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드라 97년 봄 두달 유럽배낭여행기 모음

관광과 여행 인드라1997-05-29 ​ 관광과 여행의 차이는 무엇일까? 영화 <마지막 사랑>*에서는 이렇게 답변했던 듯하다. 관광은 잠시 있어보는 것이라면 여행은 한동안 사는 것이라고. 나는 유럽에 도착한 직후부터 내내 아프리카의 광활한 사막에 도착하여 주인공들이 나누던 대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관광일까? 여행일까? ​ 늘 떠나고 싶어했다. 사랑스러운 아내가 옆에 있음에도, 칼같이 달려드는 일거리가 매일 쏟아지는 데도 문득 문득 출가하고픈 잔망(殘望)이 내게 도사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일상을 탈출하고 싶어한다. 반복되는 하루를 바삐 뛰다 보면 한 번쯤 아무 생각없이 산마루 바위에 앉아 지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이른 새벽 인적없는 해변을 달음박질하다가 아무렇게나 쓰러져 하늘을 쳐다보고 싶을 때가 있다. 또 아무 이유도 모른 채 거대한 군중에 자신을 내맡기고 종일토록 걷고 싶을 때가 있다. 또 똑같은 양복과 똑같은 넥타이와 똑같은 원피스와 똑같은 하이힐끼리 잘 정돈된 책상에서 속도있게 할 일을 논의하다가도 헝크러진 머리칼과 구질구질한 얼굴, 땀 절은 옷, 구겨 신은 신발로 스스럼없이 낯선 사람들과 길바닥에 주저앉아 쓸 데 없이 세상사를 흥얼거리고 싶을 때가 있다. 사람들은 가끔이라도 강박에서 멀리 멀리 떨어지고플 때가 있는 것이다. 영화 비터문의 습작가처럼 40억 세상사람 삶을 다 살아보고 싶은 허황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외에 나 또한 세상 사람들처럼 그렇다. ​ 나타샤가 내게 "자기는 여전히 아무 것도 포기하지 않았어. 포기했다고 말만 그러지." 라고 날카롭게 쏘아붙일 때 별 말을 할 수 없다가 찾아내곤 했던 꿈. 시일이 지나 아내가 다시 똑같이 말하면 덩그러니 담배만 피워대며 내가 왜 이러는지 자문해야 했던 꿈. 평소에는 집 바깥에 나서기도 귀찮아하는 사람일수록 역마살이 심하다는 역설이 성립될 수 있을까? 적어도 나는 그러한가 보다. 나는 며칠이고 집에만 틀혀 박혀 아무도 만나지 않고 고독을 즐기면서도 일년에 한 번쯤은 어디든 떠나야 한다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 어른들은 어린 시절 나를 두고 옆에 벼락이 떨어져도 상관없을 거라 핀잔할 만큼 나는 생각에 몰두하길 좋아하지만 한 달에 한 번쯤은 밤새워가며 사람들과 수다하고픈 율법을 지니고 있다. 또한 나는 종종 내가 만일 무인도에 홀로 살 수 있을까 공상하곤 하는데 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루에 한 번쯤은 무인도 위로 비행기라도 훌쩍 지나갔으면 하는 계명을 지니고 있다. ​ 그런 이유로 나는 내 행위를 유럽 관광이라고 규정지을 수밖에 없었다. 잠시 떠나보는 것. 그곳에 한동안 정착하여 그곳 사람들과 살기 보다 그곳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나 슬쩍 엿보는 것. 그곳 사람들도 역시 나처럼 일상을 견디고 있는 모습에 안도하는 마음이 드는 것. 마치 만나는 여행자들마다 내게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우. 지금 시작이라우. 당신은 쌩쌩해." 라고 말하는 듯 힘차게 돌아 다니는 모습을 보며 서점에서 십수권 책을 산 뒤 읽지 않고도 뿌듯한 기분이 드는 것과 같은 것. 돌아와 사진 몇 장과 길지 않은 사연을 뻥튀기하여 침 마르게 자랑할 생각으로 서울행 비행기에 오르는 것. 그리고 이산가족이 상봉하여 닭똥같은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떠올리며 김포국제공항에서 아내와 재회를 하는 것. ​ 나도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삶이 수만가지라면 하나쯤은 영국에, 또 하나는 프랑스에, 이태리에, 독일에, 체코에, 스페인에, 내가 들렀던 모든 곳에 남겨 두고 오고 싶었다. 두고 올 수 없다면 척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내 삶은 하나이니 될 법이나 한 소리이던가. 척이라도 할 만큼 하나뿐인 삶이 한가롭던가. 떠난 자의 이야기 결말은 어찌 되었든 돌아온다는 것. 조여진 삶은 조르쥬 바타이유의 일탈행위 같은 관광만을 허락하고 있기에 나는 관광객에 불과할 수밖에 없었다. ​ 그러나 나는 어떻하든지 관광객을 부정하고 싶었다. 여행자인 척하고 싶었다. 어느 도시에 하루를 체재하더라도 열흘을 머무르는 느낌을 바랬다. 한 나라 특정 도시만을 돌아다녀도 한 나라를 두루 돌아다닌 체험을 원했다. 단지 그곳 인포메이션 창구에서 직원과 사무적인 대화 몇 마디 나누더라도 신을 만난 기적을 꿈꾸었다. ​ 문득 이런 이야기가 들려왔다. 마을에 한 젊은이가 살았다. 어느날 젊은이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을 찾아 짝을 이루겠다는 결심을 친구에게 고백하고 길을 떠났다. 마을에 남은 친구는 젊은이를 기다렸지만 수십년이 흘러도 길을 떠난 젊은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날 무척 지친 늙은 행려병자 한 명이 마을에 왔다. 늙은 행려병자가 바로 길을 떠난 젊은이였다. 마을에 남아 있던 친구는 말했다. "결국 멋진 여성을 찾지 못한 모양이로군." 행려병자는 씁쓸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닐세. 찾긴 찾았다네. 그런데 내가 찾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여성도 나 같은 결심을 하고 있더군." ​ 나는 유럽에 왜 갈 생각을 했을까? 무엇을 찾고자 했을까? 찾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결국 어떤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을까? 나는 생각 끝에 내 행위를 관광에 낙서하기라 정의내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야기란 본디 뿌리는 같지만 열린 모양이 비슷하지만 자세히 보면 가지각색인 꽃봉오리와 같아야 재미난 법이기 때문이다. 가지각색 꽃봉오리가 열려 저마다 씨를 뿌리다 보면 언젠가는 원래 꽃봉오리와 천양지차인 꽃봉오리가 열리지 않겠는가? 이런 꿈이라도 꾸는 것이 소심한 나로서는 적당한 일일 것이다, 아래와 같은 공처가 소리를 남발하면서. ​ 아내와 종종 짧은 이별을 경험하는 자는 결코 긴 이별을 꿈꾸지 않는다. 인디오밴드와 함께 한 암스텔담 국경철폐(國境撤廢) 2004. 5. 28. 10:02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2759133 통계보기 * 당시 몸무게는 65kg여서 지금과 달리 그런 대로 괜찮은 편이어서 세계의 여러 여성들에게도 통했다는 것을 믿거나 말거나. * 아래 5인조 인디오밴드가 나오는데 나중에도 다른 유스호스텔 어디에선가 만났는데 이 밴드가 바로 SISAY로 이 친구들 근래에는 한국과 일본으로 와서 공연중이다. 나는 민속음악으로서는 아프리카 음악을 최고로 좋아하지만 러시아, 아일랜드, 안데스(볼리비아, 페루, 에콰도르) 민속음악도 무척 내 취향에 맞는 편이다. 싫어하는 민속음악이 있다면 두 가지인데 하나는 중국민속음악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 민속음악이다. 암튼 내게도 SISAY 시디가 있습니다. 인디오밴드와 함께 한 암스텔담 내가 마약의 도시 암스텔담에 도착한 건 구십칠년 사월 십이일 저녁이었어. 유로버스를 타고 암스텔담 교외에 내렸지. 그리고 유로버스 안내인이 추천하는 숙소를 찾았는데 실망스러웠어. 분위기는 브뤼셀 숙소와 비슷했거든. 하여 나는 브뤼셀 숙소에서 만난 미국인이 추천한 숙소를 찾아가기로 했지. 사십대 캐나다인도 다른 곳에 간다더군. 우리 둘은 지도를 보며 걷다가 헤어졌어. 별 쓰잘 데 없는 말이지만, 그 캐나다인 애국심이 대단하더군. 아무튼 나는 쉽게 찾으리라 생각하고 갔는데 뜻밖에도 '론리 플래닛' 지도가 부실한 것이야. 어두컴컴해졌는데도 헤맬 수밖에 없었지. 배낭을 메고, 저녁 굶어가면서 터덜터덜 마냥 걸어간 거야. 물론 그때 몇몇 친절한 네덜란드인들을 만날 수 있었지. 그 중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던 아가씨도 있었는데 제일 인상적이었지. 타고 가다가 갑자기 내 앞에서 멈추더니 도와준다는 것이야 다만 별 도움이 되진 않았지, 쩝. 나는 묻고, 또 물어, 암스텔담이 의외로 큰 도시(?)군, - 하지만 서울 생각하지 마! 절대로! - 절규하며 간신히 찾아갔어. 내가 밤 11시가 훨씬 넘어서 찾은 숙소는 ARENA. 그곳의 숙소는 거대한 체육관 분위기야. 이인용 침대들이 수십개 아무렇게나 놓여 있고, 사이사이에는 사우나에서 흔히 보는 옷가지 넣는 사물함이 있을 뿐이었지.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남녀 공용 침실이었다는 점이지. 그곳에 한국인들도 많이 갔나 봐. 한국어 안내판도 있어. 나는 자리를 정하고, 간단히 빵과 콜라로 배고픔을 해결하고, 샤워를 하러 갔다 왔는데, 돌아와 보니 내 옆에는 일본인 친구 3명이 있더군. 그 중 한 명은 여성이었는데 안경끼고 펑퍼짐한 친구였지만 그들의 리더였지. 나머지 일본 친구 둘은 왜소하고, 자신없는 친구들이었어. 왜 그녀가 리더인가 보았더니 그녀가 영어를 좀 하더라. 그녀는 신나게 영어권쪽에서 온 아가씨랑 이야기를 하다가 내 모습을 보더니 입을 다물더군, 거참, 그럴 필요가 없는데. 아무튼 일본인들은 나를 본 이후로 극히 조심하더군. 내가 먼저 인사를 했거든. 한국에서 왔다구 말야. 나는 더 이상 신경쓰지 않고, 바깥으로 나왔지. 로비에는 보이 죠지 흉내를 낸 친구가 있는 거야. 재미나잖아. 머리를 세워 염색을 하고 있었으니까 말야. 내가 멋있다고 하면서 사진 좀 찍어도 되느냐 하니까 부끄러워 하는 것이야. 알고 보니 여성이었어. 난 남자인 줄 알았는데. 네덜란드 아가씨인데 한 모습과 달리 매우 순진하더라고. 보이 죠지 아가씨 친구들에게 부탁해서 둘이 다정하게(?) 어깨동무하고 사진을 찍기도 했는데 내가 늘 강조하지만 내 사진기가 개판이라 나오질 않은 거야, 엉엉엉. 그때 한 남자가 왔는데 미국에서 온 웨이터라고 소개하더군. 웨이터 아르비를 하며 유럽여행중이라는 거야. 이 아가씨 일행을 꼬실려고 무지 애를 쓰는데 실패했어. 내 입장에서 평가하자면, 격조는 있는데 터프함이 좀 떨어지지 않았나 생각되더군. 그때, 바깥을 둘러 보니 줄을 서 있더라고. 뭔 줄인가 물어보았더니 토요일 저녁마다 하는 아레나 직영 디스코텍이라는 거야. 앗! 그렇다면 내가 빠질 수 없잖은가? 이 놈들이 어떻게 노는가를 알 수 있고 말야. 원래 내 여행 주제가 '퇴폐와 타락이 있는 1997판 조지 오웰'이지 않아? 크하하하. 인근 네덜란드 연놈들도 무진장 찾아오더군. 줄을 오랫동안 서 있다가 들어갔지. 일본인 친구들이 줄 서 있다 들어가는 내 모습을 멀뚱멀뚱 부러운 듯이 쳐다 보더군. 짜식, 용감하네? 알 게 뭐야? 디스코홀 분위기는 한마디로 토요일밤의 열기였어. 2층으로 되어 있었는데 1층이 좀 건전하다면 2층은 좀 더 퇴폐적이었지. 하여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가득 찼어. 이 자식들, 맥주 엄청 먹더군. 춤 솜씨가 어떠했냐고? 수준이 한참 낮더군. 다만, 자기 꼴리는 대로 춘다는 거야. 딱 내 마음에 들었지, 뭐.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내가 본 경우를 잠깐 말한다면 남성들이 오히려 점잖고, 여성들이 활달하더라. 한참 혼자 뛰놀다 심심해서 2층도 가봤지. 그랬더니 2층에는 한국 어느 락 바나 디스코텍에 가면 꼭 한명씩 있는 친구들이 있었어. 모냐고? 혼자 도취해서 마구 자리를 휘젓는 스타일 말야. 잘 추는 것도 아닌데 하여간 혼자 분위기 다 내는 친구 말야.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이 놈들은 분명 뽕먹었다는 것이지. 그야말로 암스텔담에 온 것이 실감났지. 디스코텍 밑바닥에는 드라이 아이스를 연신 뿌려 대어 뽕 분위기를 부추기더군. 너무 많이 걸어서 그런가, 졸렸어. 나와 숙소로 돌아가는데 주의문이 눈에 띄더군. - 뽕 먹을 연놈은 지정된 구역에서 하시오! 흡연 공간과 비슷한 개념이었지. 후후. 일본 친구들은 잠 안 자고 자기네들끼리 이야기하더군. 남자애들은 대화가 안 되었어. 여자애와는 대화했냐고? 못 했어. 둘 다 영어 발음이 시원찮아서 서로 못 알아 듣는 것이야. 둘 다 서구애들이랑은 잘 되는데 거 이상하지? 잤어, 아! 졸립다. 아침이야. 샤워를 해야지? 어? 그런데 이 말 안했나? 샤워도 남녀공용이라는 거? 샤워하려고 옷 벗고 들어가는데 웬 벌거벗은 서양 아가씨가 나오는 것이야. 볼 것 다 봤냐고? 그야, 다 봤지. 우리는 서로의 것을 모두(?) 확인했지. 난 순수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하고 샤워실로 들어갔지. 아무 일도 없었어. 상쾌한(?) 아침을 다시 맛없는 빵과 콜라로 적당히 잡친 뒤 암스텔담 사냥을 나섰지. 어떻게? 무작정 걷는 것이야. 댐 광장을 찾자! 댐 광장을 찾자! 꽤 오래 걸리더군. 하여간 댐 광장 가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렇게 헤매면서 돌아 다니는 게 내 체질이거든. 나는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잘 걷고, 군대에서도 행군 만큼은 자신이 있었거든.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둘러 보아야 하지 않느냐고? 내 앞에 있다면, 혹 특별히 생각해 둔 게 있다면 그러하지. 아니라면 내 관심사가 아니야. 나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오히려 관심이 있지. 우연히 만난 사람들에 대해서 말이야. 포르노 박물관 갔어! 재미없었어. 하지만 진지하게 하나하나 자세히 들여다 보았지. 마치 국보급 보자기를 구경하는 것처럼 말이야. 말자지가 있더군. 그것 외에는 신기한 게 없었어. 나중 이야기지만 베를린 포르노 박물관이 가장 나은 듯. 그리고 섹스숍들이 쭉 있는 곳을 탐방했지. 그때 뽕먹은 한 놈이 따라오며 배고프니 돈 달래? 뽕이 배고프다는 것이지. 내가 없다고 하니 퍽 유! 그러더군. 동양 여성 혼자 가면 좀 위험한 건 있는데 낮에는 서양 여성들이 섹스숍 쇼윈도우를 보면서 낄낄 대지. 뽕 먹은 놈들이 많으니 조심은 해야 해. 사창가 앞을 지나는데 백인 여자가 젖소 유방을 마구 흔들어대는 거야. 그쪽은 그것이 유혹 사인인가 봐. 난 정나미가 뚝 떨어지더군. 아무튼 의외로 흑인이 인기 있나 봐. 낮에도 들어가는 서양놈들 꽤 되더군. 암스텔담역에 들렸는데 전화대 옆 포토샵에 연놈 둘이서 들어가 계속 낄낄대는 거야. 알고 보니 뽕 먹고 있더군. 그런데 역에서는 뽕 먹는 거 금지래. 단속하더군. 서울에다 전화 간단히 하고, 스톡홀름행 예약을 하려고 하는데 수속밟는 아가씨가 무지 까다롭게 구는 거야. 다행히 한국 아가씨를 만났는데 파리 유학생이래. 그 아가씨가 불어로 수속을 대신 밟아주더니 내게 하는 말이, 동양인들에게는 가끔 우습게 대한다니까,하며 날 위로하더군. 암스텔담에서 스톡홀름까지는 예약해야 해. 잊지 마. 일본인들은 일찍 와서 또 자기네들끼리만 도란도란이야. 이 여행 끝나고는 벨기에 들려서 파리로 간다더군. 나와 반대코스더만. 새벽에 오줌누러 깨니 여전히 새벽까지 도란도란. 낮에 여행이나 제대로 하나? 다음날이야. 이제 암스텔담을 떠나야 해. 나는 느지막히 일어났어. 비틀즈의 컴 투게더를 들으며 이 곳 바에서 아침 식사를 즐겼지. 사과가 나와. 아침 식사 값이 여기는 포함되지 않으니 참고 해. 배낭 메고 길을 떠나는데 비가 왔어. 비를 맞으며 걸어 갔지. 왜냐고? 그냥. 레이첼 광장으로 걸어 가다 우연히 도깨비 시장을 만나서 구경하다 보니 비가 그쳤어. 레이첼광장에 있는 수퍼에서 빵 등을 사고 댐광장으로 향했지. 거기서 시간 때우다가 스톡홀름으로 가자! 댐 광장에는 다른 곳처럼 비둘기랑 사람들이 적당히 섞여 있었어. 나는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길다란 바게뜨빵으로 점심을 즐기고 있었지. 그때 남미쪽에서 온 인디언들이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이야. 사이먼 앤 가펑클의 엘 콘도르 파사 분위기였어. 구슬프면서도 정겨운, 급류를 탈 때 튀어오르는 물방울들의 행진처럼 격렬하면서도 흠뻑 취하고픈, 멜로디가 무척 익숙한 민요곡이었지. 인디언 전통 복장을 한 5명의 밴드가 각각의 민속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것이야. 매우 흥미있잖아? 그래서 이들의 연주를 내내 들었지. 그들은 다른 이들처럼 연주 끝나고 돈을 받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시디를 팔더군. 하하하! 멋있어. (나중에 다른 도시 어떤 숙소에서 이들을 만났지. 그 판 돈으로 여행하는 것이야.) 나는 눈을 감았어. 아! 나는 자유롭고 싶다. 이들처럼 나도 한두가지 악기나 혹은 시를 노래하며 영원히 떠돌고 싶다. 어디에든 귀착되지 않고, 영원토록...... 그러고 있는데 누가 날 부르는 거야. - 저, 있죠? 한국인 맞죠? - 아, 네. 맞아요. - 반갑군요. 저도 한국인이에요. 여행중이죠. 암스텔담에 도착해서 숙소에 짐풀고 막 나온 상태라 이곳 지리를 잘 몰라요. 이곳에 오래 있으신 듯해 보이는데 안내 좀 부탁할까요? - 하하. 이틀 있었죠. 안내하고 싶긴 한데 제가 간 곳이 딱히 없어서 할 수가 없겠네요. - 그래도 가신 곳이 있을 터인데... - 포르노 박물관 빼고 없죠, 모. - 네? 후후. 농담하시는 거죠? - 아니요? 저는 이 분야를 제 전공 분야처럼 여기고 있거든요. - 네에. 아무튼... 혼자 이 곳을 여행하려니 좀 힘든데 같이 할 수는 없나요? 그녀는 서양화 계열 미술전공 대학원생이었다. 이태리에서 유학하는 오빠를 찾아왔다가 보름 정도 짬을 내어 유럽을 돌고 있다는 것이다. 그녀는 물가가 비싸서 런던이 제일 끔찍하고, 이태리가 제일 좋다고 한다. 오빠가 있어서 편안해서이지 않을까? 나보고 이태리에 오면 여행온 맛이 날 거다,라며 자랑했다. 아무튼 그녀는 나보고 같이 돌아다니자고 계속 요구해서 나는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우선 암스텔담에 보석 세공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다며, 가봤는데 별 게 아니었다. 그녀도 실망했다. 그녀가 내게 포르노 말고 무엇에 흥미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이라고 하니, 그것말고 정말 없냐고 해서, 굳이 따진다면 그들의 사회상, 역사에 관심이 많다고 하니, 그럼 안네의 일기로 유명한 안네 기념관을 가자고 한다. 그녀는 그곳을 별로 가고 싶지 않았고, 나도 그랬는데 뭔 생각인지 자기가 돈을 낼 터이니 가자고 했다. 그녀는 이것 저것 내게 많이 물어보았고, 자기 생각을 자꾸 털어 놓았다. 자기는 여행하면서 보는 주안점이 색깔이라는 것이다. 나는 별 말을 하지 않으며, 가끔 그녀가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대로 사진을 찍어 주었다. - 남는 게 사진이래요. - 그래요? 전 사진 별로 안 찍는데요. - 그래요. 저도 그렇죠, 모. 다른 친구들에 비한다면, 저도 정말 사진 안 찍는 편이죠. 여기서도 한 장 찍어줘요. 그리고 우리는 정말 볼 게 없는 안네 기념관을 둘러 보고 나왔다. 그녀 돈으로 말이다. 입장료가 꽤 비쌌다. - 저는 풍차마을, 치즈마을 등을 볼 것인데 정말 볼 생각 없어요? 나랑 같이 가면 좋을 텐데... - 없는데요. 그녀는 내내 내 퉁명스런 태도에 적잖이 실망했다. 그러다 내가 대화하다 유부남임을 말했다. 나는 여행 내내 내가 유부남임을 숨기지 않았다. 그랬더니 더더욱 실망한 눈치였다. 그렇군요, 하긴. (혼자만의 생각인지 모르나 괜찮은 남자는 죄다 왜 유부남일까, 하는 표정 비스무리했다. 음~ 나의 황태자암이란.)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그녀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나도 그녀가 물으면 답변하는 정도였는데 그녀가 말을 하지 않으니 나도 말을 안 했다. 그녀가 못 생긴 것도 아니었다. 이십대 후반으로 적당한 키(165 정도?)에 평범하게 예쁜 얼굴이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딘지 나랑 분위기가 다르다는 걸 이미 느낀 터라 서먹서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왜 난 그렇게 생각했을까? 보석 구경하러 가자고 했을 때부터 그랬었나??????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른 채 마침내 헤어졌다. 머나먼 타향에서 우리는 이렇듯 쓸쓸한 이별을 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다르니 피부 색깔이 다른 친구들보다 더 먼 이 느낌이란 무엇일까? 내게 마약이란 낯설고 두려우면서 호기심의 대상이라면, 아마 나는 그녀를 마약 만큼 인정하지 않아서 그러한 것일까? 그녀가 어쩐지 이곳 마약 도시에 어울리지 않아서? 스톡홀름행 기차 지정석에는 나 혼자 탔다. 호텔 투숙 기분내며 사온 맥주를 이빠이 먹고 잠이 들었다. 안녕~. 마약의 도시 암스텔담! 프라하의 찢어진 스타킹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1. 7. 1:46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09057875 통계보기 프라하의 찢어진 스타킹 체코 국경을 넘었을 때는 97년 4월 23일이었다. 그때 나는 운전대가 오른쪽 에 있는 영국 유로버스를 타고 있었다. 버스 안에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에서 온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동양인은 화교계 말레이지아인 1명과 나뿐이 었다. 국경 심사는 매우 까다로왔다. 여행 내내 영국 하드락에 취해 자유롭 다 외에 표현할 길이 없는 운전사와 가이드가 긴장하는 순간이 있다면 국경 심사였다. 젊은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시종 떠들거나 가져 온 휴대용 카세트를 통해 자기만 좋아하는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거나 일기를 쓰거나 잠들던 젊 은이들도 이때만은 하얗기만 한 얼굴이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한 40분 걸렸 을까. 무사히 체코 국경을 넘어갈 수 있었다. 가이드는 "제기랄, 40년이야, 40년!"이라는 말을 하면서 독일 파시스트 운운하였다. 국경을 넘기 전 잠시 들린 휴게소에서 가이드가 내게 담배를 권하면서 코리아에 흥미를 느끼던 표정과는 대조적이었다. 국경을 넘자 처음 눈에 뜨인 광경은, 길가에 늘어 선 체코 아가씨들이었다. 서구 도시에서 다 떨어진 옷차림에 화장기없는 얼굴만 보다 체코 아가씨들을 보니 순식간에 버스 안에선 동요가 일었다. 여성들은 오우!하며 탄식했으나 남성들은 와아!하며 탄성을 질렀던 것이다. 경험 많은 운전사는 말했다. "당신 들은 그녀들과 즐길 수 있다, 단 돈이 많다면." 아가씨들은 매우 짧은 초미니 스커트에 짙은 화장을 하고 국경을 통과하는 차를 향해 유혹하고 있었다. 독일 마르크화의 지배를 받는 체코 어느 곳에서도 이러한 풍경은 익숙했다. 서구의 특정 구역 내에서만 볼 수 있는 옷차림들이 체코 프라하 시내 어디서 건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경험 많은 여행자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여 프라하에서 제일 싸다는 호스텔에 묵기로 했다. 영어권 여행자가 선호하는 호 스텔은 참고로 영어가 통할 것, 락이나 재즈음악이 나오는 까페를 갖추고 있 을 것, 돔룸이 완비되어 있을 것, 값이 무진장 쌀 것 등이다. 이 호스텔은 이 러한 조건을 모두 다 갖추고 있었다. 나는 만족했다. 올 4월, 5월에 유럽을 여행한 이들 중에 내 이야기를 들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전해 들은 사람들 반응은 믿기지 않는다,라는 것이었으나 사실은 사실이다. 락까페에는 '킴'이 라는 흑인과 '미쉘'이라는 체코 아가씨가 일을 보고 있었다. '킴'은 내 이름 을 보자 한마디했다. '킴? 오! 킴---' 그의 이름은 킴이고, 내 성은 킴이지 만 무슨 차이가 있으랴. 순식간에 우리는 친해졌다. 하지만 그보다 더 친했던 이는 '미쉘'이었다. 카프카와 쿤데라를 사랑하고, 미제국주의를 경멸한다는 이 아가씨가 일하는 곳은 공교롭게도 영어권 국제호스텔 바였던 것이다. 내가 ' 미쉘'에게 특히 정이 간 것은 그녀의 찢어진 스타킹 때문이었다. 분홍빛 스타 킹에 줄이 나갔음에도 개의치않고 신고 다녔다. 서울에서라면 무척 창피한 일 이 틀림없지만 살림을 스스로 해야 하는 서구 젊은이들에게 그러한 것은 사치 에 불과했다. 그녀 외에도 심심찮게 나는 체코 시내에서 찢어진 스타킹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체코산 흑맥주를 앞에 놓고 그녀와 몇 번 말을 나누었다. 우/리/는/ 이/토/록/가/까/운/데/그/간/너/무/멀/리/있/었/구/나. 나는 유럽여행때 가장 많은 나날을 체코 프라하에서 보냈다. 가장 마음에 든 도시였기 때문이다. 카프카가 거닐던 좁은 벽돌길을 새벽까지 거닐며 사색에 잠기기도 했고, 낭만적인 아주머니를 만나 카프카와 체코문학에 대해 이야기 하기도 했으며, 민주화 불길이 일었다는 광장에서 상인들과 관광객이 득실대는 풍경을 아무렇게나 드러누워서 감상하기도 했으며, 클린턴이 연주했다는 재즈 바 '레듀타'에서 맥주와 담배와 재즈가 있는 공연을 만끽하기도 했다. 또 밤 이면 동화처럼 등장하는 프라하 성의 웅장함에 도취되기도 했다. 그러나 무엇 보다 내게 강렬하게 남았던 것은 '미쉘'의 찢어진 스타킹이었다. 우리의 70년 대처럼 막 자본주의에 눈떠 정신없이 돌아가는 체코. 그에 따라 젊은이들은 관광품을 팔거나 아니면 자기 몸을 대신 관광품으로 팔고 있었다. 3만명의 미 국인들이 불법체류한다는 믿기지 않는 이야기와 미국인들이 체코 여자 모두를 창녀로 안다는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는 체코. 남자 잘 만나 독일이나 미국으로 떠나고 싶어하는 건 아마 그녀들만의 관심사는 아니겠지. 그럼에도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그네들의 여유로운 삶이었다. 풍족한 문화유산 속에서 자긍심을 잊지 않고 사는 모습들이 아마 그네들의 진정한 모습이리라. 겉멋들린 관광객 들의 시선이 찢어진 스타킹에 머물렀을 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아니라 당당하 면서도 여유로운 모습. 아마 나는 '미쉘'의 찢어진 스타킹을 영 원히 잊지 못할 것만 같다. 파리의 지붕밑에서 밤새 취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2. 6:1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056295 통계보기 크로키를 수첩에 그리면서 대화하는 크리스티나와 함께 스웨덴인 DJ 쟝과 함께 호주에서 온 플레이보이들과 함께 흑인 친구가 뉴욕대 다닌다는 친구임 구십칠년 사월 구일이었어. 인드라는 영국 워터루역을 떠나 유로스타를 타고 파리북역에 내렸지. 유로스타 어땠냐고? 별로였어. 하지만 설문조사에는 자세히 응했지. 난 유럽에서 몇번 설문조사를 받았는데 그때마다 철저히 대하기로 했지. 사고칠 때만 한국인 티내면 뭐하나. 아무튼 유럽기차의 장점은 흡연석이 있다는 거야. 런던에서 파리로 들어갈 때 영국 산천은 볼품 없었어. 자본주의 원시 축적기에 온 땅을 다 초지로 바꾸어서인가. 초지가 아닌 데는 거의다 쓸모없는 관목이 무성한 늪 따위들.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남동부인데도 말야. 그 점에서 파리로 가는 프랑스 풍경도 후졌어. 역시 산천 하나는 한국이 끝내주는군. 아참, 파리역에는 가방 보관하는 로커가 없어. 테러 방지 때문이지. 이 때문에 런던이나 파리나 쓰레기통 찾을 길이 없더군. 담배 피다 그냥 땅에 버리라구. 세금에 포함되어 있다는 농담이 있대. 일단 배가 고팠어. 그래서 파리 10대학, 소르본느 기숙사 식당을 찾아갔지. 거기가 싸다고 해서 말야. 어느 한국 유학생의 조언으로 지하철 일일권(30f)을 끊어 시떼역으로 갔어. 어? 그런데 끝난 것이야. 2시 50분인데... 마감 시간이 3시라던데... 아차차. 시간 조정을 잊었음이야. 런던과 파리는 한 시간 시차가 있어. 에구구. 3시 50분으로 시간 조정할 수밖에. 벌써부터 배가 고프더군. 아직 여행초기라서 단련이 안 된 것이야. 여행지 뒤져 사랑의 집을 발견하고 거기서 밥이라도 먹자 생각했지. 그런데 찾기가 무지 어려운 거야. 약도가 왜 이리 엉터리야? 길 가던 프랑스 아가씨에게 당당히 짧은 영어로 길을 물었지. 영어 못 한다고 얼굴 빨개져서 도망가는 거야, 나참. 생긴 건 예쁜데... 간신히 찾아가니 사랑의 집이란 신앙공동체하는 곳으로 양수리에 가면 있음직한 후줄그레한 민박집이었어. 상관없었지. 밥만 먹을 수 있다면. 그러나 아줌마가 나타나더니 싸늘하게 여기는 식당이 아니라고 말해. 잠 안 잘 거면 밥도 없다는 거야. 속으로 화가 났지만 웃으면서 나왔지. 그곳에서 일하는 남자가 아줌마 볼멘 소리가 마음에 걸렸던지 나보고 이해하라는 투로 말하더군. 무거운 배낭을 메고 세시간 이상 걸어보라구. 으아아. 할 수 없이 원래 묵기로 작정했던 배낭족 여관으로 가야 했어. 3 ducks hostel. 영어권 친구들이 잘 가는 곳이야. 코메르스역 근처에 있지. 그런데 첨에 보자마자 마음에 탁 든 거 있지? 입구가 바야. 그 바를 통해 여관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젊음이 진동하고 있었지. 97f. 파리는 런던, 베를린처럼 물가가 다소 비싼 편이지. 식사 제공되지 않고 말이야. 한국 민박이 아침 포함 80f~90f이라는 점에서 비싼 것이지. 그러나 내 목적은 단지 싸다는 것만 아니었어. 다시 파리에 왔을 때에는 한국 민박집을 이용하기로 했어. 우선 중요한 건 이왕 왔으니 세계 별별 놈들을 만나보는 거였지. 아무튼 짐을 풀자마자 가까운 수퍼로 갔어. 인근에 수퍼가 있다는 건 안성맞춤이야. 바게트와 생수, 그리고 콜라와 맥주 하나를 샀지. 돌아와 바와 돔룸(보통 6인실에 2인용 침대만 달랑 있다.) 사이에 있는 정원 탁자에 앉아 빵과 콜라를 먹은 뒤 맥주를 마시며 여행 일지를 썼지. 정원에는 각국에서 온 젊은이들이 우글우글 대었어. 그중에 한 백인 친구가 나를 향해 엄지손가락을 내보이더군. 멋있다는 거지. 아! 난 항상 멋있어. 아마 맥주 마시며 일지 쓰는 게 멋있었나 봐. 그런데 서구 배낭족들도 엄청 일지 쓰거든. 그 중에 맥주 마시며 일지 쓰는 사람이 없었던 걸까. 아무튼 내 주위에서는 서로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던가 나처럼 일지 쓰고 있었어. 아무튼 백인, 흑인, 남미인, 나 같은 유일한 동양인이 섞여서 인종 전시장이었어. 그때 와우~ 멋진 백인 아가씨 둘이 등장하더군. 초미니스커트에 배꼽티를 입고 있었어. 큰 키에 금발. 전형적인 백인 미인 스타일이었지. 그런데 아까 나보고 손짓하던 친구가 환심사려는지 말을 많이 걸더군. 나중에 알았지만 호주 친구였어. 나는 일지를 다 쓰고, 날이 어둡자 나갈 궁리를 했지. 그런데 이 친구들은 관광할 생각을 안 하네? 이미 했다는 것일까? 이건 나중에 천천히 말하고 싶어. 서구 친구들의 여행 관행을 말이야. 나는 일단 파리에 하루만 묵을 생각이었기에 어디로 갈까 궁리했지. 답은 샹제리제 거리였어. 콩코드 광장부터 개선문에 이르는 거리 말이야. 밤이 깊어 그곳으로 갔지. 많은 관광객과 파리장들이 나왔어. 아마 그곳이 압구정 거리쯤 될 거야. 그래서 다들 좀 꾸미고 나왔더만. 파리 아줌마가 지나가는데 향수 냄새가 엄청 나서 죽는 줄 알았어. 샹젤리제의 밤이 어땠냐고? 한마디로 싸구려 전시장이었지. 큼직큼직한 거리에 점포와 까페만이 있는 자본주의 전시장. 압구정동 건물 보러갈 일이 있냐? 마찬가지로 샹제리제도 그런 것이야. 연인과 야외 까페(엄청 비쌈. 참고로 유럽 레스토랑 개념은 우리와 다름. 비스니스나 특별한 일이 아니면 유럽인들도 안 감.) 에서 폼나는 저녁을 먹을 생각이 없는 사람은 갈 필요 없어. 난 이 거리를 걸었지, 개선문까지. 개선문에 이르르자 갑자기 일본 단체 관광객들 태운 버스가 도착하여 일본인들이 우루루 내려 요시! 하고 감탄하면서 사진을 연신 찍더군. 우리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어. 사진 찍지 않으려다가 그래도 왔는데 하고 일본인에게 부탁해서 찍었지. 물론 사진 안 나왔어. 열 장 중에 서너장 나왔을 정도로 내 카메라는 고물이거든. 그리고 참고삼아 말하는데 서구인들에게 사진 찍어달라고 부탁할 때는 상대를 잘 살펴 보아야 해? 훔쳐가서 그런다고? 아니야. 그건 아니고. 그들 중에는 고의적인 게 아니라 정말 발만 찍는 사람들도 꽤 있어. 고의가 아니니 화낼 일은 아니지만 좀 그렇잖아. 주의해. 올 때는 국철인 '레'를 타고 왔어. 빠르더군. 그런데 파리 지하철은 서울 지하철과 비슷한데 차이가 있다면 바로 이 '레'야. 이 '레'를 잘 이용할 줄 알면 다 아는 것인데 처음에는 무진장 헤깔리더군. 오죽하면 내가 파리 지하철을 이해하는 것이 파리를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호스텔 낙서장에 나중에 썼겠어? 그런데 길을 물어보기 위해 지하철 관계자에게 영어로 물어보면 대부분 영어 단어 한 두 개 섞인 불어로 답변해. 그럼, 아, 영어를 알면서도 프랑스 자존심 때문에 그런 거구나 하고 생각하지. 착각이야. 영어를 아는 사람이면 영어로 말해. 그럼 그들이 어떻게 알고 말하냐고? 명동역까지 어떻게 갑니까?라고 외국인이 물었다고 하자. 그러면 다른 말은 몰라도 명동이란 말은 알아 들을 것 아니야? 다 그런 거야. 그래도 무시하지 마. 프랑스 지하철 직원과 경찰들은 프랑스 하층 엘리뜨래. 요즘 프랑스 엘리뜨들도 자식 영어 공부시키는데 여념이 없다는군. 프랑스 서적들이 세계적으로 안 팔린다고 큰 걱정을 하고 있었어. 파리 지하철은 매우 음습해. 퐁네프의 연인들 외 많은 프랑스 영화에서 나오는 것과 비슷해. 미로같은 굴을 지나면 온갖 낙서들이 있는 낡은 지하철을 타지. 좌석 구조가 우리 시외교통버스와 비슷해. 그리고 보조좌석도 있지. 갑자기 누가 소리치길래 뒤돌아 보니 한 흑인 아줌마가 절절한 불어로 구걸을 하더군. 정말 불어는 절규할 때 제일 압권인 듯 싶어. 그걸 유심히 보니까 마주 앉은 프랑스인이 나를 향해 빙긋 웃더군. 아! 대부분의 유럽인들은 배낭족에 호의적인 듯 싶어. 한편으로는 여행 다녀서 무지 부럽다(?)는 느낌을 보내는 것도 같아. 그리고 자기네들이 어떻게 비칠 지 무지 신경쓰는 듯도 싶더군. 호스텔에 도착한 나는 간단히 돔룸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지. 두 명이 있었는데 하나는 뉴질랜드, 다른 하나는 호주에서 온 친구였어. 뉴질랜드 친구는 솔직하게 말하더군. 스페인 여자 친구 사귀러 왔다고. 스페인 여자들이 인기 많은 거 알지? 나도 나중에 말해 주지. 다른 친구는 샤워를 막 마친 상태였는데 처음부터 반가우니 술 한 잔 하자, 하고 호탕하게 나와서 샤워 끝나고 하자 그랬어. 그런데 샤워 끝내고 나오니 없더군. 바에 갔어. 맥주 한 잔 하려고. 나는 다른 돈은 다 아껴도 맥주값은 안 아끼기로 했지. 바에는 락의 물결이었어. 아까 호주 친구는 어떤 여자 꼬시려고 무진 애를 쓰고 있더만. 내가 잘 갔던 신촌의 케쟈르 분위기였지. 다소 국제적인 분위기 때문에 인근 프랑스 아가씨들도 놀러오더군. 아! 그리고 아까 나에게 손짓하던 친구와 야한 아가씨 둘도 있었지. 여주인 이름은 기억이 안 나고 거기서 일하던 친구 이름은 쟝이었어. 스웨덴 친구인데 경제학을 전공했다고 하더군. 파리가 좋아서 잠시 여기 있는 거라더군. 이름이 뭐냐고 해서 종화라고 하니 어렵다 해서 김이라 하니까 김이 편하대. 맥주 한 잔(13f; 1f=163원) 먹으면서 분위기를 즐겼지. 나에게 손짓하던 친구는 호주 친구(X라고 부르자)였어. 시드니에서 왔다든가? 나한테 'really' 발음을 가르쳐 주었지. 내가 리얼리? 그러니까 노우! 노우! 룰루랄라 운전하듯이 자연스럽게 리얼리하라는 것이야. 내 발음이 좀 튀니까 다들 웃더군. 안 되다 결국 내가 지쳐서 에라, 모르겠다 리얼리하니까 그거라는군. 나는 아직도 그 차이를 모르겠어. 알고 보니 그 친구 영어 교사 자격증이 있다더만. 한국오면 떼돈 벌고 여자 친구 많이 사귈 수 있다고 하니까 웃더군. 무자격 교사들이 얼마나 많이 와서 떼돈 벌어? 인터넷에서도 소개된 엘도라도의 땅이라는데 말야. 모름지기 영어 잘 하는 사람보다 영어를 가르칠 줄 아는 사람이 가르쳐야 해. 어쩌다 영화 이야기를 하는데 흑인 친구가 끼어 들었어. 뉴욕에서 온 뉴욕대 친구인데 자기는 스파이크 리를 최고 감독으로 생각한대. 그리고 내가 비평책을 썼다니까 매우 광분(?)하면서 자기 소원도 책 내는 거래. 매우 지적이었는데 그 흑인 옆의 여자가 또한 지적이면서 멋진 여자였어. 그녀의 이름은 크리스티나. 나와 같은 왼손잡이. 히히. 그녀는 말하면서 크로키를 하더군. 상대방 얼굴을 그리는 것이야. 캐나다에서 왔다든가? 아무튼 셋이서 잠시 정겨운 이빨을 해댔어. X는 같이 온 호주 친구들이 많아 나한테 다 일일이 소개해줬어. 나보고 한국에서 온 플레이보이라나? (자식. 서로가 서로를 알아 보는군.) 무슨 비평이냐 해서 영화평도 있고, 그러니까 다들 무지 흥미를 갖더군. 헐리웃 영화, 스필버그 영화에 다들 일단 관심이 있었어. 그때 한창 스타워즈 바람이 불었거든. 나는 그도 관심이 있지만 내가 좋아하는 영화들은 좀 비대중적인 것들이 많다고 하는데 자세히 설명할 수가 없어 독립영화라고 했지. 그러니까 다들 와우! 독립영화! 그러더만. 독립영화하면 상표가 되나 봐. 그러면서 호주 영화 중에 뭐 봤냐하고 궁금해 해서 난 솔직하게 말했지. 크로커다일인가 악어 나오는 거 봤다! 그러니까 다들 죽을려고 하더군. 호주인들은 자신들이 영국 죄수 출신이라는 기원 때문에 야만인(?) 이미지를 싫어하거든. 아무튼 그들에게 호의적으로 보이고 싶다면 다만 이렇게 말해. 당신은 지적인 듯 싶다! 그러면 세계 젊은이들은 모두 뻑 가. 틀림없는 사실이야. 크리스티나가 나한테 그림을 보여주었는데 내가 큐비즘 스타일의 피카소 그림 같다니까 자기는 피카소 좋아한다는군. 그 말 듣고 무진장 좋아하대? 아무튼 크리스티나의 반응에 질투를 느꼈는지 X가 자기 청바지에 그림 그려달라고 생떼를 쓰더군. 청바지에 그림 그리는 게 끝나고 난 뒤 나는 X에게 한국식 음주법을 가르쳐 주었지. 원 샷! 한 호주 아가씨 이름은 킴. 스웨덴인 쟝이 둘 다 킴이라고 소개해 둘이서 서로 웃었어. 쟝이 내가 마음에 들었는지 듣고 싶은 음악 없냐고 물어보네? 내가 좋아하는 곡이 있지만 없을 듯해서 아무 것이나 좋다고 하니 그럼, 자기가 좋아하는 라이브 공연 실황 음악을 들려주겠다더군. 느즈막히 아르헨티나에서 온 멘도사가 합류했어. 멘도사는 전형적인 남미인 스타일. 자신은 스페인을 방문할 목적으로 유럽에 왔다고 해. 남미인들 상당수는 스페인을 방문하고 싶어한다더군. 멘도사도 재미있는 친구였어. 낙서장에 재미난 그림을 그리고 내게 보여주어서 서로 낄낄 대었지. 자정이 넘어서 멕시코에서 온 친구가 방이 없느냐고 물었어. 이제서야 도착했구나. 물론 여름철만 아니면 방이 있어, 예약할 필요는 없지. 바는 밤새 열어, 그것이 장점이야. 뉴욕 흑인 친구는 밤새우고 아침 9시차로 간다고 해. 아무튼 별 잘 하지도 않은 영어로 시종일관 이빨을 까니 그 모임에서 나는 단연코 화제의 인물이 되었지. 그 초미니스커트와 배꼽티의 아가씨들도 내게 흥미를 보낼 정도였어. 아쉽지만 나는 졸려서 2시에 잠자리로 갔어. 아까 나랑 한잔 하자던 호주 친구는 이미 와서 코를 골고 있더군. 아침에 일어나니 X를 비롯한 많은 친구들이 인사를 해. 개중에는 밤을 새운 친구들이 있더군. 이들은 이렇게 여행을 즐기고 있었어. 한 곳에서 며칠씩 머무르며 영어권 친구들과 교류하는 것이었어. 나는 서둘러 샤워를 하고 벨기에로 가는 유로버스를 탔지. 안녕! 파리! 또 보자. 쟝! 안녕~! 브뤼셀에서 포르투갈 학생들을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5. 2. 13. 2:40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리버스 게임을 하자고 했던 포르투갈 고교생 수학 여행단과 함께 ​ * 없는 사진 그나마 몇 년 지나니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생각난 김에... 이 사진도 언제 없어질 지 모르니까. -------------- ​ 고교 수학 여행 때 기억할만한 자질구레한 일이 내게도 없다 말할 수 없지. 따분한 해인사 여행을 마친 뒤 담임을 잔뜩 술먹이기로 작정을 했어. 일찍 잠들게 한 뒤, 우리끼리 신나게 놀자는 상투적인 계획이었지. 예상대로 담임이 일찍 자라고 엄포를 놓고 자기 방으로 가는 것이야. 그리고 바깥으로 나갔는데 해인사 앞 밤거리는 정말 고요하더군. 아! 담임이 안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어. 우리는 이대로 도저히 잘 수 없다는 모진 자학을 하며 고스톱을 쳤어. 그때였어. 귀신 같이 담임이 나타나 일차 경고를 하더군. 그렇다고 포기할 수 있나? 우리는 문을 잠그고, 침묵하며 고스톱을 계속 쳤지. 하지만 한참 뒤에 담임이 문을 꽝꽝 두들기며, 그런다고 모를 줄 아냐, 불 꺼! 한번만 더 걸리면 죽는 줄 알아! 그러는 거야. 불을 껐지만, 잠이 오지 않는 거야. 어떻게 이대로 잘 수 있겠어. 우리는 다시 일어나 이불 속에서 회중 전등을 켜고 고스톱을 쳤지. 이것이야말로 완벽한 거다! 우리의 승리이다! 하지만... 담임은 타잔처럼 이십센티 될까한 이층 난간을 타고서 창문에서 방 안으로 뛰어들었던 것이야. 우리는 개처럼 끌려 나가 달밤의 체조를 해야 했어.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니 피곤한 우리를 누군가 치약으로 다 분칠했더군. ​ 특명 받고서 군대 제대하는 날까지 나는 고스톱을 쳤어. 왜 그랬냐고 묻지 않기를 바래. 나가는 그날까지 중대장이 넌 어째 끝까지 군바리답지 않느냐라고 했으니까. 그래도 인정받는 박격포 사수 겸 보급병이었는데 말이야, 쩝. 아무튼 내 목표는 즐거운 내무반이었지. 업무 시간이 끝나면, 쫄다구도 없고, 고참도 없는 내무반. 나는 고스톱을 치면서 내 군생활에 대한 정당성을 지워버리려 했으니까. 제대 인사하고 부대를 나서자마자 군가를 다 까먹었다는 성과라면 성과야. 하지만 잘 안 되더군. 그후 한동안 내가 부대에서 근무한다든가, 복귀 명령이 떨어지는 꿈을 꾸었어. ​ 회사 연수받는 마지막 날이었지. 청평의 모 리조트에서 받았는데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간부들의 엄포에도 불구하고 맥주를 마시며 고스톱을 쳤지. 일차 경고를 무시했어. 그러다 이차 경고를 할 때쯤 우리는 사태의 심각성을 느끼고 판을 치웠지. 위기일발이었어. 이차 경고에 걸린 이들은 퇴사 조치 당했지. 일차 경고 명단자들은 그날 운동장 백 바퀴를 뛰는 달밤의 체조를 했어. ​ 내가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내가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한 건 구십칠년사월십일이었어. 영국 회사 영국발 유로 버스를 타고 브뤼셀에서 처음 본 풍경은, 호주에서 직수입한 미녀들이란 제목의 포스터였어. 비키니 차림을 한 여성들이 성인 술집에서 공연한다는 내용이야. 같은 버스를 탄 호주 여성들이 죄다 한숨을 내쉬더군. 호주 친구들에게 쥐약이 바로 야만인 이미지거든. 그런데 조금 더 가니 이번에 나타나는 포스터는 무엇이었느냐. 호주에서 직수입한 미남들이란 제목의 포스터였어. 성기가 크게 돌출된 수영복을 입은 남성들이 공연한다는 것이었지. 이번에는 호주 남성들이 죄다 한숨을 내쉬더군. ​ 숙소는 '웰 슬립'이야. 한국어 안내판이 있고, 시설이 현대식이야. 쾌적하고, 편안하고, 시내 중심가 숙소를 원한다면 이곳이 괜찮을 거야. 다만, 이곳에서 절대 환전하지 않기를! 파리 쓰리 덕 호스텔 분위기를 원한다면, 브뤼셀에서 기차로 두 시간 거리인 브뤼헤로 가서 '바우하우스'에 머물길. ​ 도미트리 방에서 스페인 발렌시아 출신 친구를 만났지. 자신은 영화 관계 일하면서 이곳에 머무르고 있대. 이 호스텔이 상대적으로 싸니까 말이야. 스페인보다 이 곳 물가가 살인적이라면서 연신 머니 타령이었지. 스페인에서 여기까지 버스로 왔대. 버스로 12시간이 걸린다는군. 숙소에서 종일 여자 친구에게 엽서 보낸다고 난리였어. 그러다 내게 스페인에 오면 발렌시아에 꼭 오라고 공짜로 엽서를 주는 것이야. 그때 내 준비 부족을 아쉬워했지. 한국 알리는 것을 준비할만한 물품이 없는 걸 말야. 하다 못해 백 원짜리 동전이라도 있었다면. ​ 또 히피 스타일의 미국 친구를 만났지. 이 친구는 또 종일 기타를 치면서 숙소에만 있는 친구였어. 암스텔담을 다녀왔는데 아주 좋았다며 숙소 아레나를 소개해 준 친구였어. 나보고 처음에 재패니즈? 그러길래 코리안이라고 답변했더니 미안하다고 그래서 왜 그러냐 그러니까 한국인더러 일본인이냐고 물어보면 그간 만난 한국인이 기분 나쁘게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 말하더군. 그 말 들으니 나도 그랬었나 생각이 들었어. 아무튼 이 친구는 괜찮은 양키였어. 내가 여행 중 만난 양키는 두 부류인데 하나는 이 친구처럼 히피 스타일이어서 편안한 친구들이고, 다른 하나는 유에스에이 넘버 원! 부르짖는 짜증나는 친구들이지. ​ 시내 관광은 걸어서 다 했지. 하루면 되지. 옆을 지나가면서 있는 지도 모르는, 조그만 오줌싸개 동상도 보고, 유명하다는 광장도 슬쩍 지나갔지만 재미는 없었어. 그때 거리에서 그림을 그려 파는 친구들을 보았지. ​ ​ 고흐처럼 생긴, 조그맣고, 까무잡잡한, 고흐처럼 못 생긴 남자가 그림을 그리면 예쁘게 생기고, 남자보다 훨씬 키가 큰 금발 아가씨가 그림을 파는 것이었어. 이 남자가 그리는 그림은 대부분 SF적 그림들이었지. 갖가지 스프레이로 신문지 등을 이용하여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내더군. 정말 신기했어. 그리고 그는 매우 진지했지. 아가씨는 동거하는 친구 같은데 이 남자를 마치 고흐인양 생각하는 눈치였어. 그런데 이 친구들은 거리에서 곧 쫓겨났지. 경찰들이 와서 허가없이 영업한다는 명목으로 엄포를 놓더군. 나는 이 예술가 양반들에게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어도 되느냐 양해를 구했어. 이 사진에는 예술가 양반들의 분노와 경찰의 철딱서니 없는 것이 함께 잡혔지. 하지만 늘 말하지만, 내 사진기가 엉망이어서 다 안 나온 것이야, 이런 젠장. 십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는 대학로처럼 자화상을 그리는 친구들이 있었어. 경찰들은 이 친구들에 대해서는 아무 말 하지 않았지. 세금 내나 봐. ​ 저녁이 되어 길거리를 돌아다니다 롭-롭이란 술집에 들어갔어. ​ ​ 브뤼셀 중심가에서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들락거리는 곳인가 봐. 이층으로 되어 있는데 이층에서는 매일 이벤트가 벌어지나 봐. 락 페스티발, 재즈 페스티발, 아마추어들의 라이브 공연을 할 수 있나 봐. 일층은 생맥주 마시며 가벼운 락 음악을 듣는 곳이고. 나는 일층에서 흑맥주 한잔을 마셨지. 사람들로 북적였어. 카우보이 차림의 중년 미국인 둘이 들어오더니 매우 거만하게 달러를 펄럭이더군. 그러다가 한 초라한 행색의 남자가 들어왔어. 한참 동안 주문을 하지 않고, 유일하게 동양인인 내 옆에서 나를 보더니 - 야밤에 싸돌아 다니는 동양인들이 별로 없거든? - 술을 달라고 하는 것이야. 웨이터가 술을 주고 돈을 달라 하니 이 남자 주머니를 계속 털어댈 뿐. 동전 몇 닢만이 간신히 나왔지만 술값으로는 미치지 못했지. 이 남자는 웨이터를 가련한 눈으로 쳐다 보았어. 안 되겠냐고? 웨이터는 단호하더군. 안 된다! 눈싸움이 삼십 분 가량 오고 갔어. 안 되냐? 안 된다! 이 남자는 거지였던 것이야. 하루 동냥질해서 번 돈을 생맥주 한 잔 값으로 날리는 것이었지. 하지만 그조차 생맥주 한 잔 값이 안 되는 것이었어. 그만큼 이 나라 물가도 엄청 비싼 것이지. 결국 이 남자가 술집을 박차고 나가더군. 그러다 오 분 뒤에 다시 돌아왔어. 웨이터 앞에다 생맥주 한 잔 값도 안 되는 돈을 획 뿌리더니 말하는 것이야. 팁이다, 임마!, 그러고 나가는 것이었지. 웨이터는 한 1분간 나간 현관을 쳐다 보다 그 돈을 계산통에 넣더군. 이것이 혹 서구 역사 합리성의 단면이자, 역사이지 않을까. 이 철저한 계급 사회의 합리성들. 빈부 차이의 뚜렷함. 자존심의 대립. 나는 유럽 여행 중 곳곳에서 이러한 것을 엄청나게 체감했어. 적개심들이 까다로운 계약 관계 속에서 위태롭게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야. ​ 가게를 나왔지. 씁쓸하지 않을 수 없었어. 그때 그 쫓겨난 예술인 친구들이 밤거리를 헤매고 있었어. 내가 약간 아는 척을 하니 처연하게 웃으며 지나가더군. 그들은 또 어디서 하루를 보낼 것인가. 그래, 유럽의 젊은 예술인들은 이렇게 길거리에서 보내지. 지하철에서 시를 팔던가, 길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하든가, 판토마임하던가, 춤을 추던가, 하여간 그 모든 것으로 하염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었어. 남한의 시인들은 길거리로 나와 시로 구걸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알량한 시인 레떼르에 헛기침하기 보다 큰 자존심으로 구걸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 김종화여! 너는 준비되어 있는가! 영화 속에 나오는 시품팔이에 감동되었던 바 있는 너이지 않더냐! ​ 제목 : 적대적 M&A ​ 나 같은 시인이 아무렇게나 내뱉는 한 마디는 너의 지하철 표값보다 비싸다 그만큼만 돈 내 놔, 이 자식아 그래도 내가 손해야. ​ 숙소로 돌아온 나는 새벽 기차를 타고 온 흑인 때문에 잠이 깼다가 잠들었다. ​ 다음 날에는 고심 끝에 브뤼헤를 가기로 했다. 브뤼헤는 건축학도들이 한번쯤 꼭 가보는 코스이다. 처음에 나는 멋진 옛 건축물들이 있는 곳인 줄 알았다. 그러나 헤매다 간 그곳은 관광 수입을 위해 새롭게 조성된 관광 마을이었다. 여기서 한 마디하자. 분명히 브뤼헤를 가는 기차를 탔는데 기차가 다른 곳으로 가서 이름도 모르는 시골 역에 도착하여 고생을 조금 했다. 나는 춥고, 바람이 몹시 부는, 썰렁한 브뤼헤를 걸어가며 관광했다. 건축학도들이 충분히 흥미를 느낄 만한 전원주택들의 연속이었다. 모두가 실제 살고 있었고, 아름다왔다. 하지만 그뿐. 사람들은 모두 어디에 있는 것일까. ​ 그때 아이들의 소란스런 웃음이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진원지로 향했다. 브뤼헤 작은 호숫가를 중심으로 유원지가 진원지였다. 새롭게 조성된 유원지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유원지였다. 그런데도 부모 손을 잡고 온 아이들은 매우 즐거워했다. 유치해 보이는 공포의 집도 있었고, 그네도 있었다. 하나 특이해 보이는 건, 그 추운 날씨에도 물놀이를 즐긴다는 것이었다. 수상 미끄럼틀이 그것이다. 아이들은 옷에 물이 젖는 것도 마다 않고, 수상 미끄럼틀을 탄다. 그래, 내게도 저런 때가 있었지. 아이들을 보는 부모들 마음은 아마 자신들의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지도. 그곳에서도 동양인은 유일하게 나 혼자여서 잠시 눈길을 끌었다. ​ 유레일 패스 십 일짜리. 두 달 동안에 하루씩 끊어 열흘을 이용하는 패스권. 그래서 나는 패스 사용에 신중할 수밖에 없다. 한번 쓰면 오만육천원이니 본전을 뽑아야 하는데... 나는 무작정 룩셈부르크행 기차에 올랐다. 시간이 된다면 보자. 그러나 룩셈부르크에 도착한 건 밤 8시. 브뤼셀 행 막차가 십 분 뒤에 있어서 도착하자마자 다시 브뤼셀 행. 승무원이 함께 왔던 승무원이라 잠시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마! 기차를 잘못 탄 것이겠지, 라고 생각했을 거야. 그 기차에 잠시 동안 유일한 승객인 내게 친절하게 대했지. 그도 심심하니까. ​ 밤 12시가 다 되어서 브뤼셀에 도착했어. 나는 매일 샤워하는 사람답게 샤워하고 라운지에 가서 일기를 썼지. 그런데 이곳은 12시가 되면 점등을 해. 출입도 통제시키더군. 숙소 정할 때는 이런 점도 참고해야 해. 할 수 없이 나는 새벽 2시까지 하는 호스텔 직영 바로 향했지. 그곳은 인심이 좋은 흑인이 술을 팔고 있었지. 나는 벨기에 흑맥주가 마음에 들어서 흑맥주를 마시며 일기를 썼어. 참, 그곳에는 컴퓨터가 있어서 인터넷이 되지. 좀 해볼까 했는데 다른 흑인 친구가 컴퓨터 팬이더군. 떠날 줄을 모르더군. 이들만 있었던 것이 아니야. 포르투갈에서 수학여행을 온 고교 친구들이 이십여 명 있었어. 그 친구들 잘 놀더군. 특히 노래를 잘 부르더군. 바 음악을 끄게 한 후, 자기네들끼리 기타치며 노래를 하는 것이야. 합창도 하다가, 갑자기 독창을 하더군. 주목할 만한 친구가 있었어. 한 여자애가 포크락을 부르는데 허스키한 음성이 듣기 참 좋았어. 게다가 기타 반주만 하던 친구가 딱 한 곡을 불렀는데 하드락이더군. 친구들이 다 게거품을 물며 좋아하더만. 나도 아낌없이 박수를 쳐주었지. 그리고 계속 일기를 썼어. 그런데 그중 한 친구가 내게 다가오는 것이야. ​ 버스? 버스? 버스? 오케이? 처음에는 2시까지여서 여흥이 더 생기니 버스를 타고 밖으로 나가 더 즐기자는 것인 줄 추측했지. 그리고 가슴 속에 양주 두 병을 내게 보여주더군. 술이 고프지만 돈 아끼려 참고 있던 차에 웬 떡이야? 그래서 나도 나쁘지 않다 여겨 예스 한 것인데 그게 아니더군. 그들이 자기네 방으로 나를 끌고 올라가는 것이야. 그리고 자기네들끼리 무슨 비밀 음모를 하는양 서로 사인을 보내고... 알고 보니 선생 몰래 수학 여행 때 나처럼 즐기려고 했던 것이야. 그리고 버스는? 다름 아닌 리버스 게임이었지. 우리의 숫자 게임과 요령이 같아. 특정 숫자를 지정한 뒤 그 수의 배수가 나오거나, 그 숫자가 포함된 수가 나오면, 버스!하면서 리버스, 즉 역순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나는 금방 알아차렸지만, 술이 무척 먹고 싶어서 자꾸 틀렸지. 벌주가 양주를 벌컥 마시는 것이거든? 내가 틀리니까 다들 배꼽 빠지게 웃어대고 좋아하더라. 알 게 뭐야? 난 서너 번을 계속 틀려가며 마셔대었지. 그러다 그들이 약간 눈치채었어. 또 틀리자, 많이 마셔서 취할 터이니 봐준다나? ​ 역시 어느 게임이나 자주 틀리는 친구는 있었어. 물론 나 같이 일부러 벌주를 마시려는 친구도 있었지만 말이야. 그렇듯 즐겁게 시간을 보냈지. 참, 이 비밀 모임에 들어올 때, 이들이 방문 두들기는 사인이 뭐냐면, 손가락을 구부리고 가운데 손가락 둘째 마디로 익숙한 가락으로 보내는 거야. 똑 또 로 로 똑 똑! <- 만국 공통의 상투적인 비밀 모르스 부호인가? 그때였어! 선생이 나타난 것이야. 문을 잠가 놓아서 문 열어! 하는 것이야. 아이들은 혼비백산했지. 술 감춘다, 잠잔 척 한다... 음냐, 그러면 나는 뭐야? 할 수 없이 정면 돌파하기로 결정했지. 당당히 나갔어. 선생이 황당한 표정을 짓더군. 당신은 누구냐? 왜 여기에 있느냐? 자기에게 설명해 달라! 그런 그의 집요한 질문에 나의 전술이란 뭐겠어? 양 손을 연신 휘두르며, 웃는 낯짝으로, I don't know!의 연속이었지. 별 수 있겠어? 조심하라는 소리밖에. 후후. ​ 그리고 나는 돌아와서 잠을 청했지. 아! 긴 하루였어, 오늘도. 다음 날 아침 숙소 떠나려 로비에 나오니 새벽의 전사들이 나를 대환영하는 것이었어. 나 때문에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고. 내가 선생에게 뭐라고 말했냐고. 그래서 모른다고 묵비권을 행사했다 하니 뛸 듯이 기뻐하며 잘 했다, 잘 했다 그러더군. 