소에 밤늦게 도착하여 팬티만 남기고 전부 벗으라고 했다. 그때 나는 유일하게 빨간 팬티를 입고 있었다. 군화를 신은 자가 명령했다. 주먹을 쥐고 앞으로 내민 뒤 허리를 낮춰! 나는 빨간 팬티를 입고 있었기 때문에 어쩌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군화발이 내 좆을 향해 날라왔다. 자식아! 넌 뭐야! 이거 진짜 빨갱이 아냐! 벗어 임마! 나는 그때 사람들 중에 유일하게 나체였었다.
그런 생각이 미칠 때쯤, 나는 연대에 갔다. 왈칵 울음이 솟아났기 때문이다. 감정과잉도 아니었다. 나는 혁명이 곧 닥치느니, 민중을 위하니 하는 말을 믿지 않는 편이다. 게다가 주사계열의 운동방식을 전혀 찬성하지 않는다. 다만 정권도 지랄이고, 언론도 지랄인데 혹 후배들이 내 꼴 당한다면 어쩌랴? 이 정권이 한총련 몇몇만 잡아 족칠 정권이 아니지 않느냐! 한총련 몇몇 지도부가 건대사건때처럼 학생운동의 오류를 극대화시켰을지언정, 그들을 같은 운동세력으로서 엄중히 비판할지언정, 그 책임은 그들 지도부 몇몇에게 있지, 이들 대다수 학생들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또한 그 오류조차 김영삼 정권이 심판할 자격이 있는 것이 아니다. 김영삼 정권이 무능하게 정책을 펼치고, 정책 혼선을 일삼고, 편파 수사, 편파 행정, 편파 선거, 편파 인사를 일관하니 이처럼 된 것이 아니냐! 근본적으로 김영삼 정권이 이들을 여기에 오게 만든 것아니냐! 바로 박정희때로부터 김영삼정권까지 반공교육을 철저히 받은 이들이 아니더냐! 그들 중 몇몇은 너무나 서럽고 복받쳐서, 또 만나는 형사마다 때리며 김일성 새끼들! 라고 하니 김일성이 정말 누군가 새롭게 비춰져 엄청나게 존경하게 된 학생도 있을 것이다. 오죽 했으면 내가 김일성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 데도 구치소에서 반공비디오로 틀어준 김일성 얼굴만 보고도 눈물을 흘렸겠는가! 내가 중 2때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총탄을 맞아 죽은 후 라디오에서 첫방송이 나왔을 때 난 새벽에 시험공부 하다 말고 진심으로 눈물을 흘렸다. "지금 공부할 때냐, 나라가 위기이다." 그러니 나는 박정희의 정체도 모르고, 김일성의 정체도 모르는데 둘 다 눈물을 흘린 셈이었다. 도대체 인간의 조건이란 얼마나 끔찍한가? 아무튼 내가 간 것은 학생들이 백명의 농민과 천명의 노동자와 등가되기 때문에 간 것은 아니다. 단지 나처럼 비인간적 대우를 받고 있지 않나 염려되었을 뿐이었다. 가능하다면 학생들의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나는 경차를 타고 갔다. 만일 학교가 봉쇄되어 있다면 인근에 주차시킬 작정이었다. 차를 가져가는 게 현명하다고 생각했다. 만일 필요하다면 전경의 배치 등 상황을 학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연대 주위를 쭉 한바퀴 돌았다. 이대 후문에 무술경관 100명이 있었다. 연희동 방면으로 백골단이 있었다. 백골단중 일부는 쇠파이프를 가지고 왔다갔다하여 출근하려는 시민들에게 위협감을 주었다. 완전히 삥 둘려쌓여 있었지만 틈새가 보였다. 개인적으로 잘 만 연구하면 빠져나올 수도 있을 듯했다. 그러나 곳곳에서 검문검색은 계속되었다. 먹을 것을 사가지고 들어갈까 하다가 나는 관두었다. 먼저 상황을 살피고 난 다음에 해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다. 게다가 불필요하게 오해살 행동은 이런 때일수록 삼가는 게 좋다고 생각했다.
나는 세브란스를 통해 들어가 주차를 시킨 뒤, 먼저 학생들에 의해 씌여진 글들을 차례로 읽어나갔다. 연대생들에게 대한 사과문, 학생 실명 위기, 노수석 기금 약탈, 통일축전 이야기 등등. 통일논의는 흡수통일로 귀결되므로 반대한다는 연세 게릴라 대자보도 있었다. 그 대자보에는 찢는 폭력 행위를 하지 말라고 당부 말로 끝을 맺고 있었는데 그대로 있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학생회관과 도서관은 온존된 채였다. 그러나 연대 정문은 여지없이 박살나 있었다. 아침이라서 평온한 듯 보였다. 그러나 이과대로 올라갈수록 최루탄 냄새는 더욱 심하게 다가왔다.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학생들이 지친 듯 대부분 누워 있었다. 그러나 몇몇 이는 일찍 일어나 신문을 읽고 있었다. 다들 무표정했다. 흘끔 나를 바라보는 시선들은 경계가 잔뜩 있었지만 개의치 않고 이과대로 향했다. 말해 볼까? 하다가 자는 사람 깨울까 신문 보는 것 방해될까 말하지 않았다. 김밥 아줌마가 보였다. 광주리를 이고 올라왔다. 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들에게 김밥을 살 돈이 아직 남아 있을까? 서둘러 지갑을 펼치니 빈 지갑이었다. 이런! 다니던 직장을 관두고 한 달여 동안 놀다 보니 지갑에 돈이 없는 줄 몰랐다. 되도록 바깥 출입을 안하는 것이 덜 돈을 쓴다고 생각해서 바깥 출입을 자제한 까닭에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이과대 계단에서 현관으로 가는 좁다란 광장이 있는데 이 곳의 얇다란 보도블럭이 많이 뜯겨져 있었다. 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돌 던져봐야 아무 소용도 없는데... 그리고 이과대 현관을 들어가려니 남총련 명의의 조그만 소자보가 눈에 띈다.
<경고! 짭새들, 눈에 띄면 죽어! 수상한 자 발견 요령은 쓸 데 없이 학생 상황에 대해 물어 보는 자...>
음, 나는 바로 그걸 물어 보려 들어 왔는데... 이야기를 쉽게 나누지 못하겠다 생각했다. 그래서 상황실이 있다면, 상황실에 가서 무작정 말해 보리라 생각했다. 이곳 저곳을 왔다갔다하니 눈들이 심상치 않다. 예전에 경북대에 가서 소변을 보러 화장실 갔을 때 이런 눈총을 받은 적이 있지 않는가? 학생들이 지금 얼마나 예민한가?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좀 더 자신있게 다가서자. 나는 과거에 아무 건물, 아무 사무실에 거침없고 뻔뻔하게 들어갔던 영업사원이지 않았던가! 학생들이 아침 일찍부터 전화통에 매달려 줄을 길게 서고 있었다. 기다리는 사람은 지금 딱히 일이 없다. 나는 그중 앳띠게 보이는 여학생에게 갔다.
"저, 상황실이 어디죠?"
"네?"
"상황실 말입니다. 지금 이곳 상황을 지도하는 곳 말입니다."
그 여학생은 잔뜩 긴장하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멀쑥하게 있다가 다시 말문을 꺼냈다.
"저 짭새라고 오해하시는 게 당연할 수 있는데요. 그래도 전 아닙니다."
"정말 몰라요. 저는 이곳 학생이 아니거든요?"
나는 말해 놓고도 이러는 내가 한심해 보였다. 그녀에게 날 어떻게 믿어달라고 할 수 있는가? 지금 상황이 어떤데? 그래도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녀의 답변이 즉각 날라왔다.
"전 1학년인데요. 아무 것도 몰라요."
당황하여 말을 더듬기까지 하는 그녀를 더 이상 곤란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옆의 남학생에게 물었다.
"상황실이 어디에 있죠?"
그는 짤막하게 말했다.
"모릅니다."
아무리 봐야 대학 2년생이었다. 나도 이때에 이렇게 어렸을까? 내 나이 이제 32살인데... 내 막내동생만한 친구들! 나는 물어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실 운운하는 것이 소자보에 있는 내용 그대로이지 않는가? 나는 이럴수록 침착하게 대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여유롭게 이과대를 빠져나와야했다. 학생들이 피곤하면서도 이런 나의 행동을 예의주시했다. 이른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코를 찌르는 데도 땀이 내 등을 적셨다. 나는 이과대에서 법과대 뒤쪽도로를 따라 문과대 종합관으로 걸어갔다. 중간중간에 학생들이 신문을 보다 나를 긴장하며 쳐다 보았다. 그때 한 교수의 차가 들어와 법대쪽으로 들어갔는데 그 교수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그 교수를 보았다. 아마 그 교수가 나를 봤다면, 저 친구 왜 저렇게 찌푸리고 있지? 라고 했을 것이다. 곳곳에 농구대 등으로 바리케이트가 쳐져 있었다, 분단의 벽처럼. 과연 누가 누구에게 지금 서로 총부리를 겨누고 있느냐, 너는 누구의 편이냐 힐문하듯이 복잡하게 헝크러져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것처럼 굳건히 길을 막고 있었다.
연세춘추 신문사를 지나 문과대 앞 소위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려는 찰나에 갑자기 무어라고 고성이 터졌다. 어느 아주머니였다. 아주머니가 학생으로 보이는 사람에게 뭐라고 떠들더니 내려갔다. 그 학생은 50대쯤으로 보이는 아저씨와 쇠파이프를 든 학생과 함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말을 걸기로 했다. 성공할 수 있을까? 여전히 그들 뒤로 문과대 종합관을 묵묵히 지키는 바리케이트가 사신(邪神)이 나를 불안하게 했다.
"저, 말 좀 나눌 수 있을까요?"
예의 경계의 눈초리가 날라왔다.
"저는 하이텔에서 이번 사건을 접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내가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말이었지만 사실이지 않는가?
"컴퓨터 통신망 있죠? 그곳 게시판에서 연일 이곳 상황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래도 경계심을 늦추기에는 내 말이 너무 싱거웠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쩌랴. 에라! 부딪쳐 보자. 될대로 되라.
"저는 연대 졸업생입니다. 건대사건때 구속되었던 사람이죠. 이번 사태가 건대사태처럼 되어간다고 통신에서는 난리입니다. 그래서 저는 두서없이 여기로 왔죠."
내가 뭔 말을 했는지 몰랐다. 아무튼 상관없었다. 그들을 조금이라도 안심시킬 수 있다면. 그러고 보면 짭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닌 듯 싶다. 그제서야 그의 입이 조금 떼어졌다.
"아 네, 그러세요."
약간 호남 사투리가 배여 나왔다. 나는 그때서야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신원에 대해 왈가왈부한다는 건 금물이기에, 또한 구체적 상황에 대해 물어본다는 것은 금물이기에 이번 사건의 파장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제 2의 광주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이 친구는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광주는 살아 있었다. 우리는 편파언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난 며칠 동안의 경과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여기서 한총련 지도부 노선에 대한 의견을 나눌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충분히 알고 있었다. 이 곳은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곳이 아니라는 점을 말이다.
그때 사수대로 보이는 학생들이 쇠파이프를 들고 사오십명씩 열을 지어 여기저기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 중에 힐끗 나를 쳐다 본 학생이 있었다. 아니, 나의 착각이었을까? 그들은 너무 피곤해 보였다. 마치 군대 훈련생처럼 보였다. 싸움에 지친 그들! 그들을 누가 불굴의 투사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가 일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가 나에게 물었다.
"아까 소리치다 내려간 아주머니 이야기 들었어요?"
아까 고함치던 그 아주머니 말인 듯 싶다.
"아니요. 멀리 있어서 못 들었습니다."
"그 아주머니가요. 아들 찾으러 온 사람입니다. 아들 내놔라 하며 저희와 싸우다 내려갔습니다."
그는 안타까운 듯 말을 하더니 고개를 잠시 수그렸다가 말을 이었다.
"그 아주머니가 내려가다가 기자들에게 잡힌다면 아주 기막힌 소재 아닙니까?"
내가 말했다.
"그렇죠. 개새끼들이 옳다구나 하고 달려들 소재이죠."
그때 오십대 아저씨가 말을 이었다.
"왜 여기있는 학생들 이야기는 안 싣고 그래? 하여간 내가 여기서 6일째 지켜 보고 있는데 너무해, 너무해."
내가 말했다.
"그 자식들이 하는 짓이 뻔하죠."
"벵기가 몇 대나 뜨는 데도 그런 게 신문에 안나."
내가 깜짝 놀라 물었다.
"헬기가 아니라 비행기요?"
"헬기나 벵기나 하여간 벵기가 왜 뜨냔 말이야."
그 아저씨는 계속 벵기라고 말했다. 내 옆에 쇠파이프를 든 친구는 계속 말없이 우리들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게 뭐지요?"
내가 말했다.
"우리는 안전귀가를 바랍니다. 그뿐입니다."
아저씨가 보충설명을 해주었다.
"아, 말이지. 학생들이 어제 해산하고 학교도 청소하고, 잡힌 전경 이십여명을 풀어주고, 연대생들에게 사과하는 글도 붙이고, 집에 보내달라고 했는데, 왜 벵기가 뜨냔 말여. 벵기가."
내가 말했다.
"통신은 기존언론과 달리 쌍방향매체라서요. 지금 하시는 말씀을 게시판에 올리면 다른 사람들이 볼 수 있거든요.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꼭 돕고 싶습니다."
아저씨가 말을 계속 했다.
"내가 신문을 봤는데 말이야. 왜 학생들이 하는 건 죄다 안 실어. 기자놈들한테 말하니까 기자놈들 하는 야그가 자기네들은 써서 올리는 편집국에서 짜른다는구만."
내가 말했다.
"그건 기자놈들이 하는 아주 고질적인 변명입니다. 그놈들 자체도 썩었어요. 입회하자마자 술 퍼마시는 게 얼마인데요. 여기서 암만 아저씨같은 분이 이야기해도 다른 사람들은 이 현장의 이야기를 잘 몰라요. 생각해 보세요. 제주도에 사시는 분이 얼마나 알겠어요."
학생이 따지듯이 물었다.
"왜 몰라요? 신촌오면 다 아는데..."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누가 시간내어서 신촌에 오겠습니까? 저같은 놈이야 오지, 사람들은 언론에 의한 것만 전달받습니다."
"그야 그렇지요."
그는 침울하게 말했다.
"그래서 저는 싸움이 무척 중요하지만 여기서 암만 잘 싸워봐야 언론들은 폭력시위입네 하는 폭력논쟁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여론싸움도 중요하다는 이야기지요. 그래서 싸움은 사람들 지지를 받으면서 해야 싸움도 더 빛나지요."
"그야 그렇지요."
다른 사수대 학생들이 속속 연세춘추 앞 골고다 언덕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이 거의 모였을 쯤에 노래를 불렀다. 내가 모르는 노래였다. 무슨 조국이 어떻다는 노래이다. 나는 88년 이후 노래는 꽃다지 노래와 천지인 노래 중 대표적인 노래 외에는 잘 모른다. 그래도 88년 이전 노래도 잊지 않으려 군복무시 보초설 때면 쫄다구에게 피곤하냐 묻고 피곤하다고 하면 자라고 하고 자면서도 감시하러 순찰하는 중대장 발걸음을 정확히 아는 무적병장딴 덕에 초소밖에 나와 노래를 쉬지 않고 불렀던 기억이 문득 일었다. 가끔은 내 일상이 궁금한 쫄다구들이 물어왔다.
"사회주의가 뭐지요? 사회주의 망하지 않았나요?"
왜냐하면 나는 그들에게 그들의 고민이 뭐냐고 자주 물어봤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농사짓다가 서울에 가서 공장생활하다 온 친구가 있었으며, 어떤 이는 아버지가 어용교수로 몰려 고민이다 라고 토로하기도 했고, 어떤 이는 영화 시네마천국처럼 지방도시 3류극장에서 영사기 돌린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문제가 무엇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를 찬찬히 말해 주고는 했다. 그보다는 그들에게 내가 다소 인간적이라고 비춰졌기 때문이 정확하다. 무엇보다 그들에게 내가 아주 편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내가 감히 이렇게 답변하는 것이 결코 뜬금없는 것이 절대 아니었다.
"사회주의? 망했다고도 할 수 있고, 안 망했다고도 할 수 있지."
그들은 쇠파이프끼리 마주치며 불렀다. 마치 군대행군하다 잠시 앉아 군가 부르듯이. 파르티잔! 그러나 나는 섣불리 이름을 부여하기를 주저했다. 그 따위의 미화가 사람 경치게 만들지 않는가. 지금 중요한 문제는 그들의 안전귀가였다. 나와 대화를 나누던 학생들이 일어섰다. 대열에 합류해야했기 때문이다.
"수고하세요."
그 학생들은 웃으며 대열에 합류했다. 아저씨는 계속 말했다.
"내가 말이야. 내 딸년과 군대간 아들이 있는데 처음에 내가 말해 주니까 다들 의심스러워 하더라고. 하지만 내가 학생 데모하는데 무슨 벵기가 뜨고 난리냐. 이게 전쟁이냐. 전쟁이면 장비가 말이 되냐? 하니 반신반의하더군."
내가 건대사태때도 그러했다고 말해주자 아저씨는 말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알지. 학생들 다 가두고 뭔 짓거리였어. 이거보다 훨씬 심했다고 나도 알고 있네. 그땐 정말 보통 난리가아니었지. 하여간 내 이야기를 찬찬히 듣더니 딸년이 하는 말이 누가 옳고 그른지는 모르지만 집회 마치고 집에 가겠다는 건 보내줘야 하는 것 아니냐고 하더군. 내가 그랬어. 내 말이 그 말이야. 모! 북에 간 친구들이야. 어쩔 수 없다고 쳐. 좀 국민 감정을 무시하긴 했지. 또 간부 몇몇이야 그렇다고 쳐. 왜 이런 친구들까지 다 구속시켜야 해. 이 사람들 다 재판 붙일 거야 뭐야. 우리나라 사법소가 그렇게 많아? 이거 정말 생각하고 하는 정치야, 뭐야. 김영삼 정권 정말 머리가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저씨의 흥분을 말릴 이유가 없었다. 아저씨의 아들같고 딸같은 학생들이 마음고생, 몸고생하는 걸 지켜봤는데 당연한 반응이었다.
"신촌 사세요?"
"그럼, 신촌에 살지."
"장사하시나요?"
"아니, 난 사업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하도 최루탄이 날라와서 뭔 일인가 하고 올라와봤지. 그랬더니 말이 아니야. 아니, 장사 며칠 안하는 게 문제가 아니라고. 그런 게 중요해? 지금 사람이 죽었는데..."
"네? 사람이 죽어요?"
"아! 이렇게 가다간 사람 죽일 일 생긴다는 야그지. 좌우당간 벵기가 뜨고..."
이때 다른 아저씨가 왔다. 대략 보니까 30대 후반으로 보였다. 40대 초반이라 하기에는 어딘지 젊어보였다. 이른 아침 인근 산 산보가는 티셔츠에 반바지 옷차림으로 나타났다. 그는 오자마자 대뜸 아저씨에게 말했다.
"일찍 나오셨네요."
두 분은 서로 잘 아는 사이인 듯 하였다.
"그나마 한겨레가 낫긴 낫더라구요. 학생들 이야기가 쬐금 나왔어요."
아저씨가 말했다.
"다 똑같지 모. 다 신문 팔아먹으려는 수작이지. 암튼 한겨레가 다른 신문보다 다르게 쓰긴 해."
"연대 총장이 안전귀가 요청했다고 하더라구요? 그리고 시경측에서도 요청했는데 거절했다고."
"아! 말하면 잔소리지. 김영삼이가 딱 버치고 고집불통인 게야. 나도 교회집사를 해봐서 아는데 이 교회 적당히 믿어야지 아주 믿어버리면 곤란해져. 그저 자기가 최고인줄 안다니까."
내가 잠시 끼어들었다.
"빽 중에서 하나님 빽이 가장 든든하니까 그렇겠죠. 배경따지는 이놈의 사회에선."
"말하면 잔소리야! 하여간 이거 모 정치야 뭐야. 왔다갔다 하기만 하고."
"그게 감의 정치라고, 오늘 아침에 생각한 거랑 어제랑 다르다잖아요."
"말하면 잔소리야!"
다시 사수대에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때 나는 피부색이 까맣고, 곱슬머리의 사람이 눈에 띠었다. 내가 잘 못 본 건가 하고 다시 보니 틀림없이 흑인이었다. 그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유학생일까? 아니면, 혼혈학생일까?"
노래를 아주 잘 불렀다. 만일 혼혈학생이라면...
나는 혼혈인에게 대하는 우리나라의 통념이 매우 안타까운 적이 많았다. 아무리 백인 부자일지라도 우리네 부모들은 결사 반대부터 한다지 않는가? 내 주변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가 결국 잘 마무리되었긴 하지만. 둘이 너무나 행복한 사랑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는 아주 예외적인 경우이다. 대부분 이땅의 혼혈인들은 알게 모르게 차별대우를 받고 산다. 나는 혼혈인들만 생각하면 인순이가 떠오르고, 함중아 밴드일원 중 쵸컬릿 CF에도 나왔던 이름을 모르는 이를 떠올린다. 그가 그간 얼마나 고통스럽게 살아왔을까? 언젠가 TV에서 보니 그의 슬픔이 마구 밀려 들어와 눈물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가 부르는 뽕짝은 정말 애절했다. 마치 흑인이 부르는 부르스같았다. 기타에 실은 뽕짝! 나는 그래서인지 민족 민족하다가 가끔 소스라치게 놀란다. 임진왜란때 거주한 일본계 성씨가 살고 있다는 지방에서 그 지방 유족이 항의했다고 하지 않는가? 아무리 500년이 흘러도 내 핏줄, 내 새끼가 합리적인 말보다 내 핏줄이 통하는 사회! 내 학연, 내 지연이 통하는 사회. 아무리 논리적으로 토론을 해봐야 다 헛 것이고, 정치든 경제든 운동이든 다 술자리에서 결판나는 사회! 끔찍했다. 그런데 저기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아니 설명하기가 귀찮은 오만가지가 다 스쳐 지나갔다. 아무튼 그대여! 이 땅에서 정말 잘 먹고 잘 살기를!
아저씨가 말했다.
"일어날까?"
우리는 함께 일어났다.
아니, 정확히 내가 그들을 따라나섰다. 어차피 상황을 보니 상황실을 찾기는 문과대 종합관에서도 어려운 일이 될 듯 싶었다. 나를 뭐라고 소개하겠는가? 통신인 INDRA 입니다. 후후~ 그건 아직 이 시대 어법으로 상용화되지 않았다.
우리는 조금 더 걸어가다가 교육대 조금 못 미친 길가에 다시 앉았다. 역시 아저씨가 이야기를 주도했다.
"벵기가 뜨는데 말야. 뭐하는 거야. 내 아들이 지금 군대에 있는데 신문도 못 보고 하여간 세상 일을 잘 모른데. 이런 놈들이 인민군과 싸워봐라. 이기나. 여기 열 명이 인민군 한 명 당해낼 것 같아?"
"실례지만 자제분이 어디서 근무하시나요?"
"서울"
"그럼 편하지요, 모. 저는 강원도에서 근무했어요."
"암튼 이 군인들이 암 것도 몰라. 그래서야 되겠어?"
"그야 그렇지요."
우리는 정말 별 이야기들을 다 나누었다.
그러다 아저씨가 다시 말했다.
"아! 아까 그 사람 말이야."
"아! 우리와 말하던 그 학생 말이군요."
"나도 학생인 줄 알았지, 내가 차근차근 말하니까 그 사람이 말하더만. 자기는 지방대학 졸업하고 서울와서 보니 서울대나 명문대만 취직해서 농사나 지러 갔다는 거야. 그런데 농사짓다 보니까 안 되겠다는 거야. 그래서 여기에 왔대. 땅이 60필지나 있는데."
"그럼, 부농이네요. 하긴 요즘 어떤 젊은이가 농사짓겠습니까만은 그래도 땅 60필지면."
"하여간 그 친구 말 어렵게 꺼내던데 안 되겠다는 거야."
"그렇지요."
이 놈의 나라는 가만 따져 보면 신분사회이다. 봉건제가 뿌리 뽑히지 않아 사회전역에 만연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국가독점이 뿌리를 내리고 있어 국가독점자본주의라 할 수 있는데 우리네 생활에서는 봉건제가 군대, 가부장제, 정치조직 등이, 심지어 운동권까지 후진적이어서 독일 융커식의 사회라 할 수 있다. 돈을 많이 벌어도 인정받지 못하는 사회가 바로 한국사회이다. 졸부를 웃음거리로 만드는 대신 재벌들은 나날히 그 힘을 축적해간다. 세계일류라고 나서기도 한다. 그런데 세계일류가 노조가 없다. 진짜 졸부는 바로 재벌들이다. 다른 무엇이 졸부인가?
아저씨가 담배 한 대를 물고 후하고 한 모금 빨더니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가 말이지, 사업하는 사람인데 우리 집이 원래 만석꾼이었어. 그런데 할아버지가 상해에서 독립운동하다가 말아먹고, 아버지가 공산주의하다가 말아먹고, 여긴 이런 것하면 못 살아. 김대중이 말이야. 그 친구 옆에 있다가 망한 친구들 많아. 워낙 등쌀에 못 이기니까 말이야."
나는 내 이전 직업을 말하면서 화제를 돌렸으나 한 번 청산유수는 영원한 청산유수였다.
"이수성이가 말이야. 아니면 이홍구라도 말이지. 부상전경한테도 가고, 부상학생들에게도 가서 금일봉도 전해 주고 말이야. 그리고 위로도 해주고 말이지. 그리고 연행학생 가운데 정 안 되겠는 학생들 몇몇이야 어쩔 수없다고 하고 나머지는 국가와 사회를 위해 관용정책을 펴야 하는 거 아니겠어? 다 석방해 봐. 사법부에서도 만세를 부를 걸. 그리고 국민들도 만세해서 오히려 김영삼 정권이 그간 재미 좀 보지 못했다가 이번에 뜰 수 있는 거 아니야. 그런데 어떻게 일처리를 이렇게 하나."
내가 말했다.
"제가 보기에는 윗선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어서 그런 듯합니다. 뭐 하나 잘 들여다 보면 어디서부터 손대야 할 지 막막할 만큼 문제이거든요. 매번 윗사람은 관두고 아랫사람이나 짜르고 하는 짓거리를 하니까 안 되죠. 시중에 김현철 브레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 거기서 나오는데 누가 책임질 거냐 라는 말이 있습니다."
"다 그래, 정치가란 것들이... 그저 돈이나 밝히고..."
"김대중 말야? 그래 김영삼 보다야 김대중인데 내가 충청도 사람인데도 김대중 찍었지. 왜 찍었냐고? 내가 김종필에게 그랬어. 고향에 한 일도 없는데 왜 나타나냐고. 그런데 김대중의 문제는 그도 돈이 많다는 거야. 한 십억 정도 정치인이 가지고 있다면 내가 이해를 해. 그런데 정치하면서 그 이상 가지고 있으니 말이 되는 거야? 그러니 김상현이 나선다고 하지."
"하하, 재미있는 분석이시네요. 그렇다면 김상현이가 왜 나선다고 할까요?"
"그야 돈이지. 이권이지. 다음 차기 때에도 노려야지, 뻔히 안 되는 걸 알면서 저리 주장하는 거 보면 다 돈이지. 김상현이가 쌈짓돈은 잘 걷는데, 뭉칫돈이 잘 안 되나봐."
"네."
우리는 모든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물 흐르듯 흘러갔다.
일어나야 될 시간이다. 아저씨들은 이왕 온 길 무악산 쪽으로 산책을 하신다고 일어나셨고, 나는 더 상황을 지켜 보기 위해 백양로로 내려왔다. 가방을 든 여학생들이 무리지어 있었다. 나를 보는 눈빛들이 심상찮았다. 애초에 수틀리면 합류할까 했던 생각이 순진한 것이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경차를 타고 연대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연대 주변도로를 한 바퀴 돌았다. 연희동 방면에서 전경이 쇠파이프를 들고 서 있었다. 그 옆에는 출근하려 버스를 기다리는 시민들이 무표정하게 서 있었다. 또 우정스포츠센터 주변에는 피곤한 전경들이 모두 드러누워 자고 있었다. 서대문 구청 부근에도 전경이 있었다.
나는 빙 둘러 본 뒤 서강대를 들렸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소위 좌파라는 친구들은 지금 무엇을 할까 하는 호기심 정도였을까? 정문에서 출입을 통제하는 아르바이트생이 차를 정지시키라는 사인을 보냈다. 차를 멈췄다.
"무슨 일인가요?"
사실대로 말할까 하다가 아까의 경험이 떠올랐다. 지금 나의 행동을 누가 이해할 것인가?
"컴퓨터 통신 잡지사 기자인데요. 취재할 게 있어서요."
그는 조금 의심스럽게 보았지만 내 양복을 훑어보더니 통과시켰다. 내가 이럴 줄 알고 양복을 입고 왔다면 나의 지나친 생각일까? 차를 주차시키고 청년한마당 사무실을 찾는데 아무래도 총학생회실일 것같았다. 예상은 맞았다. 나는 연대의 경험 때문에 아주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한 학생이 나를 발견했다.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네. 제가 방금 연대에 들어갔다 나왔거든요. 상황이 혹시 궁금하다면 알려드릴까 해서이죠."
다행히도 그들은 연대소식에 매우 궁금해했다.
"그래요? 잘 되었군요. 안 그래도 서로 연락이 안 되어서 저희도 무척 궁금하던 차였거든요. 그런데 어디서 오셨죠?"
"네. 하이텔이라고 있죠?"
"아,네. 알아요."
"통신을 이용하는 사람입니다. 아이디는 INDRA죠"
"INDRA요? 아, 알아요. 글 많이 쓰시는 분?"
나는 무척 놀라기도 하고 반갑기도 했다. 드디어 프락치라는 오해를 벗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기쁜가. 우리들은 연대상황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있지요. 좌파는 말이지요. 입장이 틀려도 함께 투쟁을 했답니다. 연대 앞 가두시위에서도 열심히 싸웠지요. 그리고 의료지원 등 등을 하고 있는데 상황을 잘 모르니 현재 답답합니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시원한 말이었다. 얼마만인가? 이렇게 같이 투쟁한다는 말을 들어본 것이... 5.3 투쟁 이후에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말이다. 5.3 투쟁 때 부근 성당에서 놀던 관악 자주파 친구들이 생각난다. 나는 누군가에게 물어봤다.
"저들이 왜 그러고 있나요?"
"5.3투쟁이 자기들 싸움이 아니래요. 그래서 저렇게 놀고 있다고 하더군요."
이들 학생에게 신임이 가기도 했다. 그러나 노동문제를 잠시 언급하니 첫 마디가 민주노총 비판론이었다. 이 친구에게 내가 노동관련 일을 했다고 말할까 하다 말았다. 학생들 말마따나 일부 민주노총 지도부가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말이 과연 현재 노동법개정운동에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싸움을 앞에 두고 적전 분열을 일으키는 행동을 내가 어찌 이해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노동법개정 문제를 깊이 연구하다보면 참 답이 안 나오는 사안 중의 하나이다. 민주노총 관계자들과도 이야기를 나눴었지만 학생들이 쉽게 판단할 문제가 아니다. 과연 학생들이 저토록 확신하여 말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러나 나는 그 학생에게 묻지 않았다.
"저, 컴퓨터 통신 좀 할 수 있을까요?"
"그러세요."
나는 컴퓨터 전원을 켜고 통신망에 들어갔다. 바통모 게시판과 전대기련 게시판 등에 연대상황에 대한 짤막한글을 올렸다. 내 글이 속보성 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추측이었다. 이야기하던 학생도 많이들 궁금해 할 것이라는 말 때문에 확신이 들기도 했다. 일을 마친 뒤 나는 총학생회실을 빠져 나왔다. 아침이라서 학생들은 청소를 하다가 작별 인사를 했다.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차를 몰고 서강대를 빠져 나오자마자 이내 우울해졌다. 시내에 볼 일을 보고 난 뒤에도 개운치 않은 뒷맛이 남았다. 자꾸만 연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아저씨의 말이 떠오르며 보이는 신호등이 온통 바리케이트로 보였다. 사람들이 신기하게도 바리케이트를 피해 길을 건너고 있었다.
"통일이 사실 우리 모두가 바라겠지만 그리 쉽나? 그리 쉽다간 벌써 되었지. 좀 말이야. 학생들이 조금 양보해서 우덜 이야기도 차분히 듣고 또 김영삼 정권이나 북정권에 대해 아는 이야기 있으면 들려주고, 이산가족도 만나게 힘써 주면 얼마나 좋아. 그 점이 좀 아쉽기는 해. 누가 학생들 순수하다는 거 왜 모르겠어? 다만 학생들을 그냥 믿기에는 우리도 통일에 대해 알 건 알아. 통일은 멀고 험하다는 거지."