그들 사이에 끼어 개폼잡는 기념 사진을 찍었지. ​ 암스텔담으로 떠나는 시간이 조금 남아서 나는 무료라는 브뤼셀 미술관을 보러 갔지. (결혼 전에는 인사동도 자주 갔다만, 결혼 후에는 바깥 출입을 거의 안 하니...) 그런데 무료가 아니더군. 고심하다가 이왕 보는 것 특별전도 보기로 했어. 돈을 더 내야 하지만, 특별전이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말이야. 예상이 맞았어. 폴 뵈흐의 그림에 나는 신선한 충격을 받았지. 벨기에의 특징. 유럽 전 지역에 전차가 지나다니지만, 예로 부터 상업 도시화한 이곳. 전차선을 배경으로 나체의 여인들이 우울하게 갖가기 포즈를 취하고 있는 것이야. 베네룩스 미술을 소국이라고 우습게 여기지 말길. 내가 무식하지만, 이 친구들 소국이지만 뭘 하나 하면 딱 부러지는 스타일 같아. 자기 것에 대해 애착이 엄청 많아. 나는 베네룩스 삼국이 프랑스 말? 독일 말? 생각할 만큼 이들에 대해 몰랐거든? 벨기에만 하더라도 같은 나라인데도 두 개의 표준어를 지정해서 지역 별로 다르게 사용해. 거기다가 불어, 독일어, 영어도 아는 편이니 도대체 이 나라 국민들은? 이들은 더치인들이야. 더치인들도 한때 잘 나가던 때가 있었지. 인도네시아 동인도 회사라는 것 들어보았지? 잘 나가다가 영국, 스페인 등 강대국들에게 당한 것 뿐이라고. 더치 페이라는 말이 있을 만큼 이들의 상업력은 알아 주나 봐. ​ 하지만 소국이지. 양차 대전때 모두 침략당했고, 국토의 상당 부분이 주요 전쟁터가 된 슬픈 역사. 그런 그들이기에 남들보다 더 손해보지 않게 살고자 하는 걸까. 그들의 각박함이, 한푼이라도 더 관광객이 쓰도록 하기 위한 노력이 나를 무척 씁쓸하게 만들면서도 비난만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살아남으려고 바둥치는... 그 와중에서 폴 뵈흐를 만났던 것이야. ​ 나는 그나마 조금 남은 동전을 남김없이 사용하고자 대형 슈퍼에 들려 싸구려 빵 하나를 샀지. 그거 외에는 살 것이 없더군. 남들은 하나 가득 쇼핑하는데 대형 마트에서 싸구려 빵 한 조각 달랑 든 모습을 생각해 봐, 히히. ​ 그리고 나는 유로 버스가 오자 주저함이 없이 암스텔담로 떠난 것이야. 안녕! 브뤼셀! 안녕! 수전노들! 안녕! 뜻밖의 수학 여행이여! 헬싱키에서 일본 백수청년과 토론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4. 2:4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109166 통계보기 이 글은 외환위기가 있기 전 97년 초의 이야기입니다. 헬싱키에서 일본 백수청년과 토론하다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엄 유스호스텔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오랫동안 여행을 한 듯한 차림을 하고 있었다.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보니 일본에서 왔다고 했다. 나는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안녕하 세요, 감사합니다 등 간단한 한국말을 하는 것이었다. 나는 순간 놀 랐다. (그러나 이후 몇몇 일본 청년들이 내게 간단한 한국말을 하곤 했다. 나는 약 3개월 정도 일본말을 배우긴 했으나 한마디도 일본말 로 말하지는 않았다. 특별한 자존심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왠지 그냥 그렇게 해야 될 듯 해서이다.) 우리 대화는 서투른 영어가 매개체였 다. 나는 계속 물어봤다. 여행한 지는 얼마나 되었느냐고. 2년 계획 에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는 또 자신의 계획을 말했 다. 그의 계획이란 이제껏 중국 상해에서 출발하여 네팔, 인도, 이란, 아프리카 종단, 스페인, 오슬로, 헬싱키, 그리고 지금 모스크바로 가 기 위한 비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몽고를 통해 다시 중국으로 갔 다가 한국 서울에 들려 부산에서 배타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었 다. 그는 심리학을 전공한 서른살 먹은 사람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아울러 일본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것이냐는 말에 무계획이라며 자신 은 백수임을 강조해 우리는 함께 웃었다. 나와 다를 바 없었기 때문 이다. 나는 미묘한 감정에 휩쌓여야 했다. 백수라는 말 한마디에 국 경을 넘어 정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또한 마찬가지인듯 했다. 우리가 처음 만난 지점은 유스호스텔 주방에서였다. 그는 카레를 만 들고 있었고, 나는 한국에서 사온 인스턴트 쌀로 밥을 하는 중이었다 . 자연스레 우리는 식사를 마친 후 그가 끓인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였다. 그는 자신의 여행경로가 표기된 지도를 보여주면서 여러 나라 이야기를 하였다. 배낭 여행자들이 특히 관심이 있는 대목은 물 가라서 자연스레 물가 이야기부터 나왔다. "인도에서는 1불에 욕조딸 린 싱글룸을 잡을 수 있지요." 북유럽의 높은 물가고 덕에 관심이 가 는 대목이었다. 나는 이 일본인 친구에게 진심어 린 감탄을 하면서 당신이 부럽다고 말하니 이 일본인 친구는 매우 기 뻐하였다. 나는 사실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해당 국가 국민들이 혹 내게 자신의 나라는 어떠냐고 물을 때마다 늘 하는 말이 있었다. ' 내가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는데 유럽에서 최고입니다.' 그후 상투적 인 몇 마디가 추가되면 그만이었다. 나는 이 일본인이 DRUM(약 4~5 유에스달러되는 담배로 비싼 서구 담 배를 살 수 없는 젊은 여행자들은 종이에 말아 피는 이 담배를 선호 한다.)을 피고, 아프리카 친구들과 정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을 보며 상당히 국제화되었다고 생각했다. 간단히 표현하자면 겉만 국제 화된 일본인이나 한국인이 아니라 속도 어느 정도 국제화된 친구라고 보인 것이다. 그러나 성급한 판단은 금물이라는 생각에 이모저모를 물어보았다. 어디가 가장 좋던가? 아프리카라고 하였다. 그는 자기가 다녔던 나라 지폐를 모으고 있어서 내게 보여주었다. 무척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스페인에서 네덜란드 암스텔담까지는 열 차가 비싸니 버스를 이용했으며, 오슬로에서는 식당에서 일하며 돈을 벌었고, 그 돈으로 헬싱키에 왔다며 내게 오슬로 식당까지 소개해 주 는 것이었다. 영어도 평균 일본인보다 잘 하는 편이었는데 이 일본인 은 여행탓이라고 말했다. 일본인 특유의 속마음을 대화에서 찾아볼 수 없었다. 마치 한국 사람하고 대화하는 듯했다. 그리하여 나 또한 한국 사람처럼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국 사람들과의 대화가 아니 면 나는 철저히 계산해서 외국인과 말해왔기 때문이다. 이유를 나중 에 설명할 기회가 온다면 설명하겠다. 그와 이 이야기, 저 이야기하다 보니 그는 일본에 지친 듯했다. 가령 일본 경제 이야기만 하면 그는 일본 경제는 저물고 있다고 강조했다. 나는 그것은 일본 특유의 겸손함이다라고 강조하니 아니라고 말했다. 내가 일본 경제보다 한국 경제가 더 걱정이다라는 내 말에 오히려 한 국 경제는 지금부터이다라는 말을 강조했다. 나또한 한국 특유의 겸 손함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아니라고 말했다. 한 십여분간 일본 경제 가 더 어렵다, 한국 경제가 더 어렵다 옥신각신했다. 그는 이란에서 의 한국인 활동에 대해 경탄을 하며 말했다. (내가 만난 외국인은 그 다지 많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특기할 점은 외국인들이 말하는 한 국 대기업은 대우가 월등했다. 반면에 현지에 사는 한국인이나 해외 여행나온 한국인들은 삼성이나 현대를 말하고는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다만 혹시 삼성이나 LG, 현대는 유럽 대도시 한복판에 광고를 많이 싣는 편이다. 반면 대우는 못사는 나라 체코 등지에서 광고를 많 이 싣는데 이러한 상징적 예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일본인 친 구도 대우를 말했다. 나는 그가 매우 부럽다. 나도 시간이 된다면 남미 브라질에 가서 신 나게 놀고 싶고, 멕시코도 꼭 가고 싶고, 인도 히피 마을에도 가고 싶고, 아프리카도 종단하고 싶다고 말하니 그또한 자기 꿈을 이야기 하는데 대체로 나와 비슷했다. 그리하여 함께 사진도 찍었는데 한국 에 돌아와 현상하니 불행히도 현상이 되지 않았다. 우리는 이틀밤을 같이 묵었고, 여행자 특성상 인사도 없이 서로 헤어져야 했다. 그와 여러 이야기를 하면서 느낀 점은 나는 어쩔 수 없는 한국인이며,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본인이라는 점이다. 다만 우리가 서로를 느꼈 던 대목이 있다면 자신의 국가가 보다 발전하기 위해서는 자유롭고, 개방적이어야 한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느꼈다는 점이 아닐까? 그와 가장 인상깊게 나누었던 대화는 다음과 같다. - 그토록 2년이나 다닌다니 매우 부럽다. 당신은 프로인가? - 아니다. 일본에는 5년, 10년된 여행자가 무척 많다. 한국도 이 추 세라면 우리와 곧 같아질 것이다. (나는 유럽여행중에 이미 이러한 시도들이 한국 여행자들에게 일어난 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어 매우 기뻤다. 서구인들도 여전히 깃발 여 행을 즐긴다. 여행문화는 한 패턴이 절연되고, 다른 패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첨가되는 것이다. 한국인 여행자들은 현재 혼자 오 지만 혼자 다니는 걸 매우 꺼려하는 습성이 있다. 일본인은 더욱 그 렇다. 하지만 일본인보다 한국인이 훨씬 더 혼자 다니는 걸 꺼려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영어에 대한 공포는 일본인이나 한국인나 마 찬가지이지만 아직까지는 한국인이 더 공포스럽다고 할 수 있지 않을 까? 물론 영어를 하면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일본인보다 영어를 잘 한 다. 이 때문에 영어가 서툴러도 일본인과 대화시 영어로 하는 것이 매 우 유리하다. 당신도 영어를 못하지만 그보다 일본인이 못할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 당신은 2년이나 여행을 다닌다. 그러면 한곳에 오랫동안 있는 편이 니 그 나라 사정을 훨씬 더 잘 알 것이 아닌가? 매우 부럽다. (한국 종합상사와 일본 종합상사를 비교하면 현지화면에서 일본인이 앞서 있 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그의 경험이 일본인의 기 록 습관때문에 좋은 정보가치가 되리라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나또한 매일 일기를 쓰지만 여행 중에 일기를 쓰는 한국인이 몇 안 되었다는 점이 안타까왔다. - 하루 있으나 열흘 있으나 마찬가지 아닌가? 나는 감탄하였다. 맞다. 내가 삼십년 이상 서울에 있었지만 내가 서 울에 대해 얼마나 아는가를 선뜻 대답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에게 진지한 겸손함을 가르쳐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그 또한 매우 내게 고마와하는 눈치였다. 필요 이상으로 고마와한다면 예의바 른 것일 뿐이지만 서로 필요한 것을 나눠주니 진심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겠다. 한일관계는 지금도 불편하다. 또한 전후세대 한국 - 일본인들은 더욱 멀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전후세대 한국인은 보다 반일적이 되었으 며, 지난 세대보다 훨씬 컴플렉스가 덜 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어린 시절부터 무의식적으로 일본문화에 젖은 것 을 말한다. 반면에 일본인들은 아시아에 더 이상 얽매여 있지 말자고 말한다. 특히 미국에 대한 뿌리깊은 패배의식을 극복하려고 매우 열 성적이다. 이제 아시아는 버려라라는 이야기가 우익 인사 입에서 공 공연히 제기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한국 - 일본인들이 유럽 한복판 에서 마주하면 동양인으로 취급되는 것이다. 즉 서구 문명에 컴플렉스 지니기는 마찬가지인 동양인으로서 말이다. 이 점에서 한국 - 일본인 들은 중국인보다 자존심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본인은 한국인에 게 장사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라 말하지만, 아마도 중국인은 일본 인에게 장사를 위해서는 자존심을 버려라라고 장사에 대해 한 수 가르 쳐 줄 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중국인들에게는 넉넉 한 대륙 기질이 있다는 것이다. 삼국지적 중화주의자인 모택동 말에서 도 입증되지만 중국은 중국 것을 많이 포기해도 결국 중국화된다는 것 이다. 인구가 워낙 많기 때문이다. 그것이 중국 역사였다. 중국에 중 국왕조가 세워진 적이 얼마나 되더란 말인가? 반면 한국이나 일본은 작은 나라이기에 작은 나라가 갖는 자존심을 포기하기엔 벅찬 것이다. 중국인이 잘 나서라기 보다 인구 때문이라면, 이것은 양질전화의 중요 한 변증법적 사례인지 모른다. 우리는 이제서야 산아제한 정책이 선진 국 위주 정책이었음을 느끼고 있다. 이러한 정책의 반대가 바로 히틀 러가 수행했던 극우 정책이지 않았던가? 우리는 흔히 일본인보다 대륙 기질을 많이 갖추고 있다고 한다. 이러 한 넉넉함을 우리 생활에서 발견하고 발전시킬 방안을 없을까? 물론 중국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일 수밖에 없음은 환경 자체가 틀리기 때 문이겠다. 다만 일본인이나 우리가 강조해야 할 것은 대국적 견지에서 의 민족 정책이 아닐까 싶다. 토종이든 혼혈이든 상관하지 않되, 개개 인이 국가나 민족을 최종적으로 자유의지로 선택할 때 나는 한국인이 요, 일본인이요라고 말하면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지금까지 일본인 이 가장 실패한 듯하며, 중국인이 가장 성공적인 듯하다. 나는 그후 많은 일본인을 만났지만 이 일본인 친구로부터 일본의 잠 재력이 죽지 않았음을 느꼈고, 그 또한 나를 만나 그렇게 생각하기를 바랄 뿐이다. 열린 마음 속에 서로가 공존하는 자존심이 아름다운 세 계가 되기를! 안녕! 핀란드, 안녕! 누루미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5. 3:47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137672 통계보기 말을 타고 나타나 식사하는 나를 이상하게 여기고 관찰하는 핀란드 경찰 바이킹 섬에 놀러갔는데 한국 상표가 있길래 찍었음. 여기는 핀란드 헬싱키. 올림픽 스타디엄 수영장 앞 잔디밭. 지금은 천구백구십칠년 사월 십육일이지. 난 바케트빵과 태국산 참치와 코카콜라가 있는 점심식사를 끝내고 휴식중이야. 햇살에 온 마음이 쓰러져 눈도 스르르 감겨. 북구인들의 심정을 이해할 것 같아. 한국인들은 너무 행복해. 햇살 가득한 곳에서 살고 있으니... 네덜란드에서 여기까지 잘 왔다는 생각이 들어. 암스텔담에서 독일을 거쳐 코펜하겐까지 와서 열차를 다시 갈아탔지. 그런데 잠을 자려고만 하면, 열차가 쿨럭쿨럭 거려서 선잠을 잤어. 독일 승무원은 문고판을 열심히 보는 청년이었어. 원리, 원칙에 충실한 독일 병정을 보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설핏 잠들었다 깨보니 기차가 서있는 거야. 어? 하고 밖으로 나오니까 배안이었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것이었지. 잠에 취해, 술에 취해 바다를 보았어. 맥주를 먹으면서 바다를 보았어. 인드라, 너는 지금 북구 바다를 지나가고 있는 것이야. 동쪽 끄트머리에서 존재감도 없이 살던 네가 유럽 북구 바다에서 운치를 즐기고 있는 것이야, 감회가 어떠하니? 비장미를 느낄 정도야. 지상낙원으로 칭송받는 사회민주주의국가라는 북유럽으로 들어간다니... 밀입북하는 기분이 들어. 만일에 말이야. 만일에... 그 지상낙원도 단지 꿈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드라, 너는 도대체 무엇을 확인하려 하느냐. 난, 난, 단지, 진정한 꿈을 꾸고 싶었기 때문에, 때문에... 코펜하겐에서 다시 바다를 건너 가는데 국경 심사를 하더군. 여권과 표를 보여주었는데도 가방을 검사하자고 하더군. 동양인이어서 차별하나 하고 내심 반발했지만 참았지. 알고 보니, 마약의 도시, 암스텔담에서 왔기 때문이야. 국경 검사원들이 초고추장을 보더니 정색을 하더군, 무엇이냐고? 나는 당당하게 말했지. 코리안 소스~다, 먹어볼래? 냄새를 맡아보고는 정색을 하더니 지들끼리 뭐라뭐라 하더군. 이내 내 배낭을 다 털어내는 것이야. 쏟아진 하이네켄들. (물값이나 맥주값이나 그게 그거다 여겨 맥주로 대신한 거지, 뭘.) 그제서야 그들이 빙그레 웃더군. 예약하면 아침식사를 주니 먹어. 기차에서 아침을 맞이하며 먹는 기분이란! 아! 욕망의 끝은 있으나 끝장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구나. 마치 여행자의 서툰 발걸음처럼 헬싱보리에는 눈발이 내렸어. 스웨덴 기차로 갈아탔지. 볼품없는 관목들만 끝없이 무성한 풍경들. 도중에 인도네시아 친구를 만났지. 여행 중에 좀 뚱뚱한 미국 여자랑 만났나 봐. 미국 여성이 코펜하겐 친구를 만나러 간다는데 따라갈 심산인가 봐. 나보고도 같이 가자는 걸, 나는 내 일정을 이유로 정중히 사양했지. 사람의 심사는 이토록 꼬일까. 그토록 보고 싶던 스톡홀름. 스톡홀름에 도착하자마자 떠오른 건 스톡홀름 증후군이었어. 빨리 도망치고 싶었지. 모든 도시의 환상을 지워야 해. 어느 도시에도 있는 낙서들 같은 풍경들을 알려면. 낙서 탓이야. 뉴욕에도, 파리에도, 어느 대도시에나 있는 그 낙서들 탓에 나는 스톡홀름에서 떠나고 싶었던 것이야. 나는 무덤덤하고, 시계추 같은 만남을 떠나 낯설고, 불온한 만남을 기다렸지만, 저 낙서들처럼 다가오는 세계란 무엇인가, 나인가. 나는 나름대로 사민주의의 허실을 탐색해보겠다 작정했건만 직감적으로 들어오는 북구의 풍경에 나는 그만 도망치고 싶었어. 너무 빨리 좌절하고 싶지 않았어. 이토록 쉽게, 단번에 사민주의 지상낙원이 무너질 지 몰랐던 것이야. 나는 일정을 바꾸어 핀란드로 향했어. 핀란드 국적 실버라인 유람선을 탔지. 유레일 패스가 있으면 할인되기에 이용할만 해. 인천 - 제주행 유람선 탔던 경험이 있었기에 비교가 가능했어. 기대는 컸지, 초호화유람선이라 해서, 카지노도 있고 말이야, 허나 배는 배지, 모. 짐을 풀고, 12층 선셋 전망대로 올라가 맥주를 곁들인 식사를 했지. 저녁 노을이 서서히 지는 북해를 떠올려 봐. 좀 추워서 그렇지. 폼을 잡고 로맨티스트처럼 서 있으니까 지나가는 위인들이 전부 굿! 하더만. 그러다 동양인 여성이 나를 부르는 거야, 사진 찍어달라고. 발만 찍어줄까, 하다 제대로 찍어 주었지. 핀란드 대학에서 국제경영학을 공부중인 대만계 중국인이었어. 오빠도 같은 전공, 부모는 물론 중국집하고 말이야. 졸업하면 중국집을 기업화하는데 전공을 살리겠다더군. 도대체 화교들은 중국집을 하는데도 국제경영학을 공부하니. 저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어, 세상의 모든 곳에 중국집을 열겠다는... 핀란드에는 아직 중국집이 별로 없다더군. 일본, 한국 여성과 다르게 그녀는 무척 대담하고, 활발한 친구였어. 여행 중 내가 만난 중국 여성들의 특징이라고나 할까. 그녀와 헤어진 후 배 안으로 들어가 구경하다 살 물건도 없고, 레스토랑에서 비싼 해물요리 맛있게 먹는 것도 질투나고, 카지노도 별 재미가 없고, 피곤해서 그만 잠들었어. 헬싱키 도착이야. 중앙역에는 성냥팔이 아가씨처럼 체코 아가씨가 사탕을 팔고 있었지. 버스를 타고 올림피아드 유스호스텔로 향했어. 버스 승객 중 하나가 자꾸 내게 말을 걸더라구, 신기한가 봐. 보드카 같은 걸 꺼내더니 벌컥 벌컥 마시면서 말야. 한 핀란드인이 그 친구에게 주의를 주더니 내게 말하는 거야. 아이스 베어라고! 얼음 곰? 노숙자, 혹은 거지를 이렇게 말하나 봐. 그런데 핀란드에 도착하면 반드시 먼저 체크해야 할 일이 있어. 시차 조정. 런던 - 파리에서도 헤깔리더니 여기서도 대실수를. 올림픽 스타디엄을 찾긴 찾았는데 유스호스텔이 안 보이는 거야. 그 옆에 있는 수영장이 유스호스텔인 줄 알았는데 아닌 것이야. 간신히 찾았더니 오전 10시에 문을 닫는 것이었어. 이크! 핀란드에 도착하면 먼저 해야 할 일, 시차 조정. 런던 - 파리에서도 실수했는데 이런, 이런! 어쩌랴! 어디서 어떻게 버티랴! 다시 수영장으로 가서 아르바이트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청년에게 사정을 말했지. 몇 시간 동안만이라도 버티게 해달라고 말이야. 갖가지 쇼를 다 하니까 마음이 통했나 봐. 만세! 사우나하면서 기다리래. 헬싱키 시립생활체육관 같은 것이어서 안 되는 것인데 특별히 봐주는 것이라나? 히히. 그런데 그 수영장은 여름에만 하고, 봄,가을, 겨울에는 헬스와 사우나장이었어. 드디어 예정에도 없던 핀란드 원조 사우나를 한 거야. 그리고 이렇게 잠시 나와 식사를 하는 것이지. 푸른 하늘이 정겹고, 지나가는 핀란드인들이 동양 여행객을 보고 환하게 웃었지. 내가 그랬거든. 햇살이 좋아요!!! 이 곳은 잠실처럼 몇 개 체육관이 몰려 있는 올림픽 공원이야. 조깅을 할 수 있도록 잘 설계되어 있지. 말을 탄 경찰도 나를 보고 씩~ 웃고 가더군. 아! 밥을 먹었으니 다시 사우나를? 헬스도 할 수 있었는데 마침 특별회원들이 이용하는 시간이어서 하질 못했지. 다시 사우나에 들어갔어. 그 사우나에는 나 혼자만 있었구 말이야. 신나지? 그런데 그때 웬 핀란드 아가씨가 들어오는 것이야. 이런! 내 발가벗은 육체를 몽땅 보여주고 말았던 것이야. 에구! 에구! 아무도 없는 줄 알고, 아르바이트 아가씨가 청소하러 들어온 것이야. 서로 얼굴 붉어져서 아무 말 못 하고 있는데 아가씨가 나가더군. 그리고 조금 있다 다시 들어와서 특별룸을 사용하라는 것이야. 특별회원들만 이용하는 전용룸이었는데 이것이 내 알몸을 보여준 대가? 아가씨가 어디서 왔냐고 해서 코리아!라고 했더니 코리아! 그러더군. 나보고 여행중이어서 부럽다더군. 올림픽 유스호스텔은 바로 스타디엄 내부에 있었어. 4시에 문이 열려 들어가니, 유스호스텔 회원에게만 할인이 된다네? 나는 국제학생증(학생 아니어도 짜가로 만들 수 있음.)을 들이밀며 화이? 화이? 하며 뻔히 알면서 수작을 부렸더니 할인해주더군, 만세! 그곳에서 숙식하는 몇몇 핀란드 거지들을 만났지. 추운 곳이라 거지들은 이런 곳에서 생활해야 해, 정부 지원받아서 말이야. 핀란드인들은 북한, 남한을 구분할 줄 알아. 핀란드 역사에는 겨울 전쟁의 쓰라린 상처가 있지. 소련의 침공으로 스웨덴 등이 도와주었지만 졌지. 영토를 잃고 식민지가 되었어. 그리고 이만큼 큰 거야. 참, 인상적인 일본인 친구 만난 것은 언젠가 여기에다 쓴 일이 있지? 그건 생략할게. 아무튼 여름이 아니면 헬싱키 볼 게 별로 없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어. 그런데도 거기서 이틀씩이나 머물렀지. 왜냐고? 뭐냐, 그 알 수 없는 끈질기게 따라붙는 응어리 말이야. 나는 시내버스를 타고 다니기보다는 걸어다녔어. 나는 잘 걸어, 몇 시간, 하루 종일 걸어도 피곤하지 않은 편이야. 뭐? 타고난 파르티잔이라고? 하여간 한심한 나라이면서도 한심하게만 바라볼 수 없는, 스웨덴과는 다른 느낌이 분명한 핀란드인들 말이야. 북구인 특유의 오만함보다는 자신들도 간신히 이제야 먹고 살고 있다고 발버둥치는 듯한 핀란드인들을 보면서 나는 곧바로 떠날 수 없었던 거야. 미술관 가봐도 수준이 낮은 것 같아, 그래서 좋지, 뭘, 에구, 내가 뭘 안다고. 그리고 영어로 물어보면 부끄러워 도망치는 여대생도 있어. 끝으로 길거리에서 만난 어떤 핀란드 노인과의 이야기야. 자신은 모더니즘으로 황폐해가는 이 도시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자신은 클래식이 좋다는 거야, 인상적이지 않아? 이렇게 해서 시벨리우스의 핀란디아를 떠나게 되었지. 바이킹을 타고 갈까 하다 유레일 할인이 안 된다고 하여 다시 실버라인. 저녁에 잠이 안 와서 돌아다니는데 한국인들을 만났지. 핀란드 합작 중소기업 회사원들인데 업무차 왔다는 거야. 술 한 잔 먹자고 해서 그네들 방에 들어가 한 잔 했지. 과장이라는 사람이 이혼했나 봐, 이유가 뭔지 모르나 도박을 좋아하는 듯. 도박하자는 것이야, 카지노로 내려가 블랙잭을 하더군. 난 포카는 알아도 블랙잭은 몰랐거든? 거기서 처음 배웠어, 나보고도 하라고 해서, 조금 해보기로 했지. 근데 땄어, 마감시간이 되면 딜러가 일부러 좀 잃어주더군. 한국인들과 헤어지고 돌아오는데 핀란드 친구들이 부르는 거야. 화이? 그러니 술 먹자더군. 취한 김에 오케이 해서 공짜술 또 먹었는데 아이스 하키 선수들인 것이야. 무주 동계 유니버시아드에도 참가했다면서 마구 좋아하는 것이야. 나도 누루미를 알고, 스포츠 기념관도 다녀왔다고 하니 퍽 킹 누루미! 그러는 거야. 마음에 들었지. 우리는 술을 더 마셨는데 그 친구들 하나가 오바이트를 해서 그만 마셨지. 나도 취했고 말이야. 젊은이들이 하나 같이 박스채 맥주를 사와서 떠들썩하게 마셔대는 분위기였어. 국내 언론에서는 말하곤 하지. 어글리 코리안이라고 하면서 한국인들만 술에 취해서 지랄한다고 말이야. 꼭 그렇지는 않아. 영어권 숙소들을 주로 간 내 평가는 어떤 것이냐. 자신들 영역에서 다른 이질적 종족들이 주인인듯 군다는 것이 싫다는 것일 뿐. 즉 코리안들도 눈치를 보면서 놀아야 한다는 것이지. 유에스에이 넘버원따위 하는 애들처럼 눈치없이 놀면 욕을 먹게 되어 있는 거야. 지네들끼리만 낄낄 대고 놀기 보다 유럽, 남미 청년들과 함께 어울려서 놀면 아무 문제가 없어. 겉으로는 이렇게 말하지. 하여간 핀란드 놈들은, 프랑스 놈들은, 잉글랜드 놈들은 대책이 없어,하고 넌더리를 내지만 속으로는 자신도 즐기면서 인정하지. 그러하니 도를 넘기지만 않으면 되는 것이야. 즉, 주눅 들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만용을 부려서도 곤란한 것이지. 이렇듯 핀란드의 여행이 끝나가고 있었어. 안녕! 누루미! 안녕! 핀란드! 오슬로에서 수도승 뭉크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6. 3:17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169370 통계보기 구십칠년 사월 이십일이었어. 계획에도 없던 오슬로에 간 까닭은 전날 배안에서 핀란드 친구들이랑 술먹다가 결정한 것이었거든. 문득 뭉크가 보고 싶어졌어. 너무 추워서 그런 걸까. 북쪽에서 뭉클뭉클한 무언가를 맛보고 싶어했던 것이야. 이대로 남쪽으로 내려가기에는 어쩐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어. 스톡홀름에서 오슬로까지 가는 기차 안에서 본 풍경이란 침엽수림의 행진이었다고 할까. 불행히도 내게는 노르웨이의 숲을 감미할 재능이 없었던 듯 싶어. 반복된 빙하기로 인해 거의 평지인 이 동토에는 여름에도 슬며시 찬 바람이 불어 여행자의 호기심을 얼어붙게 하거든. 오슬로에 도착한 건 구십칠년 사월 십구일이었어. 나는 노르웨이 최대의 유스호스텔이라는 YH-Haraldsheim에 묵었지. 오슬로의 북쪽 교외에 있는데 오슬로 중앙역에서 내려 좀 걸은 뒤 전차를 타고 가지. 참고로 유럽에는 전차가 일반적이야. 전차를 타고 내려 푸른 잔디밭을 지나면 언덕 위에 유스호스텔이 있어. 이 유스호스텔에서 시내를 보면 오슬로 풍경이 다 보여. 원래 이 곳은 YH증이 있어야 하는데 나의 특유한 달변(?)으로 YH증이 없이 할인된 가격으로 묵었지. 노하우가 뭐냐고? 비밀이야. 첫인상은 좋지 않았어. 왜냐하면 처음 배정받은 6인실 돔룸에 들어가니 먼저 있던 친구들이 모두 자고 있는데 분명 자리가 하나 비어 있음에도 자리가 없다고 하는 거야. 자식들이 인종차별하네? 나는 그들에게 분명히 자리가 있다는 것을 말하고 난 뒤 안내 데스크에 가서 이야기했지. 안내 데스크가 방을 바꿔 주더군. 내가 그 방을 고집할 이유가 없었거든. 설사 그 방을 차지하더라도 내가 기분 나쁘잖아. 그래서 겨우 얻어 들어간 방에는 뜻밖에도 노르웨이 수도승이 있었던 거야. 특이한 경험이지? 이 수도승은 매우 연로한 사람이었어. 영화 제 7봉인에 나오는 그 수도승 같았어. 얼마나 고리타분한 모습이냐면 같은 노르웨이 사람들도 신기하게 볼 정도였거든. 노르웨이 지방에서 올라왔다는군. 그런데 나보고 계속 중국 사람이냐는 거야. 자기는 중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다면서 중국 찬미를 계속 하더군. 난 한국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한국이란 나라를 모르는 사람이었어. 중국의 일부쯤으로 아는 거야. 연로한 사람의 불명료한 액센트를 이해하자니 정말 힘이 들더군. 잘 하지도 못 하는 영어 실력인데 말이야. 아무튼 그 수도승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점은, 지독스런 노랑내였어. 노랑내는 보통 지하철에서 많이 나는데 이 수도승은 거의 노랑내의 화신이었어. 어느 정도 버티다가 난 신음하면서 휴게실로 도망갔지. 나는 휴게실에서 슈퍼에서 사 온 바게트빵에 잼을 발라 먹었지.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떠날 때 잔돈이 남는데 슈퍼에 들러 잔돈 모두를 먹을 것과 바꾸는 것이 중요하지. 아끼느라고 배가 고팠어, 하지만 어쩔 수 있나. 살 빠지는 소리가 곳곳에서 울리더군. 그러나 맥주도 있었지. 여행 내내 나는 유럽의 모든 맥주 맛을 음미했던 것이야. 맥주를 천천히 먹으면서 여행 일지를 쓰는 기분이란 묘하지. 휴게실 TV에서는 영화가 나오는데 더빙하지 않고 나오더군. 북구 유럽에서는 그래서 영어가 잘 통하는 편이야. 중남부 유럽과 다른 언어 정책이지. 어떤 것이 더 나은 지는 아직 판단이 안 서. 일지를 쓰고 있는데 한 장년 백인이 다가와 말을 걸더군. 스웨덴 사람인데 잦은 비즈니스 때문에 이 곳에 자주 온다는군. 나보고 스웨덴이 어떠냐고 그래서 무진장 좋다고 그랬지. 17개 도시 사람 모두에게 그런 소리를 했지, 푸하하하하~ 그런데 그 사람은, 핀란드 사람들을 싫어했어. 스웨덴과 핀란드 사람 사이에도 묘한 라이벌 의식이 있어. 아무튼 그 사람 말에 의하면 핀란드만이 북구의 수치라는 거야. 다른 북구 국가(노르웨이, 스웨덴, 덴마아크)는 바이킹의 후예답게 유럽 전체를 상대로 호령하던 시기가 있었던 반면 핀란드는 오히려 러시아에게 먹히는 등 치욕이라는 것이야. 나는 별다른 답변을 하지 않았지. 그 사람의 주장에 따르면, 덴마크가 북구의 자존심이라는 거야. 역사적으로 독일의 공세를 막아서일까. 아무튼 나는 기분 나빠졌지. 이렇게 오슬로의 밤은 깊어가고 있었어. 항만의 야경이 멋있었지만 을씨년스럽다 보니 즐길 여력이 없었지. 다음 날, 나는 뭉크 미술관을 찾아갔지. 내가 오슬로에 온 이유의 전부. 헬싱키에서는 한국인을 전혀 만날 수 없었는데 오슬로에서는 몇 번 만날 수 있었지. 별 인연 없이 곧 헤어졌지만 말이야. 뭉크 미술관까지는 지하철을 타고 갔지. 북구의 지하철에서는 다른 유럽 지하철과 달리 금연이야. 그리고 최근에 만든 것이라 청결한 편이야. 뭉크 미술관! 잘 꾸며진 지상 1층, 지하 1층의 미술관! 뭉크의 생가는 아니고, 뭉크 작품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인데 오슬로에서 가장 인기 있는 관광 코스 중의 하나야. 뭉크! 이 사람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머리털없는 인간이 귀를 막고 혼란에 빠진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거야. 유명하니까. 현대인의 불안을 잘 묘사한 작품이라고 비평가들이 격찬했거든. 그런데 이런 특정 작가 미술관에 가는 이유는 이런 유명한 작품을 보기 위함이 아니거든. 오히려 그런 유명 작품들은 유명한 미술관에 있는 것이 보통이지. 유명 작가의 유명 작품들은 유럽 미술관 곳곳에 있어. 나는 그저 뭉크가 뭐 하는 사람이었나 알고 싶었을 뿐이야. 그런데 웃기는 놈이었어. 마음에 들었지. 처음엔 별 인상적이지 않은 그림들만 있어서 짜증이 났는데 몇 가지 그림들이 눈에 띄었어. 불안 씨리즈라고 할까. 빨간 벽돌 건물 앞에 서 있는 뭉크 자화상들이 여러 개 있었어. 또 비슷한 구도로 아픔, 절망, 질투가 이어지지. 특히 질투가 압권이었어. 공원 숲에서 남녀가 애정 표현을 하고 있는데 이를 몰래 엿보는 뭉크의 고뇌가 담긴 작품이 질투야. 으하하하하! 나는 사실 작가의 자화상을 좋아하는 편이야.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작가를 나는 별로 인정하지 않지. 더더구나 근현대 작가일수록 말이야. 아무튼 뭉크의 누이가 아팠다는군. 병적인 섬세함이 있었던 듯 해. 그것이 추운 북구와 맞아떨어진 듯 싶고. 지하 1층에는 뭉크 일대기를 드러내는 사진 따위들이 있었어. 뭉크가 오슬로에만 있었던 건 아니고 미술 수업하러 유럽을 돌아다닌 모양이야. 아무튼 뭉크는 같은 그림을 REPAINTING하고 판화로 만드는데 무척 관심이 많았던 듯 해. 밖으로 나왔어. 햇살이 따뜻하더군. 북구에서 햇살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곧바로 찬 바람이 불거든. 그러하니 한국의 계절은 격찬받아도 모자랄 지경인 거야. 자꾸만 그 수도승이 생각났어. 뭉크와 수도승이 오버랩되었지. 왜 그랬을까. 나도 모르겠어. 다만 갇힌 이미지, 그 속에서 자신의 일에 탐닉하는 병적인 자아, 소통 불가............... 추위 때문인지 몰라. 웅크리고 서로에게 허용할 것없이 평행선을 달리는 까닭은. 내가, 혹은 뭉크가, 혹은 우리의 관계가 불안한 것은. 오슬로 국립미술관에도 들렸는데 거기엔 동양인 입양아로 보이는 예쁜 청년을 볼 수 있었어. 미술관 관리원인데 이 관리원들은 공무원으로서 상당히 높은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듯 싶어. 브라질 출신 유학생도 길을 가다가 만났지.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고 했는데 내가 춥다고 그러니까 자신도 추위는 질색이라며 배울 것도 없는 이 곳에 왜 왔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며 농담을 하더군. 국립극장앞 공원에서 추위에 떨며 빵 먹은 뒤 몸 풀려고 걷는데 21살의 한국인 청년을 만났지. 릴리 함메르를 다녀온 친구답게 약간 썰렁했지만 활달하고 씩씩한 청년이었지. 대부분을 기차에서 자는 그야말로 체력의 여행을 펼치고 있었는데 난 늙어서인지(?) 그 체력을 따라갈 수는 없었어. 이태리에서 위기에 처한 한국 여성 강간 미수 사건을 해결한 후 늘 스위스 칼을 손목에 지니고 다니는 이 청년과 함께 나는 오슬로를 떠났지. 정말 지겨운 북구. 제기랄 북구. 썰렁한 북구. 넘 춥다. (혁명을 위해선 무진장 추워야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안녕! 스칸디나비아! 퍽킹 팬덤 오브 오페라/런던에서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20. 2:3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287544 통계보기 구십칠년 사월 사일이었어. 한국을 떠난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지. 누군가는 일찌감치 고향 생각에 눈물 찔끔한다는데 적어도 인드라는 아니었지. 혼자서 신나게 런던을 돌아다녔던 거야. 그러다 오페라의 유령(Phantom of Opera)하는 극장 앞을 우연히 지나간 거야. 이게 바로 그 유명한 오페라의 유령을 하는 극장이로구나. 극장 이름도 기억나지 않아. 하지만 다시 간다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어떻게 찾느냐고? 간단해. 옥스퍼드 서커스역이나 피카디리 서커스역이나 레스터 광장역 중 지하철 역 아무 데나 내려서 무작정 헤매면 돼. 이 곳은 서울의 대학로쯤 된다고 보면 돼. 역과 역 사이 거리가 무척 좁으니 역 하나 통과했다고 걱정할 것 없어. 종로 5가역과 혜화역 사이에 역 하나 더 있는 셈이고, 지하철이 사방팔방으로 연결되어 있으니까 말야. 아는 사람 아무도 없고, 말도 통하지 않은데 걱정된다고? 그러니 좀 실수해도 쪽팔리지 않지. 말이 안 통하면 만국공통어가 있잖아? 손발짓. 지나가는 사람 붙들고 헤이~, 팬텀 오브 오페라하며 폼을 잡아봐. 그래도 영어 써야 한다고? 훼어? 팬텀 오브 오페라? 그러면 대충 알아 들어. 굳이 정석 영어 쓸 필요가 없어. 물론 알면 다 써도 되지만 정석 영어 써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소통하길 겁내한다면야 우스운 것 아냐? 1단계를 통과했지? 다음 단계는 뭐겠어? 극장으로 무조건 들어가는 거야. 그러면 표파는 데가 있어. 그러나 무척 인기 있는 공연이어서 표가 없을 거야. 그러니 당신은 예약하든가, 암표를 사든가, 인드라처럼 극장 옆에서 줄을 서야 해. 여행 출발지와 기착지를 모두 런던으로 하고 한두달 기간을 설정했다면 예약 창구에 가서 예약할 수도 있어. 신용카드도 되니 안심하라고. 그러나 대부분은 며칠 묵는 여행자라서 예약이 어려울 거야. 그래서 많은 여행자들이 암표를 사지. 그러나 비싸. 보통 두세배를 호가해. 꼭 보고 싶다면 암표라도 사서 봐야겠지. 돈 아깝다는 생각은 공연보고 하루 지나서 생각날 터이니까. 위의 방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인드라처럼 줄을 서는 방법 외엔 없어. 예약 손님들이 취소한 티켓을 당일 공연 직전에 한해 판매하는데 할인은 없어. 어느 여행지에는 할인이 있다고 나오는데 이건 인기 별로 없는 오페라에 한한 거야. 인기 많은 오페라에는 할인이 없어. 그리고 극장 외에 레스터 광장 등에서 티켓을 팔기도 하는데 역시 인기 있는 오페라 표는 구하기 힘들어. 있다 해도 수수료가 붙지. 학생 할인도 없어. 인드라는 가짜 국제학생증을 만들어 갔지만 말이야. 괜히 인드라처럼 국제학생증 내보이며 디스카운트를 외칠 필요는 없어. 그런데 줄을 선다고 해도 표 구하는 건 하늘의 별따기일 수 있어. 인드라도 삼일 도전해서 간신히 표를 구했으니까 말야. 핵심 포인트는 다음과 같아. 혼자 서 있으면 제일 유리하고 숫자가 많을수록 불리해. 앞에 서 있어도 일행이 많으면 티켓 구할 확율이 그래서 적지. 반대로 뒤에서 줄 서 있다해서 오늘 공연보기는 틀렸다고 비관할 필요없어. 공연 시간이 다가오면 극장 관계자가 줄 서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와서 말해. 한 좌석 팝니다. S석 사실라우? 혹은 세 좌석 팝니다. 싸구려 좌석인데 사실라우? 좌석 등급에 따라 가격 차이가 심해. 당시에는 1파운드당 1500원대쯤 했는데 10파운드대에서 30파운드대까지 다양하거든. 하지만 보기 어려운 공연이니 좌석 있는 대로 사. 돈 아깝다는 생각 마. 그 돈 축낸 걸로 적당히 굶으면 되니까. 오케이하면 관계자가 메모를 하고 메모지를 주고 해당 좌석을 알려 줘. 그걸로 끝이 난 것이 아니야. 극장 안으로 들어가 티켓 구입하는 곳으로 가야 해. 그곳에서도 줄을 서는데 서 있다가 자기 차례가 오면 창구 앞에 그 관계자가 옆에서 안내하고 있으니까 아까 배정받은 좌석을 말하면 돼. 그리고 돈을 내면 (신용카드도 됨.) 창구 직원이 표를 주는 거야. 인드라는 삼일 동안 줄 서 있다가 간신히 구한 거여서 다소 비싸더라도 최상급에서 한 등급 낮은 석(5파운드 차이남.)을 구했어. 인드라 경우에는 관계자가 헤깔려서 최상급 표를 주었다가 인드라가 처음보다 더 돈을 내라 해서 의문을 표시하니 앞뒤 사람이 바뀌었다며 다시 표를 바꿔주었어. 최상석은 0층(우리식으로 하면 1층) 앞자리들과 가운데 자리들이 특석이야. 그 다음으로 좋은 좌석은 0층 뒷좌석들과 0층 좌우 변두리 좌석인데 인드라가 배정받은 좌석은 오른쪽 맨변두리 좌석이었지. 하여간 드디어 인드라는 표를 산 거야. 진한 감격이 밀려 오더군. 혹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표를 확인, 또 확인하고 고이 지갑에 넣어두고 극장 옆에 나와 담배를 맛있게 피웠지. 그러고 있으면 암표 장수가 와서 싱긋 웃으며 티켓? 하고 물어. 그때 의연한 미소를 지으면 되는 거야. 그 기분이란! 암표 장수는 한국 암표 장수와 하나도 다를 바 없으니 신기하게 쳐다 볼 필요없어. 그렇다면 줄을 언제부터 서는 것이 좋은가? 일찍 설수록 좋지. 관광 포기하고 점심 먹자마자 와서 줄 서 있으면 아마 맨 앞에서 줄 설 가능성이 있어. 그러나 그럴 필요까지야 있나. 공연 입장이 한 7시 반 정도(실제 시작은 8시 훨씬 넘어서)부터 하니까 너무 늦게 가면 안 되고 점심 먹고 박물관 한 군데 정도 들리고 4 ~ 5시쯤에 가면 될 거야. 혼자라면 더 늦게 가도 된다고 인드라는 봐. 인드라는 그때 6시쯤에 갔으니까 말야. 처음에는 같은 비행기 탄 한국인 두 명과 함께 줄을 섰다가 낭패를 보았지. 그때 그 씁쓸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 귀한 시간 다 망친 거 같아. 여행 초기에는 돈만 아깝게 여겨지지만 여행 후반으로 갈수록 시간도 아까와. 그러하니 이 돈과 시간의 함수를 잘 이용할 필요가 있어. 돈 곱하기 시간해서 일정한 상수값을 만들어야 해. 그게 여행 요령이야. 이처럼 볼만한 볼거리에는 아낌없이 돈을 투자하라고. 나중에 보니 돈 아낀다고 안 본 사람들 땅을 치며 후회하더라. 영국 물가가 살인적인 데다가 급한 마음에 유럽 대륙으로 뜰 생각하다 보니 그렇지. 아무리 한달 일정이라도 꽉 짜인 계획표를 정할 필요없어. 어차피 현지에서 수정하다 보면 휴지 조각이 되기 일쑤이니까. 그렇다고 아예 계획을 짜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니야. 넉넉하게 틈새를 많이 만들고 짜라는 것이지. 인드라는 공연보기도 전에 이 감격을 보존하고자 팜플릿을 사고 말았던 거야. 에구구, 딱 그 돈 더 하면 최고석으로 구경할 수 있었을 터인데. 나중에 참고할려고 산 건데 음, 솔직히 팜플릿 보면 졸려. 그리고 여행 중에 쓸 데 없이 쓰지도 않는 걸 가지고 다니다 보면 잃어버리거나 무심코 쓰레기통에 버릴 수 있음이야. 아무튼 남들 다 산다고 자기도 사야 한다는 강박을 갖지 말길 바래. 그리고 극장 안 0층에는 예약 창구, 당일 판매 창구, 팜플릿 판매대 말고 오페라의 유령 기념품 파는 곳이 있는데 거기도 사람 몰린다고 따라 살 필요는 없어. 사고 싶으면 사는 거야. 날이 어두워지자 인드라는 극장 안으로 들어갔어. 비S석은 계단을 통해 올라가고 S석은 지하로 내려 가는데 인드라는 S석이니까 티켓 검사를 받고 지하로 내려 갔지. 지하로 내려 가면 다시 안내인이 있어서 비로소 표를 내고 지하홀로 들어가는 거야. 별 게 아닌데 남의 나라이니까 하나하나가 신경 쓰이지. 아기 걸음마처럼 말이야. 지하홀은 바야. 여기서 손님들은 공연 전까지 술을 마시고 동행자와 떠들고 그래. 대부분 유럽이나 미국에서 온 여행자들이거나 영국인 조금이야. 약간 좀 사는 유럽인들은 이런 까페에서 술을 마시나 봐. 못 사는 유럽인들은 그냥 길거리에서 마시는데 말야. 시장바닥처럼 바글거리는데 마치 많이 본 영화의 한 장면 같아. 무슨 사교클럽 같지. 아무튼 엄청 떠들고 담배 피면서 술이나 음료수를 마셔. 참고로 이러한 바에서 파는 건 뭐든지 시중보다 훨씬 더 비싸니까 알아서들 마셔. 그리고 한 편에서는 역시 기념품 가게가 있는데 여기서는 주로 오페라의 유령 옷과 CD 등을 판매해. CD를 살까 했으나 엄청 비싸서 포기했는데 나중에 살 껄 하고 후회했지. 아무튼 역시 자본주의다운 나라야. 며칠만 있어 보면 알아. 무엇이든지 이렇게 상품화되어 있고, 돈에 따라 사람도 등급이 매겨져 있는 듯이 보여. 런던 유명 백화점에는 정장 하지 않으면 못 들어가거든. 우리네 문화는 이것이 아직 미등급화된 형편인데 자본주의가 앞선 나라들은 아주 이것이 철저하더만. 계급사회라는 걸 조금만 있어도 알 정도야. 드디어 입장이야. 긴장하며 극장으로 들어갔지. 그런데 인드라 옆좌석에 동양인 여자애 둘이 앉아 있네? 아까 맨 앞에서 줄 서 있던 아가씨들인데 어느 나라 친구일까? 한국계? 일본계? 중국계? 어느 쪽이었으면 좋을까 그때 잠깐 생각했지. 모, 어느 쪽이라고 무슨 수작을 걸어볼 생각은 없었어. 다만 그간 워낙 헌팅을 한 경력(?) 때문인지 준비가 절로 되었을 뿐이지. 결정을 빨리 내렸지. 일본 여자애들이었으면 좋겠다. 한국 여자애들이랑은 많이 이야기했고, 앞으로도 지겹게 이야기할 터이니까 그리고 중국애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호감을 가지게 되었지만 원래 중국에 큰 관심이 없었던 데다가 그때만 해도 여행 초기였었거든. 하나씩 지워가는 내거티브 선택을 하다 보니 그런 결정이 났던 거야. 대선도 아닌데. 과연 어떤 애들일까. 그런 궁금증은 싱겁게도 금방 끝났어. 앉자마자 들리는 소리가 일본말이었거든. 그네들도 뭐라고 팜플릿을 보며 계속 떠들더군. 흥분했나 봐. 사람이란 그런 걸까. 이러한 반응을 보면 오히려 차분해지는 거야. 아무리 술에 취하더라도 옆에서 더 취하면 깨듯이 말이야. 친구가 격한 감정을 감추지 않으면 꼭 옆에 있는 친구가 자기도 흥분했으면서 한마디 하잖아. 자, 이성을 찾고 생각을 정리하자고. 인드라가 그런 꼴이었지. 인드라는 무진장 침착하게 오페라를 기다렸어. 유럽 관객이라고 서울에 있는 극장 관객과 다를 바 없었어. 다만 극장이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전통 양식으로 치장한 극장이다 보니 분위기가 다소 이국적이었던 것뿐이지 사실 피카디리나 단성사 극장에 온 기분과 다른 느낌이 아니었다고 봐. 단지 검은색과 울긋불긋한 색의 머리색깔 차이라고나 할까. 아! 드디어 오페라를 보게 되는구나. 영어를 잘 하지 못 한다고 걱정할 필요는 없어. 줄거리를 모른다고 분통해 할 필요도 없어. 분위기만 느끼면 되니까. 대형 샹젤리제가 갑자기 천장에서 날라와 관객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가 무대 위에 올라서고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 위에 주인공 유령이 있다든지, 정말 나룻배가 움직이는 것처럼 움직인다든지, 무대장치가 변화무쌍하게 돌아간다든지, 조명이 말할 수 없이 아름답다든지, 오페라 가수들이 가창력이 뛰어나다든지 각자 느끼는 대로 느낄 따름이야. 다만 뮤지컬 영화를 좋아하긴 하지만 오페라를 생판 모르는 인드라 같은 사람이 보기에도 좋았어. 인드라가 눈여겨 보았던 점은 관객 반응인데 틈만 나면 박수치는 거야. 그래서 생각했지. 클린턴이 연설할 때 청중들 엄청 박수치던데 그때마다 별 건덕지없는 내용 가지고 그러네 하고 생각할 게 아니다라고 보았어. 문화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런 건 배울만 하다고 봐. 아무래도 박수 많이 치는 쪽이 좋지 않을까. 그리고 형편없으면 그만큼 더 야유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술에 술탄 듯 물에 물탄 듯 하는 것보다 말이야. 감정을 솔직히 털어 놓는 것이 보다 라이브 맛이 나는 것 아닐까. 다만 형식적인 감이 있어서 거부감이 있긴 했어. 어쩌면 이렇게 훌륭하고 소문난 오페라도 결국 관객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닌가 하는 판단도 해봤지. 관객 행색들이 인드라 같은 여행자 빼고 모두들 정장 차림인데 관객들이 아까 술을 많이 먹어서인지 감정 배설을 잘 하더군. 그래, 배설이야. 이런 걸 제대로 못 하면 한국인 특유 문화병인 화병이 생기지. 그때 그때 잘 풀어주어야 해. 끝났어. 인드라는 대실망을 하였지. 아니, 그런데 한 시간도 채 되지 않는다 이 말인가? 사람들이 빠져 나가자 허탈해 하며 본전 생각이 나더군. 짜증나서 나와 나가려는데 문이 굳게 닫혀 있었어. 아! 어쩐지... 단지 1부가 끝났음이야. 쪽팔려라, 하지만 인드라가 이런 지 아무도 모르니 괜찮아!!! 또 술 마시더군. 관객들은 대부분 흥분한 거 같아. 마구 떠드는데 암튼 오늘 작정하고 스트레스 푸는 것 같더라고. 그래, 축제는 난장이야. 위선 떨지 말고 신나게 놀아야 해. 왜 우리는 이런 난장을 막고 쓸 데 없이 공자왈 맹자왈 해야 하는 걸까. 그저 있는 것이라고는 연고제 따위여서 다른 사람들 짜증나게 하는 것뿐이잖아. 제대로 된 끼리끼리 문화가 없어서 그래. 그저 학연, 지연, 혈연에 얽매인 요상한 문화만이 판쳐서 그렇지 않을까. 바로 이러한 문화 타파가 필요한데... 2부가 시작되었어. 오페라를 잘 모르지만 형식이 있는 것 같아. 주 테마곡이 끊임없이 편곡되어 흐르지. 그리고 주제곡과 더불어 러브송이 꼭 끼고 말야. 히트친 디즈니 영화 곡들도 보라고. 이 두 가지이지. 다 좋지만 역시 들을 노래는 이 두 곡이었어. 아울러 주인공들이 아무래도 목소리가 시원스럽다는 인상이 들었지. 배역은 모두 더블 시스템이어서 일주일 혹은 보름마다 바뀐다더군. 아. 점차 갈수록 감동이 느껴지더군. 돈이 아깝지 않았어. 공연이 끝나고서도 한참 있었지. 아마 일본애들이 나가면서 애 뭐 하나 했을 거야. 아무튼 인드라는 오케스트라가 있는 무대 앞에 가서 정리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했지. 다음에 혹 본다면 오케스트라 지휘자도 볼 수 있는 데서 보아야겠다는... 그리고 꼭 S석만 고집할 필요는 없어. 다양한 각도에서 본다면 더욱 좋은 느낌이 있으리라고 봐. 그래서 한 번 본 사람들은 또 보는 확율이 높다더군. 하지만 한 번만 봐도 돼. 사람들이 앞다투어 CD를 산다 뭐한다 난리더군. 극장을 나오니 어두컴컴했지. 테마곡을 흥얼거리며 감동을 이어가려고 했어. 인드라가 기분 좋으면 어떠한 지 아는 사람은 알잖아. 혼자 얏호! 하며 온갖 폼을 잡으며 걸어가는 거야. 근데 한 가지 말할 것이 있어. 줄 서 있는데 한 흑인 꼬마가 왔다갔다 하면서 퍽킹 잉글랜드, 퍽킹 오페라, 퍽킹 팬덤 오브 오페라하며 퍽, 퍽, 퍽 하는 거야. 멋있더라. 흑인 꼬마가 옳아. 퍽킹 오페라! 우리는 있는 여건에서 잘 나게 살아 보려고 애써야 하는 거라고. 기죽을 필요가 없지. 최근 오페라 선두를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런던 피카디리로 뺏어온 런던이지만 배울 건 배워야겠지만 그렇다고 한숨 쉴 필요는 없다고. 어차피 이런 것 수입해서 암만 잘 만들어도 키치가 아니겠어.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 비인에서도 하고 유럽 여러 곳에서 하는데 런던에서 특히 인기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물론 가장 수준이 있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일단 영어권이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엄청난 제작비가 들어 웬만한 오페라 대가도 흥행 참패하면 큰 시련을 겪는다는데 말이야. 런던 유명 오페라가 여행객들이 없다면 유지될까? 미스 사이공 같은 몇몇 오페라 빼고 다른 오페라 극장은 파리 날려서 죽을 쑤고 있던데 말이야. 이 시스템 역시 1등만 살아 남는다는 철저한 자본주의 방식이 아니냔 말야. 런던에서 똥 싸면 서울에서 보약이 된다는데. 아하! 그래서 요즘 문화평론가들이 공연 문화에 심취되었군, 그래? 여행 자유화가 만들어 낸 문화지형이구나. 그래, 세계 최고를 얄짤없이 인정하자고. 줏대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날 오페라의 유령이 내내 인드라 귓가를 맴돌면서 이런 고민을 했어. 오페라의 유령이 재미있는 이유? 이런 글쓰기를 할 수 있기 때문에 재미나다, 어쩔래? 배째라. 로마의 휴일에 그녀들을 다시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5. 23. 3:58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3127525 통계보기 1997년 5월 2일 휴일 아침을 로마에서 맞이하다. 그녀들과는 베니스에서 잠시 헤어졌어. 나는 유로버스를 타야 했고, 그녀들은 기차를 타야 했으니까. 로마 테르미니역에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했지. 전날 오후 11시경에 베니스에서 유로버스를 탔어. 유로버스는 밤새 달려 로마에 도착한 것이야. 그런데 차안에서 잘 수 있으리란 기대는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기차는 모르지만, 버스는 너무 많이 흔들리고, 자리도 비좁고... 나는 거의 잠을 이루지 못한 채 뜬눈으로 밤을 새웠지. 그런데 유로버스가 도착한 곳이란 맙소사! Roma 교외의 sevenhill이라는 캠핑장이었어. 2002년 월드컵 때 상암월드컵경기장 주변 난지도에 이런 개념의 캠핑장이 들어섰던 적이 있지. 캠핑카를 타고 왔거나 캠핑을 즐기는 이들을 위한 숙소였어. 하지만 난 캠핑할 준비를 해오지 않았거든. 짐이 무거울 듯싶어 침낭 같은 걸 준비하지 않았는데... 큰일났다 싶었지. 그녀들과 약속을 했는데 인적이 드문 로마 교외라니... 시간을 알아보니 테르미니역으로 가는 버스가 오긴 오는데 약속시간이 9시인데 9시 반이나 되어야 온다는 것이야. 아쉽지만 캠핑장을 떠나기로 했어. 참 떠나기 전에 이 캠핑장에는 타조를 방목해. 깜짝 놀랐지. 타조가 제 멋대로 숙소를 왔다갔다하는 것이야. 캠핑장을 나와 큰길로 나가는데 한참 걸렸는데 외롭지는 않았지. 왜냐? 일본 여성 한 명도 동행했으니까. 캐나다 벤쿠버에서 공부하는 유학생이었어. 유학 중에 유럽여행을 하러 온 것이야. 일본 여성치고는 다소 큰 키에 까만 뿔테 안경을 썼지. 배낭을 메고 한참 걸어서 큰길가까지 나오는데 말이 거의 없는 거야. 몇 마디 나눴지만 내 발음이나 일본인 영어 발음이나 막상막하여서 서로 못 알아듣는 것이 많으니까^^. 차를 좀 기다리니까 시외버스가 도착했어. 버스에 오르다 보니 사람들이 버스표를 내는데 우리는 없었지. 순간 당황했어. 그때 한 흑인 청년이 나를 향해 빙긋 웃더니 버스표를 공짜로 주는 거야. 얼마나 좋아~. 정말 고맙지. 하지만 나만 생각할 수 있나? 받은 버스표를 그녀에게 건네주니 그녀가 당황하면서도 고마워하더군. 그리고 난 돈을 내려고 주머니를 뒤적거리면서 버스기사 눈치를 보는데 버스기사가 날 한번 획 쳐다보더니 무표정한 얼굴로 그냥 문을 닫더군. 버스는 혼잡했어. 게다가 출근길이었고. 한참을 갔는데 테르미니역인가 싶었더니 그것도 아니었어. 테르미니, 테르미니 하니까 버스를 갈아타야 한다고 버스 기사가 알려주더군. 종점에 도착하니 버스터미날이었어. 여기서 다시 다른 버스를 타고 테르미니역까지 가야 하는 것이지. 해서, 나는 티켓을 사러 갔다왔더니 그녀가 사라진 것이야. 쳇, 대가를 바라지는 않았지만, 아무런 말도 없이 사라질 수가 있나? 나보다 더 급히 시내로 갈 이유가 있었던 듯싶더군. 그냥 떠나는 버스를 올라탄 듯싶어. 하여간 나 역시 버스를 타고 드디어 로마의 테르미니역까지 간 것이야. 드디어 도착한 시각이 오전 9시 10분. 약속시간보다 십분 정도 늦었는데 괜찮겠다 싶었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는 것이야. 삼십분 이상을 기다렸는데도 없는 것이야. 계속 기다릴 수는 없지 않겠어? 포기하고 짐을 맡긴 뒤 무척 졸렸지만 시간이 금이니까. 그리고 한국인 신혼부부를 도중에 만나 어디 가냐 그러니까 바티칸으로 간다고 해서 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에 바티칸으로 간 것이야. 바티칸에는 메이데이 공휴일이었기 때문에 사람이 엄청나게 많았어. 바티칸으로 들어가려면 엄청나게 줄을 서야 하는 것이야. 줄선 사람들에 질려서 신혼부부와 헤어져서 그냥 바티칸 광장 구경이나 하자고 광장으로 갔어. 아! 