까페 <장정일>:까페에 사는 여자 vs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 탄백신화(坦白神話)
2004. 5. 31. 2:59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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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페 <장정일>
까페 <장정일>은 어디에서나 보였으나 함부로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전직 은행원이었던 소설가는 무전취식할 작정으로 그 곳을 찾아 갔으나 문전박대 당하자 간판만 보고 감격하여 오줌보가 터졌고 전직 소설가인 가방모찌는 까페 <장정일>에서 양주를 마시며 "그게 아직도 꿈이란 걸 믿으십니까?"란 히트작을 쓰는 게 소원이었는데 매번 잠만 자면 나타나 소원이 이루어져서 군말 없이 사회생활 지내고 있고 엉덩이가 줄었다 커졌다 맘대로 할 수 있는 전직 노동자인 모델은 가상현실 오락게임인 까페 <장정일>에서 홀딱쇼를 했었다는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소문 때문에 조선일보에서 시사칼럼을 쓰고 있다. 이 이야기는 물론 인생유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1. <까페에 사는 여자>는 명문대에 다니는 여학생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규모가 작지만 알맹이 있는 사업을 하시는 분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을 유복하게 보냈다. 시대가 아무리 척박한 팔십년대라 하더라도 그녀에게 팔십년대란 꿈과 사랑과 낭만의 시대였을 뿐이다. 그러던 그녀에게도 기분 나쁜 <현실>이란 단어가 뇌리 속을 떠나지 않게 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녀의 부모님이 이혼했다. 이혼 사유는 아버지의 바람끼, 정확히 표현하면 젊은 아가씨와 두 집 살림을 차린 아버지의 외도였다. 그녀는 가치 혼란에 빠졌으며 아버지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어머니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었다. 단말마의 울부짖음외에는 뚜렷한 대안이 없으면서도 지독한 아집만으로 상황을 자꾸 자신에게 불리하게 끌고 가는 어머니의 무식함에 넌더리를 낸 것이다. 그녀가 아버지를 <능력있고 지적이며 세련된 남자>의 이상형으로 생각해왔기에 대비는 한층 강조되었다.
그후 그녀는 대학가 근처에 방을 따로 내어 혼자 살았다. 우울한 날에는 까페를 자주 찾았다. 그녀는 거의 매일 우울했기 때문에 자취방에서 까페를 찾는 것이 아니라 까페에서 자취방으로 가끔 놀러가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녀는 거의 혼자였다. 사람들 사이에서도 혼자였다.
그때 그녀가 잘 다니던 까페의 주방장이 그녀를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주방장은 영국인과 결혼한 누나의 사진을 언제나 지갑 속에 품고 다녔다. 그리고 주방장은 누나의 사진을 보여 주면서 자신도 조만간 초청을 받아 영국으로 간다고 자랑하였다. 이 <영국에 사는 남자>는 누나의 사진, 멋들어진 칵테일 솜씨, 촌스럽지만 익살스럽지 않은 퍼머머리, 아동스런 얼굴, 장난끼가 돋보이는 말솜씨로 그녀를 사로잡았다.
그는 그녀와 억수로 비가 쏟아지는 밤에 빗속을 거닐고 싶다는 그녀를 이끌고 여관에 갔다. 그리고 그들은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인신고를 했다. 그녀는 신혼 꿈에 부풀어 있었고 나름대로 학벌과 재산의 차이를 극복한 이 위대한 사랑에 헌신할 것을 속으로 다짐했다. 이러한 사랑만이 그녀의 고뇌를 잊게 해주었다. 그녀는 대학을 그만두었고 그 또한 다니던 까페를 그만두었다. 그들은 마련한 돈으로 방을 얻어 열심히 살고자 했다. 그들은 포장마차를 차려 행복한 단꿈을 꾸었다. 그녀의 부모도 할 수 없다는 듯 인정을 해주었다. 그는 건실한 듯이 보였다. 그녀는 가진 자의 고유한 속성인 건방진 티를 내지 않고 늘 겸손함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영국에 사는 남자>는 포장마차를 돌보지 않았다. 그는 매일 술에 취해 들어왔다. 가진 돈을 도박에 물 쓰듯 썼다. 가끔씩 이유 없이 그녀를 패기도 했다. "네깟 년이 뭘 알아? 나 중학교밖에 안 나왔다고 무시하는 거지? 씨발년! 하늘 같은 남편을 뭘로 알고! 군말말고 돈이나 내놔" 그녀는 때로 사정하고 때로 애원하고 때로 울기만 하였고 때로 짐짓 화난 척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영국에 사는 남자>는 더욱 증세가 심해졌다. "영국에 있는 누이도 너따위와 살지 말고 빨리 영국에 오라고 편지왔어, 내 누이가 누군지 알아? 영국에 살고 있다고."
<까페에 사는 여자>는 이미 그 정체를 알고 있었다. 그의 누나는 동두천 아가씨였었다. 어떤 혹인 병사와 운좋게 정을 통해 미국으로 갔다가 그의 복무지를 따라 영국으로 갔다. 그러나 그의 누나는 남편으로부터 한 푼의 위자료도 받지 못하고 이혼을 당했다. 그의 누나가 곤경에 처해 있다. 그러나 <영국에 사는 남자>는 그의 누이에게 아무런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서 영국에 가야 하는데 그녀의 부모는 전셋방과 포장마차 정도로 자신들의 역할이 끝났다고 보기 때문이다. "씨발 년! 왜 말을 안 해. 돈 내놔! 돈을 내놓으라고!" 그들은 결국 헤어졌다.
그후, <까페에 사는 여자>는 신혼집에서 나와 다시 까페로 가서 살았다. 전과 다른 까페였지만. 그리고 <영국에 사는 남자>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가끔씩 영국으로 갔다고 회자되더니 어느 날 예전에 다녔던 까페에 멀건하고 이쁘장한 예전 얼굴로 나타났다. "잘들 계셨어요? 장사 잘되나요? 주방장 필요하지 않으세요? 누이요? 요즘도 영국으로 오라고 성화랍니다."
2.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까페의 주방장이다. 그가 따분한 일들에 넌더리를 내던 참이었다. 아까부터 혼자 와 있던 유한마담으로 보이는 아줌마가 사방이 막힌 테이블에 앉아 다시 손뼉을 쳤다. "여기 맥주 두 병과 담배 한 갑" 경험이 미숙한 웨이터가 술과 담배를 갖다 놓고 그냥 나온다. "저런 쪼다 같은 놈" 그렇다고 그가 그녀와 상대하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벌써 몇 번이나 근처 여관에서 그녀와 볼 일을 마친 후였기 때문이다. 씹에 환장한 년! 씹을 대가로 돈벌기도 좋지만 가끔씩 사업상 남한에 찾아오는 쪽빠리 새끼한테 기다렸다는듯이 후장을 내미는 년따위에게 질렸기 때문이다. 그는 웨이터에게 말한다. "야! 임마, 네가 좀 처리해."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요즘 골치가 아프다. 벼라별 년들이 다 찾아와 지랄이기 때문이다. "에이, 나도 여대 근처로 옮길까 보다." 그에게는 여대 근처에서 일하는 그의 친구가 있다. 그의 친구 말에 따르면 골빈 여대생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 하였다. 영업이 끝났는데도 집에 가고 싶지 않다고 투정부리기까지 하는 여자를 달래 집으로 보낸 경험이 꽤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여기보다 물이 좋잖아, 그래도 여대생들인데." 그는 자신이 일하는 까페가 불만이다. 이 까페에는 약간 미쳤다 싶은 여자들이 자주 찾아온다. 한번은 자신이 H그룹 회장 딸이라며 찾아오는 여자가 있었는데 그녀는 계산할 때마다 팁을 후하게 주었다. 심지어 자신들이 가엾다며 그녀의 시계며 목걸이며 닥치는대로 내주곤 했다. 물론 웨이타들이나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속지 않았다. 그들은 단번에 보고 그녀의 신분을 눈치챌 수 있었다.
'공순이군.'
그녀는 한 달에 한 번씩 찾아왔다. 웨이타들은 한동안 그녀가 오면 장난쳤다. 웨이타들이 경호원들이 왜 없냐고 정중히 물으면 그녀는 자유가 너무나 그리워서 가끔씩 이렇게 경호원 모르게 빠져 나온다 하였다. 오드리 헵번의 로마의 휴일을 한 번 본 모양이었다. 웨이타들은 겉으로 미소를 띄지만 속으로 비웃는다. "미친 년, 구로공단에서 뼈빠지게 한 달 일한 돈을 저렇게 물 쓰듯 해?' 고향에 계신 부모한테 효도나 하지."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가 그녀의 정체를 확실히 알고 있어서 웨이타들도 혹시 하는 기대는 일찌감치 버린 뒤였다.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이미 <한 달에 한번 회장딸>과 잔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웨이타들도 잘 사람은 다 잤다. 그래도 그녀가 찾아오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이런 돈씀씀이가 아니면 지금과 같은 호강을 누리지 못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너무나 그 관념이 강렬했기 때문에 한달 전의 일을 기억하지 않았다. 십 년 뒤 백 년 뒤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아무튼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능청스럽게 그녀에게 말한다. "회장 따님, 또 이렇게 왕림해주셨군요. 정말 친절하고 고마우신 분입니다. 또 들려주세요." 그는 그녀를 보내고 나서 홍콩영화광인 <임청하피아>인 웨이터에게 말한다. "얌마, 너 무협지 좀 그만 읽고 홀 좀 잘 봐, 쟤 더이상 저러는 거 못봐주겠다. 여기가 뭐 정신병원인 줄 알아?" <임청하피아>도 지지 않고 말했다. "저라고 막지 않은 줄 아세요? 지가 마구잡이로 들어오는데 어떡해요. 그리고 왜 또 무협지 가지고 그래요? 무림은 우리의 숨소리가 요동치는 곳인데요, 아! 임청하!!" 그는 말끝마다 임청하 타령을 하다시피하곤 했다. "미친 놈!"
<임청하피아>는 유복한 집안에서 살다가 계모가 들어오는 바람에 삐딱선을 타다 학교에서 무기정학을 먹고 가출한 열여설짜리였다. 계모가 소설에서 등장하는 계모와 달리 무척 마음씨 착한 분이라 애타게 <임청하피아>를 찾고 있지만 <임청하피아>는 다음과 같이 말할 뿐이었다. "제 이복형님은 훌륭한 법대생인데요. 꼭 성공할 거예요. 그런데 형이 저 때문에 불편해 해요. 전 돈을 무지무지 벌어서 형 줄 거예요."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웃기지도 않게 악착같이 돈 벌어 자기 통장에 저축하는 <임청하피아>에게 한숨만 쉰다. "병신 같은 놈!"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중학교때 패싸움하다가 상대방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바람에 중학교에서 퇴학당하고 서울로 올라온 사람이었다. 갑자기 그의 눈앞이 환해짐을 느꼈다. 두 명의 괜찮은 여자애들이 들어왔다. 그는 잽싸게 시바스 리갈을 꺼내어 다가갔다. 한참 동안이나 여자애들을 배꼽 빠지게 하더니 홀에서 바쁘게 일 보는 <임청하피아>에게 다가가 말한다. "야! 오늘 일 끝내고 이태원 가는 거다. 알았지?" "전 관심 없는데요." "얌마, 시키는 대로 해, 네 놈 총각딱지를 졸업시켜 줄테니까." "............"
<임청하피아>는 우울했다. <임청하피아>는 TV도 자주 보았다. 언제나 TV 드라마 속에 나오는 이쁘고 생기발랄한 여대생들. 그녀들 중 아무나와 데이트할 수 있다면...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가 아무리 그에게 싸가지 없는 여대생들이 너 같은 가출한 놈에게 추호도 관심이 없을 거라고 말해도 막무가내였다. 적어도 대학이라도 가야 된다 말했지만 꿈쩍하지 않았다. 차라리 돈이나 많이 벌라고 말해도 <임청하피아>는 듣지 않았다. "그 여대생들이 마음씨가 얼마나 착한데요. 그딴 거 다 필요없을 거예요. 두고 보세요." 소귀에 경읽기였다.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가 여기 까페에 오는 여대생들이 얼마나 시건방부리는 지를 잘 알지 않느냐 백날 이야기해도 <임청하피아>는 짧게 말할 뿐이다. "암만 그래도 TV가 거짓말 할까요?" 아무튼 <블루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임청하피아>와 두 여성들을 동반하고 이테원 해밀턴호텔 나이트에 갔다.
그 나이트에는 자신의 고향 친구가 웨이터를 보고 있었기 때문에 외상이 가능했다. 그들은 술을 계속 마시다 부르스를 추기 시작했다. 물론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계속 술만 마셨다. <임청하피아>는 처음 만져보는 여체의 육감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럴수록 자신의 손의 힘이 더욱 가해졌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과 비슷하거나 한두살 위이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능숙하게 스텝을 밟는다. 무대에는 개그맨 임하룡이가 와서 음담패설 섞인 DJ솜씨를 발휘하는 멘트를 계속 주절거린다. 그녀들 중 <임청하피아>가 마음에 들어하는 여자는 무척 좋아하며 꺄르르 웃는다. '그러고 보니 무척 이쁘네.' <임청하피아>는 심각한 눈치로 부르스를 추며 말을 건넨다. "저는 당신을 이해못하겠어요. 하지만 당신이 좋아지네요. 한때 젊은 혈기로 하는 불장난보담 밝은 낮에 우리 만나요." 순간 <임청하피아>의 파트너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밀착된 둘의 간격을 약간 벌린다. 그리고 말한다. "왜요?" " ???" <임청하피아>는 의외의 답변에 한동한 말문이 막혔다. 그러다 다시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야기도 제대로 못 나누고 마치 연애하는 것처럼 이렇게 둘이 춤추니까 이상해서요." 파트너는 또한번 꺄르르 웃었다. "어머, 순진도 하셔라. 내숭이라면 저 뒤집어져요." 그러다 무슨 생각을했는지 사못 진지해지며 <꺄르르>는 말했다. "그래요? 그러지요, 근데 댁은 웨이터 맞아요?" "네." 부르스 타임이 끝났다. 그러자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의 파트너가 몸이 달아올랐는지 뛰어나와 열정적인 춤을 췄다.
새벽 3시가 가까이 오자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 일행은 나이트를 나와 여인숙에 갔다. 그 여인숙은 <부르스...>의 단골이었다. "또 오셨수?" 늙은 여주인이 마치 잘 교육받은 비서실장처럼 방 2개를 잡았다. <부르스...>는 돈을 건네며 말했다. "괜찮은 그림 좀 틀어줘. 지난 번 꺼는 재미없던데, 그리고 동양화 하나 가져오고." 방 하나에 넷이 앉아 <부르스...>는 말한다. "우리 짝짓기 내기하는 거다. 이기는 사람이 선택하면 되는 거다." <임청하피아>는 술도 많이 마신 데다가 정신이 없었다. 속으로는 계속 말도 안돼 그러면서도 왠지 끌리는 마음이 없지 않았다. 그래도 안되겠다 싶어 <임청하피아>는 일어났다. "저, 졸려서 저 방에 가서 잘래요. 재미있게 노세요." "얌마! 어디 가? 이 자식이?" <임청하피아>는 재빠르게 다른 방으로 가서 이불을 뒤집고 누었다. 잠이 안 온다. 갑자기 옆방에서 소란이 일더니 <꺄르르>가 여자친구랑 함께 방에 뛰어들 듯 들어온다. "무서워요. 아저씨가 대신 옆방에 가서 잘래요? 저희는 여기서 잘께요." <임청하피아>는 깨달았다는듯 벌떡 일어나 예의 신사도 정신을 발휘한다. 복도에서 <부르스...>를 만났다. "임마, 여자들 어디 갔어." "피곤하다고 잔대요. 그러니 놔둬요." "뭐가 피곤해? 저리 비켜." <부르스..>가 여자들 방을 들어가려 하니까 벌써 문이 잠겨져 있었다. "야, 문 좀 열어봐, 할 이야기가 있어. 문 좀..." "저희 피곤해요. 일찍 잘래요." "야! 문 열으라니까. 성질 피기 전에 열어." "......"
<임청하피아>는 너무나 피곤하고 적이 안심도 되어서 방에 들어와 잠을 청했다. 그런데 잠이 안 왔다. 자꾸 <꺄르르>의 얼굴과 요염하게 피어올라 자신의 가슴과 맞닿았던 <꺄르르>의 제법 봉긋한 가슴만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깜박깜박하며 잠이 저절로 들었는데 한참 동안이나 입씨름을 하던 <부르르...>가 지쳤는지 자기 옆에서 코를 골며 자고 있었다. <임청하피아>는 씁쓸해 한다. '내 풍운의 꿈을 갖고 서울로 올라왔는데이런 꼴을 아버지와 계모랑 형님이 아신다면 얼마나 안타까와하실까? 그래, 한 때 불장난이야. 다 <부르스...> 때문이야. 이런 인간인지 정말 몰랐어.' <임청하피아>는 잠자리에서 몰래 일어나 여인숙을 빠져나갔다. 몸으로 싸늘한 한기가 닥쳐왔다. '그녀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안물어봤잖아. 아니야. 인연이 닿으면 만날 날 있겠지' 그는 까페로 향했다. 그의 발걸음이 왠지 힘차 보였다.
<부르스...>는 다음 날 오후 들어서야 어기적거리며 까페에 나타났다. <임청하피아>는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주인 아저씨가 형님 없다고 야단이신데, 오늘 재료 구입해야 하는데 형님 없다고 난리였어요. 연락해도 여인숙에선 모른다고 하고." <부르스...>는 심드렁하게 코를 한 번 후볐다.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께." 그때 누군가가 들어왔다. 살짝 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더니 귀엽게 인사를 했다. 그녀들이었다. 순간 <임청하피아>는 정신이 멍해졌다. '도망쳤을 줄 알았는데?' <부르스...>가 말했다. "얘들 일자리 마련될 때까지 당분간 여기서 일할 거야." 아가씨들은 싱글거리면서 주방도 청소하고 홀도 청소했다. 여간 내기들이 아니었다. 싹싹함도 있어서 풋풋한 느낌과 함께 사못 싱그러웠다. '어떻게 된 거지?' <임청하피아>는 <꺄르르>가 잠시 전화를 거는 내용을 엿들었다. "나, 이모야. 꺄르르. 요런 앙큼한 녀석. 있지. 이모가 있잖아. 오늘 일자리 얻었거든? 그러니까 엄마한테 이야기해. 걱정마시라고. 알았지? 꺄르르. 공부 잘 하고 알았지? 그래, 응응"
그녀들은 일을 멋들어지게 해냈다. 주인도 만족하는 눈치였다. 특히 <꺄르르>도 <꺄르르>지만 <꺄르르>의 여자친구는 보통이 아니었다.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적당히 씌우면서 매상을 엄청나게 올렸다. <부르스..>는 웃으며 말했다. "저 년, 인물이야. 빠구리하는데 방귀를 뿡뿡 뀌더라고? 하하. 그런 년치고 인물 아닌 년 없다. 내 말이 틀림 없어. 두고 보라지."
그녀들이 일을 마치고 잠들었을 때 <임청하피아>는 <부르스..>에게 말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뭘? 아! 그거. 하하. 무지 웃겼어. 그러나저러나 넌 언제 갔냐? 짜식 가면 간다고 해야지. 말없이 사라지니 놀랐잖아." 그러면서 <부르스...>가 말하는 내용은 <임청하피아>에게 충격적이었다.
"새벽에 목이 마르더라고. 그래서 물 한 잔 먹었는데 네가 없잖아. 그래서 볼 일도 없겠다 나가려는데 오줌이 마렵잖아. 그래서 복도 끝에 있는 화장실에 갔지. 그랬는데 <뿡뿡>과 떡하니 마주쳤어. 걔가 말하더라. 너 있냐고. 없다고 했더니 누가 먼저랄 것도 없었어. 순간 서로 불꽃이 팍 튀더라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있던 방으로 가서 빠구리 한바탕 했지. 끝나고 <꺄르르> 자고 있냐고 말했더니 둘이서 잠 안자고 밤새 이야기하다가 심심해서 포르노 보고 있다고 하더라. 너가 이상한 이야기해서 그냥 잘려고 했는데 잠이 안 오더래. 내가 그래? 하고 피곤에 지친 <뿡뿡>을 두고 그 방으로 갔지. 그랬더니 열심히 그림을 보고 있더라. 나를 보더니 그녀가 은근히 반색하더군. 사실 이렇게 말이 나와서 말인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뿡뿡>보다 그녀가 더 좋았거든. 그래서 재미 좀 봤지. 그리고 잠이 들었는데 오후에야 깨서 밥 먹고 이야기 해보니까 오빠 만나서 즐거웠다고 또 만나고 싶다는 거야. 그래서 너 갈 길이나 가라, 한두 번 해보냐 그랬더니 요즘 갈 데가 없다더군. 그럼 내가 아는 친구가 있는데 소개해줄까 그랬더니 좋아하더라. 그래서 데려왔지. 그 친구들 오늘 보니까 잘 하더라."
<부르스...>는 이야기를 끝내고 피곤하다는 듯이 허리를 만지다가 자고 있는 그녀들 엉덩이를 한 번씩 토닥거리더니 의자들을 펴서 잠을 청하더니 이내 골아 떨어졌다.
<임청하피아>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따위 일들이 어떻게 일어날 수가 있는가? 무협지에서도 보지 못한 일이다. 더구나 TV에서는 더더욱 보지 못했다. 그리고 왠지 손해를 본 것 같아 기분이 울적해졌다. 자신이 더더욱 초라해졌다. <임청하피아>는 다음 날로 관두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군장교인 아버지와 계모는 무척 기뻐했다. <임청하피아>는 앞으로 공부에만 전념하겠다고 말했다. <부르스를 추지 않는 남자>는 계속 그 까페의 주방장으로 있다가 여대 근처의 친구가 있는 까페로 직장을 옮겼다. 땅달하면서도 자신감이 있고 그러면서도 백옥 같은 피부가 빛나는 <부르스...>. 여대생들도 생각한 것과 달리 다른 여자랑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징징짜는 게 싫다 라는 그다운 말이 들려왔다. 그는 여대 근처에 있다가 영등포 방면으로 옮겼다. 아는 사람의 말로는 그가 형님에게 도움을 받아 임대식 호프집을 경영했다는데 워낙 부지런한 성품이어서인지 잘 된다고 하였다. <꺄르르>와 <뿡뿡>은 까페에서 며칠간 일하다가 <부르스...> 친구가 하는 의정부쪽 조그마한 술집으로 갔다가 그 집 주인으로부터 지나치게 자유분방(?)하다는 이유로 쫓겨나서 가끔씩 이태원에서 보였다가 <뿡뿡>은 공장에 취직했다고 하고 <꺄르르>는 어느 놈팽이를 잘 물어 시집가서 제법 산다고 한다. 얼마 전 <뿡뿡>이 <부르스...>를 찾아왔다가 없는 걸 알고 무척 아쉬운 눈망울로 갔다고 한다.
소식통에 따르면 그녀가 다니는 공장의 노조가 그녀 없이는 일이 안 될 정도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 이 글은 96년쯤에 썼을 겁니다.
2014년, 통일대교가 무너지다
인드라 94? 95년?
2014년 10월 12일,
통일발해연방공화국 발해자치공화국 수도
평양의 고요한 아침을 가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유히 흐르는 대동강 물을 가로질러 하루 십만 명의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통일대교의 중앙부 상판이 갑작스럽게 붕괴되어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는 참변이 일어났다.
이 통일대교는 첨단공법과 신소재로 설계된 트러스 구조로 만들어져서
아무도 의심하지 않고 안심하고 지나다녔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시민들의 절규와 분노 어린 성토가 잇따랐으며
자치공화국 정부는 수습마련에 안간힘을 쏟고 있었다.
자치공화국 대통령이자 개혁사회주의당 당수인 최소평은
연방공화국 대통령인 권동길에게 전화를 한다.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발해자치공화국의 고속성장의 미명하에 인민들이 조금은 먹고 살만해졌습니다만
핵폐기물 처리시설의 80프로를 발해에 한다든지,
산업합리화정책이란 허울로 발해중소기업의 60프로 이상이
신라백제자치공화국의 대기업에 의해 예속, 혹은 도산되었고,
시민들은 살인적인 실업의 위협에 몸을 떨고 있습니다.
더 이상 발해는 땅투기의 엘도라도가 아닙니다.
신라백제자치공화국 굴지의 대기업인 존경받는 부자, 삼대그룹이
(삼성-현대 초유의 2대 기업이 2000년 들어 기업생존을 위한 강력한 기업연합을 형성.
이로 인해 약 20,000명 - 파급효과 360,000명이 기업합리화 정책으로 실업상태에 빠졌다.
무능력자로 해고된 사람들은 대부분 발해출신들. -
만든 통일대교가 붕괴되어 시민들은 삼대그룹에 대한 비난에 그치지 않고
연방공화국에 협력한 개혁사회주의당과 자치공화국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야당인 진보적 주체사상을 꿈꾸는 민족연대당(이하 주민연)은
의회해산 요구, 총선거를 요구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지한 토의와 절차 끝에 자치공화국 군병력을 이전 휴전선으로 이동하고
당분간 자치공화국간의 교류를 금지시킬 방침을 방금 내각에서 의결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연방공화국의 장밋빛 미래를 그리지 않습니다.
그리 아십시오."
통화가 끊겼다.
일방적인 핫라인 전화에 연방공화국 권동길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어떻게 이루어진 연방공화국인데 이런 사태가 일어나다니...
그는 즉각 신라백제자치공화국 대통령인 유근찬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받은 유근찬이 말한다.
"그것은 핑계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인기없는 정책일지라도
백제신라자치공화국 국민에게 통일세를 걷는 등
민족과 민중과 함께 하는 복지 정책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습니다.
우리는 개혁사회주의당의 정권 창출과
발해공화국의 경제성장에 지대한 역할을 해오지 않았습니까?
현재 발해자치공의 상황을 보면
야당인 주민연의 인기가 망국적인 지역주의에 편승하여
개혁사회주의당을 위협할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주민연 당수인 김평일과 김가문에 대한 애정을 잊지 않고 있는
극렬분자들뿐만 아니라
평안도민들, 실업자들, 발해쪽 중소기업업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개혁사회주의당을 지지해 온
노동자들과 인텔리계층에서도 일부가 암묵적인 지지를 보낼 정도입니다.
따라서 개혁사회주의당내 매파들이
국민의 불만을 연방에게 폭사시키려는 책략입니다.
우리는 이제 결정해야 합니다.
저와 통일민주노동사회주의당 내
'갱제를 걱정하는 존경받는 부자 연구 모임' 에서
그간 줄기차게 주장해온 계획을 실천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기회에 껍데기뿐인 발해정권을 쓸어버리고
잔존 주사파 무리를 제거할 다시 없는 기회라고 생각됩니다.
위대한 통일국가의 번영을 위한 고뇌 어린 결단을 바랍니다."
권동길이 말한다.
"당신의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야당이 반대할 게 틀림없잖소.
나 또한 탐탁하게 여기지는 않으나 그들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는 없잖소."
유근찬이 말한다.
"연방 최대의 야당인 '인간을 생각하는 노동동맹(이하 인노맹)'
의 반대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극좌 노선을 걷는 이 빨갱이들이 기승을 부리게 놔두는 한
우리의 앞날은 보장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반대를 위한 반대만 일삼는 집단이니까요. "
이 말을 들은 권동길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소. 지난 20세기말 한때 함께 운동을 했던 사람들일진대
어찌 저리 극악무도할 수 있소.
다함께 대오에 앞장서지 못할 망정
재나 뿌리는 저들이야말로 반민족적, 만민중적 무리임에 틀림이 없소.
그러나 우리 통사당이 지난날들의 군사정권과 같은 행동을 할 수는 없소.
나 또한 진보에 몸을 바친 사람이오."
유근찬이 다소 상기된 음성으로 말을 잇는다.
"우리는 국내정책에 연연해서는 안됩니다.
지금 일본은 연방공화국의 높아 가는 국력에 위협을 느끼고 있습니다.
심지어 일본의 빨갱이들이 인노맹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저와 연락을 취하는 일본쪽 관계자들의 말로는
일본과 손을 잡고 저희 연방을 붕괴시키고자 한답니다.
더 이상 저들의 놀음을 방관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는 현재 힘이 미약하여 일본과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그들을 자극시켜서는 곤란합니다.
우리는 더이상 무책임한 야당이 아닙니다.
우리가 야당이었다면 다르게 나가야하겠지요.
미국쪽과도 연락이 되었습니다.
이제 대등한 관계로 진일보해가는 미일통일발해동맹이 깨져서는 안됩니다.
한편 개혁사회주의당 최소평이 중국쪽으로 급속히 쏠린다는 첩보도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중국이 고립을 피하기 위한 정책으로 보입니다만,
만일 이와 같이 외교정책에 혼선이 있게 된다면
미국이 가만 있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은 어떤 일이 있어도 현재의 평화로운 동북아 정세에 영향을 주는 행동은
삼가겠다는 원칙입니다만
중국 견제에 혼선을 주는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는 입장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시면 안됩니다."
"그렇다면 대책은 있소?"
"물론입니다.
통일대교가 지난날의 성수대교도 아닌데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좋은 빌미를 줄 수 있습니다.
물론 삼대그룹과 발해자치공의 실수이지만
우리는 이를 인노맹 내 과격테러분자들의 사회혼란책동으로 몰면 됩니다.
이 방식은 언제나 쓸 모 있습니다.
우리는 발해쪽에서도 원군을 구할 수 있습니다.
주민연과 인노맹 사이 또한 대립되는 점을 이용하여
전술적으로 주민연과 민족적 이익에 따라 행동을 같이 할 것입니다.
일차적으로는 인노맹을 공격하고
인노맹 우파와 개혁사회주의당의 호의적 관계를 빌미 삼아
이번 개혁사회주의당의 행위를 내란행위로 간주하고 일시에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권동길은 감탄한다.
"참으로 치밀한 계획이오.
실행시키시오.
그러나 만일 실패한다면."
유근찬은 확신에 찬 듯 말을 한다.
"성공할 것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훗날 역사가 평가해 줄 것입니다.
전임 노무환 대통령도 그 험한 꼴을 겪고도 맡은 바 책임을 다 하지 않았습니까?
역사가 우리 편인 이상 실패는 없습니다."
권동길이 말한다.
"그래도 희생은 최대한 줄여야 되오."
전화를 끊고 유근찬은 생각한다.
"바로 다음 차례는 너야 임마!"
유근찬, 급히 어디론가 전화를 한 뒤 밖으로 나간다.
그 후 발해자치공화국은 붕괴되고 한반도에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다.
<출처 : 네이버 이미지 검색>
충격 인노맹 사건 X파일
출처 : 인드라 혁명 블로그
INDRA 94? 95?
1.
CHOJI 일보 사회면기사 : 충격! 人勞盟 사건
국가 경제가 흔들리고 개혁이 몸살을 앓고 있는 요즘
아직도 망상에 집착하는 조직원이 최근 공안당국에 의해 검거되고,
그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 국민들에게 충격과 분노를 일으키고 있다.
XX 월 XX일 국정원 고위 당국자는 이 사건에 대한 회견을 가졌다.
고위 당국자에 의하면,
이 사건의 특징은 첫째, 조직의 자금 확보를 위해 정예 조직원을 훈련시킨 뒤
상류사회로 침투하여 협박과 공갈 등으로 사회질서를 문란시킨 점.
둘째, 소위 학생운동 활동가들을 가급적 배제시키고
노동자출신 활동가들 중심으로 조직을 꾸렸다는 점.
셋째, 장기간 조직의 보안과 활동을 위해 점조직으로 구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정 기간 조직원간의 연락을 정지시켰다는 점.
넷째, 노조를 중심으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도
자신들의 주장이 담긴 일체의 유인물 작성을 하지 않은 점.
마지막으로 그들 주장에 따르면
통일의 영역을 일본까지 확대했다는 점이라고 밝히고 있다.
고위 당국자는 이 인노맹(인본주의노동동맹) 사건이
서울뿐만 아니라 전국 각 지방에 조직이 있으며 해외에까지 조직을 확대시킨
규모가 건국이래 최대의 조직사건이라 밝히고 있다.
이 조직의 주동자로 밝혀진 인드라(가명)씨는
조직 내 특수훈련을 받고 서울 홍대 앞 오피스텔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조직 자금을 이용하여 카페를 차린 뒤,
오렌지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을 프리미엄 오렌지족이라고 자칭하면서
인지도와 신망을 높여왔다.
인드라씨는 오렌지족들이 부유층 자제인 점을 이용하여
그들의 비리 사실들을 알아내어 협박하는 등의 방법으로 조직 자금화였다.
인드라씨의 행각이 드러난 것은
김종화(가명)씨가 그의 여동생이 인드라씨로부터 협박받은 사실을 안 후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인드라씨를 폭행하는 사건서부터다.
경찰이 출동하여 양측을 조사하던 중
인드라씨가 단순한 사기범이라고 보기에는 의심스러운 점이 많아
사건을 국정원으로 넘겨 심층 조사 끝에
인노맹 조직의 전모가 드러나게 된 것이다.
국민에게 국내외로 여러 가지 우려할만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고,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운 지금
국민의 사회기강이 해이해진 틈을 타서
이러한 극좌폭력혁명조직이 준동했다는 점을 강조한 고위 당국자는
국민의 심려를 끼쳐드리는 이들을 발본색원할 것이라는 대국민 약속을 한 후
국민이 동요없이 맡은 바 일에 충실히 하실 것을 당부하였다.
또한 개혁 완수라는 시대정신으로 거듭나는
국정원 상을 정립할 것을 다짐하기도 하였다.
2.
HANGAE 일보 정치면 인터뷰 기사
- 현재 조직은 밝혀졌으나 조직원이 한 명밖에 검거되지 못했다. 이유는?
- 인드라(가명)씨가 완강히 버티고 있다. 다소 시간이 걸리리라 본다.
- 그렇다면 이렇게 수사가 공개되면 조직원들이 더욱 잠복할 게 아닌가?
- 우리도 그 문제를 충분히 고려하였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인드라씨를 검거한 뒤,
밝힌 대로 이 조직의 특수성이 있어 수사가 쉽지 않다.
인드라씨에게서 얻은 정보로는 그가 그를 훈련시킨 조직원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했으며 서로 알지도 못한다고 한다.
또한 그를 훈련시킨 조직원조차 현재 뉴질랜드에 있다고 하여
재외공관을 통해 추적했으나 행방이 묘연하다.
- 현재로서는 추적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인가?