이럴 수가. 그녀들을 만난 것이야. 셋 다 놀라서 그 자리에서 한동안 얼음인형이 된 채 있을 정도였어. 그 수많은 인파 속에서 우연히, 정말 우연히도 그녀들을 만난 것이야. 그녀들이 말했어. 우리가 뭐 영화 찍을 일이 있냐, 이게 뭔 일이냐... 이제 만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만났으니 참으로 놀랍지 않느냐 이 말이야. 우리는 배가 고팠기 때문에 피자집에 들려서 피자를 맛있게 먹었지. 정통 이태리 피자! 한국 피자랑은 맛이 다르지. 줄이 조금 줄어드는 기미가 보여서 바티칸 박물관 구경을 하러 나섰지. 와우! 바티칸 박물관 환상적이더군. 천장이며, 벽이며, 아무 데나 눈길을 주어도 보이는 게 온통 미술품이야. 입장할 때 국제학생증 제시하면 할인을 받으니 참고하길 바래. 26세 이하지만 동양인 얼굴로만 보면 열 살 아래로 낮게 보니 통과 가능해. 우리들은 바티칸을 나와서 콜로세움으로 갔지. 로마는 도시 전체가 유적이야. 무너지면 무너진 대로 보존하고 있나 봐. 이러니 이런 대목에서 북유럽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듯싶어. 그들은 어쩌다 파야 나오는 유적이 노천에 그냥 깔려 있으니까 말이야. 게다가 강렬한 햇빛이란... 이탈리아는 분명 관광 수입만으로도 어느 정도 먹고 살 듯싶었어. 우리는 마지막으로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진실의 문'으로 갔어. 오드리 헵번의 깜짝 놀라는 장면 기억이 나지? 쳇. 영화는 역시 영화야. 영화에서는 뭔가 그럴 듯한 장소였지만, 막상 와보니 별 게 아니었어. 무척 시시한 곳이라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래. 그래도 다들 한번씩 와서 손 집어넣고 가지. 영화의 힘이란... 우리도 역시 손을 넣은 뒤 서로 놀라는 표정을 지어봤지만, 짜증만 날 따름이었지! -_- 서서히 해가 지고 있었어. 나는 물론 그녀들도 너무 피곤해서 일찍 들어가서 쉬기로 했지. 이번에는 처음으로 한국인 민박집을 택하기로 했지. 우리가 묵었던 한국인 민박집은 로마에서 유학중인 여성이 운영하는데 라면 밥을 모처럼 먹어서 기분이 짜릿했어. 밥을 먹고 난 뒤 씻고 나오니까 그녀들과 다른 여성들이 계속 수다, 수다... 어떻게 로마에서 이처럼 우연히 또 만날 수가 있느냐면서... 하필이면 유부남과 인연이라느니, 유부남만 아니라면, 어쩌구 하면서 수다, 수다... 대단하다. 대단해... 피곤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난 좀 누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잠이 들었어. 하긴 따지고 보면 약 40시간 동안을 자지 않은 셈이니까. 이렇게 로마의 휴일이 지나가고 있었어. 프라하 레두타 재즈클럽에서 인드라 취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8. 26. 6:1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6555959 통계보기 레두타에서 공연하는 연주자들 찍은 장소는 잘츠부르크 숙소이지만 이들은 프라하 숙소에서 친해진 호주인들. 둘은 연인 사이. 카를교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인 여행자와 함께 맥주를! 체코 전통 포퍼먼스 그룹의 카를교에서의 포퍼먼스 바츨라프 광장에서의 길거리 예술가들의 공연 바츨라프 광장에서의 길거리 예술가들의 공연 2 나는 97년 4월 23일에서 4월 26일까지 4일간 체코 프라하에 머물렀다. 유럽 도시 중에 바르셀로나 다음으로 아름다운 도시인 점도 있지만, 바와 숙소를 겸한 영어권 게스트하우스 하루 숙박비가 삼천원일 정도로 부담이 없었던 것이다. 숙소가 도시 중심부와 떨어져 있어 바츨라프 광장까지 걸어서 삼사십분 정도 걸리기에 지하철을 타야 했지만, 나는 나흘간 프라하를 아침 9시에서 새벽 3시까지 걸어다닐 정도로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고 온종일 걸어다녔다. 첫날 발견한 것이 레두타 재즈클럽(Reduta Jazz Club)이었다. 클린턴이 체코를 방문하였을 때 여기서 연주했다고 할 만큼 유명한 곳이다. 하지만 난 그런 단지 유명세에 휩쓸려서 갔던가. 혹은 "신좌파의 상상력;조지 카치아피카스;이후"에서 언급한 1956년 이후의 체코 저항운동을 관통하던 전형적인 사유 방식을 접하기 위해 들렸던가. 아니면 길을 가던 중 우연히 간판이 보여서 갔을 뿐일 따름인가. 모르겠다. 그 모든 것일 수 있고, 모두 아닌 다른 무언가일 수도 있다. 그래서 나는 세 번이나 레두타를 갔던 것일까. 처음에는 바깥에서 구경만 했고, 다음에는 레두타에 들어가서 조용히 구경했고, 마지막에서는 맥주를 마시면서 어깨도 흔들면서 그들의 연주와 함께 했다. 마지막에 가서야 내가 왜 레두타를 계속 오고 싶어했는지를... 밤마다 프라하의 밤거리를 미친 듯이 쏘다녔다. 낮에는 볼 수 없는 낯선 풍경들, 즉 관광하기 좋게 만든 꾸며진 모든 것들의 이면을 혹 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표현주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기괴한 풍경들 사이로 달렸다. 그러면 마치 카프카라도 될 것만 같은 유치한 생각으로... 잠시 기분을 내기도 했다. 어둑한 강변에서 우연히 마주친 프라하의 한 여성. 깊은 밤에 한동안 서로 떨어져서 말없이 강변을 바라보며 상념에 잠기다가 서로를 발견한 것이다. 그녀가 먼저 물었다. "카프카 좋아해요?" 나는 말했다. "그럼요. 아주 아주 좋아해요." 그녀가 또 물었다. "이 도시 맘에 들어요?" 나는 말했다. "그럼요. 내가 가 본 도시 중에 최고입니다." 그녀는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그녀가 프라하에 사는 여성인지, 아니면 나 같은 관광객인지는 물어보지 않고 헤어졌다. 왠지 묻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이것. 어떤 설레임으로 나는 프라하를 마구 돌아다녔지만, 프라하의 밤도 서울의 밤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체코의 저항운동도, 카프카도, 프라하의 야경마저도 현재성을 결여한 채 화석처럼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오히려 밤마다 길거리에서 불쑥 내 앞에 나타나곤 했던 체코 아가씨들이 더 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오늘 나랑 잘래?" "섹스? O.K?" 25일 오후 9시. 레두타를 가다. 레두타는 공연장과 휴게실로 이루어져 있는데 휴게실에서 맥주 등을 마실 수 있다. 나는 공연장 앞줄에 앉았다. 인드라가 재즈를 알면 얼마나 알겠는가. 잘 모른다. 모르는 데도 이토록 즐거울 수 있을까. 기타 연주자는 담배를 피며 연주를 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객석의 백발 미녀와 눈이 맞았는지 서로 추파를 날리는 것이다. 임순례의 '와이키키 브라더스'에서 나이트클럽에서 드럼 연주자와 여자손님과의 한 장면을 떠올려 보라. 드럼 연주자가 드럼 애드립을 하기도 하고, 심지어 보컬까지 하지 않던가. 매우 비슷하다. 나는 이러한 즉흥적인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재즈를 들으며 상념에 잠시 빠졌다. 구부린 동전을 가진 사내 이야기. 표면적으로는 단절하였지만, 심연에서는 단절하지 않는 삶 이야기. 아아. 그랬다. 나는 프라하에서 공산당 관료를 부정하고, 현실 사회주의를 부정하면서도 저 심연에서는 다시 사회주의와 인연을 맺을 길은 없을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소중한 사회주의의 꿈이기에 더더욱 현실 사회주의와는 단호하게 절연해야만 하는 처지. 시위 장소였던 바츨라프 광장에서도, 체코 전통 포퍼먼스가 끊이질 않던 카를교에서도, 웅장한 프라하성에서도, 아름다운 프라하 야경에서도, 카프카 집과 카프카가 거닐었다는 황금소로에서도, 숙소에서 만난 아킴, 파브, 미쉘에게서도 느끼지 못한 정취를 접한 것이다. 버드와이저 고향일 만큼 유명한 체코 맥주에 취해, 재즈에 취해 인드라는 프라하의 밤과 마침내 하나가 된 것이다.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트리어로 가는 길 프로파일 인드라 ・ 2005. 9. 14. 8:37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History buffs and nostalgic socialists can seek out the Karl Marx Museum...but don't expect to see anything particularly revolutionary." Western Europe on a shoestring(Lonely planet)의 Trier 소개 중에서; ​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 ​ 1997년 4월 28일 월 어제 격정적으로 놀던 영국인들과 어울린 탓에 모처럼 늦게 일어났다.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게이꼬는 빈 국립 미술관이 좋았고, 이곳도 좋다면서 오스트리아가 마음에 든다고 하루 더 머무르겠다고 한다. 은근히 같이 동행하자는 의미로 내게 말한 것이었지만, 나는 잘츠부르크를 떠나기로 했다. 잘츠부르크를 떠나 뮌헨에 도착하였다. 미국의 텍사스 지역과 유사한 독일 바바리아 지방의 주도 뮌헨. 잔뜩 긴장했으나 베를린에서처럼 인종차별을 겪지는 않았다. 공원에서 중년 남녀들이 우리네 구슬치기 같은 게임에 열중하고 있었다. 다만 구슬이 매우 컸다. 호프 브로이 바깥에서만 구경했다. 안에서 누가 노래하고, 또 고함도 치고 있었다. 호프 브로이 앞에는 일본식 음식점이 있었다. 막시밀리안-슈바빙 거리를 걸었다. 단 한 명의 관광객이라도 끌어들일 작정으로 옛건물들을 복원하고 있었는데 남는 건 없었다. 독일 청년이 다가와 설문조사를 요청했다. 어디서 왔냐, 뮌헨이 어떠냐, 뭐가 문제라고 여기나, 얼마나 쓰고 있느냐 등등. 또 나처럼 혼자 쏘다니는 일본인 관광객을 만났다. 그는 뮌헨에서 삼일을 지냈다면서, 내가 이태리로 갈 예정이라고 하자 이태리의 베로나, 파도바, 베네치아, 로마가 괜찮다고 말한 뒤, 동유럽을 가보고 싶다고 일정의 짧음을 아쉬워했다. 점심을 태국음식점에서 볶음밥으로 먹다. 중국음식점보다 볶음밥 값이 싸다. 볶음밥도 종류가 있는데 재료가 거의 들어가지 않은 맨밥을 볶았을 뿐이지만 한국의 볶음밥보다는 비싸다. 하지만 그중에 가장 싸다. 뮌헨역에 들리니 한국인들이 많았다. 부다페스트로 가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각자 따로 출발했다가 비행기에서 만나고, 여행지에서 만나서 같이 다닌다는 것이다. 여기서 잠깐! 한중일 여성 구분법 - 조용하면서도(중국인들이 활달한 편이고 말을 많이 하는 편이다) 대부분 화장을 진하게 한다(일본인들이 말수가 적으면서도 화장기는 거의 없다). 트리에로 떠나기로 했다. 벨기에에서 룩셈부르크를 잠시 들릴 때 트리에까지 가려고 했다가 포기하였던 아쉬움이 있었다. 유럽 남부로 내려올수록 점차 부대끼는 한국인들이 많아서 긴장감이 떨어지는 감도 있었다. 일정상 독일쪽으로 다시 오기가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맑스가 사는 동네가 어떤 동네일까 하는 것이었다. 11시 17분 발 5시 22분 도착 예정 기차를 타다. 그러나 가는 도중 독일 기차도 고장이 났다. 이럴 수가~. (인드라는 여행 중에 별 일을 많이 겪는 편!) 사람들 따라 기차를 바꿔 탔다. 예정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다. 계획을 아주 촘촘하게 짠 편이라 일정이 어긋나자 짜증이 밀려왔다. 1997년 4월 29일 화 시계까지 말썽이다. 시계가 고장이 났다. 룩셈부르크로 가는 기차로 도중에 트리에에서 내려야 하기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다. RB선으로 갈아탔다. RB선을 굳이 비유한다면 우리네 비둘기호라고 할까. 역마다 선다. RB선도 콤파트먼트식이지만, 탁자가 없으며, 흡연석은 1등석에만 있다. 비가 내린다. 새벽 기차를 타고 비가 내리는 라인강을 바라보며 가니 언짢은 기분이 조금씩 풀려온다. 춘천행 기차를 떠올려 보라. 생각해 보니 라인강변보다는 북한강변이 훨씬 괜찮은 듯싶었다. 새삼 우리네 금수강산에 대한 자긍심이 밀려온다. 비가 계속 내린다. 약간 배고프다. 프랑스 바케트빵 맛이 그리워졌다. 바케트빵에 독일 맥주 한 잔이라면 더할 나위 없는 낭만일 터인데... 식욕을 잠재우고자 생각에 몰두하였는데 생각할수록 더 배가 고팠다. 점심 먹고 물만 먹었으니... 새벽을 지나 이제는 아침이다. 기분이 상쾌해졌다. 아침 기차에는 출근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학생들은 학교를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기차 안이 떠들썩하다. 그들이 나를 바라본다. 나도 그들을 본다. 문득 나는 즐거워졌다. 내가 여행하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다른 이들이 여느 날처럼 일상적 생활을 할 때 바로 옆에서 나는 그들을 지켜볼 수 있다는 것이 이 얼마나 큰 행운이란 말인가. 내가 조금 흥분하여 노트를 꺼내 열심히 끄적이기 시작하는데 차장이 표 검사를 한다. 내가 아랑곳하지 않고 뭔가를 계속 쓰자 차장이 나를 슬쩍 보더니 윙크를 하고 다른 사람에게로 간다. 기분이 점점 좋아진다. 비는 계속 내리고. 학생들은 코헴역에서 대부분 내린다. 굳이 유람선이나 로맨틱가도를 달리는 버스를 탈 필요가 없지 않은가. 우연히 풍경에 녹아든 독일인들의 일상을 보니 마음이 즐겁다. 이런 걸 두고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할까? 비가 내리는 라인강변의 집들은 아름다웠다. 우리네 금수강산에도 자연과 합일하는 건축물들이 많이 지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저들보다 더욱 아름다운 강산인데... 트리에 도착. 역에서 시내만 다니는 전차를 타서 Hauptmarkt에서 내려 맑스 기념관으로 향하다. 작은 읍 정도에 불과한 이 도시도 겉모습만 보면 참 살기 좋은 동네로 보인다. 가는 도중 재래시장을 접하다. 아침 일찍 신선한 야채와 꽃, 생선 등을 거리에 진열하려고 분주히 움직이는 모습이 그림엽서처럼 괜찮았다. 맑스 기념관 가까이에 이르러 한 여성이 길가에서 담배를 피고 있었다. 파마를 한 검정머리, 푸른 눈의 그녀는 나를 보더니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사우쓰? 노오쓰?라고 묻는다. 그래도 사정을 아는 여성이다. (몇몇 독일인들과의 접촉을 통해서 본 조심스런 생각은 독일인들이 한국에 대해 다른 유럽인보다는 아는 편인 듯싶다.) 뭐 이런 촌동네에 볼 것이 있겠냐하는 투가 역력한 표정으로 여기에는 왜 왔냐고 했다. 맑스를 보러왔다고 했다. 그랬더니 담배를 비벼 끄더니 오! 맑스! 그러면서 놀라면서도 친근한 표정을 짓는다. 그녀와 헤어진 후 맑스기념관을 찾았는데 문이 닫혀 있었다. 해서, 이리저리 거리 구경하다 다시 가보니 계속 닫혀 있는 것이다. 어? 무슨 일일까, 싶어서 문을 열고 들어가니 기념관에서 일하는 여성이 당신이 찾는 맑스기념관은 여기가 아니라 맑스가 탄생한 집이고 여기서 지근거리에 있는 곳이라고 한다. 그곳은 연구소쯤 되는 것이었다. 관료적 말투로 딱딱하게 대하는 것이 기분이 안 좋았다. 그런 기분으로 맑스가 탄생한 집에 갔다. 관광객들은 거의 없었다. 혼자서 맑스 집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전시된 사진들을 본다. 아, 초라하기 짝이 없다. 책으로만 보던 이들이 이런 식으로 살면서 사회주의운동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후일 상하이 임시정부청사에 갔을 때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아무튼 별 느낌이 없이 맑스 동상에 이르렀는데 그때 마침 중국인들이 몰려왔다. 모택동 모자를 쓴 중국인들은 꽤 높은 지위에 있는 이들로 보였다. 나는 안중에도 없이 자기들끼리 저마다 맑스 동상 앞에서 사진을 찍다가 나에게 와서 단체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을 한다. 찍어주었다. 갑자기 나는 내 자신이 그렇게 웃길 수가 없었다. 난 지금 무엇 때문에 이 곳에 왔는가? 중국 관료들로 보이는 저들과 무엇이 다를까? 중국 관료들이야 자신들 출세시켜 주었으니 맑스를 고맙게 여기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나는 뭔가. 내가 찾고자 했던 것이 무엇인가. 뭔가 다른 듯이 행동하는, 론리 플래닛에서 '향수에 젖은 사회주의자들'이란 대목을 읽으면서도 스스로 현재형이라고 믿었던, 뭔가 혁명적인 계기를 얻을 것만 같았던 그 모든 것들이 마치 연극처럼 느껴졌다. 잔뜩 긴장한 채로 뭔가를 갈구하며 맑스의 집에서 헤매던 나를 일깨워준 것은 중국 관료들이었다. 그들은 현실적이었다. 그들은 맑스 흉상을 원했으며, 다른 것들은 안중에 없었다. 마치 정치인의 사진 찍기처럼. 그들은 그것만으로도 즐거워하였으며, 그것으로 맑스 관광이란 소기의 성과를 거둔 것이다. 아아! 그들에 비한다면 나는... 나는 반성하는 자세로 그들에게 나도 사진을 찍어줄 것을 부탁했다. 나의 초라하고, 우스꽝스런 표정을 보라. 트리에에서의 아침은 이렇게 흘러가고 있었다. 맑스를 비난하는 이들이나 맑스에서 한치라도 벗어나면 죽을 듯이 보이는 교조주의자들 모두에게서 나는 해방되었다. 그만큼 그들과 나에게 맑스는 신이었다. 그러나 나는 인간 맑스를 만났으며, 맑스를 좋아하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 산업이 되기도 하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맑스가 박정희와 같은 대접을 받고, 세상의 어느 곳에서는 여전히 맑스는 금기된 무엇이기도 하다. 그 무거운 짐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아니, 그 굴레를 영광스럽게 여기기까지 했던 모든 관념들이 깨끗하게, 일순간에 정리된 것이다. 이제 나는 맑스를 내 머리에서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가 맑스주의자라고 했던 그 모든 굴레들로부터 맑스를 해방시킨 것이다. 맑스여! 당신, 그동안 내 머리 안에서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그러니 맑스여! 해방이다! 그 순간 동상의 맑스가 내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세상이 나, 맑스를 해방시킬 일만 남았군, 그래." 나는 순간 혁명적인 전율에 몸을 떨었다. 안녕! 트리에! 안녕! 맑스 산업! 그리고 기념하는 모든 것들이여! 이제는 안녕! 그레이스 켈리식 화장을 한 베로나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9. 24. 13:16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7743702 엮인글 1개 통계보기 1997.4.30 수요일 당신이 유럽 배낭여행을 하러 떠난다면 나는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다. 가고자 하는 나라의 첫 기착지를 가능하다면 지방 소도시로 하라는 것. 가령 서울 대신 속초, 남원, 안동, 공주, 이천 등으로 한다면? 한국에서는 다소 어려운 일이기는 하지만, 유럽에서는 가능하다. 내가 소도시를 추천하는 까닭은 우선 두어 시간 그냥 헤매고 걸으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느새 당신은 소도시가 매우 낯이 익게 될 것이다. 대도시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아울러 여행 중반기라면 소도시에서의 아침을 즐기는 것이 여행의 재미를 보다 풍성하게 만끽할 수 있을 것이다. 야외 오페라의 도시, 이태리 베로나. 무엇보다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유명한 베로나. 내가 이 도시를 찾은 것은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니다. 전날 오전은 트리에에서, 오후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머물렀다.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 이태리행 밤차를 타고 눈 좀 붙이려고 했다. 그런데 같은 객실에 있는 놈이 아무리 봐도 소도둑놈처럼 생겨서 잠을 잘 수가 없는 것이다. 하긴 그 놈도 무슨 일인지 나를 쳐다보면서 잠을 자지 않고. 서로 말을 하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놈도 나를 소도둑놈으로 알았나? 아는 것이 병이다. 이태리에 가면 무엇보다 소매치기, 날치기에 조심하라는 이야기를 하도 듣다 보니 그런 듯싶다. 맘 편히 있어야겠다고 여기지만, 불안한 것이 어쩌랴. 정말 미치고 환장할 지경이었다. 하이델베르크행 기차에서 기껏해야 선잠으로 한 두시간 정도 잔 것에 불과한데... 졸음은 쏟아지는데 상대가 나를 노려보고 있으니... 애써 눈을 뜨고 있다 보니 나 역시도 상대를 노려보는 꼴이었던가?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놈도? 하지만 그때는 그런 생각할 겨를이 없이 너무나 졸렸다. 하여, 예정에도 없이 내렸던 베로나. 어차피 기차에서 잠을 잘 수 없다면 다음 역에서 무작정 내리자,라고 여겨 내린 곳이 베로나였다. 베로나 메인역인 포르타 누오바(Stazione Porta Nuova)는 베로나의 외곽에 위치한다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특징이 베로나를 말하고 있다. 고대 로마제국 도시 중심이 아레나로 통칭되는 원형경기장에 있다면, 중세는 두오모(성당)가 중심이고, 근대는 말할 나위없이 기차역이다. 서울을 떠올려 보라. 역세권. 유동인구. 유럽의 유명한 도시들은 거의 예외없이 기차역을 중심으로 하여 행정기능과 상권과 관광지가 맞물려 있다. 내가 만난 베로나는 고대 로마제국 도시도 아니고, 근대 도시도 아닌, 중세 도시였다. 왜냐하면 두오모를 중심으로 한 에르베 광장에서 베로나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인구 이십만명의 베로나에서 버스를 탄다면 마을버스를 탄다고 생각하면 된다. 일정이 빡빡하지 않거나 피곤하지 않다면 걷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나는 버스를 탔다. 너무나 피곤했기 때문이다. 배낭을 역 유인보관소에 맡기고 약간의 환전을 한 뒤 상점에 들려 대략 물건들의 시세를 파악한 뒤(물건은 물론 안 샀다. 시세를 통해 물가 수준을 확인하려고 하기 위함임.) 역앞의 버스를 탔다. 어디 가는 버스를? 그냥 아무 버스나 탔다. 이게 또한 소도시의 장점이다. 헤매봐야 거기서 거기이기 때문이고, 가다가 맘에 들면 그냥 내리면 되기 때문. 그러다가 버스 종점까지 가버렸다. 나중에 찾아보니 싸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언덕가라는데 고급주택이 있는 데였다. 버스에서 내려서 아무 생각없이 담배를 피고 있으니까 버스 운전사가 다가와 사진 찍어줄까? 한다. 해서, 찍었는데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리고 다시 버스가 출발할 때 버스를 탔다. 운전사가 여기서 내리면 좋다고 해서 내렸는데 그곳이 에르베 광장이었다. 로미오와 줄리엣. 황제와 교황이 피터지게 싸우는 와중의 사랑을 다룬 세익스피어 작품. 교황과 싸우고 제멋대로 마이웨이 종교로 나간 영국 출신이라서 황제파 몬테키(Montecchi)가 로미오가 영국놈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만남을 몰래 주선하는 신부는 영국국교 신부처럼 보이고^^! 마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무왕과 선화공주처럼... 중북유럽인들은 따스한 햇살, 찬란한 유적, 아름다운 사람들에 취해 이탈리아를 훔치고 싶어했을지 모른다. 그 상징으로 줄리엣이 있다면... 베로나는 정동진이다. '모래시계'의 고현정과 최민수가 정동진에서 아련한 그리움을 나눈 것은 드라마 속에서이다. 그처럼 로미오와 줄리엣이 운명적인 사랑을 나눈 것도 세익스피어의 작품 속에서일 뿐이다.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사람들은 저마다 고현정, 최민수가 되어서, 로미오와 줄리엣이 되어서 그들이 거닐던 그곳을 거닐고 싶어한다. 로마에 가면 오드리 헵번과 같은 옷차림을 하고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돌아다니고 싶어한다. 그러하니 줄리엣 집의 베란다가 볼 품 없다 불평하지 말 것. 나는 그곳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떠올렸다. 그녀가 베란다에서 로미오와 나누던 대사를 떠올렸다. "아아, 로미오, 로미오! 어찌하여 당신이 로미오란 말입니까. 부디 나를 위해서 당신의 부친과 당신의 이름을 버려주세요. 아니, 그것이 싫으시다면 오직 한 가지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맹세해 주세요. 나도 카풀릿이라는 이름을 기꺼이 버리겠어요." "아아, 아가씨, 부디 내 이름을 당신이 부르고 싶은 대로 불러 주세요. 애인이라고 불러도 좋고, 전혀 근거 없는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좋습니다. 만일 로미오라는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그 이름도 버리고 말겠어요." 베로나는 정동진이되, 세련되게 도시 전체를 상품화한 도시다. 돈 좀 된다 하면 지나치게 싸구려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화장할 때 가장 멋진 화장이 그레이스 켈리식 화장이라면? 안 한 듯 한 것이 최고라면? 이성에게 어쩌죠, 급히 나오느라 화장도 못 했는데... 뭐, 이런 뻔한 대사를 말할 수 있는... 속아도 즐거운... 베로나는 그레이스 켈리식 화장법과 같은 도시다. 또한 뭔가 여백미가 있는 동양화 같은 도시다. 왠지 이런 곳에 혼자 왔다는 것이 기분이 찝찝한 도시다. 그래서 혼자 가야 한다. 둘이 가면 그 맛을 모른다. 베로나. 그냥 내버려둔 듯이 보이는 풍광 하나하나를 문득 세심하게 보면, 손님맞이를 위한 그네들의 치밀한 준비를 발견할 수 있다. 쓰레기통마저도 가만 두지 않고 그림 낙서로 채운 그네들의 솜씨란! 에베르 광장, 시뇨르 광장... 돌아다니다 보면 별 것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해하기를! 나는 그때 매우 피곤했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앉아서 쉬고 있을 때, 들리는 성당의 종소리!!! 두 군데 성당에서 동시에 들리는 종소리!!! 성당 종소리가 그렇게 좋은지 그때 처음 알았다. 그 다음부터 나는 이태리를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네들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어찌된 일인지 음악처럼 들렸다. 일상의 대화가 음악처럼 느껴지니 노래를 잘 할 수밖에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소도시에서의 아침. 좁은 미로 사이로 학교에 가는 학생들, 문을 여는 상점주인들, 그리고 성당의 종소리... 트리에에서도 이랬지만, 차이점은 그네들의 옷차림과 목소리였다. 왜 하나같이 모델들이며, 가수들일까? 그리고... 베로나 사람들은 정겹다. 한국적이다. 버스에 탔을 때다. 우연히 눈길이 마주치면 민망할 지경으로 나를 쳐다본다, 그네들의 언어를 더욱 풍성하게 하는 오버스런 손동작과 함께. 매년 수백만명 관광객이 온다지만, 따지고 보면, 그네들도 내가 낯설고, 나도 그네들이 낯설다. 어느덧 피곤은 사라졌다. 해는 중천으로 치솟고... 잠바를 벗고 시내를 한 두시간 더 활보하다가 걸어서 메인역까지 갔다. 밀란으로 가자! 스페인 말라가에서 그녀가 보고 싶었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3. 27. 2:2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5761940 통계보기 그래요. 여행기를 다시 쓸 힘이 생겼어요. 어떤 문체를 적용할까 고민이었는데 시간이 해결해주는군요. 몇 분이 계속 쓰라고 하네요. 고마워요. 이제 써볼까요? 이 문체죠. 다소 여성적인... 그러면서도 중성적인... 사춘기를 갓 넘은 여대생 글쓰기처럼, 의식보다 더 커버린 그녀의 유방처럼 로코코적인 글쓰기죠. 궁금한가요? 당신의 질문이 뭔지 몰라도 아니죠. 아니죠. 훗. 잊었나요? 전 연극 대본을 쓰기도 했죠. 포즈에 관해서라면 은희경도 울고 갈 정도죠. 별 것도 아닌 것에 신경을 쓴다구요? 그래요. 그렇게 해서라도 세상을 잊고 싶죠. 맞아요. 전 지금 술을 먹고 있어요. 코로나랑 버드와이저랑 기네스랑 먹고 있어요. 맛이 있냐구요? 맛있죠. 다이어트에 해가 된다구요? 칼로리는 높다고 하는데 술만 먹으면 오히려 살이 빠지네요. 전 요즘 매일 술을 먹어요. 저는 살고 싶거든요. 정말이죠. 살고 싶어요. 그래서 쓰죠. 당신은 누구시죠? 난... 몰라요. 그래요. 할 말이 있으면 안부게시판을 이용해요. 덧글은 싫어요. 지나치게 음란해요. 쓰리섬 같아요. 저와 대화하는 것을 누군가가 지켜보기를 원하나요? 아, 전 아직 준비가 안 되었어요. 아직은 당신을 이해하고 싶지 않아요. 그날 저는 걷고 있었죠. 전화를 걸었어요. 보고 싶다구요. 보고 싶어요. 울면서 전화했죠. 전화박스에서 울면서 전화하고 있었는데... 스페인 말라가에서였죠. 심야의 거리에는 나이트클럽 조명이 반짝거렸고, 젊은 남녀가 오토바이를 타고 히히덕거리면서 스쳐 지나갔죠. 그들이 괜히 미웠어요. 알 수 없죠. 그때도 술을 먹었어요. 스페인식 선술집에서죠. 안주는 항구도시답게 주로 생선류였는데 술만 먹었어요. 술만 먹었어요. 그래요. 까뮈죠. 까뮈예요. 취하고 싶었죠. 살인을 하고 싶었나요? 그건 모르겠어요. 세상의 끝을 본 듯한 느낌이었죠. 더 가고 싶었던 마음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고픈, 알함브라의 궁전이... 저는 벗었어요. 온갖 위선의 껍질을 벗어버렸죠. 1996년 5월 9일에 무슨 일이 있었냐구요? 젊은 일본친구가 일본인인 줄 알고 제게 말을 걸었어요. 한국인이라는 걸 알고는 한국에 가봤다, 부산에 가봤다 하면서 열심히 변명하더군요. 배낭여행객이 아니었어요. 정장 차림의, 그래서 특이한, 부드럽게 생긴 일본 남성이었죠. 간단한 한국말을 할 줄 알더군요. 스페인에 2주 있었다는군요. 제가 볼 때는 6개월 정도 있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말이죠. 그래요. 그게 여행이죠. 저처럼 하루 잠깐 스쳐가는 여행이 무슨 여행이겠어요. 초라한 거죠. 제가... 보고 싶었죠. 그녀가... 그녀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죠. 동양적이고 매력적인 스페인 여성들이 제게 미소를 지을 때마다 그녀가 보고 싶었죠. 하여간 그 일본인 친구는 마음에 들었어요. 왜냐구요. 1920년대 분위기였거든요. 전 그 시대를 정말 좋아하는 것 같아요. 모던한 점에서죠. 지금은... 숨이 막혀요. 왜 이렇게 살아야하죠? 전 왜 이렇게 살고 있구요. 편안해요? 전 죽을 지경입니다. 살고 싶거든요. 정말이죠. 누가 제 진심을 알까요? 전 지금 스페인 말라가에 있어요. 사랑도 명예도 없이 베를린을 걷는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4. 19. 4:21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사랑도 명예도 없이 베를린을 걷는다 ​ 1997년 4월 22일 ​ 잠이 쏟아졌다. 졸면 안 되는데... 여기서 졸면 또 엉뚱한 곳에 내릴 지도 모르잖아. 졸지 마. 참으라고. 참아. 참을 수가 없다. 베를린에서 라이프니쯔까지 가는 길은 밤이어서 몰랐다. 날이 차츰 밝아지자 등장하는 동독의 풍경이란. 아, 이런 것이었던가. 사회주의의 모범국이라는 동독이... 차마 말할 수 없다. 그래, 난 아직 사회주의잖아. 졸립다. 졸리면 안 되잖아. 졸지 마. 졸립다. ​ 라이프니쯔의 새벽 추위는 매서웠다. 밤새 걷다 지쳐 갈 곳 없는 배낭 여행자에게는 더욱 더. 연신 훌쩍거리면서 역 매표소가 열리기를 기다렸고, 표를 사고서는 새벽 첫 기차를 기다려야만 했다. 아무리 배낭여행이라지만 이렇게까지 고생을 하면서 여행을 해야 하나하는 후회가... 막상 기차가 도착하니 생각과는 달리 몸뚱아리는 신이 난 듯 냉큼 기차에 올라탄다. 아늑하기 그지없다. 집인 듯 앉아마자 잠이 오기 시작했다. ​ 샤프너역에 도착하여 차를 바꿔 탔다. 목적지는 통독 이전의 서베를린 중앙역이었던 동물원역인 초역이다. 중앙역은 건설중이었다. 중앙역 뿐이랴. 마치 제 3세계 수도를 보는 듯. 아니 전후 복구 작업을 하는 듯. 도시 전체가 공사중. 고생해서 온 베를린을 즉시 떠나고 싶을 만큼 흉하게 치솟은 아파트 사이로 가득한 매연, 또 매연들. 어? 서울인가 잠시 착각할 정도. ​ 비가 내린다. 시각은 9시 반. 제길. 제기랄. 젠장할. 유로버스는 9시에 이미 떠났으니 어차피 하루를 묵을 수밖에 없었다. 일일권 지하철 표를 끊었다. ​ 초역에 도착하여 유로버스가 추천하는 숙소를 찾아갔다. 36DM. 욕실이 하나밖에 없다. 변기도 라이프니쯔와 똑같이 뚜껑이 없는 이상한 모양의 변기였다. 화장지도 방마다 하나씩 배급. 숙소가 고풍스럽지 않은 모던한 건물이면서 낡아 아무런 감흥도 못 느끼게 만든, 그래서 독일적인 듯싶은 숙소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숙소가 36DM이라니 너무 비싸다. 게다가 주인장이라는 사람을 보라. ​ 이 사람을 보라. 나찌 시대에 아우슈비츠 같은 데서 생체실험을 했을 것 같은 인상이라고나 할까. 숙소 주인답지 않게 하얀 색의 의사 가운을 입고 있는 이 사람. 독일적인 억센 억양으로 웃지도 않고 딱딱하게 말하는데 취조 받는 기분이 든다. ​ 셈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샤워부터 했다. 어젯밤 기억을 모두 꿈으로 간직하려는 듯 시원하게 샤워를 마치고 담배 한 대 피우고 방으로 돌아왔는데. 이런! 어떤 늙은이 하나가 내 락카를 만지작거리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무슨 일이요? ​ 기분이 나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당황한 듯싶었다. 도둑으로 오해를 받는다고 여기는지 그 역시 화난 표정이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연한 대응이지 않던가. 왜 내 락카에 손을 대는가 이 말이다. 서로 씩씩거리면서 말을 한참 동안 하지 않고 상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가 먼저 말했다. 오해다. 오해. 넘어갈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슨 물건을 잃어버렸는데 찾아보니 그렇다는 게다. 그럼, 내가 도둑놈? 뭐, 이런... 그는 손사래를 치면서 아니라고 말한다. 아닌 것 같다고. 여행자이니... 그는 독일인. 독일인이면서 베를린에 여행을 온 사람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하다가 라이프찌히도 갔다 왔다고 했다. 그는 서독 출신이었다. 동독은 열등한 지역이야. 라이프찌히에서 만난 비즈니스맨이 내게 라이프찌히는 죽었어, 동독은 죽었어,라고 말했다고 하니 서독인 왈, 맞는 말하는 것이다. 첫인상부터 기분이 안 좋았지만, 말할수록 더 기분이 나빠지는 서독 촌놈이었다. 마지막 말도 압권이었다. 독일과 베를린에서 오래 묵어라. 돈 많이 써라. 내놓고 말한다. ​ 숙소를 나와 은행부터 찾아갔다. 은행에서 독일 돈을 더 바꾼 다음에 에로티카 뮤지엄을 찾아갔다. 베를린 초역(동물원역)에서 얼마 되지 않은 거리에 있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릴 만큼 매우 가깝다. 에로티카 뮤지엄은 내가 가본 유럽 포르노 박물관 중 최고 수준이었다. 아마도 주된 고객은 관광객인 듯싶다. 시설 면에서나 수많은 포르노 전시물 면에서나 뮤지엄이라 평가할만하다. 물론 중국, 일본, 인도, 유럽의 그림, 조각, 사진 등은 기본. 마네킹 전시가 볼만했지만, 무엇보다 추천하고픈 것은 고전 포르노를 보여주는 것이다. 흑백 무성영화였다. 2층 전시장과 달리 1층은 비디오룸과 연결된다. 흥분한 사람들이 동전을 넣고 비디오룸에 들어가 볼 일을 본다. 대개 남자들이 들어가는데 간혹 여자도 들어갔다. 사십대 아줌마였다. 나는? 나는 편집증적인 사람이라, 엄밀하게 말한다면, 정신분열적인 사람이라, 남들과 똑같이 노는 것을 다소 혐오하는 편이다. 물론 성욕도 생기지 않았다. 그냥 내려와 박물관 화장실이 무료라 화장실에 소변 좀 보고 가려는데 재미난 일이... 함께 볼 일을 보던 서양 젊은 친구가 연신 내 눈치를 보면서 같이 화장실을 나오다가 마치 뭔가를 잊어먹었다는 듯이 행동을 취하더니 다시 화장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이 사람이? 비디오룸은 유료이고, 화장실은 무료다 이거지? 내가 별 취미가 있는 것인지 한동안 화장실 문앞에 있어봤다. 역시 그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들어가는 것도 우습지 않은가? 그가 볼 일을 잘 보도록 시키지도 않았는데 잠시 망을 봐준 셈치고 웃으면서 박물관을 나섰다. ​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더 이상 잠은 오지 않았다. 어디로 갈까? 달렘에 있는 민족학 박물관을 가자. 민족학박물관에는 중동, 오세아니아, 인도, 동아시아, 마야, 아즈텍의 예술품들이 다수 전시되어있다. 이 박물관에 가면 영국 대영박물관과 비견되는 제 3제국의 야심을 엿볼 수 있다. 그중에서 내게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폴리네시아 문화였다. 유럽 박물관도 돌아다녔는데 그다지 인상적이지는 않았다. 돌아가려는데 꽃길이 사진빨이 있어보였다. 잘 안 찍는 사진이었지만, 마침 지나치던 독일인에게 부탁. 키일에서 왔다는 빵모자 아저씨는 익살스런 표정으로 유 노 치즈? 하면서 포즈를 취하란다. 어디서 왔냐고 해서 한국에서 왔다고 하니 웃음기는 어디가고 진지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한다. 독일의 경험이 교훈을 줄 것이다. 나는 주사파가 아니지만, 그에게 말했다. 한국에게 통일이란 진정한 독립을 의미합니다. 그가 공감을 표했다. 박물관 본 소감이 어떤가 묻는다. 이그조틱(exotic)한 것이 인상적이다 - 와~ 마침 이 단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 훌륭하다. 나머지는 어느 박물관에 가든 똑같은 것 같다. 그랬더니 상당히 만족한 듯 기분이 좋아 보인다. 다음에 어디 갈 예정이냐 해서 브란덴부르크에 간다고 했더니 오! 역시 하면서 가까운 전철역을 가르쳐 준다. 당신에게 행운이 있기를. 당신도... 굿바이. 돌아다녀봤지만 한국에 대해 그나마 가장 잘 알고 이해하는 유럽인은 독일인인 듯싶었다. ​ 전철 풍경은 서울과 다를 바 없다. 아시아계 한 명이 뉴스위크 독일어판을 읽고 있었다. 바로 옆에서 어떤 아줌마가 노골적으로 훔쳐보니 그는 기분이 갑자기 나빠졌는지 신경질적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래도 꿋꿋하게 아줌마 계속 훔쳐본다. 젊은 아가씨들도 조용하게 문고판 책 같은 것을 본다. 그때 거지가 한 명 들어와 마침 있던 빈 좌석에 앉아 술병 째로 술을 마시고 담배를 핀다. 옆 사람들이 불쾌해하며 일어선다. 그러자 그는 드러눕다시피 한다. 그러자 갑자기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가 거지에게 다가가더니 독일어로 뭐라 뭐라 한다. 알아들을 수 없지만, 정황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거지에게 충고를 하는 것이다. 이런... 아직도 독일에서는 이런 계몽주의가 통하다니... 뭐랄까? 이 기분이라니. 마치 19세기에 온 착각이... 한때 유행했던 독일 성장소설류를 떠올리며... ​ 역에 도착하니 온통 공사중이다. 소음과 먼지. 이 사이를 학생들이 바삐 지나가고 있다. 이 혼탁함. 알 수 없는 짜증. 무력감. 그리고 분노... 문득 나는 ‘역사적 과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프랑스에서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역사적 과제’ 혹은 ‘근대 기획’. 그렇다. 프랑스에서는 탈근대주의일 수밖에 없고 독일에서는 근대주의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갑자기 흥분이 밀려왔다. 한순간에 정리가 된다. 그렇다. 와보면 안다. 데리다와 하버마스의 차이는 별 게 아닌 것이다. 나는 직관적으로 파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갑자기 만세를 불렀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잠시 놀라 나를 바라보았다. 보거나 말거나. ​ 브란덴부르크에 도착. 털썩 주저앉아 빵에 딸기잼을 발라서 먹었다. 브란덴부르크 주변은 온통 터키 행상인들뿐. 마치 독일 통일은 터키인이 지켜주고 있는 것처럼. 관광버스들이 쉴 새없이 관광객들을 쏟아낸다. 관광지에 막상 와서 볼 것이 별로 없는 것은 어디나 마찬가지. 그런 심드렁한 관광객들 눈에 갑자기 내가 보이기 시작했던 것이다. 길가에 앉아서 빵을 우걱우걱 먹는 모양새가 우스웠는지 그들끼리 나를 보면서 킬킬댄다. 졸지에 내가 관광상품이 되어버린 것일까? ​ 사진 한 장 찍어야겠다고 여겨 그냥 지나가던 사람에게 부탁했다. 그는 동베를린인이었다. 그가 사진을 찍어준 후 내가 고맙다고 말하면서 열변을 잠시 토했다. 독일인은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통일을 했다. 한국인은 당신들에게 교훈을 얻을 것이다. 나도 자랑스러워지고 싶다. 등등. 콩글리쉬로 마구 떠들었는데 그 동독인은 영어를 하지 못했다. 다만 내가 하도 진지하게 웅변을 하니 뭔가 감동된 듯 조용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말을 마치자 그는 한동안 브란덴부르크 문을 올려다보고 뒤돌아 나를 한 번 본 뒤 가던 길을 갔다. 그렇지 않은가. 입장을 바꾸어보라. 당신에게 아무 것도 아닌, 일상에 불과한 어떤 풍경을 외국인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면서 그대에게 말을 한다면... 외국인도 이런 열정으로 자신의 문화를 사랑하는데 나는? 이런 생각을 할 것이 아닌가? 가만 보면 나 같은 놈들이 한국에 와서 문화평론이다, 당신들의 조국, 대한민국 이따위 잡설을 푸는 것 같다. 재수 없는 놈들. 상대가 듣건, 말건 썰을 푸는 놈들이라니... ​ 나는 맑스 엥겔스 광장으로 걸어갔다. 길을 걸으면 생각이 난다. 노래를 불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왜 이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아직도 내게 소명이 있었더란 말인가? 남들이 다 버린 사명. 낡고 쓸모가 없어진 임무. 왜? 왜? 왜? 내가 왜 아직도 이따위에 미련을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나는 울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한없이 걸었다. 하지만 답을 구할 수 없었고, 광장 끝까지 어느새 걸어갔고, 기진맥진했다. 돌아올 때는 너무 지쳐 버스를 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상관저로 보이는 건물에서 수십 대의 차량이 나와 백차 호위를 받으며 지나간다. 저들은 알까? ​ 초역에서 나와 전철역 인근 노상에서 파는 독일 소세지 맛을 본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구운 소세지 냄새가 좋았다. 막상 맛을 보니 소세지는 별로. 소스 맛은 그런대로 일품. 배가 고팠는지 하나 더. 알루미늄으로 된 일회용 포크와 나이프를 주었는데 괜찮은 듯싶어 가방에 넣었다. 숙소에 오니 첫인상 더러웠던 숙소 주인이 이미지를 끝까지 지키고 싶은지 덱덱거린다. 많이 늦은 것도 아닌데... ​ 자, 이제 자는 거다. 이틀 동안 잠 한숨 자지 못했다. 그리고 내일은 체코 프라하로 가자! 잘츠부르크에서 웨일즈 서포터즈를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4. 20. 4:25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뉴질랜드 커플 ​ 뮌헨 출신 웨이타 로버트 ​ 잘츠부르크에서 웨일즈 서포터즈를 만나다 ​ 1997년 4월 27일 ​ 유럽의 날씨는 짓궂다. 햇살이 창창하게 비치다가도 시도 때도 없이 비가 내리곤 한다. 지금도 비가 내리고 있다. ​ 빈-잘츠부르크간 유로버스 승객은 나를 포함하여 18명이었는데 남성이 셋이고 그 외는 여성이었다. 수다스러울 것 같은 분위기를 연상할 수 있겠지만, 조용했다. 여성들 외모나 행동이 학구파들이었다. 가져온 책만 들입다 읽고 있는 것이다. 비가 올지라도, 아니, 비가 와서 더더욱 상큼해 보이는 알프스가 코앞에 있는 데도 다들 책을 읽고 있다니... 나도 노력은 했다. 하지만 기차와 달리 흔들림이 심한 버스에서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었다. 아, 단 한 명의 소녀만이 이어폰을 낀 채로 창밖을 보며 도레미송을 흥얼거리고 있다. 영화에서 보던 산과 호수, 그리고 그 사이에 절묘하게 위치한 알프스식 산장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가고 있다. 어찌 노래 부르지 않을 수 있을 것인가. 저절로 기분이 좋아지는 듯싶다. 나도 모르게 아마데우스처럼 깔깔거리고 싶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풍경만 내내 보는 것도 끝내 질려버렸다. 사운드 오브 뮤직 투어는 이쯤에서 끝내고, 프라하-빈 구간에서 만난 미국인과 잡담을 하였다. 그는 2개월 배낭여행을 잡았고, 이제 일주일 남았다고 했다. 그간 어디가 좋았더냐 하니 플로렌스 지방과 스페인이 좋았다고 했다. 유럽에서 내가 만난 미국인은 두 부류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이 최고’라며 오만방자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부분의 유럽인이 싫어하는 어글리 미국인이라면, 다른 하나는 점잖고 예의가 바르며 유럽을 배우겠다는 겸손한 자세의 히피풍 미국인이었다. 이 미국인은 히피풍이 아니었지만 온화하고 친절했다. ​ 이번에 만난 여성 버스 가이드와 남성 운전사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요일이기에 환전할 곳이 마땅치 않아 휴게소에서 되는지, 차지는 얼마나 되는지 가이드에게 물어보는데 무조건 바꾸라는 성의 없는 답변이다. 한 번 더 물어보니까 대답하는 모양새가 알면서도 책임지지 않겠다는 식이었다. 말하는 것도 냉랭한 투여서 짜증이 났다. 하여간 휴게소에 도착하자 나와 같은 처지인 배낭객들이 우르르 환전소로 몰려가서 바꾸었다. 나도 바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운전사와 가이드가 환전소에 와서 티켓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아마도 휴게소와 환전 소개를 대가로 무료 시식 티켓을 주는 모양이다. 이 정도야 한국 패키지 관광에서 많이 보아왔기에 넘어갈 수 있었는데 더 기분이 나빴던 것은 자신들이 식사를 할 동안 차문을 잠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식사하고 커피도 마시고 할 것 다 할 동안 기다리라는 것이겠다. 짜증 만땅~! 9시 출발한다고 해놓고 9시 10분에 느긋하게 오는 꼴이라니... ​ 어느덧 버스가 잘츠부르크에 도착했다. 숙소는 6시부터 8시까지가 저녁시간이고, 취침 소등은 1시였다. 잘츠부르크는 사우드 오브 뮤직 투어 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제법 쌀쌀한 날씨에 떨면서 한 시간 내내 잘츠부르크를 돌아다닌 나의 결론은 없다. 모차르트 생가 정도 남을까? 그조차 모차르트 마니아만이 재미있을 공간이었다. ​ 에라, 가까운 인스부르크나 가볼까? 일을 저질렀다. 인스부르크를 보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다. 잘츠부르크-인스부르크간 기차가 있는데 천장이 유리로 되어 있어서 구름과 산이 어울린 풍경을 감상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아낄 때는 최대한 아끼지만, 쓸 때는 과감하게 쓰자는 여행 계획을 지니고 있었다. 비싼 대가를 치루었지만 결과는 만족스러웠다. ​ 잘츠부르크로 돌아왔다. 구시가 끝에 있는 성에 케이블을 타고 올라가봤다. 성에서 내려다보이는 시내 풍경은 별 게 없었지만, 저 멀리 보이는 알프스 만년설에는 압도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관광지는 모두 그렇듯이 좋은 자리는 모두 레스토랑 지정석이다. 연인과 함께 왔다면 노천 테이블에 앉아 영화의 한 장면처럼 쥬스를 먹으면서 경치 구경을 하며 품위 유지를 했겠지만, 솔로의 이득이란 무엇인가. 품위 유지가 필요 없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오직 실속 뿐. ​ 배가 고프다. 숙소로 돌아와 저녁 식사로 스파게티와 맥주를 먹었다. 그때 갑자기 바가 난리가 났다. 잉글랜드 남녀 아해들이 바를 장악했기 때문이다. 이 당시에 나는 축구도 몰랐고, 서포터도 몰랐다. 축구 문화 자체를 모를 때다. 그런 내가 보았던 잉글랜드 아해들의 노는 문화가 매우 흥미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잉글랜드, 아니 정확히는 웨일즈 녀석들은 특정 노래에 특정 율동을 섞어서 정신없이 노는 것이었다. 지금에서야 아, 이것이 서포터즈들의 응원가로구나,하고 여겼겠지만, 당시로서는 이게 무엇인가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대중적인 팝송도 아니었기에. 그러면서도 이처럼 다수가 모두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와 춤이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 녀석들! 운동권도 아니고. 그랬다. 운동권에서야 예전부터 농민가다, 뭐다 해서 노래와 춤을 결합한 놀이가 있었는데... 뭐야. 도대체... 하지만 재미있기는 하다. ​ 내가 누구인가. 재미있으면 일단 뛰어들지 않던가. 뛰어들었다. 노래도 모르고, 춤도 모르지만, 옆 사람 눈치 보면서 대충 따라했다. 왜? 재미있잖아. 나뿐이랴. 다른 배낭객들도 덩달아 끼어들었다. 웨일즈 아해들이 시작했지만 곧 숙소 전체로 퍼져나갔다. 바가 그야말로 광란의 도가니였다. 네덜란드 나이트에서도 느낀 바이지만, 서양에서는 여성들이 특히 더 잘 노는 것 같다. 아까도 말했지만, 압도적으로 여성이 많아서 여성들 사이에서 어깨동무도 하고, 우리네 기차놀이랑 비슷한 것도 하면서 뛰어다녔다. ​ 마침내 지쳐서 내가 잠시 자리에 앉아 있었는데 옆에 땀을 닦으며 앉는 대머리 총각이 있었다. 나를 향해 찡끗 눈짓을 하며 웃더니 노는 친구들을 손으로 가리키면서 저 잉글랜드 놈들은 못 말리는 족속이라는 게다. 그럼 당신은? 하니까 자신은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나? 맞은 편 자리에는 프라하에서 만난 바 있던 뉴질랜드인 커플이 있었다. 남자는 무직인 반면 여자는 직업이 미용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서 드럼 담배 말아 피우는 것을 배웠다. 마치 대마초 피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뮌헨 출신의 웨이터도 만났다. 이름이 로버트라고 했다. 인상만 보면 영락없는 이태리인인데 뮌헨 출신이라는 게다. 이태리를 다녀왔다고 한다. 이태리가 어떠냐 했더니 쥑인다고 했다. 아마도 이태리 여성이 쥑이겠지. 돈을 모아서 다시 이태리를 가겠다는 것이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작업이었다. 지금도 쉴 새 없이 작업을 거는데 그 친구 작업이 잘 먹히지 않았다. 왜일까? ​ 여자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뉴질랜드 남자가 내게 가까이 와서 귓속말로 신나게 노는 여성들을 가리키면서 키키라고 했다. 뉴질랜드 남자가 내게 말하길, 로버트가 계속 차이는 것이 키키를 노리지 않기 때문이라는 게다. 키키가 아니라면 원 나이트 스탠드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내가 키키? 하면서 쉬운 상대? 재패니스 걸?을 말하니까 맞다 하면서 박장대소를 했다. 내게 은근히 경험이 있느냐 묻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연인이 화장실에서 오니까 시치미를 뚝 뗀다. 그 친구 설명을 듣지 않더라도 유럽에 배낭여행을 온 서양 아가씨들은 기분만 맞으면 원 나이트 스탠드가 가능한 것 같았다. 뭐랄까.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고, 간섭도 없는 곳에서의 순간의 일탈이라고나 할까. 게다가 노는 모습을 보자면, 뭐랄까, 짝을 찾지 못하여 응축되기만한 에너지가 폭발한 듯 노니까... 그래서인지, 밤이 깊어지자 여기저기서 작업을 걸고 작업에 넘어가는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웨일즈 친구들의 파티는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한 커플이 등장하여 람바다식 춤을 추기 시작한다. 로버트와 뉴질랜드 헤어드레서인 크리스틴은 이내 친해졌다. 서로 낄낄대고 있는데 남자친구는 모든 것을 다 이해한다는 투로 미소만 짓고 있다. 이 와중에 동양인 여성도 늦게 합류했다. 분위기가 익숙하지 않은 듯 말없이 앉아있기만 했다. 호기심이 생긴 서양남자애들이 여기저기서 물어보는데 당황하는 인상이 역력했다. 이름은 게이꼬. 빈 국립박물관이 좋았다면서 잘츠부르크도 좋다면서 며칠 더 묵을 예정이라는 게다. 사운드 오브 뮤직도 좋고. 갑자기 스코틀랜드 대머리가 내게 프라하가 어떠냐고 묻는다. 프라하? 정말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곳이다,라고 내가 말했다. 그랬더니 스코틀랜드 대머리가 크게 공감을 한다면서 양주 한 잔을 사겠다는 것이다. 해서, 공짜 술 한 잔 먹었다. 크... 독하다. ​ 맥주 두어 잔에 양주 한 잔인데 다소 어질어질하다. 취한다. 자야겠다. ​ ​베네치아에서 사랑을 외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4. 21. 3:01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 1996년이 아니라 1997년이군요. 이전 글에서 연도 수정합니다. 왜 96년이라고 여겼을까? ​ 베네치아에서 사랑을 외치다 1997년 4월 30일에서 5월 1일 ​ 베로나에서 가까운 밀란으로 이동하였다. 