- 그렇다. 우리도 안타깝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드라씨의 전력을 면밀히 추적중이다.
지금까지 얻어낸 정보에 따르면
조직원만 전국에 수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이번 일을 공개로 한 것은 인드라씨 이외에 다른 조직원 또한 유사한 방식으로
자금 확보를 위해 암약한 이들이 있을 것으로 당국이 보기 때문이다.
국민 여러분 중 유사한 피해로 의심나는 분들이 있다면
당국에 즉시 신고하시기 바란다.
철저한 신변 보장을 약속드린다.
- 마치 유괴범 검거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는데. 성공하리라 보는가?
- 그렇다. 발상의 전환이 이루어질 때가 아닌가?
내부에서조차 비관적인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국민들에게 경각심뿐만 아니라
개혁의 열망을 담아 반국가적, 반사회적 사태를 근절시키고 예방하여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 서민이 행복한 사회라는
민중의 정부가 표방하는 국정 원칙 차원에서 공개하였다.
- 좀 더 인드라씨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말해달라.
- 중학교를 졸업한 것이 그의 학력 전부이다.
그가 포섭된 것은 인천에서 전자부품 만드는 공장에서 일할 때이다.
같은 근로자 출신 중 하나가 조직원이었다고 한다.
그 조직원은 신원을 위조한 뒤 인드라씨를 포섭한 직후,
함께 퇴사하여 인드라씨를 집중 교육시켰다고 한다.
인드라씨가 귀공자 풍에 반사회적 정서가 강해
인노맹 조직으로 포섭된 것으로 보인다.
인드라씨는 훈련을 마친 뒤 십여년간 서울 등지에서
카페를 바꿔 차리며 암약해왔던 것이다.
- 구체적인 피해는?
- 현재 드러난 것만 해도 어마어마한 액수이다.
삼백억원에 달하고 피해는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 그러한 큰 액수라면 자금추적이 가능하지 않는가?
- 그렇다. 우리도 추적하였다.
그러나 인드라씨는 금융과 부동산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었다.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지만 인드라씨는 이를 교묘히 빠져나갔다.
그를 훈련시킨 조직원이 그 계통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자금 관리 수법이라 보고 이를 조사중이다.
현재 자금 중 일부분만이 인드라씨에게 있고
나머지는 모두 행방이 묘연하다.
- 잘 이해가 가지 않는데?
- 우리 사회에는 아직도 부패가 만연되어 있다.
유감이지만 현 시점에서는 이렇게 밖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
구체적인 이야기는 이들이 악랄한 수법을 사용했기에
여러 차원에서 대안을 마련한 뒤 추후 공개할 것을 약속한다.
- 인드라씨 주변에 정말 공범이 없었는가?
- 그와 함께 있던 종업원 등을 조사했으나 뾰족한 단서는 못 찾았다.
종업원들조차 그가 재벌 2세쯤으로 알았다고 한다.
개중에는 협박, 공갈 등에 공모한 자들도 있어 수명 구속시켰다.
그러나 국가보안법 위반은 아니다.
- 이 사건으로 파장이 여러모로 클 것이다. 어떻게 보는가?
- 인드라씨가 검거되면서부터 말썽이 많았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사건이 공개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인드라씨가 상류사회에 던진 충격은 말로 형용할 수 없다.
그리고 인드라씨가 4개 국어를 유창하게 하고
해외여행을 수 차례 다녀온 점을 수사중이다.
- 수사하는데 고생이 많았다. 끝으로 할 말은?
- 국가 질서 수호를 담당하는 한 사람으로 국민 여러분께 말씀드린다.
현재 이들은 각계에 침투되어 있다고 한다.
각별한 주의를 부탁드린다.
어느 때보다도 비장한 각오를 가지고 열심히 수사할 것을 약속드린다.
현 정부는 역대 정권과 차별화되는 민중의 정부다.
부자가 존경받는 사회, 서민이 행복한 사회 건설을 위해
맡은 바 일을 충실히 하겠습니다.
3.
Omygod 인터넷 신문 심층보도 :
(1) 인노맹은 과연 어떤 조직인가?
국정원 발표에도 나와 있듯이 규모가 건국이래 최대 조직이지만
밝혀진 대로 그 대강의 숫자조차도 현재 미지수이다.
왜냐하면 전적으로 인드라씨의 자백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드라씨 자백에 의하면,
수만 명이 국내외에서 활동 중이며
일정 기간 활동이 완료될 때까지 조직원간 연락을 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자금 연락이 이루어졌는데
그 연락조차 직접적 루트를 통하지 않고 해외 등으로 일단 유출된 뒤,
역으로 국내로 들어오는 단계를 거쳤다.
마피아식 방식으로 해외에서도 일시 고용한 외국인을 통해
외국인과 이루어졌으며 고용한 외국인은
다시 그 일에 고용하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접선 방식은 간단하다.
인노맹을 상징하는 푸른색 바탕의 하얀 망치가 수놓은 손수건을
지정된 장소에서 서로 보여주면 된다는 것이다.
지정된 장소는 사전에 훈련시 체득한 방법으로 장소를 정하였다고 한다.
만일 서로간에 루트가 끊어질 긴급한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는 사전에 통고해주지 않아도 안다는 것이다.
아마도 인드라씨의 정황 등을 수시로 파악하고 있다는 추리 외에는
현재 뚜렷한 생각이 없다.
당국은 그가 인터넷 블로그에 무의미한 글들을 써온 점에 착안하여
그의 글에 대한 암호화 가능성을 정밀 조사중이다.
일각에서는 공안당국 내에까지 이들 세력이 침투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아무튼 이를 토대로 이 조직을 고려한다면,
가히 외국의 전설적인 프리메이슨 조직과 같은 신비한(?) 조직임은 틀림없다.
(2) 인노맹의 구체적 활동?
현재 그들의 유인물이나 서적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인드라씨가 훈련시 학습한 정도는
대학가내 운동권 1학년생들이 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학습은 주로 실무적인 것이었으며
기존 책들에 대한 철저한 비판이 중심이었고 구술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노맹을 극좌 조직이라고 추정하는 이유는
인드라씨가 학습한 책들 대부분이 마르크스 관련 서적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조차도 원서 등이 아닌 입문서나 개론서였으며
이후 인드라씨가 나름대로 원서 등을 읽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노맹에대해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첫째는 좌익조직으로서는 독특하게 사상성보다는 실무에 중심을 둔 점이다.
둘째는 인노맹은 좌익조직의 전혀 새로운 유형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인드라씨는 자신을 인본주의자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특정한 사상만 고집하지 않고 동양사상과도 접합하는 등
넓고도 깊은 사상적 편력이 있다.
그를 직접 취조한 공안 당국자의 말에 따르면,
인노맹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독특한 사상적 발전을 보장하고
또한 이를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사상은 대안 해결이요, 의식적 문제라는 점이고
선차성은 삶 자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각자의 다양한 경험은 여러 대안점을 낳을 수 있으며,
자신의 삶에서 녹아든 원칙들 속에서 조직 이론이 공유된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요즘 논의되고 있는 "몸 철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드라씨는 인노맹 조직이 수평적이며, 유동적임을 강조한다.
단지 자신은 조직 내 과제를 맡았으며 그것을 학교에서 리포트 제출하듯
상류사회 진출 프로젝트를 제안했고 동의를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조직에서는 자신 아이디어에 적합한 훈련체계만을 제공해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인노맹의 경우는 인드라씨가 인노맹의 최고 수장이기도 하면서
일개 조직원이기도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 동의를 구한 것조차
그를 훈련시킨 사람과 그 사람과 관계된 다른 사람만이 안다고 하기 때문이다.
인노맹에서는 제안이 조직원들로부터 입안되면
그 조직원과 관계된 사람 1인과 그 관계된 사람의 관계된 사람 1인,
도합 2인의 동의만 구하면 해결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현대 경영기법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첨단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인드라씨 또한 조직원을 확보하는 노력을 하고자 했을 텐데
그 점만은 완강히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다만 알려진 바에 따르면 인노맹에서는 조직원을 포섭하는 경우,
조직원 1인만을 포섭할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다시 말해 평생 조직원 포섭 대상 인원을 1명으로 국한시킨다는 점이다.
또한 조직원과는 일정 기간 그를 면밀하게 검토한 뒤(2~3년경과),
다시 그에 대한 신뢰 등을시험해보고(1~2년),
거의 확정적일 때,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후 훈련 기간을 삼년 정도로 하여 철저한 훈련을 한 뒤
그의 역할을 관계자와 함께 논의한 후 다른 일에 참여토록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틀림없이 교육자 자신과 다른 역할을 맡는다는 것이며
그 역할도 서로 모르게 떨어지게 한다는 것이다.
현재 공안당국에서는 그 피교육자가 일본에서 활동중이라는
막연한 추측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점에서 인노맹이 반드시 한국인만으로 구성되었는가도 의심할 수 있다.
(3) 인노맹은 무엇을 추구하는가?
현재까지 인드라씨 의견만으로는 전혀 알 수 없다.
인노맹의 의견이기도 하면서 인드라씨 개인의 의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만 다음과 같은 점만이 공통적일 수도 있다고 한다.
첫째, 기존 운동에 대한 비판적 사고.
둘째, 특히 학생운동에 대한 깊은 불신.
셋째, 노동조합의 중시.
넷째, 당 조직을 최후의 부르주아적 방식이라고 본 점.
다섯째, 혁명과 반동 시기가 몇 차례 지나가야만
진정한 혁명이 도래할 시기가 온다는 전략적 특징.
여섯째, 노동자의 대규모 스트라이크가 일정 정도 상승하면
인노맹의 사람이건, 아니건 사상적으로도 공감이 되고
대중활동에 풍부한 경험과 지지를 갖춘 인물이 노조활동에서 등장하면
그를 중심으로 별도의 지침이 없는 한 함께 한다는 점.
일곱째, 인노맹 조직원은 진정한 혁명 시기에만 공개화되며
혁명 시기에는 그 즉시 그간의 비밀 원칙을 파기한다는 점.
여덟째, 혁명 성사 후, 계속되는 혁명기간에는
노동의회가 구성되기 전에 인노맹이 해체된다는 점.
그리고 노동의회에는 인노맹 자신부터 철저히 검열받은 뒤
노동의회에도 참가할 수 있다는 점.
또한 어떠한 이권이나 특권, 기득권을 주장할 수 없다는 점.
이후 문제의 모든 사항은 노동의회가 결정할 문제이므로
구체적 문제는 논의할 수 없다는 점.
아홉 번째, 인본주의를 추구한다는 점,
이 점에서 인본주의 자체를 비판하는 것 또한 인본주의적이라고 본다는 점.
열 번째, 인간이 최우선이라는 점.
그리하여 근본적으로 인간간 차별이 없으며
능력 또한 개발하기 나름이며 부차적이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는 점.
아울러 발표되었듯이 통일적 관점이 남북한에 국한된다는 것은
결국 부르주아적 방식을 채택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남한에 혁명이 국한되거나 남북한에 국한되는 것은
올바른 통일 관점이 아니라는 점.
세계혁명에는 공상적이라고 반박하나
세계시장에 대항할 수 있고 또한 개방경제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면,
일정한 블럭권역이 필요하다는 점.
따라서 필리핀 등과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따졌을 때,
일본까지 영역으로 하는 통일이 필요하다는 점.
궁극적으로는 세계 혁명을 지향한다는 점 등이다.
그러나 이조차도 과연 인노맹이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목표인지
인드라씨 개인의 생각인지는 우리는 알 수 없다.
다만 증거물 속에 있는 노트와 디스켓, 그리고 인터넷 글에서
찾아서 추측할 뿐이다.
(4)인노맹의 파장은?
현재 이러한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적으로도 큰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각 국가의 정보국에서는 인노맹의 정체를 파악하기 위하여
한국정부에게 요청중이며 한국정부 또한 연락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일본에서는 이 사실이 알려지자
연일 우익인사들이 일왕궁 앞에서 데모를 하며
"조센징을 몰아내자"라는 구호를 외치고 있어
양국관계에 암울한 전망을 낳게 하고 있다.
반면 천황제폐지 등을 주장한 바 있는 일부 좌파 인사들과 노동조합에서는
은연중 인노맹의 존재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는 한편,
침묵(?)으로 그들의 지지 의사를 표시하는 듯하다.
한편, 북한 방송은 인노맹 사건이 터지자
이례적으로 남조선 사회가 썩을 대로 썩었다고 하면서도
인노맹에 대해서는 맹렬한 비난을 가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인노맹의 통일정책에서는
명백히 북한 정권 자체도 부르주아 반동 정권이라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음이 그들의 심기를 건들인 듯하다.
또한 한반도에 많은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는 미국 당국은
내정간섭이라는 이유로 논평을 거부하고 있으나
미 언론에서는 인노맹 사건을 20세기 혁명운동의 최후의 형태인가 아닌가?
이데올로기는 끝나지 않았는가?
혁명운동의 실용주의 선언!
등의 현란한 제목으로 다각도로 분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이 뿌리가 깊은 유럽에서는
벌써부터 학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일어난 이 사건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며 분석중이다.
현재 국내 외교가에서는 자국 내 여러 기관으로부터 자료를 요청하는 문의 때문에 업무가 마비될 지경이라는 유럽외국공관들의 소식이 오르내리고 있다.
이로 비추어 볼 때 인노맹 사건이 인드라씨의 자작극이 아님을
그들의 반응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쩌면 한국인에 의한 세계를 움직인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4.
다음 해 국정원 공식 발표문:
가칭 인노맹 조직 사건은 인드라씨의 자작극이었으며
인노맹은 실체 없는 일인조직이었음이 드러났다.
당국은 인드라씨를 정신과에 의뢰하였으며
분석 결과 양성의 반응이 나온 바, 수사를 종결시키기로 한다.
국민에게 커다란 우려를 낳은 점, 심히 송구스러움을 면치 못한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국정원 내의 책임 있는 인사가 곧 이루어질 것이다.
국민 여러분은 유념치 말고 맡은 바 책임을 다해주기 바란다.
5.
그 다음 해 인노맹 관련 유인물 발견 :
"인노맹은 살아 있다."는 짤막한 화장실 낙서 수준의 유인물,
청와대 주변 효자동에서 수백장 발견.
6.
이후 어느 인터넷 블로그에서 퍼온 자료 :
그 이듬해 곳곳에서 유인물 발견 및
자신이 인노맹 조직원이라고 하는 사람들 속출,
당국 그러나 확인 불가능.
인드라씨 정신병원에서 종신치료 판정 받음.
현재 "인노맹은 없다" 라는 소설쓰며 정신병동 격리 수용 중.
병원의사에 따르면,
삼류 소설 쓰는 일만 막지 않으면 위험하지 않다고 함.
한편 출판사들 앞다투어 인드라씨의 책을 내기 위해 접촉중이나
국정원은 이를 막고 있다고 함.
다만 공식적으로는 언급을 회피 중.
출판사 사장들, 김현희의 '나도 여자가 되고 싶어요'에 이어
공전의 히트를 칠 책이라며 잔뜩 돈독이 올라 있음.
전국의 정신병원, 갑작스런 환자의 증가에 따라 폭주 상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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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전위 탄백신화(坦白神話)
2004. 7. 9. 6:15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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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위
인드라
나는 시간을 떠올릴 때마다 사막을 생각한다. 낮에는 뜨겁고 밤에는 차가운 사막. 한복판을 나는 걷는다. 왜 내가 걷게 되었는가는 알 수 없다. 다만 가끔씩 뛰어야 한다는 것뿐.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는 듯이 보여 얼마 안 걸리리라 여기고 뛰어간다. 그러나 가보면 없다. 착각이었다. 그렇다 해도 사막에서 달리 뾰족한 수가 있겠는가. 나는 다시 걸어야 한다. 새로운 오해가 나를 기다릴 지라도 나는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뒤돌아보면 몇 개의 발자국들. 그 발자국들이 나를 떠밀지만 그조차 곧 모래로 뒤덮일 터. 앞이나 옆이나 사정은 마찬가지.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충족시킬 무언가가 설사 거짓일지라도 나는 뛰어가야만 한다. 내 목구멍까지 모래가 들어올지라도. 내가 쓰러져 모래더미에 파묻혀 뼈만 남을 지라도 무언가 움직이고 싶다. 불확실하고 터무니없는 확률에 목숨을 거는 것만큼 초라한 것이 어디 있던가. 하지만 사막에선 아무리 초라한 것이라도 목숨과 맞바꿀 정도로 위력을 가진다. 나는 사막에 홀로 내팽개쳐 싶다고 소망한 적도, 저항한 적도, 체념한 적도, 분개한 적도 없었다. 사막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든가 바깥에는 멋진 피안의 세계가 있으리라고 여기지도 않았다. 판단하기에는 지나치게 한정된 순간을 탓하지도 않았다. 운명 탓을 하기에는 어쩐지 허튼 웃음만 났다. 다만 지금 내가 이 자리에 있는데 이해할 수 없었고 노력을 해보지만 해결할 도리가 없을 뿐이었다. 차라리 뭔가 이해해야할 거리나 주지 말았으면. 이것이 내 솔직한 심정이다. 사정이 이러한 데도 나는 걷다가 뛴다.
연대 정문 안으로 들어가면 아스팔트 도로 사이로 양측에 공대 건물과 세브란스 건물이 있다. 더 들어가면 도서관과 학생회관이 있다. 또 상대와 강당이 있고 본관이 정면으로 나타난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야외강당으로 가는 길이 있는데 그 우측에 교육대 건물이 있고 2층에 여러 동아리가 있다. 계단을 올라가 맨 처음 눈에 띄는 문 중앙을 보면 검은 매직으로 <가사라기>라고 써 있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면 막다른 길이다.
가사라기. 가사라기는 문학예술운동 동아리 이름이다. 방 우측 흑판 위 벽에 누런 마가 걸려 있다. <가사라기는 벼나 옥수수 따위의 수염동강을 뜻하는 까끄라기의 옛말로 하잘 것 없는 존재>란 글귀가 써 있다. 중앙에는 대형 사각탁자가 있었는데 군데군데 담배불 자국이 나 있고 그 위로 꽁초가 수북히 들어 있는 소주병 두 개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그 사이로 낙서장이 있고 펼쳐진 낙서장 바로 우측 아래에 그가 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긴 의자에 누워 있었다. 흰 샤츠에 다소 네모나고 앳띤 얼굴에 검은 뿔테 안경.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가 인기척을 느끼고 일어나 앉으니 그의 옆으로 난 창문으로 수풀이 있다. 막혀 있다.
그는 나를 흘끗 보더니 말없이 낙서장을 덮고 나간다. 나는 그가 누워 있던 자리에 앉는다. 나는 문을 정면으로 하고 텅 빈 방에 앉아 담배를 꺼낸 뒤 후하고 우측에다 분다. 낙서장 맨 끝장을 천천히 펼친다. 그의 글씨가 있다.
-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다. 이 길이 나의 길이다.
나는 볼펜을 꺼내 다음 장에 그와 똑같이 <아무도 없다. 그러나 나는 외롭지 않다. 이 길이 나의 길이다.>라고 쓴다. 어쩐지 어색하다. 찢는다. 덮는다. 휴지통에 던진다. 담뱃불을 끈다. 소주병에 넣으려니 꽁초가 꽉 찼다. 휴지통에 버린다. 한참 동안 나는 있다. 얼마만한 시간이 흘러갔는지 알 수 없다. 나는 문을 열고 나선다. 들어올 때는 낮이었는데 밤이다.
나는 역순으로 연대 정문을 나서 우측 지하보도로 내려 간다. 잠시 안도의 숨을 쉰다. 좌측으로 한 번, 또 두 번. 그리고 계단을 오르면 다시 지상으로 통한다. 굴다리 쪽으로 꺽은 뒤 두 번째 골목에서 다시 우측으로 돌아선다. 오십미터를 걸어가면 우측에 <인생 찌꺼기> 주점 간판이 있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칸막이가 된 열 개의 좌석 중 오른쪽 맨 끝 탁자에 그가 있다. 그외에 그녀가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다.
- 어서 와. 이리 앉아.
그녀 말이 없었다면 나는 그냥 나갈 작정이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술잔을 기울인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의 우측에 앉는다. 내 잔이 오고 그가 채워준다. 그는 들이킨다. 나도 들이킨다. 또 채워 준다. 또 들이킨다. 그녀는 마시지 않고 있다. 그녀는 다소 상기된 얼굴이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을까.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 그가 담배를 꺼내는 사이 흘끗 그녀를 보다 그녀와 눈빛이 마주친다. 그녀가 억지로 눈웃음을 주다 이내 심각한 얼굴이 된다. 황망해진 나는 다시 소주를 들이키고 다시 잔을 채운다. 그가 드디어 말을 한다.
- 네 문제는... 넌 아직 알량한 미국년이라는 거야.
- 미국년?
- 미문화원 방화 투쟁의 의미를 모르잖아.
- 아니, 난 그저 왜 문화원에 불을 질렀나 물어본 것뿐인데.
- 넌... 그 말이 그 말이야.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네가 정작 묻고 싶은 건 미국이 전쟁 때도 남조선을 도와주었고 경제성장도 도와주었는데 왜 불을 지르느냐 하는 것이지. 빠다 냄새 풀풀거리며 내게 말하는 투가 그거잖아.
그녀는 얼굴이 새하얗게 된다. 그는 자주 첫마디를 어눌하게 내뱉는다. 그러면 상대방이 긴장한다. 그런 후에 상대를 향해 씩 웃으며 말을 툭 던진다. 그것이 얼마나 상대방에게 위압감을 주는지 그 자리에 있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애써 궁리하여 어쩌다 답변을 할라치면 용의주도하게 본질을 파헤친다. 본질. 그나 그녀나 내가 어떤 상황이어도 간직해야 할 단어. 그녀가 애써 궁리한 걸 말하지만 피해갈 수 없는 운명. 몇 마디 간신히 더듬거리며 말하다 이내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
- 알겠어. 노력할게.
이야기 발단은 세미나에 게으른 그녀 문제였다. 학번 세미나에서는 현실 인식을 위해 사회과학 서적들을 읽고 토론했다. 선배없이 자체적 커리큘럼을 짜서 해보자는 의욕적인 시도는 그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고교 때부터 학습을 해왔다는 그였다. 여기에 문학청년들을 만나고 싶어 가입했다는 그녀가 리버럴리스트가 욕이었던 상황에서 시도 때도 없이 곧잘 영미시(英美詩)를 유쾌하게 읇조리고는 하였으니 세미나 때마다 그의 공격목표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집요했다. 직접적으로 이를 거론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가 타켓으로 삼은 것은 그녀의 성실성이었다. 이유없이 한 번 빠졌다는 데에 대한 문책. 그녀는 이를 견디기 힘들어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지... 단 한 번의 실수를 용납치 않는 그의 철두철미함, 또한 사소한 사건에서 단번에 회원들을 장악해 가는 용의주도함, 무엇보다 그의 진정한 능력은 그녀를 변화시키고 있다는 데에 있다. 그녀를 그토록 비판했음에도 그녀는 오히려 그의 말을 어쩔 줄 모르며 듣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자신 있는 태도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그녀는 전보다 많이 변해 있었다. 그녀는 개강 초기에 이미 회원이었다. 그녀는 재외국민 특례 입학생으로 영문과였다. 한국말보다 미국말에 익숙한 그녀로서는 학과 공부보다 과친구를 사귀는 것이 공부였던 셈이다. 그녀의 미국인 같은 재기발랄함은 대학입시에 찌들어 있고 대다수가 여성이었던 동료들에게 큰 관심거리가 되었다. 그런 그녀가 밤늦게까지 술집을 섭렵하는 것은 한국사회 익히기였고 낭만적인 일이었다. 그리하여 그녀가 <인생 찌꺼기>에서 가사라기 소속 복학생들을 만난 건 우연이지만 황당한 일만은 아니었다.
담배를 멋들어지게 피워대는 그녀가 좁은 술집에서 높은 옥타브로 자신있게 웃는 모습에 술을 마시던 남자들이 관심을 가지기에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담배 피는 여성이 드물었기도 하다. 행여 누군가 담배 꼬나물고 있다, 버릇없다 훈계하는 사람도 심심찮았는데 무슨 상관이냐는 듯한 그녀 모습이 돋보일 수밖에 없다. 복학생들 마음 한 켠에는 불편한 심기가 있었는지 없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다만 복학생들이 그녀 모임 틈으로 합석하자고 말을 꺼낸 것은 그런 그녀가 무척 예뻤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녀는 아름다왔다. 복학생들은 그녀를 꼬실 작정으로 가입을 권유했고 그녀는 쉽게 승낙했다.
가사라기의 전신은 문예사랑이다. 칠십년대 자유주의적 풍토에 젖어 있는 복학생들은 작년에 동아리 명칭을 변경한 만큼 달라진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할 수 없었다. 글보다 사람 만나 술 마시기를 좋아하는 그들이었기에 동아리보다 <인생찌꺼기>에서 그녀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신입 회원 모집에 게을리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 불만을 느낀 이가 그였다. 그는 작년에 사학과에 다니며 동아리 활동을 하다 뜻이 맞는 선배들과 의기투합하여 문학예술운동을 통해 현 시국에 저항하자는 취지로 가사라기를 주도했고 보다 예리한 칼날을 세우기 위해 재수를 하여 국문학과에 재입학한 그였기 때문이다. 그런 그였기에 그녀가 눈에 가시처럼 느꼈으리라. 가끔 동아리방에 들려 낙서장에 꼬부라진 영어를 휘갈기거나 복학생들에게 술 마시자고 메모를 남기거나 단체 미팅하자고 선동질을 했으니 말이다. 그녀에게 동아리는 가사라기가 아니라 문예사랑이었다. 동아리는 썰렁했고 기웃거리던 신입생들도 이런 분위기에 쉽사리 적응을 할 수 없어 머뭇거렸다. 그런 이들 중에 나도 있었다. 내가 가입한 시기는 중간고사를 일주일 남겨 두었을 때이다. 그래서 내가 그녀를 처음 본 순간 선배로 착각했던 해프닝까지 있었다. 그러다 일이 터진 것이다.
중간고사가 끝나고서야 간신히 신입생 환영회를 열 수 있었다. 일찌감치 낮부터 단골 <인생 찌꺼기>에 자리잡고 판을 벌린 복학생들과 그녀가 좌중을 휘어 잡았다. 내가 도착했을 무렵은 땅거미가 서서히 지고 있었을 때였는데 복학생들 일부는 이미 눈이 충혈되어 있을 정도였다. 회원들이 칸막이를 치우고 탁자를 모은 뒤 주변에 빙 둘러앉아 있었다. 감자에 젓가락을 꽃아 한 명씩 소개하고 노래를 막 시작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 맞은 편에 앉았다.
저마다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못 부르지만 잘 봐주세요 한 뒤 부르는 열창이 끝나면 복학생들이 막걸리 사발에 소주를 잔뜩 부어 마시게 했다. 한 신입이 일어나 윤수일의 아파트를 부르니 난리가 아니었다. 복학생들은 앞다퉈 일어나 손짓발짓하는 것이었다. 기분 좋다, 다음 누구냐, 오늘 막 가자, 자식들 우리따라 오려면 멀었어, 시범을 보여 주마... 소개가 채 끝나지 않았는데 흥에 겨운 선배들이 나서서 트로트를 불렀다. 나는 이 소동을 가만히 지켜 보다 문득 그가 없음을 알았다. 그는 이런 분위기와 사뭇 달랐기 때문이다. 동아리 방에서 신입회원이라고 내가 간단한 인사를 하니 그는 냉정한 미소로 잘 해 봅시다, 라며 악수하더니 문학을 하려면 문학 공부보다 사회과학 공부가 선행되어야 한다느니 하는 소리를 했기 때문이다. 그는 왜 오지 않았을까. 그럴 즈음 그녀 순서가 되었다.
- 제가 누구인지 모르는 사람이 설마 있겠어요?
- 가혜야. 생략하고 한 곡조 멋들어지게 뽑아 봐.
- 가혜가 뭐야. 지니야, 지니. 촌스럽게 놀기는.
- 하하. 그래 그래. 가혜든 지니이든 하여간 뽕가게 해 줘잉~
- 제가 한국에 와서 배운 노래 중 제일 마음에 드는 노래를 할께요.
그녀는 생긋 얼굴을 가볍게 찡그리더니 노래를 시작한다. 그녀만이 낼 수 있는 미소였다. 그녀는 이미 복학생들의 우상이었다.
<긴 밤 지새우고 풀잎마다 맺힌 진주보다 더 고운 아침 이슬처럼 내 마음에 설움이 알알이 맺힐 때 아침 동산에 올라 작은 미소를...>
그때였다.
- 학우여! 동지들이여! 전두환 정권의 반민중적 탄압 속에서 지금 동지들이 차디찬 감방에서 신음하고 있다. 아름다운 조국강산을 두동강 낸 것도 모자라 민중의 가슴을 끝도 없이 짓밟는 양키들의 놀음에 노동자 농민들이 죽어가고 있다. 이러한 때에 자유주의자의 추잡한 현실 타협과 개량적 음모에 빠져 있을 터인가. 아니면 나와 함께 깃발을 올릴 것인가.
그였다. 잔뜩 술 취한 모습. 뿔테 안경이 코 밑에 가까스로 걸쳐 있었고 흰 샤츠에는 군데군데 지저분한 자국이 묻어 있었다. 한 손에는 막걸리 통을 들고 있었다. 순간 좌중은 얼어붙었다. 그녀 노래가 그친 것은 물론이었다.
- 뭐야. 이 새끼는. 여기가 어디라고.
- 어디긴 어딥니까. 척박한 한반도 한복판입니다.
- 이 자식이 선배를 놀려? 넌 마 뭐야.
- 민중의 아들, 김종화입니다.
- 뭐야. 이 좆 같은 새끼.
복학생 하나가 잘 걸렸다는 듯이 그에게 달려가 멱살을 잡으니 그제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일어나 말린다. 이거 놔. 이 새끼 보자보자 하니까 완전히 또라이 아냐. 내 이번 기회에 작살을 내버려야지. 그래도 그렇게 하면 안 돼. 한창 옥신각신하는데 그는 그 선배를 노려보고 가만히 있기만 했다. 그녀는 갑작스런 사태에 놀라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면서 계속 그를 원망스럽게 쳐다 보았다. 그런 시선을 느꼈는지 그가 그녀에게로 시선을 차갑게 돌릴 때 그 선배가 그에게 달려 들었다.
- 이 새끼. 맛 좀 봐라.
선배는 그의 아구통을 날린 뒤 그의 머리를 붙잡고 쓰러뜨린다. 그리고 코피가 나도록 두들겨 패는데 그는 저항을 하지 않는다. 다만 노래를 불렀다.
<삼천만 잠들었을 때 우리는 깨어 배달의 농사형제 울부짖던 날...>
- 이 개새끼가 그래도 정신을 못 차리고...
내가 뛰어들어 적극적으로 만류하지 않았다면 큰 사고가 났을 것이다. 모두들 너무 놀라 어쩌지 못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의 노래에는 어금니를 깨물며 부를 만큼 한맺힘이 들어가 있었다. 은연중 모두가 선배의 행동을 만류하고 싶었으나 선배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평소 밉게 보이긴 했으나 그가 얻어터지는 것을 언짢게 바라보았다. 모두들 이제 그만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그녀가 마구 울며 이제 제발 그만해요, 라고 말하며 자리를 뛰쳐 나갔고 내가 몸을 던져 둘 사이를 갈라서게 한 것이다.
그후 자리는 파장이 되었고 동아리 분위기는 그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복학생들이 자숙한다는 의미에서 운영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찌된 일인지 그녀는 그 이후로 말수가 적어졌고 그가 하는 대로 따르기 시작했다.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학업에 관심을 두지 않는 편이었다. 틈나는 대로 잔디밭에 앉아 하늘을 벗삼아 누워 있기를 좋아했다. 아니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쪼개 학생식당에서 밥을 먹거나 아니면 학교앞 인문사회과학 전문서점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데모에 참여해 보기도 했다. 전경들이 학내에까지 진입해서 도서관 앞 광장을 사이에 두고 투석전을 전개할 때 흥분해서 나도 끼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외의 내 일상이란 극히 평범했다. 그가 지정해 준 책을 열심히 읽고 발제도 하고 자료를 만들기도 하였다. 어찌 되었든 나도 그를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나도 그에게 매혹된 점이 없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그가 동아리연합 사무실을 간다든지 총학생회 사무실을 간다든지 할 때 도울 일이 없겠냐며 물었다. 그도 흔쾌히 받아들여 우리는 자주 함께 가서 등사기도 돌리는 노가다를 마다하지 않았다. 세미나 시간이면 가장 열렬히 그의 노선을 추종한 이가 바로 나였다. 우리는 사적으로 따로 오랜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공적으로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시간을 쪼개도 없을 만큼 빠르게 시간이 흘러갔다. 간혹 그녀가 있는 인문대 강의실에 들어가 청강을 해 보는 등 악취미가 있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생각이 미칠 즈음 문득 옆을 보니 그녀 눈빛이 심상찮다. 내가 혼자 공상에 젖어 있을 때 둘이서 무슨 이야기가 오고간 것일까. 그녀 자세가 흐트러짐을 느꼈다.
- 솔직하게 말해 줘. 내가 그렇게 미워?
그녀는 나란 존재를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이렇게 그에게 물어보는 듯이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나도 자존심이 있단 말이야. 네 자존심만 있는 게 아니야.
그녀가 빈 술잔을 말없이 그에게 내밀 때 흡사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는 그녀를 보더니 역시 말없이 따른다. 그리고 한마디를 한다.
- 마셔.
그녀는 응. 네 뜻이라면 하고 화답하듯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빈 술잔을 내민다. 그가 또 말없이 따르자 그녀는 마신다. 아마 그가 주는 술이라면 주점에 있는 모든 술을 다 마실 작정이라도 할 것처럼 빈 술병을 보자 한 병 더 주세요 라고 말한다.