곧바로 베네치아로 갈까 싶었지만 패션의 도시를 지나가는 길에 들려보자는 심산이다. 유명한 밀란 패션거리를 걸어보았는데 역시나 수많은 여성 관광객들, 특히 동양 여성들이 많았다. 그녀들은 행복이 양손에 있는 쇼핑백만큼 비례한다고 여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가격은 생각보다 싼 편이었다. 그래서 사는 것인가 보다. ​ 옷차림이 왜 이리 다들 화려한 것인가. 특히 색감 중에 엷은 분홍색이 돋보였다. 태양 때문일까. 원색 계통이 천박해 보이지 않아 보였다. 밀란의 청담동격인 시내 중심가 구경은 이쯤하고 변두리로 가볼까 하고 버스를 탔다가 이내 내렸다. 갑자기 밀란이 싫어졌다. 너무 피곤한 탓일 게다. 잠 한 숨 자지 못하였으니... ​ 기차에 오르자마자 자고 싶었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이 끝내 나를 저버리는 것일까? 앞에 앉아 있는 이태리 녀석이 핸드폰으로 계속 전화를 건다. 당시에는 핸드폰이 대중화되기 전인데 핸드폰을 들고 다닐 정도면 잘 사는 놈일 것이다. 이 녀석이 누구랑 통화하는지는 금방 알아차렸다. 그의 엄마였다. 뭔가 끈질기게 부탁을 하는 것으로 보였다. 칭얼대는 모양이 가히 수준급이다. 생긴 건 모델인 놈이 엄마, 엄마하면서 기차가 베네치아에 도착할 때까지 전화를 거는 것이다. 잠을 도저히 잘 수 없었다. 참다 참다 다른 자리에 가려다가 그조차 가기 싫을 만큼 피곤한 상태여서 눈만 감고 있었다. 잔뜩 짜증난 표정을 알아차린 것일까? 도착하여 기차에서 내릴 때 이태리 마마보이 녀석이 내게 헤이, 굿바이~하는 것이었다. 아! 쉬고 싶다. 유로버스 추천 숙소는 메테르역 인근에 있다. 숙소를 찾아가 방을 잡은 뒤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으로 갔다. 피곤해서 그녀들이 올 때까지 그냥 앉아 있었다. ​ 베네치아 산타루치아역에서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는데 낯선 여성 여행객 둘이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담배 인심이 풍부한 동양인의 친절을 고려해서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담배 좀 달라고 하여 나는 담배를 그녀들에게 한 가치 씩 나누어주었다. 그러자 그녀들은 담배를 피면서 내게 말을 건넨다. 그녀들은 내게 자신들이 헬라스인이며, 아테네에서 왔으며 ,또한 영어 교사라고 소개했다. 이번에 시간을 내어 이태리 여행중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내게 중국인, 일본인이냐고 묻는다. 나는 서울에서 왔으며, 한국인이라고 하니 흥미를 보이면서 한국에서는 중국어와 일본어 중 어떤 말을 쓰냐고 했다. 나는 답했다. - 그리스에서는 이태리어와 터키어 중 어떤 말을 씁니까? 그러자 그녀 얼굴이 빨개지면서 당황한 빛을 감추지 못했다. 하여 자신의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내게 예쁜(?) 짓을 많이 시도하였는데 불행히도(?) 기다리던 그녀들이 도착했다. ​ 4월 26일에 체코 프라하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들. 살면서 유럽 여행을 꼭 가고 싶었던 그녀들. 다니던 직장에서 회사냐, 여행이냐를 택하라는 요구에 직장을 때려 치고 그간 결혼 자금 삼아 저축한 돈으로 여행길에 나선 그녀들. 여행사에서 배낭여행 설명회 참가한 후 받은 가이드북 책자 달랑 하나 들고 영어 한 마디 하지 못하면서 나선 그녀들. 길을 물을 때면 책자에 손가락으로 찍으면서 눈빛으로 어디냐고 물으면서 쏘다니는 최초의 손가락 여행파인 그녀들. 하나는 오드리 헵번 스타일을 좋아하듯 치마가 잘 어울리는 새침떼기이고, 다른 하나는 털털한 중성 스타일로 바지가 잘 어울리는 선머슴아인 그녀들. 작심하고 온 것인데 배낭여행조차 점차 패키지화 되어가는 바람에 모험과 낭만에 대한 기대로 실망하던 그녀들. 하여, 내 이야기가 재미있고 유부남이어서 오히려 안심이 되면서도 흥미진진할 듯하다면서 이태리에서는 같이 움직이자고 하여 4월 30일에 베네치아에서 만나자고 했던 그녀들. 지금 생각해도 재미난 일인 듯싶다. 체코 프라하에서 약속을 하고 이태리 베네치아에서 만난다. 휴전선과 바다로 막혀 있는 한국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가 힘들지 않던가. 기껏해야 서울에서 약속을 하여 제주도에서 만난다든가 하는 것이 고작일 것이다. 각자 따로 다니다가 견우와 직녀처럼 어느 날을 정해 전혀 가보지 못한, 국경을 쉽게 넘어 낯선 곳에서 재회를 가진다는 것. 아마도 나는 이때 비로소 처음 유럽 여행을 실감할 수 있었다. 밤이 늦은 시각에 여자 둘을 끼고 이태리 정통 피자 한판 사서 숙소로 들어가는데 이태리 남자들이 부러운 듯이 쳐다본다. 사정을 모르니 부러울 것이다. 수많은 오해를 낳는 부러움과 질투로 타인들에게 보이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이 순간을 즐기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우리들은 각각 샤워를 마친 뒤 TV를 보며 각자 프라하에서 예까지 왔던 경험담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심야 시간대에 혹시 있을 지도 모를 에로틱한 영화를 기대하였지만 별 것이 없었다. 새침떼기 아가씨가 왜 그런 것에 관심이 있냐고 하며 다소 못마땅한 듯했지만 선머슴아 아가씨가 의외로 나를 이해해주는 눈치였다. TV에는 별 게 나오지 않았다. 별 일이 있었을까? 그냥 잤다. ​ 오랜만에 늦은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들이 없다. 베로나에 갔다. 내가 베로나 이야기를 했더니 자극을 받은 모양이다. 아점을 대충 먹고 베네치아 관광에 나섰다. 오후 4시에 베네치아 산마리노 광장에서 만나기로 한 것이다. ​ 산마리노 광장으로 가는 길은 미로의 연속이다. 영화에서 흔히 보던 운하 사이로 좁은 골목길과 다리가 연결되어 있어서 자칫하여 길을 잃으면 경을 칠 일이다. 다행히도 관광객들 다수가 가는 길로 따라가면 된다. 한 시간 정도 관광객들을 따라가니 광장이 나타났다. ​ 광장에는 사람들이 북적였다. 이야기를 듣자하니 노동절 휴일이라는 게다. 해서, 인파가 장난이 아니었다. 유럽에 와서 처음 겪는 일인 셈이다. 한국인도 한 명 만났다. 2주 휴가로 왔다는 직장인이었다. 한국인들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이 얼마나 경제적으로 여행을 하는지를 강조하는 것이다. 나는 듣고만 있었다. 사실 따져보면 사람들이란 자기 수준에 경제적인 여행을 하는 것일 뿐이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해서, 그의 입장에서는 경제적이겠지만, 나로서는 그 정도면 풍족하다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말을 하지 않았다. ​ 베네치아 광장 중앙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그녀가 보고 싶어졌다. 나타샤와 이곳 까페에서 유명하다는 이태리 커피를 마시면서 폼 좀 잡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가득했다. 베네치아 중심 산마리노 광장에서 사랑을 외쳤다. ​ 그녀들을 찾는 것이 어려울 것이라 여겼지만, 의외로 쉽게 찾았다. 광장에서 이렇듯 지랄하는데 그녀들이 나를 찾지 못할 까닭이 무엇이 있겠는가? 하하하. 광장 한 바퀴 돌며 사람 구경하고 저녁이 되면 미로 길을 빠져나갈 엄두가 나지 않아 다시 골목길로 갔다. 똑같은 길을 갈 것인가. 아니다. 내가 누구인가. 가지 않은 길을 가보자. 그녀들은 걱정하면서도 은근히 나를 믿는 눈치다. 믿는 도끼에 발등을 찍히나? 이리 저리 헤맨 끝에 간신히 미로를 탈출했다. 덕분에 관광객들이 가지 않은 베네치아 구석구석을 구경하긴 했지만... 다시 하라면 못하겠다. 미로를 헤매다 탈출한 기념으로 우리는 과감하게 스파게티를 역 앞 가게에서 주문. ​ 이제 헤어질 시간. 그녀들은 기차를 타고, 나는 유로버스를 타고. 나는 두달 동안 열흘 이용 가능한 유레일패스와 유로버스를 교대로 이용했기 때문에. 로마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베네치아처럼 쉽게 만날 수 있겠지? 숙소로 돌아와 버스를 기다리는데 오지 않았다. 어찌된 일인지... 게다가 유로버스 추천 숙소라는데 배낭객들이 하나도 안 보이니 어찌된 일인지... 초조감은 극심해지고. 차가 왔다. 살았다. 다행이다. 알고 보니 추천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산타루치아역 인근 숙소로 다들 간다는 것이다. 이들이 좋아하는 숙소란 바가 있어서 새벽 한 시까지 시끄럽게 놀아도 되는 곳이다. 하긴 이 숙소는 정말 수도원이었어. ​ 자. 가자. 로마로... 그런데 버스에서 잘 생각이었는데 잠을 못 잘 분위기다. 애들이 술에 취해서 정신이 없다. 티볼리에서 사색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4. 22. 5:20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683351 통계보기 티볼리에서 사색하다 1997년 5월 3일 “그곳은 아름답다, 로마와 티볼리 사이에 있는 그 마을은, 사비나 산맥의 산기슭에 부채꼴처럼 펼쳐져 있고, 일찍이 열광으로 들끓었던 마을. 고대에는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토록 많은 화가들이 거쳐 갔던 곳이다...<내가 차라리 예술가로 태어났더라면, 폐허와 걸작품들 사이에서 고독과 자유로움과 태양을 누리는 그런 예술가로......>- 장 그르니에, 지중해의 영감,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중에서” 과한 인연은 집착을 부르고, 집착은 이별을 고하는가. 오드리 헵번 스타일로 무장한 그녀들과 로마의 휴일을 되풀이 즐기기에는 내 감수성이 지나치게 예민했던 듯싶다. 트래비 샘, 판테옹, 스페인 광장, 라보나 광장을 돌았으나 남는 게 없다. 게다가 그녀들과 나는 사사건건 의견이 달랐다. 이리 가자하면 저리 가자, 이걸 해보자 하면 저걸 해보자. 무엇 하나 같은 것이 없을 지경이다. 아니, 처음에는 우리 사이에 왜 이리 공통점이 많은 걸까 하면서 시작한 동행이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몇 번의 기적과도 같은 만남으로 인해 착시현상이 발생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무엇이든지 갈등은 사소한 것으로부터 출발했고, 서로 충분히 양보했다고 여겼고, 임계점에 다다랐을 때 더 이상의 배려는 자존심을 무너뜨리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서로가. 결국 그녀들은 로마에 머물기를 원했고, 나는 티볼리로 떠났다.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미소년 안토니우스를 사랑하였으며, 재임 중에 여행을 즐겨하였고, 용맹하고 강건한 로마식보다는 감성적인 그리스식 미적 취향을 지녔다고 한다. 해서, 하드리아누스의 미적 태도가 고스란히 반영된 것이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 장 그르니에는 왜 ‘알제리’라고 했을까?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별장, 그것이 곧 알제리이다...어떤 사람들은 진정한 알제리는 로마인들의 알제리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고, 다른 사람들은 아랍인들의 알제리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마혼 장인들과 시실리아 어부들의 알제리라고 말할 것이다. 그들 모두가 옳다. 그리고 그들은 또한 실수를 저지르고 있기도 하다. 이 나라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속해 있는 나라가 아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인다.” 장 그르니에는 알제대학교 철학과 선생으로 알제리 태생 까뮈를 가르쳤으며, 까뮈에게 큰 영향을 끼친 까뮈의 스승이다. 까뮈가 훗날 알제리 독립전쟁에 대해서 모호한 입장을 지녔던 것을 떠올린다면 장 그르니에의 수사법에 고개를 끄덕일만하다. “알제리아의 람바이시스에서 그가 행한 엄격한 부대시찰과 혹독한 훈련규정은 128년에 그가 병사들에게 한 연설을 담고 있는 장문의 비문에 잘 나타나 있다.- 하드리아누스의 행적에 대한 인터넷 글에서”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말년에도 여행을 떠났지만, 이번에는 일이 목적이었고, 로마의 오랜 식민지인 알제리 영토를 둘러보는 것이었다. 황제가 지금의 알제리의 랑베즈인 람바이시스로 간 이유는 북아프리카 전선을 지키는 제 3군단을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장 그르니에는 어떤 이국적인 것도 소화할 수 있는 로마 제국의 영광을 노래하는 것일까? 나는 한편으로 한 번도 제국의 신민으로 살아보지 못한 탓에 제국의 미학에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제국주의를 전도한 양상, 즉 국제주의에 관한 미학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게 국제주의 세상이란 어떤 세상일까. 그 세상은 제국주의 세상보다 효율적이면서도 아름다워야 할 것이다. 신자유주의 세계화 세상보다 경제적이면서도 미학적이어야 할 것이다. 과연... 해서, 직관을 끌어당겨 상상을 일으키고 주의를 최대한 집중시켜 사색에 몰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세상은 어떠한 세상일까. 폐허에서 과연 미래를 만날 수 있을까. 장 그르니에는 말한다. “그 어떤 모호한 말보다 가장 평범한 말이 위대함과 엄격함으로 가득찬 이 광경에 더 어울리리라. 단 하나의 그림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드는 어린애처럼 무한을 암시하는 어떤 간결함, 지중해에 대한 정의란 이런 것이 아닐까?” 광개토왕 비문을 보고 느끼는 감흥이 이와 비슷할까. 한반도에 머무르던 좀생이 기질에서 벗어나고픈 제국적 야망일까. 고작 이 정도라면 파시즘의 미학으로 불러도 손색이 없겠고^^. 그러나 그렇지 않다. 장 그르니에가 정녕 말하고자 했던 것은... 안달루시아 태상의 젊은 청년과도 같은, 청춘의 꿈과 같은 것. 이제는 없는, 기억으로만 남아 있는 ‘무엇’에 대한 향수, 노스탤지어, 낭만인 것이다. 스승의 낭만을 극한까지 추구하여 정점에 이르게 한 이가 까뮈인 셈이다. 지금은 잔해로만, 화석으로만 남아 있는, 화려한 젊은 날을 추억하는 것. 마치 십년 전의 유럽여행을 쓰는 나의 글쓰기처럼. 이 글쓰기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 왜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하고 있는 것일까. 티볼리는 B선 지하철을 타고 종점 전역에서 내려 4번 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약 1시간 정도 걸린다. 티볼리에 오르면 전망이 무척 좋다. 서양인들이 언덕이 있는 집을 선호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나는 빌라 데스떼를 먼저 갔다. 소위 600개의 분수가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뿜어댄다는 별장터이다. 수도원이었는데 데스떼 가문이 정원으로 만들어서 이태리 대표 정원으로 자리매김되었다고 한다. 여러 블로그에서 사진과 함께 잘 소개되어 있는데 내 소감이란 이렇다. 별 게 없잖아? 기억나는 것은 서양애들이 들어가지 말라는 잔디밭에 들어가서 죽치고 논다는 것이다. 연인이 가서 뽀뽀하고 지랄이다. 가족들이 와서는 밥 먹고. 하여간 내가 유럽에서 느낀 세 가지는 이렇다. 하나, 박물관 등에서 사진 찍지 마시오, 하는 말을 잘 듣는 사람은 동양인, 일본인과 한국인 뿐이다. 둘,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안 들어가는 사람은 동양인, 일본인과 한국인뿐이다. 셋, 휭단보도 빨간불임에도 건너가지 않고 신호가 바뀔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은 동양인, 일본인과 한국인뿐이다. 서양 애들의 말은 어떠한가. 자신들이 왜 잔디밭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지를 설득해달라고 말한다. 그들의 사고방식이란 규정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규정한 것조차도 완전하다고 여기지 않으니... 나는 빌라 데스떼를 나와 걸어서 하드리아누스 별장까지 걸어갔다. 간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데 다 개뻥이라고 나는 본다. 왜? 유적지가 원래 그렇다. 하드리아누스 별장 소개하는 사진을 보면 꼭 나오는 연못 사진이 있는데 이 연못 있는 데를 제외하고서는 사실 볼 게 없다. 고고학자나 이 방면 전문가들이야 관심을 가질 대목이 많겠고, 내가 갔을 때도 여전히 발굴중이었지만, 일반 여행객들의 호기심을 끌 정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별장은 부천의 아인스월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의 유명 건축물을 모형화 시킨 테마파크. 이것이 내가 규정하는 하드리아누스 별장이다. 하드리아누스의 상상력은 시대를 넘어서 관광 아이템 만들기에 골몰하는 유럽 관광 담당자들의 귀감이 되었다. 유럽 곳곳에서 굳이 여기저기 다닐 필요 없이 한 곳에 모형전시물을 만든 테마파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도심의 보행자 거리가 이를 압축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다만, 원조라는 게 그렇다. 전문가만이 식별할 수 있다는 점. 김기덕 영화와 같은, 진정한 작가주의 영화처럼 대중은 이러한 영화에 대해 무관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 장 그르니에는 옳았다. 하드리아누스의 별장은 모든 나라에서 온 이들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그들은 각자의 이유로 별장에 만족했을 것이다. 별장을 나와 버스를 탔다. 승객 중에 흑인 여성이 내가 내릴 때까지 노래와 기도를 계속했다. 왜? 저렇듯 애절하게 하는 것일까? 왜? 왜? 왜? 그 버스에는 수녀들도 있었는데 조용히 자기 볼 일만 보고 있을 뿐. 문득 ‘미션’이란 영화를 떠올리면서, 갑자기 내가 티볼리를 가고 싶었던 것은 티볼리라는 노래 때문이 아닐까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제목의 노래를 내가 어디서 들었던 것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흔적조차 남지 않은 티볼리.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에서 들었던 것 같은데... 이태리에서 공부한다는 한국 여성이 하는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로마, 이태리에 정이 들어가는 듯싶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니스에서 아드리아나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4. 24. 3:52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749758 통계보기 니스에서 아드리아나를 만나다 1997년 5월 5일 그녀의 이름은 아드리아나. 그녀 이야기를 잠시 해볼까. 그녀는 오스트리아인 아버지와 스페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셋째 딸로 태어난 오스트리아인이다. 첫째는 저널리스트이고, 둘째는 컴퓨터 회사에 다니고, 아드리아나는 인테리어를 공부하고 있는 중이다. 취미는 스키와 승마. 스페인, 독일어, 영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다. 그녀는 밤기차로 스페인에 가고 있다, 모국에서 승마를 즐기기 위해. 우리는 그녀를 컴파트먼트에서 만난 것이다. 우리라고? 그렇다. 우리다. 자칭 플레이보이라는 한국인 동행 친구를 만난 것이다. 플레이보이라지만 한 번도 작업에 성공하지 못했을 것 같은, 희망사항이 플레이보이인 어설픈 짝퉁 플레이보이였다. 나는 유로버스로 니스에 아침에 도착했다. 갑작스런 변덕 탓에 하루라도 이태리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남들이 다 좋다는 피렌체, 혹은 플로렌스를 그냥 통과하고 말았다. 아침에 도착하여 유로버스가 추천한 숙소를 가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역에 가서 유인락커를 찾아 배낭을 맡기고 일일 관광이나 해보자 했으나 유인 락카가 없었다. 인포메이션을 찾아 문의하니 호텔 락커룸을 소개해준다. 당시 물가로 10프랑. 그때 만난 것이 캐나다에서 공부하고 있다는 녀석이다. 그런데 유럽여행 중에는 왜 이리 건축 전공자들을 많이 만나는 것인지... 비행기에서 만난 아가씨도 건축 전공이었잖아. 한국에서 건축 전공 전문대를 졸업한 이 녀석이 캐나다 영어 연수 6개월을 마치고 곧장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유럽 여행 좀 하다가 돌아간다나... 팔자 좋은 녀석. 그래서 우리인 것이다. 우리는 잔뜩 기대하면서 니스 해안을 간다. 무슨 기대? 아, 이제 우리도 토플리스 차림의 아가씨들을 보고야 마는 것인가. ㅋㅋㅋ. 우리는 시선 처리를 위해 선글라스로 완벽하게 무장하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뛰는 것인지 걸어가는 것인지 애매하게 달려간 것이다. 아뿔싸. 아직 시즌이 아니었던 것이다. 날씨는 온화한 편이었으나 그렇다고 수영을 즐길 만큼은 되지 않는... 좌절 모드로 돌입한 우리는 해안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햇살은 그런대로 따뜻했다. 그렇다면 우리만이라도 선도적으로 일광욕을 즐겨보자고. 누가 알아? 우리보고 따라서 일광욕할지... 아무도 따라하지 않았다. 바람이 굉장히 세게 부는구나. 우리는 서로 아무 말 없이 부스스 일어나 해안을 빠져나왔다. 젠장할, 뭐, 니스라고 별 거냐. 광안리보다 못하네, 뭘. 투덜거리면서 한마디씩 했는데 물은 좋긴 했다. 하지만 그때는 뭐 하나라도 찾아서 씹어야 했기에 수질 좋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우리는 샤토 성에 올라갔다. 니스만 북쪽 언덕 위에 있는 성터다. 성은 파괴되었지만 성터는 남아 이곳에서 니스를 내려다보면 전망이 좋다. 성에서 내려온 우리는 잠시 헤어지기로 했다. 그는 니스에 남고, 나는 칸으로. 칸은 마침 칸 영화제를 준비 중이었다. 5월 7일부터 19일까지가 영화제 기간이었다. 해안도로는 이미 각국의 부스로 채워져 있고, 영화 홍보물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었다. 안 되겠다싶어 나는 저녁기차로 스페인으로 떠나려던 생각을 애초의 마음을 바꿔 며칠 묵을 생각을 하였다. 해서, 이곳저곳 숙소를 알아보러 다닌 것이다. 그러나 허탕, 또 허탕, 계속 허탕. 워낙 유명한 영화제여서 이 기간 동안은 일 년 전부터 예약을 하고 조기에 마감이 된다는 것이다. 방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유스호스텔 가격이 만만치 않게 비싸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야 어디까지나 저렴한 게스트하우스 수준을 고집하는지라... 나는 북유럽에선 숙박비 포함하여 일일 삼만 오천 원, 중부유럽에서는 삼만 원, 남부유럽에서는 이만 원의 예산을 책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해서, 삼만 오천 원까지도 고려할 수 있었는데 그 이상을 부르는지라... 아쉬움을 뒤로 하고 니스로 무거운 발걸음을 떼려는데... 앤디 맥도웰이 등장한 것이다. 부산영화제에서도 하는 방식이지만, 칸영화제 홍보를 위해 현지 방송사에서 앤디 맥도웰을 초빙하여 해안도로에 마련된 가설무대에서 앤디 맥도웰과 토크쇼를 진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맥도웰이 누구던가. 사랑의 블랙홀 (Groundhog Day, 1992)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부상한 여배우 아니던가. 사랑의 블랙홀이 굉장히 인기가 있어서 나중에 스페인 기차에서도 방영해줄 만큼 인기가 많았고, 한국에서도 지금까지도 많은 팬을 확보할 정도다. 나 역시 이 영화를 한 열 번 정도 본 것 같다. 최근 이웃이 된 분의 표현을 빌면, 작가주의 작품도 아니면서, 그렇다고 영화관 나오면 금방 잊고 마는 영화도 아닌 영화라고나 할까. 어려운 영화도 아닌데 내 머리를 한동안 굉장히 복잡하게 만든 영화였다. 지금 앤디 맥도웰을 보면 그저 그런데 그때는 왜 이리 매력적이었는지... 가끔은 나도 영화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할 때가 있었던 것이다. 까아악~~~. 내가 빠돌이인지는 미처 몰랐다. 구경하는 인파 속에서 기웃기웃 거리는데 해는 저물어갔다. 니스로 돌아와 9시까지 기다려서 짝퉁 플레이보이를 만났다. 나는 니스 숙소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탓인지 밤기차를 타고 스페인으로 떠나기로 작정하였다. 짝퉁 플레이보이도 떠나려는 비슷한 이유로 떠나기로 한 모양이다. 실은 둘 다 토플리스 아가씨에 대한 좌절 탓이 주된 이유일 것이지만 명분은 그랬다. 떠나기 전, 우리는 차이니스 푸드점에 들려 도시락을 샀다. 지금이야 이런 것이 한국에서도 보편화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중국음식을 뷔페식으로 길거리 가게에서 대중화시킨 것은 처음 보았기에 신기했던 것이다. 스페인으로 가는 밤기차를 탔다. 정확히 이 기차는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에 위치한 역까지 간다. 컴파트먼트에 자리를 잡고서 이제 쿨쿨 자고 아침이면 스페인인 거다, 하면서 조잘대고 있는데 - 사실은 나의 불타는 썰에 감명을 받아 짝퉁 플레이보이가 에로티즘에 관해 해적판 강의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헤헤~~ - 그때 그녀가 등장한 것이다. 응큼해 보이는 것이 분명한 아시아인 두 명이 있는 소굴에 홀로 당당히 들어온 그녀, 아드리아나. 잡아먹지는(?) 않을까 두렵지 않았을까? 서양에서는 어머니가 딸에게 남자는 몽땅 늑대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란 말인가? 이 매력적인 아가씨의 출현으로 우리는 내심 환호성을 지르고야 만 것이다. 신은 살아 있다. 토플리스의 좌절을 보상해주시는구나. 그녀가 인테리어 전공이라고 하자 짝퉁 플레이보이는 물 만난 고기였다. 신이 나서 6개월 공부한 영어 실력으로 온갖 썰을 다 푸는 것이었다. 이 녀석, 배운 것을 곧바로 써먹고 있구나. 나는 어느새 한국인의 실천력에 감탄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인들과 지내면서 늘 느끼는 것은 이놈들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좀만 뭐 된다 싶으면 불나비처럼 뛰어드는 특징이 있다. 열 중 아홉은 망하면서 말이다. 이것저것 섬세하게 고려하는 맛이 없고 냅다 밀어붙인다. 나 같은 사람 입장에서는 참 짜증나는 스타일이다. 해서, 나는 한국에서 살면서 숱하게 이런 소리를 듣는다. 너처럼 해서 뭐가 하나라도 되겠니... 젠장할. 어쩌면 내가 좌파인 이유 중 하나도 이것 때문일 것이다. 밀어붙이는 놈들이 싫다. 우리는 가져온 도시락을 꺼냈다. 그런데 갑자기 짝퉁 녀석이 볶음밥을 뜯더니 아드리아나한테 먹으라고 젓가락을 가져가는 것이 아닌가. 나는 일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드리아나가 기분이 나빠서 거절하면 뭐가 되는가 이 말이다.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지, 상대 의중을 생각하지 않고 밀어붙이냐는 생각으로 내가 아드리아나가 되는 듯 잔뜩 불쾌한 표정과 미안한 표정을 복잡하게 한 채 아드리아나를 바라보는 순간... 그녀가 생긋 웃으면서 받아먹는 것이 아닌가. 이런. 아드리아나의 천성이 무서웠다. 애 둘을 키우면서 알게 된 것 중 하나가 인간에게는 천성이 분명 있다는 게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말이다. 그것이 오십 프로이고, 나머지 오십 프로가 교육인 게다. 누군가가 백 프로 천성이라고 하고, 누군가 백 프로 교육이라고 하면 나는 둘 다 안 믿는다. 반반이다. 어떤 천성은 습관을 기르면 바꿀 수 있고, 어떤 것은 바뀌지 않는다. 아드리아나의 당시 태도는 지금에 봐도 그녀의 천성이었다. 교육의 결과라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짝퉁은 정말로 감격한 모양이다. 얼굴, 몸매 다 되지, 성격도 좋아, 집안도 좋은 것 같지... 어떻게든 해볼 작정으로 그때부터 난리가 아니었다. 밤새 이야기를 할 작정인지 묻고 또 묻고, 먹이고 또 먹이고... 참, 아드리아나는 서양인인데 젓가락질도 잘 했다. 어느새 국경역에 도착했다. 어스름한 새벽. 이제 헤어질 시간. 짝퉁은 다른 기차로 갈아타는 그녀와 이별하는 것이 무척 싫은 표정이다. 밤새 작업하였건만... 잠을 못 잔 얼굴에 아쉬운 표정이 역력한 짝퉁을 위해 그녀는 무엇을 하였을까. 어디론가 다녀오더니 자판기 커피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선물 하나씩 해준다고 하는 것이다. 무슨 선물? 이리 오세요, 하더니 나부터 꼭 안아주면서 뺨으로 키스를 해주는 것이다. - 영화에서는 자주 봤는데 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 짝퉁 녀석은 여전히 볼멘 표정이었다. 입으로 해달라고 우겼다. 그렇게 칭얼대는 녀석에게 아드리아나는 더욱 더 웃으면서 꼭 안아주는 것이다. 아마 나하고 할 때보다 서너 배는 길었던 것 같다. 나는 하하하 많이 웃었다. 고마워. 아드리아나. 바르셀로나에서 아리랑 할아버지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4. 25. 3:08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784364 통계보기 바르셀로나에서 아리랑 할아버지를 만나다 1997년 5월 6일 국경을 넘어 바르셀로나로 가는 기차였지만 마치 춘천행 기차를 타고 가는 착각이 들었다. 스페인 첫인상이 그만큼 매우 친숙했다. 이뿐이랴. 여성들도 동양적인 얼굴에 대부분 지적이고 예쁜 것처럼 보였다. (헐리웃 영화를 많이 보아서일까. 금발 머리하면 멍청하다는 선입견처럼 검은 머리는 지적이라는 선입견을 나도 모르게 지니고 있었나 보다. 몰랐는데 유럽여행하면서 깨달았다.) 이래서 서양 애들이 그토록 스페인 여성을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인가. 여행 중에 이런 저런 이야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스페인 여성은 감수성이 뛰어나고, 여성적이고, 열정적이고, 난잡하지 않다. 무엇보다 가장 높은 점수를 받는 항목은 결혼상대로서 일등 신부감이라는 게다. 결혼하면 처녀 때 아무리 왈가닥으로 놀아도 한 눈 팔지 않고 가정에만 몰두한다는 것이다. 어? 한국 여성? ㅋㅋㅋ. 내가 감히 스페인 여성과 한국 여성을 비교한다면 다른 것은 다 비슷한데 처녀 때가 조금 다른 것 같다. 한국 여성이 처녀 때는 전 세계적으로 콧대가 유난히 높고, 불친절하다는 것을 강조하고픈 것이다. 한국 여성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국 여성들이 사람 차별 참 잘 한다. 해서, 나는 강조하는 것이다. 군 가산점 같은 것은 위헌이라고 나도 생각하고,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신 여성의 사회적 참여를 의무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봉사활동 일 년 정도를 의무적으로 시켜야 한다. 이렇게 하면 근본적인 대안은 아니더라도 노동, 교육, 문화 전반에 많은 변화가 올 것이라고 예전부터 주장한 바 있다. 이런 주장하면 표 떨어지는 소리여서 아무도 정책으로 채택하지 않겠지만, 나는 독재를 해서라도 이 정책을 꼭 추진하고픈 것이다. 하여간 이런 주장도 한 십년 지나면 정책 검토 대상이 될 것이다. 왜 난 십년을 앞서가는지 원... 계획대로 중북부 유럽에서는 게스트하우스를, 남부 유럽에서는 한국인 민박을 이용하고자 했다. 입소문이 난 아리랑 숙소를 정했는데 잘 정했다. 아리랑 민박 주인은 할아버지였는데 사명감에 투철한 전형적인 한국인이라고 할까. 분위기를 이끄는 솜씨가 장난이 아니다. 지휘봉을 들고 요점을 칠판으로 지적하는 모습은 마치 작전 명령을 하달하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뜻밖이라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나는 매뉴얼을 사랑한다. 해서,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메모를 하였다. 아리랑 할아버지는 작전장교에서 정훈장교로 바뀐다. 황영조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금메달리스트 황영조 기념관을 설립하자는데 몬주익의 영웅 황영조가 왜 이리 꽁무니를 빼는지 이해를 못하겠다는 것이다. 한 입으로 두 말하기도 한다면서 실망했다는 것이다. 이 나이에 자신이 이권 좀 챙겨보자고 오해하는 것 같아 참담하다고 하면서. 나도 처음에 들었을 때는 의심을 했지만, 좀 지내보니 아리랑 할아버지가 돈 좀 만지려고 하는 것은 아닌 것 같았다. 그보다는 명예욕이랄까. 죽기 전에 뭔가 하나 남겨보려고 하는... 아마 한국에 있었다면 무슨 무슨 비상대책위원장 같은 것 감투가 있다면 돈 한 푼 안 생겨도 나서서 할 양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공감을 해서일까. 아리랑 할아버지가 이번에는 정훈장교에서 주방장으로 바뀐다. 나는 한국에서도 육개장 같은 것 거의 안 먹었는데 할아버지가 해준 육개장을 참 맛있게 먹었다. 이로써 할아버지에 대한 천성이다시피 하는, 모든 것을 의심하고야말겠다는 나의 의지를 무디게 했다. 조용하고 쾌적한 남국의 날씨는 정말로 좋았다. 바르셀로나. 프라하와 함께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둘 다 꼭 다시 가고픈 도시.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이고 가우디는 바르셀로나다. 당신이 바르셀로나에 간다면 놓치면 반드시 후회할 법한 것이 가우디 건축물이다. 내가 건축물에 대해 지니고 있던 통상적인 생각을 처절하게 무너뜨린다. 이전까지 내가 알던 현대 건축물은 모던한 양식이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예술적인 건축물을 보면, 최근 짓고 있는 파주 헤이리까지도 죄다 모던하다. 그런데 가우디의 그것은 모던하지 않다. 모던 이후라고 말해야 할까. 지구 온난화가 진행된 백년 뒤라면 전 세계 보편 건축 양식이 가우디 차지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해볼 정도다. 가우디 건축물을 보러 버스를 타고 가는데 백주에 거리에서 날강도 사건이 벌어졌다. 북아프리카계로 보이는 삼인조가 길을 가던 여성 핸드백을 날치기하려다가 실패하자 여성과 핸드백을 놓고서 실랑이를 하는 것이다. 다행히 여성을 폭행하지는 않고, 서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밀고 당겼다. 주위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아무도 없고, 내가 깜짝 놀라 어? 하며 소리를 지르면서 손가락으로 가리켜도 버스기사도 그냥 가고, 사람들도 늘 있는 일이거니 한다. 바르셀로나 치안은 다른 대도시에 비해서 비교적 안전한 편이다. 로마에서처럼 바르셀로나에서도 집시들 행태가 나쁘다는 입소문이 많았지만 안심해도 된다. 집시에 대해서는 안심하라. 대부분 과장된 것이다. 다만, 밤에는 여성 혼자 다니기에는 조심스러운 것 같다. 한국에서는 12시 직전까지 여성이 술 취해서 몸 가누지 못하고 비틀대어도 괜찮지만, 유럽 대도시에서 그러면 그 여성 큰 일이 날 가능성이 많은 것 같다. 바르셀로나 곳곳에서 느낀 바이지만, 특히 해안가애서 나는 관광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에 놀랐다. 가령 벤치 하나만 보더라도마치 내가 배를 타고 가는 듯하다. 지하철을 타고 돌아오는데 바르셀로나 거지들을 만났다. 남녀 커플로 보이는, 옷을 잘 차려 입어서 외형적으로는 전혀 거지라고 보이지 않는 이 스페인 거지들이 말을 하다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흐느끼기 시작한다. 그리고 손을 벌리며 애원을 하는 것이다. 갈수록 바르셀로나가 마음에 든다. 하루 묵을 생각이 바뀌어 며칠 있다 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거지조차도 멋있다. 바르셀로나에는 피카소가 없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4. 26. 1:3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814688 통계보기 바르셀로나에는 피카소가 없다 1997년 5월 7일에서 5월 8일 오전부터 아리랑 민박이 북적이기 시작했다. 각자 따로 왔다가 스페인 기차에서 만나 뭉치기로 했다는 여성 삼인방. 커플로 보이지만 커플이 아닌 캐나다 유학생들, 이들도 짝퉁 플레이보이처럼 연수를 마친 뒤 유럽여행 후 귀국한다고 했다. 여자 쪽이 남자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는데도 남자에 많이 의존하는 듯싶다. 혼자 다니는 것에 자신이 없어한다. 간단한 인사를 마치고 오늘 일정을 잡았다. "저의 스승은 자연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언제나 새로움을 보여 줍니다. 땅의 모양이나 식물이나 동물의 세계에도 어느 것 하나 똑같은 것은 없습니다. 저도 똑같은 건축물을 짓고 싶지 않습니다. - 가우디“ 전날에는 구엘 저택, 구엘 공원, 성가족성당 등을 거쳐 람블라스 거리로 바르셀로나 해안가를 둘러보았다면 오늘은 피카소 뮤지엄부터 둘러보는 코스를 계획하였다. 피카소 뮤지엄으로 가니 안드레 드랭 특별전도 열리고 있어서 피카소와 함께 보았다. 피카소는 말라가 출신으로 십대 시절 바르셀로나에서 미술을 하였고, 19살이었던 1900년에 파리로 가서 정착했다. 그래서일까.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바르셀로나와는 안 어울리지 않나 생각이 들었다. 내 소견으로는 나중에 본 살바도르 달리 그림이 바르셀로나와 잘 어울리지 않나, 카탈루냐적이지 않나 하는 것이다. 내가 만난 카탈루냐는 인간의 의지를 더 중시한 입체파 피카소의 직선보다는 자연을 경외시한 가우디의 곡선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해서, 나는 가우디가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라고 하지만, 동시에 모던 이후를 말할 수 있지 않나 싶은 것이다. 안드레 드랭에 대해서는 별 소감이 없다. 야수파답게 원색을 즐겨 쓰는 화가로구나, 하며 특별한 인상을 받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나는 이 계통으로는 고흐만 편애하는 것이 분명한 듯싶다. 죄다 고흐 짝퉁으로 보이니 원. 오전에는 피카소, 오후에는 몬주익 언덕이다. 몬주익 언덕을 구경하러 가는 도중에 스페인 사람을 만나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해봤다. 어이~ 스페인 양반. 황영조 압니까. 몰라요? (당연히 모르지만)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리스트. 아하! 이런 식으로 쓸 데 없이 썰을 풀고 있는데 비가 오는 것이었다. 금방 그치겠지 하고 그냥 천천히 걸어가는데 소낙비가 내리고 우박까지 떨어지는 것이다. 비에 흠뻑 젖자 급한 김에 아무 버스나 타서 기사에게 가까운 지하철역에 내려달라고 말했다. 버스기사의 답변. 노! 못 알아들었다. 버스에는 나 혼자 있었고, 할 수 없이 그냥 앉아 있었다. 버스가 조금 가더니 멈추었다.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기사가 일어서서 차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닌가. 오잉! 종점이라는 말인가. 나는 낙담한 채 내려서 빗속을 걸어갔다. 어차피 쫄딱 비 맞은 것 더 맞는다고 달라지랴. 그때 방금 내가 내렸던 버스가 내 옆을 바람처럼 스치며 가는 것이 아닌가. 그때 얼마나 기사가 원망스럽던지... 한참을 헤맸다. 만나는 사람마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었는데 저마다 이쪽을, 저쪽을 제시하는 것이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방향감각을 찾게 되었다. 운명의 여신이 짓궂은 듯싶다. 멀리 오백 미터 전방에 에스파냐광장 지하철역을 드디어 찾게 되었는데 그때 비가 멈추는 것이 아닌가. 열 받아서 그냥 걸어갈까 하다가 여신이 또 무슨 장난을 칠까 싶어 지하철을 탔다. 혹시나 했던 예측이 맞았다. 비가 다시 오기 시작했다. 비 때문에 몬주익 언덕 관광 일정 등을 모두 취소하고 아리랑으로 왔다. 저녁에는 플라멩고 쇼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리랑 할아버지의 민박 옵션인데 한인 관광객을 연결시켜주고 약간의 금전적 수익을 내는 것으로 보였다. 어제는 가우디의 자연미에 취해 아리랑 할아버지에 대해 긍정적이었으나 오늘은 피카소의 인공미에 취해 아리랑 할아버지에 대해 비판적으로 돌아선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플라멩고 쇼는 나쁘지 않았다. 여인 둘이서 무대를 연출하였는데 역시 나이가 많은 여성의 연기가 뛰어난 듯싶었다. 기타 연주에 따라 정열적으로 혼신을 다해 박수를 치는 동작이 얼마나 기가 막히던지... 잠시 기타 선율에 여행의 낭만을 만끽하기도 했다. 쇼가 끝나자 아리랑 할아버지가 호레이~하면서 꽃을 무대에 던진다. 그후 할아버지가 반강제로 사람들을 무대로 끌어들인 후 춤을 추자고 한다. 본전 생각나지 않게 하려는 의도가 엿보였다. 해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할아버지 정성이 갸륵하여 다들 어색하게 춤을 추었다. 돌아오는 길에 다들 후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쇼는 그런대로 괜찮았지만, 그래도 액수가 지나치게 높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나도 다소 후회했지만, 그래도 아리랑에서 밥 잘 먹은 팁이라고 여겼더니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사람들이 숙소로 돌아와 소주 팩으로 술판을 벌였다. 아무래도 아쉬운 맘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게다. 비도 내리고. 해서, 일행들은 새벽까지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일행 중에 모 방송국 대본작가가 있었는데 이 여성 이야기가 그중 흥미로웠다. 당시 한국 여성들이 이태리에 가면 잘 들리는 곳 중 하나가 카프리 섬이었다. 요즘도 잘 가나 하고 가끔 검색하는데 요즘도 잘 가나 보다. 그곳에 가면 푸른 동굴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그녀가 빠질 뻔했다든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십년 전이어서.) 이때 잘 생긴 이태리 남자가 그녀를 구해주었고. 시간이 늦어 카프리에 머물게 되었고, 잠을 자게 되었는데... 이 남자가 끈질기게 그녀와의 썸씽을 원하는 듯했다는 게다. 이 대목에 이르러서는 다들 피곤한지 물러나고 나와 그녀만 남아 있었던 것 같다. 내가 도전적으로 말했던 듯싶다. 그래요? 한번 일을 저지르지 그랬어요? 그녀도 지지 않고 말했다. 남자가 마음에 들어서 사고 칠 뻔 했어요. 별 일은 없었다는 게다. 하긴 별 일이 있으면 이야기했을까 싶다. 카프리 섬. 카프리 맥주도 있지만, 근래 이야기고. 당시에 카프리 섬이 인기가 있었던 것은 카프리의 깊은 밤이라는 성인영화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영화 만든 감독이 누구냐면 그 유명한 틴토 브라스다. 나는 틴토 브라스 감독 작품을 거의 다 본 사람으로서 말한다면 카프리의 깊은 밤이 별로라고 여기는 편이다. 영화가 아무려면 어떠한가. 그후로 카프리 섬이 한국에서 유명해진 듯싶다. 다음날 늦게 일어나 역시 육개장을 먹은 뒤 어제 못 다한 일정을 시작했다. 몬주익 언덕 등정. 전망이 좋다. 올림픽 스타디엄도 볼만했다. 경비원에게 뭣 좀 물어보려고 하니 경비원이 스페인어로 뭐라 뭐라 하더니 내게 지도를 준 뒤 담배 한 가치를 주는 것이 아닌가? 빙긋 웃으면서. 나 역시 미소를 지으며 얼른 담배를 받아 피웠다. 이렇게 바르셀로나에 정이 들어가자 떠날 때임을 깨달았다. 가자! 어제까지만 해도 피카소의 게르니카(피카소 그림 중에 유일하게 내가 좋아하는 그림)를 보러 마드리드로 가겠다고 여겼는데 오늘 전망 좋은 몬주익 언덕을 배회하면서 문득 말라가로 가고 싶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피카소는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 출신이 아닌 말라가 출신이 아니겠는가. 가자! 말라가로! 말라가에서 토플리스 여성을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4. 27. 2:25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 말라가에서 토플리스 여성을 만나다 ​ 1997년 5월 8일에서 5월 10일 ​ 스페인을 간다면 바르셀로나 - 발렌시아 구간 기찻길 옆 해안 절경을 놓치지 말기를 권한다. 후일 스페인에 다시 오는 기회가 있다면 이 구간 해변을 찾아가고 말리라. 괜스레 미안한 감도 들었다. 브뤼셀에서 만난 발렌시아 친구가 내게 발렌시아 그림엽서를 몇 장씩 선물로 주면서 자신의 고향을 들려보라고 했건만... 나도 아쉽다. 혁명의 고장, 발렌시아를 가지 못한다는 것은 한국에 와서 광주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것과 같지 않던가. 허나 어쩌랴. 여건이 안 되는 것을. ​ 유레일패스는 두 종류가 있는데 일정한 기간 동안 마음대로 쓸 수 있는 패스와 일정한 기간 동안 특정한 날만 선택하여 쓸 수 있는 패스가 있다. 내 패스는 두 달 동안에 열흘을 쓸 수 있는 후자 패스였다. 어쩔 수 없구나. 발렌시아여. 내 다시 오면 반드시 발렌시아를 가리니... ​ 기차가 갑자기 시끄러워졌다. 수학 여행하는 스페인 학생들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마침 내가 타고 있던 기차에는 스페인어 전공한 한국인이 있어서 잠시 대화할 수 있었다. 학교 졸업한 이후 한 번도 써먹어보지 못했다는 실력이고, 아무리 봐도 되도 안 되는 막무가내 통역이었지만, 물증을 밝힐 수가 없으니 뭐라 할 수는 없는 일. 어찌되었든 모든 학생들과 일일이 소개를 하게 되었다. 여학생이 그중 돋보였는데 성격이 외향적인 듯싶었다. 이 여학생 앞에서 남학생들도 기가 죽은 듯싶을 정도다. 학교 짱처럼 보였는데 이야기할 때 특이하게도 남학생 어깨를 휘어 감고 말한다. 곱상한 남학생은 수줍은 듯 조용히 있고... ​ 고교생들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11~13세. 역시 서양 애들 발육상태는 놀라워라. 유럽을 돌아다니면서 나름대로 나이 계산을 공식화했는데 서양 애들은 보기보다 약 5년 정도를 낮추면 대략 맞는 것 같다. 스물 살쯤 보이면 실제는 열다섯이라는 이야기다. 반면 그들이 동양인을 볼 때는 나이보다 약 오년에서 십년 정도 낮추어서 보는 듯싶다. 가령 당신 나이가 서른이라면 서양 애들은 한 스물 혹은 스물다섯 정도로 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이다. ​ 5월 9일 ​ 세비아, 코르도바. 세비아의 알카사르도 가고 싶었고, 특히 코르도바에서 내리고 싶었지만, 일정상 어려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라나다로 향했다. ​ 그라나다로 오면서 풍광이 바뀌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춘천행 기차를 타고 동해안 일주를 하는 듯했다면 이제부터는 북아프리카 탐험인 것이다. 아, 스페인 남부 지역이 역사적으로 이슬람 지역인 줄은 알았지만, 자연 풍광조차 북아프리카 지역과 흡사하다는 것을 이번에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렇구나. 그라나다는 유럽의 북아프리카였던 셈이다. 장 그르니에식으로 표현한다면, 진정한 그라나다는 이슬람 통치 시대의 그라나다인 셈이다. 기기묘묘한 돌산들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깜짝 놀랐다. 그라나다 시에라네바다 산맥에는 만년설도 있지 않은가? ​ 그라나다에 도착하여 곧바로 알함브라 궁전을 찾는다. 표지판 없이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듯싶다. 궁전에 올라 그라나다의 풍경을 눈에 담은 뒤 기타 선율을 떠올리며 조용히 즐기고 있다가 한국 여성 두 명과 조우한다. 그녀들은 그중 한 명의 거주지인 이집트에서 출발하여 북아프리카를 관통하는 여행 일정의 종착역으로 스페인을 택한 것이다. 이집트 - 튀니지 - 모로코 - 지브롤터 - 그라나다 - 세비아로 이어진다. 돌아다니면서 가장 안타까울 때는 이런 사람을 만날 때다. 나도 당장이라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북아프리카로 가고 싶다. 가고 싶어, 가고 싶다고. 부럽고, 또 부럽다. ​ 미술관을 관람하려 했지만 관람시간이 오후 2시까지였다. 정원이나 보려고 했더니만 표를 끊어야 한다는 것이다. 게다가 정원이 여럿 있는데 이중 3개 중 2개는 내일 와야 볼 수 있다고 하니 굳이 표를 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그냥 내려왔다. 내려오는 길은 올라오던 길과는 다른 길로 내려왔다. 다른 것이 있을까 싶어서. 스페인 청년들이 스페인 노래를 틀어놓고 손뼉을 치며 노래하며 춤을 춘다.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가 이를 구경하면서 따라 휘파람 소리와 비슷한 화음을 넣다가 프렌치 키스를 한다. 은근한 기대가 충족이 되었다. 센트로 광장에 이르러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먹었다. 이후 가게마다 아이스크림 가격을 비교해봤는데 가게마다 가격이 다 달랐다. 역에 도착하여 화장실을 갔다. 소변은 무료, 대변은 유료였다. ​ 말라가까지 가는 기차 구간 역시 경치가 빼어났다. 강원도로 갈 때처럼 수많은 터널을 통과하되 기묘한 돌산을 구경하니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이 이럴까 생각해봤다. 열차에는 스페인판 스파이스 걸스로 보이는 처자들이 레게음악을 틀고 담배 피면서 신나게 떠들고 있었다. 이들에게 어떤 스페인 남자가 어떻게든 말을 붙이려고 하는데 퇴짜를 놓는 것이다. 남자가 좌절한 모습이 너무 불쌍해 보였다. 그때 일본인이 내가 일본인인 줄 알고 말을 건다. 이 친구에 관해서는 이미 말했으니 넘어가자. ​ 늦은 밤에야 말라가에 도착했다. 게다가 기차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해안으로 가야 한다. 버스터미널에서 직진하여 갈스테크 4라고 표시한 데서 숙소도 간신히 구한 뒤에야 한시름을 놓았다. 초행길이었는데 두렵지 않았는가라고 물을 수 있다. 두렵지 않다. 나는 낯선 길을 갈 때 쾌감을 느낄 지경이다. 내게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혹은 내 일생에 처음 가보는 길이란 아기 걸음마처럼 역사적인 사건으로 여긴다. ​ 숙박시설은 만족스러운 수준이나 아침식사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며, 해변까지는 이십여 분이 걸린다. 당연한 말이지만, 해안에 가까울수록 비싸다. 선술집에서 스코틀랜드 위스키를 3잔 마셨고, 전직이 선원이었을 것 같은 주방장과 기념사진을 찍고 나왔다. 밤새 거리를 돌아다니다 그 주방장과 다시 만났다. 주방장이 아는 척하면서 아침에 다시 오라고 하면서 잘 해주겠다고 한다. ​ 5월 10일 ​ 아침에 일어나 곧장 해안으로 갔다. 일찍 가서인지 해안에는 사람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해서, 나 홀로 해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밤새 쏘다닌 탓에 잠이 부족했다. 두어 시간을 잤을까. 깨고 보니 내 주변에 제법 많은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 재빨리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하하. 토플리스 차림을 볼 수 있었다. 눈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는가. 그러나 대부분은 아이 엄마들이었다. 반면 아가씨들은 가슴을 드러내지 않는다. 등만 드러낼 따름이다. 아이 엄마들일지라도 하여간 과감하게 가슴을 드러내고 있는 것은 나로서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무엇이든지 익숙해지면 별 것이 아니게 되는가. 약 삼십분 동안 가슴을 드러낸 토플리스 차림만 보다 보니 수영복을 한 것과 다름없이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만일 모두가 나체 차림이라고 약속하면 그 역시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 분명 이런 지점만큼은 바타이유의 지적이 옳다. 그런 생각을 할 때 즈음 몇몇 아가씨들도 과감하게 토플리스 차림을... ​ 갑자기 혼란스러웠다. 내가 말라가에 온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인가. 토플리스 때문인가. 피카소 때문인가. 그런 생각이 미치자 더 이상 해변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운전면허증처럼, 대학 입시나 취업처럼 따기 전까지, 입학이나 입사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부러울 수 없지만, 막상 따고, 들어가면 아무 것도 아니다. 그저 토플리스 차림이라는 이유만으로 아름답게 보였던 아가씨들이 시간이 지나자 별 다르게 보이지 않는다.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다. 초미니, 배꼽티를 처음 볼 때는, 팬티가 살짝 드러나는 패션을 처음 볼 때는 충격이었으나 이내 별 게 아니게 되듯. 진정한 아름다움은 손쉽게 구해질 수가 없는 것이라는... 어떤 합리적인 이유를 달아야만 직성이 풀리듯 뭔가를 규정하고 해변에 등을 돌리려는 순간... ​ 아, 나는 보았다, 예술을. 남자 친구와 공놀이를 하고 있는 토플리스 차림의 아가씨를 보았다. 이제까지 보았던 가슴들은 정적인 것이었다면, 그녀의 가슴은 동적이었다. 아가씨와 남자 친구가 공을 주거니 받거니 하고 그 사이를 강아지가 쫄래쫄래 공을 따라 다닌다. 해맑은 하늘 아래 해안으로 밀려오는 잔잔한 파도가 배경이다. 그 그림을 보고서야 나는 피카소의 그림을 떠올리게 되었다. 입체파이니 뭐니 하는 것이란 결국 운동을 담고자 한 것이 아닐까. ​ 운동은 직선으로도, 곡선으로도 이루어진다. 레닌의 역사관은 나선형이었다고 한다. 사계절처럼 순환하며 반복되는 듯싶기도 하면서도, 역사의 끝을 달려가는 듯도 한... 만일 좌파가 반성을 해야 한다면, 직선적 역사관에만 매달리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왜 작전상 후퇴조차 받아들이지 못할까. 때로는 모든 권력을 주고도 이기는 길이 있다면 그 길로 가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새 시대에 좌파의 가치 중에 환경과 여성만이 유일하게 각광을 받고 있는 것도 유념할 일이다. 19세기식 자연주의 수법에 주의하면서 전망을 위해 신자연주의를 탐구하는 것도 결코 헛된 일만은 아닐 지도 모른다. ​ 해변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서커스단을 만났다. 참 이상한 일이다. 한국에서 동춘 서커스다 해서 보는 것은 어딘지 어색했다. 불쌍해 보이고, 측은해 보이고. 그러나 서커스 본고장에서는 그런 기색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나의 변두리 의식, 나의 기지촌 의식이 송두리째 파괴되어간다. 달콤한 혁명이 진행 중이다. 이 기분 좋은 깨달음. ​ 갑자기 코끼리 조련사가 코끼리를 쇠막대기로 때린다. 그때 이상한 눈빛을 내비치던 코끼리 조련사. 가해자가 대단한 지위가 아닌 기껏해야 코끼리보다 조금 나은 신세인 코끼리 조련사. 코끼리 조련사의 분노는 코끼리에게 향한다. 코끼리를 향한 분노만이 보상을 받는다. ​ 아아. 과연 내가 느끼는 게르니카는 무엇이란 말인가. 과연 피카소는 제대로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일까. 나는 언제까지... 왜 내 운명이란... 이다지도 슬퍼야 하는가. 의문은 소용돌이치면서 끝 간 데 없이 솟구쳐간다. ​ 그러나 말라가는 휴양지다. 그만큼 해변 경치는 죽인다고 말할 수 있다. 인터넷 검색하면 사진 몇 장만으로도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영국의 중산층이 휴가차 자주 온다고 한다. 이런 데서 지나치게 철학적이다가는 돌아버릴 지경이다. ​ 안 되겠다. 말라가를 떠나야 한다. 다시 바르셀로나로 가자.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보아야 하지 않겠나. 피게레스에서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4. 28. 3:1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882522 통계보기 * 내가 본 그림 이미지와 가장 비슷한 이미지 그림이다. 피게레스에서 살바도르 달리를 만나다 1997년 5월 11일 5월 10일 5시 2o분에 말라가에서 출발하여 코르도바를 경유하여 0시 45분에 마드리드에 도착하였는데 너무나 피곤하여 그냥 통과. 사라고사를 경유하여 바르셀로나로 간다. 다른 유럽 기차들과 달리 스페인 기차들은 로컬 기차와 국경으로 가는 기차를 제외하고서는 사람들로 북적이는 듯싶다. 밤기차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스페인 기차는 예약이 필수다. 스페인 차장이 목이 짧고 코는 크고 눈도 큰데 어딘지 안 생겨 보이는 것이 전형적인 프랑스 사람처럼 보였다. 잠깐의 검표가 끝난 후 사라고사-바르셀로나 구간에서 약 한 시간 정도 잠을 잤는데 바닥에서 잤다. 컴파트먼트가 아니었기에. 옛날 기차와 달리 고속기차는 북유럽, 독일이건, 프랑스건, 스페인이건 컴파트먼트 구조가 아니다. 최신식이어서 좋기는 하지만, 나는 그래도 컴파트먼트 열차가 좋은 것 같다. 열차에서 사랑의 블랙홀을 스페인어 버전으로 방영해준다. 그 덕에 잠이 깼다. 이미 영화를 여러 번 보았기에 대사를 다 알고 있어서 영화 보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었다. 다만 자막이 아닌 스페인 성우의 목소리를 입힌 것이어서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이때만큼은 스페인어가 짜증이 났다. 그 외에는 들으면 들을수록 스페인어가 참 매력적인 언어인 듯싶다. 영화가 재미있었기도 하지만, 더 이상 잘 수가 없었다. 무척 졸렸다. 자고 싶었다. 그러나 스페인 남자 아이가 계속 울어댄다. 스페인 남자들은 참 못 생겼다. 어떻게 저렇게 못 생길 수 있나 생각이 들 정도다. 반면 스페인 여자들은 이쁘기만 하니 신은 공평한가?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여 아리랑에서 맡긴 배낭을 찾는다. 그냥 나올까 하다 너무 피곤해서 약 한 시간 정도 잔다. 자고 일어나니 미국 유학생과 여성이 왔다. 따로 왔다가 어느 순간 남녀가 동행하기로 한 모양이다. 흔한 일이다. 경제적으로도 이익이고, 대인 관계에 자신이 없는 경우 이익이다. 이러한 패턴은 대부분 여자가 남자에게 의존하는 경우이다. 그 반대 경우는 매우 드물다. 여성이 능력이 있으면 혼자 여행하기 때문이다. 육개장을 먹었다. 인드라는 아리랑 할아버지를 좋은 사람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육개장 탓이 99%다. 민박을 나와 기차를 탄다. 살바도르 달리를 보러 가자. 피게레스역 하차. 역 바로 앞에는 태권도장이 있었는데 내가 갔을 때는 문이 닫힌 상태. 드디어 달리 미술관에 도착. 달리는 과격한 성품으로 마드리드 미술학교에서 퇴학당했다고 한다. 또한 이태리 여행하다가 영감을 받아 고전주의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이 있어 초현실주의 유파에서 추방되고 만다. 그래서일까? 달리 미술관을 들어가면 초입부터 바티칸 성당을 흉내를 내는 듯하다. 그처럼 달리 미술관은 다른 미술관과 다르다. 차라리 테마파크라고 해야 어울리고, 특히 유령의 집과 같다고나 할까. 아! 인간이 살아서 이만큼 작품을 많이 남길 수 있을까. 그는 신을 닮고 싶어했던 것인가. 클래식 룸이 신을 경외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면 모던 룸은 무엇인가. 많은 그림과 조각, 모형물을 보았지만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이 다가오는 것은 단순히 센세이널리즘에 불과한 것일까. 살바도르 달리의 이와 같은 특징을 아이러니, 역설로 보아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다. 마치 김기덕의 작품에서 등장하는 역설처럼 가장 나쁘고, 더러운 곳에서 선하고, 아름다운 모티브를 잡아내는 탁월함이 있는 듯싶다. 무엇보다 눈에 뜨이는 것은 역시 갈라였다. 별 볼 일이 없는 갈라에게 달리는 왜 그토록 매달렸을까. 갈라를 그리는 달리 자신을 드러내는 그림... 김기덕의 나쁜 남자에도 나온 구도다. 아마도 김기덕이 이 이미지를 차용했을 것이다. 거울의 이미지를 이토록 잘 드러낼 수 있을까. 나는 이 대목만 나오면 헤겔을 떠올린다. 내게 변증법이란 거울이기 때문이다. 살바도르 달리. 그는 독재자이다. 탁월한 능력으로 자신의 세상을 창조했다. 자신이 창조한 세상에서 그는 점차 경계를 불분명하게 만들어간다. 끝없는 착시효과 속에서 인간 존재란 무엇인가 질문하는 듯싶다. 그러다 만난 살바도르 달리 그림. 아마도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에 그린 그림인 듯싶다. 유명한 그림이 결코 아니다. 인터넷에서 검색하였는데 찾을 수가 없다. 인간의 얼굴이 화폭 가득 차지하였는데 얼굴 윤곽이 새가 되어 날아가면서 점차 인간 얼굴이 사라지는 그런 그림이다. 나는 이 그림에 이르러서야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내 마음을 열기로 한 것이다. 왜?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이 그림이 마치 오슬로의 뭉크 질투 그림처럼 여겨진 것이다. 독일 표현주의에 등장하는 어두운 세상에서 내던져진 인간 존재. 나약하기만한 존재. 신에게서 독립하고자 했으나 신이 퇴장한 근대에 다시 바티칸의 신을 찾을 만큼 그 어느 때보다 인간 존재에 대한 불신이 지배하는 세상. 그것이야말로 원자폭탄의 세상인 것이다. 그 어두움을 넘어서야 한다. 자연주의에 매몰되지 않고 따뜻하게 포옹하고 넘어서야 하는데... 부채를 사는 것으로 넘어섰다. 엽서를 살까 했지만 부채를 사기로 했다. 그제서야 나는 살바도르 달리를 따뜻하게 안고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살바도르 달리는 돈이 필요했고, 내게는 카드가 있었다. 과감히 긁었다. 유년기에서 멈춘 살바도르 달리에게 경의를! 영원히 철이 들지 않은 달리에게 경배를! 엄마 갈라에게 축복을! 미술관을 나오니 약 한 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다. 분수대에서 쉬려고 하니 여자 꼬마아이가 오도방정을 떤다. 동네 아줌마, 아저씨들이 분수대 주위에 모여 논다. 우리네 사랑방 같다. 그 사이로 여자 꼬마아이 흙장난도 하고, 뛰어다니고. 남자가 동네 아줌마에게 술을 권하는데 아줌마는 극구 사양한다. 이러한 모양새가 한국적이다. 할아버지 한 명이 나서서 기분이 좋다며 건배하는데 좌중이 따라주지 않아 웃음바다가 된다. 국경으로 가는 기차가 도착할 즈음에 역으로 들어가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데 스페인 아가씨 한 명이 다가온다. 수작이 뻔하다. 동양인 담배 인심이 좋으니까 담배 한 가치 얻고자 하는 것이다. 준다. 그녀도 내 옆에 털썩 주저앉아 담배를 핀다. 달리 미술관을 나와 기차를 기다리며 생각한다. 달리는 갈라가 세상에서 가장 현실적 욕망에 충실하였기에 그녀를 위해 그림을 그렸던 것은 아닐까. 상상한다. 아무리 주어도 예의 날카로운 핀잔을 제대로 던질 줄 알았던, 결코 평생 만족할 수 없었던 갈라야말로 달리의 창작 열망을 끝없이 불태우게 했던 불쏘시개였을 것이다. 누구보다 속물인 여성이 어쩌면 가장 매력적이고 여성적인, 성모 마리아와 동격인 여성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처음 해본다. 루 살로메나 갈라 등 소위 여왕벌의 공통분모란 이것이 아닐까. 한국에서도 직접 만나거나 소문으로 들은 왕언니들 특징을 보면 여지없이 누구보다 속물적이었다는 것이다. 무엇이건 경지에 오르면 빛이 나는 법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떠한가. 나타샤는 내 작품에 지나치게 소홀하다. 눈물이 다 날 지경이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나타샤에게 애정이 가는 듯도 싶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이 내 글쓰기가 아니라 생활비라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다. 세르부르에서 불가리아 축구 전문 기자를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4. 29. 2:22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DIMITAR BERBATOV 세르부르에서 불가리아 축구 전문 기자를 만나다 - 인드라, 축구에 눈을 뜨다 ​ 1997년 5월 12일 ​ 스페인에서 프랑스, 프랑스에서 스페인으로 갈 때에는 국경 역에서 일단 하차에서 기차를 바꾸어 타야 한다. 궤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해서, 밤기차로 잠을 자면서 이동하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잠을 설치는 효과가 충분하다. 새벽 4~5시에 환승해야 하기 때문이다. 환승하기 귀찮다면 돈을 좀 더 주고 궤도가변열차를 이용하면 되겠지만,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다. ​ 왜냐하면 돈도 돈이지만 국경역이라고 하면 설레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분단이 된 이후로 한국에서는 국경을 접할 기회가 없는 섬 국가가 되어버렸다. 오랫동안 대륙과 연결되어 대륙 기질이 있었던 한반도인은 이차대전 이후로 대륙과 단절되어 일본 열도처럼 고립된 생활을 해왔고, 그에 따라 의식도 변화한 듯싶다. 19세기 조선인이 21세기 한국인을 본다면 과연 같은 민족인가 깜짝 놀랄 듯싶다. ​ 마주하는 국경선이 휴전선 외에 없기에 다른 국가들처럼 출입에 큰 주의를 요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하여, 내부적으로 다소 폐쇄적인 생활 패턴을 지니게 되었고, 이러한 패턴이 누적됨에 따라 어느 순간 폭발하여 대륙 진출이라는 야망을 품기 시작했다. 마치 19세기에 아시아에서 누구보다 일찍 근대화의 길을 걸었던 일본이 야심을 품었던 것처럼 말이다. 해서, 그 설레임의 근원을 알아 주의를 하면서도 막상 국경이다 여기면 묘한 흥분이 이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다. ​ 세르부르 역에 도착하여 니스 행 기차를 타기 전까지 시간이 남아 잠시 국경 역 마을 구경을 해볼까 싶었지만 너무 이른 새벽에다가 바라본 풍광이 황량하기 그지없어 포기하고 만다. 기차로는 별다른 감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제대로 느끼고자 한다면, 자동차나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는 것을 추천한다. 양국 사이가 한일관계처럼 그다지 좋지 않은 지역이라면 효과가 점증할 것이다. 양차대전의 영향으로 독일과 독일에 인접한 모든 국가들 국경, 마약 합법화로 요주의 대상이 된 네덜란드와 네덜란드에 인접한 모든 국가들 국경이 그 예다. 내가 겪은 바는 체코-독일, 체코-오스트리아에서 유난했는데 장면 장면이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기분이 들 정도였다. ​ 자판기 커피를 한 잔 하면서 아드리아나와의 만남을 추억한 뒤 니스 행 기차를 탔다. 컴파트먼트에는 새로운 인연이 기다리고 있었다. ​ 그는 불가리아 소피아에 있는 축구 전문지 객원 기자였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클럽 축구를 본 뒤 밤기차로 리옹으로 이동 중이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소속한 축구 전문지는 불가리아에서 저명하고 인기 있는 저널이지만, 자신에게는 충분한 취재비와 생활비를 보장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해서, 비용 절감을 위해 밤기차를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 나는 이전까지 축구에 문외한이었고, 심지어 축구를 혐오하는 혐축인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2002년 월드컵을 한국에서 한다는 것조차도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을 정도였으며, 심지어 한국에서 축구한다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사람이었다. 물론 이렇다고 하여 축구를 아예 도외시한 것은 아니다. 차범근이 분데스리가에 진출하여 한때 녹화방송을 할 때에는 곧잘 보고는 하였고, 국가 대항 경기가 있으면 보고는 했다. 하지만 축구와는 무관했다. 그저 한국 사람이 유럽에서 활약하는구나 하는 정도였고, 한일전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정도였을 뿐이다. 예전에는 대다수가 나와 같았다고 본다. 2002년을 경과한 지금 젊은 세대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상황이겠지만. ​ 그런 나를 개안시켜 준 사람이 바로 불가리아 축구 전문 기자였던 것이다. 그에게 축구란 생활 자체였다. 단지 돈만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취재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축구에 미쳐 있는, 제대로 미친 사람이었다. 축구를 좋아하다 보니 축구 기자까지 된 것이다. ​ 그가 축구에 대해서 말할 때의 눈빛을 잊지 못한다. 열정에 불타오르는, 그러면서도 행복한... 그 눈빛만으로도 나는 순간 그에게 빨려 들어갔다. 그는 월드컵이 한국에서 개최되는 것을 매우 부러워했다. 나야 좌파이다 보니 월드컵이나 올림픽이나 진배가 없고, 상계동 올림픽의 예처럼 스포츠 행사가 나와 같은 반체제적 성향에게는 불리하고 체제 유지에 도움이 되었기에 비판적이었던 것이다. ​ 그에게 매우 짧은 영어 실력으로 나는 좌파다, 축구를 좋아하지 않았다, 월드컵이 왜 한국에서 개최되어야 하는지 모르겠다 등등의 발언을 쏟아내었다. 이런 나를 향해 그는 따뜻한 미소와 쉬운 영어로 조목조목 차근차근 말하였다. 그의 설득 방법은 단순했다. 오직 축구였다. 축구를 위한, 축구에 의한, 축구인의 설득이었다. ​ 나로서는 그제서야 뭔가 내 논리에 허점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간 알던 축구에는 축구가 정작 없었다. 사실은 그 모두가 국가이거나 민족 등등이었을 뿐이다. 순간 나는 매우 큰 혼란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다양성을 중시해왔다고 자부했는데, 다원주의자라고 내심 여겨왔는데 나 자신이 이제까지 축구로 세상을 볼 수도 있고, 또한 그렇게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지도 못했고, 이제는 만나 알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정하길 주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 그를 만나고 나서야 나는 축구가 국가 혹은 민족보다 더 광의의, 상위의 개념이 될 가능성을 엿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여, 잘츠부르크에서 만난 웨일즈 서포터들을 떠올렸다. 그들처럼... 그들처럼. 무언가 내게 어떤 소명이 계시한 듯 순간 움찔하였다. ​ 유럽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뒤 나는 하이텔 축구 동호회에 가입했다. 놀랍게도 축구 동호회 사람들이 열렬히 환영해주었다. 당시는 축구 동호인들이 축구 발전을 위한 획기적 대안을 모색 중이었고, 축구 동호인들이 주축이 된 붉은악마가 출범하는 태동기였다. 이들은 당시 김대중 정권 교체로 인해 이 과정에서 확인한 언론과 통신 여론의 중요성을 매우 절감하고 있었기에 당시 논객이다 뭐다 해서 하이텔 칼럼 자리 하나 차지하고 있던 나와 같은 사람들을 눈여겨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사람 한 명이 도와준다면 파급 효과가 만만치 않아 축구 발전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해서, 오지 않아도 정중하게 부를 생각이었는데 제 발로 찾아왔다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오랫동안 오로지 축구에 매달린 사람들과 거의 동등하게 대우를 받았던 점은 지금 생각해도 참 과분한 것 같다. ​ 나는 결심하면 행한다. 결심하는 데에는 매우 오래 걸리지만 말이다. 해서, 생각해 본다. 만일 내가 유럽여행에서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과연 나는 2002년 월드컵을 어떻게 맞이하고 있었으며, 지금 프리미어리그에서 활약하는 4인방에 대해서는 뭐라 평가할 것이며, 프로축구에 관해서는 어떻게 대했을 것인가. ​ 그가 내게 엽서도 보내었는데 당시 내가 어떤 일로 매우 경황이 없을 때여서 미처 챙기지 못해서 지금도 미안하게 여기고 있다. 2002년 월드컵에 오고 싶어 했었는데... 그에게 불가리아 출신 토트넘의 베르바토프 팬이 되었다는 안부를 전하고 싶기도 하고... ​ 여행이란 때로는 인생의 항로를 바꾸기도 한다. 책 한 권이 인생을 좌우하는 것처럼 말이다. 모나코에서 누드촌까지 쏘다니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 3:55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6984641 통계보기 니스-모나코 사이에 있는 beauliev라는 작은 마을에서 모나코에서 누드촌까지 쏘다니다 1997년 5월 12일 아침 약 7시경에 니스에 도착하였다. 기차역을 나오는데 한국인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안타레스 호텔에 갔다. 4인이 공동 사용하는 돔룸인데 가격 대비 만족스럽지만 대신에 샤워할 때는 따로 돈을 지불해야 한다. 비가 내린다. 쉬지 않고 내린다. 어디를 갈까. 모나코를 가자. 니스에서 모나코는 매우 가깝다. 간이역마다 매번 서는 기차를 타고 한 삼사십 분 가니까 모나코다. 모나코는 해안을 따라 길이가 3키로, 너비 500미터, 면적 약 2㎢ 소국으로 세계 제 2의 소국이다. 인구가 약 오천 명 정도가 된다는데 거주하는 사람은 약 삼만 명 정도라고 한다. 모나코에서 가요제로 유명한 이태리 산레모에 이르는 이 지역 특징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지중해에 면한 해안가 암벽 곳곳에 마을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서울 강북강변도로를 가다 보면 한남대교 근방인 한남, 옥수, 금호, 응봉 지역을 볼 수 있는데 그와 비슷한 느낌이다. 소국인 만큼 여기저기 돌아다니면 걸어서 두어 시간이면 다 볼 수 있다. 소국에 오면 내가 걸리버가 된 듯싶다. 모나코를 거닐면서 문득 공상적 사회주의자인 푸리에를 떠올렸다. 그를 비판하려면 공상이란 데에 방점을 찍어 손쉽게 비판이 가능하지만, 그것이야 맑스 등이 후일 등장하였기에 가능한 것일 뿐이다. 아인슈타인이 등장하였다고 뉴튼이 폐기되는 것이 아니듯. 그가 주장한 것 중에는 노장사상의 소국가론와 상통하는 주장이 있다. 이들은 소국가론을 통해 대제국 지향을 비판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그들에게 영감을 제공한 것은 당시 유럽의 수많은 도시국가들이며, 춘추전국시대의 소국들일 것이라 여긴다. 모나코하면 몬테카를로 카지노다. 재정악화로 시작한 카지노 사업은 이후 수많은 국가에서 모델이 된 듯싶다. 미국에서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 인디언들이 카지노를 한다고 한다. 한국에서도 강원도 태백 폐광지역을 카지노로 개발했다. 무엇이라도 선택해서 집중하자는 전략이란 소국가론에서 나온 맥락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기차역에서 나와 일단 모나코 성에 올라 모나코 전경을 감상한다. 다음으로 몬테카를로. 생각보다 초라하다. 미친 척하고 들어가 볼까. 하지만 정장 차림이어야 하고, 입장료를 내야 한다. 게다가 최소 액수 환전 규모도 장난이 아니어서 포기했다. 외관만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당시 모나코는 카 레이스 임시 관중석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고, 주요 도로가 카 레이스 경로로 제한되어 있었다. 듣자하니 토요일마다 자동차 경주가 있다고 한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이 없던가. 내게 모나코는 생각보다 별로였다. 기차를 타고 곧장 니스로 갈까 하다가 도중에 beauliev에 들린다. 간이역마다 기차가 서는데 지나가다 보니 한적하고 운치가 있는 듯해 무작정 내려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모나코에서 획득하지 못한 지중해 정취를 느끼기 위함일까. 모나코보다 더 작은 마을을 거닐면서 스스로에게 물었다. 아마도 아직 상업화가 덜 진행한 마을이기에 끌린 듯싶다고 결론을 내린다. 해안에 멋들어진 집과 자가용처럼 작은 배가 집마다 있다. ez역에서 내렸다. 누드촌으로 소개된 곳이다. 여름철이 아니어서 아무도 없이 황량했다. 누드해안이라는 안내 푯말만 덩그러니 나를 맞이했다. 왜 이런 곳에 누드해안을 만들었을까 생각하니 아무래도 상업적 목적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별 볼 일이 없는 해안을 누드해안으로 만들면 관광객들이 꼬이지 않겠는가 싶다. 모나코 카지노의 응용 버전이 아닐 수 없다. 당장은 아니겠지만, 언젠가는 관광 수입을 위해 한국 일부 지역에 누드촌이나 누드해안을 만들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다. 이제 칸느로 다시 가자. (지난 니스 글에서 앤디 맥도웰을 만났다고 했는데 일지를 보니 그날이 아니라 5월 12일 니스에 다시 온 날에 앤디 맥도웰을 본 것이다. 착오가 있었다.) 칸느에 도착하자 영화제 분위기가 물씬 흐른다. 누군지 알 수 없는 스타들이 여기저기에서 보인다. 사람들이 스타가 등장하면 환호를 하는데 특히 십대 소녀의 열광은 어디 가나 볼 수 있는 보편적 현상이다. 길가에 스타 사진이 전시가 되었는데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팜플렛을 보니 임순례의 세 친구를 한다고 했는데 이런, 이미 시간이 한 시간 지나가버렸다. 영화야 이미 보았고, 굳이 보고자 했던 것은 관객들의 반응이었는데... 아쉬운 일이다. 유니버설사가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 홍보를 위해 당시 절정의 인기이던 맥 라이언과 엇비슷한 배우를 데려와 놓고 인터뷰도 하는 등 선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날이 저물어간다. 그때 앤디 맥도웰이 생방송 중이었다. 니스로 돌아오는데 차장이 검표를 한다. 그때 여기저기를 보니 다들 부정 승차한 사람들 투성이... 차장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주의만 주고 내린다. 돌아와 한국인 친구와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녀석도 건축 전공. 그가 건네준 프랑스 건축가 작품 사진도 보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건축만을 위주로 한 테마 여행 중이였는데 이제까지 유럽여행 중에 만난 한국인 중에 꽤 괜찮은 편에 속했다. 잠자리에 들면서 하루를 정리한다. 칸, 니스, 모나코, 누드촌 등... 하나씩 특화하여 살 길을 찾고 있는 셈이었다. 루체른에서 불법체류자와 택시기사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2. 2:52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017180 통계보기 루체른에서 불법 체류자와 택시 기사를 만나다 1997년 5월 13일 오전 8시에 니스에서 유로버스로 출발하여 스위스 루체른으로 향했다. 이태리를 경유하여 스위스로 들어가는데 가는 도중에 바라본 풍광이 절경이었다. 중북부 유럽 자연 경관은 사실 그다지 별 볼 일이 없는 반면 지중해에 면한 지역과 알프스 접경 지역은 유럽인들이 자랑해도 되는 관광 지역이다. 하지만 내가 애국심이 한국인 중 99%보다 없는 사람임에도 한국의 풍광이 더 낫다고 냉정하게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꾸미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이제 고작 시작이다. 지방자치제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적어도 수십 년 흘러야 한다. 현재로서는 그 시작도 재정 때문에 대도시에 집중되어 있는 양상이지만 나는 비관적으로 보지 않는다. 당장 말할 수 있는 것이 지역 곳곳에 있는 박물관들이다. 내가 유럽여행을 가기 전까지 박물관들을 보기는 매우 어려웠다. 또한 한강 야경은 어떠한가. 프랑스 파리 센강 야경만 좋던가. 프라하 야경만 좋던가. 런던의 야경은 또 어떠한가. 불과 십여 년 전만 해도 볼 품 없던 것이 한강의 야경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희망을 품는다. 얼마 전 남이섬에 갔는데 잘 해놓았다. 그렇게 해야 한다. 시작도 하지 않고 불가능만 따져서는 아니 된다. 나는 매우 신중하고 까다로운 성격이지만, 해야 할 것은 반드시 해내고야 말아야 한다고 여기고 있다. 놀라지 마라. 제주, 강원도 좋은 자원이다. 또한 경상도와 충청, 그리고 전북은 잘 모르겠지만, 부산, 광주, 전남도 좋은 자원이다. 혁명보다 개혁이 더 힘들다고 한다. 아니다. 혁명이 힘들다. 만일 내게 관광 프로젝트를 맡긴다면, 혁명적 추진이 가능하다면 수많은 아이템을 내놓을 것이다. 그러나 고작 개혁에 그친다면 안 하는 것만 못하다. 아는가? 청계천. 그 프로젝트를 사회당이 내놓았다는 것을 말이다. 추진력이 없다? 사이비 좌파인 노무현만 해도 추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 까는 소리 하지 말자. 정통 좌파의 추진력은 상상을 불허한다. 루체른에 도착하였다. 아, 루체른. 스위스... 정말 산뜻하고 청량하다. 공기는 강원도의 공기처럼 완벽하고, 풍광은 강원도 알프스 리조트 원조 격을 말해 주듯 테마파크 수채화다. 루체른을 걷는다. 황홀하다. 걸어보라. 지리산 깊은 산 속 산골을 걷는 느낌이다. 아, 한국도 자연 친화적인 개발을 한다면 얼마든지 스위스적인 느낌을 줄 수 있으련만. 왜 한국의 개발업자들은 하나같이 멍청이들인지... 일을 하면 누구보다 똑 소리 나면서도 속도감이 있는 자들이건만. 머리는 텅 빈 것인지... 어느 방면이든 복제 기술은 일본을 넘어서고 여전히 중국보다 앞서는 초일류이지만 기획 설계는 빵점인 특이한 민족성... 각론에 강하고 총론에는 무식한... 한국인 택시 기사를 만났다. 그는 애타게 도움을 구하고 있었다. 외면하고 싶었다. 동정은 좌파의 가치가 아니다. 진정 그를 도울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그러나 머리보다 가슴이 먼저였다. 반성하지 않을 수 없지만, 아직 나는 온전한 좌파가 아니다. 그의 사정을 들어봤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그는 잘 사는 택시 운전사의 꼬임에 따라 엉겁결에 스위스에 온 셈이다. 동료 택시 운전사는 다른 운전사와 달리 잘 살지만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서 개인택시 기사가 되려는 사람이다. 개인택시를 하려면 일정 기간 경력을 쌓아야 하기에 회사 택시를 몰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해도 조건이 워낙 여유가 있어서 스위스 여행을 계획하였는데 졸졸 따라다니던 이 사람이 혹했다. 하지만 막상 스위스에서 와서 오직 부자 택시 운전사만 쳐다보려는데 부자 택시 기사가 자신을 귀찮아 한다는 것이다. 사소한 문제가 비행기를 탈 때부터 일어나더니 결국은 감정 싸움으로 이어져 결별을 고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그야말로 스위스에 홀로 내던져진 것이다. 택시 기사를 하기 전에 그는 연예인 운전기사였다고 한다. 한국에서 최고의 명문대 출신 가수 운전사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가 그만 둔 이유는 연예인이 자신을 박하게 대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자유를 늘 강조하던 그 연예인은 돈을 지나치게 밝혀서 각종 행사 프로그램에서 악착같이 돈을 챙기면서도 푼돈에는 쩔쩔 맨다는 것이다. 결국 그는 해고당해서 택시 기사를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번에는 동료 부자 택시기사한테 버림을 당했다고 몹시 슬퍼하였다. 나는 그를 위로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같은 한국인이랍시고 내가 잘 대해줄 이유는 없다. 그럼에도 그와 루체른 동행을 한 까닭은 무엇일까. 루체른이 아름답기 때문일까. 이것도 인연인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만일 운명의 여신이 있다면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것일까. 그는 하루바삐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나는 그에게 이왕 온 것이니 본래 일정대로 하고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않느냐 했다. 그는 내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에게 루체른에서 그래도 상대적으로 저렴한 숙소를 추천하자 그는 기뻐하며 연신 고마워했다. 이후 우리는 동행하여 루체른 관광에 나섰다. 석탄 박물관에서는 내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면서 아부하기까지 했다. 그에게 나는 제한적이나마 신이었던 셈이다. 숙소로 돌아와 식사를 하는데 우연히 숙소 주방장과 조우한다. 어? 동양인? 해서 물어보니 한국인이었다. 그의 사연은 또 어떠한가. 삼십대 후반이었던 그는 한국에서 완벽하게 망한 경우다. 이것 저것 손을 대다 다 망하고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기 직전에 여기저기서 간신히 빌린 돈으로 무작정 유럽으로 떠난 것이다. 관광 비자이니 곧 불법 체류자가 된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재주가 좋던가. 숙소 주방에서 일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도 주방 일처럼 허드렛 일을 하는 이가 매우 적다. 간호사도 그렇고. 외국인을 고용할 수밖에 없는데... 그 틈새를 놓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그의 꿈은 크다. 서빙하고 있는 스위스 아가씨를 연일 유혹하고 있다. 뚱뚱하여 누구도 관심이 없을 타입이지만, 바로 그러하기에 불법 체류자인 그는 그녀에게 끊임없이 결혼하자고 조르고 있다고 한다. 그녀와 결혼한다면 영주권이 나오니까. 배창호의 깊고 푸른 밤이 생각나는... 그의 매력을 한껏 발산시켜서. 과연 스위스 처녀는 넘어올 것인가. 그는 유능한 사람이다. 위조 신분증으로 이태리 여행까지 다녀왔다고 한다. 그는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그래요. 전 스위스가 좋아요. 스위스 시민이 될 겁니다. 저를 지금 욕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저는 반드시 목표한 것을 이루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 꿈은 이루어진다. 루체른의 밤은 깊어간다. 알프스에도 역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코펜하겐에서 에로티카를, 함부르크에서 리퍼반을 가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3. 4:05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049973 통계보기 코펜하겐에서 에로티카를, 함부르크에서 리퍼반을 가다 1997년 4월 21일 덴마크 코펜하겐에는 오전 8시 30분에 도착하였다. 계획대로라면 다음 열차를 타는 정해진 시간 내에 에로티카 뮤지엄을 구경해야 한다. 당시에는 인터넷이 아닌 피씨통신이어서 하이텔 여행 동호회, 여행 게시판을 밤새 들쑤신 끝에 얻어낸 정보다. 다만 에로티카 뮤지엄이 코펜하겐에 있다고만 알 뿐, 구체적으로 어디에 위치하는지를 모르는 것이다. 과연 희망사항은 이루어질 것인가. 중앙역을 나와 만나는 사람들마다 무작정 물어본다. 하지만 다들 모르는 눈치. 순간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뭐가 문제인지... 내 콩글리쉬 발음이 문제인가? 아니면 에로티카 뮤지엄을 모르는 것일까? 괜한 헛고생을 하는 것이 아닐까. 에로티카를 있다면 모를 리가 없었을 터인데... 정보 제공자의 미스인가? 초조감이 밀려왔다. 십여 분간 무작정 보행자 거리를 걸었다. 비가 막 온 뒤의 날씨라 으스스한 느낌이 날 정도였지만 개의치 않고 걷는다. 과연 어디에 있느냐. 에로티카여! 그때 내 앞에 나타난 로센보르그 궁전. 여기서 만난 단마크 - 하하. 그쪽에서는 단마크라고 발음하더라~! - 아가씨가 구세주였다. 고마워~ 아가씨. 로센보르그 궁전을 바라보고 오른쪽으로 가다가 맥도널드 햄버거 가게가 나타나면 왼쪽으로 꺽어서 약 50미터만 전진하면 뮤지엄 에로티카다. 서양 애들의 좋은 점 하나는 가르쳐 줄 때 정확성을 기한다는 게다. 때로는 자신만의 셈으로 이야기해서 오히려 길을 헤매게 만들지만, 제대로 임자 만나면 유명 학원 강사의 대학 입시 수학공식 해설 법처럼 명쾌하다. 어디냐구요? 쭉 가면 나와요. 이렇게 말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시 입장료는 49 덴마크 화폐. 인터넷에서 보니 2003년엔가는 99 덴마크 화폐라고 한다. 그렇다면 지금쯤은 129 덴마크 화폐쯤 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뮤지엄 에로티카를 찾은 기쁨을 무엇으로 설명하랴. 내가 참 기뻐하는 일 두 가지를 들라면 하나는 계획대로 되는 경우이며, 다른 하나는 계획대로 되지 않았지만 뜻밖의 상황 전개로 애초 계획보다 더 재미난 진행이 되었을 경우다. 이 즐거움을 간직하기 위해 곧바로 박물관에 입장하지 않았다. 오래도록 느낌을 유지하고 싶어서. 인접해 있는 ALDI 슈퍼 옆 가게에서 커피를 마시다. 뮤지엄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였기에. 게다가 지하에는 무료 화장실도 있다. 얼마나 다행인가. 무료라니... 노천에 나와 있는 테이블에 앉아 두어 번 리필을 하고 나오는 빵으로 아침을 해결하며 코펜하겐의 정취를 느껴보고자 한껏 여유를 부린 뒤에 에로티카로! 기다려라. 내가 왔다. 표를 파는 사람이 아가씨였다. 20대 초반으로 추정되는 이 아가씨는 검은 머리 때문인지 학구적인 이미지를 주어 나는 내심 당황스러웠다. 이른 아침부터 아시안 관광객이 찾아왔으니... 개시 손님이었단 말인가. 극한 환대에 내가 다 몸 둘 바를 모를 지경이었다. 어떻게 해서든 더 많은 돈을 뿌렸으면 좋겠다는 의지가 뚜렷해 보인다. 이런 친절은 일본, 싱가포르 등 아시안 스타일인데 유럽에서 고객은 왕이라는 대접을 받다니... 오죽하면 내가 팁이라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고민할 정도였다. 그녀를 뒤로 하고 에로티카 심장부로 들어갔다. 과연 실망스러웠던 네덜란드 섹스 박물관 수준일까. 아니라면... 전시물은 기본적으로 네덜란드 섹스박물관과 비교하여 대동소이했다. 성기를 드러낸 원시적 조각물들, 중국과 일본, 인도 등의 동양 고전적 포르노물과 중세와 근대 서양 포르노물, 마릴린 몬로 등 영화 배우들의 근대물. 다만 덴마아크 에로티카의 독특함은 12개 티브이로 이루어진 멀티비젼에 각기 다른 포르노를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이다. 백남준한테 힌트를 얻었나? 이곳에 머물러 유심히 지켜보고 있는데 다른 입장객들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여자도 있고, 남자도 있고... 노장년 층도 있고... 젊은 층도 있는데... 내가 뚫어져라 화면을 쳐다보고 있으니까 다들 무관심한 척 지나가다가 다시 오곤 했다. 하하하. 특히 어떤 서양 장년 부부.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왔다 갔다 하더니 결국 체념했는지 나랑 같이 보기 시작했다. 내용은? 워낙 숱한 포르노물을 접한 나로서는 그저 그랬다. 다만 암스텔담 섹스박물관보다는 낫다고 말할 수 있다. 뮤지엄을 나오는데 아가씨가 다시 친절한 미소로 인사한다. 좋은 짝 만나 잘 사시오~~! 계획대로 정해진 시간을 가까스로 맞출 수 있었다. 시간만 있다면 좀 더 돌아다니고 싶었지만 약간은 아쉬웠다. 자고 가기에는 북유럽 물가가 장난이 아니다. 다시 기차를 탄다. 함부르크에 오후 5시 25분에 도착한다. 다음 기차를 확인하니 오후 7시에 출발한다. 약 한 시간 삼십 분 정도의 시간이 있다. 이 시간 내에 리퍼반 거리를 가서 함부르크의 섹스박물관을 찾아가 구경해야 한다. 과연 이번에도 성공할 것인가. 지하철을 타고 리퍼반 거리로! 세계에서 가장 저주받은 거리라는 영광스런 호칭을 부여받은 거리여! 내게로 오라! 그러나 홍보였을 뿐, 참담한 수준이다. 그저 관광객들의 남은 푼돈이라도 다 빨아들일 듯한 거리였을 뿐이다. 거리에는 섹스숍, 라이브쇼, 피프샵, 비디오방 등 각종 섹스 관련 산업이 총집합해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는데 의외로 아이들이나 여자들도 몇 지나갔지만 대부분은 간혹 지나가는 사람들이란 나와 같은 관광객이거나 아니면 섹스 산업 종사자였다. 어떻게 아느냐고? 체코와 같은 동유럽에서는 아니지만, 서유럽에서는 매춘 산업 종사자 패션이 따로 있다. 금방 눈치 챌 정도다. 머리를 싹 민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다. 심지어 머리에도 구멍을 내어서 링을 끼운 이도 있다. 그렇다. 그들은 유태인 지구 게토처럼, 인디언 보호구역처럼 일정한 영역 내에서만 허용하는 것이다. 또한 매춘 산업 종사자는 일반 시민과 확연하게 구분하고 산다. 하여, 나는 심각하게 고민하였다. 왜? 나는 유럽 여행 3대 테마 중 하나로 유럽 섹스 산업 실태를 둘러보면서 에로티즘에 관해 정립할 생각이었기 때문이다. 여행 중에 만나는 한국인에게도 말했는데 그때마다 그들은 농담으로 알거나 혹은 황당하다는 입장이었다. 지금도 아마 그럴 것이다. 포르노 인간의 영역 게토, 리퍼반 스트리트. 과연 여기에서 무엇이 나올 수 있을까.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한 푼이라도 더 빨아들이겠다는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들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이를 넘어서는 미래는 무엇인가. 함부르크의 장식물에 지나지 않는 리퍼반 거리에서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누구인가. 저들은 일반 시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분리시켰는가. 아니면 분리를 강제 당하였는가. 다들 표정이 우울하다. 갑자기 SF공포영화의 주인공이 된 듯한 오싹함이 밀려왔다. 섹스 뮤지엄을 그만 찾자. 리퍼반이라는 거리 자체가 내게 환멸로 다가왔다. 어떤 빈틈도 없이 인간성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듯한 거리에 대한 기대로 왔다가 완벽하게 실망하고 돌아간다. 시간도 다 되었다. 그제서야 건물에서 사람으로 관점이 이동했다. 몇몇 여성들이 경직된 자세로 서둘러 걸어가고 있다. 걸어가다가 그들도 흥미를 느꼈는지 가끔씩 고개를 옆으로 돌려 자세히 보기도 한다. 약간 주위 눈치를 살피면서... 역으로 돌아왔다. 이제 베를린으로 가자. 몽마르뜨에서 거리 화가와 말쌈을 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4. 3:26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083882 통계보기 몽마르뜨에서 거리 화가와 말쌈을 하다 1997년 5월 15일 파리 오전 8시 도착. 일전에 묵었던 숙소 대신 민박을 택하자. 전화카드를 사서 여기저기 수소문을 하다. 남대문 민박에 연락하니 방이 있다고 한다. 남대문 민박에서 하루 묵는다. 지하철로 가는데 마침 러시아워라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때 등장한 프랑스 거지. 프랑스 거지의 특징을 보자면 - 자꾸 거지만 이야기한다고 여길 수도 있겠다. 조지 오웰의 궁상스런 룸펜 여행기에 영향을 받아 그런 것이니 널리 양해를 바란다 - 시적이다. 거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읇조림은 프랑스어가 왜 매력이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시를 노래하고 있었던가. 어떤 시민이 수표까지 넣어준다. 와~! 그렇다면 이 거지는 거지가 아니라 뭐냐. 겉차림이 멀쩡한 이 자의 정체는... 거리에서 연주를 해서 돈벌이를 하듯 지하철에서 자신의 시를 노래하고 돈벌이를 한다? 음...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닌가. 아르헨티나 영화였던가... 가물가물... 자극을 받아 나도 시를 써봤다. - 돈을 내 놔 쉬발 놈들아 놈들이 돈을 줘도 내가 손해야 하얀집에 도착하여 짐을 풀었다. 좋은 점은 많은데 오후 열시 이전에 들어와야 한다는 단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허나 어쩌랴. 아침으로 한식을 먹을 수 있다는데... 매번 딱딱하게 변한 바게뜨 빵과 우유만으로 세끼를 해결하기에는... 바스티유로 가자. 혁명을 느끼자. 갔다. 바스티유에 이르러 한동안 바스티유 주변을 맴돌았다. 도대체 그 바스티유는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흔적조차 없는... 관광객들에게 볼거리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 파리 시장에게 따지고 싶었는데... 운명의 여신은 나를 저버리지 않았다. 그때 나는 발견하고야 말았다. 바스티유 방탄 유리창이 금이 간 것이다. 틀림없이 누군가 묵직한 돌을 던져 작살을 내고만 것이다. 혁명은 살아 있다...... 혁명은 살아 있는데 혁명 주위로 거지들이 득실거린다. 어디서든지 만나는 거지들. 라데팡스로 갔다. 또 다른 파리를 만난다. 신도시를 건설할 셈인가. 그래도 개선문은 보이게 만든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야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젊은이들이 보드도 타고 롤러스케이트도 탄다. 어떤 이는 장애물을 만들어 그 사이로 빠져나가는 묘기를 부리기도 한다. 왜 내게는 라데팡스라는 신도시가 별 볼 일이 없는 것일까. 모던함에 지친 탓일까. 모던 이후를 보고 싶어함인가. 하긴 나에게 클래식도, 모던도 식상하긴 하다. 다시 지하철을 탔는데 이번에는 한참 헤매다 찾아간 몽마르트 언덕. 처음에는 몽마르트 언덕인지도 모를 정도였는데 가다 보니까 거리 화가들이 많아서 혹시 하는 생각을 했다가 역시하게 된 것이다. 이런 저런 거리 그림을 구경하고 언덕에 걸쳐 있는 성당을 지나서 내려오려는데 한 거리 화가가 내게 접근하는 것이다. 그림을 사라고 삐끼질을 하지 않은가? 내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면서 난처하다는 표식으로 양손으로 어쩌랴 했다. 다소 허술하게 보였던가. 거리 화가는 봉을 놓칠세라 공격적으로 나온다. 자뽀니스? 일본 좋아해, 좋아해... 난 부드럽게 말했다. 농~ 꼬레아~. 그러면서 안녕하고 가려는데 거리 화가가 내게 저주의 말을 퍼붓는 것이다. 저매인! 하고 경멸조로 내뱉는 것이 아닌가. 그냥 가려다가 이왕 들었는데 내가 가만히 있을 성격이 아니지 않은가. 평소에는 무심한 듯 상냥하지만 성질 긁으면 곧바로 두 얼굴의 사나이로 변모한다는 것을. 내가 지지 않고 거리 화가에게 말했다. 오호! 한국은 독일이지. 잘 들어, 임마. 역사적 과제가 여전히 있는데 내가 아무리 모던 이후의 삶을 살고자 하는 이지만 여건이 힘들잖아. 자식아. 니가 뭘 알아. 코리아를 알아? 개자식아. 니가 몽마르뜨에서 멍청한 관광객 푼돈이나 삐끼질을 하며 살아간다고 해서 파시즘과 혁명 사이에서 늘 줄타기할 수밖에 없는 꼬레아에서 태어난 나의 절박한 사연을 알기나 해? 씨발. 너를 탓하기는 싫어. 다만 구역질이 나지. 구한말 일본 사무라이가 하듯 하나라도 뭔가 교훈이 될만한 것을 배우겠다는 일념 하에 너희들이 버린 쓰레기까지 음미하고 있다. 그래. 너희 먹고 살만하지. 좋겠어. 잘 났어. 그래, 나는 그래서 여행도 악착같이 다니는 거야. 헝그리 정신이지. 너네들에게는 없는... 기대했지. 꼼뮨의 후예들은 무엇을 할까 하고. 과연 너희들이 나보다 고민하며 살까. 젠장할. 몽마르뜨에는 꼼뮨이 없어. 없다고. 이제 사회 복지가 좀 되었다고 근본적인 고민을 하지 않은 나라에서 태어나 지랄해대는 니놈에게 해줄 말은 딱 하나다. 엿 먹어라. 영어와 알 수 없는 한국어를 적절하게(?) 섞어서 거리 화가에게 일갈을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이다. 그놈 입장에서 보자면 미친 놈 하나 만난 것이겠다. 지나고 보니 그 화가에게 굳이 화를 낼 까닭은 없었다. 왜 그때 그리도 화가 났을까. 아마도 파리를 지나치게 혁명의 도시로 미화했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 아니었을까.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와 무작정 걷다 보니 묘지가 나타난다. 여기에 꼼뮨의 무덤이 있지 않을까. 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없다. 홍세화가 괜히 미워졌다. 쉬발, 나도 여기서 그냥 망명해서 택시 운전사나 할까. 묘지에서 에밀 졸라도 보고, 짐 모리슨도 보았지만... 묘지에서조차 계급투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비애가 느껴진다. 아마 나 역시 그처럼 의미 없는 것처럼 죽어가겠지. 그들처럼. 하지만 기억해다오. 그래서 내가 기억을 하고 있다고. 우울한 마음으로 묘지를 나온다. 과연 내게 던져진 소명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도대체 세상은 내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인가. 정체를 알 수 없다. 나를 알 수 없다. 좌파, 운동권, 지식인... 이 모든 개념이 허망하게 다가올 따름이다. 맑스 기념관을 나오면서 해방되었다고 여겼는데... 맑스에게서는 해방할 수 있었는데 왜 파리 콤뮨에서는 여전히 답답한 것인가. 아직도 남은 부채 의식이 있더란 말인가. 크게 웃자. 크게 웃어. 크게 웃어. 묘역에서 피갈거리로 가는 도중에 나는 크게 웃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 주변에서 걷던 프랑스인들이 이상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런 저런 상념에 젖어 걷다 보니 어느덧 피갈 거리. 피갈 거리에 접어들자 예의 삐끼가 등장한다. 이 삐끼, 저 삐끼에 초연한 듯 걸어갈 때 만난 삐끼. 국적을 이것 저것 묻다가 꼬레아...라고 하니 곧바로 나오는 말. 학상. 학상 할인 오케이? 이야... 그간 얼마나 많은 한국놈들이 이곳을 찾았길래 저런 말이 곧바로 튀어나오는가. 처음에 백 프랑을 부르는 것을 몇 번 그냥 간다고 하면서 마구 깎아서 흥정 끝에 삼십 프랑에 낙찰을 보았다. 가게에 들어가니 나 외에 한 테이블만 손님이 있었고, 그 손님조차 사라진다. 아마도 손님이 아니라 가게 뒤를 봐주는 영업 상무이거나 양아치겠지. 떡대가 장난이 아닌 걸. 아직 밤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테이블에 앉았더니 좀 이상하게 생긴 아가씨가 테이블에 앉겠다고 우긴다. 해서, 앉아라, 했더니 그 다음부터 쥬스를 먹어도 되냐, 술을 시킬까 별 소리를 다 한다. 내가 속으로 웃으면서 돈 없는 배낭 여행자에게 뭘 기대하니? 하며 아무 말 없이 쥬스만 들이키는데... 스트립쇼가 시작되었다. 갑자기 간이무대 위로 한 여자가 등장해서 어설프게 옷을 하나씩 벗는 것이 아닌가. 어? 하지만 말라가에서 보았던 예술과 비교조차 될 수 없었다. 썩은 미소로 엉성한 몸매로 어색하게 하는 스트립쇼에 넘어갈 수 있을까. 정육점의 고깃덩어리가 따로 없다. 역겨울 따름이다. 쇼가 끝나자 그녀는 서둘러 사라졌다. 일어나야 할 때다. 일어서자. 그때 아까 보았던 떡대가 등장한다. 내게 지불을 하라는 것이다. 이미 다 지불하였다고 하니까 그것은 입장료일 뿐이라는 것이다. 쇼를 본 값을 치루어야 하고, 아가씨랑 쥬스를 마시고 이야기를 했으니 그에 상응한 돈을 내놓으라는 것이다. 영수증에는 천 프랑 넘는 액수가 적혀 있었는데 당시 환율로 1프랑이 163원이니 16만 원 정도 되는 것이다. 과연 이렇군. 여행책자에서 본 대로야. 바가지를 하겠다는 속셈이로군. 그간 관광객들이 많이 당했겠다. 호랑이에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근대적 이성을 회복하여 나는 차분하게 그에게 말했다. 알았어. 무슨 말인지 알겠어. 내가 부탁 하나 해도 될까. 파리 경찰서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니? 나한테 연결해줄래? 떡대는 당황하여 한순간 아무 말하지 않더니 나를 가게에서 내쫓았다. 피칼거리를 지나 또 무작정 걷다 보니 시장이 나타났다. 시장 골목을 여기저기 다니다가 복숭아 6개를 10프랑을 주고 샀다. 하나씩 먹으며 다시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여의도 격인 시떼섬에 간다. 시떼섬에서 내려 정의의 문과 노틀담 성당을 본다. 노틀담 성당으로 들어간다. 그래, 여기가 노틀담 성당이로구나. 노틀담의 꼽추 영화가 생각이 나는... 내가 앤소니 홉킨스라는 배우를 처음 알게 해주었던... 스테인그라스가 정말 멋지다. 관광객들이 시종 끊임없이 들어오는데 성당 안에서는 신부가 미사를 진행하고 있었다. 한 쪽에서는 속세의 무리들이 잡담하면서 구경하고 있는데 한 쪽에는 신자들이 경건하게 기도를 드리고 있다? 그때 한 여성이 종교적으로 중요해 보이는 표식 앞에서 숙연한 자세로 기도를 할 때 남자 친구가 이 모습을 비디오로 담고 있었다. 나는 이 모습을 보면서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웃음을 그칠 수가 없었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대나 맑스 기념관 동상에서 사진을 찍은 나나 무엇이 다르랴. 아, 우습다. 인생이 우습다. 산다는 건 거울 앞에 서면 막상 우습구나. 그 아무리 진지한 삶일지라도 이다지도 우습다니... 우습다니... 너무 웃어 눈물이 다 흐른다. 노틀담을 나와서 프랑스 공산당사가 어디에 있나 여기 저기 물어보고 찾았지만 찾지 못했다. 스탈린의 충직한 개라는 소리를 듣고는 했던 프랑스 공산당 놈들을 막상 찾으려니 없구나. 노틀담 인근의 마리 공원에서 주저앉아 쉰다. 여기서 노틀담을 보아야 가장 운치가 있는 듯싶다. 론리플래닛에 적혀 있는 그대로다. 뤽상부르 공원에 가다. 불가리아 태생의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자전적 소설 사무라이에도 언급이 되었던 공원. 