- 취하고 싶어. 나, 취해도 돼?
그녀가 탁자 위로 팔짱끼고 가만히 그의 눈을 보며 불쑥 말한다. 나도 취하고 싶다. 아니 이미 취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말하지 않는 데도 어찌 내 가슴 속으로 그녀 말들이 쏙쏙 들릴까. 그녀 마음 속에 있는 말들이 말이다. 나는 알아. 네 마음을 말이야. 게슴츠레하게 그녀를 보며 술을 들이킨다. 그가 흡사 내게 말하기라도 하듯 말한다.
- 취했어. 그만 마셔.
- 싫어. 더 마실 거야.
그녀가 어리광부리듯 반항적으로 말하자 그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술잔을 비운다. 나라면 어떻게 말했을까. 그래, 같이 취하자. 우리 밤새워 취하자. 너랑 같이 있는다면 무엇이 아쉽겠니. 아마 그녀가 코웃음칠 서투른 말들로 포장하여 이렇게 말했을 것이 틀림없다. 내 이런 말을 듣고 정신이 번쩍 깨여 그녀가 벌떡 일어나 가지 않았을까. 그리 되었을 것이다. 아마 나라면.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했다면... 그래, 그라면.
그와 언젠가 등사기 함께 돌린 뒤 총학생회 친구들과 간단한 뒷풀이를 할 때였다. 그는 내가 알아듣기 힘든 용어를 알기 쉽게 풀어쓰면서 정세에 대해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그래도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난 참 무식하다. 그가 가장 많이 구사하는 단어는 '전위'였다. 어떤 말일까. 아무튼 다들 그 말만 나오면 고무되는 듯싶었다. 학생이 앞장서서 미국 제국주의와 전두환과 싸워야 하는 것도 전위이기 때문이고 지금 특히 가열차게 투쟁해야 하는 이유도 전위이기 때문이고 우리 학교 학생들이 더 나서야 하는 까닭도 전위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남들 놀 때 등사기 돌리며 고생하는 이유도 전위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지만 아둔한 내가 간신히 정리하면 위와 같았다. 그에게 전위란 직위는 매우 소중한 것이어서 그가 전위란 직위를 놓치면 금새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 죽는 게 나아.
나는 그가 김일성을 말할 때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럴 법도 한 것이 내가 대학에 들어오기 전만 하더라도 데모하는 대학생들은 다 빨갱이고 북한으로 보낼 놈들이거나 아니면 무인도에 다 빠뜨려 다 죽여야 할 놈이라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솔한 판단을 하고 있었던 나로서는 그의 말을 받아들이기 곤란했다. 내가 민주, 민중, 민족이라는 삼민주의가 뭔지도 모르고 이것이 왜 논쟁거리인지 모르기에 당연했다. 게다가 어느 날 제헌의회 깃발을 내리고 반미구국의 전위로 나서야 한다고 말하니 더욱 납득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제헌의회는 무엇이고 반미구국은 무엇이냐 차이가 뭐냐 물어보면 그는 자세히 가르쳐 주었지만 뭐가 뭔지 몰랐다. 내가 그럼 제헌의회는 민중 편이고 반미구국은 민족 편이야 그러면 그는 쓴웃음만 지었다. 내가 에이, 모르겠다, 전두환이랑 싸우면 그만이지 라고 말하면 그는 마구 웃으면서 네 말이 맞다, 그것이 바로 애국애족의 순결한 정신이야, 지금은 우유부단함보다 단순한 정열이 필요해,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파스테르나크란 러시아 작가를 맹렬히 비난하면서 닥터 지바고에 나오는 인용문에 대해 격렬히 저항했다. 그런 귀족적, 부르주아적 태도야말로 반민중적이지. 수많은 혁명가들이 제국주의 반대 투쟁에 몸을 바칠 때 그런 자식이 살아서 한다는 게 기껏 닥터 지바고 따위나 내놓는 것이니. 내용을 읽지 않아서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그의 말로는 나 같은 사람을 무시하는 발언을 일삼았다고 하였다. 철의 규율로 단련된 동지를 모독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내게 쳬르니셰프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꼭 읽어보라 하였다. 레닌도 매우 칭찬한 소설이라면서 말이다. 아, 그는 레닌에 대해 뭐든지 알고 있었다. 많은 사람이 레닌에 대해서 말했지만 그만큼 레닌을 아는 사람도 드문 듯 싶었다. 내가 레닌을 알 지 못 했고 책도 제대로 읽은 것이 없지만 그가 레닌과 관련하여 토론을 할 때이면 누구도 그에게 이의를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그가 김일성을 말했으니 깜짝 놀랄 일이다. 레닌은 훌륭한 혁명가지만 김일성은? 그는 전위는 적들의 수많은 이념적 공세를 받기 때문에 대중에게 오해될 여지가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만일 북에서 북한군이 내려오면 우리는 환영해야 할 것이며, 만일 북한군이 우리를 처형한다면 기꺼이 죽어야 할 것이라 말했다.
- 그래도 억울하잖아. 우리는 싸웠는데. 상 받지는 못 할 망정.
- 우리는 자본주의에 오염된 족속이야. 특히 우리는 전위로서 제대로 해내지 못 하는 일도 많았어. 과오가 많아. 나는 김일성 수령을 존경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지. 그의 명령이라면 죽을 각오가 언제든지 되어 있어.
- 그럼, 넌 김일성주의자야?
- 하하. 아니야. 냉정히 말하면. 아니야. 나는 나야. 전위이지.
그의 말은 알 듯 모를 듯했다. 나를 경계해서 속내를 감추고 저런 말을 한 것일까. 하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말은 최소한 우리 사회에서는 진리였으니까 말이다. 나는 간혹 모르는 말이 나오면 나중에 공부하기 위해 메모를 하고는 했다. 그는 그런 나를 매우 못 마땅하게 여겼지만 막지는 않았다. 그만큼 그는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 조직을 위해 헌신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첫 엠티가 있었던 때였다. 밤새 술 마시는 위인들 몇몇 빼고 새벽 가까이 파장될 무렵 고성이 들려왔다. 아악. 그녀였다. 나중에 진상을 파악해 보니 숙소에서 조금 떨어진 외진 화장실에 가는 그녀를 동료 하나가 몰래 뒤따라갔다가 껴안고 성폭행하려 한 것이다. 그때 흥분한 내가 뛰어가 무슨 짓이야? 라고 말하는데 뒤따라 나온 그가 동료에게 주먹을 날리더니 그녀를 데리고 어디론가 가 버렸다. 그후 나는 이 일을 문제삼아 공개 토론화시키려고 했지만 그가 만류했다. 그녀의 자존심 문제도 문제거니와 불미스런 일로 공개화되면 무엇보다 조직에 좋지 않다는 것이었다. 적들의 기막힌 멋잇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동료는 평소에 그녀를 좋아했었는데 말을 붙이려다 안 되니 강제로 해보려고 했던 모양이다. 깊이 반성한다고 하였다. 그녀도 어찌된 일인지 용서하는 듯 싶었다. 나는 아니었는데. 결국 그가 용서하면 다 용서하는 것이었다. 그러하니 그에 대한 그녀의 신뢰는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런 일을 회상하자 따스하면서도 응어리진 무언가가 가슴 속 깊은 데서 울컥 터져 나온다.
- 종화 학형을 위해 건배!
그러자 그들이 잊고 있던 물건을 발견이라도 한 듯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함께 건배를 한다.
- 반미구국을 위해!
- 조(국)통(일) 세(계)평(화)!
취한다. 나는 이들이 좋다. 하지만 어느덧 한 켠에서 흘러내리는 아쉬움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알 수없다. 나는 이들이 좋지만 반미구국도 좋고 조통세평도 좋지만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는 그가 좋지만 그가 비난한 파스테르나크도 좋을 지 모른다. 나는 이처럼 가끔 무책임하기까지 할 만큼 소신이 없다. 이 사람이 말하면 그런 것 같고 저 사람이 말하면 또한 그런 것 같다. 내가 언제 확실하게 결단한 적이 있었던가 말이다. 그런 것에 비한다면 그는 얼마나 과단성이 있는가. 그러하니 내가 그녀라도 그를 좋아할 수밖에 없겠지.
한달 전인가 그가 차를 끌고 나온 적이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아버지가 지방에서 홀로 생활하기에 그는 어머니와 둘이 사는데 친척 한 분이 올라와서 마중나가기 위해 차를 가지고 나왔다고 했다. 내가 그 모습을 본 건 우연이었다.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북문 근처에서 주차한 차를 막 타려는 그를 보아 인사를 한 것인데 당황한 듯 싶었다. 그러나 이내 반갑게 맞이하는 그를 보고 내가 잘 못 판단하였구나 생각했다. 어디 가는 길이냐고 하여 서울 교대 쪽에 볼 일이 있다고 하니 마침 가는 길이라고 타라고 하는 것이었다. 차는 고급스러운 중형차였고 쿠션도 푹신했다. 나는 무척 피곤해 있었기에 눈치없이 금새 졸았다. 어느 정도 갔을까.
그러다 갑자기 차가 급회전을 하는 것이다. 정신을 수습하고 보니 그가 매우 화난 표정으로 씹새끼들, 하고 차를 몰아 앞차 옆으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창문을 열더니 차 똑바로 몰아, 이 자식들아 그러는 것이다. 나는 매우 놀랐다. 그가 욕하는 모습을 그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나 냉정하고 예의바른 친구였는데. 상대는 외제 스포츠카를 탄 젊은이들 둘이었다. 병신 새끼야, 너나 잘 해. 그들도 욕을 해대었다. 나는 경황없이 이 광경을 멀건히 보아야 했다. 졸음에서 미처 깨어나지 못한 데다가 낯선 모습의 그를 보니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참 그들이 서로 욕을 주거니 받더니 하다 스포츠카가 휭하니 빠르게 가 버렸다. 그는 분이 풀리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러다 차를 도로 한 쪽에 세웠다.
- 내려.
- 왜?
- 넌 차를 탈 자격이 없는 사람이야. 목숨 걸고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졸지 않나 싸움이 붙었는데 방관하지 않나. 그딴 태도가 바로 뭐겠어? 썩어빠진 기회주의 소부르주아 근성이라고. 근성.
나는 어쩔 줄을 모르고 변명을 해보았으나 통하지 않았다. 그의 논리정연한 말에 항상 탄복하는 나이지만 이번에는 다소 억울했지만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는 사과가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 너, 동지를 배반하는 것 만큼 죄악은 없는 거야. 알아?
- 알았어.
나는 그의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고민하다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었다. 사실 할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렇듯 학교 생활을 소일했다.
그녀가 그에게 왜 술을 덜 마시느냐고 투정을 부린다. 그는 마실 만큼 마시고 있다 하여도 우격다짐이다. 그녀가 저렇듯 취한 모습을 보기는 힘들다. 술이 잘 받는 타입이었기에 술을 많이 마셔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는데. 그러고 보니 그녀가 내게 무관심한 것도 일리가 있었다.
얼마 전 연대와 고대간 정기전이 있었는데 끝나고 영동대로까지 행진한 일이 있었다. 우리는 어깨동무를 하고 구호를 외쳤다. 그때 번개불 콩 볶는 소리와 함께 전경들이 사방팔방에서 들이닥쳤다. 나는 혼란에 빠졌는데 회원들은, 특히 그와 그녀는 연신 구호를 외치는 것이었다. 순간 난 내가 뭔가 하는 자책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정기전이 재미없었기 때문에? 많이 걸어서 피곤했기 때문에? 그와 그녀가 나란히 사이좋게 구호를 외치기 때문에? 모르겠다. 아무튼 내 싸움이 아니었다. 내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나는 그 자리를 떴다.
며칠 뒤 끌려갔다 훈방되었다는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아무 말하지 않았다. 무엇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는가. 마침 내 시를 대상으로 시합평회를 하는 자리였었는데 여지없는 공격이 날라왔다. 시라고 부르기 전에 이것이 과연 시라고 말할 수 있는지 말해 봅시다, 언행이 일치되지 않는 시가 이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삶을 대하는 태도부터 자아반성해야 한다고 봅니다만 등등. 그녀는 아무 말하지 않고 내게 단 한 번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회원들 말투가 날카로왔던 건 물론 정기전 일이었지만 요즘 가두투쟁 때마다 정보가 새는 것도 한 몫을 하였다. 그때 그가 내게 기회를 줍시다 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나는 매장되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애정어린 질책을 달게 받겠습니다 라는 말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그제서야 그녀도 나를 용서하듯이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끗 쳐다보지 않았던가.
이 자리에 있는 것만도 고마운 일이다. 그들에게 축복이 있기를. 눈물이 나기까지 한다. 우리는 무려 소주 일곱병을 비웠다. 취한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아간다. 내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외쳤다.
- 종화 학형. 나, 정말 알고 싶은 게 있어. 물어봐도 돼?
- 뭔데?
- 도대체 문학이 뭐야. 무엇인데 왜 나를 이렇듯 가슴 아프게 하지?
우습다. 내가 문학을 감히 말하다니. 그는 이런 나를 빤히 보다 역시 무척 취한 그녀를 보고 나더니 말한다.
- 이 탁자 보이지? 이게 현실이고 문학이다.
- 엉? 뭐라고? 이 탁자가 현실이라고? 문학이라고? 그게 다야?
- 다야.
- 하하. 보이는 것만이 죄다 현실이고 문학이라고? 아냐, 아냐...
그가 당황한다. 나도 취한 적이 간혹 있지만 취했다 해서 이렇듯 자신있게 그 앞에서 웃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의 발언을 정면으로 부정하다니. 그는 안경을 벗더니 말한다.
- 그래? 그럼, 너 자신 있으면 나를 때려 봐.
처음에는 농담인 줄 알았다. 그의 눈빛을 보니 내 우스개 같은 말 따위에 경쟁을 느낄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아니다. 그가 그럼 먼저 내가 때려 볼까 하더니 냅다 주먹을 날린다. 퍽. 코피가 흐른다. 이 새끼가, 하고 흥분이 되었다. 때려 봐, 때려 봐 하는데 못 때릴까 봐 하고 주먹을 움켜 쥐었는데. 때리지 못 했다. 자, 주먹도 제대로 날리지 못 하나? 하면서 또 그가 날 때렸다. 그리고 말했다. 이게 현실이고, 문학이야. 무엇이 아니야. 아니라면 때려 보라고. 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금새 풀렸다. 그래도 아니야. 간신히 말을 했다. 그가 흥분했다. 또 주먹이 날라왔다. 아프다. 이번에는 많이 아프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다.
어디선가 들리는 소리. 그래, 재는 좀 맞아야 정신차릴 애야. 누가 시키지 않으면 하지도 못 해. 자존심도 없어. 맞아. 저 녀석은 좀 맞아야 해. 씨발, 아파. 교양없이 욕지거리 하는 것 좀 봐. 너 같은 애 교육시키려고 하는 건데 그게 그리도 억울해. 가혜, 가자. 술맛 버리겠다. 그래, 가자. 우리 다른 데 가서 한 잔 더 해.
나는 주먹을 부르르 쥐고 있었지만 끝내 날리지 못 했다.
나는 정신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거리에서 소리쳤다. 난 아니야. 아니라고. 흥, 뭐가 아니지. 그것만이 문학이 아니라고. 난 알아. 네가 지방대 교수 아들이라는 걸 말야. 네 아버지 평생 소원이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되는 거라며. 넌 단지 우리를 이용할 뿐이야. 이 자식이. 못 하는 소리가 없어. 안 되겠어. 이 자식. 어쩜, 저런 말을 할 수 있지. 나쁜 자식. 너, 누구한테 그런 말 들었어. 말해. 나 너한테는 물론 아무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데 말해. 너, 도대체 누구야. 응? 하하. 나는 아무 것도 아니야. 가사라기도 될 수 없는 놈이라고. 말 돌리지 마, 새꺄. 하하. 나는 가혜가 좋았어. 가혜, 너를 지켜주고 싶었어. 나는 아무 꿈이 없지만 내 이상이라면 이상이지. 네가 종화와 여관에 들어가는 장면을 숱하게 보았어도 너를 사랑했어. 네가 데모하는 남자가 멋있다고 강의실에 나오면서 친구들에게 말하는 걸 듣고 데모까지 했지. 너가 보기 좋은 장소에서 말이야. 하지만 너는 보지 않더군. 그나 나나 뭐가 달라? 뭐야? 이 자식, 우리 뒷조사까지 다 하고. 뭐, 이런 자식이 있어. 이 새끼, 프락치 아냐. 너 프락치지? 열 받네. 이 놈 가방 뒤져봐. 경영대 다닌다는 자식이 수업도 맨날 빼먹는 것 같고 평소 수상한 게 한 두가지가 아니었어. 하하. 우습다. 난 아니야, 아니라고. 뭐가 아니야. 새꺄. 퍽. 으읔. 수첩 줘 봐. 그래, 이 새끼 설마 설마 했는데 경찰서 전화번호가 있네. 이 새끼 학생회실로 끌고 가서 조사해야겠어. 너, 학생회에 전화해. 알았어. 너, 이 자식, 너가 그간 다 불어서 가투 다 망치게 한 장본인이지? 너 도대체 누구야. 뭐하는 놈이야. 하하. 나는 나야. 전위도 민중도 프락치도 아닌 나야, 나. 헛소리 하지 마, 새꺄. 너 새끼, 강형사가 시킨 거지. 말해. 문학이 다라며, 현실이라며? 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떠들었던 거야. 정작 현실을 마주하니 겁이 나지? 하하하. 이 새끼. 난 문제 없어 임마. 입 닥쳐. 죽을려고 환장하네. 새꺄. 죽어. 죽어. 하하. 넌 문제 많아. 퍽. 우우욱.
그날 새벽 3시 30분께 연세대 학생회관 3층 모 동아리실에서 나는 10여 미터 아래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한 것이 그들을 안심시켰던 것이다. 그들은 프락치임을 자백하라고 계속 윽박질렀고 고문에 참다 못해 억울하게 성폭행범으로 몰린 내가 일을 하면 배려해 주겠다고 하는 안기부 직원의 회유에 설득당해 정기적으로 만났고 수고비조로 매일 일만원씩 받았다고 진술했다.
하지만 그것도 거짓이다. 난 안기부 프락치가 아니다. 난 그저 대학다니고 싶었을 뿐이다. 대학생이 되보고 싶었을 뿐이다. 여대생과 사랑해보고 싶었다. 그의 이야기도 언젠가 밤늦은 시각에 청송대에서 그녀와 밀담을 나누는 걸 엿듣다 알게 되었을 뿐이다. 경찰서 전화번호야 전과자 신세인데 별 수 있나. 씨발 놈들, 암만 그래봐야 광주항쟁도 나 같은 놈들이 몸 바쳐서 해본 거지. 네 놈들이 그럴 리가 있겠냐. 한 번 뒤집어버렸으면 소원 없겠다는 우리 잔치에 네 놈들이 왜 껴?
젠장할, 아침이슬. 씨팔놈의 농민가. 엿먹어라.
하지만 내가 이래도 아무도 내 말을 믿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 말을 믿을 테지. 나보다는 전위의 말을 믿을 터이니까. 안기부라고 다르겠냐.
씨발. 좆 같은 세상.
인연
인드라
나로 말할 것 같으면 무엇보다 잘 생긴 얼굴이 받쳐 준다. 공부도 전교에서 알아 준다. 중학 때부터 합주반에 들어 각종 연주회에서 첼로 독주를 할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아 여자들에게 받는 인기가 하늘을 찌르지만 나를 질시하는 선배놈들 등쌀 때문에 너무나 힘들다. 선배들은 툭하면 연습실에서 베토벤의 운명을 틀어 놓고 후배들을 때리면서 특히 나를 심하게 다루었다. 비명 소리를 죽일 목적 이외에 그 곡을 들을 때 비명 소리가 섞어져야 맛이 난다 했다.
사이코들.
축제 때 고 3 대빵이 분위기 띄운답시고 나보고 무대 올라가 노래하라 해서 신승훈 것을 부른 게 화근이었다. 여학생들의 뜨거운 갈채에 시샘을 한 선배들이 그때부터 나를 못 살게 구는 것이었다.
급기야 저녁에 나를 부르더니 내게 백원을 주면서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삼사만원치나 되는 쵸콜릿과 과자 등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엉겹결에 네 하고 돌아서는 내 등뒤로 잔돈이 남아 있을 터이니 너 가져라, 하는 말만 하지 않았어도. 얼마나 자존심 상했던가. 나에게 그만한 돈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 돈이 있으면 사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 투성이다. 하지만 돈도 없고 설령 돈이 있어 사더라도 선배들에게 옷이며 신발이며 죄다 뺏기고 만다. 드문 일이 아니라며 친구들이 웬만하면 참고 견뎌라 했지만 그간 쌓인 설움이 복받쳐서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쌩고아라고 놀리는 녀석들.
자기들도 고아이면서 부모 얼굴조차 모르고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으로 온 나같은 애들을 고아 중의 고아, 쌩고아라며 특히 못살게 구는 것이 정말 참기 어려웠다. 하지만 사나이가 그럴 수 있나 싶어 화장실 가서 몰래 울었다. 그리고서야 잠자리에 들어 다시 깨어나지 말기를 바랬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지고 어제의 괴로움이 반복되었다.
참기 힘들어. 참을 수 없어.
친구들에게 어렵사리 이만원을 빌렸다. 교복을 빈 가방에 넣고 사복으로 갈아 입은 뒤 잠바를 입고 점심 시간을 이용해 담치기를 해서 가게에 들렸다. 하지만 이내 도망쳤다. 후일 안 것이지만 사회 생활에 익숙하지 않았던 내가 얼마예요, 라고 하지 않고 몇 원입니까, 한 것 때문이었다. 주인 아저씨가 기다려라, 하면서 <소년의 집>에 전화를 거는 눈치를 채고 튄 것이다. 두툼한 잠바에 과자를 숨긴 채. 부산 바닥에 있다가는 잡힐 듯 싶어 곧바로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 도착한 건 새벽이었다. 쏘다니다 보니 남대문이 바로 앞이다. 그 옆으로 시장이 있어 돌아다니다 중국집에 종업원 구함이라고 써 있길래 취직할 작정으로 현관에 앉아 날이 밝을 때까지 기다리는데 웬 대머리 아저씨가 나한테 다가오더니 본드 마셨냐, 가출 했냐, 일자리 알아 보냐 등 이것저것 묻는다. 그런 뒤 잠시 기다리라고 하더니 정말 찾아보는 양 어느 골목길로 쑥 사라진다. 이때 거지 같은 옷차림의 형이 나타나 우두커니 서 있는 내게 도망치라고 했다. 무슨 말인지 몰라 엉거주춤하니 형이 내 손을 붙잡고 뛰는 것이다. 그런 뒤 포장마차에서 국수를 말아 먹으며 형이랑 이야기를 나눴다.
형은 배를 탔다고 했다. 그 전에는 나처럼 <집>에서 나왔다 대머리한테 팔려서 삼년 동안 중국집에 묶여 있다가 빠져 나왔다는 것이다. 그놈한테 끌려 가면 월급도 못 받고 얻어 터지면서 일해야 한다고 한다. 나보고 주민등록증 없이 취직하려면 그놈 조직에 다시 걸리니 <집>으로 다시 들어가라 말했지만 난 죽으면 죽었지 돌아가고 싶지 않다 말했다. 대신 아는 친구들이 있는 부산으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니까 형이 나를 좋게 보았는지 여비를 보태주겠다고 한 것이다. 내가 괜찮다고 사양했지만 형이 야광 팔찌를 보여 주었다. 한강 공원에 가면 제법 팔린다는 것이다. 나는 말을 듣기로 했다. 며칠간 돈 좀 모아질 때까지 난 형 친구들이 모여 사는 데서 잤다.
삼일째다. 야광 팔찌가 생각보다 많이 팔린다. 공원 내에서 누워 자거나 한강 쳐다 보고 있으면 초저녁이 된다. 이때쯤부터 가족들이 놀러 나온다. 아이들도 있기 마련인데 아이들이 밤에 번쩍번쩍 빛나는 팔찌를 보면 좋아한다. 저리도 좋을까. 하긴 좋긴 좋다. 야광 팔찌를 끼고 팔을 빙빙 돌리면 날아갈 듯한 기분이 든다. 양손을 날개짓하면서 뛰어 가면 슈퍼맨 같다. 내가 시범삼아 아이들 앞에서 바람 잡아야 하기 때문에서인지 정말 그렇다. 아이들이 내 모습을 보며 와와 하면 신이 난다. 마치 내가 독주를 한 연주를 마치고 난 후 쏟아지는 박수와 함성 소리 같다. 밤이 깊을수록 연두빛 팔찌 위력이 더해 간다. 어두컴컴한 밤이 되면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팔찌만 보인다. 그러면 나는 마치 마술사처럼 팔찌를 있는 대로 양팔에 끼고 휘휘 젓는 것이다. 이틀 동안 했음에도 은근히 기다려진다.
낮에는 볼품없는 싸구려 팔찌에 불과하지만 밤만 되면 주인공이 되는 마술 팔찌.
팔찌를 팔기 위해 한강 공원까지 가는 버스를 탄 뒤 껌을 팔았는데 역시 시원찮았다. 나는 어색해서 가방만 들고 있었는데 형이 익숙한 솜씨로 승객들에게 말했지만 설득력이 떨어졌다. 요즘 누가 버스에서 껌을 살까. 우리는 한강 근처에 이르자 운전 기사 아저씨에게 고맙습니다, 하고 내렸다. 돈을 내지 않았다. 받지도 않는다. 공원까지 걷다가 형이 불쑥 빵을 내게 건넨다.
- 야, 빵 좀 먹어봐. 괜찮으니까.
내가 싫다고 거절하니까 막 웃는다.
- 왜 웃어?
- 나도 너 같았거든. 사회에 첫발을 내딛을 때는 사나이 야망이 있는 거잖아. 째째하게 길에서 빵이나 먹고 있다는 게 우습다 모 이런 거 아냐. 너, 그리고 가게도 안 들어가지? 괜히 뻔한 거 몰라서 실수할까 싶어서. 하하하.
먹고 싶지만 남들이 나를 쳐다 보는 것 같아 싫다. 더구나 가게 사건 이후에는 더욱 그렇다. 패스트푸드점이니 하는 곳도 들어가기 싫다. TV에서 다 본 것이지만 실제로 겪기는 처음이니 모든 것이 다 어색하다. 형이 내 속을 뻔히 보며 멍청하다고 여길까 싶어 더욱 그렇다. 여름이서인가. 낮에도 사람들이 꽤 있었다. 공놀이하는 사람, 연 날리는 사람, 부메랑 놀이하는 사람, 돗자리 펴고 그냥 앉아 쉬는 사람. 주말이어서 더 그러한가. 우리는 방죽 근처 약간 그늘진 곳에 앉아 숨을 돌렸다. 한강에는 고기가 없을 듯 싶다. 보기에도 지저분하니 말이다.
- 야, 부모 얼굴 아냐?
- 몰라.
- 얼굴도 모르는 부모지만 가끔 보고 싶지?
- 형은?
- 보고 싶다. 너만 할 땐 보고 싶지 않았는데 나이가 드니 그렇다. 날 버렸지만 말야. 지금이라도 날 찾아 준다면 좋겠는데. 씨팔. 어디서 뭐하는지.
- 나도 보고 싶어. 형.
- 너, 혹 사진이라두 있냐? 부모 사진 같은 거 말야.
- 없어. 하지만. 있잖아. 머리카락으로도 알아 볼 수 있다고 누가 그러던데. 모더라. 맞아. 유전자 말야.
- 찾을 정신이 있으면 머리카락 뿐이더냐. 사정이 있겠지. 살기 힘드니까 우릴 찾지 않는 걸 거야. 돈 없으면 차라리 나타나지 않았으면 싶다.
- 왜? 아깐 보고 싶다고 해놓고.
- 나 살기도 힘드니. 이번엔 내가 버릴 지도 모르잖아.
- ...
- 나 잠깐 눈 좀 붙일 건데 너두 좀 자둬라.
형이 아예 신발 벗고 누워 잠을 청하더니 조금 뒤 코까지 골며 잠들었다. 하지만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누워 있으려니 좀이 쑤셔 걷기로 했다. 만일 나라면 어떨까. 형 말을 듣다 문득 두려워지고 무너져가는 내 자신을 느꼈다. 아니야, 아니야 라고 소리쳐도 꺼지지 않는 불신이란 무엇인가.
아, 내가 싫다. 내가 싫어. 이 세상이 싫다.
그래도 아니라고 다짐을 했다. 나처럼 잘 생기고 재주 많은 자식을 둔 부모가 실수해서 나를 잃어버린 것이야. 어디선가 나를 애타게 찾을 지도 몰라. 만날 날까지 무슨 수로든 살아야지. 게다가 이왕 사회에 나섰는데 성공해야지. 좋은 형이긴 해도 형처럼 살 수는 없어. 서울 물정도 익힐 겸 며칠 묵으면서 여비가 되면 부산으로 돌아가 친구들을 만나야겠다. 내가 이렇듯 혼자 생각에 젖어 둑길을 걷고 있을 무렵이다. 어디선가 낯익은 소리. 슈베르트?
- 이 음악 괜찮은데? 누구 거야?
- 슈베르트.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도이치 번호 821인데 내가 아주 좋아하는 곡이야.
- 슈베르트 거구나. 거 모야. 가곡만 괜찮은 줄 알았는데. 좋네. 뭐라고 했지. 아르. 아르...
- 킥. 아르페지오네. 6 현짜리 첼로 비슷한 악기야. 지금은 사라지고 없어. 암튼 슈베르트만 이 악기를 위한 소나타를 만들었어.
- 그럼, 지금 나오는 게 아르페지 악기음이야?
- 아니, 첼로. 마이스키란 첼리스트가 연주하는 거야. 마이스키는 이 곡을 어릴 때부터 즐겨 연주했대. 그래서 슈베르트를 누구보다 존경한다더라.
다리 밑으로 그늘진 곳에 주차한 차 안에서 들리는 소리였다. 창문을 열어 놓고 볼륨을 크게 올린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차 근처로 갔다가 대화를 엿들은 셈이 되었다. 그렇다. A 단조 아르페지오네 소나타. 첼리스트에게 인기 있는 곡이다. 마이스키도 연주했고 로스트로포비치도 연주했고 얼마 전에 정명화도 연주한 바가 있다. 비록 정명화 것을 듣지 못했고 마이스키 연주랑 비스펠베이 연주를 게눈 감추듯 듣긴 했지만 금방 알 수 있었다. 슬픈 곡이다. 나를 받아줄 테니 졸업하거든 두 말 말고 오라하던 지방 대학 교수님이 앨범과 CD로 내게 들려주시면서 이 곡을 만들 무렵 썼다는 슈베르트 일기를 말씀하신 적이 있다.
- 슬픔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만이 사람들을 즐겁게 합니다.
마치 내게 꼭 필요한 말이라는 듯이 격려하던 말씀이었다. 교수님은 비스펠베이와 마이스키 연주를 비교하면서 말씀을 하셨었지.
- 마이스키는 인간의 목소리와 가장 닮은 첼로를 통해 멜로디와 흐름을 중요시하며 다소 빠른 템포로 노래해 전환을 크고 빠르게 하는데 반해 비스펠베이는 악기의 자연 질감을 순수하게 재현하기 위해 유치원 피아노 같은 소리를 내는 포르테피아노 반주에 강철현 대신 옛날식으로 동물창자를 꼬아 만든 현을 첼로에 걸고 소리 떨림을 최대한 절제시켜 각각의 음이 내는 변화가 주목된다. 마이스키의 연주가 유창한 달변이라면 비스펠베이의 그것은 어눌하지만 방점 있는 잔잔한 이야기이다.
나는 그때 음표들이 살아 나를 뒤흔드는 것을 느꼈었지. 교수님처럼 표현을 할 수 없었지만 말이야.
- 뭐야?
문득 꿈에서 깨듯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나는 어느새 열린 창 바로 앞까지 와 있었던 것이다.
- 예? 아. 야광 팔찌이거든요.
- 안 사. 우리가 어린애인 줄 알아?
그들도 빤히 나를 본다. 얼굴이 달아오른다. 그는 분위기 잡쳤다는 듯이 성깔을 내며 짜증을 내었다. 엷은 회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이란 글귀가 박혀 있었다. 얼마 전 한참 떠서 화제가 되었던 영화 제목인데 대히트를 쳐서 티셔츠까지 팔리고 있었다. 여자는...
말없이 있었다. 참, 예쁘다. 책으로 짧은 치마를 가린 위로 하얀 브라우스가 잘 어울리는 여자. TV에서 보았던 여자 탤런트들과 비슷한... 누구더라. 누구랑 닮았을까.
- 안 산다니까 뭐해.
- 아 네. 그냥 가지시라고. 두 분께 하나씩.
나는 무의식중에 끼고 있던 팔찌를 벗어 그들에게 준다. 그러나 그는 귀찮다는 듯이 창문을 닫으면서 시동을 켠다. 차는 붕하고 후진하더니 방향을 틀다 잠시 멈춘다. 창문이 다시 조금 열리더니 팔찌가 하나 툭 떨어진다. 그러더니 차는 곧 그 자리를 뜬다.
나는 그 팔찌를 쳐다 보며 오랫동안 그 곳에 있었다.