젊은이들이 많다. 여기서 나는 사과 하나, 복숭아 하나, 담배 하나를 소화하며 단지 뤽상부르라는 이름에 한때 도취되었던 기지촌 지식인이라는 자화상을 회상해 본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야. 무슨 까닭인지 울음이 솟구친다. 이런 마음을 달래주려는 것일까? 성미첼 성당 앞에서는 재즈 팀이 거리 공연을 했다. 상념에 젖어 터덜터덜 걷는데 한국인 신혼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8박 9일 일정으로 파리 여행을 왔다고. 이제 파리 구경할 만큼 해서 이틀 남았는데 스위스 간다고 했다. 다만 패스를 미리 끊지 않아서 상당 비용을 부담해야 할 것이라 하니 허니문 앞에서야 비용이 문제될 것은 없다. 68 때 이름을 날리던 소르본느 교정으로 마지막으로 향했으나 문이 닫힌 상태. 이제 하얀집으로 가자. 소르본느에서 데리다를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5. 5. 3:15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소르본느에서 데리다를 만나다 ​ 1997년 5월 16일 ​ 남대문 민박에서 만난 오퍼상 소개로 ‘하얀 집’을 알게 되다. 하루 숙박 70프랑이라는 저렴한 가격에 라면 6프랑이고 주변에 수퍼가 있으며 무엇보다 통행금지가 없다. 숙소를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 하얀집에서는 바르셀로나 멤버들을 만날 수 있었다. 심지어 로마에서 헤어진 그녀들과도 조우하였다. 우리가 왜 이리 늦게 만났냐며 정말 질긴 인연이라면서 혀를 차던 그녀들 말로는 한국인 부자 카톨릭 신도를 만나 자동차를 렌트해서 포르투갈을 다녀왔다고 한다. 파티마에 간 것이다. 정말 좋았다고 은근히 나를 약을 올린다. ​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프랑스 외인부대를 지원하러 왔다는 이와 무역 아이템을 개발한다면서 삼 개월 동안 유럽에서 머무르고 있는 이를 만났다. 나는 이들이 마음에 들어 이들과 행동을 함께 하기로 내심 결정한다. 하지만 오늘은 아니다. ​ 어제 못 다한 일정을 소화하자. 소르본느로 가자. 갔다. 경비가 있길래 긴장했으나 자유로이 출입 가능하다. 대학 앞에는 까페가 있었다. 음... 장 뤽 고다르의 영화가 떠오르면서... 한 때 여기서 철학적 토론을 한다느니... 아, 왜 나는 젊은 날 괜히 프랑스 영화에 열광했을까... 지나고 보면 어이없기도 하는... ​ 여기 저기 둘러보다가 자끄 데리다 이름을 발견. 기분이 어떠했냐고? 주눅이 들었냐고? 잘 모르면서 해체 팔아서 책까지 낸 놈 주제에 뻔뻔하기까지 하느냐고... 그랬다. 오기라고 해도 좋다. 자끄 데리다도 해체에 뭘 아냐고 묻고 싶었을 뿐이다. 나도 모르면 데리다도 모를 것이다. ​ 겁대가리를 상실하였는가. 기세를 살려 용감하게 강의까지 들어본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있었다. 무슨 줄인가 하고 일단 줄을 섰는데 알고 보니 강의를 듣는 줄이었다. 인기 강좌인 모양이다. 본래 강의를 듣는 대학생들 외에 프랑스 전역에서 온 시민들 - 주로 노년층이 많았다 -이 청강을 하는 것이었다. 아! 프랑스의 힘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저 나이에 강의를 듣는 열정이란... 노년층의 증가로 사회보장제도가 근본부터 뒤흔들리는 현장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동시에 그 노년층이 부단히 힘을 내는 데서 아직은 프랑스가 세계 주도권에서 밀려날 때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2시간짜리였다. 나폴레옹 시대 문화를 다룬 강좌였다. 극장과 오페라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데 뭘 알아들을 수 있어야... 고교 때 불어한 수준만으로 도대체 알 수가 없었다. 해서, 강의 풍경만 감상했다. 교수는 칠판에 쓰는 법 없이 준비해온 원고를 가지고 2시간 내내 중얼중얼 염불을 왼다. 그러면 학생들이 부지런히 메모하고 또 메모한다. 교수 뒤편으로는 나폴레옹 시대의 그림으로 추정되는 대형 그림이 있었고... 옆의 여대생들은 열심히 필기하고 있는데... 여행하면서 느낀 것이지만, 앉으면 졸립다. 마치 예비군 훈련을 나온 것처럼 말이다. 하루 잠을 서너 시간만 자서 그러한가? 서서히...서서히 잠이 온다. ​ 데리다와 대화를 하고 있다. 넌 왜 내게 관심이 있지? 변증법 때문이야. 다른 비판들은 그저 그랬는데 당신이 한 변증법 비판이 꽤 설득력이 있었어. 적어도 내겐... 찔렸거든. 그래서 당신을 기억했지. 그렇다면 당신이 얼마나 잘 난 사람이기에 감히 변증법을 비판하나 알고 싶었거든... 출발은 그랬어. 그렇다면 이제는 어때? 당신은... 촘스키보다 조금은 잘 난 유태인이더군. 난 알 수 있어. 이상하게도 예전부터 유태인 출신에 대해 굉장히 예민했거든. 혹시나 했더니 역시더군. 자네도 유태인이었어. 좋아. 유태인, 자네도 랍비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인류에게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지? 자네들은 하나님이 선택한 유일 민족이잖은가. 모르겠어. 신은 아마도 웅얼거림을 좋아하는 듯싶어. 아우슈비츠에서 일어난 일을 생각해 봐. 신학이 설명할 수 있겠어? 철학이 필요할까? 그 무엇으로도 이해가 불가능하잖아. 어쩌면 신은 그 불가능을 말하려고 하는 것인지 몰라. 바벨탑 말이야. 그렇군. 해체란 결국 바벨탑의 교훈인 것이야? 모른다고 했을 뿐이야. 그래. 그것이 너의 해체 방식이지. 알아. 모른다면서 아는 척 말하는 이들을 역시 모르면서 조롱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 소크라테스 이후로 너처럼 통쾌한 철학자가 있을까? 후후. 유대인 랍비들이 생존하기 위해 그간 얼마나 애매한 말을 즐겨하였는지를 말이지. 모호한 영역에서는 늘 당신들이 있고, 그 틈새를 당신들이 개척하였지. 맞아. 해서, 묻고 싶은 거야. 유대인도 아닌 내가 왜 그런 유대인적 냄새를 잘도 맡는 것일까. 후후. 이제 당신도 느낄 법도 한데... 당신이 그토록 당신 스스로를 찾아다닌 이유가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는가. 몰라. 모른다고. 당신도 유대인이기 때문이야. 뭐라고. 내가 유대인이라고? 그래, 유대인... 당신이 좌파여서 유대인이 된 것이 아니라 유대인이기 때문에 좌파가 된 것이라고... 알겠니... 무슨 말인지... 말도 안 되는... 잘 생각해 봐. ​ 불현듯 잠에서 깼다. 옆의 여대생들이 상큼하게 웃으면서 나를 쳐다본다. 이런! 침까지 흘렸다. 재빠르게 입가의 흔적을 치웠지만 여대생들이 다 안다는 듯 나를 빤히 바라본다. 정말 쪽팔렸다. 강의는 계속 되었다. 교수가 강의 도중 유머를 섞어 말했나 보다. 사람들이 웃는다. 그러나 여대생들은 웃지 않는다. 강의가 끝났다. 아가씨들 일어나면서 내게 윙크를 하고 간다. 아... 함께 나갈 용기가 없었다. 조용히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사람들이 다 나갈 동안... 뭔가 포즈를 취해야 할 듯싶어 진지한 척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뒤적거리고 있었으나 신경은 온통 사람들에게 향해 있었다. 다 나간 뒤에 그제야 나도 강의실을 빠져 나왔다. ​ 소르본느를 나와 지하철을 탄다. 지하철에서는 온통 거리의 악사들이다. 또 거지 시인을 만날까? 하얀집으로 돌아왔다. ​ 저녁에는 무역 대박을 노리는 오퍼상 준비생과 에펠탑을 가다. 저녁에 가야 맛이 난다고 했다. 에펠탑을 들어가는데 경비를 보던 사람이 우리에게 묻는다. 꼬레아? 그래. 그랬더니 무진장 좋아하면서 자기가 태권도 일단이라면서 우리 앞에서 발차기 시범까지 보여주는 것이다. 태권도에 굉장한 자부심을 지니고 있는 듯싶다. ​ 에펠탑에 오르니 별 생각은 나지 않는다. 파리 야경이 보일 뿐. 그때 패키지로 온 한국 관광객들을 만났다. 며칠 더 묵는다고 했다. 그때 한 남자가 우리에게 다가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울릉도 유지라는 것이다. 울릉도에서 자기 모르면 간첩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패키지에 매우 실망했다고 하며 뭔가 색다른 것을 할 수 없느냐 하면서 우리 눈치를 보는 것이었다. ​ 이 눈치에 재빠르게 잔머리를 최대한 굴린 이가 있으니 다름 아닌 오퍼상 준비생. 울릉도 유지와 뭔가 쏙닥쏙닥하더니 내게로 와서 저분들이 우리랑 한 잔하자고 한다고 한다. 해서, 에펠탑 근처 술집에서 기네스 흑맥주로 한 잔을 했다. 한 잔하면서 이야기를 가만히 듣자 하니 울릉도 유지가 바라는 것은 꽉 얽매인 패키지 일정보다는 자유로운 일정을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왕 유럽에 왔는데,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데, 조금 있어보니까 다니기가 그렇게 무서운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혼자 다니니 여전히 두렵고, 누가 가이드만 조금 해주면 돈 좀 더 쓰더라도 재미나게 여행하고 싶다는 것이다. 오퍼상 준비생 눈알이 빠릿빠릿 돌아갔다. 울릉도 일행이 잠시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정말 하려고 그래? 그는 이미 결정을 내린 뒤였다. 패키지들과 함께 벌써 이태리행 기차에 탄 것이다. 여윳돈은 거의 바닥이 났거든. 기회잖아. 벗겨먹기 정말 좋거든. 이런 것을 해먹지 못하고 어떻게 오퍼상 꿈을 꾸겠어. 그랬다. 그는 정말 온갖 사기에 능통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것이 장사꾼의 정체라는 듯. 그는 더 나아간다. 물주만 잡는다면... 이번 건 잘 된다면 말이야. 그가 정말 울릉도 유지라면 돈 좀 있을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여행 중에 반드시 설득하고 말겠어. 나는 폴란드, 아프리카를 상대로 사업을 구상하고 있거든. 거의 구체화되었어. 단지 종자돈이 조금 부족할 따름이지. 해서, 그가 도와준다면...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여겨...... ​ 자정을 넘어 12시 반에야 지하철을 타서 하얀집으로 돌아왔다. ​영화박물관에서 세네갈 유학생을 만나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5. 6. 2:59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영화박물관에서 세네갈 유학생을 만나다 ​ 1997년 5월 17일 ​ 오늘은 박물관의 날. 파리 모든 박물관을 하루 동안 다 볼 수 있는 패스를 구입했다. 작정하고 아침 일찍부터 길을 나선다. 오르세 미술관부터 시작한다. 오르세 미술관이 유명 화가 그림들을 상대적으로 많이 보유한 편이었다. 하나하나 자세히 보지는 않았다. 다들 훌륭하고 의미가 있을 터. 다만 순간적으로 영적으로 통하는 작품이 있는 것 같다. 시일을 두거나 혹은 다른 장소에서 본다면 왜 그때 저 그림에 뻑 갔을까 싶은 것이다. 그날은 세잔느와 클림트에 이끌렸다. ​ 오르세를 나와 루브르로 향한다. 지하철을 타지 않고 걸어서 루브르까지 간다. 걸어가면서 바게뜨 빵으로 점심을 해결한다. 부드러운 맛이 좋은 프랑스 빵이 좋다. ​ 루브르 지하로 내려가 나폴레옹 홀부터. 지하에는 고대 성벽들이 재현되어 있다. 계속 걷다가 모나리자까지 본다. 너무 힘들어서 잠시 루브르를 나온다. 담배 한 대를 핀다. 무덥다. 공원 분수에 발을 담근다. 시원하다. 공원에는 누워 자기도 하고 나처럼 발을 담고 담소를 나누거나 도시락을 꺼내 식사를 하고 있다. 다소 안정을 찾은 후 다시 루브르에 도전! ​ 루브르를 나와 팜플릿에 아시안 뮤지엄이 있기에 갔다. 왜 굳이? 팜플릿에는 한국 것도 진열되어 있다고 하여 무엇이 있나 해서였다. 갔다. 0층 - 영국과 프랑스 등에서는 1층을 0층이라고 하는 듯싶다 -에는 중국, 일본 전시관이 따로 있었고, 1층에는 기타 아시아 국가들의 일반 전시관이 있었다. 그런데 한국 것이 있다 해서 왔는데 없으니 난감한 노릇이다. 나는 담당자에게 가서 매우 짧은 영어로 팜플릿을 가리키며 왜 한국은 없느냐고 따졌다. 그는 알 수 없는 프랑스 말로 뭐라 뭐라 한다. 이봐요. 난 팜플릿에 있다길래 귀한 시간 쪼개서 왔단 말이오. 답답해서 한국말로 쏘아붙인 뒤 뮤지엄을 나왔다. ​ 시네마 뮤지엄으로 가다. 1895년에 뤼미에르 형제가 시네마토그라프로 영화를 발명한 지 백주년이 어느덧 지나갔다. 해서, 뭘 어떻게 하고 있을까 가보았는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실망스러운 수준이다. 혹 남양주 종합촬영소를 방문했다면 그곳이 더 낫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그때 그곳 시네마 뮤지엄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는 세네갈 유학생을 만났다. 알바를 뛰고 있는 셈이다. 세네갈은 어느덧 우리에게 월드컵과 축구로 익숙한 아프리카 나라가 되었다. 2002년 월드컵 개막전에서 세네갈이 우승후보 프랑스를 1:0으로 이겨 전 세계 축구팬들에게 충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세네갈은 프랑스 식민지였고, 언어도 프랑스어를 쓴다. ​ 그에게 묻는다. 이곳 파리가 어떤가. 그는 말한다. 끔찍해. 그렇다면 어디가 좋은가. 고향이지. 세네갈. 어떤 곳이지? 세네갈은? 정말 좋은 곳이야. 자네도 세네갈에 간다면 분명히 좋다고 여길 거야. 코리아에서 왔는데 코리아에 대해 아나? 그러자 그는 말한다. 대우! 하필이면 그가 쓰는 퍼스널 컴퓨터가 대우 제품이었던 것이다. 내가 배낭여행 중이라는 것을 알고 그는 매우 부러워했다. 그는 소시민 출신의 후진국 엘리트로서 고국으로 돌아가 어떤 역할을 발휘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아마도 그는 유학 도중 당한 인종차별 및 푸대접을 기억할 것이고, 선진국에 대한 질투심으로 똘똘 뭉쳐 고국으로 돌아가서는 반프랑스주의를 기치로 내걸고 완전한 독립운동을 전개할 가능성이 클 것이다. 다만 방식은 프랑스식이겠지. 그것이 늘 문제. 형만한 아우 없다. 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모방도 필요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과감하게 탈피해야 하는데 그것이야말로 길이 없는 길을 가는 것. 민족해방운동이 유럽에서건, 아시아에서건, 남미에서건 일정한 역할을 하는 것이 분명하지만, 동시에 소시민 유학생들에 의해 주도되는 민족해방운동이 결국은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 그 이상의 발전을 하는 데에 오히려 장애가 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 이번에는 발자크 기념관에 가볼까. 발자크 기념관은 소박했다. 아마도 발자크가 살던 집을 기념관으로 한 듯싶다. 발자크? 발자크에 대해서는 전기 작가로서 일급인 슈테판 츠바이크의 소설을 참고하라. 발자크를 그 누구보다도 소상하게 밝혀주었다. ​ 퐁피두로 간다. 퐁피두는 현대 사조를 의미한다고 할까.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어울리는 공간. 내가 갔을 때는 퐁피두에선 한참 일류가 유행이었다. 퐁피두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 일본은 오랜 경제 침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를 비롯한 전 유럽에서 일류를 만들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일본 전자제품과 일본 만화에 심취하여 자라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느끼는 바는, 프랑스가 유럽에서 유난히 친일본적이로구나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젠가부터 프랑스인과 일본인의 유사성을 곧잘 비교해 보는 편이다. 다소 의아해할 수 있으나 내가 접한 경험만으로는 이 둘은 상당히 비슷하다. ​ 퐁피두 2층은 루브르 특정 작품에 대한 비디오 해석을 하는 코너가 흥미가 있었다. 헤드폰을 착용하면 불어로 해설이 나오는데 불어를 알 지 못해도 그림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을 만큼 잘 만들었다. 3층은 열람식 도서관으로 학생들이 열심히 책을 보고 있었고, 4층이 전시관인데 현대 미술 전시관이었다. 실험과 파괴, 추상과 변형, 그리고 참여에 열심이었다. ​ 퐁피두를 나오자 퐁피두 광장에서 젊은이들이 공연을 한다. 근래 한국 대학로 등지에서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없었다. 해서, 이러한 아마추어 즉석 공연이 재미있었다. 기타와 북을 든 청년들. 베트남계로 보이는 젊은이가 술을 마시면서 기타를 치며 노래한다. 또 옆에서는 흑인이 노래를 한다. 역시 흑인의 가창력은 아마추어라도 뛰어난 듯싶다. ​ 하얀집으로 돌아왔다. 사온 술을 마시며 새벽 3시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이 든다. ​ 베르사이유에서 에밀 졸라 거리까지 걷는다 프로파일 인드라 ・ 2007. 5. 7. 3:33 URL 복사 통계 본문 기타 기능 ​ 베르사이유에서 에밀졸라 거리까지 걷는다 ​ 1997년 5월 18일 ​ 외인부대원 지망생. 그는 무인경비시스템 보안회사에 근무한다. 그런 그가 회사에 병가를 내고 프랑스 파리로 날라 온 이유는 돈 때문이었다. 돈 좀 크게 만져 보고 싶다 보니 다니는 회사가 성에 차지 않은 것이다. 특공부대에서 활약한 솜씨 덕에 월급만 많이 주면 말뚝 박았을 위인이나 한국군 하사관 급여 수준이 어디다 대고 말할 수준인가? 해서, 제대하고 무술 실력으로 취업이 되긴 하였지만, 그의 야무진 꿈을 실현시켜줄 정도는 아닌 셈이다. 가만 따져 보니 수십 년 일해 봐야 남는 것 없을 것 같고. 젊을 때 고생하더라도 크게 한탕해서 보란 듯이 살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프랑스 외인부대. 그의 야심은 돈만 많이 준다면 얼마든지 국적도 바꿀 수 있을 각오였다. ​ 하여, 그는 사람들에게 단지 뻥이 아님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외인부대 행 열차를 타고야 말았는데... 어제 늦게 돌아온 것이다. 다들 무슨 일인가 싶었고. 새벽까지 이야기를 나눈 셈이다. 그가 열차에서 외인부대 자료를 보고 있는데 앞자리에 있던 프랑스 젊은이가 눈치를 채고 놀라움을 표시하더라는 것이다. 마치 우리로 치면, 프랑스 외인부대가 UDT와 같은 특수부대 취급을 받는 듯싶다. 그로서는 우쭐하였을 것이다. 이미 외인부대원이 된 듯 기분 좋게 외인부대로 갔다. 하여, 그의 외인부대 행은 99% 확정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런데 변수가 발생했다. 외인부대에서 이런 저런 면접을 보던 중에 그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야 만 것이다. ​ 오호! 통재라... 외인부대원 급여가 생각보다 적었던 것이다. 그는 낙담했다. 고작 이 돈으로 국적을 팔아먹어야 하겠는가. 그는 인사장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그의 손을 잡기까지 하는 데도 뿌리치면서 나온 것이다. 그는 우울했다. 꿈을 잃어버린 것이다. 자신이 잘 하는 기술로 큰돈을 벌고 싶었는데 출구가 막힌 것이다. 그러던 그가 나를 만난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이 말발하면 나 아닌가. 조폭 앞에서도 움츠리지 않고 현란한 언어를 구사하는 날라리 문명비평가 겸 작가. 이봐. 남한과 유럽은 달라. 남한은 공부만 잘 하면 그만인 나라이지만, 유럽은 반드시 그렇지 않아. 한 가지만 잘 해도 그만이야. 가령 너, 태권도 잘 하지? 이곳에서는 태권도와 같은 무술인을 예인 취급해. 아니? 내가 들은 이야기인데 어떤 사물놀이패 사람이 있는데 유럽을 돌아다녔다는군. 그런데 이 사람한테 뻑 간 백인 여성들이 한둘이 아니었다는군. 이소룡 알지? 동양인들이 발차기만 좀 하면 이 사람들은 다 이소룡으로 알아. 해서, 일부 여성들은 몸짱에 많은 관심이 있다고. 자신을 가져. 당신이 큰돈을 만지려는 이유가 무엇이겠어? 여성이잖아. 멋진 여자를 만나고 싶잖아. 그러자면 능력이 있어야 하고, 능력은 돈으로 환산되지. 그런데 만일 돈을 굳이 많이 벌지 않더라도 멋진 여성을 만날 수 있고, 그 여성이 자신한테 뻑 가게 만들 수만 있다면 굳이 돈을 많이 벌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겠어. 그렇다면 당신 꿈이 좌절되었다고 아직은 낙담할 때는 아니라고 보는데... 어때? 아, 나는 아무래도 교주 기질이 있는 것 같다. 몇몇 사람들이 나를 만나면 영성을 느낀다고 한다. ​ 그는 당장 나를 형님으로 부르면서 따르기 시작했다. 해서, 간 것이 베르사이유이겠다. ​ 자, 이제 외인부대원들의 베르사이유 공략을 기대하시라. ​ 베르사이유 하면 무엇보다 베르사이유의 장미가 떠오른다. 일본 만화였는데 오래 전에 읽다 보니 내용은 희미한 반면 베르사이유만 떠올려진다. 바로 이것. 이야기는 닳고 닳은 동전이 되어 결국 동전만 남는 것. 어쩌면 당신의 전부였던 인피가 벗겨지고 해골만 남는... 그처럼 생명은 죽음으로써 동질감을 느낀다는 덧없음의 비애. ​ 그랬지. 베르사이유의 장미. 오스칼, 페르젠, 앙드레, 샤를로트... 특히 오스칼. 어쩌면 내 여성관은 이런 만화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른다. 남성과 흡사한, 보이시한 매력을 갖춘 여성. 나한테 애교 따위나 부리는 여성이 아니라 동반자로서의 격을 갖춘 여성... ​ 하하. 다른 이들이 좀 의아하게 생각할지 몰라도 나는 폭력 만화류보다는 이런 순정만화류가 더 좋았던 사람이다. 유리가면(흑나비)도 그렇고. 또 아르미안의 네 딸들도 좋았고. 북해의 별까지... 다만 순정만화류도 변모하기 시작해서 그 다음부터는 내 취향이 아니게 되었다. 뭐라고 할까. 탐정 소설의 고전들이 있지 않은가. 셜록 홈즈 이야기나 괴도 루팡,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들. 내 취향은 딱 여기까지인데... 뭐랄까. 미술 사조도 어느 순간 역사나 정치, 종교에서 이탈하는 순간부터랄까. 그 순간이 세잔느라면... 세잔느까지는 봐줄 수 있더라도... 그 후로 나오는 하드보일드한 추리소설에는 영 손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처럼! 이야기는 없고 오로지 러브 액션만 있는 하드보일드한 순정만화류에 지치기 시작했다. 보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다만, 역설적으로 그러하기에 동인지 활동하고 코스프레 하는 여성들을 나와 다른 사람이어서 낯설어서 호의적으로 보고 있고, 또한 전투복을 차려 입고 모의 전투 서바이벌을 하는 남성에게도 낯설어서 호의적으로 보고 있다. 해서, 내 소중한 이웃들인 셈이다. 나와 다르기에. 아, 괜히 복잡하다. 오늘은 여기까지....... ​ 파리에서 레를 타고 파리 근교 베르사이유에 가야 한다. 즉 지하철 표로는 못 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 관광객들은 이를 잘 모르고 지하철 표를 계속 투입시켜 삑삑 소리를 내게 만든다. 상당수 관광객들이 이렇다. 이러다가 한 사람이 담 뛰어넘듯 넘어가면 연이어 다른 이들도 넘어간다. 이런 일이 워낙 많은지 제지하는 이도 없다. 그러나 우리는 표를 샀다. 그런데도 동양인이어서인지 유독 우리만 검표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 차별이란... 하여간 이 프랑스 놈들이 유럽에서 제일 인종차별적이야. 진짜 이미지 하나로 먹고 사는 족속들. 표를 샀다고 해도 말이 안 통해 결국은 내 유레일 패스를 보여주기까지 하니 그제야 통과. 사실 유레일 패스 조차 서양 애들 중심으로 공공연하게 불법이 이루어지고 있다. 즉 나처럼 두 달 동안 며칠 이용하는 플렉스 패스인 경우, 연필이 아닌 볼펜으로 기입하게 되어 있지만, 문제는 지울 수 있는 볼펜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해서, 지우고 다시 쓰면 그만인 것이다. 나야 유럽에 와서 서양 애들이 하니까 그제야 알게 된 것이지만. 아는가. 모두가 불법을 저지르고 있는데 유독 동양인만 집중 조사하는 것. ​ 베르사이유에 가면 이쁜 정원을 그냥 볼 수 있다. 당시 가이드 책은 정원도 따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한다고 했지만 아니다. 물론 베르사이유 내부로 진입한다면 돈을 내야 한다. 베르사이유 정원을 남남이 걸어간다. 야, 여기 데이트하기에는 딱 좋겠네. 그러게나 말입니다. 형님. 야. 이거 남남끼리 와서 뭔 꼴이냐. 하하하. ​ 외인부대원은 습관이 하나 생겼다. 백인 여성만 지나가면 틈나는 대로 발차기를 하는 것이다. 그의 발차기는 일품이었다. 높이 뛰어 바람을 일으키며 허공을 가르는 솜씨로 볼 때, 분명 무술도 예술임을 입증한다. 문제는 당장의 쓰임새다. 이곳에 오는 백인 여성들 다수는 아무래도 그의 무술보다는 정원에 더 관심이 있는 듯싶다. 내가 아무리 여성을 획일적으로 대하지 말라, 때와 장소를 가려라라고 말해도 별 소용없다. 그는 틈이 나는 대로 발차기를 했다. 마치 한 년만 걸려라는 전통적 코리안 식 홍보 수법이라고나 할까. ​ 저수지까지 내려와 구경을 하고서야 우리는 베르사이유 공략을 마칠 수 있었다. ​ 돌아오는 레에서 깊은 잠을 약 삼십분 자다. 잠이 부족하였기에. ​ 하얀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는데 한국에서처럼 습관적으로 물을 많이 쓰면서 했다. 하지만 유럽은 물이 매우 귀하다. 때로는 기름 값보다 물 값이 더 비싸다고 할 수 있을 만큼... 하얀집 누님이 매우 화가 나셨다. 수도요금을 장난으로 아느냐? 누님의 잔소리에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요. 여기서 잠깐. 에비앙이 맛있다고. 생수로서는 여러 생수 중에 에비앙이 좋다고 하지만. 까는 소리다. 한국 물맛이 가장 좋다. 아리수라고 하는 서울 수돗물이야 유럽 석회수보다는 낫지만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강원도에서 군복무 할 때 마시던 물과 공기. 아, 정말 이런 맛을 따라갈 수는 없다. 물 소중하게 생각하자. 운하 같은 소리 내 앞에 누가 꺼내면 죽을 각오를 해라.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내 입장에서야 상관이 없지만 운하 운운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 삼족을 멸하겠다. ​ 저녁에 홀로 나와 미라보와 퐁뇌프에 가다. ​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강은 흐르고 우리네 사랑도 흐른다... 밤이여 오라. 시간은 머문다.... ​ 젠장할, 세느강. 중랑천과 안양천이잖아. 프랑스 놈들 허풍이 일본 놈들 허풍 만큼 대단한 걸. 퐁뇌프는 또 어떠한가. 나의 영화평 중 가장 찬사를 받는 영화평이 레오 까락스의 퐁뇌프의 연인들이 아닌가. 어떤 노동연구소 위원은 내 영화평을 토대로 강의하기까지 하였다고 할 정도다. 그런 퐁뇌프 다리 위에서, 미라보 다리 위에서 내 자신에게 묻는다. ​ 그대여! 왜 여기 있는가. ​ 그랬다. 무슨 무슨 기념일이 아닌,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겨울 어느 날에 슬쩍 광주 망월 묘지를 다녀올 때처럼... 그 기분이었다. 이 슬픔... 애잔한 슬픔... 보다 정교한 나르시즘... 아직도... 아직도... 살아간다는... 알 수 없는 흥분과 동시에 드는 자학. 한없이 자학해도 위안을 해 줄 무덤들. 그리고 죽음. 그 본질 앞에서 단지, 단지, 살아 있다는 그것. 이렇게 글을 쓴다는 것. ​ 뺨으로 눈물이 흐른다. ​ 에밀 졸라 거리를 걸어간다. ​잔세스칸스에서 아침 산책을 즐기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8. 2:28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217796 통계보기 잔세스칸스에서 아침 산책을 즐긴다 1997년 5월 19일 밤기차를 탔다. 에밀 졸라 거리에서 결정한 일이다. 이제 하루만 패스를 쓸 수 있다. 그 하루를 어디에 쓸 것인지... 사람들은 몽쉘 미셀을 추천했는데... 나는 지금 암스텔담 행 밤기차를 타고 있다. 그래. 결심한 것이 있다. 정말 좋은 경치라면 혼자 볼 수 없다. 나타샤랑 보아야 한다. 융프라우가 참 볼만하다고 했다. 그리스 아테네는 어떠한가. 아일랜드는? 해서, 아끼고자 했다. 안 갔다. 그보다는 오로지 나만 관심이 있을 법한 장소를 더 선택한 것이다. 왜? 언젠가는 다시 오리. 그때는 혼자 오지 않을 거야. 가족이랑 올 것이다. 안 가본 데와 정말 좋았던 곳을 다시 가볼 것이다. 같은 칸에는 댄디한 차림의 영국인이 있었다. 그는 내가 론리플래닛을 열심히 들여다보자 여행 책 중에 액설런트한 책이라고 말을 건넨다. 그는 브뤼셀-함부르크-프라하로 가는 일정이다. 그는 브뤼셀에 오자 다른 기차로 갈아탔다. 그리고 한동안 기차가 멈추어 있었다. 가까운 거리여서 시간을 맞추기 위함일까? 그래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혹시 지난 경우처럼 엉뚱한 곳에 내릴 가능성이 있을 듯싶어... 확인하고 또 확인하였지만, 한 번 실수를 해서인지 100%여도 안심할 수 없었다. 다시 기차가 움직인다... 시간은 흐른다. 아니, 정지하였나. 나는 순간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멍하니, 멍하니... 풍차가 보였다. 암스텔담에 도착이다. 간 데 또 가느냐 싶지만, 간 데 또 가니까 더 재미있다는 것을 알까? 뭔가 아쉬움이 남아 있는 것이다. 좀 더 둘러볼 수 있었는데 하는... 마치 첫사랑과 같다고나 할까. 더 잘 할 수 있었는데, 단지 처음이라는 이유로 실수 연발이었던,,, 그래서 더욱 기억이 초롬초롬 나는 것이 첫사랑이지만, 그 아쉬움은 긴 여운으로 남는다. 그 여운을 오래도록 음미할 수도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또 다른 삶이 시작한다는 것. 옛일보다는 오늘을, 오늘보다는 내일을 준비한다는 것. 다시 와서 뭘 느끼는 걸까. 처음에는 낯설어서 좋고, 다음에는 익숙해서 좋은 것이다. 익숙함을 즐기러 가자. 서두름이 없이 당황함도 없이 정확히 목적지로 가는 익숙함이라니~. 중앙역에서 시내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반대편으로 가보기로 했다. 반대편은 배를 타고 건너편 마을로 가는 것이다. 5분도 안 되어서 도착했다. 암스텔담에 와서 반대편 마을에 오는 사람도 있을까? 비가 막 온 직후여서인지 마을 분위기는 정갈한 느낌을 주는 한 폭의 수채화였다. 여기저기 둘러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없어서 조금만 보고 다시 배를 타고 돌아온다. 마치 최근 남이섬에 다녀온 것과 같은 경험이랄까. 곧바로 잔세스칸스로 가다. 암스텔담에서 만난 보석녀가 동행해서 보고 싶어 했던 풍차 마을이다. 그 마을을 왜 갔을까. 보석녀에 대한 그리움일까. 아니다. 그보다는 반성이랄까. 좀 더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해주지 못한 미안함이었다. 당시에는 여행 초기여서 다소 경직되었던 것에 대한 반성이었다. 알크마르행 4번째 기차역에서 내렸다. 이른 아침에 소도시에 도착하는 일은 참 유쾌한 일이다. 아무도 없는 새벽길을 걷는다면 얼마나 상쾌한가. 게다가 처음 가보는 낯선 마을이라면. 나는 추천한다. 유럽 곳곳의 도시를 돌아다니며 비슷한 건축물들을 보며 길지 않은 여행 일정임에도 매너리즘에 빠진다고 여긴다면 아침 일찍 일어나 처음 가보는 소도시에 가서 마을을 산책해보라. 새삼스레 느껴진다. 여행오길 잘 했구나 하고 말이다. 아무도 없는 길을 걸어가 보라. 행여 마을 사람 누군가를 만난다면 누군가는 대부분 당신에게 호감을 표시할 것이다. 드디어 풍차를 발견하다. 총 7개다. 견본용까지 합치면 8개. 중국계 관광객들이 이른 아침부터 몰려와 있었다. 여기가 일본 하우스텐보스 원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동화에 나오는 마을이다. (여기서 내가 일지에 느낌이 에로틱하다고 했는데 왜 이런 주석을 달았는지 잘 모르겠다.) 알크마르로 가볼까 했지만 흥미 있는 이벤트인 치즈 시장이 금요일에만 열린다고 하여 헤이그로 간다. 헤이그 CS역에 도착하다. 헤이그의 교통 시스템은 다소 복잡하다. 한 시간 안에는 뭐든지 탈 수 있으나 1시간이 넘어가면 룰에 따라 값이 천차만별이라고 한다. squi 가겠다고 하여 1번을 탔더니만 아니었다. 내려서 맥도널드 가게 알바생에게 물어보니 8번을 타야 한다고. 이준열사기념관은 론리플래닛에는 없고, 우리는 유럽을 간다라는 책자에 있었기에 이 책자만 보고 간 것인데 엉터리였다. 여기저기로 헤매면서 묻고 물어 간신히 이준열사 기념관을 찾다. 이곳은 한국인이 운영하며 한국인 주인장이 워낙 손님이 없어서 1:1 가이드를 해준다. 주인장인 그녀는 당국에 불만을 털어놓았다. 지원이 부실하다면서. 기업들도 관심이 있는 척하지만 결국은 일회용에 그치는 것이다. 많이 듣는 이야기가 아닌가. 나는 왜 여기에 갔는가. 민족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이 있어서? 아니다. 그렇지 않다. 이씨 일행은 이씨조선의 부활을 위해 최후까지 노력한 셈이다. 그렇다면? 해외에서 한국인이 운영하는 곳을 가보고 싶었을 뿐이다. 프라하에서는 대우자동차 영업소에 들려봤다. 또한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각국 주재 대사관, 영사관을 들리려고 노력했다. 대체 어떻게 하고 있을까 싶어서. 그래서 왔을 뿐인데 주인장은 오랜만에 보는 한국 손님이라면서 매우 반색하였다. 유럽에 돌아다니는 한국인들은 꽤 많은데 이곳에 오는 이들은 거의 없구나. 12일 이후로 내가 처음이란다. 그녀가 열정적으로 가이드를 하였기에 나는 매우 정중한 자세로 손을 가지런히 모은 자세로 그녀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다. 다가오는 말은 별로 없었다. 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을 끝낼 때마다 나는 감탄조의 탄성을 지르며 보조를 맞추었다. 누가 주인이고, 누가 손님인지... 하하하. 때로는 돈을 내고도 상대를 위해 배려해주어야 할 때가 있다면 바로 지금이다. 그녀의 설명을 듣다 보니 이준보다는 이위종이라는 인물에 관심이 갔다. 모던하게 생긴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났다. 소감은? PEACE. 기념관을 나와 HS역으로 간다. 이번에는 찾기도 쉽다. 기차표에 따르면 예약을 하는 것이 좋고, 특히 피크타임 때에는 예약이 필수라고 한다. 참고로 유레일패스를 끊어도 예약을 하는 경우 예약비는 별도다. 밥을 먹으면 팁과 부가가치세가 별도로 계산되듯이... 참 이런 것에 비하면 한국은 비빔밥 문화가 확실하다. 한 방에 다 통하는 것을 선호하잖은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빨리빨리 문화, 신속 문화에서 비롯된 것일 게다. 이런 한국인이니 세계 어디를 가나 느릿느릿하니 답답할 것이다. 음식은 담백하지 않고 대개들 느끼하고, 언행은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어눌하니... 사람이 없어도 예약을 했다. 불안감을 해소해야 한다. 오늘 반드시 파리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네 아인스 월드 격인 마두로담에도 가보고 싶었지만,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가지 못했다. 그러면서 재빨리 나 자신을 정당화했다. 마두로담에 들려 네덜란드 곳곳을 다 가보았다는 식의 헛된 욕망을 버리라고. 가거나 가지 않거나 당신은 아직 네덜란드를 알려면 멀었다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오후 5시 30분에 브뤼셀 도착. 잠시 브뤼셀도 돌아본다. 이곳도 이제 익숙한 풍경이 되었구나. 브뤼셀에서 저녁으로 생라면을 뜯어 먹었다. 생라면을 먹었더니 졸음이 밀려왔으나 참고 세수를 해서 깼다. 다시 기차를 탄다. 조금이라도 싸게 가려고 2등석 예약을 한다. 그간 경험으로는 1등석이나 2등석의 차이는 없다. 컴파트먼트인 경우에는 더더욱. 파리로 돌아왔다. 하얀집으로 돌아오는데 어떤 서양인이 나를 보고 아는 척을 한다. 어? 나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인데? 하하. 알고 보니 그 사람은 내 옷차림이 패셔너블하다고 여긴 것이다. 영감에 도움이 되었다나. 평생 패션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산 내가 이런 소리를 듣다니... 그것도 파리에서... 참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는 나를 한 번 껴안더니 행운을 빈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자기 길을 간다. 나는 가다가 뒤를 돌아보고, 또 길을 가다 쇼윈도우에 비친 나를 바라보기도 했다. 당신은 누구인가. 파리에서 김기덕을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1. 1:07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311056 통계보기 파리에서 김기덕을 만나다 1997년 5월 19일 네덜란드 헤이그를 다녀와 민박집 누님이 끓여준 칼국수를 맛있게 먹고 있었다. 민박집 누님이 내게 이것저것 묻는 것이었다. 나를 독특하다고 본 모양이다. 문화 관련 책을 냈다 하니 더 흥미를 보였다. 혹시 전날 내가 샤워하면서 그야말로 물 쓰듯 물을 써서 잔소리를 한 부담감이 있는 것은 아닐까 싶어 나는 더더욱 조심스러웠다. 민박집 누님은 미술을 공부하는 이였는데 유학하면서 오랜 기간 생활하려니 민박집을 운영하게 된 셈이다. 유럽 다수 민박집 사정이 이런 편이다. 김기덕은 주지하다시피 몇 년간 프랑스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이런 인연 때문인지 민박집 누님이 김기덕 스태프에게 간식거리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나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더니 김기덕이랑 나랑 느낌이 비슷하다면서 만날 생각이 없냐고 해서 내가 좋다고 한 것이다. 즉석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은 96년에 나온 악어를 잘 보았고, 그에 관해서 통신에 호평도 올린 바 있기에 그렇다. 시간이 문제이지, 어차피 만날 인연들은 만나기 마련일까. 영화팀에게 전화를 건다. 김 감독은 부재중이었다. 무슨 일이냐기에 통신에서 영화평론을 하는 이인데 인터뷰를 하고 싶다고 했다. 지금이야 이런 이야기가 자연스럽지만, 당시에는 아직 낯선 형식이었다. 다만 이쪽에서 워낙 당당하게 나가니까 그쪽도 그런가 보다 하고 오라고 했다. 마주침이 필요할 때에는 적극적인 자세가 역시 필요한 법이다. 당시 김기덕은 악어의 후속작 야생동물보호구역 해외 촬영을 위해 파리에 머무르고 있었다. 저녁 10시경인가에 4호선 끝에 있는 오피스텔로 보이는 건물에 갔다. 파리 변두리에 자리를 잡은 캠프는 그야말로 야전 사령부였다. 영화 찍는 일이란 전쟁과도 같은 일을 치루는 일임을 보여주듯 온갖 기자재 더미와 사람이 뒤죽박죽 뒤섞여 있었다. 김기덕과의 만남은 조금 시간이 걸렸다. 감독이 오기 전까지는 제작 부장과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모 유명 여배우가 지금 파리에서 누구와 열애중이라는 이야기도 듣고... 또 기자들이 취재한 이야기도 듣고... 제작 이야기도 듣고... 주지하다시피 예산 탓에 해외 촬영이란 대개 일정이 강행군이다. 게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들이 벌어지고는 하는데 가령 배경으로 찍고 싶은 곳이 관계당국과 주민들의 허락을 받지 않아도 될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게 된 일 같은 것이다. 이런 것이야 영화 에드우드를 보면 될 일이다. 자정 무렵에 온 김기덕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누님의 말대로 그는 전혀 감독 같지 않은 인상이었다. 자신을 감독이라고 말하지 않았다면 촬영 보조기사 쯤으로 여길 만큼 나처럼 동안(童顔)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이야기 도중에도 쉴 사이 없이 소품들을 챙기고 만들고 있었다.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저렇게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시나리오처럼 계획된 어떤 것의 집행이 아니다. 오히려 계획된 시나리오와의 한판 싸움이라고나 할까. 계획과 현실 사이에서 그때그때마다 결단할 수밖에 없는 무수한 상황이 찾아오고 이러한 상황에 부딪쳐서 무엇이 우선인가를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김기덕은 그런 한계 상황과도 같은 작업을 즐기고 있었다, 마치 어린이가 장난감을 만지작거리듯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다행히 평단의 반응이 좋아 후속 작품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고 말을 시작하는 김기덕. 작품을 계속 만들 수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무척 행복해 보였다. 문득 나는 그에게 질투가 났다. 영화 말레나와 같이 동네 남성들이 말레나의 미모에 반해 어떻게 해보려고 하지만, 동네 여성들이 말레나를 강수지, 송혜교, 이승연 대하듯 미워하면서도 그녀의 스타일을 끊임없이 분석하는 것처럼 나 역시도 김기덕을 그처럼 분석하는 것이 아닐까. 왜 나는 김기덕처럼 되지 못했는가. 아아, 나의 게으름 탓이다. 그저 그의 악어를 보고 호평하는 수준이라니. 비록 질투에 눈이 먼 이들이 김기덕 영화에 악평하지만 그들과 내가 다른 차이가 있을 것인가. 나는 이창동이나 홍상수가 박찬욱이 무엇을 만들든, 혹은 그밖의 누가 무엇을 만들든 질투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배창호나 이명세나 허진호, 그리고 김기덕 같은 이에게는 질투가 난다. 나는 질투어린 시선으로 김기덕의 머리 스타일이나 옷매무시를 점검하듯이 그의 영화 세계에 대해 전투적인 질문을 아끼지 않았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 될 것처럼 말이다. 그보다 더 멋진 사람이 되고자, 그보다 더 멋진 작품을 만들고야 말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 악어를 보면 레오 까락스 영화가 떠오른다. 일부에서는 베낀 것이다라고까지 이야기하는데... - 레오 까락스를 존경한다. 관객들이 그렇게 보아준다면 나로서는 영광이다. 이런 발언을 한 사람은 당시에 인드라고 밖에 없었다. 내가 한눈에 알아보았다. 레오 까락스 팬이다 보니... 요즘 같으면 오마쥬다, 해서 넘어갈 것이었지만 당시에는 민감한 일이었다. 이런 민감한 사안에 대해 회피하지 않고 답변하는 것이 바로 김기덕 스타일이다. 날 것. 이래서 사람들이 나랑 김기덕이랑 비교를 잘 하나? 민박집 누님도? 제작부장과도 이야기를 조금 나누었었다. 보통 작가주의 감독이라면 제작사측과 갈등이 상존하는 법이다. 감독이 원하는 필름이 나올 때까지 찍고 또 찍고... 이런 데에 가장 극단적인 형태를 보인 것이 장선우라면, 이명세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어떤 컷 하나 찍기 위해서 배우와 스탭들을 쌩고생시키는 것으로 유명하지 않던가. 이 점에서 배창호도 만만찮으리라. 그렇다면 김기덕은? 그 역시 이 문제를 회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 김기덕은 회피하지 않는다. 그런데 방식이 독특하다. 영화를 찍는데 있어서 시간은 돈이다. 시간을 소비하는 만큼 제작비가 상승한다. 김기덕의 생각은 간단하다. 불필요한 데에 시간을 낭비할 수 없다는 것. 즉 제작진과 다툴 시간이 있다면 그 시간을 영화 제작에 보다 투자하는 것. 에드우드 방식이다. 물론 인드라고 방식이기도 하다. 이렇게 글을 쓰고, 이렇게 잡지를 내고, 만화영화를 만들고, 책을 내었으니까. 자신이 원하는 것이 구체화되어 있다면 다른 문제들이란 부수적인 문제들일 뿐이다. 소소한 문제에 신경 쓸 틈이 어디 있겠는가. 문법 따지려거든, 한국 문법책을 보지, 뭐하러 내 글을 읽겠는가 이 말이다. 사람들은 보고 싶어하는 것만을 볼 뿐이다. 하여, 김기덕은 그 점에 대해 대범하다. 아니,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말인가. 그에게 영화란 인식론적 도구라기보다는 존재론적 도구다. 하여, 그의 영화를 볼 때 장르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 되었다고 본다. 장르에 집착한다는 것은 나의 입장에서, 아니 브레히트 입장에서 비판적이다. 내용을 강조하기 위해 형식의 단일성을 추구하는 이들에 대하여 나는 비판적이다. 후일 정성일과 같은 대부분의 삼류 저질 평론가들의 지적인 유희거리를 만들기 위한 도구가 전부인 이런 짓거리에 왜 내가 끼어 놀아나야 한다는 말인가. 김기덕은 무엇을 보여주었나? 1%를 위해서. 카프카의 비체코적인 언어처럼, 비한국적인 언어로 말이다. 김기덕의 영화는 잠시 일탈을 만끽하는 99%를 위한 영화가 아니다. 잠시 노동운동하다가 대세가 아님을 깨닫고 변호사로, 교수로 간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박찬욱처럼, 이창동처럼, 그리고 박찬욱을 추천한 미국 감독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그의 영화는 스파이크 리와 같은 이를 위한 영화다. 그의 영화는 잠시 1%의 세계를 즐기고, 그 끔찍함을 알고, 재빨리 99%의 대표자인 또 다른 1%로 발길을 돌리는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또한 시골의 자연 풍광을 찬미하고, 시골 사람들의 소박한 인심을 찬미하고, 북한이나 쿠바 사람들의 소박한 마음씨를 찬미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늑대와의 춤을 따위나 쇼생크 탈출과 같은 영화를 좋아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김기덕의 이제껏 영화는 그 1%를 벗어나려 애쓰지만 결국은 벗어나지 못하는 세상에 절망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이다. 유기농법, 귀농운동에 폼을 잡는 애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라 유기농법이니 귀농운동이니 하는 한때의 운동이 역시 폼일 뿐인 것으로 귀결되는 것을 잘 아는 시골 촌로들을 위한 영화이다. 국회의원 되고자, 국회의장이 되고자, 노동조합 지도자가 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가 아니다. 그리고 믿음을 토대로 하는 세상이 아니라 거짓과 위선을 토대로 하는 세상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을 위한 영화이다. 평등한 것이 존재하지 않기에 평등함을 노래하고, 자유로운 것이 없기에 자유로움을 이야기하는 이들을 위한 영화이다. 그렇다면 김기덕은 이런 영화의 모범을 보여주었는가. 아니다. 그는 호평을 받은 동양미가 가득한 영화를 만들기 전까지는 모범적이었다. 그러나 그 영화 이후 그는 스파이크 리처럼 타락해가고 있다. 마이크 리처럼, 빈 벤더스처럼. 내가 그렇게도 싫어하는 헝그리 정신이라는 것이 인위적으로 조성되기는 힘든 것이다. 성공은 이제까지의 작업을 보상하지만, 반면 미래를 향해 열린 문을 점차 닫게 한다. 그러하기에 스파이크 리가 리메이크 판권을 이야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직은 김기덕이 덜 타락하였으며, 참신하니까 말이다. 스파이크 리 입장에서는 김기덕을 통해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고 싶어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 인식론적으로 가능한 일이겠는가. 한때 아메리칸 흑인의 대부로 통했던 그가 왜 오늘날 그래야만 하는 것인가. 모든 것은 타락하며, 죽는다. 한 개인의 타락을 문제삼을 필요는 없다. 문제는 김기덕을 부러워하며 질투하는 자들의 몫인 셈이다. 문제는 김기덕을 쓰러뜨리고 가야할 길이다. 김기덕은 근래 작품에서 날 것을 조금씩 줄이고 있다. 하여, 그의 성공은 갈수록 그가 걸어온 길과는 다른 길을 걷게 만든다. 조금 더 국민을 위한 작품이기를 바랄 것이며, 조금 더 99%를 위한 작품이기를 바랄 것이다. 혹은 절반 정도가 자신을 지지하면 그만일 것이라고 여기고 있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빈집에서 했다는 작업. 스토리가 아닌 이미지로 승부했다는 그것. 나는 아직 빈집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그간 그가 작업한 바를 본다면, 그 이미지라는 정체가 무엇이던가. 자신의 형식이 아니겠는가. 박찬욱도 삼인조 만들던 좋은 시절이 있었다. 반드시 흥행에 참패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보다는 흥행해도 극복할 수 있는, 상을 받아도 이겨낼 수 있는 그러한 모델, 그러한 형식이 가능한 것인가이다. 김기덕, 마냥 좋아할 일이 아니다. 아시아 시장을 겨냥한 유럽인들의 관심사는 끝이 없다. 단순하게는 아시아 시장을 겨눈 것이겠고, 길게 보자면, 중세의 유럽인들이 수피즘에 관심을 가지듯, 중국에 관심을 가지듯, 그리하여 새로운 항로를 구축하겠다는 일념 하에서 그대에게 영광을 수여한 것이다. 김기덕, 그대에게 왜 유럽인들이 관심을 지니는가. 그대의 유럽적 코드 때문인가. 아니다. 그대가 아무리 유럽적 코드로 나가더라도 남아 있는 흔적 때문에 그대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그 흔적에 대해 대한민국 사람들은, 아시아 사람들은 관심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관심이 있을 것이다. 마치 내가 데리다나 아도르노나 맑스 같은 이에게서 그들이 아무리 국제적인 코드로 나가더라도 남아 있는 흔적 때문에 저들을 높이 평가하듯이 말이다. 그 흔적이 보이지 않을수록 나의 관심이 증대된다. 김기덕. 그대와 서울에 가면 연락하여 술 한 잔 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 대신에 이런 말을 해주고 싶다. 김기덕. 이왕 그렇게 타락해 가는 길이라면,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는데, 추락하면서 보는 세상에서 새로운 항로를 찾을 계기가 있다면 이를 다음 영화에서 기대하겠다. 스토리가 없는, 대사가 없는 이미지에 너무 구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짧은 시간 내의 촬영에도 너무 구속되지 않기를 바란다. 그런 것이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다. 김기덕, 그것은 단지 그 당시에 적절하였던 형식이었을 뿐이다.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변화이며, 이제껏 사례들을 통쾌하게 부정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데에 있다. 피카소는 자신의 그림에 평하는 이들을 끊임없이 조롱했다. 발자크 역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말이 많다고 양복 입는 김기덕 감독, 잘 기억하길 바란다. 물론 나는 양복을 입고서 이것은 오히려 양복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이들을 위한 조크입니다,라는 식의 언어 유희로 나가는 것보다는 솔직담백하다고 본다. 하지만 그네들의 관용에 눈물겨운 모습에 어느덧 나는 영화의 죽음을 본다. 해서, 규칙을 바꾸어야 한다. 규칙을 바꾸지 못한다면, 김기덕 감독, 그대는 국제적이기 보다는 여전히 지역적인 명성에 만족해야 한다. 그저 독특한 변방의 감독으로 말이다. 그들의 관용을 역겨워할 줄 알아야 한다. 노예적 삶을 역겨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규칙을 바꾼다면 김기덕으로부터 새로운 영화 시대가 열릴 것이다. 김기덕 감독. 99%를 위해 영화를 만들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 당신이 성공을 거둔 것은 1%만을 위하고, 자신만을 위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결과적으로 99%를 위한 길이다. 생활의 여유가 그대 스스로를 속일지라도, 그것을 아는 이가 설사 그대 혼자일 뿐이더라도 가는 길에 허투름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김기덕 감독의 방식을 칭찬하는 모든 언행들은 모두 김기덕 감독을 죽이는 일이 될 것이다. 누군가 묻는다. - 한국영화란 무엇입니까? 나는 답한다. - 프랑스영화는 무엇이고, 미국영화는 무엇입니까? 영화는 영화이다. 그 앞에 붙는 것 따위에 신경을 쏟는 것 따위란 부수적인 것이다. 영국 영화와 독일 영화 사이에 있는 게 프랑스 영화인가. 그러한 경계는 애초에 누군가의 관념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지하철 막차 시간이 가까워서 아쉽지만 인터뷰를 종료했다. 막차는 1시 30분. 심야의 파리 지하철에서는 이곳 저곳에서 술 취한 절규와 고함 소리가 진동했다. 그 아비규환마저 정겹게 느껴질 만큼 내가 파리지앵인 듯 착각에 빠진다. 그러하니, 이제 파리를 떠날 때이다. 런던으로 돌아가자. 떠나자, 런던으로!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3. 2:47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386065 통계보기 떠나자, 런던으로! 1997년 4월 1일 미국에서 출발하여 오후 4시 55분 서울에 도착하는 싱가포르 항공 비행기가 연착을 하였다. 안내판에는 거의 모든 비행기가 지연임을 알리고 있었다. 안개가 자욱한 기상 악화가 주원인이었다. 시작부터 조짐이 심상치 않은 걸? 유럽으로 가는 할인티켓 중에 가장 저렴하여 싱가포르 항공 티켓을 구입하였다. 조건은 직행이 아니라 싱가포르 경유. 당시 어떤 이들은 일부러 경유하는 티켓을 구입하기도 했다. 경유지에서 호텔 숙박이 포함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 홍콩, 싱가포르 등이 그러하였다. 함께 비행기에 올랐던 신혼부부도 싱가포르 호텔에서 숙박을 하였다. 