나는 오일만에 부산으로 돌아갔다. 단란주점에서 일한다는 친구를 찾아갔다. 친구 이름은 병구. 병구는 콜라 중독이어서 돈만 생기면 얼마 되지 않는 돈을 죄다 콜라만 사서 먹었다. 하루 동안에만 1.5리터짜리 콜라를 서너개나 들이키는 그였다. 아무튼 콜라 실컷 먹기 위해서 나왔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병구는 우리 동기 중에 제일 먼저 <집>을 나온 친구였다. 그는 인상도 험악하고 주먹을 잘 써서인지 키가 작은 데도 단란주점 어깨로 있었다. 그래서인지 <집>선배들도 병구가 일하는 곳을 알아도 내버려 둔다고 들었다. 내가 당분간 지내기에는 알맞은 곳이다.
- 대빵들이 너 찾는다 어쩐다 생난리다. 가을 연주회 너 땜에 완전 빵꾸래. 교수던가 뭔가 하는 사람 땜에 꼰대들도 나 찾아왔었다. 알아? 잡히면 최소한 사망이다, 너. 나 책임 못 져.
- 상관없어.
병구는 말과 달리 나를 무리에 끼워 주었다. 병구는 머리를 박박 밀었다. 자기 말로는 물 좀 들이려고 했는데 조직에서 금지한다는 것이다. 나는 밤에는 삐끼를 하고 낮에 병구와 어울려 다녔다. 그는 깡이 있는 친구다. 한 번은 키 큰 놈이 길을 가는데 가로막더니 모자를 훌렁 벗고 인상을 구기면서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니 키 큰 놈이 시키는 대로 따라오는 것이었다. 병구도 서울놈인데 이때 만큼은 사투리를 쓴다. 그래야 상대에게 위압감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키 큰 놈은 처음에는 없다 하다가 털어서 백원짜리 나올 때마다 열대다, 하고 병구가 위협하니 사색이 되어서 다 꺼내 놓았다. 뺨따구를 때리는 데도 맞기만 하다가 그만 가 보라고 하니 줄행랑을 친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광안리에 놀러 갔을 때이다. 길을 건너가는데 좁은 길에서 어떤 차가 빵빵하면서 운전사가 차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뭐야, 조심해,라고 하자 병구가 나한테 잘 보라더니 그 차쪽으로 갔다. 운전석 문을 확 열더니 주먹으로 냅다 운전자 얼굴을 갈기는 것이었다. 그래도 어쩐 일인지 운전자는 병구에게 죄송합니다 주의하겠습니다, 하는 것이었다.
- 봤지? 이게 싸나이 세계라는 거야.
나도 그를 따라 머리를 박박 밀고 처음으로 사람을 쳤다. 통쾌했다. 병구는 나 이외에도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남자 4, 여자 2이 우리 멤버였다. 한 놈은 머리를 죽어라고 기르고 다녔는데 신세대 깡패여서 그렇다고 했다. 병구 말로는 그가 모시는 성님 친동생인데 성님도 어쩌지 못 하는 또라이라는 것이다. 다른 녀석은 가출한 애인데 집은 꽤 살만 한데 부모가 맨날 싸운다고 했다. 여자 한 명은 <집> 출신인데 이름이 유나였다. 나 보자마자 하는 소리가 여자애들 중 절반이 나를 좋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자기가 힘이 있어서 한마디로 눌렀다고 한다.
- 걔 찍었으니 노리는 년 있으면 죽는 줄 알아?
남자들과 달리 여자들이 <집> 나오는 경우는 극히 드문 데다 그 정도가 되면 굳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데 답답해서 나왔다고 했다. 다른 여자애는 가출한 아이인데 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집이 싫다고 했다. 병구를 비롯해 우리가 하나 같이 미친 짓 그만 하고 집에 들어가라 해도 오빠들이랑 언니가 좋다고 한사코 버티는 것이었다. 그 애는 하는 일없이 우리 따라 다니며 같이 노는 게 좋다고 했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함께 자고 먹고 했다. <집> 여자들은 대부분 수줍음을 타고 범생 스타일인데 유나는 그렇지 않아 밤만 되면 상대를 바꿔 가며 잤다. 그러다 보니 가출한 여자애도 분위기에 젖어 잤다. 유나가 간혹 내 몸을 자극시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거절했다. 유나가 자길 무시한다고 급기야 막 화를 내는데 병구가 거들어줬다.
- 하하. 쟤, 애인 있어. 서울 기집애인데 지난 번에 올라갔다 만났다더군. 뻑 갔어. 자식이 눈은 높아서 꼴에 여대생이라는데. 저거 보이지? 야광 팔찌를 보라구. 저자식 잠자면서도 저걸 빼지 않더라.
- 피이. 여대생 지지배들이 눈이 삐었나? 너 같은 쌩고아 생각해 주게.
유나는 나를 화내게 할 의도로 쌩고아를 강조해서 말했지만 나는 무시했다. 아무튼 병구가 날 비꼬려는 말이었지만 효과가 있었다. 그후로 유나는 나에게 일절 관심을 갖지 않고 대신 병구에게 찰싹 붙어서 다른 남자랑 더 이상 자지 않았다. 병구는 성격이 이상했다. 우리한테는 매우 잘 해주다 수틀리면 같은 동료한테도 욕설과 주먹을 날렸다. 하지만 나한테는 하지 않았다. 병구 말로는 같은 깡패라도 고아랑 가출한 놈이랑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놈들은 그러다가도 집에 갈 구석이라도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어쩌다 술에 약한 병구가 취하기라도 하면 나이프 들고 가출한 남녀에게 집에 들어가라 고래고래 소리를 쳤다.
- 씨발, 너희 같은 새끼들 보면 배알이 꼬여. 알아? 알아? TV에서 똥폼 잡는 거에 환장해서 나온 새끼들. 니네들이 우릴 알아? 알아? 오토바이 훔치는 거나 배워서 지랄하는 좆 같은 새끼들. 그럴 시간 있으면 공부나 해라. 개쉐이들아. 우리 같은 놈은 부모 잘 만나 군대도 면제야, 면제.
병구는 지지리도 공부 못 했지만 누나가 있었다. 아주 어릴 적에 부모가 죽어 같이 <집>에 들어왔는데 누나가 공부를 잘 해 중소기업에서 일한다고 했다. 누나가 가끔 찾아와 한숨 쉬고 갔는데 그때마다 병구 말이 똑같았다.
- 나도 생각이 있는 놈이야. 출세하는 길이 그 길만 있는 게 아니야.
병구는 조직에 아주 헌신적이었다. 비디오를 보더라도 깡패 나오는 것만 보았다. <보스>란 비디오가 나오자 아예 사 가지고 틈만 나면 봤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아무 때나 성질 난다고 운전자 때리면 안 되는 것이다. 다른 조직원이면 곤란한 것이다. 특히 머리에 염색한 놈들이라서 만만히 보았다가는 큰 코 다친다. 광안리에서 놀다 시비가 붙었는데 패거리들이었던 것이다. 조직에서 금하는 것이었는데 우리가 그만 실수한 것이다. 아니 사실은 내 실수이다. 오토바이 탄 놈들이 빵빵 거리며 자꾸 시비를 걸길래 병구 만류에도 참을 수 없어 말싸움 끝에 가까운 한 놈을 골라 들입다 머리를 박은 것이다. 곧바로 패싸움이 났는데 숫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병구가 활약해서 그 놈들을 물리친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알고 보니 그 놈들 조직이 우리 조직보다 훨씬 오래되고 큰 곳이어서 말썽이 난 것이다.
신세대 깡패는 실컷 얻어 터지고서는 그 자리에 없었다고 발뺌하고 병구가 책임지게 된 것이다. 싸움에서 이기고도 조직은 우리 팀을 해체시켰다. 영화에서는 싸움에 이기면 대접을 해주는데 오히려... 병구는 조직 결정에 열을 잔뜩 받았다. 하지만 도리가 없었다.
- 젠장할,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병구는 순응하고 누나 집에 있다 중국집에 취직했다. 유나는 다른 단란주점으로 팔려 갔다. 가출한 애들이 갑자기 오갈 데 없어지자 그제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었다. 아니 매일 잊지 않고 있었던 그녀. 그녀가 있는 서울로.
어느덧 <집>을 나온지 3년째로 접어든다. 형을 찾지 않았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어린 아이가 아니었다. 밑바닥에서 쓴 맛을 보았고 이제 쓴 맛 깊숙한 곳에서 우러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어느 정도 사회 경험을 한 터인 데다 이젠 미성년자가 아니기에 신촌 클래식 까페 <라이프찌히>에서 일할 수 있었다. 내가 신촌을 택한 것은 그때 얼핏 본 그녀의 책에서 이대 출판사라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혹 맞다면 근처에 있으면 우연이라도 볼 수 있을까 싶어서였다. 내가 있는 까페는 신촌 기차역에서 연대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기차길 다리가 있는데 다리 못 미친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숙식을 하다 가끔 있는 휴일이면 무작정 신촌을 떠돌았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그녀 얼굴이 더더욱 또렷해진다. 미칠 듯이 그리운 마음. 가을로 접어드니 그 쓸쓸한 마음이 간절해지는 것이다. 즐겁게 속삭이며 흐르는 듯이 걸어가는 쌍쌍. 그 사이를 비집고 터덜터덜대며 걷는 쇼윈도우에 비친 내 모습이 처량하다. 그녀와 비록 한마디 대화를 나누지 못 하였으나 어쩐지 만나면 바위를 뚫는 정열이 폭발할 듯 싶었다.
그녀가 나를 바라보던 슬픈 눈빛
말없음이 오히려 나를 도와주는 것이지 않았는가
비록 우리가 서로 다가서지 못 하는 곳에 떨어져 있을 지라도
음악 사이로 흐르는 교감을 나누었지 않았는가
그대여
어디에 있는가
멀리 있지만 내 터져 버릴 지경이 되어
숨이 막혀 버릴 것 같은 마음을 녹혀 줄 유일한 그대여
올 가을이 깊어가는데
내 멍든 마음도 따라 깊어가는데
그때 그녀가 기적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바람이 제법 스산하게 불어대던 어느 가을날 저녁. 내가 일하고 있던 까페에서. 누군가와 만나기 위해. 그러나 상대는 바로 나일 뿐이다. 나는 진정할 수 없었다.
이건 분명 운명이야, 운명.
손이 떨리고 다리도 흐느적거린다.
마음을 침착하게 가져야 해.정신 차려. 기회가 온 거야. 하늘이 주신 기회.
나는 아주 천천히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 저, 손님 더 오면 시키겠어요.
- 저, 저, 저...
- 소리가 작아 못 들으셨나보죠? 나중에 시킨다구요.
- 네.
그녀는 나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 살포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나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 하고 물잔만 놓고 돌아온다. 피우지도 못 하는 담배를 억지로 핀다. 콜록콜록. 주인이나 동료들이 갑작스레 뚱딴지 같이 구는 나를 이상하게 보지만 무슨 상관이랴. 차마 그녀가 떠날까 싶어 그녀만 뚫어지게 본다. 갈색 긴 머리칼에 갈색 치마, 그리고 흰 브라우스. 독서를 하는 그녀가 너무 아름답다. 그때 퍼뜩 든 생각. 그렇지. 나는 얼른 뮤직 박스를 겸하고 있는 카운터로 가서 빌스펠베이 연주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를 틀어달라고 부탁했다. 선율이 흐른다. 그녀가 잠시 고개를 들어 눈을 감는다.
투명한 기억 속으로 침잠하는 은은한 음표들의 춤.
방랑자처럼 고독한 여정으로 한없이 자신을 파묻히게 한다.
생전에 베토벤처럼 큰 주목을 받지 못해 후원자없이 음악 살롱에서 음악을 진정으로 아는 친구들 앞에서 주로 곡을 발표하던 소심한 슈베르트.
길 건너에 있는 베토벤을 존경했지만 찾아가기에는 마음이 너무 여렸던 슈베르트.
그녀가 거기에 있네
어서 빨리 가서 고백을 하렴
찾아 헤맨 그녀가 바로 코 앞에 있네
용기가 없어
무엇을 망설이는 거냐
어서 어서 뛰어가 네 뜨거운 침묵을 토해
부끄러움이 무슨 소용이냐
벅차오르는 마음 숨겨 어디다 쓸래
하지만 발걸음이 떼어지지 않는다. 너무나 고통스럽고 숨이 헐떡거린다. 아르페지오네 소나타는 3악장에 접어들어 악센트가 죽죽 내 가슴을 찢어대는구나. 이 음악이 끝나기 전에 가야 한다. 가자. 가자. 그녀 앞에 서서 당당히 나를 알리자.
- 저, 저, 저,,,
- 네?
- 아르페지오네를 좋아하세요?
- 아, 네. 그래요.
- 저, 혹시 이 야광 팔찌를 기억하세요?
- 아뇨? 아. 팔찌라면...
그녀가
그녀가 나를
나를 본다
드디어 고개를
갸웃하다
회상을 끄집어 내기 위해
빙빙 돌다
되돌아오는
끄덕인다
- 아. 그때 한강에서 본 분.
- 그때 제가 팔찌를 그냥 드렸었죠.
- 네. 맞아요. 갑자기 주셔서...
- 갖고 계시나요?
- 훗. 지금은 없어요. 하지만 집에 있어요. 가끔 끼고 다니죠. 우울할 때 말이예요.
- 손님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올 때까지 잠시 앉아 있어도 될까요?
- 네. 그러세요.
앉는다. 그러나 더 할 말이 무엇이 있으랴. 그녀와는 야광 팔찌를 주고 받은 사이일 뿐이지 않던가. 오늘 처음으로 말을 나누었을 뿐이지 않던가. 그녀가 나를 다행히 기억해 준다니 그것만으로도 족한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 솟구치는 마음의 정체란 무엇인가.
나는 조금씩 자신을 얻어 가며 그녀에게 이 생각 저 생각을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털어놓았다.
- 첼로를 연주하셨다구요?
그때마다 그녀는 마치 음표를 찍듯 물음표로 음악에 관한 내 경험을 경이롭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그러면 무엇하랴. 더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인데. 내가 만일 그녀에게 처음 보았을 때부터 좋아한다고 고백한다면 받아들일까. 너무 무례해서 냉정해지지 않을까. 내 앞에 있는 그녀가 너무나 아름다운데 그 마음까지 헤아릴 수 있다면. 하지만 끝내 고백할 수 없었다.
- 참, 대단한 분이지만 너무 안타깝네요. 지금이라도 돌아가셔서 다시 시작할 수는 없을까요?
- 그게 저...
- 많이 기다렸지? 근데 이 분은 누구시지?
그때 그녀가 기다리던 사람이 왔다. 그때 그 남자였다. 설마 했었는데 잠시 스치는 인연일 것이라고 단정짓고 또 했는데 아니었다. 얼굴에는 기름기가 주루룩 흘러 내리고 전보다 훨씬 뚱뚱해진 체격. 그러나 그의 옷차림은 이를 보상하기라도 하듯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 종화씨. 이 분은. 여기서 일하시는 분이거든요. 음악에 조예가 깊으신 분이라고 알고 있어서 제가 궁금한 게 있어서 몇마디 물어보았어요. 당신을 기다릴 겸해서 말이지요.
- 그래? 이거, 미안한데.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 내 오늘은 크게 한 턱 낼 수밖에 없는 걸. 자. 일어나지.
당신
당신은 아무 남자에게나 당신이라 하는가
저토록 다정스럽고 스스럼없는 태도
너무나 답이 뻔하네
운명은 내게 이토록 지독스럽게 불운한 것
이제 마악
조금만 더 있었더라면
언제나 훌쩍 떠나는 시간이라지만
짧은 시간만이라도 잠시 머물러 주었더라면
그녀가 일어난다. 내가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남자가 계산을 하는 동안 그녀가 슬며시 내 눈길과 마주친다. 무슨 눈빛일까. 나를 향해 마구 쳐들어오는 칼날을 받아들여야겠지. 하지만 알고 싶다. 어떤 마음인지. 무언가 내게 말할 것만 같은 저 입술.
- 저, 잠시만. 이 분과 할 이야기가 좀 더 남았으니 제가 기다린 시간 만큼 나가서 기다릴래요?
그러나 그녀는 이런 말은 끝내 없이 눈웃음으로 대신하고 까페를 떠난다.
그녀를 붙잡을 어떤 끈도 없이
예전엔 야광 팔찌가 있어 주었건만
지금은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결국 이렇게 헤어질 인연이었구나
밤이라도 전혀 빛나지 않는 내 야광 팔찌처럼
나는 이렇듯 초라하게 서 있구나
내 눈물이 글썽거리고 있네
- 태륜아, 아직두 그녀 생각하니?
병구가 물었다. 여기는 유치장. 오랜만에 병구를 만났다. 그뿐만이 아니다. 신세대 깡패랑 가출한 남자애도 볼 수 있었다. 각자 뿔뿔이 흩어져 있던 우리들이 재회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가출했다 집으로 들어간 여자애 때문이다. 여자애 부모는 여자애를 족쳤고 여자애는 모든 것을 불었다. 아니 그녀가 한 이상을 다 불었다. 부모가 원하는 답이 나올 때까지. 부모는 꼬치꼬치 이름을 물어 성폭행범으로 고발했고 우리들은 굴비엮듯 잡힌 것이다.
내가 병구와 헤어지고 서울로 올라가기는 했었다. 막연히 그녀가 보고 싶어서. 그러나 여전히 두려운 것이 서울이고 하루도 버티지 못 하고 형을 찾아갔다. 형이 나보고 좀 더 머물다 가라 하였고 내가 막무가내로 부산으로 떠났었기에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는데 불안한 마음이 드니 저절로 뻔뻔해진 것이다. 형은 여전히 친절하게 나를 대해주었고 나는 그와 지냈다. 그날 저녁 형이 갑자기 내 뒤를 덮쳤다. 나는 형을 통해 처음으로 성경험을 한 것이다.
나는 다음날 뛰쳐 나왔고 눈에 보이는 아무 중국집에 취직해서 일했다. 짬이 날 때 병구와 지나와 연락을 취하면서 말이다. 그러한 연락망이 문제였다. 유나는 경찰에게 우리 거처를 다 말해 주었던 것이다. 병구 말에 의하면 여자애 부모는 가출한 남자애 집안이 좀 산다는 정보를 알고 합의금을 노린 것이다. 그 때문에 가진 게 몸밖에 없는 우리도 공평성이라는 이유로 엮인 것이다. 그런데 남자애 부모는 자식에게 철저히 무관심했다. 합의는 애초부터 이뤄질 수 없었다. 나는 방금 조서를 꾸몄다. 지독하기로 소문난 소년원보다 형무소가 차라리 편안하겠지 위로를 한다. 지금이나 방금 상상한 것이나 크게 다를 바가 무엇이던가. 상상도 어차피 저들의 것이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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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이들이 이 글을 보고 사투리 강조하는 친구나 그리고 눈물 등등의 한국 영화 여러 편들이 오버랩된다고 하기도 하는데 다른 글들처럼 이 글을 쓴 것은 1997년입니다. 이전에 나온 영화라면 몰라도 그 이후에 나온 영화에 대해서는 제가 먼저입니다.
그리고 이 글은 아임 프라블름 연작으로 했던 것인데 쓰다 보니 독립이 되었습니다. 쓴 글 중에 가장 아쉬움이 많은 단편인데요. 단편으로 하기에는 스토리에 너무 치여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작중인물이 살아서 작가를 압박해야 하는데, 그래서 작가가 글을 쓰면서 괴로워해야 하는데, 그래야 작가의 의도를 넘어서야 작위성을 넘어서는데 그것이 어려웠고, 등장인물이 많은데 산만해서 극적 구성이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장편이거나 혹은 최소한 중편 정도되어야 할 듯싶다 여깁니다. 아무튼 이 글은 중간 정리 성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전 글에서 뻥따라는 별칭을 썼다가 이내 병구로 바꾸었는데요. 그래서 다소 용어가 혼선된 바 있습니다. 사실 쓰고 나서 거의 수정을 하지 않았는데 어떤 계기가 들면 지금처럼 하지요. 이번에는 지나라는 이름 대신에 유나로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몇 대목을 수정했습니다.
이 글을 쓰게 된 모티브는 전적으로 아르페지오네라는 악기 때문입니다. 슈베르트의 아르페지오네를 들으면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르페지오네, 지상에서 가장 슬픈 악기라는 글은 다음 사이트를 참고하시길 바랍니다.
20xx년 설날 풍경
인드라
설날이다.
아침 일찍 일어났다.
제사를 지내려고?
천만에. 미리 지냈다.
모처럼 맞은 연휴이니 가까운 근교에 가서 놀다 와야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다.
마루로 나가니 벌써 초등학교 3학년생인 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HELLO!"
1997년부터 시작된 조기영어교육 탓에
이미 각 가정에서는 영어로 말하고 있었다.
"HI! TOM."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는 외국 이름이 유행이다.
본 이름보다 영어식 이름에 더 익숙하다.
본 이름인 민기를 부르면 촌스럽다고 짜증을 낸다.
자꾸 쓰니 익숙하다.
세계화 추세에 맞추려면.
이미 때만에서는 20년전부터 외국이름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하지 않던가?
늦었다...
아무튼 톰 생각만 하면 골치가 아프다.
그놈의 영어 교육,
대세가 대세이니 어쩔 수 없고,
또 남들 다 하는데 자식 뒤처지게 할 수도 없어
남들처럼 유치원 때부터 영어 과외를 시켜왔던 것이다.
남들은 조기유학도 한다는데
이 정도도 안 하면 아버지 소리도 듣지 못한다.
대충 준비해서 차를 타고 나섰다.
거리는 한적하다.
설빔 입은 사람이 안 보인다.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한복은 이미 상류계층이 상류층임을 과시하기 위한 옷으로 전락한 지 오래이다.
그나마 남아 있던 민족 의식을 세워볼까 하는 의도는 아니었고,
단지 상류계층이 입는다는 한복 좀 입어보려
가격을 물었다가 망신당할 뻔한 기억을 새삼 떠올린다.
"아저씨, 한복 사시려구요?"
주제파악이나 하고 물어보라는 듯이 말하는 종업원의 말에
멀쑥하니 돌아섰던 게 한달 전이었다.
이제 설날은 단순한 공휴일이다.
국가에서는 여전히 민족을 외치고,
TV에서는 설날 큰 잔치이니 뭐니 떠들겠지만
국가경쟁력이니 기업경쟁력이니 하며 늘 쫓기듯 사는 지금
무슨 사치스런 설날 타령인가?
연휴가 끝나는 즉시 사장이 정리해고 시킬 지도 모르는데...
오늘도 적당히 놀고 집에 와서 영어 공부해야지.
아참! 제 2외국어도 해야지.
기업에서는 이제 영어 뿐만 아니라 제 2외국어도 강조한다.
다른 부서이야기지만 영어는 잘 하는데
제 2외국어 공부를 소홀히 한 과장급들이
줄줄이 고향 앞으로 했단다.
제사도 조촐히 치뤘다.
조상님들에게는 죄송하지만
국산 조기가 없어서 원양 참치로 하는 등
대부분 수입 농수산물로 제사상을 차렸다.
국산 조기는 이제 눈씻고 찾아볼 수가 없다.
연안해역이 모두 썩었기 때문이다.
해마다 기름누출사고는 일어나지,
공장폐수는 계속 쏟아지지,
쓰레기는 나날이 늘어나지...
안 썩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일주일 전쯤인가 낚시 좋아하는 동료가 낚시하러 갔는데
고기는 없고 쓰레기만 난무하더란다.
속상하기도 하고, 씁쓸하기도 하여 쓰레기만 줍다가 왔다는데......
제사를 마치고 우리는 맥도널드 햄버거를 먹었다.
최근 이 햄버거사는 한국 시장을 겨냥해
아침식사용 햄버거를 만들었다.
요즘 아이들은 밥먹기보다 햄버거 먹는 걸 더 좋아한다.
미국에서도 점심때 먹는 거라던데
지난 20세기부터 저녁식사 대용이 되더니
이제는 아침식사까지 햄버거로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톰은 김치 햄버거를 좋아한다.
"파파, 김치 햄버거가 아니라니까.
기무치 햄버거야. 똑바로 알아야지."
기무치 햄버거였다.
기무치가 김치를 누르고 전세계 시장을 장악한 지는 오래이다.
이미 국내에도 상륙하여 김치를 압도했다.
20세기 말부터 일본인들이 국내에 와서 기술을 부지런히 터득하였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오랜 수산물 유통 경험에서 닦은 첨단 냉동 기술과
세계인의 입맛에 맞는 양념 기술을 개발하여
국제용 기무치를 개발한 것이다.
다이어트 기무치가 특히 젊은 여성에게 인기를 끌었다.
이제 어머니들과 달리 김치를 담글 줄 아는 젊은 여성은
전체 여성의 5%도 되지 않았다.
톰은 기무치를 좋아한다.
나는 김치를 좋아한다.
나는 톰한테 냄새난다고 핀잔을 받는다.
"파파, 휘발유 떨어진 것 같아."
"그래?"
어제 휘발유를 넣었는데 잠깐 볼 일이 있어 시내에 다녀오니
휘발유가 떨어진 모양이다.
리터당 10000원.
언론에 의하면 내일 또 오른단다.
만땅(가득할 만, TANK : 일본식 조어)을 넣어야지.
갑자기 신경질이 났다.
그래서 라디오를 틀었다.
- 신통한 당은 오늘 설날을 맞이하여 국민 담화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세계 주역이 되기 위해서는 무작정 앞만 보고 뛰어야 하겠습니다.
... 예전의 경쟁국이었던 때만이 오늘날 우리보다 앞선 이유는
세계화를 빨리 단행했기 때문입니다...
허리띠를 졸라 매고 좀 더 참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달려 갑시다...
오늘은 설날,
비록 지나치게 긴 연휴라 생각되지만 마음껏 쉬시길 바랍니다....
교통 만담(96.8.4)
1. 속도 위반
전라도 김제쯤을 달렸나 봅니다. 제한속도 시속 100키로를 유지하면서
가다 보면 여러 차례 뒷차에게 헤드라이트로 협박을 받습니다. '능력이 안되
면 비켜라' 라는 신호이지요. 카레이서라고 착각하는 분들이 아예 깜박이도
안킨 채 차 사이를 찰랑찰랑대며 빠져나갑니다. 남들 차가 다 100키로 이상
으로 달리는데 자기만 100키로를 유지하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간신
히 욕망을 억누르다가도 순간적으로 흥분할 때가 있습니다. 카레이서 하나
가 나타나 깜빡거리니까 열을 받았습니다. 어디 좋다! 하고 일단 양보한 후, 곧
바로 나는 그 차 뒤에 붙어 깜빡거리며 뒤쫓았습니다. 모퉁이를 돌아갑니다.
그때 경관이 나타났습니다. 손짓을 합니다. 나는 순간적으로 브레이크를 밟
았으나 경관은 내게도 손짓을 하더군요. 저하고 비슷한 시간대에 통과된 모
든 차량이 다 속도위반이었습니다. 한 십여대를 조사하여 제 차례가 올 때
까지 많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 앞 차 하는 짓을 보니 돈이 오가고
있더군요. 저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경관은 특별한 말이 없고 다만 이
렇게 말했습니다. "고맙지라~~~" 차를 서서히 출발시키다가 단속하는 경관의
손짓을 보았습니다. 계속 손을 흔들고 있었습니다. 그냥 통과하는 차도 있었
고, 알아서 서는 차도 있었습니다. 저는 알아서 선 차량이었고, 그래서 돈을
냈고, 경관에게 인사를 받은 것입니다.
최근 세상은 무척 편리해졌다고 합니다. 기계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일을 하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힘들어졌습니
다. 더 땀을 삘삘 흘려 취직공부를 하고, 더 열심히 일을 해도 제자리입니
다. 그만큼 노동강도가 강화되었습니다. 하지만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모
두가 빠른 스피드로 달리기 때문에 약간만 쉬자고 생각하면, 당장 그래서
당신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거야라는 말이 나옵니다.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라는 말이 나옵니다. 가정을 포기하라는 말도 나옵니다. '모아니면 도다'
라는 식으로 조직생활의 냉혹함을 강요합니다. 그런 당신은 이 복잡하고 냉
혹한 세상을 질주할 지 모릅니다. 그러다 보면 당신은 당신의 천성을 잊고,
조직의 부속품으로 전락합니다. 잠자는 도중에도 지금 누군가 당신을 앞서
가기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다는 망념에 시달립니다. 당신은 일요일에 쉬어도
쉬는 것 같지 않을 만큼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근교로 놀러나가 잠시 자연의
풍광에 빠지기도 하지만 곧바로 싸늘한 시선이 되어 휴양지 가게 주인과
날카로운 실갱이를 합니다. '다 저 자식들도 먹고 살려고 별 수를 쓰고 있다
고, 나만 당할 수 없지.'
그때 상상 속의 경쟁자가 등장합니다. 당신보다 컴퓨터를 잘하고, 영어
실력도 뛰어나고, 조직생활도 군말없이 해내는 입사 후배가 불쑥 나타납니
다. 그의 모든 행위는 마치 앞차를 바짝 붙어서 헤드라이트를 깜박거리는
신호로 받아들입니다. 모든 것이 불쾌합니다. 당신은 '능력 우선주의'의 대세
에 따라 양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당신은 반격을 준비합니다. 이
제껏 볼 수 없었던 당신의 더러움을 남김없이 발휘합니다. 당신 또한 조직
체계에 반발했으면서도 가장 조직적인 인간이 되어 추월한 앞차를 바짝 뒤
쫓습니다. '자식이 능력만 있다고 다 되는 줄 알아? 세상이 어떤 곳인데...'
그러나 세상은 냉혹하지요? 경찰이 나타나 무조건 손짓하듯 당신과 그 입사
후배는 똑같이 감사를 당합니다. 그러나 잔뜩 컴플렉스를 지닌 당신만 징계
를 받지요. 입사후배는 보란 듯이 어둔 터널을 뚫고 시련을 이겨냅니다. 갖
은 치사한 수를 다 써서 당신도 간신히 징계를 면하지만 이제 당신은 더 이
상 스피드 경쟁을 할 수 없습니다. 입사 후배는 이미 당신의 시야를 떠났습
니다. 감사하는 친구와 술을 먹습니다. 서운한 감 없지 않지만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니 이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술취하면 괜스레 역정을 냅니
다. 아마도 몇 년 후에 대기발령자 명단에 그를 쉽게 찾아 볼 수 있겠지요.
2. 앞지르기
강원도 44번 국도를 신나게 달리다가 생긴 일입니다. 되도록이면 추월
을 하지 않다가 한 30분 트럭을 졸졸 따라가자니 정말 참을 수 없었습니다.
할까 말까? 그런데 마주오던 차가 낮인데도 불구하고 헤드라이트를 깜박깜
박합니다. 더워 죽겠는데 왜 지랄이야. 짜증난 김에 추월을 하였습니다. 그
리고 추월을 했는데, 아뿔사, 바로 평창경찰서 앞이었으며, 경관이 손짓하였
습니다. 경찰이 있다고 마주오던 차가 헤드라이트로 신호를 보냈던 것입니
다.
세상 살다 보면 앞지르기를 할 때가 있습니다. 어떨 때는 무난하게 일
들이 진행되다가도, 민감한 때에 앞지르기를 하면 본의 아니게 희생양이 될
수 있습니다. 특히 요상한 관례가 득실대는 남한 사정에 비춰 본다면, 이런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제까지는 평소에 잘 하면 이런 일이 없을 거라고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하급 공무원과 하급 샐러리맨들은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상부에서 알아서 하라!는 그 엄청
난 말때문이지요. 평소에 잘 할 수 없는 도로 사정을 가지고 안전운행 운운
한다는 말이 얼마나 어폐가 있습니까? 따라서 우리가 눈여겨 볼 대목은 바
로 헤드라이트 신호입니다. 언제부터 내려온 자구책인지는 모르되 이런 위
험 신호에 민감해질 때, 그나마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차 빨리 안간다고 뒤에 바짝 붙어서 하는 헤드라이트 신호가 있는 반
면에 이와 같은 헤드라이트 신호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전자에만 몰
입하는 생활을 해온 것은 아닐른지요? 설사 내가 벌금을 냈을 지언정 타인
도 똑같이 당해보라는 심보가 아니라 그 경험을 보다 잘 살리려는 신호를
나눠야 되지 않을까요? 컴퓨터 통신이 만일 서로 마주보고 달리되 끊임없이
엇갈리는 소통이라면, 우리가 스치듯 지나가는 이런 신호를 잘 유념해야 하
지 않을까 하는 저의 생각입니다.
3. 주차 위반
서울에서 가장 큰 문제는 주차 문제입니다. 이웃집에 살면서도 칼부림
날 수 있는 것이 주차 문제입니다. 나는 대학로에 갔습니다. 차를 주차시키
려 30여분간이나 삥삥 돌았지만 주차할 곳을 도저히 못찾습니다. 그렇다고
언제 나올 지 모르는데 유료 주차장을 이용할 수도 없습니다. 경차라고 하
여도 특별히 싸게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때, 빈 곳이 보였습니다.
희미하지만 분명히 흰선이 쳐 있는 곳이었습니다. 나는 오늘 운수대통했구
나 생각하고 차를 주차시킨 뒤, 약속시간에 쫓겨 바삐 뛰어갑니다. 한 시간
쯤 흘렀습니다. 나는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주차딱지 위반이 붙여져 있는 것
입니다. 단속 시간은 불과 5분이 채 안되었습니다. 내가 계산을 하고 화장실
에 볼 일만 안보고 나왔다면 무난히 넘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그러나 더욱
더 화가 난 일은 안전지역이라 여겼던 그 흰선이 사실은 예전엔 주차지역이
었지만 지금은 아닌 곳이라는 점입니다. 줄지어 선 차량들이 주차위반 딱지
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차량은 주차위반 딱지를 붙지 않았습니다. 다행
스럽게도 단속경관이 지나간 뒤였습니다.
당신은 학교 다닐 적부터 크고 안전한 직장에서 자아성취와 성공를 위
하여 공부합니다. 몇 번의 취업시도 끝에 취직됩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회사
입니다. 부모님이 무척 기뻐합니다. 연인도 함께 기뻐합니다. 이제 결혼도
할 수 있습니다. 아! 이제 편안한 삶이 눈앞에 그려지는구나. 그러나 착각입
니다. 마치 주차지역 아닌 곳에 주차를 시키듯 당신의 일자리 또한 그렇습
니다. 단지 시작일 뿐입니다. 어디에고 안전지대란 없습니다. 가파른 세상
언덕을 오르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취직하자마자 당신은 당신보다
훨씬 좋은 조건에서 일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사람을 만납니다. 서로 술을
먹으며 세상 일을 논하지만 서로가 부러워하는 웃지 못할 희극이 일어납니
다. 당신은 고민 끝에 별다른 이유없이 사표를 냅니다. 다른 일자리를 찾아
보아야 하지요. 쉬운 일은 어디에고 없지만 천신만고 끝에 재취업을 하고,
전직 직장동료의 부러움을 삽니다. 그런데 그역시 당신이 찾는 자아성취와
성공은 아닙니다. 당신은 이제 자영업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큰 코 다칩니
다. 오히려 샐러리맨때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곳에서 당신
은 자영업을 안전지대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자영업으로 성공한 이들을
보면 자나깨나 그 생각으로 살아온 사람들이 많습니다. 당신은 그들과 경쟁
하려면, 뒤늦게 출발했으니 더욱 열심히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당신은 노력
합니다. 그러나 무리와 노력은 늘 함께 하는 동료이지요. 돌아오는 부채를
채 감당하지 못해 당신은 성공일보직전에서 망합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요행히 그 순간을 넘어서서 성공가도를 달립니다. 당신은 되돌아갈 수 없습
니다. 그 순간만 넘겼다면 일이 순조롭게 풀렸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에
당신은 재차 시도하다가 어느덧 브로커가 되버린 당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4. 중앙선 침범
낯선 길을 간다는 것은 호기심도 일지만 그만큼 헤맬 수밖에 없습니
다. 신호를 무심코 지나치고 아차! 하는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나는 지
나온 길을 다시 돌아가려 반대편 차선을 확인하고 중앙선을 넘어 유턴을 시
도합니다. 성공했습니다. 아! 그러나 그곳은 경관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입니
다. 의무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말합니다. '사실 제가 이 자리에 있으면 얼마
나 춥고 배고픈지 압니까?' 의무경찰의 애처로운 요구에 나는 내심 쾌재를
부릅니다. '별 게 아닙니다만 담배값에 보태쓰세요.' 마침 제가 가진 돈이
3,000원뿐이라서 지갑을 보여주며 타협을 하였습니다. 안전띠 미부착 딱지입
니다.
당신은 마음 먹은 일이였다고 믿어져 온 것들이 한 순간에 가치전도가
일어나는 곤경을 겪고 있습니다. 당신은 이 상태대로로는 갈 수 없다고 여
깁니다. 다른 길을 선택해야 합니다. 당신은 되돌아 가야 합니다. 당신이 만
일 학생운동경력가라면 당신의 투쟁경력은 휴지조각입니다. 게다가 당신이
그토록 신념화했던 이념들에 대해 깊이 회의하고 있다면 당신의 유턴은 의
외로 빨라집니다. 당신은 다른 길을 선택합니다. 그후, 당신은 괜스리 밤마
다 술을 먹으며 쓸 데 없이 팔십년대 투쟁가를 부르곤 합니다. '아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을 거야!'라며 절규하기도 하는 서푼짜리 오페라를 불러 제
끼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른 동료가 나타납니다. '넌 몸은 청산되었을 지 몰
라도 마음은 그대로구나.' 그는 그의 경력 자체를 모두 낡아빠진 것이라고
규정을 내립니다. 그러나 학생운동경력가는 그처럼 손쉽게 청산될 수 없다
는 점을 잘 압니다. 인간이란 지나온 자신의 날들에 대한 회한을 좀처럼 떨
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유턴 후 새로운 인간들을 만납니다. 학생운동때에는 죽었다 깨
어나도 못만날 인간군상들을 만납니다. 그들은 당신의 영역밖에 있었으나
늘 당신의 주변에서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즉, 당신으로부터 소외된 인간군
상들입니다. 그들도 나름대로의 가치판단을 가지고 적당히 거짓말하고, 적당
히 이익을 챙기고, 적당히 자선을 베풀면서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들이
말합니다. '내가 얼마나 춥고 배고픈 나날들을 견디어 왔는지 아느냐?' 그들
의 애처로운 요구에 당신은 내심 동조하면서 술을 마셨고, 당신이 계산을
합니다. 당신은 이제 새로운 영역에서 학생운동과는 전혀 다른, 그러나 본질
적으로는 똑같은 영역에서 새롭게 출발합니다. 이제보니 학생운동 조직경험
과 하등 다를 바 없는 회사조직이고, 대인관계였습니다. 어찌 보면, 학생운
동 경험이야말로 조직생활에 훨씬 도움을 많이 주기도 합니다. 당신은 직장
동료들과의 회식을 2,3차로 이끌면서 룸까페까지 갑니다. 그리고 술받아주는
여성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누군지 알아? 팔십년대에 민주화를 위해
몸바친 사람이야. 그러니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내가 누군지 알아? 팔십년
대 민주화 투사라고. 그런고로 당신도 민주화 혜택을 받았으니 오늘밤 내게
무진장 봉사를 해야 해? 알아? 몰라?'
5. 통행료 미납
며칠 전 여행을 돌아오는 길입니다. 부산에서 경부선을 타고 올라오는
데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를 들렸습니다. 기름을 다 넣고 카드를 내놓으니
주유소 종업원이 말합니다. '이 카드는 안되는데요.', 나는 다른 카드를 내놓
습니다. '이 카드는 등록이 안되어 있습니다.' 나는 할 수 없이 현금을 냅니
다. 이제 달랑 4,100원 남았습니다. 나는 하루종일 밥을 먹지 않았으므로
2.000원짜리 우동을 사먹습니다. 이제 2,100원 남았습니다. 경차 고속도로
50% 할인 카드 만원짜리를 가지고 있으니 얼추 해결이 되겠다고 생각했습
니다. 그리고 그날따라 무척 막히는 고속도로를 무려 8시간을 운전하여 서
울 톨게이트에 다달았습니다. 검표원이 말합니다. '만이천구백원입니다.' 제
가 가진 돈은 경차티켓 만원과 2,100원이라서 팔백원이 부족하였습니다. 검
표원이 말합니다. '그러면 만원짜리는 끊어놨으니 내일까지 2,900원을 내셔
야 합니다.' 제가 말했습니다. '온라인으로 안될까요. 그돈 내기 위해서 여기
까지 다시와야 합니까?' '안됩니다.' 저는 다음날 도로공사 서울영업소에 들
렸습니다. 바로 서울톨게이트 옆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사무원이 말합니다.
'만이천구백원을 현금으로 내셔야 합니다.' 저는 순간 당황했습니다. '이천구
백원만 내면 되지 않아요?' '규정이 그렇습니다.' 알고 보니 이런 부분미납인
경우 컴퓨터에 카드를 넣어도 찍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경차
할인카드를 가져와도 현금으로 내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마구 따져서 결
국 이천구백원만 내었습니다. 만일 제가 할인카드를 혹시나해서 가져오지
않았다면 무지막지한 손해를 입게 되었을 뻔 한 것입니다. 저는 이런 불편
한 서비스 체계를 고쳐야 하지 않느냐 항의를 했으나 그 사무원은 하루에도
몇천원들이 모여 수십만원씩 미납되기에 불가능하다는 말로 답변하였습니
다. 나오는 길에 보니 방송사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이 메모지를 보고 연신
무언가를 되뇌고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교통방송용 멘트 연습이었습니다.
"서울-안산간 소통이 원활하고 어쩌구 저쩌구..." 불쌍해 보였습니다. '저조
차도 관료적 의식을 타파하지 못하고 있구나.'
사람이 돈이 없으면 고생입니다. 단 돈 몇 푼에 정말 울고 웁니다. 돈
이 있어 쓸 때는 잘 모르지요. 그러다가 돈이 똑 떨어지면 그 다음부터 마
음이 심란해집니다. 운전대를 잡아도 좀처럼 떨치기 어렵습니다. 마치 기름
이 떨어져 연신 계기판에서는 연료주입 신호를 보내주는데도 고속도로 휴게
소가 좀처럼 나타나지 않는 경우 같은 것입니다. 어떤 아이가 부모에게 용
돈 올려달라고 하니 그 부모가 그랬다지요? "네가 나가서 인상분만큼 돈을
벌어봐라. 그만한 돈 벌기 쉬운 줄 아느냐?" 이자 갚으랴, 전기 수도세 등
세금내랴, 보험료, 차유지비 내랴, 생활비 내랴, 기타 잡비 내랴.... 정말 돈이
쑥쑥 나갑니다. 별달리 쓰는 것도 없는데 그렇습니다. 저축은 꿈도 못꿉니
다. 다행히 저축을 해왔지만 사표쓴 덕택에 얼마 전에 3년간 착실히 붓던
통장을 깼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이처럼 관료적 패턴에 당하면 정말 울 수
도 없는 희극적 상황에 처합니다. 정말 휴지살 돈이 없어서 꾹 참고 집에
가서 대변을 봐야 하는 심정 따위입니다. 그나마 이 경우 참을 수 있었길래
망정이지 그렇지 않다면 사람 꼴이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이런 상황
에 살고 있습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면 거지가 줄어들겠습니까? 천만의 말
씀입니다. 일본이나 프랑스나 미국이나 우리보다 훨씬 거지가 많습니다. 거
지는 기본적으로 도시에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밥벌이도 되고, 거식
처도 생깁니다. 그래서 서구제국의 지하철은 거지들의 주거지가 되는 것입
니다. 그런 거지들이 처음부터 거지였겠습니까? 대다수가 꾹 참지 못하고
길거리에서 똥싼 사람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것이 그들만의 잘못이겠
습니까? 선거를 위해 엄청난 돈을 한국은행에서 찍어 물가를 부추기고, 수
출 잘 되라고 재벌들에게 특혜를 주어 물가를 부추기고, 권력자들이 땅장사
해서 물가를 부추겨 결국 길거리로 내앉은 사람들입니다.
만일 당신이 친구들에게 인심이 좋았으나 망한 후 친구들이 외면했다는 부
호라면, 그리고 그 부호가 나처럼 단돈 팔백원이 없어서 사람 꼴값을 지키지
못한다면, 또한 그조차 하루를 돌아다녀도 구할 수 없었다면 당신은 과태료를
물게 되고, 또 그 과태료를 물지 못하고, 당신은 이자에 이자가 붙어서 당신
은 허덕이게 될 것입니다. 물론 과태료를 물지 못하면 면허정지조치가 내려
져 과태료가 없어지겠지만 이런 환유적 속성은 당신이 돈이 없으면 자유형
의 징계를 받을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삼일만 배고프면 인간은 도
둑질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풍요로운 후기 자본주의 시대에서 일어나지 않
을 일인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본에서도 기아자가 생긴다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웃지 못할 일입니다. 미국에서도 굶어죽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그보
다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아프리카에서는 굶어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을 방영하는 방송사 멘트는 한결 같습니다. 단순 암기 이상의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당신의 일임에도 당신의 일이 아닌 것. 멘트를 준비하기
위하여 정작 교통문제 자체에는 신경쓰지 못하는 것.
뼈만 남은 여자 탄백신화(坦白神話)
2005. 1. 9. 3:31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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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운스 (Bounce) / 스타킹
너의 스타킹 땜에 나 정말 미쳐버릴거 같애
사람 도는꼴 보고 싶어서 그래?
우리 함께 했었던 그시간들
행복했던 그땔 잊을수 없어
너의 검은 스타킹을 망사 스타킹을
다시 보고싶어 Oh~ 다시 사귀고파 Ye~
반복되는 생활속에 늘 만나던 여자들속에
너는 항상 까만 스타킹을 치마 속에
나는 니가 좋아서 아니 사실 그게 좋아서
가끔 신고 나오던 까만 스타킹이 좋아서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너와의 재회를 바래 유후~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난 참을수 없어 다시 내게로 돌아와
When I Say 스 You Say 타킹 스(타킹) 스(타킹)
When I Say 스 You Say 타킹 스(타킹) 스(타킹)
그렇게 너는 날 떠나버렸어
하지만 나는 널 잊을수 없어
다시 그때로 돌아가 내품에 안겨봐
다시 예전처럼 Oh~ 너를 안고파 Ye~
반복되는 생활속에 늘 만나던 여자들속에
너는 항상 까만 스타킹을 치마 속에
나는 니가 좋아서 아니 사실 그게 좋아서
가끔 신고 나오던 까만 스타킹이 좋아서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너와의 재회를 바래 유후~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난 참을수 없어 다시 내게로 돌아와
왜 날 떠나 아직도 잊지 못했나
눈을 감아도 아른아른
보통 여자와는 다른다른
그녀 머리 허리 매끈하게 빠진 다리
이리와 이제 어서 빨리 달링
이리와 이제 나의 품에 달링
그리워 몸살나게 쭉빠진 까만 너의 다리 Ye~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너와의 재회를 바래 유후~
까만 스타킹을 신고 나오기를
난 참을수 없어 다시 내게로 돌아와
http://blog.naver.com/jhjhjsjs/120002511453
긴머리와 히프선, 그리고 각선미로 이어지는 내 뒷모습. 내 애인 눈에 비치
는 내 뒷모습. 거절할 수 없는 뒷모습.
그가 나를 간절히 붙잡으며 베르사이유 시대의 방탕한 귀족처럼 무엇이든지
다 하겠다고 나를 붙잡는다. 그럼 나는 모양있게 생긋 웃으며 뒤돌아서
면 될 뿐이다. 그러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언제나 그의 한계를 요구하
기에 그의 분발을 위해서는 그의 취향보다 한발 앞서가야 한다. 긴 머리를
유지한 채 노랑, 빨강, 파랑으로 염색하기도 한다. 그는 좋아한다. 그러나 무
엇보다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스타킹의 변화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는 맨살다운 맨살을 원했다. 나는 온갖 곳을 다 뒤져가며 최고급 스타킹을
구하러 다닐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면 그는 아낌없이 최고급 스타킹 비용을
내는 걸 주저하지 않았다. 그러나 점차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맨살다운 맨
살 스타킹이란 끝없는 욕심이었다. 그는 처음엔 맨살같아서 무척 기뻐하다가
도 이내 싫증을 내곤 했다. "맨살이 아니야." 나는 차라리 맨살을 그냥 드러
내면 좋지 않냐고 애원하기도 했다. 답답하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는 퉁명스
럽게 말했다. "그건 맨살이 아니라 고깃덩어리야." 나는 도리가 없었다. 도저
히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자 자살을 결심하기까지 했다. 내가 싫었다. 내
자존심이 나를 용납하지 않은 것이다. 그때 <머리통이 없는 남자>인 인드라를
만났다. 인드라는 말했다. "스타킹을 겹쳐서 신으면 되잖아."
나는 내 애인이 싫증을 낼 때마다 하나씩 스타킹을 겹쳐 신기 시작했다.
마치 수많은 층위의 피부처럼, 물감을 덧칠한 유화처럼 내 각선미는 점점 생생
해져갔다. 물론 기술적 어려움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현대 과학은 믿을
수 없는 두께의 스타킹을 제조해가고 있었다. 또한 나는 뼈를 깎는 노력으로
다이어트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뼈만 남은 여자>였다.
이제 나는 그와의 섹스가 너무나 황홀하다. 그가 하나씩 스타킹을 벗겨줄 때마
다 참을 수 없는 인내에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없이 벗겨
도 끝없이 나타나는 스타킹. 그는 자주 맨살에 이르기도 전에 흥분을 채 참지
못하고 외마디의 비명을 지르곤 했다. 이제 나는 목욕하기를 포기한다. 스타킹
을 벗으려면 하루종일해도 다 벗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대신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린 스타킹을 치장하기 시작했다. 스타킹에 줄이라도 나가면
내 못에 가시가 박힌 듯한 고통이 찾아왔다. 나는 외출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외출할 시간도 없었다. 매일매일 새로운 스타킹을 신으며 느끼는 쾌감이란 이루
말 할 수 없는 것이었다. <간없는 남자>인 그는 그런 그녀를 위해 매일매일 자
본을 증식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맨살은 너무나 맨살답지 못하다. 맨살답게 보이려면 맨살같은 스타킹을 신
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나는 살색 스타킹이 아무래도 멋있어 보인다. 하지
만 스타킹을 신어야 하는 여성 입장에서는 답답한 측면이 있다. 최근에는 바
르는 스타킹이 나왔다. 맨살에서는 이물질이 분비되어도 자연증발할 수 있으
나 스타킹을 신으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에 각종 질환을 일으키기 쉽다. 특
히 팬티 스타킹인 경우 특정 부위의 손상이 문제될 수 있다. 남성은 이물질의
원활한 추방과 원만한 성생활을 위해 '고래사냥'을 하는 데에 반해 여성은 오
히려 스타킹을 신어 역기능을 담당하고 있으니 문제이겠다. 그럼에도 왜 여성
은 스타킹을 신는가. 오로지 남성의 눈요기를 위해 신는가. 가부장제를 이해
하지 않는다면 저급한 여성해방론이나 남성편의주의론이 등장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자 함이 아니다. 어느 소설가가 '차라리 사회
부조리나 계급문제에 몫을 떼어주었다면 내 삶이 다소 나아졌으리라'는 바램
에 관한 것이다. 또 어느 소설가가 '아무래도 인쇄매체적 글쓰기가 글쓰기답
지 않느냐'에 관한 것이다. 또 어느 소설가가 뒤늦게 종교에 귀의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또 어느 소설가가........
삶의 층위는 단순한 하나가 아니다. 이분법에서 벗어나라는 말은 현상적인 대
립구도만을 바라보지 말고 심층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지식인이란 인쇄매체와 운명을 같이 해왔다. 인쇄매체가 우리 앞에 등장한 것
은 인류의 역사에 비춰보자면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인쇄매체는 우리 사
고틀을 변화시켰다. 촉각이나 청각보다 시각을 중심으로 모든 감각을 마비시켰
다. 인쇄매체는 또한 근대적 합리주의를 낳아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 가차없
이 삭제를 명했다. 모든 애니미즘이 미신으로 치부되었다. 인디언들이 땅에
귀를 대고 아메리카 들소오는 소리를 듣는 것과 근대인은 아무 관련이 없었다.
그저 아메리카 들소를 쫓아 다닐 수 있는 운반수단과 들소를 쳐죽일 무기와
이를 정당화시킬 인쇄매체만 있으면 되었다. 인쇄매체의 보급은 대중적이며 민
주주의에 이바지하였기에 다소 편협한 점이 있더라도 열광적인 환호를 받았다.
비로소 귀족이 아닌 대중들도 숫자를 셀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물론 선
거권은 후일을 기약해야 했다. 이제 인쇄매체는 자립화되었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는 인쇄매체로 살은 것처럼 움직인다.
이미 근대인에게 원시인적 감각을 기대한다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그건 '목소리
인 척하는 가짜 목소리'에 불과하다. 그런 데도 많은 이들은 자신들이 인쇄매
체를 통해 '목소리'를 전달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아주 어리석지 않은가. 게
다가 성경을 통해서라니 통탄할 진저. 거기 어디에 목소리가 있다는 것인가.
당신이 지금 보고 있는 건 단지 인쇄매체일 뿐이다. 거기에 나오는 목소리 또
한 인쇄매체일 뿐이다. 설령 당신이 기도하다 듣는 신의 목소리가 있을 지라도
또한 인쇄매체일 뿐이다. 그런 자신을 깨닫기도 전에 이제 인쇄매체의 위기(?)
가 닥쳤다. 통신매체가 인쇄매체를 대신하는 징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
신매체란 간단히 말해 전기적 속도감을 특성으로 한다. 인쇄매체에서 은유(복제
, 혹은 동어반복, 또는 세뇌)란 무제한적이지만 소통 주체, 생산, 유통, 소비
과정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통신매체가 등장하자 이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졌다. 누군가는 이제 사이보그 상상력외엔 남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인쇄매체를 지키자!라고 우습게 말한다. 그러나 이미 우리는 인쇄보그 상상력
밖에 없지 않았나? 우리는 인간인가? 정말 웃기지도 않는다. 우리는 인간이 아
니다. 단지 괴물, 외계인이다. 그런 외계인에 불과한 이들이 사이보그 상상력
을 두려워한다고 사태는 막을 수 있는가? 없다. 다만 이제까지 인쇄매체 상상
력으로 이 무지막지한 사회를 고발하고, 소외된 자들에게 용기를 부여하고, 불
행한 이유로 육체 노동자와 예술질 밖에 할 수 없는 자들의 밥벌이를 했던 것
처럼 다시 통신매체에서도 할 뿐이다. 전보다 달라진 점이란? 보다 대중적이고
, 보다 민주주의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중세 수도승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처럼 기존 지식인들에게는 밥벌이의 축소를 의미한다. 어쩌랴. 감수해야 되
는 것 아닌가. 또한 당신들은 말한다. 투쟁을 거두고 문학으로 가자고. 그러나
문학이 당신의 고향이었던가? 문학으로 족한가. 문학은 유토피아인가. 그렇지
않겠다. 더욱 고통스러운 길로 가는 것이리라. 그러하기에 마치 투쟁이 끝난
양 말하지 마라. 더욱 험난한 길로 간다고 말하라. 다만 누구처럼 손쉬운 길이
라 택한 것이라면 투쟁 운운조차 하지 말자. 문학을 꿰뚫고 들어가니 무엇이
남는가.
재수없어! 탄백신화(坦白神話)
2005. 7. 8. 17:56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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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우연히> 책방을 들린다.
- 뭐하고 지내시오?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난 하루끼인가 뭔가 하는 놈이 괜히 미웠다.
- 지금 당배 피시고 있나요? 담배 한 대 드릴까요? 헤헤. 전 불만 있어요. 열정 따위 시시껄렁한 이야기는 집어치우고 담배 맛이 어때요? 맛있어요?
하하! 그 놈이 뭐길래 사람들이 미쳐 발광하는지 모르겠다. 유럽 유학생이던 일본인이 애인을 죽이고 냉장고에 넣고 먹었다는 그런 X인가? 그게 상실의 시대인지...
- 01234567894377483...
문득 인간의 얼굴을 한 야만이란 표제가 내 앞에 떡하니 서 있다. 앙리 레비의 저서인데 그는 1968년 파리 뿐만 아니라 전 유럽을 떠들썩하게 했던 5월 투쟁 리더 중 하나였다. 쿠쿠. 짜식. 고르비를 씹고 싶었나? 아니면 책 팔아먹기 위한 사랑과 영혼 식인가? 읽는다. 그는 요즘 프로이트와 니이체에 X나게 빠졌나 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환상에 젖어 있는 것이다. 하긴 맑스를 씹기 위해서는 다른 권위 있는 회의주의자를 통해서 까야 네 이빨도 튼튼한 법이지. 당 좌익과 해방 좌익은 기실 파시즘이고 전체주의다. 너다운 발언이다. 따지고 보면, 하루끼는 굉장히 불쌍한 녀석이다. 이렇듯 한순간에 나의 관심에서 멀어지다니.
- 하루끼 책은 좀 읽어 봤니?
- 아니.
- 왜?
- 돈 아깝고 시간 없어.
- 채팅할 시간은 있고?
그래, 레비야, 레비트야. 토끼? 네 말마따나 이 대목에 한하여 나도 해방 좌익 축에 끼나 보다. 왜냐하면 그 대목에서 예민해졌으니까.
- 인드라, 잘 들어. 좌익은 맨날 패하면서도 승리했다고, 진일보라고 말하고 똑같은 짓거리를 하면서도 자기들만은 다르다고 하고 언제나 뻥만 질렀다고, 거짓말의 백과사전이라고, 무엇보다 환상을 어느 누구보다도 드높여서 비판하는 바로 너, 인드라야말로 환상 속의 그대이지.
음... 수양 부족이다. 나 뽕 먹었다고 생각해. 똥에 치인 놈이라고. 그리고 권력은 기실 지식이고 지식을 가진 자는 깨어 있고 깨어 있지 못한 자는 계몽을 통해 깨어야 하고 깨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폭발하여 기존 권력을 남김없이 빨아들이는 불가사리 같은 존재여야 하고 자신의 계급마저 철폐하는 무정형의 존재라고 이 모든 것을 말하는 나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 나라고 그래서 프롤레타리아는 없다고. 그래, 랍비야, 유대교의 추종자야. 그러니까 움베르토 에코의 표현대로 맑시즘은 근대 기독교의 지파라고. 메시아는 프롤레타리아고 중세 교회는 당이고 루터는 너, 랍비 아니냐 따지고 보면? 그래. 앙리 10세야, 넌 무덤 속에서 걸어나와 변증법을 체화하는 자는 자본가가 가장 잘 한다고 말하는구나. 그리 새삼스럽지 않은 발언이지만 너의 권위를 조금 인정하는 것이 내 신상에 유리하구나. 우리 함께 그렇다면 무덤 속으로 다시 들어가 보자꾸나.
- 허허. 누군가 거참 산파술을 어디서 제법 줏어 들었구만 하겠군. 사실 산파술이 뭔지도 모르는데... 각개 격파 게릴라 수법인가? 청량리 병원.
권력이란 것이 담배 같은 것인지 몰라. 끊어야 할 담배, 해로운 담배, 끊지 못할 담배, 기호품인 담배, 분위기 살리는 담배, 꿈에 본 담배, 배고플 때 담배, 밥 먹고 나서 담배, 잠자기 싫을 때 담배, 안 피우는 사람 괴롭히는 담배, 금연실에서 담배, 마일드, 새마을, 피워서 없애자는 담배, 없앨 것을 왜 만드냐는 담배, 인디안 나쁜 사람 담배, 허용된 마약 담배, 성인 취급 받고 싶은 담배, 작가들의 담배, 건설 노가다의 담배, 마피아의 담배, 군발이 담배, 폼나게 책상 위에만 있는 담배, 콜라 같은 담배, 병원에서 담배, 담배, 담배. /Q
변하지 않는 구조를 가정하는 가설은 구조주의자들에게는 낯익은 과제이지. 대립항을 개설하고 대립항간의 모순을 설정하고 모순의 운동 속에서 영구 기관처럼 작동되는 그 무엇을 제작하지. 그런 후에 그 구조에 치여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자들 가운데 뭔가 희망을 가지려는 자들을 비웃지. 짜식~ 순진하기는 하며 남 모를 미소를 짓지. 레비, 너는 초월했구나. 5월주의자답게 무계획을 말하는구나. 해프닝이었다고? 그렇지. 125불을 내고 클린턴 취임 축하 파티에 나가는 이유는 세 가지인데 사람들은 두 가지만 생각하지. 첫째는 비싼 술과 음식을 먹기 위해. 둘째는 역사적인 장소에 참여하기 위해. 그런데 사람들은 한 가지를 무시하고는 하는데 바로 재미를 위해서라고. 그래. Girl just wanna have a fun이다. 이제 해프닝의 무덤을 들어갈까? 대립항은 하나가 아니고 여러 개이고, 대립항을 만들고 싶어 한,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욕망의 시니피에이지. 다변항을 전체주의적으로 늘 끊임없이 해석해야만 마음이 진정되는 지식은 다름 아닌 조지 오웰이 지적한 Double Thinking 수법이라고. 그래서 영구 기관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기관차로 갈음된 것이고, 갈음된 과정들은 전도의 과정이고, 권력의 쟁취이고, 통일의 완성이고, 전체주의자의 책략이고, 실존하는 개인을 질식하는 소외이고,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빨이들이는 치밀한 파쇼라고. 그래도 데리다는 조심스럽더구나. 정치에 대해서 직접적인 언급을 하지 않고 맑스에 대해 해체 계획을 표명하지도 않고. 그리고 알튀세는 경망스럽지. 맑스를 위하여,라고 공갈을 친 다음에 자기를 위하여,라고 썼으니까. 파리 교수들 학생들에게 대접받지 못한다던데 그래서 썼나? 설마 아니겠지. 미안하다. 나도 너처럼 되는 대로 지껄일려고 할 뿐이야. 해보니까 신나는데? 할머니 말로는 생이 난다고 하시지. 이제 너처럼 떠들어 놓고 보니 너도 네가 비판하는 대상의 일부에 불과하구나. 그래서 넌 비관적으로 생각하니? 헤어날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 너의 책을 한 시간 가량 읽으면서 생각한 것은 프랑스풍 번역 문체만이 나를 즐겁게 하더라. 프로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읽는 느낌이 나더라고.
- 자기 외에 아무도 의존하지 않는 자야말로 노예 중의 노예다. 히히. 나는 그저 나랑 관계한 것만 나라고. 나? 없어.
나는 네 글을 읽으면서 묘한 생각을 했어. 폴 스위치라고 알 것이다. 미국에 있는 사람인데 민주주의에 관한 토론에서 논쟁자들을 열받게 한 듯 싶다. 동구 유럽인이 민주주의가 결여되어 있다고 여기는 것이 전통적인 서방적 사고인데 폴 스위치는 이는 사실이 아니라고 말해. 오히려 동구 유럽인이야말로 프랑스 혁명 기원에 둔 민주주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고 말하지. 즉, 동구 유럽인의 민주주의는 서방이 당연시 생각하는 사유 재산의 정당성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한다는 것이지. 그런데 폴의 비판자들은 이렇게 말하지. 폴씨, 이제 당신은 과학자 대신 신학자가 되지 그랬소. 왜냐하면 당신이 말하는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그 과학적이란 표현은 당신이 말하듯 물리학적 법칙이 아니기 때문이오. 물리학은 인간이 역사를 통해 해온 가장 객관적인 성과요.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이 당신의 주장대로 자본주의가 가서 사회주의가 온다면 얼마나 좋겠소만 아무리 봐도 그렇지 않는구료. 물리학 뿐만 아니라 다른 과학 분야와 상이한 분야인 그 과학적 사회주의는 신학이나 윤리학에 의존하는 것이 보다 현명할 것이오. 이에 대해 그가 뭐라고 점잖게 씹었냐면 '심각한 경제적 동란과 광범한 국내적 충돌과 그리고 미증유의 파괴성을 가진 국제적 전쟁의 위협이 보여지는 조건'이 거의 보편적으로 항상 현존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과연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따라 결정되어질 것이라고 했소. 모, 폴이 말한 바에서 설명 대신 실천으로 포괄적으로 이해해도 좋을 듯 싶소. 앙리, 당신은 조절학파가 말하듯이 자본주의는 언제나 위기였으나 뉴딜 정책처럼 해결하는 능력이 있고 거짓말장이 좌익처럼 자기 말을 맨날 변명하기 보다도 속물에 충실하면서도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파괴 속으로 몰아넣는 그 상황으로 이끌어 마침내 다시 서는 위대한 변증법론자들이라고 칭송하면서 - 당신이 물론 차라리란 표현으로 변증법론자들을 차선책에 불과(!)한 환원주의자들로 치부할 지언정 - 엥겔스가 자본론 옮기면서 했던 말을 패러디하는 꼴이 너무나 웃기오. 그리고 혼성 모방이기에는 당신의 이빨 또한 허약하오. 그것은 영화 브라질 등에서 이미 익숙한 이미지일 따름이오. 당신은 죽었소. 당신은 이미 68년 5월에 죽었다는 말이오. 이제 편히 쉬시오. - 정말 지겨워. 지겨운 문체야. 애들 장난치듯이 휘갈긴 정파 기관지 같이 너저분해. 다를 게 뭐야.
나는 과학적 사회주의란 말도 이제는 귀찮다. 그러면 사회적 과학주의라고 말해 볼까? 말장난에 그칠 지라도 조금이라도 사태가 바뀔 수 있다면 무슨 짓을 마다할까? 과학에 충실하면서도 과학에 포함된 이데올로기를 경계하여 그 이데올로기가 과학의 제 과정과 사람들 간에 침투해 있으니 이를 내부에서 추방하는 방안? 어딘지 하버마스적이구만. 과학적이건, 사회적이건, 당이건, 해방이건,
- 92년에 인드라 씀.