과연 오늘 떠날 수 있을 것인가 초조하였지만 다행히도 한 시간이 지연된 5시 55분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자, 이제 가는 거야. 떠나자, 유럽으로! 오후 11시 10분에 싱가포르 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기를 바꾸어 타야 한다. 이 절차를 번거롭게 여기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언어 소통이 안 되어서 자칫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기 때문에. 나 역시 주의를 하여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를 찾는데... 이런! 서울에서부터 연착하는 바람에 변경이 되었다고 하지 않은가. 순간 당황스러워서 어찌할 줄 몰랐는데... 싱가포르 항공 부스에 가서 티켓을 보이며 어쩌면 좋냐 하니 다른 비행기로 바꾸어준다. 자고 갈래? 해서 아니다, 그냥 가겠다 하니 네덜란드 암스텔담 공항행 티켓을 끊어주는 것이다. 그렇게라도 가겠냐는 것이다. 그것이 최단 시간 내에 가는 것이라면 가겠다 하여 암스텔담 공항행 비행기를 탄다. 신혼부부는 이왕 연착된 것 싱가포르 호텔에서 하루 숙박하며 다음 직행 비행기를 타겠다고 한다. 잘 가라. 예정에도 없던 암스텔담 행 11시 50분 출발 비행기를 탄다. 잠이 오지 않는다. 다행히 싱가포르 항공 좌석은 바로 앞에 게임과 영화를 동시에 볼 수 있는 서비스가 있었다. 영화는 최신영화로서 한국에서는 개봉이 안 된 작품도 있는 등 골라볼 수 있었다. 특히 감동스런 서비스란 안내하는 아가씨가 내가 무엇을 필요로 하면 와서 무릎을 꿇고 서비스이다. 내가 마치 왕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콧대 놓은 젊은 아가씨가 저자세로 나를 올려다보다니... 이 느낌이란 여성들이 잘 모르겠지만, 남성들은 잘 알 것이다. 감격스럽다. 음... 이래서 싱가포르 항공이 일등 항공사였구나... 식사가 나온다. 와인과 함께 간단한 식사를 즐긴다. 와인이 맛있다. 자꾸 시켜먹는데 좀 미안했다. 맛있는 것을 어쩌라고... 다른 이들이 식사를 마치고 잠이 들 때 나는 잠이 들지 않았다. 아, 이제 내가 유럽으로 간다는 말인가. 아직 실감이 나지 않은 것이다. 도대체 이 질기고 질긴 유럽 사대주의의 잔재는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태어난 이후 나는 줄곧 계몽주의 사조에 길들여져 있었으며, 계몽주의의 본고장은 유럽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태어났음에도 언제나 내 고향은 유럽인 듯 유럽을 노래했다. 그런 유럽을 간다? 나는 냉정해져야 했다. 기지촌 지식인의 전형인 내가 유럽을 간다는 것 자체가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마치 영화 A.I에 나오는 로봇의 신세랄까? 프로그램대로 살아왔는데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 로봇. 그 로봇은 고향을 찾고, 자신을 찾고자 한다. 사실은 엄마를 찾는 것이지만. 모국으로 가자. 유럽으로! 생각해 보라. 얼마나 짜릿한가. 유럽에는 나의 친구들이, 나의 사촌들이, 나의 가족들이 있을 것이다. 맑스도 있고, 카프카도 있고, 데리다도 있고, 발자크도 있고, 까뮈도 있고... 한국에는 없는... 마음 속으로 노래를 불렀다. 내게 이 행복이 영원할 수 있도록... 다른 이들은 모두 자는데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찌 이 황금 같은 시간을 잘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대여. 아는가. 뿌리를 찾아가는 나의 기쁨을... 역겹기 짝이 없는 한반도를 떠난다는 것 자체만으로 얼마나 기쁜가. 그런데 유럽으로 가다니... 떠나 다시 오기 싫었다. 내심 망명할까 하는 생각으로 이리 저리 궁리도 하면서 밤을 새었다. 어느덧 비행기는 암스텔담 공항에 도착하였다. 아침 아홉시. 암스텔담 공항은 초현대식이었다. 싱가포르 공항에서 약간의 문화적 충격을 받아서 완화가 되어서 그러하지, 암스텔담 공항은 관료적인 김포공항과 달리 인사동에 온 것 같은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잠시 스테이하는 승객들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것일까. 나도 모르게 암스텔담에는 반드시 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11시 45분 영국행 비행기를 탔다. 예정에 없던 일정이다. 원래 싱가포르를 경유하여 런던에 가는 일정이었는데 네덜란드 암스텔담을 거쳐서 영국 런던에 가는 것이다. 잠을 한숨도 자지 않았지만 긴장하면 잠이 오지 않는 습관 탓에 피곤하지는 않았다. 무엇인가가 나를 기다리는 듯하다. 이 직감이란 때로는 무섭다. 왜 내게 이런 느낌이 오는지는 모른다. 다만 살면서 가끔 무서울 정도로 찾아온다. 어떤 때는 격렬하게 거부도 하고... 그래서 내가 더더욱 이성을 찾는지 모른다. 영국 비행기의 스튜어디스는 젊은 아가씨가 아니다. 모두 아줌마였다. 미모라는 이미지보다 능력이라는 실속이 우선이었다. 짧은 비행시간 탓에 식사도 제공이 되지 않는다. 서비스는 사실상 제로였다. 그러면서 생각한 것은, 왜 동양 비행기에서는 지나친 서비스를 하는 것일까 싶었다. 왜 젊은 아가씨만이 스튜어디스를 해야 하는 것일까 하는... 여기서부터 해방이다. 그렇다. 왜 스튜어디스를 젊은 아가씨만이 해야 하는가. 그래. 아줌마들이 하면 어떠랴. 그 열정이 더 고스란히 다가온다. 못 생긴 아줌마가 열정적으로 플라멩고를 하는 그런 포즈... 여기에 더 박수를 보내는.. 보다 본질적인 느낌이 드는... 이쁘면 더 좋겠지만. 극대화한 차이를 느끼고 싶은 것일까. 분명하게 대비되는... 드디어 영국 히드로 공항에 도착하다. 암스텔담에서 연락한 탓에 지인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동행했던 한국인들과는 이별. 건축 전공하며 내게 관심을 보이던 아가씨... 안녕! 뉴 몰든으로 간다. 영국 런던. 자동차 키는 물론 자동차 핸들까지 뽑아야 안전이 보장되는 현실로 돌아오다. 영국에서는 아무 데다 자동차를 세워두면 차를 훔쳐가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아, 미스터 빈에서 빈이 영국식 티코인 차 핸들을 뺄 때 단지 영화라고 여겼었는데 실제로 그렇구나... 여기서부터 문화적 차이를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잘 왔구나. 런던에 오길 잘 했구나. 처절하게 여기서부터 기지촌 지식인의 전형을 무너뜨리자. 모오든 선입견이여 가라. 뉴몰든에서 빨간 2층 버스를 타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4. 1:37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425100 엮인글 3개 통계보기 뉴몰든에서 빨간 2층 버스를 타다 1997년 4월 2일 1996년 투자 활성화 조치 일환으로 개인의 주택 구매와 임대가 쉬워지면서 실거주보다 투자 목적으로 주택을 매매하는 소비자들이 증가하였다. 십년 간 부동산은 세 배 가량 올랐다. 물가 인상과 금리 인상으로 최근 가계부채 증가로 인한 경제 침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한국의 이야기가 아니다. 영국의 이야기다. 뉴몰든에서 하루가 지났다. 히드로 공항에서 뉴몰든까지 차를 타고 왔는데 외곽 순환도로를 타고 왔다. 지금이야 아하! 하고 받아들이겠지만, 당시 외곽 순환도로라는 것이 없었기에 상당히 괜찮은 시스템으로 여겼다. 도심을 통과하지 않고 주변부에서 주변부로 가니 교통난 해소에 도움이 된 것이다. 또한 차들이 가는 도중에 가끔 속도를 줄였다. 왜 그러냐 했더니 무인속도측정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에 역시 한국에서는 낯선 방식이었다. 얼마 후에 물론 도입되었다. 런던은 서울과 지형적으로 비슷한 듯싶다. 템즈강을 끼고 남북으로 나눠진 양상이다. 뉴몰든은 런던의 서남부에 위치하고 있는데 서울과 비교하면 어떨까? 위치로만 따진다면 금천구 독산동 쯤 되는 듯싶다. 주변에 괜찮은 학교들이 많아 학군이 좋고, 고급 주택이 있다는 점에서 양천구 목동이고, 지하철 윔블던 역에서 내려 기차나 버스로 갈아타서 이십여 분 정도 걸린다는 점에서는 당산역에서 그만큼 시간이 걸리는 강서구 염창동이나 가양동쯤 되는 지역이다. 뉴몰든에는 약 2만명 가량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 전체 거주인이 4만명이라고 하는데 절반이 사는 셈이어서 유럽 최대의 한인촌 뉴몰동으로 불리기도 한다고 한다. 몰든 의미가 언덕을 가르다라고 하며, 평지가 대부분인 영국에서 언덕이 있다는 것은 고급 주택지를 의미한다. 언제부터 한인이 이곳에 거주하게 되었을까? 지인한테 들은 바는 이곳은 유태인이 살던 곳인데, 이후 일본인이 거주했다가, 삼성 주재원이 뉴몰든에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한인촌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뉴몰든 저택들은 어떠할까. 검색하면 여러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는 아파트 투성이라면 뉴몰든에서는 단독주택 투성이랄까. 똑같은 모양을 한 단독주택들 단지라고 보면 된다. 나는 뉴몰든의 주택에서부터 영국인의 보수성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전통을 매우 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과 다르다. 그들은 오래된 것일수록 높이 평가한다. 한국인은 막 새로 생긴 가게를 선호하지만, 그들은 since XXXX에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보는 영국인이란 유지 보수가 삶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였다. 그들은 똑같이 생긴 주택에 살면서 어떻게 유지 보수를 하느냐에 따라 자신들의 개성을 살린다고 보는 듯싶었다. 뉴몰든이 한인촌이라 하여 한인들만 거주한다고 여기면 오산이다. 길가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은 한인보다는 영국인이다. 다만 다른 지역에 비해 한국인을 만날 확률이 더 높다는 것이며, 한인 가게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많다는 것이다. 뉴몰든 기차역은 간이역이다. 간이역에서 나와 걷는 도로가 뉴몰든 번화가인데 이곳에 한인 가게들이 조금 있다. 한국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한국은 자영업자 비율이 굉장히 높은 반면 유럽은 자영업자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번화가라고 해봐야 해만 지면 어두컴컴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나마 이곳에 가게들이 있다는 정도다. 주택지역에는 주택 외에 거의 아무 것도 없기에 상대적인 의미에서 번화가라고 하는 것이다. 그대는 런던에 오면 무엇부터 하고 싶은가. 나는... 웃기지만, 빨간 2층 버스를 타고 싶었다.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여간 런던에 가면 2층 버스를 타보고 싶었다. 2층 버스 2층에 올라 거리를 내려다 보는 기분이란 어떨까? 하하하. 조심스럽게 도심으로 향했다. 2층 버스를 타고... 아무래도 처음 내딛는 행보인지라 모든 것이 신중했다. 실수하지 않을까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차장이 인도계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돈 가방으로 보이는 가방을 둘러매고 있었는데 시종 긴장한 모습이었다. 인도계 사람들은 런던을 다니면서 많이 보았다. 한국으로 치면 지하철역 복권판매소와 같은 곳은 여지없이 인도계 사람들이다. 인도계인지 어떻게 아느냐? 그들은 인도식 터번을 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내 관심은 그가 인도계냐, 아니냐보다는 계급적 분별에 있었다. 제국의 심장부답게 확연한 계급 구분을 가시적으로 볼 수 있었다.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에서는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느냐 싶은 것을 아무렇지 않게 행하고 있다고나 할까? 차장은 승객이 어디까지 갈 것인지 주의 깊게 관찰하는 듯싶다. 현 시점에서 보자면, 교통카드로 해소시킬 간단한 문제이지만, 바로 이런 기술적인 해결 이전에는 사람이 대행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아메리카 대륙 개발은 아프리카인의 노예 수탈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그렇다. 바로 이것이 맑스가 주목한 것이 아닌가. 맑스가 런던에서 주목한 것. 원시적 축적. 자연스럽게 보이는 자본주의제가 사실은 그 시초에서는 너무나 폭력적이었다는 것이다. 조폭이 기독교에 교화되었다면서 예수 사랑 전도사하며 착한 사람 노릇을 한다지만 믿을 수 있냐는 것이 맑스의 질문이다. 태생적으로 문제가 많은데 지금 그럴 듯하게 보인다고 끝까지 가겠냐는 것이다. 저 차장의 모습을 보라. 저 차장의 안타까운 모습을 기계로 대체한들 달라질 것이 무엇이던가. 그렇다. 우리 눈앞에 없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만을 중시한다. 체육복 차림의 아가씨가 도심에서 내린다. 당시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도심에 나가는데 동네 패션 차림으로 나가냐? 오! 이럴 수가... 역시 선진국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만. 한국에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옷차림으로, 당당하게, 자기 멋으로 나갈 수 있다니... 나는 한국의 화려하지만 획일적인 도심 패션에 비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환상은 하루도 지나지 않아 깨졌다. 패션 트랜드라는 것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운동복 패션이 유행이었고. 그 다음에는 노숙자 패션이었고. 유럽에서 시작한 것이 미국을 거쳐 일본에 상륙하고, 한국에 와서 중국으로 넘어가는... 하하하.... 십년이야, 십년이라고! 패션 이야기가 이왕 나오는 김에 하나 더! 스웨터나 잠바를 허리에 묶고 다니는 패션이 한때 유행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이 패션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 기원 역시 유럽이었다. 유럽 날씨가 변덕스럽다. 낮에는 더운데 밤에는 또 왜 이리 추운지... 게다가 비가 올 듯 말듯한데 안 오기도 하고, 소낙비가 내리기도 하고... 날씨를 가늠할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러므로 두껍게 옷을 걸치고 나갔다가 날씨가 화창하여 더우니 입던 옷을 벗어 허리춤에 묶은 것이다. 이처럼 오로지 실용적인 옷차림이 바다를 건너니 형식만 남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다. 패션의 본질이 아닌가. 운동복 패션이나 노숙자 패션 모두가 그렇지 않은가. 그간 주목하지 않은 일상에 눈을 돌리면서도 무극의 장동건처럼 노예여도 멋있는, 헝그리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까. 알 수 없다, 패션의 문외한이... 다만, 앞으로의 패션 동향은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흐름으로 가지 않을까. 그대들이 그간 경멸해왔던 패션이라면 언젠가는 패션의 중심이 될 것이다. 그 타이밍이말로 전문가의 안목이겠다. 갑자기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는 영화를 보고 싶은가? 하하하. 차이나 타운을 가다.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식민 경영에서 시작되었다는 유럽 차이나 타운은 흥미롭다. 도시의 변두리가 아닌 중심부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평가를 받는 식문화로 도전하는 차이나 타운. 화교의 시스템이 놀랍다. 배제와 추방이라는 유대 문화와 엇비슷한 차이나 남방 문화에서 많은 교훈을 얻다. 그런데 볶음밥이 왜 이리 비싼가? 제일 싼 볶음밥을 주문했는데 8천원... 음냐. 한국에서는 그보다 많이 재료가 들어가고도... 하루 종일 런던 도심이 어떨까 걸어 다니다 뉴몰든으로 돌아왔다. 서서히, 차분히 대륙 진출을 꿈꾼다.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스탕달 신드롬을 앓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5. 3:08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461438 통계보기 런던 국립미술관에서 스탕달 신드롬을 앓다 1997년 4월 3일~ 4월 4일 런던에는 휴지통이 없다. 테러 예방 때문일까. 길거리가 그리 깨끗한 편이 아니다. 어제는 특별히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정하지 않고 온종일 도심을 돌아다니기만 했다. 오늘은 목적지를 정한다. 바비칸을 간다. 이곳은 깨끗한 편이다. 일설에는 주민들의 자부심이 커서 자발적으로 주기적인 청소를 한다고 한다. 이곳에서 foyer music을 듣다. 극장 로비 등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는 음악이란 어떤 것일까. 음악 듣기와 장소는 밀접한 관계일까. 단지 장식적일 것 같은, 별 같잖은 영역에까지 무엇인가 의미를 부여하는 노력이 가상하다. 오전에 바비칸을, 오후에는 대영박물관에 간다. 직지심경도 구경하고, 이집트 미이라, 로마 청동상 등을 차례로 본다. 처음에는 제국 심장부에서 박동하는, 아직도 여전히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임을 웅변하는 전시물들을 보면서 감탄한다. 그러다 갈수록 무엇인가 울적해지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통째로 가져왔구나. 그렇다면, 이집트에서는, 그리스에서는 없겠네. 이집트와 그리스 유물이, 로마 유물이 그들 손에 있다면 과연 이처럼 훌륭하게 보관할 수 있었을까. 그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을 수 있었을까. 가령 한국 도공의 실력이 일본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무슨 말이 나왔을까. 한국은 여전히 유교적인 나라다. 아직도 정치공학이란 말을 사용할 만큼 사농공상에 투철한 나라다. 정치공학이란 말은 부정적인 의미다. 정치라는 긍정적 용어에 공학을 넣어 부정적 표현으로 사용한다. 공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정치공학에는 어떤 공학도 개입되지 않는 것을 목도한다. 그저 몇 가지 간단한 산수를 도입하는데 이를 공학이라고 한다니 공학도로서는 참으로 우습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이것이 이 나라 현 수준인 게다. 정치공학을 처음 사용한 자는 아마도 정치과학이라는 말을 쓰기에는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이다. 해서, 만만한 게 공학이었던가. 공학이란 말이 쓰이기 전에는 술수, 잔머리 등이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는 유교가 지배 이념으로 확립되기 이전에, 즉 한나라를 중심으로 보는 중화사관이 성립하기 이전에 춘추전국시대의 이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념은 유교사관 입장에서 비판당하지 않을 수 없겠다. 허나, 어떠한 지배 이념이건, 심지어 유교조차도 지배적인 이념이 되기 위해서는 투쟁이 필요하며, 집권을 요구한다. 정권 장악 기술은 정권을 쥔 자 입장에서는 언제나 반역적일 수밖에 없다. 자신도 비주류일 때, 야당일 때 활용하였으면서도 막상 권력을 쥐면 그 누구보다도 그 심각성을 깨닫는다. 해서, 과학이 아니라 공학인 게다. 과학이라면 무언가 뉴튼이나 아인쉬타인의 구상이 포함된, 말 잘 하는 이들만을 위한 것이지만,공학이라면 구상이 결여된, 육체노동자의 단순 무식성만이 각인된다. 굳이 따지고 보자면, 나는 정치공학의 선두주자로서 모택동을 든다. 그는 삼국지를 애독하고 써먹을 만큼 삼국지주의자였다고 한다. 오늘날 인터넷 정치 웹진에서 툭하면 나오는 것이 삼국지이고, 제갈공명이다. 해서, 나는 제안하는 것이다. 정치공학이라 하지 말고, 삼국지학이라고 하자. 정치공학이란 말보다 삼국지학이 훨씬 더 지시하는 대상에 접근하고 있다고 여기지 않는가. 다음 날에는 oneday trabler ticket을 산다. 런던이 타 도시에 비해 관광객들에게 좋은 점 하나는 유명 박물관, 미술관이 무료라는 것이다. 해서, 고려될 사안은 이렇다. 가령 서울 시내 모든 공사립 박물관, 미술관을 특별전을 제외하고 무료로 하든가, 아니면 프랑스 파리처럼 박물관 티켓을 만드는 것이다. 일일 티켓, 혹은 위클리 티켓을 만들어 저렴하게 제공한다면 관광객들은 가격 대비해서 보다 만족스런 관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런던 국립미술관을 가다. 이곳에서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을 만난다. 이 작품을 보자 나는 그만 스탕탈 신드롬에 빠졌다. 왜 그랬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주저앉고 말았다. 한 시간 동안 멍하니 이 작품만 바라보았다. 왜 그랬을까. 이 때문인지 몰라도 다음날 나는 아무런 기운도 낼 수 없어 지인 집에만 머물렀던 것이다. 마음이 아프고, 몸이 아팠다. 국립 초상화 박물관을 갔다. 그곳에서 존 레넌과 오노 요코의 나체시위 사진도 본다. 임바크 공원에서 잠시 머문다. 임바크 공원은 템즈 강변에 위치하고 있다. 매점에서 산 빵으로 점심을 먹는다. 이곳에서 수많은 직장인들이 나와 끼니를 해결하고 있었다. 직장 동료끼리 나와 햄버거 같은 것으로 식사를 해결하면서 햇살을 만끽하고 있었던 것이다. 테이트 갤러리에 가다. 영국 미술과 현대 미술 작품을 주로 전시하는 미술관이다. 작가별로 전시되기 보다는 주제별로 되어 있어서 어떤 면에서 나와 같은 관객에게는 흥미로운 전시방법이었다. 미술관에서 그림을 그리는 미술학도는 어느 공간에서나 만난다. 심지어 초등학생도 앉아서 그림을 그린다. 이런 것이 진정 미술 교육이 아닐까. 살아 있는 교육 말이다. 마지막으로 자연사 박물관을 둘러보다. 테마파크에 온 줄 알았다. 정말 대단하다. 이래서 선진국이로구나. 왜 한국에서는 이런 자연사 박물관이 없을까. 기껏해야 똑같은 역사박물관 따위나 짓는 식민지 콤플렉스를 보일까 싶다. 아는가. 영국이나 프랑스에서는 인류학, 과학 다큐멘터리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반면 한국에서는 다큐하면 푸대접을 받는다는 것을 말이다. 왜 한국인들은 다큐멘터리에 관심이 없을까. 왜 진정한 역사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국사학 따위의 파시스트 학문에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일까? 노무현 정권에 이르러서는 숨이 막힐 지경이다. 왜 그들은 진실을 두려워하는 것일까? 조작하면 다 속일 수 있다고 정말 믿는 것일까? 나는 용산 지구에 자연사 박물관이 들어서기를 고대하였다. 허나, 어쩌랴. 이 나라 수준이 고작 그 수준인 것을. 해서, 이 나라는 여전히 원칙이 없는 나라다. 존재할 필요가 없는 나라인 게다. 런던 펍에서 영국인과 술을 마시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6. 2:1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501782 엮인글 2개 통계보기 런던의 펍에서 영국인과 술을 마시다 1997년 4월 6일 하루를 푹 쉰 탓에 몸 상태가 다소 호전되었다. 런던 도심으로 간다. 내가 가본 파리나 로마, 베를린과 같은 대도시는 인종 전시장이라 할만하다. 그중에서 런던이 특히 유난했다. 트라팔가에서는 거지 신문을 파는 거지를 만났다. 정말 거지가 신문을 파는구나. 이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가장 언론인다운 언론인은 거지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가장 낮은 위치에서 세상을 올려다보는 것이야말로 언론이 가야할 길이 아닐까.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여서 언론이 권력과 유착하여 세상을 내려다보니 여기저기서 언론은 죽었다고 나오는 것이 아닐까. 피카디리 서커스에서는 한 흑인 청년이 드럼을 치고 있었다. 매우 인상적이었다. 해서, 후일 드럼라인이라는 영화가 나와 볼 때 불현듯 이 흑인을 떠올리기도 했다. 레스터 광장은 대학로, 혹은 홍대 앞과 비슷한 곳이다. 여기서는 많은 이들이 퍼포먼스를 한다. 백인 남성이 작은 의자 위로 올라가서 무언가를 열심히 이야기하고 있다. 마블 아치 앞 연설자 코너 흉내를 낸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들 관심이 많았다. 이유는 그 앞에 한 흑인 남성이 정열적으로 그 남성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상황인지, 아니면 연출된 퍼포먼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삐에로 복장을 한 이가 길을 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괴롭히는 장난을 친다. 재미있다고 삐에로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바이올린 협주곡을 연주하던 거리의 악사와 주로 동양인 여성만 그리던 거리의 화가도 빠질 수 없겠다. 거리의 화가들이 브래트 피트 그림을 많이 전시해놓았다. 브래드 피트 인기가 상당함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이 줄지어 서 있다. 무슨 일일까. 해서, 일단 줄을 섰다. 알고 보니 코미디 클럽에 입장하는 줄이었다. 요즘 같으면 당연하게 여겨질 터이지만, 당시에는 신기해서 한번쯤 구경해보고 싶어졌다. 말 그대로 클럽이다. 한쪽은 간단히 맥주를 마실 수 있는 구조이고, 다른 한 편에는 작은 무대가 있다. 관객은 맥주를 마시면서 코미디 공연을 보는 것이다. 맥주를 마시면서 락 밴드 공연을 보고 듣는 것과 같다. 관객은 99% 백인들이었고, 어쩌다 들어온 나만 유색인종이었다. 알아들었느냐고? 애초에 기대하지 않았기에 부담 없이(?) 보았다. 주로 말로 하는 스탠딩 개그이긴 해도 동작을 많이 오버해서 한다. 주제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였다. 한국 개그와 비슷한 듯싶다. 중고등학교를 나온 사람들이라면 다 알만한 고전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패러디하는 양식인 게다. 전쟁과 평화... 나폴레옹을 공동 적으로 하는 영국과 러시아. 안드레이와 삐에르와 나타샤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는데... 오드리 헵번... 나타샤...? 프랑스인을 놀려먹기에는 딱 좋은 고전이 아닐까 싶다. 007 영화 2편 007-From Russia With Love (007 위기일발)은 역대 007 영화에서 수작으로 종종 꼽히는 영화다. 이 영화가 대박을 쳐서 007 시리즈가 연이어졌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본드 역으로는 스코틀랜드 출신 숀 코넬리이고, 본드걸 타티아나 로마노바 역으로는 이태리 출신 다니엘리 비앙키가 맡았다. 이안 플레밍은 2편의 본드걸을 북구 유럽형 미인인 그레타 가르보로 묘사하였다고 한다. 이와 가장 비슷한 다니엘리 비앙키가 오디션에서 선발되었고... 타티아나 로마노바는 터키 주재 소련 암호부 여직원으로 007과 사랑에 빠진다. 전쟁과 평화를 007 영화 식으로 재해석했나? 뭐, 더 이상은 무리... 나타샤가 타티아나로 변신하고, 삐에르가 007로 변신을 하는... 러시아 마지막 황제인 로마노프가 네 딸 중 한 명의 이름이 타티아나 로마노프. 이안 플레밍이 작명하면서 혹 Tatiana Romanov를 연상했던 것은 아닐까? Romanov에 단지 a 철자 하나 붙였을 뿐이니... “타티아나는 1897년 5월 29일 니콜라이 2세와 알렉산드라 황후의 두 번째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형제들 중 그녀의 어머니와 가장 많이 닮았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우아한 아름다움을 갖춘 매력적인 여인이었고,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타티아나는 큰언니인 올가를 무척 따랐다고 합니다. 또한 그 둘은 마치 한 쌍처럼 떨어지지 않고 언제나 함께였다고 하네요. 타티아나 역시 세계 1차대전 때 언니와 어머니를 도와 병원에서 일했었습니다. 마음고생이 심해서였는지, 그녀는 그 당시 매우 말랐었다고 하네요. 그녀 역시 다른 가족들과 함께 20살의 어린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 ‘잊혀지지 않는 레몬’의 로마노프 왕조멸망 당시의 니콜라이 2세의 가족들 글 중에서“ 저녁에는 지인이랑 지인과 인연이 있는 영국인과 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철학을 전공하였고, 영어 교습 자격증이 있어 학원에서 강사를 하고 있었다. 키가 크고, 지적인 얼굴이어서 만일 이 친구가 한국에 간다면 엄청난 인기를 누리지 않을까 여길 정도였다. 그의 애인은 스페인 여성. 주변에서 스페인 여성과 사귄다고 다들 부러워한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 중에 흥미 있는 이야기 몇 가지. 하나, 영국인은 왜 미국을 비판하길 즐겨하고, 싫어하는가. 그의 해석은 일부 영국인이 과거의 영광을 잊지 못한 데서 연유한 영국인의 콤플렉스다. 어떤 영국인이 미국과 미국인을 비판할수록 그는 내면적으로 미국 콤플렉스가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식의 사고는 대안을 만들지 못하고, 퇴행만 부추긴다. 그는 동양인 친구들을 앞에 두어서인지 중심부가 주변부를 많이 착취하고 있다는 종속이론 비슷한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선택적인 삶에 비판적이었고. 운명적인 삶에 호의적이었다. 하버드 출신으로 레이건 정권 때 미국 운동권이었다는 현각 스님 글 읽으면서 느꼈던 인상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는 자신이 속한 문명에 부정적이었다. 그렇다면 나는? 나 역시 내가 속한 문명에 부정적이니... 바로 이러한 데서 보편적 지평이 열리는 것이 아닐까? 우리는 술을 많이 먹었는데 취하지 않았다. 모처럼 즐거운 술자리였다. 인생의 목적은 사는 것에 있다. 내일의 행복을 기대한다면 오늘의 행복에 듬뿍 취하라. 파리에서 칼레를 경유하여 런던에 가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7. 3:5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539348 통계보기 파리에서 칼레를 경유하여 런던으로 향하다 1997년 5월 20일 런던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하얀집 누님과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 한 채 유로버스를 타기 위해 이른 아침 3 ducks hostel로 향했다. 약 40일 만에 다시 보는 호스텔. 여행 초기 설레였던 추억을 되새기며 지나온 나날을 잠시 생각한다. 그때 로마에서 만났던 일본 여학생과 재회했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날아온 그녀. 나를 다시 만날 줄 몰랐던가. 무척 당황하는 기색이었다. 어찌할 줄 모르고... 인사를 하는데 황급히 인사를 받더니 도망치다시피 자리를 피하는 것이다. 그러게 그때 말 한마디라도 남기고 떠날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이리 좁은가. 유럽이 좁은 것인가. 혹 스웨덴인 장이 있나 찾았지만 그는 없었다. 아침이어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이제 떠나야 한다. 유로버스를 탄다. 이제 칼레로 가는 것이다. 런던에서 파리로 올 때는 유로스타를 타고 왔고, 파리에서 런던으로 갈 때는 페리호를 타고 간다. 둘 다 경험하고 싶었기 때문에. 칼레항. 유로버스 기착지가 아니기에 칼레를 둘러보지 못했다. 다만 파리에서 칼레까지 버스로 왔기에 풍경을 구경할 수 있다. 칼레는 영국 도버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의 항구 이외에 의미 있는 지역이다. 칼레는 백년전쟁 당시 영국에 점령당하였으며, 그리하여 로댕의 칼레의 시민이란 작품이 나왔고, 노블리스 오블리제(가진 자의 도덕적 의무)의 효시로 거론되기도 한다. 또한 칼레의 기적으로도 유명하다. 축구 4부리그 아마추어팀인 칼레가 프랑스 FA컵 결승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어쩌면 한국의 월드컵 4강 진출보다 더 의미 있는 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칼레이지만, 내게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좌파 해방구라는 것이다. 왜 이곳은 좌파 해방구일까. 칼레의 역사 때문일까. 좌파는 과연 어느 지역에서 융성하는가. 접경지대가 아닐까. 한반도에서도 평안도, 함경도, 특히 함경도 지방에서의 좌파 활동이 활발했다는 기록을 접했을 때 드는 생각이다. 아마도 경계인적 인식이 싹트기 때문이 아닐까. 이쪽도 아니고, 저쪽도 아니면서, 지난 625때처럼 어느 한 쪽을 강요당했던 배반과 좌절의 역사를 겪었기에 좌파 지역이 된 것은 아닐까. 다만, 이런 유구한 전통의 좌파지역이 극우파 지역으로 변모한 현실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인다. 왜 좌파 지역민이 극우파에 환호하게 되었을까. 이번 대선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던 듯싶다. 프랑스 마초의 고향인, 프랑스 좌파의 불모지인, 한국으로 보자면 부산쯤 되는 리옹에서는 뜻밖에도 루아얄이 선전한 반면, 칼레는 이전 선거에서 극우파 르펜에게 손을 들어준 것처럼 사르코지에게 환호했던 것이다. 또 다른 접경지, 알사스와 함께.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일까. 나로서는, 감히, 이런 추측을 해본다. 칼레나 알사스는 과거 누리던 변경지역으로서의 수혜가 사라졌기 때문이 아닐까. 알기 쉽게 이해하자면, 지정학적 이해라는 것이다. 가령 한반도가 분단하였기에 따르는 고통이 무엇보다 크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지정학적 안보 우산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남북 대치 상황은 역설적으로 체제경쟁을 이끌어내어 유무형의 이익을 끌어올 수 있었다. 하여, 이러한 때에는 좌파가 주도할 것이다. 저항하였기에, 저항의 도시로서 상징화되었기에, 예루살렘처럼 효과를 본다. 그러나 만일 더 이상 남북 대치 상황이 아무런 시사적 의미를 줄 수 없다면, 전시 효과는 사라지고 만다. 오로지 분단에 따른 고통만 남을 때, 과연 한반도인은 어떤 선택을 할까? 칼레의 선택일까? 나는 오늘날 좌파의 침체와 무능을 이처럼 진단하는 편이다. 물론 이와 같은 진단이 독자적 산물은 아니다. 자유주의자인 왈라스틴의 저서를 비판적으로 읽고 그간의 구상을 보다 체계화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으로 유럽 사민주의라는 변경지대도 역시 몰락한다는 주장을 편다. 전시장이 사라진다는 게다. 이를 한반도에 대입한다면, 아직은 북한 김정일 정권이 있어서 한편으로 전시 효과를 누리기도 하지만, 이미 그러한 전시 효과는 중국의 등장으로 말미암아 상당히 의미가 축소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해서, 한나라당조차도 요즘 방북 쇼를 연출하지 않은가. 무엇보다 현재의 전선은 중동이며, 근래 가장 유력한 음모설은 미국의 대이란 전쟁설이다. 어떤 이는 이미 초읽기에 들어갔다고도 주장하고 있다. 국제 유가가 오르는 이유를 달리 해석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여간 세계체제는 전쟁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에. 해서, 어정쩡한 상황이 지속되고, 레임덕을 겪어야 할 노무현을 강력 지지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자니 국내 정세가 너무 악화되어, 워낙 약점이 많아 오히려 안심인 만만한 이명박 지지도를 한껏 높여 정국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심지어 유시민, 이해찬마저도 아직은 아니야, 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정국 구도를 만들어가고 있는데... 영국도 이러할까? 칼레에서 페리를 탄다. 북구를 오가는 실자라인 호화판 유람선보다 한 단계 아래인 배였다. 예전에 인천에서 제주까지 가는 배를 탄 적이 있는데 비슷하다고 할까. 배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남아 있는 프랑스 동전을 아낌없이 다 쏟아 붓는다. 나 같은 이들을 잘 포착한 것일까. 돈이 될 만한 것이라면 그들은 놓치지 않았다. 도버에 도착한다. 도버에서 영국 출입심사대는 상대적으로 매우 엄격한 듯싶다. 국경을 넘는 일이 처음이 아니어서인지 긴장이 풀렸었는데 출입국 심사원의 예상치 못한 날카로운 질문에 답변하느라 매우 힘들었다. (여러분은 내가 영어를 꽤 한다고 여기겠지만, 전혀 아니다~. 대학 입시 공부 할 때 한 영어 실력이 전부다.) 도버 역시도 유구한 도시지만 아쉽게도 통과하고 만다. 이제 런던이다. 도버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이나 파리에서 칼레로 가는 길은 의외로 심심하다. 축복받은 프랑스 땅은 보르도 지역 정도인 듯싶게 관불더미만 보이는 지루한 풍경이었고, 도버에서 런던으로 가는 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런던 교외에서 런던으로 접어들 때에는 달랐다. 무엇으로 비교할 수 있을까. 스위스 루체른, 취리히, 바젤 루트로 파리로 돌아올 때의 풍광에 비해서는 확실히 멋지다. 런던이 세계적인 녹지 보유를 자랑하는 것이 실감이 났다. 드디어 런던이다. 막상 런던으로 접어들자 이 여행도 마침표를 찍어야만 하니 착잡함이 밀려온다. 이제 끝인가... 아직은 끝맺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하는 안타까움 때문일까. 런던의 풍경이 더욱 아름답다. 이제 다시 일상으로의 북귀란 말인가. 아... 내게 이제 이런 시간이 언제 다시 허락될 수 있는지... 지나온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가니 어느새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까지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8. 3:20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574172 통계보기 하이델베르크에서 뮌헨까지 1997년 4월 29일 트리에에서 나와 하이델베르크로 향한다. 기차는 라인 강변을 따라 달리고 있다. 기차가 본에 도착하자 나는 갑자기 본이 보고 싶어졌다. 왜일까? 대부분은 베토벤 생가가 있다는 이유가 아닐까. 비는 내리고... 도대체 어디에 박혀 있는 것일까. 찾다 결국 포기하고 기차 시간 때문에 돌아오고 만다. 베토벤. 그래도 내 인생에서 의미가 있는 사람인데... 청소년 시절에 다들 데미안에 빠져 있을 때 나는 로망 롤랑의 장 크리스토프를 애독하였던 것이다. 이 책을 도대체 몇 번을 읽은 것일까. 읽고 또 읽고... 로망 롤랑 덕에 맑스도 알게 되고, 베토벤도 알게 되고, 또 전기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를 알게 되었다. 이 시기의 나는 사람 만나는 것보다 책 읽는 것을 더욱 사랑했다고 해야 할까. 사람을 의심해도 책을 의심할 수는 없었던 예민한 때. 생각하면 여전히 그리운 시절. 기차에 타서 아쉬움을 달래는데 프랑스적인 인상의 차장이 다가와 내게 농을 건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베토벤 생가를 놓쳤다는 안타까움이 있는 데다, 낯선 곳에서 뜻밖의 친절을 접하니 마음이 동했던 것일까. 차장의 권유를 그만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티를 마신다. 비쌌지만, 분위기 때문인지 맛이 괜찮았다. 기차에서 바라보는 라인강변이 운치가 있다. 비가 내려서 더욱 그랬다. 북한강변 대성리 등으로 엠티를 간 후에 돌아오는 기차에서 느끼는 느낌과 같다고나 할까. 눈을 감으니 이른 아침 안개가 자욱하게 흐르던 북한강변을 산책하던 일이 떠오른다. 연이어 종소리가 들리고 시장에서 신선한 야채를 팔고 반갑게 맞이하던 트리에 아줌마가 연상되는데... 하이델베르크에 도착하였다. 비는 계속 내리고... 비가 오지 않는다면 무작정 가겠지만, 워낙 비가 많이 와서 1마르크짜리 하이델베르크 관광지도를 산다. 처음에는 중앙역에서 하이델베르크성까지 걷고자 하였는데 걷다가 무리라고 판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를 견딜 재간이 없다. 돈 아끼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시간을 사기로 한다. 버스를 탄다. 십여분 가니 구시가에 도착한다. 학생감옥은 비가 와서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하지만 비가 옴에도 불구하고 관광객들은 꾸준했다. 이리저리 헤매다가 보니 같이 버스에서 내렸던 모녀 일행을 다시 만난다. 아가씨는 뉴질랜드 화교로서 이름은 줄리안이며, 어머니와 여행 중이라고 했다. 어머니 되는 사람과는 간단한 눈인사를 한 뒤 줄리안과 별 것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갔다. 뉴질랜드에서 무엇을 하느냐 했더니 관광 가이드를 한다고 했다. 중국 아가씨는 핀란드 헬싱키 행 실자라인에서 만난 아가씨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인데 둘 다 매우 밝다는 인상을 받았다. 뭐랄까. 일본인과 한국인에게는 느껴지지 않는 자신감이 있다고나 할까. 혹 이것이 대륙적 기질일까.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것인지 모르지만, 중국 여성들이 일본, 한국 여성들보다 유럽인 기질에 가까운 듯싶었다. 부럽다. 저 알 수 없는 자신감. 여유로움... 성당을 들려 이리저리 둘러보고 코른마르크트의 마돈나상에서 헤어진다. 마돈나 상이 볼만했다. 다만, 비가 와서 오랫동안 관찰할 수는 없었다. 등산열차를 타러 가자. 하이델베르크성에 오르기 위해서는 걸어가거나 등산열차를 타야 했다. 평소 같으면 당연히 걸어가겠지만, 또한 오스트리아에서의 케이블에 대한 안 좋은 기억 때문에 타고 싶지 않았지만, 비에 홀린 탓이니 열차를 타기로 한다. 4.5마르크여서 비싼 것은 아니네? 하고 탔는데 타자마자 내리라 한다. 이것은 또 뭐야? 등산 열차가 또 있는 것이다. 해서, 아, 갈아타는가 보구나 하고 타려는데 또 돈을 내라고... 2.5마르크 추가. 이제 끝인가. 또 있었다. 2마르크 추가. 총 9마르크. 하이델베르크의 상혼은 세 번째 등산열차에서 빛을 발한다. 두 번째까지 타고서 돈이 아깝다고 그 다음에 걸어간다면 후회할 듯. 첫째, 두 번째 등산 열차 대신 걸어서 마지막 등산 열차를 타볼 것을 권한다. 마지막 등산 열차에서 본 풍경이 장관이었다. 비가 오면 오는 대로 운치가 있다. 어쩌면 맑은 날씨 때보다도 더... 왜냐? 난 음울한 흑백 화면의 독일 표현주의 배경을 좋아하거든. 그제야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곳을 걸어오려면 반나절을 소비해야 하지 않을까? 그림 같은 전경이야 검색하면 수도 없이 나온다. 왜? 한국인이 하이델베르크를 참 좋아하는 것 같다. 이곳에서 정말 많은 한국인을 만났다. 유럽에 오면 이곳은 필수 코스인가 보다. 왜 이곳을 그토록 좋아하는 것일까? 평자의 말대로 하이델베르크가 낭만주의 자체이기 때문일까. 내 소견은 하이델베르크가 독일에서 가장 고풍스러운 자취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일상과 가장 멀리 떨어진 듯한,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떠난 듯, 중세의 도시에서 영화 주인공인양 돌아다니고 싶다는 환상을 실현시켜주기 때문이 아닐까. 비를 많이 맞다 보니 낭만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그래도 그냥 내려가기는 뭐해 등산 열차 운전사에게 사진 한 장을 부탁하였다. 운전사가 서울, 한국 뭐 이런 걸 잘 안다고 한다. 한국인들이 참 많이 왔구나. 사진도 무척 많이 찍어주었나 보다. 이곳이 배경이 좋다면서 자리를 지정해준 뒤 찍어준다. 다른 이들 여행기 검색을 해보니, 사진 배경이 다들 비슷비슷한데 혹시 운전사 도움을 받은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운전사가 십 년이 지난 오늘에도 할 지는 미지수이겠지만... 건너편으로 가서 철학자의 길 - 담양 죽녹원에도 철학자의 길이 있어 대나무 사이로 나타샤랑 아이들과 걷는 기분이 쏠쏠했다. -로 가서 하이델베르크 성 전경을 볼까 싶었지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비 때문이다. 의욕이 사라졌다. 성을 내려오니 독일 여대생들을 볼 수 있었다. 오! 아가씨들이 모두 멋진 걸? 독일 여기저기 많이 다니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간 본 중에는 괜찮았다. 철학적 전통이 면면히 흐르는 하이델베르크에서 대학을 다니면 화장을 전혀 안 할 것 같았는데 다들 화장을 했다. 이런! 화장발이 기본인 한국적 풍토에서 살다 보니... ICE 타다. 매우 편리하고 고속이어서 좋았지만 난 컴파트먼트가 역시 좋다. 이제 모던함도 클래식이 되는 것일까. 뮌헨까지 간다고 하여 마음 놓고 눈 좀 붙이려고 했더니만 슈트가르트까지만 간다는 것이 아닌가. 아니, 독일 기차만 타면 왜 말썽이냐고. 라이프찌히에서도 그렇고, 트리에로 갈 때도 그렇고... 참내. 일요일만 뮌헨까지 운행한다는 것이다. 오늘까지 가야 하는데... 과연 기차가 있을까? 초조감이 밀려왔다. 잠도 틈틈이 한 두시간 밖에 안 잤는데... 다행히 열차가 있었다. 오후 9시 10분 발이었다. 하여, 11시 17분에 간신히 뮌헨에 도착한다. 숙소에서 미국 흑인을 만났다. 여의도? 김치? 그는 내게 한국인이냐고 먼저 묻더니 그가 아는 이런 저런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알고 보니 룸메이트가 한국학생이라고 했다. 그는 컴퓨터를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여행이 어떠냐 했더니 그는 어깨를 으쓱하면서 익살스럽게 지루하다고 말한다. 그 모습이 정말 우스워서 나는 그의 어깨를 잡고 당신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야, 해주었다. 그가 기뻐했다. 영국 청년도 있었다. 일주일 뮌헨에서 스테이 한다고 했다. 이렇듯 이런 저런 여행자들과 만나 웃다가 불현듯 나는 이태리에 가고 싶었던 것이다. 비도 오고, 피곤해서 처음에는 하룻밤을 자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나를 이끌고 있었다. 지금 떠나라. 나는 재빨리 짐을 찾은 뒤 담당 아가씨에게 양해를 구했다. 거짓말을 하기 싫지만, 그냥 취소하면 미안했다. 악의 없는 거짓말이 필요한 때다. 여자 친구를 다시 만났어요.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그런데 그녀가 짜증을 내기는커녕 내게 호의를 표하는 것이다. 아까부터 내가 다른 이들과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내가 무척 재밌는 사람이라는 게다. 여자는 계속 내게 미소를 짓는데... 아, 여기가 독일에서 가장 보수적이라는, 독일판 텍사스인 바이에른 주도 뮌헨이 맞는 것인가. 아, 나는 독일 아가씨들이 좋다. 이제껏 만난 모든 독일 아가씨들이 내게 친절한 걸? 젠장할, 이럴 줄 알았으면 독일로 유학 올 걸... 자, 이제 떠나자. 이태리 베네치아로! 런던에서 네이키드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19. 3:11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609230 통계보기 런던에서 네이키드를 만나다 1997년 4월 7일에서 4월 8일 아침에 일어나니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몸에서 열이 난다. 객지에서 아프기 시작하면 대책이 없는 듯싶다. 꼼짝 않고 있자니 너무나 불안했다. 다시는 올 일이 없을 것만 같은 유럽여행인데 곧바로 한국으로 되돌아갈 일이 생기면 어쩌란 말인가. 차라리 움직이자, 움직여. 뉴몰든과 뉴몰든에서 가까운 킹스턴 정도를 배회하다. 킹스턴 대형마트에 가서 처음 로또라는 것을 사봤다. 지인에 따르면, 영국에서는 로또 광풍이 불고 있다 했다. 일주일에 두 번씩 하는데 열기가 장난이 아니어서 한인사회에서도 큰 화제가 될 정도였다고 한다. 지금이야 한국에서도 로또가 정착되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주어진 숫자로만 결정하기보다 자신이 선택한 번호로 당첨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 매력적이었던 듯싶다. 게다가 당첨 액수도 엄청나고 확률이 높아 보이는 착시 효과도 준다. 낮부터 술에 취한 젊은이가 중얼거리며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 술에 취한 줄 알았더니 아니었다. 마약에 취한 것이었다.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저 친구도 영어를 할 줄 아니 한국만 가도 영어 강사로 대접을 받을 터인데... 모험심이 없나 하는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를 하고 만 것이다. 하고 나서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콤플렉스이리라. 영어만 할 줄 알면 되는 한국 사회였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이제는 영어만 한다고 되는 세상도 아니지만, 뭐랄까, 제정 러시아에서 상류층과 민중을 가르던 언어 차이라고나 할까. 귀족은 프랑스어를 쓰는...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에서도 나온다.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프랑스 파리의 소식을 듣고자 하는 러시아 귀족들과 인텔리들. 상류층을 상징하는 프랑스어이다 보니 프랑스 거지일지라도 프랑스어를 쓴다는 것만으로도 러시아 귀족과 인텔리와 순식간에 동격이 되는 정서가 형성되지 않을까. 역시 눈에 보여야만 하는 것일까. 책에서, 사색으로 충분히 계급적 각성을 했다고 여겼으면서도 편견이란 역시 무서운 것이다. 어딘지를 모르면서 낮 동안 내내 쏘다녔다. 밤이 되자 지인 집으로 돌아왔다. 아픈 사람이 그리 다녀도 되느냐 하지만, 마음이 불안한 것을 어쩌랴. 겉으로 괜찮다 하지만, 여전히 아프기는 마찬가지다. 일찍 잠들면서 내일은 건강을 회복하였으면 정말 좋겠다고 여기며 약을 먹고 잠이 든다. 8일 아침이다. 여전히 아프기는 마찬가지이지만 전날보다 호전이 된 듯싶다. STA 여행사에 들려 유로버스를 계약했다. 한국에서 하는 것보다 약간 싸지만 별 차이는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에 계획했던 것은 유레일 플렉스 패스 10일권을 끊은 데서 알 수 있듯이 가보고 싶은 몇 개 도시를 중심으로 집중 정밀 탐구를 계획했던 것이다. 메뚜기처럼 이리 저리 뛰어다니기 보다는 진득하니 한 군데서 오래도록 있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막상 런던을 돌아다니면서 마음의 변화가 생긴 것이다. 뭐랄까. 유럽에 대한 환상이 지나치게 크다고나 할까. 한국에서라면 과연 이렇듯 세세하게 살폈을까 하는 반성이 들기도 했다.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 겉멋에 흔들리지 않는 것이야. 누가 뭐래도 내 길을 가자. 지인의 조언도 한 몫을 했다. 이왕 가는 것 후회 없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것이야. 대충 한다고 해도 그것이 어디야. 해서 정말 좋은 것이면 후일 다시 와서 흠뻑 젖어보는 것이야, 어때? 옳다. 빅토리아 역 인근 Campus Travel이란 영국 여행사에서 유로스타 티켓을 산다. 사람들로 넘쳐난다. 세계 영어권 청년들이 영국 런던으로 집중하는 모양이다. 장사가 안 될 리가 없는 듯이 보인다. 유럽 대륙에서도 이와 같은 여행사를 꾸리겠지만 과연 잘 될 것인가. 역시 세계 패권은 이래저래 남는 장사다. 프랑스인들이 분통 터질만한 일이다. 한국 대사관을 들린다. 10시에 업무 시작하여 4시에 끝이 난다. 물론 그 사이에는 점심시간이 2시간이 있다. 하루 4시간 근무라... 문득 나는 이왕 글렀으니 자식 놈이 외교관이라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4시간 노동이라니... 사회주의 이상향 아닌가? 일처리는 대략 난감이다. 행정 절차가 복잡한 듯싶다. 노는 건 선진국 형이면서 일하는 건 후진국 형이 따로 없다. 듣자하니 외교관 고충도 있다고 한다. 한국에서 국회의원이다, 뭐다 하는 족속들이 찾아오면 가이드를 해주어야 한다는 게다. 일하러 간다지만 99%는 놀러가는 것이라고 한다. 민주노동당 국회의원들도 아마 예외는 아닐 것이다. 찔리는 국회의원 있겠다. 캄캄한 밤이다. 윔블던역에서 기차로 바꾸어 타고 오는데 영국 청소년들의 포스가 장난이 아니다. 루니처럼 생긴 이들이 술에 취해서 서로에 대고 수도 없이 뻑 뻑 하는 것이다. 마이크 리의 네이키드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에 관해서 가장 근접한 면모를 보여주었던 영화 말이다. 어떤 이념이 문제가 아닌 듯싶다. 그저 아무나 대고 뻑 뻑... 무차별적인 살인... 