그래, 지 잘난 맛에 인터넷에서 이름이 무슨 대수냐고, 역사에 한 끗발 날리지 못하는 주제에 무슨 이름이냐는 말들이 난무한다. 물론 역사는 이름없는 자들이 주도했다고 할 수 있지. 그래서 그대들은 지금부터 <이름없는 사람되기> 운동을 하겠다는 것이냐. 이런 가식 덩어리들. 이제 이름없는 사람들까지 팔아먹을 작정이냐. 이름없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라. 이름얻기를 얼마나 갈망하는가. 네 깊은 욕망에서 찾아보렴. 신문사에 네 이름 한 줄 나오면 얼마나 기뻐할 지 말이다. 겉으로 이름없는 자라니 너무나 천박하지 않은가. 당신들은 잘못 알고 있다. 오히려 역사는 이름없는 이들이 절실히도 이름을 얻고자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말이다. 릴케는 말했지. 평범한 사람도 죽을 때는 브이아이피 대접을 받으면서 간다고. 긴급차량으로 실려가는 걸 이렇게 말한 거지.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이제는 DNA로 말해야 할 지 모르는... 바로 그것이란다. 이름이란... 그래서 주체인 게다. 포스트모던 유행이 십년도 더 지난 마당에 아직도 그 주체는 죽었다에서 조금도 넘어서지 못한다는 말인가. 아니면 그때 그때 달라요식 주체로 살짝 바꾼 것이냐. 주체귀신이나 니네들 그때 그때 달라요 귀신이나 뭐가 달라. 이름만 바꿔서 계속 해먹겠다는 거 아냐? 씨발 것들아. 그러니 문제지. 아냐? 시대가 요구하는 걸 니네들이 다 할 수 있는 환상을 버려! 새끼들아. 지것을 열심히 지키면서 하다 보면 운좋게 시대와 맞아떨어지면 불가피하게 나서는 것이고, 아니면 나서도 이름을 못 얻은 것일 뿐이야. 니놈도 주체가 될 수 있고, 저 놈도 주체가 될 수 있는 것이요. 근데 이놈의 주체가 자리가 뭐라고 조금 얻어도 군대 보직마냥 강짜를 놓기 마련이여. 이게 문제 아니야? 내놓지 않으려는 게 문제인 게 아니냐 이거야. 그게 보직명을 없앤다고 달라지냐 이거야. 그걸 믿느니 노무현 개혁을 믿지, 씨발 것들아. 니놈들이야말로 유명주의에 빠진 주제에... 이름없는 자들은 죽어라고 이름을 얻기를 갈망하였으나 죽어갔다는 것을. 이름을 내세울 게 뭐가 되나요?라는 중산층적 너절한 겸손 앞에 무너져가는 시대적 겸손을 보지 못하는가. 저 새끼들, 도대체 왜 나선대요? 그 새끼, 쥐뿔도 없으면서 왜 나서길 나서요? 그래,나설 놈은 나서자. 대신 너희들은 평생 이름없이 살아라. 그거 아니? 정작 이름이 있는 재벌가 사람들이 언론에 나오기를 얼마나 꺼려하는지 말이다. 구설수에 오르는 것 자체를 싫어하지. 올라봐야 도움될 것이 없으니까. 실용적이지 못하니까. 물밑에서 야합하는데 방해만 되니까. 그저 확실한 끈 하나만 잡고 있으면 되니까. 도대체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될 지 확실한 정보 없어? 그래서 월급 받아먹고 있는 게 부끄럽지 않냐? 씨발 것들아. 아아~ 이 새끼들이 후진 쁘띠들인 줄은 알았지만, 속까지 완전히 썩은 새끼들인지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살아라. 구십년대 중반이던가. 그래도 나는 감동받은 적이 있었다. 투쟁 경력이라고는 손톱 만큼도 없는 애들이, 조직을 꾸려가면서 세상에 기죽지 않던 모습이 말이다. 투쟁 경력 말해봐야 돌아오는 건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죠? 아아! 그놈들이 좋았다. 당장 아무 것도 하지 않아도 당당한 그들이 좋았다. 실용적이지 못하다? 선비적이다? 니기미, 겉으로 도닦는 이야기하면 속으로 좆같은 생각할 바에야 차라리 내놓고 하현처럼 떠드는 것이 진짜 선비에 접근한 것이지. 니네들이 진짜 선비를 만나지 못해서 그런 개소리를 하는 것이야. 진짜배기들이야 어디든 있어. 지금 그런 진짜 선비들이 없다고? 왜 없어. 찾으면 있지. 하지만 니네들이 원하지를 않는 것이지. 외면하는 것이지. 니네들이 나와바리를 갉아먹으니까. 씨발 것들, 어디서 밀실에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식으로 의뭉스럼만 배운 새끼들. 다 뒈져라. 존만한 것들아. 니네는 그렇게 살아라. 나는 놀고 먹을지라도 사는 동안 나답게 살다 가련다. 열심히 이름을 얻기 위해, 고수하기 위해 살아가련다. 나는 이름없는 이들과 언제나 함께 하련다. 너희는 인터넷의 연못에서 폭탄주 돌려가며 마시며 놀다가 빠져 죽어라. 아마도 그렇게 살아도 경제적으로 살만하니까 그런 것이겠지. 혹은 기득권이 보장되든가, 아니라면 출세의 끈을 놓치기 싫어하는 것이겠지. 그래서 다만 관료들의 고질적 수법처럼 익명 투서에 열심이겠군!~ 씨발 X같은 새끼들. 나는 누가 뭐라해도 인드라 뜰 때까지 가져가련다. 너희들 뜨면 다 죽어!~ 그리고 아직 뜨지 않았지만 준비하는 사람들. 열심히 준비하라고. 내일 당장 뜰지 모르잖아. 그기 자유로운 자유인들의 공동체라고. 언제까지 쓸 데 없이 시다바리 짓하다가 배신당할래? 연습해야 되는 거야. 연습해도 막상 뜨면 허둥지둥대는 일이 얼마나 많아. 연습은 실전처럼 해야 하는 거야. 맨날 연습만 하는 새끼들은 연습만 하다가 인생 종칠 게 뻔해. 가까이 하지 않는 게 좋아. 가까이 하다가는 백년 재수가 없을 거다. 재수없는 새끼들! 재섭서.
마법천자문 각색 뮤지컬 대본 탄백신화(坦白神話)
2006. 10. 29. 3:27 수정 삭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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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에 기획되었다가 불발이 된 뮤지컬입니다. 각색을 맡았었는데 사정상 유야무야되었습니다.
마법
천자문
원작
마법천자문;아울북
각색
김종화
시놉시스
마법대회에 손오공과 한삼장이 출전한다. 마법대회를 구경나온 저팔계와 사오정이 티격태격하고, 결승전이 진행되던 중 대마왕이 나타나 마법대회를 쑥밭으로 만들고 한삼장과 사오정을 납치한다. 대마왕이 손오공과 저팔계를 벼랑으로 내던진다. 의식을 잃었다가 되찾은 손오공과 저팔계는 마야 할미를 만나 도움을 얻고, 풍수동에서 풍수십류를 연마한다. 대마왕은 한삼장을 협박하여 결혼 약속을 받아내고 마음이 여린 사오정을 손오공에게 보내어 그들을 죽음의 위기로 내몬다. 하지만 손오공 등은 신물의 도움을 받아 살아난다. 대마왕은 삼장과의 결혼식을 치루는데 변장한 손오공 일행이 나타나 삼장을 구출한다. 대마왕과 손오공 일행은 최후의 대결을 벌이는데 손오공 일행이 대마왕에게 최후의 일격을 가한다. 대마왕의 정체는 집나간 고양이. 마법천자문 비석이 파괴되어 그 중 한 조각인 ‘믿을 신’ 조각을 고양이가 지니게 되었던 것.
등장인물
한삼장 : 나이 12세 소녀
손오공 : 나이 12세 소년
저팔계 : 나이 12세 소년, 엉터리 소년 도사
사오정 : 나이 12세 소녀, 백납병을 앓는 특이한 체질.
대마왕 : 본래 고양이이나 마법천자문 조각으로 대마왕이 됨.
마야할미
사회자 (목소리)
도깨비 4
혼세마왕, 혼돈마왕, 말세마왕, 해적 상어왕
대마왕 부하 1, 2
마법대회 출전자 및 구경꾼들
소품
마법천자문 조각 믿을 신자
마고할미 지팡이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큰 선물상자
손오공의 목걸이
저팔계의 휴대폰
사오정의 마술피리
노래
1.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by 합창)
2. 친구가 필요해 (by 사오정과 저팔계)
3. 게임 (by 손오공과 한삼장)
4. 대마왕 행진곡 및 혼돈 (by 견그루, 사오정, 저팔계, 한삼장, 손오공, 군중)
5. 마야 (by 마야)
6. 이 세상에 빛이 되거라(by 마야)
7. 도깨비(by 도깨비)
8. 불아불아 (by 도깨비)
9. 시상시상(by 도깨비)
10. 대마왕 행진곡 (by 대마왕과 부하들)
11. 道理道理(도리도리) (by 도깨비)
12. 持闇持闇(지암지암) (by 도깨비)
13. 그리움(by 한삼장)
14. 강해지고 싶어(by 사오정)
15. 坤地坤地(곤지곤지)(by 도깨비와 저팔계)
16. 西摩西摩(섬마섬마)(by 도깨비와 손오공)
17. 業非業非(업비업비)와 亞合亞合(아함아함)(by 도깨비 및 손오공/저팔계)
18. 作作弓作作弓(짝짝궁 짝짝궁) 羅呵備 活活議(질라아비 훨훨의) (by 오공,팔계 및 도깨비)
19. 천지인 (by 마야)
20. 대마왕 행진곡 및 그리움(by 반주)
21.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by 합창)
마법천자문, 모험의 세계
## 1. Intro
노래 :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by 합창)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나레이션)
옛날 옛날 한 옛날에
108마리 요괴들이 세상에서 말썽을 부리자
하느님이 모두 붙잡아 마법천자문에 봉인하였습니다.
그 후 오랜 시간이 흘렀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져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그러자 마법천자문의 봉인이 풀리고
마법천자문 조각들이 세상에 뿌려졌습니다.
마법천자문 조각이 세상에 나오면
사람들이 못된 요괴에 휩쓸려
서로를 의심하고 다치게 합니다.
그때 불쑥 손 하나가 나타나
동그라미에 하늘 천을 쓰니 하늘이 되고
네모에 땅 지를 쓰니 땅이 되고
세모에 사람을 쓰니 바위가 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위에 벼락이 치고
바위가 갈라지면서
힘세고 용맹한 손오공이 나타났습니다.
* 그림자 놀이를 통해 묘사
## 2. 마법대회
경기장 안에는 손오공이 네 명에 둘러싸여 있다. 네 명의 공격을 하나씩 격파한다. 네 명이 모두 손오공에게 달려들자 손오공이 한꺼번에 이들을 물리친다. 모두 벌렁 뒤로 넘어진다. 손오공이 포즈를 취하자 박수가 나오고 박수를 받으며 손오공이 경기장에서 내려온다.
사회자 : 여러분! 대단하지요. 도전자 손오공 힘이 천하장사로군요. 마법대회도 점점 그 열기를 더해 가고 있습니다. 잠시 뒤에는 결승전이 벌어지게 되겠습니다.
사오정이 군중 사이에서 대회를 구경하러 온다.
사오정 : 여기가 마법대회하는 곳이 맞나? 맞아요? 맞나 보다... 휴. 간신히 찾아왔네.
저팔계 : 이봐 멍청이, 마법대회에 출전하러 왔냐?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사오정이 쳐다보니 도사 차림의 소년, 저팔계가 괴상한 요가 수행하는 모습으로 있다.
사오정 : (말을 더듬는 식으로) 으응. 나?
저팔계 : 그래. 멍청하게 서 있는 너 말이야.
사오정 : 아니... 난... 구경하러 왔는데 뭐..뭐야. 넌 누군데 나한테 왜 말을 함부로 하니?
저팔계 : 나는 팔계도사이니라.
사오정 : 풋. 도사라고? 흉내낸다고 누가 도사래? 웃긴다.
저팔계 : 잡새가 봉황의 뜻을 어찌 알리오.
사오정 : 뭐라고 지껄이는 건지...
저팔계는 몸을 바로 하더니 막춤을 추더니 주문을 왼다.
지팔계 : 수리 수리 마수리 말발타 사발타 쿵쿵따리 사바라 깐따라삐야
저팔계는 보자기에서 휴대폰이 나온다.
사오정 : 음... 휴대폰?
저팔계 : 휴대폰? 후후. 이건 보통 휴대폰이 아니다.
사오정 : 그럼...
저팔계 : 소원을 들어주는 휴대폰이다.
사오정 : 헛소리하지 마.
저팔계 : 자. 봐라.
저팔계가 휴대폰을 꺼내주자 손오공 사진이 나온다.
소오정 : (괴성을 지르며) 손오공 사진이잖아? 어떻게 알았지? 내가 손오공을 만나고 싶어한다는 걸...
저팔계 : 후후. 전화번호도 알려줄 수 있지.
사오정 : 정말이야?
저팔계 : 못 믿겠으면 할 수 없지. 그만 가봐라.
저팔계 다시 눈을 감고 본래의 괴상한 요가 수행 모습으로 돌아간다.
사오정 : 이봐. 팔계 도사. 전화번호 좀 알려줘.
저팔계 : .......
사오정 : 관심이 있다니까.
저팔계 : (눈을 뜨며) 그럼 십만 원만 내.
사오정 : 십만 원? (주머니를 뒤지며 만원을 꺼낸 뒤) 만원밖에 없는데...
저팔계 : (잽싸게 만원을 낚아챈 뒤) 오늘 기분도 좋으니까 특별 서비스를 해주지.
사오정 : 고마워. 어서 빨리...
저팔계 : 자. 그럼 소원을 들어주지. 네 이름이 뭐냐.
사오정 : 내 이름은 오정이야. 사오정.
저팔계 : 오정아. 소원을 이루기 위해선 노래를 해야 한다. 노래를 해봐.
사오정 : 여기서? 창피하게... 못해.
저팔계 : 손오공을 만나고 싶지 않아?
사오정 : 알았어... (남들 들을까 속삭이듯)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참고 참지 울긴 왜 울어...
저팔계 : 그만. 됐어. 자! 내 전화번호.
사오정 : 뭐야. 손오공 전화번호 가르쳐준다며?
저팔계 : 누가 손오공 전화번호 가르쳐준다고 했니? 그냥 전화번호 가르쳐준다고 했지.
사오정 : 뭐야. 뭐. 날 속인 거야?
저팔계 : 속이지 않았다니까. 자! 받아. 특별히 주는 것이니까.
사오정 : 이 거짓말쟁이.
저팔계 : 귀신같이 생긴 게... 쳇. 넌 좀 다를 줄 알았더니 여자애들은 다 손오공만 찾는다니까.
노래 : 친구가 필요해
(by 사오정과 저팔계)
나는야 유명한 저팔계라네
어려운 일 만나면 비겁하지만
좋아하는 친구 위해 뭐든지 다해
그렇지? 흥!
나는 나는 꿈이 많은 사오정이죠
낯선 친구 만나면 떨려오지만
좋아하는 친구 위해 뭐든 다하죠
넌, 아니야. 우씨
나는야 유명한 저팔계라네
자장면 피자 초콜릿 후라이드치킨
좋아해도 돈이 없다네
그렇지? 흥!
나는 나는 꿈이 많은 사오정이죠
가슴 콩콩 두근두근 안절부절 주저주저
강한 사람이 난 좋아요
넌, 아니야. 우씨
나는야 불쌍한 저팔계라네
나한테 여자애들이 관심이 없어
여자애들 놀리는 게 유일한 재미
아직도? 응!
나는 백납병을 앓는 사오정이죠
왕따 당하는 게 제일 무서워
나의 왕자님이 어디 계실까
넌, 몰라 몰라. 휴
사오정 : 뭐, 귀신? 거기 안 서?
저팔계 : 메롱~. 나 잡아봐라~
사오정이 팔계를 잡으려 하고 팔계는 도망다닌다.
사회자 : 대회장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 드디어 결승전이 벌어지게 되겠습니다. 홍코너~ 오늘의 도전자, 괴력의 손오공~~. 청코너, 대회 3연패의 초강력 우승후보 한삼장~. 자~ 최후의 승자는 과연 누구일까요?
손오공과 한삼장이 마카로니 웨스턴의 명작, 황야의 무법자와 같은 대결 분위기. 손오공과 한삼장이 꼼짝하지 않은 채 서로를 오래 탐색한다.
손오공 : 자. 각오해라. 간다아아......
손오공이 한삼장에게 달려가며 갑자기 뽀뽀를 한다. 당황하는 한삼장.
한삼장 : 뭐야. 뭐.
손오공 : 이것이 나의 비장의 뽀뽀 기술이다. 상대의 기를 초기에 제압하기.
사회자 : 어.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한삼장 : 야. 손오공, 죽고 싶어? 이잇. 괴성으로 제압한다. 소리 음(音).
손오공 : 이에는 이다. 나도 소리 음!
노래 : 게임
(by 손오공과 한삼장)
호잇, 호잇, 내 이름은 손오공이지
상대가 누구든 내 상대가 될 수 없지(yo)
다들 그만 쉬라면 쉬는 거야
호잇, 호잇, 내 이름은 손오공이지
패거리가 많다고 작다고 깔보지 마라(yo)
다들 그만 쉬라면 쉬는 거야
어머, 어머, 내 이름은 한삼장이지
여자라고 무시하면 큰 코 다치지(yo)
다쳐도 책임 안 져 그러니 그만둬
어머, 어머, 내 이름은 한삼장이지
힘세다고 목소리만 크다고 깔보지 마라(yo)
다쳐도 책임 안 져 그러니 그만둬
자라라 나무 목
말해라 입 구
타올라라 불 화
막아라 손 수
솟아라 흙 토
용감한 손오공, 마음씨 착한 한삼장
손오공과 한삼장은 최강의 호적수이지(yo)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네
용감한 손오공, 마음씨 착한 한삼장
손오공과 한삼장은 싸우다가 정이 들었지(yo)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네
용감한 손오공, 마음씨 착한 한삼장
손오공과 한삼장은 서로를 사랑한다지(yo)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네
용감한 손오공, 마음씨 착한 한삼장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지(yo)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네
자라라 나무 목
말해라 입 구
타올라라 불 화
막아라 손 수
솟아라 흙 토
갑자기 어둠이 깔리면서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내려친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불안해한다. 한삼장과 손오공이 싸움을 멈추는데 그 앞으로 사오정과 저팔계가 다시 무대로 등장하며 뛰어오다 팔계가 오공에게 부딪쳐 넘어진다.
손오공 : 어이쿠. 저런 다치지 않았어?
저팔계 : (손오공이 부축해서 일어나며) 아고고. 괜찮은 것 같기도 한데...어? 손오공 아니야? 안녕. 난 저팔계라고 해. 만나서 반가워.
손오공 : 으응. 저팔계라고. 나도 반가워.
저팔계 : 근데 왜 이렇게 어둡지? 벌써 밤이 되었나? 경기는 끝난 거야? 귀신한테 쫓기느라 보질 못해서...
사오정 : (뒤따라온 사오정이 저팔계를 잡으며) 뭐, 또 날더러 귀신이라고? 이걸 그냥... (때리려다 그제서야 오공을 보고 동작을 멈추며) 어? 오공씨...
저팔계 : 어? 잠깐! 휴대폰이 마구 진동하고 있어.(휴대폰을 꺼내 이리저리 눌러보더니) 그렇다면 이곳에 귀신이 나타났다는 건데...
사오정 : 또 나를 놀리고 있어. 정말. 에잇. 나쁜 놈아. 에잇. 에잇. 에잇.
저팔계 : 아야야... 아깐 농담이고 이번엔 진짜란 말야. 귀신이 나타났다고.
손오공 : 귀신이라고? 그게 정말이야?
한삼장 : 귀신이 나타났다고?
그러자 짐승 우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커다란 발자국 소리가 난다. 모두들 동작을 멈추고 긴장한다. 그때 경기장 안으로 대마왕이 뛰어든다. 공포에 질린 이들 무릎을 하나둘씩 꿇는다. 대마왕이 이들에게 하나씩 마법조각 목걸이를 걸어주자 이들은 모두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괴물로 변신한다.
노래 : 대마왕 행진곡 및 혼돈
(by 견그루, 사오정, 저팔계, 한삼장, 손오공, 군중)
대마왕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내 말을 안들으면 죽음뿐이다
살고 싶은 자 무릎 꿇어라
대마왕님 대마왕님 자비를 베푸소서
죽을 죄를 지었으니 살려 주세요
우리는 대마왕님 종입니다요
대마왕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내 말을 안들으면 죽음뿐이다
살고 싶은 자 무릎 꿇어라
오공/삼장/오정/팔계만이 대마왕의 마법에 걸려들지 않고 저항한다.
멈춰라 괴물아 삼장 나간다
약한 사람 괴롭히니 혼내주리라
징그러운 네 입을 막을 것이다
대마왕 : 호. 나의 세뇌 마법이 통하지 않는 걸 보니 보통 놈들이 아니란 건 알았다면 네가 삼장이로구나.
오호라! 내가 찾던 삼장이구나
애송이 까불지 말고 항복하거라
너를 잡아 천하무적 될 것이다
한삼장과 대마왕의 대결.
한삼장이 가슴을 움켜쥐며 수세에 몰린다.
손오공 : 얍. 여기 오공도 있다.
저팔계/사오정 : 잘 한다. 우리 편 이겨라.
용감한 손오공, 마음씨 착한 한삼장
우리가 힘을 합치면 못할 일이 없지(yo)
하늘도 놀라고 땅도 놀라네
둘이 합심해 싸우자 대마왕이 수세에 몰린다.
대마왕의 종들이여 때가 왔도다
충실한 종들이여 공격을 해라
애송이들 본 때를 보여주어라
괴물이 된 군중들이 손오공과 한삼장을 공격한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진정하세요
요괴의 꾀임에 속지 마세요
우리 함께 요괴와 싸워야지요
주인님 명령에 따르렵니다
애송이들 쓴 맛을 보여주리라
주인님을 거역하면 죽음뿐이다
여러분들 여러분들 진정하세요
우리는 여러분과 싸울 수 없죠
제발 제발 정신을 차려주세요
주인님 명령에 복종하여라
주인님께 충성하면 살 것이로되
주인님을 거역하니 죽음뿐이다
공격할 수가 없어 그들이 수세에 몰릴 때 대마왕이 사오정을 인질로 잡는다.
저팔계 : 어. 사오정.
사오정 : 엉엉. 살려주세요.
대마왕 : 흐흐흐. 모두 항복하지 않으면 이 애를 가만 두지 않겠다.
손오공, 한삼장 : 이 나쁜 놈.
저팔계 : 이 나쁜 요괴야. 그 손 놓지 못해.
저팔계가 갑자기 흥분하면서 달려들지만 대마왕 손짓에 단번에 쓰러진다.
저팔계 : 어이쿠.
사오정 : 어. 팔계야.
한삼장도 수비만 하다 계속 몰리다 뭇매를 맞아 쓰러진다.
손오공 : 삼장아, 괜찮아?
한삼장 : 상대가 너무 강해.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거 같아.
손오공 : 삼장. 이 목걸이를 받아.
한삼장 : 목걸이?
손오공 : 이 목걸이를 하면 정신이 맑아져.
한삼장 : (오공이 목걸이를 걸어준 후) 정말 정신이 맑아지는 것같아. 오공, 고마워. 힘내.
손오공 : 걱정마. 목걸이가 없으면 대신 난 힘이 더욱 강해진다고. 볼래. 으으으아아아.
손오공 역시 두얼굴의 사나이 비슷하게 되어 짐승처럼 표효한다.
대마왕 : 흐흐흐. 감히 내 앞에서 수작을 부리다니... 가만두지 않겠다.
대마왕과 손오공이 대결을 벌이지만 결국 오공과 쓰러지고 만다.
대마왕 : 충실한 종들이여 수고했도다. 한삼장과 사오정을 데려오너라
대마왕의 종이 된 두 부하가 의식을 잃은 한삼장과 사오정을 업고 대마왕 뒤에 선다.
대마왕 : 손오공과 저팔계. 이 놈들은 마법으로도 소용이 없는 놈들이니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뜨려 영원히 나오지 못하게 해야겠군. 열려라! 지옥의 구렁텅이여!
대마왕이 주문을 외자 지옥의 구렁텅이가 나타나고 대마왕이 손오공과 저팔계를 차례로 구렁텅이에 내던진다.
대마왕 : 크하하하하하. 애들아. 나의 궁전으로 돌아가자.
부하들 : 네.
## 3. 마야의 세계
(나레이션)
마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마야는 꿈의 세상이기도 하고, 현실의 세상이기도 합니다.
여러분이 생각하는 대로,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는 세상입니다.
마야는 엄마의 품처럼 따뜻한 세상입니다.
마야는 모두가 행복하고 서로를 배려할 줄 아는 세상입니다.
마야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주위는 신비한 흐름으로 가득하다. 손오공과 저팔계가 쓰러져 있다. 마야할미가 나타나 이들 곁에 선다.
마야 : 마야 : 아이들을 지옥의 구렁텅이로 빠지는 것을 구해 이곳으로 데려오느라 모든 힘을 쏟았다. 마법천자문 비석이 파괴가 되어 요괴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구나. 이제 남은 희망은 이 아이들 뿐.
노래 : 마야
(by 마야)
너는 날 잘 모르지만
난 널 너무나 잘 알아
오랜 시간이 흘러도
너의 슬픔과 괴로움을
너의 사랑과 용기를
난 네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네게 해줄 수 있는데
네가 슬프고 괴로울 때도
용기를 잃어선 안 돼
난 네 옆에 있어
마야 : 일어나. 요놈들아.
손오공, 저팔계 : 으으음.
마야 : 깨어 있는 것 다 알아. 어여 빨랑 못 일어나.
손오공, 저팔계 : 으으음.
마야 : 이놈들이 맞아야 정신을 차릴려나.
마야가 오공과 팔계를 지팡이로 가볍게 때리자 손오공, 저팔계 일어난다.
손오공 : 아이 참. 너무 편안했는데. 깨서 아쉽다.
저팔계 : 어. 그런데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손오공 : 나도 잘 모르겠는 걸.
마야 : 호호. 그놈들. 하여간 꼬마 놈들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니까.
저팔계, 마야 할미를 보더니 깜짝 놀란다.
저팔계 : 우와. 귀신이다. 귀신.
손오공 : 정신 차려. 귀신이 어디 있다고.
저팔계 : (가린 손을 살짝 펴며 보다가) 귀신이잖아.
저팔계 : 난 귀신이 제일 무섭단 말이야. 내가 얼마나 귀신을 무서워 하냐면 언젠가 잠을 자고 있었거든. 그런데 누가 자꾸 날 쳐다보는 느낌이 들었어. 그래서 슬쩍 눈을 떴는데.....
손오공 : 음...
저팔계 : 천장에서 누가 날 똑바로 쳐다보고 있더라고. 입가에 피를 흘리면서 말이야. 나는 깜짝 놀라서 으아아아~ 소리를 지르고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갔어. 귀신이 사라질 때까지 이불 바깥으로 나가지 않으려 했어. 그런데...
손오공 : 그런데...
저팔계 : 아무 소리도 안 나는 거야. 그래서 귀신이 갔을까 안 갔을까 하다가 이불 바깥으로 얼굴을 슬쩍 내미는데 코앞에 으악~
손오공 : 으악~
저팔계 : 헤헤. 아무도 없더라. 있는 줄 알았는데... 깨어보니 꿈이었어.
손오공 : 별 게 아니잖아.
저팔계 : 헤헤. 하여간 난 귀신이 제일 무섭단 말이야. 그래서 이 휴대폰을 마련한 거야. 이 휴대폰만 있으면 귀신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거든.
손오공 : 하여간 귀신이 어디 있다고 그래.
저팔계 : 귀신이 있대두...
손오공 : 없대두...
저팔계 : 없다고? (할미에게 가더니) 귀신 맞지? (할미가 아무 말하지 않자) 귀신 아냐?
아닌가? (갸웃거리다 손오공에게로 돌리며) 없으면 나야 안심이지.
그러다가 마야 할미가 팔계 어깨를 툭툭 치자 할미에게로 돌아본다.
할미 : 으흐흐흐흐!
저팔계 : 으악!
놀라 기절한다.
마야 : 호호호. 고 녀석 놀리니까 재미있네.
손오공 : 쳇. 모처럼 푹 자고 있는데 깨워놓고 장난이나 치고. 팔계야, 일어나. 정신 차려.
저팔계: 으음.
마야 : 기절하지 않은 것 다 안다, 꼬마녀석아. 안 일어나면 또 맞는다.
팔계, 벌떡 일어난다.
저팔계 : 헤헤. 기절한 척 했지롱.
손오공: 할머니는 누군데 저희를 자꾸 때리려고 하세요.
저팔계 : 그래요. 그래요. 우리가 뭐 동네북인 줄 알아요?
마야 : 호호. 이 할미는 애들 때리는 재미로 사는 할미거든.
저팔계 : 이상한 할머니네.
손오공 : 그러고 보니 할머니 어딘지 낯이 익다. 우리 어디서 만난 적이 있나?
마야 : 호호. 그래. 인연이 있으면 만나는 법이지.
손오공 : 할머니, 할머니. 아까 누워 있으면서 얼핏 들었던 것 같은데... 할머니. 마야가 뭐예요?
마야 : 내가 마야야. 너도 마야고.
저팔계 : 아까는 마야라면서요. 마야랬다가 마야랬다가... 우와 머리를 썼더니 배고프다.
손오공 : 그럼 여기는 도대체 어딘가요?
마야 : 여긴 저기 보이지 않니?
풍수동이란 이름이 쓰인 문이 있다.
손오공/저팔계 : 풍수동?
마야 : 대마왕과 맞싸우려면 풍수동에 들어가 무술을 연마해야 한다.
저팔계 : 으악. 대마왕... 무서워.
손오공 : 대마왕이 누구죠? 대체 삼장을 왜 잡아갔어요? 여기 있어요?
손오공과 저팔계에게 한 대씩 지팡이로 가볍게 때린다.
마야 : 시끄러워. 이 녀석들아. 한꺼번에 질문하면 할미가 정신이 없잖아. 할미 말을 잘 들어. 대마왕이 누구냐면... 아주 아주 나쁜 놈이다.
저팔계 : 그리구요?
마야 : 끝이다.
손오공 : 잠깐만요. 대마왕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줘야 하잖아요.
마야 : 너희가 대마왕을 만나기 전에 마법을 연마해야 한다. 그럴려면 풍수동에 들어가야 한다. 알겠느냐. 이상 끝. 아참! 한 가지 더! 팔계야. 이걸 받아라.
저팔계 : 이게 뭐예요?
마야 : 네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나타나면 이 마술피리를 반드시 전해줘라. 알았느냐. 아무한테나 주면 안 돼. 알았지? 그리고 그 사람이 피리를 불게 하렴. 그럼 난 이만~.
저팔계 : 어... 할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어. 할머니... 말씀을 더 해주시고 가야하잖아요. 할머니... 할머니...
손오공 : 할머니가 발걸음도 빠르네. 놓쳤어.
저팔계 : 아이. 진짜. 더 물어보려고 했는데... 마술피리.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해주라고?
손오공 : 팔계. 그건 이따 생각하고 어쨌듯 우리에게 선택은 없는 듯하다. 들어가자.
손오공. 어. 잠깐 여기에 글자가 써있어.
손오공 : 뭐라고 적혀 있는데?
저팔계 : 용기 있는 자만 들어 오라.
손오공 : 뭘 망설여. 용기 빼면 시체인 이 손오공. 어디든 갈 것이다. 간다!
손오공, 먼저 들어간다.
저팔계 : 어. 손오공... 글자가 더 있는데... 도깨비의 지시에 따르거나 도깨비의 무공을 따라해야 한다. 어떡하지? 잠깐, 여길 통과하면 마법을 익힐 수 있다했지? 그럼 나도 진짜 도사가 된다는 건데... 에라. 모르겠다.
저팔계도 따라 들어간다.
노래 : 이 세상에 빛이 되거라
(by 마야)
인연이 있어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동에 온 아이야
대마왕이 지배하는 어둠의 세상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십류로
대마왕과 맞서길
사람들이 아귀가 되고
갈수록 대마왕이 힘을 얻는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평화를 되찾기 위하여
아이야, 이 세상의 빛이 되거라
우리 아이, 귀한 아이
이 세상에 빛이 되거라
손오공과 저팔계가 풍수동에서 두리번거리는데 가슴에 弗亞弗亞(불아불아)를 단 도깨비들이 나타난다. 도깨비들이 나타나 위협적인 공격을 하며 노래를 한다.
노래 : 도깨비
(by 도깨비)
우리는 도깨비 산도깨비
말썽장이 도깨비 도깨비라네
문제를 맞추면 상을 주고
못 맞추면 벌을 내리리라
저팔계 : 아이고. 저팔계 살려.
손오공 : 으아앗.
도깨비 방망이 공격에 도망을 다니는 저팔계와 손오공.
저팔계 : 한자를 맞추어야 해. 손오공. 어떻게 해.
손오공 : 아이고.
저팔계 : 아고.
저팔계 : 아? 불?
손오공 : 소용없잖아.
저팔계 : 네 명이니까 아불아불?
손오공 : 아아불불.
저팔계 : 불불아아.
손오공 : 불아불아?
공격이 멈추면서 도깨비들이 무공을 한다.
손오공: 어? 도깨비들이 이상해졌네.
저팔계 : 참! 따라해야만 통과할 수 있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손오공 : 까짓 거 따라하면 되지.
노래 : 불아불아
(by 도깨비)
하나는 정신, 생명, 태양, 하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니 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아
사랑으로 불 신이 된 듯 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왼편 오른편
힘을 모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일류 불아부아
손오공과 저팔계가 열심히 따라한다. 손오공은 단번에 따라 하는 듯싶지만 저팔계는 서투르기만 하다.
하나는 정신, 생명, 태양, 하늘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니 불
땅에서 하늘로 올라가니 아
사랑으로 불 신이 된 듯 아
하늘에서 땅으로
땅에서 하늘로
왼쪽 오른쪽
힘을 모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일류 불아부아
손오공 : 도깨비들이 사라졌다.
저팔계 : 음. 정리해 보자. 대마왕이 나타나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대마왕을 물리쳐야 세상이 평화로와진다. 대마왕을 물리칠 수 있으려면 무공을 익혀야 한다. 맞나?
손오공 : 뭘. 그렇게 어렵게 생각해? 이제 끝인 거야?
저팔계 : 어...휴... 앞으로 아홉 개나 더 맞추어야 한다는데...
손오공 : 헤헤. 그럼 또 문을 두들기면 되겠네. 시간이 없잖아.
손오공이 문을 두들기자 문이 열리며 이번에는 詩想詩想(시상시상)을 한자씩 가슴에 단 새로운 도깨비들이 나타난다.
노래 : 시상시상
(by 도깨비)
앞으로
뒤로
둘은 땅
앞으로
뒤로
둘은 입다
사람은 마음
몸은 태극
우리는 우주
하느님을 따르자
어른을 곤경하자
저팔계 : 시상시상?
앞으로
뒤로
둘은 땅
앞으로
뒤로
둘은 입다
사람은 마음
몸은 태극
우리는 우주
하느님을 따르자
어른을 곤경하자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일류 시상시상
역시 손오공이 따라하고, 저팔계는 엉성하게 따라한다. 도깨비들이 말을 마치고 사라진다.
## 4. 대마왕 궁전
대마왕과 부하들. 그리고 한 곳에 한삼장과 사오정이 묶여 있다.
대마왕이 운기조식을 끝내면서 크게 웃는다.
대마왕 : 하하하. 갈수록 힘이 솟구쳐 오는구나.
사람들이 제 욕심을 챙기고 서로 싸울수록 점점 더 내 힘이 강해진다. 더 싸워라. 욕심을 내라.
노래 : 대마왕 행진곡
(by 대마왕과 부하들)
대마왕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내 말을 안 들으면 죽음뿐이다
갑자기 사오정이 대마왕으로 저절로 끌려가서 멱살을 잡힌다.
사오정 : 놔라. 놔라. 으으읔. 숨이 막혀 죽을 것같아. 살려줘.
한삼장 : 오정을 당장 풀어주지 못하느냐.
대마왕 : 오정을 살리고 싶으냐. 흐흐흐. 그렇다면 나와 결혼하겠느냐.
한삼장 : 그런 터무니없는...
대마왕 : 그렇다면 할 수 없지.
삼장은 하늘나라 선녀였었다
선녀와 결혼하면 하늘도 날 어쩌지 못해
대마왕을 막을 자 아무도 없어
대마왕이 사오정의 목을 더 조른다.
사오정 : 살...살려줘. 살려줘.
한삼장 : 잠깐.
대마왕 : 결혼하겠다고?
한삼장 : 그래.
이제 세상은 대마왕의 것
서로 의심해라
서로 증오해라
서로 싸워라
대마왕 힘이 강해지도록
대마왕, 사오정을 내던지면서 한삼장 곁으로 간다. 한삼장에게서 목걸이를 빼앗는다.
한삼장 : 안 돼.
대마왕 : 뭐가 안 돼. 난 이따위 약속을 전혀 믿지 않지.
한삼장 : 나쁜 놈.
대마왕 : 크하하하. 나는 이제 천하무적이 되는 거야.
대마왕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내 말을 안들으면 죽음뿐이다
나를 막을 자 누가 있더냐
대마왕 : 나는 천하무적이야.
## 5. 풍수동
노래 : 道理道理(도리도리)
(by 손오공/저팔계)
셋은 사람
셋은 남자
셋은 서다
셋은 솟다
머리를 돌려
좌우로 돌려
천지만물 무궁무진
셋은 사람
셋은 남자
셋은 서다
셋은 솟다
머리를 돌려
좌우로 돌려
천지만물 무궁무진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삼류 도리도리
손오공과 저팔계가 물동이를 지고 힘겹게 걸어가며 노래를 부르다가 물동이를 내려놓는다.
저팔계 : 후아. 후아. 너무 힘들어. 백번째다. 끝났다.
손오공 : 힘내. 다음 단계로 빨리 가야 하잖아.
저팔계 : 손오공. 잠깐...잠깐... 이번엔 또 뭐야.
도깨비들이 근력을 기르기 위한 아령, 역도 등을 하며 노래를 부르자 손오공/저팔계도 따라한다.
노래 : 持闇持闇(지암지암)
(by 손오공/저팔계/도깨비)
넷은 여자
두 손을 벌려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알 수가 없네
금방은 몰라
두고두고 헤아려 깨달아
넷은 여자
두 손을 벌려
손가락을 폈다 쥐었다
알 수가 없네
금방은 몰라
두고두고 헤아려 깨달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사류 지암지암
손오공 : 힘들더라도 참고 이겨내야 해.
손오공, 저팔계 땀을 뻘뻘 흘리며 무술 연마에 힘쓴다.
## 6. 대마왕 궁전
한삼장 : 오공... 작년 마법대회가 끝나고 얼마 지난 뒤였어. 비가 엄청 쏟아지는 밤이었지. 길을 걷고 있는데 어디선가 구호 소리가 들려왔던 거야. 이 밤에 무슨 일이람. 궁금해서 소리가 나는 쪽으로 갔어. 거기에 오공이 있었어.
손오공이 나타난다. 비가 내려 손오공을 흠뻑 적신다. 정지해있던 손오공이 갑자기 구호를 지르면서 발차기, 주먹치기, 덤블링 등을 한다.
너무나 열심히 하고 있었어. 비 속에서도 땀 흘리는 모습이 참 좋았는데... 내가 몰래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말이야. 그때 손오공이 혼자 중얼거렸어.
손오공 : 한삼장. 다음 대회에서는 반드시 너를 이기고 말겠어. 알겠어. 한삼장.
나는 깜짝 놀랐지. 나를 발견한 줄 알고 말이야. 하지만 혼자 하는 말이었어. 그제서야 나는 혼자 속으로 훗~하고 웃었지. 그런데 다음 말을 듣고서 나는 기절하는 줄 알았지.
손오공 : 내가 이기면 너한테 고백을 할 거야. 삼장아, 나랑 사귈래?
오공이 저런 생각을 할 줄 누가 알았겠어.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몰랐지. 오공이 나를 좋아하나? 그럼 나는? 하면서 머리가 혼란스러웠어. 몰래 빠져나오려는데 오공의 목소리가 들렸어.
손오공 : 오공이는 어른이 되면 삼장과 결혼할 거다. 결혼할 거다.
처음에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혼자 있을 때마다 오공이 생각이 났어. 자꾸만 생각이 났어. 오공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내 생각하고 있을까.
노래 : 그리움
(by 한삼장)
숨조차 쉬기 어려워
하늘만 보네
저 하늘은 여전한데
내 마음은 갈수록 어두워지는 걸까
오공은 괜찮은 걸까
오공이 그리워지네
오공이 내게 했던 뽀뽀가 싫지 않았는데
오공이 그리워지네
오공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내 생각하고 있을까
오공의 목소리가 들려
오공의 목소리가 들려
삼장아. 어른이 되면 너하고 결혼할 거다.
사오정 : 삼장...
한삼장 : ...
사오정 : 삼장... 내 말 들려.
한삼장 : 으응. 미안. 혼자 생각하느라고. 왜?
사오정 : (점차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아니. 저... 그게, 있잖아. 음...
한삼장 : 차근차근히 말해봐.
사오정 : 그러니까... 그러니까... 아니야. 되었어.
한삼장 : 싱겁기는.
사오정 : 그게... 미안...미안해. 나 때문에... 이렇게 되어서...
한삼장 : 괜찮아. 네 탓이 아니잖아.
사오정 : 그래도... 그래도... 삼장, 내가 밉지?
한삼장 : 아니라니까.
사오정 : ......
노래 : 강해지고 싶어
(by 사오정)
이젠 나도 내가 싫어져
삼장에게 힘내라 말하고 싶지만
말할 수 없어
내가 엄청 밉겠지
나도 내가 미워죽겠어
나도 힘이 있었으면
나도 대마왕처럼 힘이 있었으면
이젠 나도 뭐든 할 테야
대마왕에게 무릎 꿇고 충성을 해서라도
강해지고 싶어
내가 엄청 밉겠지
나도 내가 미워죽겠어
나도 힘이 있었으면
나도 대마왕처럼 힘이 있었으면
나도 강해지고 싶어
## 7. 풍수동
노래 : 坤地坤地(곤지곤지)
(by 도깨비와 저팔계)
다섯은 머무름
다섯은 집 만들기
오른 손가락을 들고
왼손 손바닥을 눌러
오정아 기다려라
팔계가 간다
서투르고 엉성해도
끈기하면 팔계가 최고
다섯은 머무름
다섯은 집 만들기
이치를 깨달으면
천지조화 이루어지네
오정아 기다려라
팔계가 간다
힘을 내자 힘을 내자
무술소녀 팔계가 최고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오류 곤지곤지
노래 : 西摩西摩(섬마섬마)
(by 도깨비와 손오공)
여섯은 서라
삼장 삼장 삼장
오공 오공 오공
오공은 삼장을 너무 좋아해
삼장과 오공이 뽀뽀를 했어
삼장도 오공을 좋아하지요
삼장이 오공에게 목걸이를 주었어
여섯은 서라
삼장 삼장 삼장
오공 오공 오공
오공은 삼장을 너무 좋아해
삼장도 오공을 좋아하지요
몸이 서야 머리도 서고
머리가 서면 어른이라네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육류 섬마섬마
저팔계 : 오공.
손오공 : 왜.
저팔계 : 힘든데 우리 잠깐 쉬었다 하자.
손오공 : 좋지.
저팔계 : 오공. 내가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손오공 : 좋지.
저팔계 : 우리 친구지?
손오공 : 친구지.
저팔계 : 그럼 우리 게임하자.
손오공 : 게임? 뭔데.
저팔계 : 아이. 따지지 말고 할 거야, 말 거야.
손오공 : 뭔지 알아야...
저팔계 : 우린 친구잖아. 안 그래?
손오공 : 알았어. 하자.
저팔계 : 그럴 줄 알았어. 우리 진실 게임하는 거야.
손오공 : 진실게임.
저팔계 : 그래. 서로 묻고 대답하는 건데 진실만을 이야기해야 하는 거야.
손오공 : 히... 나야 뭐 숨길 게 없으니까. 좋아.
저팔계 : 시원시원해서 좋다. 내가 먼저 물어볼게.
손오공 : 응.
저팔계 : 너, 나 좋아하냐?
손오공 : 히히히. 너, 왜 그래. 쑥스럽게...
저팔계 : 진실게임이라니까.
손오공 : 어. 알았어. 너도 좋지만, 더 좋아하는 사람 있는데...
저팔계 : 나 괜찮으니까 확실하게 말해 봐. 삼장 좋아하지?
손오공 : 어? 그래. 히히히. 말해놓고 나니까 부끄럽다.
저팔계 : 그럴 줄 알았다.
손오공 : 그럼 너는 나...
저팔계 : 좋아하냐고? 땡~. 안 좋아해. 너처럼 씩씩한 애는 별로거든. 나는 얌전한 아이가 좋아.
손오공 : 누구?
저팔계 : 이제 내가 물어볼 차례잖아. 두 번 물어보기 없기.
손오공 : 알았어.
저팔계 : 삼장이 어디가 좋아?
손오공 : 어. 그렇게 갑자기 물어보면... 말하기가...
저팔계 : 진실게임이라니까.
손오공 : 좋아. 친구니까 너한테만 특별히 말해줄게. 난 공부는 별로지만 운동은 내가 최고인 줄 알았지. 마법대회에 나가면 당연히 내가 우승하는 줄 알았어. 그런데 막상 나가보니까 나보다 더 잘 하는 친구가 있었던 거야.
저팔계 : 삼장이 그 친구란 말이지?
손오공 : 그래. 삼장이 그랬어. 삼장을 보고 나니까 갑자기 심장이 두근두근거리고 그랬거든. 자꾸 삼장 얼굴보고 싶고. 삼장이랑 놀고 싶고.
저팔계 : 하하. 그래서 마법대회에서 뽀뽀를 했구나.
손오공 : 히. 그렇지. 이왕 말한 건데 다 말할게. 어디가서 절대 말하면 안 된다.
저팔계 : 그럼 그럼. 우리는 친구니까.
손오공 : 우리는 친구니까. 좋아. 삼장한테 내 마음을 전해주고 싶었어. 어느 날 저녁이었어. 비가 무진장 내리고 있었는데 삼장이 그날도 나와서 운동하는 거야. 멋있잖아. 나도 운동을 열심히 하기로 했지. 비가 오는데도 말이야. 그런데 삼장이 내가 운동하는 데로 몰래 오지 않겠어. 보란 듯이 나는 더 열심히 운동을 했어. 그런데 삼장이 가는 거야. 그래서 냅다 소리를 질렀지. 삼장아, 어른이 되면 너랑 결혼할 거다.
저팔계 : 하하. 웃겨. 쪼끄만 게 벌써부터 결혼 생각이라니...
손오공 : 하지만 진심인 걸.
저팔계 : 아무튼 재밌다.
손오공 : 너도 이야기를 해봐.
저팔계 : 헤헤. 아! 배고픈 걸?
손오공 : 이런. 나만 이야기를 시켜놓고...
저팔계 : 헤헤... 이런 걸 보면 오공이는 단순하다니까.
손오공 : 좋아. 그럼 다시 시작이다.
저팔계 : 배고프다니까.
손오공 : 헤헤. 날 놀린 벌이야.
손오공 : 간다~
저팔계 : 에효~
노래 : 業非業非(업비업비)와 亞合亞合(아함아함)
(by 도깨비 및 손오공/저팔계)
무서워 무서워
하느님 말 안 들으면 벌을 받지
무서워 무서워
부모님 말 무시하면 벌을 받지
부모님 말 그른 것 없어
부모님 말 안 들으면 벌을 받지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칠류 업비업비
손바닥으로 입을 막고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소리를 내봐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네가 내 안으로 들어가서
내가 너에게로 다가가서
소리를 내봐
아아아아아아
아아아아아아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팔류 아함아함
## 8. 대마왕 궁전
사오정 : 대마왕님께 충성을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대마왕 : 하하하. 내게 충성한다?
사오정 : 네. 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특이한 병이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그랬어요. 다른 아이들처럼 똑같이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아이들은 제가 이상하다고 놀릴 뿐이었어요. 저는 외톨이가 되었지요. 아무도 저를 생각해주지 않았어요. 모두 외면했어요. 저는 버림받았어요. 그 아이들이 미워요. 세상이 미워요. 모두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요.
대마왕 : 믿음이니 사랑이니 다 거짓이지. 힘이 있는 자만이 최고지. 좋다. 널 받아들이마.
사오정 : 부하로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대마왕님.
대마왕 : 부하가 된 기념으로 네게 선물을 주어야겠다. 자, 목걸이.
사오정 : 이건... 네.
대마왕이 사오정 가까이 가서 목걸이를 거는 척하더니 갑자기 사오정의 목을 조른다.
대마왕 : 네 이놈. 무슨 속셈으로 나를 속이려드는 게냐. 어서 말하지 못해?
사오정 : 켁켁. 대마왕님. 믿어주십시오.
대마왕 : 내가 널 어찌 믿을 수 있느냐.
사오정 : 대마왕님은 이미 저의 마음도 다 들여다 볼 수 있을 만큼 위대한 분이 아닌가요.
만일 제가 조금이라도 거짓이 있다면 당장 혀를 깨물고 자결하겠어요.
대마왕 : 음... 하하하.
대마왕, 목조르기를 풀면서 사오정을 토닥인다.
대마왕 : 마지막으로 시험을 해본 것이다. 하하하. 좋아. 내 너를 강하게 만들어주마.
사오정 : 감사합니다. 대마왕님. 무슨 일이든 시켜만 주십시오.
대마왕 : 내일 모레가 내 생일이다. 내 생일에는 세상의 모든 악당들을 다 초대하여 삼장과 결혼식을 할 것이다.
사오정 : 네.
대마왕 : 삼장은 본래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다. 내가 삼장과 결혼을 하게 되면 이제 나의 힘은 하늘도 막을 수 없게 된다. 으하하하.
사오정 : 그렇습니다. 대마왕님은 천하무적이십니다.
대마왕 : 그러나...... 한가지 걱정거리가 남아 있다.
사오정 : 네?
대마왕 : 손오공이다. 그놈이 아직 살아 있다. 그 놈의 기가 나에게까지 감지될 만큼 그놈이 강해지고 있다. 그놈을 없애야만 한다.
사오정 : 제가 할 일이라는 것이...
대마왕 : 그렇다. 너라면 손오공이 의심하지 않을 터. 손오공에게 가라. 그놈에게 목걸이를 걸어주는 척하면서 이 칼로 오공을 찔러라. 알겠느냐.
사오정 : 알겠습니다. 반드시 해낼 것입니다.
대마왕 : 만일 실패한다면 독을 써서라도 성공시켜라. 내 아까 너를 목 조르면서 네게 힘을 주었다. 동시에 마법도 걸었다. 내 뜻을 거역하거나 실수를 하는 날에는 너는 고통 속에서 내가 뿌린 독에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실패는 용서하지 않겠다. 알겠느냐.
사오정 : 네. 명심하겠습니다.
대마왕 : 가거라!
## 9. 풍수동
노래 : 作作弓作作弓(짝짝궁 짝짝궁) 羅呵備 活活議(질라아비 훨훨의)
(by 손오공, 저팔계 및 도깨비)
아홉은 울타리
아홉은 복덩어리
엄마 앞에서 짝짜꿍
아빠 앞에서 짝짜꿍
손바닥을 마주치자
천지좌우 부딪치자
손뼉을 치며 짝짜꿍
재미있게 춤추자 짝짜꿍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구류 짝짝꿍짝짝꿍
나팔 불며 나아가자
앞으로 가자
모두 모두 어깨동무
앞으로 가자
뿜빠빠 뿜빠빠 뿜뿜빠빠 뿜빠빠
우리 함께 나아가자
즐겁게 가자
어려움 헤치고서
즐겁게 가자
뿜빠빠 뿜빠빠 뿜뿜빠빠 뿜빠빠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십류 질라하비 훨훨의
손오공 : 해냈다.
저팔계 : 히히. 나도 부족하지만 육할 가량을 성취했다.
손오공 : 팔계.
저팔계 : 오공. 우리는 친구.
그때 사오정이 등장한다.
저팔계 : 어? 오정이 아니야?
사오정 : 팔계.
저팔계 : (엉엉 울면서 사오정을 껴안으며) 살아 있었구나. 살아주어서 고마워.
사오정 : 팔계야. 왜 울어.
저팔계 : 왜긴 좋아서 울지.
사오정 : 좋아서 운다고? 뭐가 좋아?
손오공 : 하하. 네가 와서 그렇지. 팔계가 너를 얼마나 보고 싶어했는데.
사오정 : 나를 보고 싶어했다고, 팔계가? 거짓말이지?
저팔계 : 그럼 그럼. 꿈에서까지 네 이쁜 얼굴이 보였어.
사오정 : 내가... 내가 이쁘다고?
손오공 : 팔계야 그 정도로 해. 근데 어떻게 된 거야? 대마왕한테 잡혀갔잖아.
사오정 : 대마왕에게서 간신히 도망쳤어.
손오공 : 이 목걸이는?
사오정 : 미안해. 내 힘으로는 삼장까지는... 혼자 도망쳐서... 어. 삼장이 이걸 네게 주랬어. 자긴 괜찮다고. 자 받아. 아. 내가 직접 걸어줄께.
손오공 : 고마워.
사오정이 손오공에게 목걸이를 걸어주고 살피는 척하면서 준비한 칼을 꺼내 손오공을 찌르려하지만 고민을 한다.
사오정 : (혼잣말로) 나한테 이런 따뜻한 말을 전해준 사람들이 없었는데. 나를 보고 싶었다고. 내 얼굴이 이쁘다고. 아니야. 아니야. 내 얼굴은 흉측해. 나는 버림받았어. 누구도 나를 좋아하지 않아. 거짓말이야. 아니야. 아니야. 나를 위해 이토록 울어주는 친구들이 있는데... 아.. 어쩌면 좋지. 어쩌면 좋아. 아니야. 아니야. 이미 대마왕에게 충성을 했어. 실패하면 대마왕이 날 용서하지 않을 거야. 찔러야 해. 찌르고 말 거야.
저팔계 : 오정아.
사오정 : (찌르려다가 깜짝 놀라며 칼을 숨기고는) 어? 팔계? 왜.
저팔계 : 오공이 옆에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있으면... 내가 슬퍼지잖아.
사오정 : 어. 내가? 내가 그랬어?
손오공 : 하하. 이거 내가 괜한 오해를 받겠는 걸?
저팔계 : 쳇. 나 또 삐질려고 한다. 삐질래.
사오정 : (칼을 뒤로 떨어뜨리며 팔계에게 다가가 손을 잡으며) 아니야. 오해야, 오해.
저팔계 : (금새 표정이 달라지면서) 헤헤. 오해라고? 그럴 줄 알았지.
사오정 : 나도 팔계 생각 많이 했어.
저팔계 : 정말이지? 정말이지? 으아. 으아. 으아. 세상 사람들! 오정이가 날 생각했었대요. d야호! 야호!~ 오정아. 너도 이거 받아.
사오정 : 피리가 삼각으로 되어 있네. 이걸 왜?
저팔계 : 응. 풍수동에서 줏은 건데... 왠지 네게 어울린다고 여겨져서. 네게 피리를 주고 싶은 걸.
사오정 : 어? 그래. 고마워.
저팔계 : 네가 피리를 부는 걸 보고 싶거든. 피리를 불어줘.
사오정 : 지금 여기서? 나 못 부르는데...
저팔계 : 괜찮아. 입만 대면 되는 신비한 마술피리야...
손오공 : 그래. 그래. 나도 듣고 싶은 걸.
사오정 : 그러면...
사오정, 피리를 분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연주곡 버전)
손오공: 와! 대단한 걸.
사오정 : 어? 나도 몰라. 알던 곡을 부르려 했는데 갑자기 나도 모르는 이 곡을 불게 되었어.
저팔계 : 곡을 지금 만들어서 불렀다는 거 아냐? 천재다, 천재.
사오정 : 팔계도, 참. 아, 이거 먹어. 무공 연마하느라 목이 마르지. 내가 맛있는 과일을 가져왔어. 오공도 먹어.
손오공, 저팔계 : 하하. 와, 잘 됐다. 근데 너 말도 안 더듬고 잘 하네? 씩씩해졌다. 고마워. 잘 먹을게. 와! 먹자.
사오정 : 잠...깐.
저팔계 : 왜?
사오정 : 어...아...니야.
저팔계 : 싱겁긴... 또 더듬네.
저팔계/손오공 과일을 먹으려는데...
사오정 : 먹..으...면 안...돼. 먹..으..면...죽..어.
저팔계/손오공 : 왜 그래, 오정아...
팔계와 오공은 이미 과일을 베어 물고 말하다가 갑자기 신음을 내면서 쓰러진다.
대마왕 : 흐흐흐. 계획대로 되었구나.
사오정 : 막으려 했는데... 막으려 했는데... 뒤늦게 말해버렸어. 피리소리를 들으니까 점차 마음이 편안해졌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행복했는데... 내 손으로 망친 거야. 내 손으로... 아... 이걸 어째.
대마왕 : 사오정. 내가 너를 믿은 줄 알았더냐.
사오정 : 대마왕... 으으으읔. 몸이... 독이 온 몸에 퍼지는구나. 대마왕... 너를 용서하지 않겠다. 나를 꼬셔서 내 친구들을 죽게 만들다니...
대마왕 : 니가 이럴 줄 알았다. 나를 속이려 들다니... 하지만 독을 먹인 건 너, 사오정이야. 내가 아니라고... 신난다. 신나. 친구들끼리 우정을 저버리고 배신을 하니 좋구나. 좋아. 그럴수록 내 힘은 더욱 커지지. 으하하하.
사오정 : (눈물을 흘리며) 그래, 내가 어리석었어. 어리석게 네 말에 혹해 친구들을 죽였어. 나는 죄인이야... 흐흐흑. 으읔.
1)사오정이 대마왕 마법에 걸린 듯 고통스러워하며 쓰러진다.
대마왕 : 이제 모두 정리가 되었구나. 흐흐흐. 결혼식만 남았군.
대마왕이 사라진다. 모두들 쓰러져 있다. 그런데 노래가 흐르면서 아이들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노래 : 천지인
(by 마야)
세상이 처음 열릴 때는
해(日)도 달(月)도 어둠 속에 숨어있다
별(星)들은 이리저리 꽝꽝 부딪친다
해도 달도 별도 모든 게 뒤죽박죽이네
하늘(天)은 동그라미
땅(地)은 네모
사람(人)은 세모
낮(日)과 밤(夜)도 따로 없었다
모두 쿨쿨 잠자고 있다
그때 마야 할미가 자고 일어나
두 팔을 쭉 펴고 기지개를 켰네
하늘은 동그라미
땅은 네모
사람은 세모
할미의 팔이 하늘보다 더 높았다
하늘이 우지직 하며 갈라졌다
해와 달이 얼굴을 내밀었습니다
별들도 사이좋게 함께 움직였네
하늘은 동그라미
땅은 네모
사람은 세모
## 10. 대마왕 궁전
화려한 대마왕 궁전. 각지에서 온 요괴들이 와서 웅성웅성하며 도열해 있다.
대마왕 부하 : 대마왕님 듭시오!
대마왕이 거드름을 피면서 등장한다. 그러자 모두들 고개를 숙이며 무릎을 꿇는다.
노래 : 대마왕 행진곡
(by 합창)
대마왕이 나가신다 길을 비켜라
내 말을 안들으면 죽음뿐이다
살고 싶거든 무릎 꿇어라
대마왕이 대마왕 자리에 앉는다. 그제서야 모두들 일어난다.
대마왕 부하 : 신부 듭시오!
한삼장이 슬픈 표정으로 등장한다.
노래 : 그리움
(by 한삼장)
숨조차 쉬기 어려워
하늘만 보네
저 하늘은 여전한데
내 마음은 갈수록 어두워지는 걸까
오공은...
대마왕 : (노래를 중지시키며 한삼장을 자신의 옆 자리 좌석에 앉힌 뒤) 자자. 그만 생략하고. 다음 순서로 넘어가지.
대마왕 부하 : 다음은 대마왕님 생신 및 결혼식을 축하하러온 분들의 축원이 있겠습니다.
대마왕 : 흐흐. 그래야지. 싸구려 선물, 시시한 선물이나 아예 선물도 안 가져온 놈들은 가만 두지 않을 것이다.
혼세마왕 : 대마왕님. 축원드리옵니다. 저는 혼세마왕입니다. 여기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앉아서 천리 바깥을 볼 수 있는 천리옥입니다.
대마왕 : 좋아. 좋아. 마음에 든다. 다음.
혼돈마왕 : 대마왕님. 만수무강하옵소서. 저는 혼돈마왕입니다. 여기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호루라기입니다. 호루라기를 불면 고통받으면서 죽는다 하옵니다.
대마왕 : 흐흐흐. 그래? 좋아. 좋아. 다음.
말세마왕 : 대마왕님. 말세마왕입니다. 저도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지옥망토입니다. 이 망토를 두르면 모습을 잠시 숨길 수 있습니다.
대마왕 : 흐흐. 재미있는 물건이 많구나. 좋아. 좋아. 다음.
해적 상어왕 : 대마왕님. 헤헤. 해적 상어왕입죠. 저도 굉장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대마왕 : 뭐냐. 빨리 보여라.
해적 상어왕 : 황금입니다요. 제가 그간 바다 통행세로 거둔 것입니다요.
대마왕 : 황금? 그게 어디 황금이냐. 돌덩어리지. 이 멍청한 자식.
해적 상어왕 : 어랏? 언제 황금이 돌덩어리가 되었지?
대마왕 : 여봐랏. 저 놈을 당장 끌고 가서 매우 쳐라.
해적 상어왕 : 대마왕님. 살려주십시오. 살려주십시오.
대마왕 : 시끄럽다. 다음...
쌍둥이 마두 : 대마왕님. 쌍둥이 마두 인사드립니다.
대마왕 : 어랏. 너희들은 처음 보는 듯싶은데... 내가 초청장을 보냈나?
쌍둥이 마두: 초청장을 받지 못했으나 대마왕님을 위해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습니다.
대마왕 : 흐흐. 나의 인기는 식을 줄을 모르는구나. 특별한 선물을 가져왔다면야 너도 받아주마. 오! 어디 특별한 선물이 뭐냐.
무명마왕은 가져온 커다란 선물상자를 보여준다.
무명마왕 : 이리 가까이 와서 직접 뜯어보시옵소서.
대마왕 : 그래? 그렇지. 선물이란 그 자리에서 뜯어보는 맛이 있어야지. 좋아. 좋아.
대마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가서 선물상자를 뜯는다. 그런데 선물상자를 열자 끔찍해보이는 손부터 나오더니 대마왕을 냅다 친다. 대마왕이 비명을 지르며 몇 걸음 물러난다.
손오공: 흐흐흐. 선물은 바로 나, 손오공이다. 너를 끝장내기 위해 왔다.
쌍둥이마두들이 대마왕이 비틀거리는 사이 재빨리 삼장 곁으로 가서 삼장을 구출하고 가면을 벗는다. 사오정과 저팔계다.
한삼장 : 아니, 너희들...
팔계, 오정 : 우리는 친구잖아.
손오공 : 헤헤. 안녕. 삼장.
대마왕 : 아니. 네 놈들은 죽었는데...
사오정 : 네 놈 손에 죽을 뻔했지. 하지만 이 피리가 독을 제거해주었지.
저팔계 : 헤헤. 죽는 척했지. 휴대폰으로 네가 온 것을 알고 있었지. 어때? 우리 연기가...
손오공 : 목걸이가 있으면 정신이 맑아지지.
대마왕 : 이 놈들. 감히 나를 속이려하다니... 그냥 두지 않겠다. 뭣들 하느냐. 저놈들을...
마왕들과 손오공 일행간의 대결. 풍수십류로 간단히 물리치는 손오공 일행.
저팔계 : 예전의 팔계가 아니라니까. 헤헤.
사오정 : 나 역시.
대마왕 : 풍수십류로 나 대마왕을 이길 수 있을까. 대마불사! (무시무시한 소리를 지르며 기를 모은 후) 흐흐흐. 이놈들 모조리 살려두지 않겠다.
대마왕 : 대 마 불 사
사오정 : 불어라 바람 풍
저팔계 : 쏟아져라 물 수
손오공 : 천상천하 유아독존 풍수십류
대마왕이 대마불사류로 손오공 일행을 몰아붙이자 손오공 일행이 수세에 몰린다.
대마왕 : 어떠냐. 이제 마지막이다.
손오공 : 삼장.
한삼장 : 응?
손오공 : 너의 힘이 필요해. 자! 손을 줘.
한삼장 : 어. 어떻게.
손오공 : 자, 이렇고, 저렇고. 알았지
한삼장 : 호호. 간지러워! 알았어.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 너희들도 힘을 모아줘.
손오공/사오정 : 알았어.
넷 모두가 손을 잡더니 각자 신물을 꺼낸다.
대마왕 : 간다. 대마불사!
손오공 일행 : 우리는 친구.
손오공 : (목걸이를 치켜들며) 하늘은 동그라미
저팔계 : (핸드폰을 치켜들며) 땅은 네모
사오정 : (삼각피리를 치켜들며) 사람은 세모
한삼장 : 근본 본!
천지가 울리고 큰 굉음과 함께 연기가 자욱하다 연기가 걷힌다.
## 11. epilogue
(나레이션)
친구들을 차별하지 마세요.
친구들을 왕따시키지 마세요.
친구들은 모두 소중한 존재입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져
나쁜 마음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지면
마법천자문의 봉인이 풀립니다.
갇혀 있던 요괴들이 세상에 나오면
사람들이 못된 요괴에 휩쓸려
서로를 의심하고 다치게 합니다.
삼장, 오공, 팔계, 오정.
마법천자문 조각이 나타나면
힘세고 용맹한 우리의 친구들이 반드시 또 나타날 것입니다.
친구들, 힘내세요.
모두 모두 힘내세요.
괴물로 변신했던 이들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다.
손오공 : 다들 이제 괜찮은 거죠?
믿을 신 마법천자문 조각이 떨어져 있고, 한 쪽에는 커다란 고양이가 야옹거리고 있다.
한 사람이 나서며 말을 한다.
사람 A : 이 개는 내가 기르던 고양이입니다. 바빠서 잘 돌보지를 않았더니 어느 날 고양이가 집을 나갔습니다. 고양이가 나를 친구로 여겼었는데 고양아, 내가 너무 소홀했구나. 미안하다.
한삼장 : 믿을 신이라... 고양이에게 누군가 마법천자문 조각을 씌웠군요. 친구간에 믿음이 사라지면 남는 건 쓰라린 상처뿐.
손오공 : 마법천자문?
한삼장 : 응. 사부님에게 들은 적이 있어. 오랜 옛날에 108 요괴들을 마법천자문 비석에 가두고 봉인을 했었대. 그런데 누군가 마법천자문 비석을 깨뜨렸나 봐. 이건 그 중의 한 조각이야. 이 조각을 몸에 지니게 되면 나쁜 요괴의 지배를 받게 된다고 해.
저팔계 : 그러면 대마왕 같은 요괴들이 더 있다는 말이야?
한삼장 : 아마 그럴 거야.
사오정 : 그렇다면 이 조각 말고 107개의 조각이 더 있다는 것이네?
한삼장 : 응.
사오정: 107개의 조각에 다 요괴가 있다면 대마왕 같은 요괴가 107명이나 있다는 거네?
저팔계 : 헤헤. 요괴들이 아무리 많아도 우리가 다 해치우면 되지.
손오공 : 맞아. 우리가 힘을 합치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을 거야.
한삼장 : 그래. 우리가 힘을 합치면.
저팔계 : 우리는 친구니까. 안 그래? 사오정.
사오정 : 맞아. 우리는 친구니까.
노래 :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by 합창)
어둔 길을 걷는 이들이여
저 밝은 빛을 보아요
그림자 땅에서 고통받는 이들이여
스며드는 희망의 빛을 보아요
증오하는 마음으로 슬프고 아플 때마다
부질없는 욕심으로 괴롭고 힘들 때마다
우리를 상처를 낼 때마다
우리를 갈라서게 할 때마다
있는 듯 없는 듯 나타나는 바람처럼
젖을수록 더욱 맑아지는 물처럼
당신은 우리의 자랑이며
당신은 우리의 친구입니다
땅을 뒤흔드는 힘
놀랍고 신기한 마법
우리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힘과 마법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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