북아일랜드 공화군의 테러나 이슬람 해방전사의 테러가 셜록 홈즈나 괴도 루팡과 같은 고전이라면 이들은 하드보일드하다 할 수 있겠다. 이제 나도 구세대란 말인가. 우울하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조지 오웰이 1933년에 내놓은 처녀작 ‘파리, 런던 바닥 생활’을 그의 작품 중 최고로 친다. 당신이 이 책을 읽는다면 아마 파리, 런던에서 저널리스트가 소개하는 맛집을 찾아가는 따위란 없을 지도 모른다. 주방에서 벌어지는 일을 적나라하게 묘사하고 있기에. 그가 스페인 내전에서 의용군으로 나가서 부상을 입었으며, 또한 좌익 내부의 격심한 당쟁에 환멸을 느꼈다고 한다. 훗날에는 그런 까닭으로 간첩 혐의도 있다고 하는데... 그래, 나는 해방군이고 싶었다. 진심으로 말하노니, 이 세상을 뒤엎고 싶었다. 허나, 내가 많이 부족하니 부족한 만큼 세상을 볼 따름인 것인가. 차마 세상에 절망하지 못하니 나에 대해 절망하는가. 왜 나는 다른 이들처럼 세상을 탓하지 못하나. 아, 내가 못난 탓이다. 나는 바보가 틀림없다. 지인 숙소로 돌아와 자리에 누우면서 스스로에게 묻는다. 과연 너는 왜 여기에 왔느냐. 이제 내일이면 본격적으로 유럽으로 가는 것이다. 너는 왜 여기에 왔고, 거기로 가려고 하느냐. 물음은 끝없이 이어진다. 옥스퍼드에서 개성공단을 생각한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20. 3:44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645502 통계보기 옥스퍼드에서 개성공단을 생각한다 1997년 5월 마지막 주 어느 날 옥스퍼드는 런던 북서쪽으로 약 80~90킬로 되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약 10킬로 정도 구간을 설정한 것은 도로 사정을 감안한 거리이다. 비교하자면, 개성 정도가 되지 않을까? 요즘 설기현이 소속한 축구팀 레딩이 축구팬이 아니더라도 잘 알려져 있다. 이 레딩에서 북쪽으로 쭉 올라가면 옥스퍼드라고 할 수 있으니 김포, 일산, 파주에서 북으로 쭉 가면 되니 개성쯤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서울에서 개성까지 60~70킬로 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나는 개성공단 운운할 때마다 기분이 묘하게 나빠지는 듯하다. 개성이 어떤 도시던가. 한 때 일국의 수도였다. 해서, 풍수적 여건은 나쁘지 않다고 보아야 한다. 이런 만만치 않은 역사를 지닌 도시를 두고 공단 운운하는 것은 백번 양보해도 좋은 구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대목에서 공단의 의미를 폄하하지 말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을지 모른다. 구로공단의 예를 들면서 말이다. 오히려 나는 그래서 주장하는 것이다. 정말 그대들이 구로공단을 무슨 생각으로 만들었는가 하고 말이다. 그대들이 구로공단에 누가 일하고 있는지,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를 고민하면서 공단 운운하는 것인가. 진심으로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라. 인드라고의 생각은 무엇인가. 통일이 되면 개성에 공단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대학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수천 년 역사의 고도인 개성이야말로 영국의 옥스퍼드처럼 인문지향적인 명문대학을 탄생시킬 기초가 튼튼한 셈인 것이다. 생각해 보라. 썩어빠진 고려, 연세 따위 일본 와세다와 게이오 흉내를 낸 대학을 없애버리는 것을! 그리고 통일 시대에 맞는 새로운 명문 대학을 만드는 것을 떠올려 보라. 개성에는 인문 중심의 대학도시를! 철원에는 자연과학 중심의 대학도시를 건설하는 것이다! 보라. 이것이 어디 개혁으로 될 일인가. 혁명 없이 가능한가. 개혁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다. 조선이 왜 망했는가. 혁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주장한다. 남북 정권유지만을 위한 근시안적 개성공단 개발을 중지하라. 진정한 통일을 가로막는 통일 사기꾼들의 협잡을 막아내자! 아는가. 아직도 발상이 얼마나 한심한가. 한국 노동자들 파업이 무섭다하여 중국에 간 한국 기업들 요즘 사정이 어떠한가. 중국에서도 쫓겨나고 있는 실정이다. 단지 싼 인건비만 노렸지만 무엇이 남았던가. 열 중 아홉이 중국에서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들려올 지경이다. 그럼에도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여전히 앵무새처럼 말하고 있다. 남측의 자본과 기술력과 북측의 저렴한 노동력을 합친다면 큰일을 낼 것이라고 말하는... 아, 이 얼마나 우스운 여론 조작이란 말인가. 당신들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다. 개성공단이 한국 경제에 획기적 발전을 이룰 계기가 아니라 한반도 운하처럼 국가 파산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똑똑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민중의 단점이 무엇인가. 눈에 보여야 하는 것이다. 망하는 것을 보아야만 망한다고 여길 것이다. 아,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이래서 황혼에 나는 것인가. 나는 좌파 중에서도 극소수 좌파다. 주류인 주사파가 볼 때에는 별 볼 일이 없는 사이비 좌파인 게다. 어쩌랴. 주사파적 통일이 되면 누구보다 먼저 숙청이 될 팔자인 것을! 그래도 나는 어떤 통일이든 바라는 것이다. 통일주의자여서가 아니다. 오히려 나는 그 반대다. 어떤 통일이 되건 그 통일은 자본주의적 통일이 될 것이며, 남측의 주도일 것이라는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해서, 나는 통일주의자에 반대하면서, 또한 통일을 바란다. 더 이상 통일 운운하며 민중을 어리석은 길로 인도하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노무현 정권까지 와서야 민중은 민주화라는 것이 얼마나 허울 좋은 것인지를 깨달았다. 그러하므로 나는 주장하는 것이다. 모든 통일이여! 오라. 그 허구성을 낱낱이 드러내기를! 지인의 중고 자동차로 옥스퍼드를 간다. 뉴몰든을 나와 런던 외곽순환도로를 타다가 옥스퍼드로 간다. 런던에서도 느낀 바였지만, 런던 교외로 가서야 알았다. 온통 평지에 푸른 잔디다. 이래서 진정한 영국은 시골에 있다고 했을까. 아이들은 어디든 있는 녹지에서 뛰논다. 부럽구나. 한국의 아이들은 어디에 있던가. 옥스퍼드에 차를 주차시킨다. 버스를 타지 않고 걸어서 옥스퍼드를 구경한다. 굳이 지도를 살펴볼 필요는 없다. 관광객이 많기에 관광객 다수가 향하는 데로 따라 가면 볼 것은 다 보는 셈이다. 어떠한가. 대학 도시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별 것 없었다. 다만, 옥스퍼드라는 유서 깊은 대학 도시조차 침윤당하는 현장을 목격한다. 오래 되었든, 무엇이든 유지를 하려면 돈이 필요한 법이겠다. 최근에는 해리 포터 덕을 보는 듯싶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경주나 공주 등에서 환타지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일까. 그토록 베끼는 것에는 일가견이 있는 한국 삼류 문화 일꾼들이 왜 이런 것에는 등한시하는 것일까. 삼류 저질 감독 박모씨처럼 똥배가 툭 튀겨 나와 광고 따위나 해서일까. 그만 하자. 어차피 따지면 역겨운 것투성이가 이 놈의 한국인 게다. 빨리 망했으면 좋겠다. 이 놈의 나라. 귀환1 - 루체른에서 은하철도 999를 떠올리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7. 5. 22. 2:09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70017718117 통계보기 귀환 1 - 루체른에서 은하철도 999를 떠올리다 1997년 5월 14일 스위스 도미트리는 호텔급 수준으로 유럽 최상의 서비스를 유지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최고로 비싸다는 것이다. 하루 숙박만으로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을 정도였다. 물론 아침 식사가 포함된 숙박요금이다. 식당에 가서 뷔페로 즐겼다. 우유 두 잔(찬 것 하나, 뜨거운 것 하나), 커피 한 잔, 오렌지 쥬스 한 잔, 감자칩 약간, 빵 넷(중간 것 셋, 작은 것 하나). 배가 부르다. 식사를 마친 후 오늘의 일정을 시작하다. 목표는 교통박물관. 택시 운전사와도 웃으면서 헤어졌고. 그런데 가는 도중에 한국 아가씨를 만난다. 그녀는 두 시간 내에 다시 열차를 타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내렸는가 하니 선물용으로 스위스 시계랑 만능 칼, 속칭 맥가이버 칼을 사려는데 품질 보증되면서 저렴하게 살 방법이 없느냐 내게 묻는 것이다. 나 역시 어제 칼을 사려고 알아보니 의외로 호텔에서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했다. 기념품 가게보다 약 십 프랑 정도 더 싸다고 알려주었다. 그녀가 고맙다고 했는데... (나중에 취리히 호스텔에서는 이보다 십 프랑이 더 싼 가격이었다. 루체른 물가가 더 비싼 셈이다. 나로서는 안 산 것이 다행이지만, 괜히 그녀에게 미안했다.) 이제 가자, 박물관으로! 루체른의 이 박물관은 유럽 최대의 교통박물관으로 한번쯤 가볼만하다고 감히 추천한다. 특히 기대를 하지 않았다면 만족감은 더욱 높을 것이다. 아울러 유레일 패스 소지자와 학생은 중복 할인이 가능하다. 지금도 그런가? 아이맥스 영화도 보고. 뜻밖에 게임기처럼 생긴 비행기에서 운전 훈련도 해본다. 달 착륙사도 보고. 융프라우 등산 열차 랙커 레일도 구경하다. 여기서 융프라우 안 가도 되겠다는 결심이 확고해진다. 교통에 관한 모든 것을 보여주니 박물관답다 말하지 않을 수 없겠다. 교통 박물관을 나와 루체른 호숫가를 산책하는데 별안간 은하철도 999가 떠오르는 것이다. 작가는 혹 철도를 통해 각기 다른 서유럽 곳곳을 여행한다는 점에 착안하지 않았을까. 물론 원작은 일본 동화작가 미야자와 켄지의 은하철도의 밤이고 여기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내 관심사는 원작이 아니다. 그보다는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미야자와 켄지의 작품과 다른 어떤 작품과 피와 살을 섞었는가가 나의 관심사다. 가장 큰 관심사는 물론 메텔이 어디에서 왔는가이지만^^! 해서, 나는 순간 강렬한 창작 열망에 사로잡혔다. 은하철도 999와는 다른, 자궁이 모계사회에서 성스러운 부활의 장소로 불리다가 부계사회로 넘어오면서 지옥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그것을 극복하고 싶었다. 마녀를 배후조종한 것은 다름 아닌 마왕, 그였음을 드러내고자 했다. 이는 모계사회로의 귀환인 동시에 이전의 모계사회와 이전의 부계사회를 넘어서는 사회임을 드러내고 싶었던 것이다. 감히, 은하철도 999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다. 하여, TV만화영화 무지개요정 통통 시나리오는 이미 이때부터 구상되기 시작하였는데... 일본 만화영화와 달리 미국 디즈니처럼 풀애니메이션으로 하되, 스토리라인은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한 만화영화 말이다. 라이프찌히에서 그를 만나다 국경철폐(國境撤廢) 2005. 2. 17. 12:46 수정 삭제 복사https://blog.naver.com/miavenus/60010207845 통계보기 저의 단편 <도박>은 픽션입니다만, 이 글은 픽션이 아닙니다. 무엇이 차이가 있는지 관심이 있는 분만 둘을 비교해 보세요. 이 글은 논픽션입니다. 라이프찌히에 도착한 건 97년 4월 22일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나는 예정에 없던 라이프찌히를 왜 간 것일까. 직접적인 이유야 내가 깜박 유럽 기차의 특징을 망각했다고, 내 착각에 불과했다고 간단히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유럽여행 내내, 더 나아가 내 짧은 삶 속에 파괴입자가 숨어 있다 어떤 균열이 일어날 때마다 순식간에 내 삶 중심에 틈입하여 전체를 다 무너뜨리곤 했던 것이 재작동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 했다. 이러한 의문이 시간이 지날수록 해소되기는커녕 걷잡을 수 없이 뒤엉 켜서 혼돈에 빠지다 벼랑 끝으로 떠밀리는 공포로 타이핑을 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러한 글쓰기를 결코 하고 싶지 않았다. 도대체 더 큰 혼란으로 이끌 뿐인 문학행위란 무엇이란 말인가. 유럽 기차는 차량마다 행선지가 달라 차량 출입문 외부 하단이나 측 면, 혹은 내부 벽에 부착된 표시를 눈여겨보아야 한다. 함부르크에서 기차에 오를 때 분명히 확인하였지만 강행군에 피로가 누적되다 보니 자리가 비어 있는 흡연석 콤파트먼트를 찾아다니다 그만 갈 곳이다른 차량으로 이동한 걸 잊어버린 것이다. 당연히 베를린에 도착할 줄 알고 바케트와 맥주뿐인 식사를 가뿐하게 마치고 론리 플래닛 서유럽편 베를린 항목을 탐독하느라 미처 확인하지 않았던 것이다. 인기 많은 흡연석에 미련을 버리고 텅텅 비 어 있는 비흡연석을 택했다면 라이프찌히행을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표 검사시 승무원이 일등석에 탄 동양인 배낭족이 혹 이등석인줄 알고 잘못 타 지 않았나 의심하다 내 여권을 보고 약간 계면쩍은 목소리로 어디 가는 길 이냐,하는 수작만 했어도 베를린에연착륙을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세 이 상인 경우 유레일 패스 1등석만 구입이 가능하다. 그리고 서양인은 동양인 을 보통 나이보다 열살 정도 어리게 본다. 내 얼굴이 동안인 편이라서 같은 한국인조차 내 나이를 다섯 살 정도 어리게 짐작하다보니 내 연령이 더욱 낮아져 서양인이 나를 십대(?)로 가끔 오인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간 프랑스적 인간미만 느끼게 했던 독일 차장들이었는데 이때만큼은 어쩐 일인 지 독일병정 이미지를 내게 확인시켜주려는 듯 내게 어떤 말도 하지 않았 다. 차장이 내게 저녁식사를 하겠냐고 물을 때야 독일병정의 정체를 확인했 을 뿐이다. 영어를 전혀 못하는 차장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 있던 40대 독 일인이 졸지만 않았어도 회항하여 치밀한 계획(!)대로 여행을 할 수 있었다. 더듬대는 영어로 의사소통을 시도했을 터이니까 말이다. 베를린 가는 길입 니다만 어떻습니까, 베를린하면 좋습니다라는 평범한 말부터 베를린에 가서 구경하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곳을 뜻밖에 추천받는 일까지 다양하기 때문 이다. 그런 와중에 '베를린이요? 잘못 타신 거 아닌가요? 이 차는 라이프찌 히로 가는 데요'등의 대화를 이끌어내었을 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는 내리기 직전까지 졸다 귀신처럼 깨어서 내게 의례적인 미소만 살짝 지은 뒤 가 버렸다. 화장실에 단 한 번 볼 일이라도 보았다면 내 앞에 닥친 폭풍전 야의 위기를 감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베를린 도착 시간인 열시 사 십분이 지나서야 긴가민가 하였으니 안 될 사람은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이 옛말만은 아닌 듯싶다. 열한시가 넘어섰음에도 기다린 것은 느긋함 이라기 보다 혹시 하는 나약함의 반증이었다. 더 이상 터무니없는 낙관으로 버틸 수가 없었다. 차창 밖으로 대도시다운 베를린의 불빛이 보이기는커녕 어둠 속에 비쳐진 내 불안한 얼굴을 끝내 지켜볼 수 없었다. 비로소 나는 대 형사고가 터졌음을 직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둘러 복도로 나가 확인하니 내가 탄 차량에는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였다. 차장도 보이지 않았다. 마침 기차는 조그만 시골역에 정차했다. 나 는 기차에서 나와 아무나 찾아 물어보았지만 역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다 만 '코리반'이란 말만 반복했다. 역 이름이 코리반인 것 같았다. 기차는 막 떠날 채비를 한다. 나는 당황할겨를도 없이 다시 기차를 타야 했다. 인터레 일 기차 목적지는 대도시였기에 어디로 가는 지 모르지만 시골역보다는 대 도시역에서 수습을 하는 것이 옳다고 동물적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기차 에 올라 여기저기 콤파트먼트를 돌아다녔으나 역시 아무도 없었다. 나는 식 당칸을 찾기로 했다. 그곳만큼은 사람이 있을 터이니까. 식당칸을 찾았다. 다행히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정신이 없었다. 바텐 더로 보이는 자에게 가서 잘 하지도 않는 영어로 마구 떠드니 '노 잉글리쉬' 였다. 마지막 희망은 사라졌다. 기가 다 빠져버렸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바 보 같은 나를 자책했다. 영어 잘 한다고 소문난 독일인은 어디에 있는가, 하 고 원망도 했다. 이렇듯 절망감에 빠져 있을 때 한 줄기 빛으로 등장한 이가 있었으니 금발과 푸른 눈매가 아름다운 여대생이었다. 식당칸에서 남자친구 와 낭만적인 데이트를 박차고 내게 온 것이었다. '아! 천사가 따로 없구나.' 그녀의 도움으로 나는 이 기차가 라이프찌히로 직행으로 가며,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가 내일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내게 지낼만한 돈이 있 느냐,라며 자기 집에서 재워줄 것처럼 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고마운데 더 폐를 끼칠 수야 없는 노릇이다. 그녀 남자친구 눈길이 등뒤에서 칼날처 럼 꽂히는 것 같아 찜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 미친 척하고 꽉 잡았어야 할 것을. 이후 일어날 운명의 회오리를 내 어찌 알았으랴. 천사의 등장이 이 운명의 끝이라고 믿은 내 낙관이 불씨였다. 사실 나는 설령 베를린에 도착 하더라도 짐을 역 코인 락커에 맡기고 역 근처 시내를 둘러 본 뒤 노숙할 작정을 하고 있었다. 내 여행 주제중의 하나가 환락과 퇴폐가 판치는 유럽 대도시의 밤탐험이었기에 이러한 일정을 넣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금발 미녀에 혹하는 취향만 가졌더라도 거절하지 않고 그녀와 즐거운 데이트를 하였을 터인데 잠시 찾아온 정전에 취해 모든 것이 해프닝인 것처럼 느껴졌 다. 여전히 불안하면서도 사랑스런(?) 눈길로 보는 그녀를 남자친구에게 돌 려보내고 멋있게 보일 작정으로 나는 여유로이 책을 뒤적거렸다. 바흐가 단 장을 지낸 토마스 교회 합창단과 괴테, 라이프니쯔, 니체 등이 수학했다는 라이프니쯔 대학이 있는 라이프찌히. 이 도시에서 바그너가 태어났고,바흐 가반생을 보냈고, 슈만과 클라라가 사랑을 했다라는 여행서를 뒤적거리자 이내 내 마음은 미지의 도시로 달려갈 뿐이었다. 여행서가 아무리 완벽해도 구체적인 정보를 직접 가서 확인해야 하는 배낭족으로서는 치명적 실수이자 어쩔 수 없는 치기였던 것이다. 역사가 정지한 도시, 라이프찌히. 아니, 어쩌면 거꾸로 시간을 먹어 가 는 도시, 라이프찌히. 이것이 내가 느낀 라이프찌히였다. 라이프찌히역에 내 리자마자 찾아온 공포. 24시간 경찰이 지켜주는, 따뜻하지는 않아도 노숙할 공간이있으리라는 기대가 처절히 부서졌다. 라이프찌히역은 공사중이었다. 흉측한 몰골을 드러낸 채 다만 내 앞에 서 있었을 뿐이었다. 어떤 기능이나 어떤 미관도 상실한 채. 인포메이션에 갔으나 두 명의 가이드는 영어소통이 되지 않았다. 유레 일 창구가 있을까 역내 사무실을 찾아 문을 열어보았으나 닫혀 있었다. 밤 늦게까지 일할 줄 알았던 역구내 은행이 존재조차 하지 않았다. 아뿔싸! 시 급히 천사를 찾아보았지만 소용없었다. 간간이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 고 물어봐도 이해할 수 없다는 눈초리로 반응할 뿐이었다. 그러다 임시천막 같은 곳에서 과자 따위를 파는 이가 가르쳐 준 건 역 바깥으로 나가면 현금 자동 인출기가 있으리라는 불확실한 정보뿐이었다. 그러나 역 주변에 인출 기는 없었다. 내가 가진 건 독일 여행자 수표인데 이를 바꾸지 못한다면 4/2 DM짜리 락커도 이용할 수 없게 된 셈이었다. 역 바깥에는 택시들이 길 게 늘어져 있었으나 어떤 택시운전사도 영어가 가능하지 않았다. 그때 나타 난 회사원 차림의 남자. 공공칠 가방을 든 그는 역주변에 은행이 없으니 걸 어서 10분 거리인 호텔에 가보라고 충고하였다. 내가 고맙지만 노숙할 작정 일 만큼 돈이 부족하다, 짐을 보관할 돈만 바꿀 수 있다면 밤거리를 쏘다니 며 날밤을 새겠다 하니 내게 진지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 Leipzig is dead. GDR is dead. 나는 그와 헤어지고 난 뒤 그 말을 은유적으로 받아들여 계속 역 주변 거리를 서성였다. '그냥 그를 따라갈 걸 그랬어. 심야에 내가 돌아다닌다고 해결이 쉽게 되겠어? 더구나 인포메이션까지 영어가 통하지 않는 데인데...' 자꾸 아쉬운 마음이 들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앞일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 다. 마음을 다져야 했다. '단지 밤이어서 그렇지. 불야성을 이루는 한국과 유 럽의 밤 문화가 조금 다르리라는 건 예상했어.' 하지만 헛탕만 자꾸 치자 그 말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을 지시한 것이라 생각되었다. 멀리 보이는 호텔로 갈 수밖에 없었다. 호텔에는 인출기가 있으리라. 인근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 로 보이는 호텔 현관까지 가서 나는 옷매무시를 점검했다. 유럽이라도 호텔 등지에선 배낭족을 꺼려하기 때문이다. 돈 있는 동양 여행자 행색을 내려 했으나 헛수고라는 걸 깨닫자 정면승부하기로하고 과감히 회전문으로 향했 다. 그때 '한스'를 만났다. 인생을 시험할 수 있는 기회가 세 번 온다는 말이 있다. 흔히 이런 기회가 찾아오면 귀인도 함께 나타난다고 한다. 그런데 상 황을 시험할 수 있는 작은 기회도 세 번 오는 것일까. 그렇다면 이 사람을 놓치면 안 되겠다는 뜬금없는 심사가 갑자기 일었다. 아마 생기 발랄한 독 일 여대생과 신분이 안정되어 보이는 회사원을 놓친 아쉬움이 컸기 때문이 리라. 그는 호텔 직원으로 보였다. 그가 기지바지를 입었을 지라도 상의는 단정한 슈트차림이었기때문이다. 그 역시 영어가 통하지 않았지만 이미 겪을 대로 겪었기에 놀라지 않았다. 호텔에 손님들을 접대하는 직원만 있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MONEY? 익스체인지?' 등 손짓발짓하며 단어들을 나열하니 간신히 몇 단어가 그에게로 전달되었나 보다. 한스는 처음에는 호 텔에 들어오지 말라고 의사표시를 하다가 자기를 따라 오라 하더니 역에서 호텔 가는 방향에서 좌측으로 성큼성큼 갔다.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역시 들어갈 수 없나 보다. 아마 인출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겠지. 그런데 좀 멀군.' 무거운 배낭을 지고 행여 그를 놓칠까 서둘러 그를 뒤쫓았다. 내 예 상 대로였다. 그는 인근의 은행으로 나를 인도한 것이다. 하지만 폐점. 또 다른 곳도 폐점. 지쳤다. 지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에게 폐를 더 이상 끼 치고 싶지 않았다. 한스에게 고맙다, 이렇게까지 해준 것도 어디냐, 일 마친 모양인데 피곤할 터이니 걱정된다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해대었다. 그는 웃기만 했다. 그만 가라고 고! 고! 하였다. - 유! 따로 고. 언더스탠드? 미, 나홀로 고. 우이 머스트 세퍼레티브. 언더스탠드? 그러니까 고! 고! 씨발, 미치고 환장하것네. 유 노 퍽킹 고? 하지만 영문을 모르는 한스. 그는 정말 영문을 전혀 몰랐다. 가지 않고 버티며 미소만 지었다. 그러다 그가 미안해 할 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아 임 NO PROBLEM'이란 말로 괜찮다고 표시했더니 환하게 웃으며 PROBLEM, NO PROBLEM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다. 다행이었다. 그는 아무 말없이 내게 손짓하며 은행 측면에 있는 정원수에 가더니 오줌을 싼 다. 내 마음이 전달된 걸까. 이 행동은 또 무엇인가. 같이 싸며 잠시 만난 인연을 마무리 짓자는 걸까.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 생리욕구가 없지 않았기 에 같이 볼일을 봤다. 그가 힐끗 내 자지를 훔쳐 본다. 내 눈길과 마주치자 푼수처럼 웃었다. 질세라 나도 그의 것을 보았다. 의외로 작은 고추였다. 나 도 웃어주었다. 그의 것이 조그마해서 웃은 것이 아니라 둘이 하는 짓이 한 국의 공중화장실이나 목욕탕에서 일어나는 일과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에 웃음이 난 것이다. 내가 독일 한복판에서 당당히(?) 바지춤에서 성기를 꺼내 리라고는 상상이나 해봤을까. 아무튼 시원스레 물을 쏟아버리며 아무도 나 를 모르는 곳으로 가서 객기 부려보고 싶은 충동이 동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가 친근해짐을 느꼈다. 누가 독일인을 냉혈동물이라 하는가. 내가 만난 독 일인들은 대체로 친절하기 짝이 없었다. 그는 따뜻한 미소를 짓고 내 손을 붙잡더니 다시 길을 재촉하며 말했다. - NO PROBLEM. 한스가 나를 끌고 간 곳은 황당하게도 호텔 부대시설로 보이는 도박장 이었다. 도박장에 들어가서 한스의 요구대로 짐을 맡겼다. 그리고 우리는 호 텔 라운지로 가서 지배인처럼 보이는 사람에게가서 사정을 설명하고 약간 의 돈을 교환할 수 있었다. 한스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런데 사람이란 정말 알 수 없는 존재이다. 막상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니 나는 한스의 과잉 친절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내 지갑을 바라보던 한스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은 것 같았다. 그를 의심하고 싶지 않았으나 오 갈 데 없는 배낭족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에게 도움 을 받았으니 내가 조심을 하면 별 문제가 없으리라. 쓸 데 없이 의심하기 보다 간수를 잘 해야지.' 라운지에서 도박장으로 나오는데 호텔 맞은편 건물 지하에서 익숙한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왔다. 내가 "디스코? 댄스?" 하니 웃 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코 음악을 듣자 나는 이상하게도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짐도 맡겼겠다, 교환도 했겠다, 이게 내가 바라던 여행이 아니던 가?' 나는 작은 배낭에서 남은 맥주 캔 두 개를 꺼내 그중 하나를 그에게 줬다. 고마움의 답례로. 그러나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재채기하는 시늉과 코를 가리키며 감기 걸렸다고 했다. "어 코울드?"하니 날씨가 말도 못한다는 제스 처를했다. 한스는 영어를몰라도 정말 몰랐다. 그래도 영어와 독일어는 사 촌지간이라는데 이럴 수가 있을까. 아마도 내 발음 때문이겠지. 그가 아는 단어란 'MONEY'와 'PROBLEM'밖에 없는 것이 틀림없었다. 나머지는 모두 국제공용어로 의사소통으로 하였는데 감정 교류가 기막히게 되었다. 맥주 캔 하나를 다시 배낭 속에 넣고 남은 맥주 캔의 뚜껑을 따서 먹었다. 내가 앉자 그도 따라 앉았다. 언어란 무엇인가. 소통하면 그만이지 않 던가. 같은 한국어로도 전달되지 않아 무수한 오해를 낳는 현실이 문득 씁 쓸해졌다. 분단된 것도 모자라 동서로 쪼갠 채 서로 상대방을 삿대질하는 정당 대변인들. 오랜 군사독재와 뒤이은 문민독재, 그리고 학벌과 지연과 족 벌로 온갖 기득권을 독차지하려는 자들이 한없이 가엾게 느껴졌다. 이렇듯 말이 거의 통하지 않는 데도 평화를 느낄 수 있지 않던가. 그런 생각이 미 치자 나는 그에게 한국에서 가져 온 애용담배인 오마 샤리프 한 가치를 주 려 했는데 그가 오히려 내게 독일 담배를 권했다. 한사코 거절했으나 그의 간절한 요청 - 그는 이럴 때마다 'NO PROBLEM' -에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맥주가 시원하지않아 맨숭맨숭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지만 기분만 은 날아갈 듯 하였다. 안심이 되니 디스코장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에 비치는 그의 얼굴을 제 대로 볼 수 있었다. 30대 말 40대 초반? 동양인 연령보다 나이 들어 보이니 나와 같은 나이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뭔 상관이람. 유 노 태권도? 라고 말 하며 발차기 흉내를 내니 그는 겁난다는 듯이 도리질을 했다. - 하하. 아이 컴 프람 서울 코리아 유 노 코리아? 서울 올림픽? - 올림픽. 서어올 올림픽. 그는 안다는 표시를 이렇게했다. 비록 서울이란 발음을 제대로 내지 않았지만 말이다. - 유 노 노스 코리아, 사우스 코리아? 아이 씽크 유 저매인 엔비. 유 머스트 비 프라우드. 커즈 아이 씽크 저매인 이즈 유나이티드. 유 노? 몰라 도 돼. 상관없어. 그냥 독일인만 만나면 이런 말이 자꾸 하고 싶어 져. 아임 낫 내셔널리스트. 버트 아이 워나 유나이티드 오브 코리아. 코리아 이즈 원. 그가 전혀 영어를 하지 못하니 오히려 안도감이 들었다. 나는 마치 그 가 서울의 영어학원강사인양 대하듯 생각나는대로 영어로 말했다. 매우 상 쾌하기 짝이 없었다.어느 정도 완벽해야만 내색을 해야 하기에 주눅이 들어 좀 아는 것까지 당황해서 까먹기 일쑤였던 것을 생각하면 더욱 신이 났다. 그래서 그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말도 가르쳐 주었다. 그가 가르쳐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내게 담배 연기로 하는 상투적인 장난을 보여주었다. 색다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재미있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만일 옆에 지나 가는 사람이 있어서 우리를 보았다면 아마 십년 지기인 것처럼 보였으리라. 둘은 킬킬거리고, 떠들고,열심히 손발짓을 해대었기에. 맥주를 다 마시자 그가 도박장으로 가자고 손짓했다. 나는 쓰레기를 버릴 마땅한 곳을 찾으려 두리번거렸다. 그러자 그는 내게 빈 깡통을 달라고 했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아르켜 주면 내가 버리겠다고 하자 'NO PROBLEM'이라며 달라고 해서 줬다. 그 가 가끔씩 내뱉는 'NO PROBLEM'에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 기까지 했다. 약간 높은 옥타브로 시작하여 삽시간에 저음으로 내려갔다가 처 음 고음보다 약간 낮게 내며 끝을 바이브레이션 비슷한 뉘앙스로 마무리하는 게 분명코미디 같은데 국회 의사봉을 두들길 때 내는 소리처럼 상황을 터무니 없이 결정짓고마는 것이었다. 그는 빈 깡통을 받더니 내게 힐끗 미소짓더니 갑자기 빈 깡통을 냅다 멀리 내던졌다. 깡-깡-깡-끄르르르-- 시계를 보니 새벽 1시 반. 나는 이렇게 라이프찌히 도착 한 시간 반만에 이 도시의 하나가 되었던 것 이다. 도박장 내에는 마지막 열기가 뒤끓고 있었다. 이 곳은 영화 투캅스 일 편에서 보았던 것과 비슷한 도박장이었다. 다만 다른 점은 경마전자오락 등이있어서 흥미를 끌었다. 중앙에 2*2 미터제곱 크기를 차지하고 있어서 둘레에 경마꾼들이 보조의자에 앉아 한 번 할 때마다 2DM, 한꺼번에 둘 이 상 걸며 시합에 열중하고 있었다. 게임 시작 전 승률이 고시되면 1번부터 10번까지 골라 코인을 투입한 뒤 시작버튼을 누르면 말들이 다그닥 다그닥 소리를 내며 골인 지점까지 내달렸다. 처음에는 느릿하게 나가다 최종 지점 에서 질주하여 역전되기도 했다. 영락없는 경마였다. 은연중 경마 게임에 눈 길을 돌리는 내 심사를 아는지 한스는 교환대에 가서 코인을 바꾸라고 하였 다. 내가 10DM만 교환하니 적잖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내가 그리 좀스럽게 보였나? 그래도 할 수 없잖아? 2DM으로 라커비하고 나머지를 설사 잃는다 해도... 10DM 다 쓴다 해도 기껏 육천원? 비록 잠을 설치겠지만 하루 값지 게 보낸 액수 치곤 안심할 수 있는 액수잖아?' 그런데 그는 가지 않고 그대 로 서 있었다. 답답했다. '당신 일이 있잖아. 당신도 가서 자야지. 나야 이제 된 거 아냐. 역과도 가까우니 여기서 버티다 동트면 뜨면 되잖아.' 그에게 물었다. - 유 아 호우텔 맨? 홧쯔 더 잡? - NO PROBLEM -아 유 타이어드? - NO PROBLEM - 스피킹 잉글리쉬? 에고, 내가 말한 게 잘못이지. - NO PROBLEM 기대하지도 않았다. 그저 내가 판단한 것이 확실한 지 되짚어봤을 뿐 이었다. 그가 여기에 있든, 집으로 가든 그건 그의 판단 문제이지 내가 상관 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그가 아무리 갈 데 없는 외톨이 동양인을 도와준다 지만 밤늦게까지 내게 호의를 베푸는 까닭이 의아스러워 몇 번이고 물었던 질문을 마지막으로 물었으나 답변은 역시 한가지였다. 그가 무슨 직업이든 뭔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경마 전자 오락기 앞으로 갔다. 한스가 잔돈이 없는지 내게 동 전을 빌려 달라 하더니 높은 승률의 말에 걸고 시범을 보였다. 잃었다. 그는 씩 웃으며 나에게 권했다. 나는 아까 짧은 순간일망정 유심히 지켜봤었다. 낮 은 승률의 말이 훨씬 더 잘 달리는 듯 보였다. 그래서 2 : 1 확률 말을 걸었 는데 그 말이 승리한 것이다. 도박이란 아주 전문가이거나 아니면 초보만이 딴다고 하던가. 다시 2 : 1에 걸었다. 또 땄다. 다른 도박사들은 10 : 1이나 30 : 1에 거니 자꾸 잃었다. 그에비해 난 얼마나안전빵인가. 우리는 함께 기뻐하며 손뼉을 마주쳤다. 몇 번 이기자 욕심을 부려 세 곳에 동시에 걸었 다. 2 : 1에도 걸었지만 높은 승률에도 동시에 걸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잃 었다. 다시 본전이다. 한스가 다시 내게 코인을 달라 해서 주어서 다시 도전 했다. 이번에도 2 : 1로. 잃었다. 이제 6DM이 남았다. 그만해야겠다. 아직 날이 새려면 멀지 않았나. 한스는 한 번 더 달라했지만 내 단호한 모습에 더 이상 요구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른 이들이 하는 걸 구경하기로 했다. 이 사람 저 사람 기계 와 내기하는 걸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안쪽 깊숙한 곳에서 하이로 게임을 하던 이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호기심에 가보니 대머리가 벗겨진 나이든 독 일인과 베트남 난민으로 보이는 친구 둘이서 돈을 엄청나게 따고 있었다. 코인이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그러자 베트남인들이 그들 주위에 몰려들었 다. 대부분 비쩍 마른 체격에 허름한 옷차림, 불량스러운 옷차림이었다. 한 스가 그들에게 아는 척을 하며 나를 소개했지만 그들은 웃지도 않고 나를 위아래로 쳐다볼 뿐이었다. '한스가 호텔 일을 하면서 아는 사이인가 보군. 그들이라고다를 바가 없겠지. 그러나저러나 이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혹시 동양 마피아?' 내가 한스에게 귀엣말로 마피아? 마피아? 하니 예의 똑같은 말을 할뿐이었다. 눈치로 마피아는 아닌 듯 싶었다. 아무튼 코인이 넘쳐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될까. 줄잡아 오천개는 넘으니 10000DM? 육백만원? 최대 배팅을 계속 하는데 한 번 할 때마다 1000DM이 쏟아지니... '새벽 두 시가 되니 종업원이 시계를 가리키며 도박장 마감을 알렸다. '이런 밤새 하는 것이 아니로군. 그래서 한스가 가지않고 기다린 것이구나' 나는 새삼 한스의 배려에 고마울 수밖에 없었다. 내가 뚜렷한 이유없이 그 를 보고 웃으니 그도 알아듣는 듯이 호탕하게 웃었다. 내가 짐을 찾고 나니 대머리는 없고 친구들에 둘러싸여 의기양양한 지폐 뭉치를 받는 베트남인만 있었다. '호화 유람선 실자라인 카지노에서도 마감시간이 두 시였고, 두 시 가 가까이 오자 딜러가 손속을 늦추어 손님을 적당히 따게 하는 관용을 베 푸는데 혹 여기서도? 아무튼 그는 아마 오늘 어디 가서 크게 한 턱 내리라. 한스가 만일따라 가면 나도 따라 가야하나?' 그러나 베트남인들은 한스와 인사한 뒤 바삐 골목 속으로 사라졌다. 북유럽서부터 보아온 카지노 열풍. 아주머니들은 시장 바구니 들고 휴 지통보다 쉽게 찾을 수 있는 전자 카지노에 아낌없이 동전을 넣는 풍경을 보아온 나로서는 그다지 놀랄 일이 아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 회주의권 지역이었기에 그 자취를 혹시라도 맛보려 했던 기대가 있었던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본 건 형식적 평등이 가고 황금만능주의만이 남 아 있을 뿐인 사회였을 뿐이다. 비록짧은 시간이었지만 지금까지본 것만 으로 라이프찌히를 알 수있었다면 지나친 편견일까. 문득 역 앞에서 만난 회사원의 말이 떠올랐다. '라이프찌히는 죽어 있다고?' 을씨년스러웠다. 밤이 깊어갈수록 중부유럽의 바람은 4월인 데도 매서 워진다. '비록 춥지만 역에서 침낭 덮고 잠만 자지 않으면 되겠지. 이제 한 스와 헤어질 시간' 그에게 당케!하며 한두 단어정도 아는 독일어를 말하며 악수를 나눴다. 그런데 한스는 예의 'NO PROBLEM'이었다. 내 손을 잡더 니 역 앞에 서 있는 버스에 오르려하는 것이다. '그가 아무래도나를 좋게 본 모양이다. 아마 자기 집에 가서 자자는 이야기겠지. 그가 선량해 보이니 따라갈까. 이제껏 내게 너무나 잘 해 주었잖아? 아니야, 무턱대고 따라갈 순 없잖아. 아직 나는 그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는데 이러다 으슥한 데에 가서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그랬다면 기회는 얼 마든지 있었어. 그가 정말 교묘한 사기꾼이라면 내 허술한 틈을 놓칠 리가 없지. 아니야. 교묘한 사기꾼일수록 완벽한 기회를 노리겠지. 내가 경계가 느슨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프게 행동한 건 아니었거든. 그러니 그가 순수한 의도로 나를 이끌었다 해도 이런 의심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닌 만큼 여기서 헤어지는 것이 낫겠다. 아니야. 날씨도 춥고, 감기 걸리기 딱 좋을 듯해. 이러다 걸리기라도 하면 여행 일정이 다 망치게 되잖아. 더구 나 약간의 위험을 무릅써야 여행의 맛이 사는 게 아닐까. 이 기회에 독일 가정을 직접 본다는 게 어디야. 용기를 내라고.' 그러나 쉽게 결정할 수가 없었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나는 갑자기 그의 직업이 다시 궁금 해졌다. '그의 집에 가면 그가호텔 직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지 않을까.' 그 가 다시 내 손을 끌며 말끝을 묘하게 내며 간청하듯 말했다. - NO PROBLEM '에라, 모르겠다.' 이런 어려운 결정이 있을 때에 내가 견지하는 임의 규칙이 있었다. 신중한 의견과 덜 신중한 의견이 쉽게 결정되지 않고 맞부 닥칠 때 덜 신중한 쪽으로 방향을 선회하기.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한스는 밤거리를 지나는 모든 이들을 아는 모양이다. 운전사에게도 인사를 한다. 요 금을 내려 하니 만류한다. 24시간 내내규정대로 출발하는 모양이다.유럽 대부분의버스들은 다른 교통수단처럼 국영인 듯 했다. 복장이 통일되어 있 고, 노동자 냄새가 물씬 났다. 가만 보면 안정된 직장인 듯 싶었다. 문득 한 국 버스업계와 노동자를 떠올리고, 지난 파업사태시 한국노총 소속 버스 노 동자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회상하다 보니 버스는 떠난다. 버스에는 우리 외 에도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초췌한 얼굴의 아가씨, 심야인 데도 책을 읽는 초로 신사, 리시버를 끼고 음악을 듣는 이십대 초반 흑인, 그리고 우리들. 처음에 나는 길거리를 익히려 바깥 풍경을 유심히 보았다. 그러나 버스가 라이프찌히 외곽으로 나가고, 비슷한 건물들이 계속 되자 포기하고 말았다. 약 30분 조금 못 미쳤을까. 우리는 어느 거리에 내렸다. 우리는 곧바로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사는 곳은 흔히 영화에서 보았던 오랜 건물에 다세대가 사는 데 였다. 음침한 큰 현관을 지나 1층에 있었는데 집 내부는 다른 유럽 건물들 이 대개 그러하듯이 잘 정돈되어 있었다. 살림이 별로 없어서일까. 20평쯤 됨직한 집이었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와 좁지 않은 복도. 한스는 독신이 었다.독신이 살기에는 큰집이었다. 우리는 응접실 겸 방으로 들어갔다. 방 안에는 25인치 티브이와 긴 탁자와 침대 겸용 소파가 있었고 벽면에는 페르 시아 풍의 싸구려로 보이는 대형 양탄자 - 십년 전에 우리 집에 있었던 것 과 거의 흡사한 것 -가 걸려 있었다. 양탄자 밑의 장식대에는 오래된 듯이 보이는 사진 액자, 빈 꽃병 등 그리 낯설 지 않은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 다. 욕실 겸 화장실에 가보니 독일 기차처럼 변기 뚜껑이 없었다. 대충 씻고 나서 응접실로 돌아와 리모콘을 연신 돌리며 TV를 보는 그 옆에앉아 실자 라인에서 세일할 때산 적포도주를 기분 좋게 마셨다. 그는 전혀 피로하지 않은 듯 보였다. 이것저것 의사소통을 시도해 보니 그가 별다른 직업이 가 지지 않은 사람이란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같은 백수 (?)여서 인지 직장인답지 않은 섬세한 특징들이 포착되었다. 직장인이라면 친구와 함께 집에 올 지라도 내일 일을 대비해서 가령 이야기 중에 자기 직 업에 대한 소개를 꺼낸다든지, 물건을 보여준다든지 하는 행동을 하기 마 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추측일 수 있었다. 백수라면 심야에 도심 호텔 라 운지에서 나올 일이 없지 않은가. 깊은 생각하기에는 지나치게 깊은 밤이었 다. 심야라 혹시 야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하였으나 평범하기 짝이 없는 것 들이었다. 그러다 마이클 잭슨이 야한 여성차림으로 분장한 것으로 보이는 장면이 나오기에 나는 웃었다. "하하. 마이클 잭슨이 웃기네?" 한스도 웃었 다. 이제 자야할 시간. 그에게 잘 의사를 표시하자 그가 알았다는 듯이 일어 섰다. 나도 일어났다. 소파가 빡빡해서 둘이 함께 해야 했다. 그런데 대충 바르게 했음 데도 한스는 마치 측량 기사처럼 앉아서한쪽 눈을 감고 제대 로 수평이 되어있는지 확인하고 또 하는 것이었다.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데서 독일인의 정확성이 나오나? 한스가 안심한 듯한 표정으 로 일어서자 나는 잘 자라는 악수를 청했다. 그때 일이 터질 줄 누가 알았 으랴. 한스가 갑자기 바지를 쑥 벗는 것이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같이 자 자는 이야기인가. 다른 방도 있는데. 그를 따라오면서 내심 작정한 바가 있 다면 방이 하나라면 모르되 둘이라면 각자 방을 쓰자고 요구할 생각이었다. 나는 무엇보다 내 지갑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친구가호의적이고 믿을 만하다고 생각되지만 만에 하나 내일 일어났는데 지갑이 없어진다면 어쩔 것인가. 그러한 일이 있어서도 일어나서도 안 되기에 나는 한사코 거 절했다. 한스도 고집을 꺾으려 하지 않았다. 한스도 나를 의심해서 그럴까. 하긴 오늘 처음 만난 배낭족을 무작정 신뢰할 수는 없겠다. 겉으로는 거절 하면서 점차 마음이 약해지고 있었다. 한스가 더 강경하게 나온다면 어쩔 도리가 없다. 그의 집이고 게다가 난 그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추위에 몸을 떨어야 하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그가 갑자기 바지를 훌렁 벗었다. 처음에는 자기 의사표시를 강하게 하려는 것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의 눈이 차츰 게슴츠레 해지면서 내 손을 붙잡으며 'NO PROBLEM'하자 나는 순식간에 상황을 판단했다. 한스가 내 자지를 보다 들킨 뒤에 나온 웃음이 단순히 계면쩍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탐욕이 막 일기 시작할 때의 징그러운 웃음 그것이었다. 그가 지배인하고 이야기할 때 직원 같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그는 왜 심야에 호텔에서 나섰 던 것일까. 그의 직업은호텔에서 연락을 하면 가서 일을 치르는 게이 매춘 부였다. 도박장에서 만난 베트남 친구 엉덩이를 툭 치는 장면을 떠올렸다. 역 앞에서 친한 듯이 보이는 이를 만났을 때 한스가 보였던 행동을 기억해 냈다. 단지 남자친구에게 호의를 보내는 것치고는 은밀한 인사였던 것이다. 입을 내밀며 약간 흔들었었다. 아무리 심야일 지라도 버스 운전사가 뻔뻔스 레 돈을 내지 않고 타는 것을 보고만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어쩐지 버스 운 전사가 한스를 깔보는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었는데. 그때 나는 왜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넘긴 것일까. 승객들이 우리 둘을 번갈아 쳐다보았던 것까지 말이다. 내가 라이프찌히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동양 배낭족인 데 다가 동독 지역에서 암묵적으로 인종차별이 좀 있으리라는 예상 때문에 이 모든 걸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 않았는가. 그리고 한스가 친절하여 그의 행 동이 약간 별스러워도 오히려 한국인다운 개성이라 여겼었다. 끝으로 무엇 보다 밤늦은 시각 낯선 도시에 도착한 내 사정이 이 모든 걸 뒤덮었던 것 이다. - 아임 PROBLEM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그가 이해하든 안 하든 나는 계속 말했다. 약간 흥분해서 영어가 약간 섞인 한국말이 나왔다. 아무래도 좋았다. 어차피 알아 듣지 못하니 지금까지처럼 뜻만 전달되면 그만이었다. - 나는 동성애자를 이해한다. 대학때 나와 운동권 조직에서 만난 친구 도 요즘 한국에서 게이 운동가로 정력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가 자신이 게이임을 사실을 언론에 밝혔을 때 나는 놀라지 않았다. 있을 수 있는 일이 기에 받아들였다. 당신의 욕망도 이해한다. 심지어 나는 한국에서 있을때 동성애자를 다룬 단편도 쓴 일이있다.피상적으로 플라토닉적 동성애를 느 낀 적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본질적으로 동성애자가 아니다. 당신의 욕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미안하다. 그간 호의는 고맙다. 하 지만 나는 PROBLEM이다. 그러나 한스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머리를 쓰다듬었고 내 손을 놓치 지 않았다. 거기다 자신의 팬티를 까 보이며 뭐라 말하기까지 했다. 독일어 였지만 알아 들을 수 있었다. "내 엉덩이 무척 탐스럽지 않아?" 그의 목소 리는 점차 애절하게 바뀌고 있었다. 눈물 섞인 구애였다. 차라리 내가 동성 애자였다면 할정도였다.한번 사고칠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하였다. 그러나 도저히 되지 않았다.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는 언젠가 나의 취향을 매우 부 르죠아적이라 판단하고 내 취향을 전복시켜 나 자신을 혁명적 투사로 만들 기 위해 마광수 선생이 구속되었던 전해에 내 취향과 전혀 반대되는 여성과 연애를 시도한 바가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쓰라린 것이었다. 논리적이고 이 성적인 인간은 인간의 가장 바깥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부의 본능을 억제하고 이성적으로 풀어내려 한 것이 잘못이었다. 본능은 본능대로의 논 리가 있었고그건 이성의외부주입으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인류사 이래 로 거의 변함이 없다는 파충류와 말의 뇌가 문명사가 담겨 있는 대뇌피질과 소통이 잘 되기 위해서는 본능을 뜯어고치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본성과 합 일되는 방향으로 서서히 변화시켜 원시 뇌를 변화하는 희미한 연결끈 외에 는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만일 원시성을 제쳐놓고 의식만의 발전만을 취한다면 혁명이고 나발이고 핵전쟁 따위를 결과하는 비참한 파시즘이 인류 의 미래라고 확신하기까지 했다. PROBLEM은 본능이 아니라 본능의 발전 을 억압하고 강간하는 의식이었다. 제도와 관습이 좋은 방향으로 발전한다 면 언제인가 한스를 전면적으로 이해할 날이 올 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성애자로 길들여져 있는 사람이다. 내가 남성이기에 남성적 권리에 대해 논 리적 판단으로 바꿀 의지가 충분하지만 습관으로 길들어진 남성적 존재란 얼마나 깨기 힘든 장벽이란 말인가. 기껏 생색내기에 불과하지 않더냐. 우리 가 양성성을 인정하고 중성화된 사회로 나아갔을 때 남자다움, 여자다움이 다만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의 특징처럼 느껴질 때까지생색내기라도 조금 씩 확대해야 하지 않겠는가. 마찬가지로 지금은 어쩌면 여성보다 더 엄청난 사회 차별적 성차로 시달리겠지만 미래에는 아름다운 개성의 하나로 인정받 는 제 3의 성일 뿐인 게이도 마찬가지 사정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진지한 구애를 거절하는 나를 인정해 다오. 나는 획일적인 하나를 바라지 않는다.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싹튼 욕망을 설렁탕을 먹을까, 갈비탕을 먹을까 정 도로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용서해 다오. 동시에 당신과 조금 다르게 태어났을뿐이고 그보다 더강력한 교육체계로 달리 느껴온 나를 이해해 다 오. 당신이 여성이었다면 아마 지금 내 행동은 불합리할 것이 틀림없다. 당 신에게 호감을 느꼈으니까. 그럼에도 당신에 대한 나의 호감은 섹슈얼적인 것이 배경으로 깔렸다 해도 섹스로까지 갈 만큼 호감을 가진 건 아니라는 것이오. 부디 내 부족한 호감을 이해해주길 바라오. 그러나 그는 내 모습에 더욱 감동 받아서인지 이제는 칭얼거리는 말투 로 변해 있었다. 도저히 어찌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벗었던 양말을 다시 신 고, 풀었던 짐을정리했다. 그가 놀란 것은 당연했다. 한스는 벗었던 옷을 입고 다른 방에 가서 잔다는 제스처를 하였다. 어디선가 게이는 강간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믿고 싶었다. 그러나 들은 이야기일 뿐이었다. 서남 아시아 권에서는 양성애자들이 여행객을 대상으로 강간도 일삼는다는 이야기를 동시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여기는 서남 아시아가 아니다. 하지만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래도 믿어보려 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다른 방에 가서 잔다는 말을 하면서도 연신 내몸을 만지자 결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에게마지막으로 희미하게 웃으며 큰 목소리로 천천히 말하고 한스의 집을 나왔다. - 아/임/P/RO/B/LEM 한스가 따라나왔다. 아쉬운 듯 나를 쳐다보다가 비장한 내 모습을 깨 닫는 듯 할 수 없다는 표정을 떨구더니 어디론가 가버렸다. 나는 기억을 더 듬으며 중앙역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내게 PROBLEM이 있을 때마다 나 는 걸었다. 지금도 걷는다. 짐이 무거워 잠시 히치하이킹을 할까 했으나 신 호등은 잘 지키나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들에 더 이상 미련을 두지 않기로 했다.행인들이 무심히 나를 보더니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갈 길을 재촉했 다. 나는 왜 지금 걷고 있는가. 본성다운 행위를 하려 애쓰지만 꼭 한번씩 닥쳐서 아무 일도 하지 못하게 만드는, 해결이 아니라 또 하나의 물음만 가 중될 뿐인, 다 망각한다 할 지라도 똬리 틀고 잠재해 있을, 죽기 직전까지 고통스러움을 벗어나고자 하는 PROBLEM 때문이다. 뺨으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지만 나는 무방비 상태로 제멋대로 당장 코앞 에 닥친 PROBLEM을 해결하고자중앙역을 향하고 있을 뿐이었다. 무서운 독감에 걸린 라이프찌히, 그리고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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